2004. 6. 5(토)~6. 9 (수)PM7:30 총 5회공연/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작곡 자코모 푸치니 대본 루이자 일리카, 주세페 자코사 구성 전 3막 예술총감독 이승현 음악감독 최흥기, 이혜선 총괄감독 박재은 홍보.마케팅 (주)아이디컴 연출 장수동 지휘 자코모 로프리에노 오케스트라 (재)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합창 서울픽하모닉 오페라 합창단, 광명시립 소년 소녀 합창단 출연자/토스카 Sop. 캐슬린 맥 칼라, 바르바라 코스타, 이재은/ 카바라도시 Ten. 미구엘 산체스 모레노, 강무림. 김신영 / 스카르피아 Bar. 마우로 아우구스티니, 김동규, 노운병 / 안젤로티 Bass. 이형원, 신재훈/ 성당지기 Bar. 임승종, 장철유/경찰관 Ten. 박성준 장규정/ 헌병 허종훈 / 간수 최광호
주요 아리아
오묘한 조화(Recondita armonia)Ten.
가라, 토스카(Va Tosca)Bar.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Vissi d' arte, vissi d' amore)Sop.
별은 빛나건만 (E lucevan le stelle)Ten.
화가인 마리오 카바라도시는 탈옥한 정치범을 숨겨준 죄로 경찰청장인 스카르피아에게 체포된다. 스카르피아는 이것을 구실로 카바라도시의 애인 토스카를 자신의 집무실로 끌어들인다. 토스카는 옆방에서 고문을 당하는 카바라도시를 구하려고 호색한인 스카르피아의 요구에 응한다. 거짓으로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한 다음, 토스카와 카바라도시가 함께 국외로 도피하는 데 필요한 통행증에 서명한 스카르피아가 토스카를 범하려고 하자 토스카는 그를 칼로 찔러 죽인다. 한편 그녀는 스카르피아에게 카바라도시를 처형 할 때 실탄이 없는 총을 쏘라고 부탁하지만 처형이 실제로 집행되는 바람에 카바라도시는 죽고 만다. 이때 스카르피아의 시체를 발견한 병사들은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서 달려오자, 토스카는 성벽으로 올라가 몸을 던진다...
박진감 넘치는 팬터마임..
1894년 가을의 어느 날 오후,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의 고급 저택 응접실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거기에는 집 주인과 이탈리아의 저명한 오페라 작곡가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경험이 풍부한 대본 작가가 이 집 주인의 희곡을 각색하여 만든 오페라 대본의 낭독을 귀 기울려 듣고 있다.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은 감동한 나머지 대본 작가의 손에서 그 원고를 집어들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직접 대사를 낭독했다.
극작가는 <토스카La Tosca >의 작가인 빅토리앙 사르두<Victorien Sardou>였다.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를 주인공으로 한 이 희곡은 사르두가 그녀를 위해서 쓴 7편의 희곡 중 하나로서, 7년 전에 파리에서 초연된 이래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대본 작가인 루이자 일리카. 그는 자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의 대본을 쓴 사람 중 하나였고 이 대본은 사르두의 희곡을 토대로 한 오페라 <토스카>를 위해 준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본에 감격스러워한 작곡가는 푸치니였을까?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정답은 주세페 베르디이다. 그는 자신의 <오델로>의 파리 공연을 보기 위해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는데, 우연히 이 낭독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감명을 받은 베르디는 자신이 작곡하고 싶지만 81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만한 체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의 작곡가는 베르디보다 훨씬 젊고 원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다. 그는 34세의 나이에 이미 호평을 받은 오페라가 여러 편 있었고, 또한 줄리오 리코르디와 계약을 체결하여 <토스카>를 작곡하면 그 악보를 리코르디 출판사에서 출판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면 이 사람이 푸치니일까?
아니다. 이 남자는 알베르토 프란케티(Alberto Franchetti)였다. 사실은 푸치니도 한때<토스카>에 대해 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889년에 연극<토스카>의 무대를 본 그는 즉시 그의 전속 출판사인 리코르디 출판사에 편지를 썼다. 그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 수 있도록 사르두의 허락을 받아놓는 게 어떠냐고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푸치니는 프랑스어 대사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 했는데, 몸 동작만 보고도 감명을 받았으므로 더욱 흥미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푸치니의 열의는 식어 버렸고, 우선<마농 레스코>에 그 다음엔 <라 보엠>에 몰두하는 바람에 <토스카>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리코르디는 1893년에 프란케티와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런데 프란케티는 왜 <토스카>를 작곡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 작곡가인 푸치니의 찬성과 동의를 얻어, 역시 그의 친구이자 출판사 사장인 리코르디와 그의 친구이자 대본 작가인 일리카가 그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베르디가 그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고 또한 프란케티와 이미 체결된 상태라는 소식을 들은 푸치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권리를 손에 넣으려고 결심했다. 일리카와 리코르디도 기꺼이 푸치니를 도와주었다. 프란게티의 오페라 두 작품이 비록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마농 레스코>에 미치지 못했다. 리코르디와 일리카는 누구의 오페라가 청중들에게 호소력 있고 자신들에게 돈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머릿속에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운한 프란케티에게서 권리를 빼앗기 위해 그들이 꾸민 시나리오는 극작가라면 탐을 낼 만하다. 일리카와 리코르디는 프란게티와 만나서 능란한 솜씨로 그를 설득했다. 오랜 숙고 끝에 사르두의 희곡은 오페라용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르두의 희곡은 조잡하고 너무 비속해서 분명 관객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것이며, 또한 여주인공이 정조를 빼앗길 뻔한 장면은 파리에서는 몰라도 이탈리아의 대중에게는 너무 자극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토스카 자신이 스카르피아를 찔러 죽이면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연극의 시대적 배경이 현대의 청중들에게는 너무 생소해서 청중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일까 걱정된다고 그들은 설명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프란케티는 작곡의 권리와 의무를 서둘러 포기해버렸다.
다음 날 리코르디는 푸치니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 사실을 들은 프란게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지인에 의하면 그는 푸치니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희곡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볼 때,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푸치니 자신이 그 희곡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당연하다. 영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스코트는"베르나르가 손에 들어 죽어 가는 스카르피아를 굽어보는 장면은 현대의 비극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연극이 거의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동작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간파한 것은 푸치니만이 아니다. 이에 전면적으로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비평가는 "비틀어진 손, 흩어진 머리카락, 무릎으로 걸어가는 동작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까지" 이 작품을 "박진감 넘치는 팬터마임"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또 어떤 비평가는"베르나르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에 잡힐 듯 이해되고 따라서 관객들은 그녀의 몸 동작을 보고 다음의 대사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될 오페라로서 이 얼마나 이상적인 평가인가! 이 연극에 대한 푸치니의 감상은 초연을 보고"외국에 수출하기에 그지없이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한 어느 비평가의 감상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푸치니의 대본의 기초가 된 것은 일리카가 프란게티를 위해서 준비한 대본이었다. 일리카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작가인 주세페 자코사와 콤비를 이루고 있었다.<라 보엠>의 대본을 쓸 때 협력했던 두 사람이 이제 <토스카>를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나비부인>에서도 활약을 하게 된다. 대본을 만들고 상세한 줄거리를 생각해내는 것은 일리카의 역할이었고, 자코사는 그 대본을 운문으로 고쳐 서정성을 높였다. 대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자코사가 이 연극을 매우 싫어했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라 보엠>은 시정만 있고 줄거리는 없었는데 반대로 <토스카>는 줄거리뿐이고 시정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의견이 충돌할 경우에는 대개 푸치니의 판단에 따랐는데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었다.
푸치니가 <라 보엠>때문에 너무 바빴던 탓에 작곡은 1898년 1월까지 연기되었다.4월에는 이 오페라의 프랑스공연 때문에 작곡이 일시 중지되었는데 푸치니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사르두를 처음 방문했다.
푸치니의 말에 따르면 당시 70세가 넘는 사르두는 흥미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독백가였다고 한다. 중요한 용건은 제쳐 두고 잡다한 화제에 대해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회담이 성과로 여길 만한 것은 먼저 희곡의 수정에 대해 사르두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점, 두 번째로는 사르두가 요구한 5만 프랑이라는 터무니없는 선금에 대해 타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결국 사르두에게는 총수입의 15%라는 전대미문의 보수를 지불하기로 결정되었다.
다음 해 초 두 번째로 그를 방문했을 때 푸치니는 오페라의 결말을 바꾸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사르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푸치니는 리코르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그 여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사르두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유명한 티베르 강이 오페라의 무대인 산 안젤로 성과 산 피에트르 대성당 가운데로 흐르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 푸치니가 얼른 그 강은 실제로는 성의 반대편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자 고집 센 사르두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아! 그런 건 상관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대형 로마 지도를 가져오더니 지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 15분 동안이나 이야기했다.
푸치니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회의에 빠져 토스카가 지금까지 만든 자기 오페라의 여주인공 미미나 마농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라 묘사하기 어렵다고 호소하자, 사르두는 "사랑에 빠진 여인은 모두 똑같은 부류랍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 낸 여주인공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여자는 모두 똑같습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페라의 초연은 1900년 1월 14일 로마의 코스탄치 극장에서 열렸다. 폭탄을 던지겠다는 협박 때문에 긴장한 가운데 신경이 날카로워진 가수들은 객석의 소동을 보더니 그만 제1막 공연 도중에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늦게 들어온 관객들과 이미 자리를 잡은 오페라 애호가들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토스카>는 그전의 <라 보엠>이나 그 다음의 <나비부인>과는 달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 여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비평가들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대개 음악이 아니라 대본이었다. 로마의 어떤 유력지의 평론가는 푸치니가 "가장 비속하다고 비판받아 마땅한"사건을 오히려 품위 있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칭찬했다.
<토스카>에서 볼 수 있는 대사와 음악의 이분법적인 대립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비평가들은 변함없이 마음에 스며드는 듯한 음악의 서정성을 그들이 천박하다고 간주하는 소재로부터 분리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푸치니의 지지자인 리하르트 슈페히트도 <토스카>의 초연으로부터 32년이 지난 후에 쓴 푸치니에 관한 전기에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토스카>는 불쾌하고, 고문 장면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대중적인 인기는 높지만 나는 구제 불능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이 푸치니의 작품 가운데 "가장 영감이 충만한 음악"이며 이 음악으로 인해 자신은 더 이상 심미적인 성찰 따위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마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토스카>의 대본은 베르디가 일리카의 손에서 낚아채 자신이 직접 낭독할 만큼 그 안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그 덕분으로 푸치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본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일리카와 리코르디는 최고의 인재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 과감히 속임수까지 쓴 것이다. 경험 많고 노련한 극장 관계자로서 그들은 대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현대의 푸치니 전기 작가 모스코 카너는 이 이야기가 세대에 따라서 어떻게 변천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중세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 로마냐 주에서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민요의 형태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토스카>가 셰익스피어의 <눈에는 눈으로>나 19세기의 독일 작가 파울 하이제의 소설과도 유사점이 있다고 지적했고,<조콘다 La Gioconda>의 원작인 빅토르 위고의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했다.
<토스카>의 이야기는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따라서 사르두가 희곡을 발표하자마자 표절이라는 비난이 계속되었다. 알퐁스 도데는 극의 줄거리가 자신의 작품<성 오뱅>의 표절이라고 주장하며 사라 베르나르가 여기에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모리스 배리모어도 <토스카>가 지신의 희곡<나데자>를 표절했다는 이유로 한때 영어판의 공연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르두는 특유의 냉정함으로 그러한 비난을 모두 부정하면서 희곡은 16세기의 프랑스 종교 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참고로 했다고 주장했다.
사르두에 의하면, 어떤 카톨릭 성직자가 아름다운 프로테스탄트 여인이게 사형을 선고받은 남편을 구명해주는 대신에 하룻밤 동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남편은 교수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비평가들은 <토스카>의 이야기 줄거리에 대해 진부하다. 저속하다. 혐오스럽다 따위의 모욕적인 수식어들을 붙였다. 존 커넌도 1952년에 출판된 <드라마로서의 오페라>라는 책에서 <토스카>에 "선정적인 3류 드라마"라는 꼬리를 붙였다. 하지만 극장을 잘 알고 있는 푸치니나 리코르디 그리고 일리카는 학자들의 이해 밖에 있는, 혹은 그 그림자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가치를 찾아냈다. 어니스트 뉴먼의 말을 빌리면, 푸치니의 비평가들도 극장에 관해서 라면 푸치니가 모르는 것은 알아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정하고 있다.
따라서 프란케티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이 품의 없는 이야기 속에서 푸치니나 일리카 그리고 리코르디가 발견한 것을 발견하지 못 한 것을 뿐이다. 만일 발견했다면 그렇게 쉽게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첫댓글이글을 어디에서 퍼 왔는지 원전을 밝혀야 합니다. 혹 어느 공연단체의 글과 다른 글을 합친 것이라면 모두 밝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글인지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글을 여기에 올린 이유는 무엇인지요? 함께 보자는 것인지...아니면 그저 자신의 공부하는 바를 알리는것인지요? 출처를 수정 바랍니다.
첫댓글 이글을 어디에서 퍼 왔는지 원전을 밝혀야 합니다. 혹 어느 공연단체의 글과 다른 글을 합친 것이라면 모두 밝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글인지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글을 여기에 올린 이유는 무엇인지요? 함께 보자는 것인지...아니면 그저 자신의 공부하는 바를 알리는것인지요? 출처를 수정 바랍니다.
출처는 무대뒤의 오페라라는 책이며 이번주에 공연을 볼 것 같아 참고사항으로 올려봅니다.
오페라 투어 또 가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