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낯선 군대 중공군
전쟁터를 찾아온 연예인들
오랜 전투에 시달리던 장병의 얼굴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입석에 당도해 쉬는 기간 내내 그랬다. 바로 옆에 있는 긴 활주로에서는 끊임없이 미군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보급물자와 탄약, 장비 등을 후방에서 전방으로 실어 나르는 미군의 비행기였다. 나는 그를 체크해야 했다. 우리에게 부족한 물자와 탄약이 제대로 도착해 우리 몫으로 자리를 잡아가는지, 여러 전투를 거치는 동안 결원이 생긴 예하 부대에 후방으로부터 올라온 새 병력을 제대로 보내지는지 등을 체크해야 했다. 나는 그래서 매우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도 음악과 율동은 뒤를 따른다. 전시(戰時)라서 전투 부대에는 한가한 일상(日常)의 활동이 발길을 들이지 못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문공연단은 후방에서 전선으로 부지런히 찾아왔다. 격렬한 전쟁터에 나아가 생사(生死)의 고비에 서서 고전(苦戰)을 거듭했던 장병에게 후방으로부터 오는 위문공연단은 그야말로 긴 가뭄 끝에 만나는 단비와 같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1사단이 달콤한 휴식과 재정비를 하고 있던 입석에도 위문공연단이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도 그런 쪽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유명한 가수나 영화배우 등은 줄곧 내 관심의 시야 바깥 먼 곳에만 머물렀다. 연예(演藝)라는 활동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둘 마음조차 내지 않았던 편이라 어느 유명한 대중 연예인이 곁에 다가와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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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국군 1사단이 주둔 중인 입석을 찾아와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연예인들.
재정비에 열중하던 우리 1사단에 위문공연단이 찾아왔고, 어느덧 영내 곳곳에는 그들이 울리는 풍악(風樂)이 맴돌았다. 그들은 사흘 정도 1사단이 있던 입석에 머물다가 떠났다. 가설무대가 차려지고 1사단 예하 장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유행하던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가 들렸고, 마침 그 노래를 히트시켜 당시 한국 일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도 현장에 왔다는 기억이 있다. 분위기가 매우 흥겨웠다. 장병은 가설무대를 중심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면서 공연을 벌이는 연예인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제법 낯이 익은 코미디언의 모습도 보였다. 이름을 날렸던 김희갑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영내를 지나가다가 그 대열에 잠시 몸을 섞었다.
장병은 사단장인 내가 자신들의 틈에 섞이는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병도 있었고, 흥에 겹다 못해 함께 춤을 추는 장병도 있었다. 나도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웠다. 그러나 오래 지켜볼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 틈에서 곧 빠져나와 다시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전쟁 지휘관이 할 일들전선의 사령관은 매우 바쁜 자리다. 죽음과 삶의 거창한 주제를 생각할 겨를은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는 더 그렇다. 전황(戰況)을 시시각각으로 체크하면서 다음 단계의 대응 조치를 늘 생각해야 한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의 여러 손실을 급히 메워야 하는 일도 사령관의 몫이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느린 부하 장병의 먹을 것, 입을 것을 늘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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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진영을 방문해 장병들을 위문 중인 중국 공연단. 왼쪽이 중국 오페라 '경극(京劇)'의 당대 최고 스타 메이란팡.
전투를 대비한 훈련 상황도 역시 사령관의 부지런한 시선이 닿아야 할 대목이다. 장병이 어떤 지향(志向)을 지닌 채 훈련을 벌이며, 전기(戰技)를 연마해야 하는지도 사령관이 판단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령관은 부지런해야 한다. 명민(明敏)함까지 갖추면 더 좋다. 그로써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과(戰果)를 최대한으로 확대해야 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전쟁을 수행 중인 사령관은 감상(感想)에 젖거나 한가한 잡기(雜技)로 시간을 보낼 여유는 별로 없다.
그 무렵, 전쟁터의 지휘관이 지녀야 할 덕목을 떠올릴 때 나는 늘 우리 1사단이 배속해 있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을 생각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덕목 중에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소를 두루 지닌 사람이었다. 우선 그는 용감했다. 적 앞에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용감했다. 그는 우선 남의 말을 경청(傾聽)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특히 부하 지휘관의 건의에 귀를 크게 열 줄 알았던 사람이다. 미리 상정했던 작전계획, 앞서 생각해뒀던 행동 지침이나 방향 등을 지니고 있었더라도 부하의 건의에 귀를 열어 이를 옳은 방향으로 조정할 줄 아는 장군이었다.
그가 만약 미 8군, 더 나아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1950년 10월 말 내린 과감한 공격 지시에만 골몰한 채 부하인 나의 건의를 무시했더라면 상황은 어땠을까. 그가 거느린 미 1군단은 사실 한반도 전쟁에서 항상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었던 신의주~평양~서울~대전~대구~부산의 축선에서 핵심 전력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상 미 8군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대였다. 1950년 10월 말에 벌어져 11월 초에 끝난 중공군과의 1차 대규모 접전에서 다행히 미 1군단은 예하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가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것 외에는 달리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주력(主力)을 보전했으며, 장비와 물자에서도 큰 피해를 기록하지 않은 채 후퇴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현장에서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던 내가 급히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직접 심문해 보시라”고 한 권유를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이어 중공군 전면 개입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는 부하의 제의에도 귀를 열었다. 그로써 그는 미 8군에 후퇴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나서 그를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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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초 주둔지에서 장병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백선엽 1사단장(왼쪽).
다시 시작한 행군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수많은 부하 장병의 생사를 어깨에 짊어지는 지휘관은 그래야 한다. 나아갈 때를 알아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미리 알아야 물러나야 하는 법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매우 용감하면서도 진실한 지휘관이었다. 스스로 쌓은 견해에 매달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진퇴(進退)의 적절함을 판단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우리 1사단의 재정비 기간은 제법 길었다.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다시 우리의 공세가 시작됐다. 서부전선 운산 일대에서 맞았던 적의 공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다시 번졌다. 재정비에 들어갔던 우리 1사단의 얘기는 아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보였던 분위기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1950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벌였던 아군의 ‘추수감사절 공세’, 그리고 한반도 참전 뒤 벌어진 초반전에서 청천강 이북의 덕천을 동서로 잇는 선까지 진출하기 위해 중공군이 벌였던 ‘1차 공세’의 성적표를 잘못 읽었던 듯하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다시 총공세를 지시했다. 중공군의 참전이 대규모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군이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시작했던 공격은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였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써 종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은 새로운 진공로를 배정받았다. 청천강을 건넌 뒤 평안북도 박천을 지나 태천으로 공격을 펼치라는 지시였다. 최종 목표 지점은 역시 ‘추수감사절 공세’ 때와 마찬가지로 압록강 수풍호였다. 미 1군단의 작전 지역은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대신 미 1군단 동쪽인 영변과 개천은 남쪽으로부터 북상해서 전선에 새로 당도했던 미 9군단이 맡았다. 미 9군단 예하의 2사단이 영변으로 진출했고, 25사단이 개천으로 공격을 펼쳤다. 그로부터 더 동쪽인 덕천과 영원은 한국군 2군단이 맡았다. 우리 1사단은 제법 긴 시간 동안 휴식과 재정비를 한 터였다.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가 내린 진격 명령은 따라서 절대 버겁지 않았다. 새로 배정을 받은 병력으로 지치거나 다친 병력을 대체했고, 미국의 원활한 보급망을 통해 받은 동복(冬服)과 탄약, 장비, 물자 등으로 긴 전투에서 생겨났던 결손을 메운 상태였다.
청천강을 무사히 건넜다. 적의 저항은 없었다. 11월 24일 입석을 떠나던 상황은 그랬다. 우선 당도했던 박천까지도 특기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10월 말에 새로 나타났던 중공군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던 박천까지의 진격 상황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그러나 박천을 지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