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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 이상이라면 가수 정재은을 희미하게라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발표한 ‘항구’라는 그의 데뷔곡도 낯설지만은 않을 테고,
좀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1978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았던
여중생 정재은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1971년 ‘이미자의 딸’이라는 서글픈 닉네임을달고
지방의 낮은 무대에서 ‘동백아가씨’를 부르던
일곱 살 소녀가 생각나지
않는가?그러고 보니, 극장 안 여기저기서 “어쩜 그렇게
제 엄마 목소리와 똑같으냐?”며 감탄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흔두 살이 되도록 친엄마를 단 세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는
정재은의 고백을 듣고 이미자의 매정함에 혀를 내두를지 모르지만,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면서 결국종갓집의 맏며느리로 살아 가야 했던
답답한 여인네의 아픔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실 첫 번째 이혼을 했던 스물여섯 살 이미자는,
인기 가수라는 점만 제한다면, 어머니 없이 자라서 아무것도 모르던
스무 살에 결혼한 외로운 성장사를 가지고 있다.
임신 9개월의 몸으로 복사열이 집중되는 녹음실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하루 종일 ‘동백아가씨’를 녹음해야 했을 만큼
그녀는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전쟁 직후보다는 나아졌지만,
이미자가 친딸 정재은을 놓고 집을 나왔던 1966년은 이래저래
모두에게 척박한 시절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였고, 누가 이야기 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부모님이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기억이 있다면, 이미자라는 인기 가수가 나의 엄마라는 사실 정도였어요.”
가련하게도 정재은이 어머니와 함께 산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 2년뿐이었던 셈이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번
그 누구에게도 ‘어머니’라 불러보지 못했다.
그녀의 슬픈 성장기는 이때부터 예견돼 있었다.
이미자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정진흡 씨는 그 당시 극장 무대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다. 1959년 ‘열아홉 순정’이란 노래로 데뷔한
이미자가 큰 주목을 끈 건 사실이지만,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그 시절 연예생활이 녹록할 리 없었다.
그때 이미자 곁에 있었던 게 그였다. 두 사람은 연애 1년 만인
1960년 결혼했고, ‘동백아가씨’를 발표한 1964년에 정재은을 낳았다.
“(정)재은이의 아빠는 참 선량한 사람이었어요.
왜 누구의 부탁도 거절 못하는 성격 있잖아요.
그게 밖에서는 더없이 좋은 성격인데, 부부 사이에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들이 살던 집안에서 어떤 사건이 생겼고, 두 사람이 크게 싸웠어요.
그러고 나서 헤어졌죠. 이미자 씨가 재은이를 집에 놓고 나온 것은
그 싸움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몇 달 전 만났던 한 원로 음악인의 회고다.
그 싸움이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그 시절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그 싸움이 이미자가 딸과도
인연을 끊을 만큼 컸다는 이야기만 두루뭉술하게 전해줄 뿐이다.
아빠는 3류 악극단장으로, 엄마는 최고의 가수로
누구의 잘못 때문에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딸 정재은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깨닫기 전에
연주자로 유랑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거친 팔에 이끌려
전국 이곳저곳을 헤매야 했으니까. 혹시 부친이 경제적으로 풍족했다면
상처를 씻어줄 만한 게 없지 않았겠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가요계를 호령하던 이미자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정진흡의 희비는
이혼과 동시에 극명하게 갈렸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헤어진 시기가
MBC에서 ‘가요대상’이란 걸 시작하면서 가수들이 전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할 때였다. 게릴라식으로 극장무대를 호령하던 가수들이
전국구 스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고,
이미자가 국내 가요 사상 처음으로 1백만 장 판매고를 올린
‘동백아가씨’에 이어 ‘아씨’와 ‘여자의 일생’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최고 가수 자리에 오른 것도 이때였다.
반면에 정진흡 씨는 계속 하향곡선을 그렸다.
유명 가수와 이혼 후 연주자였던 그의 입지는 더욱 좁혀졌다.
연예계에서 연주자였던 그의 일자리가 좁아진 현실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 부분이 있다.
이미자라는 흥행카드를 잃어버린 그는 지방 무대를 전전해야 하는
3류 악단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무대에 올랐다”는 정재은의 고백이 그렇게 선명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마이크가 높아서 긴 한복으로 까치발을 가린 채 동백아가씨를 불러야 했던
그 시절의 아픔을 정재은이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지방 공연을 가면 동료들과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잘 때가 많았어요.
그마저도 없는 날엔 여인숙 주인에게 ‘내가 이미자 딸인데,
하루 신세 좀 지게 해주세요’라고 잠동냥까지 했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 이름을 팔아야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도, 헤어진 아내와 어머니의 이름을 팔아야 하는
남편과 딸의 마음에 금이 가는 게 훨씬 큰 상처였다.
하춘화와 혜은이의 후속주자로 ‘베이비 쇼’의 스타가 되고,
‘천재소녀’란 소리까지 들었지만,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척박한 생활을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이미자의 아버지 이점성 씨)가
정재은을 납치 비슷하게 빼내서 어머니에게 데려간 일도 있었다.
그때가 정재은이 일곱 살 때 일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집을 나간 엄마를 처음 봤던 날이니까요.
엄마는 넓은 침대가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어요.
나에게 조용히 물으셨어요. ‘나랑 같이 살래?’라고.
그때 내가 했던 대답도 생각납니다.
엄마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없어도 되지만,
아빠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엄마는 나를 이틀 더 데리고 있다가 돌려보냈어요.”
이때라면, 이미자가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 김창수 전 KBS PD와
두 번째 결혼을 하기 1년 전 시점이다.
이때 정재은이 어머니 이미자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동상을 받고, 1981년 ‘항구’란 노래로 KBS 가요대상 신인상을 받았을 때는
그나마 정재은과 아버지 정진흡 씨에겐 가장 무난했던 시간들이었다.
적어도 경제적인 부분만큼은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한데, 생전 돈 관리를 해보지 못했던 탓에 큰돈이 들어와도
손에 오래 있질 못했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고생시키는 사람이에요.
거절을 못하는 성격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하고 늘 빚이 생기는 거죠.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계속 내가 번 돈으로 살았어요.
돈이 많았던 적도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계속 그랬어요.”
그러다 1986년엔 정말 경제적으로 큰 위기에 빠졌다.
아버지 정진흡 씨가 큰 빚을 지고 일본으로 도피했고,
모든 채무는 모두 정재은에게 돌아온 것이다.
거처마저 빼앗긴 정재은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삶의 모든 기대를 포기하듯 사귀던 남자와 즉흥적으로
결혼식을 올린 게 바로 그때였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아버지의 삶에 반항하느라 그냥 결혼했어요.
나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살 거라고.
결혼할 때 남편에게 다 말했어요. 나는 빚밖에 없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결혼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그 남자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고, 너무 미안합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난생처음으로 간절하게 어머니 생각이 났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곧바로 펜을 들어 밤새 장문의 편지를 써서
어머니에게 보냈다. 이목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전남편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걸 몰랐던 바는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 때도,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근데 결혼식은 다르더라고요.
엄마가 그냥 그리운 거예요. 결혼식이란 게 그렇더라고요.”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정재은에게 결혼은 현실도피의 한 수단이었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은 못되었던 게 근본적인 이유였다.
결혼생활은 채 6개월을 채우지 못했고,
1987년 초 정재은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희한하게도 일곱 살 이후 15년 만에 어머니를 만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87년 여름,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공항에서 우연히 엄마를 만났어요. 내 이혼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잘 살지 그랬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주위 이목 때문인지 당신이 걷던 방향으로 사라지셨습니다.
비행기 타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더니 내릴 때까지 울었어요.”
알 수 없는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던 것은
본인도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나서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정말 그전까지만 해도, 본인의 표현대로
“날 버리고 간 엄마, 나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어머니가 같은 여자로 오버랩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 후에 스포츠센터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인사도 받지 않는 어머니의 싸늘한 반응에 큰 상처만 받고 말았다.
공항에서 받았던 어머니의 따뜻한 한마디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지금까지 정재은은 생모를 딱 세 번 만났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처럼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1998년 정재은이 일본행을 결심한 데에는
이때 받았던 상처가 크게 작용했으니까.
평생을 두고 단 세 번 만난 생모, 이미자
1999년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가수 김연자의 도움으로
일본 가요계에 데뷔한 정재은은 그해 ‘황혼의 도쿄’란 곡으로
성인가요 부분 신인상을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그야말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허스키한 음색에다 시원시원한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 정재은은 너무나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일본 성인가요(한국으로 치면 김종환이나
박강성 같은 가수들의 노래)계에서 아주 특별한 가수로 대접받고 있다.
실제로 그가 발표하는 싱글들은 매번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고,
전 일본을 대상으로 한 순회공연 때면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채 못다 이룬 대형 가수의 꿈을 일본에서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별로 특색 없는 목소리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목소리라는 평가를
많이 듣습니다. 정직하고 힘있는 목소리라고.
그래서인지 여성 팬들이 많아요. 기분이 좋죠.”
지금이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현재 위치에 오르기까지 일본에서 겪었던 고생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다. 일본어를 배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스케줄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사람 좋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어려서부터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러서 성격이 물러진 탓인지, 아무리 힘들어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러다 2년 전엔 큰병을 얻고 말았다.
“생리통이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픈 거예요.
진통제 두 알이면 되던 게 열여덟 알로 늘어났죠.
나중에는 생리를 아예 멈추게 하는 주사를 맞았는데,
그게 화근이었어요. 호르몬 주사였는데,
목소리가 아예 남성처럼 변해 가는 거예요.
평생을 노래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데,
내게 제일 소중한 것은 노래인데, 이것은 아닌 거예요.”
결국 자궁을 모두 들어내는 적출수술을 받고 나서야
지독한 생리통은 사라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노래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며 감행한 수술이었지만,
실제로 자궁이 없어지자 그 박탈감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특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이 어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자신의 처지와 겹쳐져 연상 될 때는 칼처럼 날카로운 것이 폐부를 찌른다.
꼭,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모두 막혀버린 터널에 혼자 놓인 것 같다.
어머니를 그리워한 세월만큼, 어머니라 부를 자식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죽는 것, 아니면 부와 명예,
이런 것은 나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무슨 버릇처럼,
이유도 알지 못하고 35년이나 노래를 불렀던 게
이제는 충분한 이유로 다가옵니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난 5월 1일 한국에 왔다. 정확하게 7년 만이다.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후광이 어깨를 든든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재은은 한국에서, 일본에서 이룩한 성공 스토리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지난했던 과거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재은 내가 검증받은 게 없으니까. 처음에는 딱 한 곡 계약했다.
근데 그게 잘 됐고, 지금까지 오게 됐다. 그 노래로 1999년 신인상을 탔다.
그 이듬해엔 큰 상을 세 개나 받았다.
그리고 3년 연속 ‘시청자상’을 수상했는데,
이건 방송국에서 임의로 주는 게 아니라 시청자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것으로 일본에서도 제일 큰 상으로 인정받는 상이다.
세 번이나 만났는데, 왜 ‘어머니’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나?
정재은 정말, 어머니란 말 안 나오더라.
그것도 해본 사람이 하는 소린가 보다. 나에겐 제일 힘든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선 어머니의 그늘 때문에
성공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정재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래를 불러도
한국에선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보고 ‘이미자의 딸’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어머니를 모르니까.
일본은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외모나 풍기는 이미지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정재은 인정한다. 무엇보다도 음색이 비슷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어린 시절에는 볼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나중에 커서 어머니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나와 너무 많이 닮아 있어서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Sa Vie 어머니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가?
정재은 거의 없다.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방송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가 왜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정재은 당신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까,
내가 같은 연예계 생활을 하다 보니까 연락하는 게 더 힘들지 않았을까.
만일 내가 가수가 아니었다면, 서로 연락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근황도 궁금하다.
정재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줄곧 아버지는 일본에서 살고 계신다.
재혼하셔서 딸만 둘 낳았다. 지금까지 오르간 주자로 활동 중이다.
이미자 씨가 매정하게 당신을 외면한다는 소문이 많다.
정재은 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다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마와 내가 원수지간인 줄 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만나지 못했을 뿐이고,
나 때문에 어머니가 상처를 받아선 안 된다.
엄마도 평탄했던 인생은 아니다. 안쓰럽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가?
정재은 물론이다. 지금까지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지 맙시다’ 하고
인터뷰를 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나도 나이를 먹었고,
여자로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
최대한 마음이 편해졌을 때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포옹하고 싶다. 단 한번이라도 엄마 품에 안기면,
그러면 그리웠던 감정이 다 사그라질 것 같다.
어머니를 만나는 상상을 많이 해보는가?
정재은 요즘 들어서 많이 한다. 같은 무대에서 함께 노래 부르는 상상.
막상 만나면 가슴이 벅차서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재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뵙고 싶습니다.
좋은 목소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가슴이 아려옵니다...유명인이면 모정을 그리 쉽게 끊을 수 있나요?
나름데로 다 이유가 있겠지만...정재은님 편에서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그 어린나이에 수많은 상처를 입고~~ 생각만해도 ...!!
아무튼 성장하여 남의 나라에서나마 성공하여 금의환향하였으니
늦었지만 모녀간의 상봉이 하루속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미자의 목소리를 닮은 가수로 기억합니다.
삶이 평탄치 않은 이야기에 가슴이 아픕니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연예인의 뒤안길엔 수많은 눈물과 아픔과 시련이 있군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평탄하고 기복이 없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이미자의 목소리에 아픔이 서려있고 그 딸에게도 한이 서려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