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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은 궁전인 니죠성을 구경하고 니시키 시장을 찾아 점심을!
2024년 9월 19일 긴카쿠지 (銀閣寺 은각사) 를 보고는 철학의 길 哲學の道 을 걸은후 아라시야마를
구경한 후에, 킨카쿠지(금각사) 를 거쳐 도시샤 대학교를 찾아 윤동주 시비 와 정지용 시비를
보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고조거리의 호텔을 나와 교토 시내 중서부에 자리한 니조성을 찾아갑니다.
해자에 높은 성벽을 두른 니조성의 위용이 대단하니 정문은 오른쪽으로 걸어 구부러져서 조금 더 걸어
니조성 동문에 도착하는데, 입장료가 2가지가 있으니 700엔 짜리는 정원 만 보는 것이고 궁전 까지
보자면 1,300엔 짜리를 끊어야 하는데 벚꽃철에 처음 왔을때는 싼표를 끊었다가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성문을 들어서니 2차 해자 가 보이는데 니조성 (二条城 이조성) 은 동서 480미터 남북 360미터로 성벽
밖으로는 폭 13미터, 깊이 17미터인 사각형 해자 를 두르고 있으며 성 안에도 2차 해자가 있는데....
성 안에 해자 앞에는 음성지원 안내판 이 있으니 일본어, 영어, 중국어,한국어 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토는 특히나 서양인 관광객 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여기 니조성 이 특히 그러하니 서양인들은
이런 곳에서 "동양의 일본 문화" 를 접하는 것 같은데, 왼쪽에는 한국어를 비롯해 여러나라
언어로 된 팜플릿 에다가...... 또 한국어 를 포함 각국 언어로 된 리시버를 5백엔에 빌려 줍니다.
니노마루 입구에 대문이 있는데 지붕의 재질이 특이하게도 신사에서 처럼 히노키피즙 나무
껍질 로 만들어져 단아하게 축조되어 있으며...... 입구에 있는 지붕의 처마는 검은
옻칠 을 한 바탕에다가 화려한 금박 으로 장식을 하였으니 서양인들은 연방 감탄사 를 냅니다.
저만치 금박 을 입힌데다가 세세한 조각 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정문이 보이니 많은 관광객
들이 사진 찍느라 바쁜 모습을 보는데..... 처마 가운데에는 여러 종류의 새 모양을
조각한 현판 이 걸려있으니 한눈에 보이도 매우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덴노(천황) 가 머무르던 교토 고쇼 (京都御所 경도어소) 를 보호하고
또 자신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머무를 ‘쇼군 將軍’ 의 거소 로 사용하기 위해 1601년
에 건축을 지시하여 착공 2년 후에는 니노마루 (二之丸) 부분이 먼저 완공 되었다고 합니다.
성의 건축비용은 서부 도자마 다이묘 에게서 뜯어냈으며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왕(천황) 으로부터
정이 대장군 으로 임명받고 취임 축하연 을 벌였다는데, 손자 이에미쓰 가 혼마루(本丸) 와 천수각 등을
지었으며 니노마루 어전 (二之丸 御展) 은 독립된 전각이 아니라.... 6동의 기와집이 이어진 것 이라고 합니다.
“쇼군(將軍 장군)” 에게 접근하자면 수없이 많은 미닫이 문을 통과 해야 하는데, 야밤의 침입자를 경계하여
마루가 밟으면 소리가 나도록 마루 밑에 특수 장치를 하여 놓았다는 설도 있으며.... 전체 조례 를
하기 위해서는 점점 높아지는 서너개의 미닫이 문을 열고 품계에 따라 무릎을 꿇고 도열 했으리라 봅니다.
“쇼군(將軍 장군)” 이라는 말의 정식 이름은 정이대장군 (征夷大將軍) 인데, 이름의 유래를 살펴
보자면..... 안영우씨는 조선일보 ‘숨어있는 세계사’ 칼럼에 ’소수민족 아이누와 쿠릴열도’
라는 표제로 “러․일 서로 자기 땅이라는 쿠릴열도, 원주민은 아이누족” 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일본은 쿠릴 열도 일부가 자국 영토 라며 돌려달라고 러시아를 설득하고 있는데 러시아가 땅을 내놓긴
커녕 쿠릴열도에 레이더 기지 를 세웠으니 크게 반발 했는데..... 사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일본도 러시아도 아닌 '아이누' 라는 소수민족인데...... '아이누' 는 아이누어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누족 은 러시아 사할린, 홋카이도, 쿠릴열도 에서 살면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 를 만들었으니 이들에겐
"태양의 아들(일본인) 이 오기 10만년 전 부터 우리가 이곳에 살았다" 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는데, 물론
10만년은 '전설' 이고, 고고학계에서는 아이누족이 1만년전 시베리아 에서 건너온게 아닐까 짐작한답니다.
“아이누족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생활 을 했으니.... 일본 혼슈의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캄차카반도 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은
외모가 백인 처럼 눈·코·입 윤곽이 뚜렷하고, 동남아 사람들 처럼 피부색이 어두운 편입니다.
아이누족 남자들은 턱수염을 길게 기르는 전통이 있는지라 일본인은 과거에 그런 아이누족을 '에미시(毛人)'
라고 낮춰 불렀는데, 일본인에 비해 몸에 털이 많은 아이누족 특징을 얕잡아보는 말로 일본 '쇼군(將軍)' 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이니 아이누 같은 '오랑캐' 를 정복 하는게 쇼군의 주요 임무였기 때문이라!
일본 역대 쇼군들은 수백년간에 걸쳐 차근차근 북쪽으로 세력을 넓혔으니 일본 혼슈동북부 를 공격해 15세기
에 이르면 아이누족(에미시) 을 본토에서 몰아냈고 19세기에는 바다 건너 홋카이도(북해도) 까지 모두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 아래 들어왔으니 더 달아날 곳이 없어진 아이누족도 자연히 '일본인' 으로 동화 됩니다.
문제는 아이누족이 용모도 언어도 다른 '이민족' 이었으니 메이지유신후 일본은 '일본인은 단일민족' 이라고
강조했는데.... 아이누족은 그런 주장이 빛바래게 하는 존재라, 1899년 아이누 민족의 고유 풍습을 금지
하고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 했으며 전통적인 수렵 생활을 금지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압박 합니다.
쿠릴 열도는 크고 작은 섬 56개 가 늘어선 열도이니.... 최북단 아틀라소프섬 (아라이도·阿頼度島) 은 러시아
캄차카반도, 쿠나시르섬(구나시리·国後島) 은 일본 홋카이도 코앞에 있는데, 19세기 들어 두 나라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며 충돌이 시작됐으니 남진하는 러시아와 북진하는 일본이 쿠릴열도 에서 맞닥뜨립니다.
두 나라는 1855년 쿠릴열도에서 가장 큰 섬 이투루프섬(에토로후) 을 기준으로 섬 남쪽은 일본 땅, 북쪽은
러시아 땅 으로 삼기로 했으며 쿠릴열도 옆에 있는 사할린은 양 국민의 공동 거주지 가 됐는데,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은 뒤, 쿠릴열도는 물론 쿠릴열도 옆에 있는 사할린섬 전체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쇼군(정이대장군) 이 아이누를 토벌한건 후대의 일 이고... 규슈에 거주한 원주민을 조몬인 이라
하는데, BC 3세기 부터 한반도 에서 철기 문화에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건너와서 규슈에 수십개
부족국가를 세우니 야요이인 으로, AD 4세기에 말을 탄 김해가야인 이 건너와 왜인 국가를 통합합니다.
고 최인호씨는 이 인물이 김해 대성동 13호분 주인으로 스진(숭신) 왕 이라는데, 391년 왜병을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와 동족인 김해가야와 연합해 신라 를 공격해 서라벌 함락직전인 400년에 고구려 5만
대군이 남하해 종발성이 함락되자..... 일본으로 후퇴해 새 왕조 야마토(大和) 를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1611년 일왕 양위식 행사로 교토로 상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에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리
를 불러 여기 니조성에서 만났는데..... 교토 백성들이 열렬히 환영 했고, 22살의 히데요리를 보고는
이대로 두면 훗날 도쿠가와 쇼군가가 위험해 지겠다는 위기의식에 토요토미가 멸족 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1615년에 토요토미 가문 말살을 위해 펼쳐진 오사카 전투에서는, 니조성에 불을 지르고 그 틈을 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암살 하려는 음모가 발각됐으니 음모를 꾸민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이 되어있던 후루타 오리베의 가신 이라...... 이 책임으로 후루타 오리베는 할복을 명받아 자결합니다.
니조성 은 1634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까지 쇼군 즉위 의식 이 치러졌으나 이후 19세기
말 까지 쇼군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는데.... 200년 후에 쇼군 이에모치 는 상경해 일왕(천황)
에게 양이를 약속 했지만, 3년 후인 1866년 조슈번 정벌전쟁 도중에 쇼군 이에모치가 급서합니다.
15대이자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 니조성에서 쇼군 자리를 계승 했으나, 도쿠가와 막부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 요시노부는 니노마루 (二之丸 御展) 오오히로마(大広, 거실) 에서 40여명의 중신들을
모아놓고 일본 통치권을 일왕(천황) 에게 반환 한다고 선언하는데 1867년 사건을 "대정봉환" 이라고 합니다.
니조성은 3~4월에는 야간 조명을 밝히는 라이트업 행사 가 있고 9~11월에는 니조성 축제 가 열립니다.
니노마루 궁전 (二之丸 御展) 은 쇼인즈쿠리 양식 의 대표적인 건물로 국보 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섯동 건물이 복도를 통해 이어지고 33개 방에 화려한 벽화가 용도에 맞는 그림 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삐걱거리는 소리 가 나는데 쇼군의 암살이나 외부자의 침입을 막기 위한
덫 이라는 낭설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며 이 특유의 소리가 마치 휘파람새 소리 와
비슷해서 우구이수바리 (鴬張りの廊下 꾀꼬리 소리의 복도)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복도 밑 공간에는 못 같은 구조물 이 설치되어 있는데 복도를 밟으면 압력에 의해 나무 복도와
함께 빈 공간에 고정된 못들이 움직이면서 소리 를 내는 것이라고 하며 빛을 막기 위해
궁전 내에서는 촬영이 금지 되어 있는게 아쉬운데...... 옛날 벚꽃철 에 왔을때를 회상해 봅니다!
벚꽃철에 왔을 때 정원은 사슴 이 뛰놀것 같이 넓었으니.... 왕은철씨는 동아일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란 칼럼에 “나무꾼과 사슴은 문화다” 글을 올렸는데, "동화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만
담을 것 같지만 교묘하게 폭력을 숨겨놓기도 한다. ‘나무꾼과 선녀’ 같은 한국 전래 동화도 그렇다. "
"가난한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나무 더미 뒤에 숨겨줘 목숨을 구해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슴은 나무꾼의 소원 을 들어준다. 나무꾼은 사슴의 말에 따라 '선녀의 날개 옷을 감추고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든 나무꾼의 입장에서 보면 소원을 성취하는 행복한 이야기 이다."
그러나 반대편 에서 생각하자면...... "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결혼해야 하는 선녀의 입장
에서 보면 '폭력의 이야기' 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선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억압 하기 때문 이다."
"나무꾼과 선녀라는 제목도 그렇고 나무꾼을 중심으로 모든게 합리화 된다. 그렇다면 제목을
‘선녀와 나무꾼’ 으로 바꾸면 어떨까. 선녀가 이야기의 주체로 되면서,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엿보고 날개옷을 훔치고 속임수로 결혼 하는 사냥꾼의 행동은 관ㅇ증이요 폭력 이 된다"
"선녀를 붙잡을 비밀을 알려주는 사슴도 그 폭력에 동조 한다. 아니, 사슴은 단순한 동조자라기 보다
폭력을 처방하고 부추기는 주체 이거나 적어도 가부장 문화의 대리인 이다. 20종 나무꾼과 선녀,
선녀와 나무꾼을 비교해 보면 제목만 앞뒤로 바꾸고 내용을 그대로 두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구호는 구호일 따름이다. 진짜 변화 는 나무꾼과 선녀, 선녀와 나무꾼이 기반
으로 하는 문화가 거북이 걸음일 망정 조금씩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라야 가능하다. 문화 속의 폭력을 응시 하고 사유 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니 혼마루 천수각터 로 경치가 좋은데 혼마루를 둘러싼 해자 너머 안습 이라고
불리는 건물은 황실 별장인 가쓰라리큐 (桂離宮) 일부를 이용해 지은 것이라고 하며 세이류엔 이라
불리는 정원 은 1965년에 정원석 과 다실 등으로 조성한 곳으로 벚꽃이 피면 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니조성 (二条城) 을 지은 이 자리는, 원래는 니조신고쇼
(二条新御所 니조신어소) 였다는데..... 그럼 혼노지의 변 때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가 모반한 아케치 미쓰히데군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 패해 자결한 그곳 입니다.
빗츄(오카야마현) 다카마쓰성의 모리군을 공격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 를 지원하기 위해 1만 3천을 이끌고
단바를 떠나 서쪽으로 향하던 아케치 미쓰히데 는, 1582년 6월 21일 여기 니조성의 남쪽 근거리에
위치한 혼노지(本能寺) 에 이르러.... "적은 혼노지에 있다! (敵は 本能寺に あり!)" 라고 외치며 난입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는 한때 총애했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가 즐겨
부르던... “인생 오십년 하천(下天) 의 하루에 비교하면 일장춘몽, 덧없는 꿈 과 같구나.”
라는 아쓰모리 처럼 스러집니다! 人間五十年 下天の中を くらぶれば 夢幻のごと くなり
인근 묘가쿠지(妙覚寺) 에 있던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 는 혼노지 (本能寺) 에 변이 발생하여
노부나가의 할복 소식이 전해지자.... 아케치군에 대적하기 위해 방비가 허술한 묘가쿠지를
벗어나서 사네히토친왕 (誠仁親王) 이 자택으로 사용하던 니죠신고쇼 (二条新御所) 로 옮깁니다.
오다 노부타다 는 바로 이곳 니죠신고쇼 (二条新御所) 에서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이세 사다오키 (伊勢貞孝) 가 이끄는 아케치 대군의 공격에 맞서 선전 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 했으며 노부타다 자신도 자결 합니다.
에도막부(江戸幕府) 의 성립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영지 를 도카이지방 (東海地方) 에서 변두리인
간토(関東) 로 옮기도록 명했는데.... 만약에 혼노지의 변이 없었다면 오다 부자가 일본을 통일해
다스렸을 것이니 현재 일본의 중심은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 일 것이며, 임진왜란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후계자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타카 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와 대립해 싸우다가
죽으면서 절명시 를 남겼습니다! 옛 부터 주인을 치는 자의 노마(野間) 라면은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 (昔より 主を討つ身の 野間なれば 報いを待てや 羽柴筑前
아케치 미쓰히데 는 셋째 딸 다마코(玉子, 가리샤) 와 가신 다카야마 우콘등 그리스도 교도 가 많으니
죽으며 절명시를 남겼는데.... 순역에 두 문은 없고 큰 길은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도다. 오십
오년간의 내 꿈이여, 깨고 나니 원래로 돌아가누나. (順逆無二門 大道徹心源 五十五年夢 覚来帰一元)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조선과 평화 를 유지하고자 희망했으니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들을 일부 돌려 보내자 조선도 통신사를 파견해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부산에 왜관 을 설치해
무역하니 김동철 교수는 “500년 이어진 부산 속 ‘이방인 특구’․․․ 동아시아 물류 허브였다” 라는 글을 썼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일본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조선에 왜관 설치를 요청해
1601년 영도섬에 절영도 왜관 이 설치되고 1607년 육지인 동구청 일대에 두모포 왜관 이 설치된후
1678년에 왜관이 초량 으로 옮겨지니... 동구청 부근은 지금도“고관” 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산 왜관 역사 는 훨씬 오래됐으니 조선 태종 1407년 부산시 자성대 에 왜관이 최초로 설치되니
부산포 왜관인데, 제포(웅천현 진해) 와 부산포(동래현) 가 개항 되고 1423년 염포(울산)
가 개항되면서, 삼포 개항 으로 부산에는 1407년 부터 1876년 까지 470년간 왜관 이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제포(진해) 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1544년 사량진왜변 으로 두곳은 폐쇄
되고 부산포 1곳만 열린 가운데 1592년 임진왜란 침략을 당하는데, 부산포 왜관이 있는
동래현은 종5품 현령 이 임명되다가 일본 사신 이 들어오므로 종3품 동래 부사 가 파견 됩니다!"
니조성 궁전과 정원에 천수대 까지 구경하면서 옛날 니조성 자리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사건 들을 회상
하고 일어나 니조성 을 나와 렌터카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지하철 시조역 근처 니시키 시장 에
도착하는데.... 한큐전철 가라스마역과 가와라마치역 중간에 재래시장 인지라 울 마눌은 신이 났습니다.
또 기온 에서 강을 건너면 가까운 니시키 시장 (錦市場) 은 도쿄로 치면 쓰키지 시장, 오사카로 치면 구로몬
시장 과 유사하니..... 시장을 구경한후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서 7명 대가족이 테이블 2개를 차지하고는
우동과 소바에 불고기 정식 등을 시켜서 잘 먹는데 시장은 비싸지만 식당은 착한 가격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 부터 일본 수도 로 천년 세월이 흘러 메이지유신후 도쿄로 옮겨갔지만 '서쪽의 수도
(사이쿄, 西京)' 로 칭해졌고, 다이쇼와 쇼와 덴노의 즉위식 이 거행되는등 정통성 있는 고도로 역할을
인정받았으며 또 교토대학 을 비롯한 유수의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서는 '학문의 메카' 로 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