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 능서면 세종대왕릉 (풍수시각으로 보다)
1. 세종대왕릉
세종대왕릉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901-3에 있고 소헌왕후와 합장이다. 공식명칭은 영릉(英陵)이고 2009년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릉은 당초 서초구 대모산에 있던 것을 풍수상 명당을 찾아 여기로 이장 하였다(왕릉이장은 遷葬이라 하고 왕릉에는 4拜를 한다, 그러나 왕릉에 있는 山神壇에 3拜를 하므로 왕릉도 3배가 맞다?) 조선 왕릉중 영릉(세종), 명릉(숙종), 융릉(사도세자)을 3大 명당으로 친다. 영릉이 여기에 자리잡은 이유는 오로지 명당이라는 한가지 이유이므로 풍수적 시각으로 관찰하는 것도 의의가 있다.
2. 초장지
세종(1397~1450)은 부모옆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므로 소헌왕후(13995~1446)가 사망하자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옆에 석관 2개를 붙여서 마련하고 왕후와 자신이 묻힐 채비를 하였다. 세종이 승하하자 그의 유언대로 합장을 하였는데 지관 최양선이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 자손이 끊기고 맏아들을 잃는다)이라 혹평하고 문종2년, 단종1년(1457년), 세조의 맏아들이 요절(20세)하는 불상사가 이어졌다. 세조가 이장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일부 신하의 반대로 실행치 못하였고 예종이 요절한 형을 이어받아 1469년 즉위하자 왕실지관 안효례로 하여금 이장지를 물색케하였다.
3. 이장 과정(野史와 正史)
* 두 개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첫째 지창룡의 한국지리총람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지방설화를 채집한 것 같다). 우의정 이인손(1395~1463)은 지관에게 부탁하여 신후지를 잡았는데 지관은 이곳을 점지하고는 장차 제실을 짓지말고 묘지로 들어오는 개천에 다리를 놓지 말라는 당부를 하였다. 이인손의 슬하에 5남이 있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에 오르자 지관의 당부를 무시하고 제실을 짓고 다리를 놓아 묘지정비를 하였다. 묘쓴지 6년뒤인 1469년 지관 안효례가 예종의 명에 따라 이장지를 물색하려 북성산에 올라가 산세를 살피던 중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할 곳을 찾으니 멀리 제실이 보였다. 제실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비가 그친 후에 보니 이인손의 묘가 천하명당인 것을 알게되었다. 명종은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를 불러 극진하게 대하면서 “경은 부모를 명당에 묘셔서 부럽소”라고 했다. 이극배는 말귀를 알아차리고 묘자리를 양보하고 거기서 연을 날려 연이 떨어지는 곳으로 이장했다.
둘째 예종실록(2권 12.27/ 12.8)에는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배풀라”“이인손의묘는 이계전의 분묘 옆에 있다” “이인손의 무덤은 영릉의 청룡북쪽에 있다”고 적혀있다.
* 그렇다면 이인손 설은 야사(野史)이고 이계전(1404~1459) 설이 정사(正史)이다. 영릉이 이장해오면 국중에 있는 백성의 묘는 모두 옮겨야 되므로 영릉자리에 있는 묘와 그 부근에 있는 묘는 모두 옮겨야 된다. 그래서 두 묘는 이장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계전이나 이인손은 모두 계유정난(1453, 단종폐위)의 공신대작이므로 예종은 잔치를 열어 위로하였을 가능이 많다.(이계전의 장사는 관에서 치르면서 조회와 저자를 2일 정지하고 곡식 70석을 조의로 하사하였던 점으로 보아 이인손보다 신망이 높았다고 추측된다)
4. 풍수적 소감
* 택리지에 “회룡고조, 자좌오향, 西出東流(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다, 우리나라는 동쪽의 태백산이 등뼈역할을 하므로 물길은 東에서 西로 흐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반대 흐름은 길하다고 본다)이라 하였다. 또 목단반개화, 천선강탄형, 비봉포란형이라는 말도 있고, 정모 유투브는 정혈은 청룡쪽(아마도 동상있는 곳이 아닐가?)이라 한다.
* 입구부터 여러개의 동산이 둘러 있고 ”ㄴ”字형의 골짜기가 전개된 가운데 소국이 상당히 넓었다. 안산은 백호의 낮은 겹겹 줄기와 북성산이다. 홍살문에서 보니 벌써 범상치 않다. 묘지에 접근을 금하고 있어서 올라가보지 못했고 앞부분에 여기를 자르고 묘역을 조성한 탓으로 감상에 장애가 되었으나 대혈임이 분명하다. 예종은 영민 과감하여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애석하게도 1년2개월만에 사망하여 업적이라고는 영릉 이전하나 밖에 없다. 보통은 회룡고조형이라 부르고 말지만 회룡고조는 룡의 진행방향이 내려온 방항으로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즉, U턴한다는 뜻이므로 유턴한 다음 어떤 물형을 취하느냐가 문제이다. 목단 반개화가 옳다. 또 주산 북성산에서 빙돌아 앵봉을 만드고 회룡고조하였다고 하나 북성산에서 앵봉으로 오기 전에 크다란 과협두개를 거쳤으므로 북성산은 조산이고 앵봉이 주산이다.
5. 발복
소헌왕후는 시아버지 태종때 친정아버지 심온이 처형당하고 세종과 사이에 8남 2녀를 낳았고 세종은 후궁과 사이의 자식을 합쳐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거나 세조에 의하여 처형당하였다. 소헌왕후가 땅을 치면서 세조를 낳은 것을 원망할 것이다. 영릉을 이장한 뒤에도 성종의 연산군, 선조의 영창군, 인조의 소현세자, 영조의 효장세자등 많은 적서장자가 변을 당하였다. 영릉의 명당발복으로 이조가 백년 더 유지되었다(英陵 加百年)고 말하는 이도 있다. 후손들의 개인적 불행과 국운은 다를 수 있다. 이조 5백년중 1백년이 영릉의 발복이라면 이조의 원래 수명은 1819년이고 그 무렵은 순조때로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부패가 만연하고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농민들의 봉기가 끊임 없었다. 이때 이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섰다면 나았을 터이니 1백년 이조연장은 악운이라 하겠다.
* 공중에서---
* 영릉밑에서---
* 왕릉 뒤에서---
6. 이장한 兩이씨 묘
* 이인손의 묘는 여주 능서면 신지리236-3로 이장했다. 연을 날려서 떨어진 곳에 쓰라는 지석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장한 곳이 왕릉과 직선 2키로 거리로 가깝기 때문에 핑계를 댄 것이 아닐가. 광주 이씨는 연산군때 30여명이 희생되었다가 1561년 한음 이덕형이 태어나서 가문을 부흥시켰다. 중등중급이다.
* 이계전은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371 이씨집장지로 이장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으나 지도상으로 볼 때 중등중급 같다.(2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