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의 바울과 야고보
사도행전 21:17~26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 일행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서 예루살렘의 장로들 곧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과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단과 이방 교회들의 대표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기독교회의 장로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이방 선교 사역의 결과를 나눈 후에 당면한 문제인 사도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을 없앨 방안을 나누는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이 내용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인 근본 교리와 기타의 관습적인 부분을 구별하면서 지혜롭게 행하는 모습 또 유대인 기독교회와 이방 기독교회간의 일치를 지키려는 사도들의 노력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행하였던 신앙의 지혜를 배우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의 시작인 17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선교단과 이방 교회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에 따뜻한 환대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아마도 여기서 나오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예루살렘의 기독교회에 속한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이 형제들은 이방 지역에서 선교한다는 사도 바울의 명성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은 당시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사도들에게 사도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도착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함께 올라온 오랜 제자 나손의 집으로 가서 여장을 풀고 그 날 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쉰 그 다음날 곧장 사도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의 사도단을 예방합니다.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예루살렘의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을 찾아가 인사를 나눕니다. 마침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와 사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명절을 맞아 각처의 기독교 성도들 역시 예루살렘에 모이기도 하고 사도들 역시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의 성전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 드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론의 후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동물 제사를 드렸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 때 이미 약 23년 내지 24년 전에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서문밖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자신의 몸을 완전한 희생 제물로 바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자신이 집례하여 단 한번으로 영원한 속죄와 화목의 효력을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의 제사와 부활로써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사를 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막힌 담이 완전히 헐어졌으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영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께 드리면 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죽음의 그림자인 성전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속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유대교적인 전통을 지키는 엄격한 보수적인 기독교인의 대표로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예루살렘 기독교회의 총회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는 그 때에 예루살렘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한다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분명 이 본문 말씀에서 그들의 이름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장로들이 다 있었다는 말은 다른 사도들 빌립, 마태, 도마. 바돌로매 등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과 야고보의 접견 장소에 야고보 곁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장로들은 다른 사도들로서 그들은 유대인 교회를 대표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곁에는 이방 교회를 대표하는 이방인 형제들이 함께 있습니다. 사도 바울 곁에는 고린도교회로부터 함께 출발해서 따라온 여러 이방인 형제들이 있으니 그들은 약 10명 정도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 곁의 디도와 디모데가 있고, 의사 누가와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두기고와 드로비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교회에서 드린 헌금들을 가져온 신실한 교회 대표들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소바다는 베뢰아교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는 데살로니가교회, 가이오는 더베교회,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에베소 교회와 다른 소아시아 교회를 대표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대표는 함께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디도와 디모데가 고린도교회를 대신하여 그 헌금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매우 신실한 자들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유대교회를 위한 헌금을 맡아 사도 바울과 함께 유대 형제들에게 전달하고자 사도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것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방 교회들을 대표하는 이방 교회의 장로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 5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24장로가 둘러싸고 앉아 있는데, 그 24장로들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를 대표하는 성도들의 대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에 모인 야고보와 여러 유대인 장로들과 사도 바울과 함께 한 이방교회들의 여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값을 주고 산 우주적 교회의 대표 장로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 아름다운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일하신 사역의 결과들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사도 바울은 자기와 선교단 일행의 이방 선교 여행을 통하여 세워진 여러 이방 교회들과 많은 영혼들의 추수와 이런 저런 이적과 기적들, 그리고 복음 선교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시련들과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그런 시련들로부터 건져진 일들을 증거하였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그 동안에도 예루살렘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지 3년 후에 예루살렘에 처음 방문하여 사도들과 교제하고자 하였을 때가 처음으로 치면, 그 후에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유다 지역에 기근이 생겨서 바나바와 함께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자 왔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일차 선교 여행 후에 이방 교회의 율법 준수와 할례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생겼을 때 열리게 된 예루살렘 총회 참석차 방문한 적이 있고 이차 전도 여행 마치고 보고차 예루살렘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와 삼사 차례 직접 만난 적이 있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의 사명 맡은 것에 대하여 이미 다 알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사도 바울이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증거한 것은 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일어났던 일과 그 성과에 대한 보고에 국한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지역에서 삼년 동안 머무는 동안에 소아시아 지역에 엄청난 복음의 영향력이 나타나 그곳에 우상 숭배자들이 허다하게 돌아오고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마술 책들을 모아 다 태우고 복음으로 돌아온 일을 전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도시 외에 여러 도시마다 자생적으로 교회들이 다 세워진 일도 전했을 것입니다. 그가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여러 교회들을 돌보았을 때에 그들이 여전히 건실하게 성장하고 있고 사도 바울과 선교단 일행이 마케도니아 위쪽 지금의 지금의 알바니아와 코소보, 몬테니그로 나라에 위치한 일루리곤 지역(로마서 15:19)까지 전도하였던 일들을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보고 과정에서 각처 세워진 아시아의 교회들과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의 여러 이방 교회 성도님들이 유다 교회들의 기근으로 인한 어려움을 알고 자원하여 사랑의 구제 헌금을 드리고자 모았는데 이렇게 각 교회의 대표들이 그 모았던 헌금을 전하고자 여기까지 함께 왔노라고 자연스럽게 말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이렇게 이방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할 때에 혹시라도 모를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본래 이 구제 헌금의 의도는 이방 교회 성도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적인 은혜를 유대인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통하여 받았으니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갚고자 하는 감사함의 전달입니다. 또한 어려움을 겪을 때 더 어려운 형제들을 위하여 덜 어려운 형제들이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나누는 진실한 신앙의 증거로 이렇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한 이방인 성도들의 헌금 전달을 유대인 장로들과 성도들이 오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혹시 이방인 성도들이 자기들의 부를 자랑하려 한다거나 혹은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형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기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돈을 보낸다거나 혹은 유대인 교회 장로들과 성도들로부터 어떤 부당한 호의를 돈 주고 사려고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직 이 이방인 교회의 헌금은 믿음 안에서 받은 바 은혜에 대한 순수한 감사함의 표시요 또한 기근으로 고난당하는 형제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의 증거일 뿐인데, 이것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매우 구제 헌금을 드리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워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출발할 때에 로마서를 써 보낼 때에 로마의 형제들에게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라고 기도 부탁을 간절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방 교회 성도들이 보낸 구제 헌금이 비록 거금이라 할지라도 유대의 장로들과 성도들이 그 순수한 주 안에서의 사랑과 감사함과 믿음 안에서의 긍휼의 마음으로 행한 것을 오해하고 오히려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거절될 수 있음도 사도 바울이 생각하고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하면서 부요한 사람이나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나라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자기의 기부 행위를 자랑거리로 삼고 생색을 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화가 나게 만드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신중하고 주의 깊게 행하여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이 다치지 않게 조용히 베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신중하고 겸손하고 마음의 사랑을 담아 기도하면서 이 구제헌금을 전달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야고보와 장로들 앞에서 그간의 이방 선교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사역들을 낱낱이 보고하자 야고보와 장로들 역시 매우 감동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절 전반절에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라고 하였으니, 이 의미는 사도 바울과 그 선교단을 통하여 행하신 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일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맺은 열매라고 예루살렘의 장로들도 인정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사도 바울과 그 선교단을 통하여 이방 교회 가운데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유대 교회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을 통하여 이방 지역에서도 일하시며 이방 지역에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구원하셨노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이 사도 바울 일행이 전한 구제 헌금도 순수한 마음으로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이 그토록 기도하며 간절히 바랐던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의 하나 됨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는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토록 바울이 염려했던 문제, 곧 유대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분열되고 두 개의 교회로 찢어진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이제 막을 수 있게 되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어 하나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두고 영어로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일치운동’이라는 이 용어는 오늘날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여러 번 기도하면서 강조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21,22)
그래서 우리는 교단과 교파가 다르더라도 심지어 종파가 좀 다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근본적 진리 안에만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점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깊은 형제의 우애를 지켜가고 가꿔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종과 나라를 뛰어넘고 문화와 풍습도 뛰어넘어 근본적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며 우상과 잡신을 겸하여 섬기지 않고 도덕의 근본 정신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리스도인들과 한 형제 자매임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기꺼이 환대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 가면 거기에는 오직 한 주 그리스도와 한 아버지 하나님과 한 성령께 속한 구원받은 한 형제 자매의 성스러운 한 가족만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는 백인교회, 흑인교회, 아시안교회, 인디언교회의 구별이 없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등의 구별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한 주 한 아버지 한 성령, 한 믿음으로 된 천국 시민권자들,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들만 있을 뿐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당시 사도 바울 일행과 야고보 등 장로들의 회합에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실적인 중대 문제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신상의 위험 문제였습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살해 표적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방 지역에 다니면서 모든 유대인의 신앙의 기초를 헐어버리는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유대인들에게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기독교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사도들조차 이런 소문을 듣고 매우 심각하게 염려하면서 그 소문이 진짜인가 거짓인가를 확인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 사회의 태풍의 눈과 같은 사도 바울 자신이 직접 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그것은 분명히 과장된 것이고 오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야고보 선생과 사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제안하였습니다.
20절로부터 2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라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예루살렘의 사도들 장로들이 들은 바 소문은 사도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사역할 때에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신하고 할례를 받지 말고 유대인의 전통 곧 그들에게 율법과 탈무드 등을 통하여 전해져내려오는 여러 전통들을 다 버리고 지키지 말라고 부추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과장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세의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모세를 불경하게 비난한 바 없습니다. 구약 성경 역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성경을 통하여 약속된 그리스도 예수를 알 수 있기에 구원 얻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임을 분명히 가르친 바 있습니다. 할례 역시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굳이 행할 필요가 없다고 명하였으나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행하는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한 바는 없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심령, 거듭난 심령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지켜 행하였던 할례를 하지 말라고 유대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할례로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한 바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들은 다 악한 것이고 필요 없다고 더 집어치우라고 선동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유대인이지만 유대인들에게도 복음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으로서 복음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가르치면서 오직 복음,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기독교 장로들은 사도 바울이 유대의 여러 관습을 준수하고 율법의 규정도 잘 지켜 행하고 있다는 점을 유대인들이 알게 하도록 마침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나실인 서원을 하고 그 결례의 기한이 마친 네 사람을 위하여 결례의 비용을 대주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에서 율법 준수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제안합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 몸을 구별하여 드린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은 그 정한 기간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시신에 몸을 닿지 않게 하고 머리카락을 깍지 않았다가 기한이 차면 번제와 속죄제와 소제의 예물을 성전에 바치고 그 길렀던 머리카락도 깍아서 하나님의 제단 불에 넣어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을 치릅니다. 이 때에 나실인의 제사 예식에 드리는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과 소제물로, 흠없는 일년 된 숫양 한 마리, 일년 된 암양 한 마리, 일년 된 숫양 한 마리, 무교병 한 광주리, 고운 가루, 과자들과 무교전병들과 같은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종종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나실인 서약자들이 서원 기간이 마치고 행하는 결례식 제사에 적지 않는 그 제물 비용을 대신 내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렇게 당시 예루살렘의 기독 교회에 네 명의 서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의 제사 비용을 대주고 그들과 함께 서원의 결례 제사에 참여해주면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바울에 대하여 들었던 것이 헛소문이었음을 알고 오해를 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도들의 제안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사도 바울은 곧장 그 말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 된 것을 신고하니라”
사도 바울은 장로들과 만남 그 다음 날 즉시로 나실인의 서원을 한 그 네 사람의 형제들을 데리고 성전의 제사장에게 가서 서약의 기간이 찬 것을 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사는 비용을 대줄 것도 말하고 이레의 기간 동안 성전에 드나들면서 마지막 기간의 나실인 서약을 지키는 데 힘을 합하였습니다. 이제 이레의 기간만 차면 8일째에 제단에 제물을 바쳐 태우고 그들의 머리를 깎아 제단에 바쳐 불로 태웁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 네 사람이 하나님께 구별하여 몸을 드린 나실인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 가정과 친구들이나 사회 관계에서 포도주도 마시고 집안 식구들이 죽었을 때 장례식도 참석하는 등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사도들이 제안한 이 말을 들었을 때에 그 말을 즉시 수용하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그 동안 자기는 진리를 따라 행해 왔음을 주장하면서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율법 준수하는 모습을 유대인들 앞에서 연출할 필요는 없노라고 강경하게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사도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자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그들의 제안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태도는 일종의 대가로서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분명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그 부활의 진리만이 사람들을 진정 살리는 유일한 진리라는 점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할례를 반드시 행해야만 구원받는다고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흔들어놓았을 때 그들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선포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바 있습니다. 분명 복음의 본질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진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 외에 기타 문제들 중에 양보해도 좋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의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의 영역이거나 관습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음식 문화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이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근세에 들어와 많은 논란을 거친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애완동물 문화가 엄청나게 퍼진 현대 사회에서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거의 범죄행위에 해당하고 그런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평가를 받는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미국 대선 토론회에서도 트럼프와 해리스와 토론 중에 트럼프가 밀입국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잡아 먹는다는 말을 함으로써 제 3세계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한다는 말이 뉴스에 뜰 정도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부터 30년 전만 되어도 우리나라에서 아주 시골에서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 고기는 별로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말을 기릅니다. 지금도 그들은 말고기를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말고기 먹는 것도 최근에 일어난 채식주의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말거리가 됩니다. 최근에는 동물들이 지능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을 먹는 것을 야만적으로 보면서 채소만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능으로 말하면 동물들도 상당히 높습니다. 침팬지, 코끼리, 돼지, 강아지 순서로 높습니다. 말의 지능도 높습니다. 말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인식한다고 합니다. 바다에서는 돌고래와 범고래 등이 대단한 지능이 있습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들끼리 상당한 수준의 언어를 서로 구사한다고 합니다. 바다의 낙지도 지능이 꽤 높습니다. 이러한 지능을 가진 것들을 잡아 먹고 뜨거운 물에 산 채로 넣어 요리해 먹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주장을 담은 음성을 채식주의자들이 점점 높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문화 영역입니다.
이러한 문화 영역, 관습의 영역에서는 배타적으로 자기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자세는 지혜로운 자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유로운 영역에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지나치게 상대방의 주장에 혐오감을 느끼고 이것을 배타적으로 표현하는 일들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녀간의 다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마치 서로 철두철미 원수지간처럼 미워하며 갈등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남자 혐오 운동, 혹은 여성 혐오 운동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뉴스에 보니까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여자 아이가 머리를 단발로 깎은 머리로 있었다고 이십 대 남자 아이가 그 여자아이가 남성 혐오자인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서 마구잡이로 그 소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페미니스트는 맞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때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속 좁은 인간의 악한 태도입니다. 이것은 머리가 나쁜 것인지, 인간성이 악한 것인지, 참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이견 대립의 강도가 점점 날카로워지는 세상에서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와 사도 바울과 같은 대가에게서 자유로움의 여유가 보입니다. 포용력이 보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9~23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으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요 율법 아래 훈련받았지만 사실 율법에서 자유롭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지만 자신이 유대인들과 같이 자기를 낮춘 것은 동족 유대인들까지도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어찌하든지 구원코자 함이고 본인이 유대인이고 율법을 아는 자지만 이방인들에게 갔을 때에 율법 없는 자처럼 행한 것은 그 이방인들도 복음으로 인도하여 구원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인 복음 진리만 얻고자 한다면 자기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영역에서 고집을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의 절대 진리 외에는 유연성을 가집시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는 목적을 돕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우리 자신의 오랜 관습, 나름대로의 가치관, 주의 주장도 내려놓읍시다. 대가들이 가지는 그 자유로움을 우리도 본받읍시다.
물론 복음의 절대 진리와 성경적 가치관을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들은 우리가 분명하게 맞서 싸우는 단호함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사도 바울이 가는 이방 지역마다 늘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우상 숭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잡신 숭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때로 우상 숭배와 기독교 신앙을 함께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다른 신들이라 말하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과 오직 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외에 다른 것들은 거짓에 불과하니 절대로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시장에 가면 우상 앞에 바쳐졌다고 시장에 내다 파는 소고기 돼지 고기 등이 있었지만 그것이 제물로 드려졌다고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면 사지 말고 알지 못한 상태라면 얼마든지 먹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앙 감정상 알면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것을 알면서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거리낌으로 먹으면 영혼에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성애 용인 문제가 오늘날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창조 질서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으니, 이것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역입니다. 오늘날 미국과 서구 유럽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사님들이 교단에서 쫓겨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죄악인 까닭에 이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선택의 자유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줄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만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진작시키고 축복해주고 동성애자 목회자를 안수하는 등의 행위를 결코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일에 동참하는 자는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 불로 멸망시킨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 속에 자기 영혼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을 추구하되 복음 진리와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만큼은 목숨을 내놓고 타협없이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 교회 시대에 교회의 두 기둥 되는 사도 바울과 야고보 선생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이방 교회들의 대표들과 야고보와 사도들의 회합 속에 서로 형제 애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우 다른 혈통, 다른 문화 속에 살아왔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거룩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하나로 세워가는 데 기꺼이 손을 잡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오해와 미움 속에서 살해 당할 문제들을 풀기 위하여 지혜를 모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사도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기꺼이 자유로운 영역에서 자기 방식을 버렸습니다. 영적인 대가들은 그들은 기꺼이 형식적인 옹졸함을 버리고 실제적인 유익을 추구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화평을 위하여 서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가 됩시다. 양보하고 지는 편을 택합시다. 독선보다 화평이 낫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됨이 주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진리 안에서 교회 일치가 주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 승리요 지혜입니다. 우리도 그러합시다. 진리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굳건하되 서로의 다름의 차이는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화평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자가 됩시다. 그러나 복음의 절대 진리를 조금도 양보하지 맙시다. 화평을 추구한다고 비진리까지 용인하는 맙시다. 이 신앙의 확신과 진리 안에서의 자유로움과 건덕의 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여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잘 세워가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살려내고 잘 세워서 장차 주님 앞에 다 함께 서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