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5월 12일
말씀 : 약5:15-16
제목 : 연합으로 나타난 은혜
오늘은 ‘창립 32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5월 마지막 주일 2부예배를 끝으로 6개월 동안 안식월을 갖게 되며, 그 기간 동안 제2의 목회를 준비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2주 동안 교회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하신 약속을 신약의 교회를 통해 실패 없이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교회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열심이며 의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그저 ‘한 사람이 들어왔구나’ 또는 ‘누가 전도했구나’라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어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시려는 그분의 뜻대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금 이루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로 초청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셨습니다. 그것은 곧 ‘속된 인간의 집에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는 삶으로의 초청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에는 구원하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영혼을 어떻게 다루시고 채우시며, 그를 통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 것인가를 계획해놓으신 하나님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지성소를 이룬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말씀을 통해 성전의 언약궤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됩니다. 고전3: 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특권, 그리고 권세와 능력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훨씬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권세와 특권과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것들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권세와 특권과 능력은 언제 나타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할 때’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기에 언약궤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 즉 지성소가 된다는 말씀을 수차례 드렸습니다.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거룩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결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결함을 받고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해보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에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먼저 ‘믿음의 기도’에서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를 통한 의인으로의 부르심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도’ 앞에 ‘믿음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기도에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신유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에서 ‘구원하다’의 헬라어 ‘소세이’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신체적인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곧 질병의 치유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의 ‘주께서 일으키시리라’는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입니다. 모든 병이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죄가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죄에 대한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을 징계의 수단으로 허락하셨다는 것은 본인의 회개나 거룩한 자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사함의 권한은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할 때 비로소 그의 피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또 다른 중요한 말씀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병이 치유되는 이유는 서로 중보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지체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과 연합되어 있어서 교회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가 되기 때문에 응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권세, 특권, 능력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인정하시는 의인들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의인’은 완벽하게 죄가 없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참되게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서로 죄를 자백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특권과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백성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하며, 이로 인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그분의 백성을 세우시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신 후 교회가 반드시 지녀야 할 특성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할 때 하나의 목적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기독교에서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 안에는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고 교리도 다양한데 어떻게 연합하여 새 언약을 이룰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이 물음에 두 가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사소한 교리의 차이를 뛰어넘어 언제나 사랑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분열하여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참 교회는 아닙니다. 즉 참 교회, 참 그리스도인들은 분열에 동조하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반대로 진리에서 이탈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열심히 최선을 다해 믿음을 사수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며, 더불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 자기중심적 삶, 이기심, 자기합리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대인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은 회심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신약의 교회들도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한동안 서로 갈라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4개의 파, 즉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가는 은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같이 품고 갈보리에서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같이 깨달았기에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연합된 참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성격도, 삶의 자리도, 가치관도, 방향성도 다릅니다. 어쩌면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이 훨씬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목적을 품고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며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함께 지체로 연합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믿음과 한 성령으로 하나됨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됨의 원리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엄청난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가 계획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열방을 변화시킬 수 있고, 열방을 향한 구원의 도구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나 전기 또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지역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도 성도들과 이웃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참 교회’가 소망하며 하나님께 간구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짐을 지고, 부족함을 채워주며, 필요하다면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초대교회에만 한정된 은혜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의 뚜렷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폴 워셔의 ‘회심’이라는 책에 기록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젊은 미국 선교사가 남아메리카 고지대 정글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테러범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서 여행하기에 매우 위험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 선교사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자그마한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정글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 마을에 테러범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그곳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밤을 지낼 장소를 구하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에 할 수없이 산기슭에 있는 한 오두막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얼마 뒤에 몸집이 작은 노파가 등불을 들고 나와 문을 열었습니다. 노파는 깜짝 놀라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기독교 선교사라고 대답하자 노파는 그의 옷깃을 잡고 재빨리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노파는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를 지하실에 숨겨주었습니다. 그가 옥수숫대 더미 위에서 쉬고 있는 동안 노파는 한 소년에게 교회 형제들을 불러오라고 말했습니다. 올 때 음식을 가져오라는 당부도 덧붙였습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그리스도인들이 갓 잡은 닭과 감자 몇 개를 갖고 와서 굶주린 선교사에게 신속히 음식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면서 선교사는 침례교 그리스도인이고, 그들은 나사렛파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리, 언어, 피부색, 인종 등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그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극히 소수였지만 한 피를 나눈 형제로서 상대방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에게 성경책을 전해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들은 그날 밤 선교사를 숨겨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교리는 달랐지만, 이들은 성경대로 한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령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며, 합심하여 선을 이루고,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그들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은혜를 누립니다.
교회는 ‘진리를 따르지 않으며 교리와 실천이 서로 상충하는 모순된 삶을 사는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벧후2:1-2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리스도인들도 분열할 수 있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속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 아닌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선한 목자와 늑대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 사이에 파당이나 분열이 있어야 그리스도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는 자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전11: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분열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이루십니다. 첫째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된 그리스도인을 드러내시는 것이고, 둘째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들 가운데서 거짓 교사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적, 종교적으로 너무나 태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가지각색의 이단들이 끝도 없이 나타나는 경향을 우리는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쉽게 구별할 수 없는 이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창궐은 극단주의자들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몸 안에 칩이 들어가서 우리를 조종한다, 소금물로 가글하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 기도하면 코로나는 절대로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 등등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 인본주의, 감각주의가 혼합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발전, 물질의 번영, 육신의 건강, 일시적인 즐거움 등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오늘날 참된 교회를 이탈하여 신앙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코로나로 인해 신천지가 드러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교리와 도덕의 오류로부터 그분의 양 떼를 지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기도, 헌신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것인지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약속의 성취를 보는 영명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