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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아파트 뒤편으로 무궁화가 피어 있습니다. 작년 여름 지나며 유심히 보았습니다. 여름 내 폈다 졌다 반복하며 긴 시간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나 매일 지켜본 것입니다. 9월이 다가도록 이어졌습니다. 대단하다 싶었지요. 아주 드물게 10월 초까지 찬바람 받아가며 버티더라고요. 역시 무궁화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6월 하순부터 지켜보았습니다. 맞아요. 하순에 들어서니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꽤 만발해 있지요. 그러니 3개월 이상을 피고지고 하는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을 청춘을 즐기듯 지냅니다. 어떤 것은 제 손바닥 만큼이나 소담스럽게 폅니다. 하긴 내 손이 작기는 하지요. ㅎㅎ 올 여름 과연 얼마나 무더울지 이제 비로소 시작일 것입니다.
이제 장마도 수그러들겠지요. 본격적인 더위를 맞이할 것입니다. 이미 뜸은 들였으니 이제 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앞으로 최소 한달은 땀과 범벅이 되며 지낼 각오를 합니다. 맞아요. 그래봤자 한달입니다. 길면 한달반, 까짓 여태 살아왔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구촌 곳곳에 40도를 웃도는 곳들이 많아지니 우리도 끼게 될까 겁나기는 합니다. 50도까지도 당하고 있다니, 어찌 견딜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에어컨 켜놓고 살아요? 전기세 폭탄이 두려워집니다. 암튼 담주에 초복이니 단단히 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신나는 휴가를 그리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짐 싸들고 움직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글쎄, ‘귀차니즘’이 작용하기도 하지요. ㅋㅋ
주변에 때아닌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위 조심, 건강한 날들을 빕니다. 그리고 신나는 여름을 만들도록 하지요. ^)^
2024년 7월 13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 : 19)
<하이재킹>
요즘도 혹시 북으로 넘어가려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1971년, 그 때는 아마도 거기나 우리나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울어지기 시작했지요. 지금이야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때 저기는 정체하고 있었고 우리는 도약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세기 지난 오늘은 말도 안 됩니다. 저들이 내놓는 것은 고작 핵무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생각할수록 그 백성이 가엾기만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몇 사람의 배나 채워주려고 온 백성이 바닥을 기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지요. 아무튼 그래도 그 때 우리 쪽의 기술 인력이 탐났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다지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옵니다. 그러나 쓸 만한 인력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들에게야 인권이라는 것이 없으니 왈가왈부할 거리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네 필요를 위해 남겨두고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살까? 상상을 해봅니다. 혹시 가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강제 이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개인 사정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개인은 별 소용이 없고 국가가 먼저입니다. 말이야 국가이지만 사실은 독재자의 이익을 위한 일이지요. 그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의 피땀을 거저 빼앗아갑니다. 그 힘 앞에 저항도 하지 못합니다.
비행기 납치범이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영웅 대접을 받고 그래서 그 후에 잘 먹고 잘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실을 선전용으로는 잘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 선전 전단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잖아도 빨갱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하고 나온 터입니다. 돌아오니 홀로 남아계시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 몸이 집안에서 흙이 되도록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전과로 인하여 아무도 ‘용대’는 어디에도 발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지가 거기나 별 차이가 없다 싶지만 나도 비행기 하나 끌고 가면 영웅이 될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6.25전쟁은 실제 3년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반세기를 넘어 우리 가운데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기가 들어섰어도 그 여파는 쉽게 지워지지 않고 어쩌면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지금도 법 중에서 가장 무서운 법이 바로 ‘보안법’ 아니겠습니까? 어디서라도 ‘빨갱이’ 소리만 들으면 인생 끝나고 가정이 끝납니다. 그게 우리 사회이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분단의 아픔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여 평소 원한을 심고 있던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빨갱이라는 올무를 씌워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이용했던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이 있었는지 확실하게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남과 북, 참으로 멀고도 가까운 곳입니다. 같이 붙어 있어도 서로 오갈 수 없습니다.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구 반대편보다도 먼 곳입니다. 그러나 잠깐 기수만 돌리면 시간 내에 넘어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비행기 이북 간다.’ 그 소리를 들은 승객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말 그대로 속수무책입니다. 폭탄을 터뜨린 후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납치범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릅니다. 보안원이 나서다가 졸지에 당하여 정신을 잃고 묶입니다. 그래도 용기 있는 승객이 나서려다가 역시 부상을 입고 물러섭니다. 크지 않은 비행기 안이 공포의 도가니가 됩니다.
조종사도 이런 사실을 보고하여 알리려다가 부상을 입고 시야를 잃습니다. 이제 부조종사가 맡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합니다. 함부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비행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입니다. 용대도 그 사실은 압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살기로 나서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 같이 죽든지 다 같이 살든지 하자는 것이지요. 자기는 혼자이지만 그러나 조종사는 혼자가 아닙니다. 수십 명의 승객의 목숨이 달려있습니다. 혼자만 영웅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단 목숨이 중요합니다. 어찌됐든 살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전에 납치되어 북행하던 여객기를 살려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폭파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했다고 군에서 쫓겨났습니다. 승객들을 그렇게 간단히 처리하는 일이 쉽겠습니까?
공중에서의 사고가 가장 무서우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갈 곳이 없습니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도 구명보트라도 있을 것입니다. 일단 금방 죽지는 않습니다. 물에 떠있는 시간을 벌 수는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늘에서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서의 사태는 그 어느 것보다 공포를 일으킵니다. 아마도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여러 가지 경우를 대비하여 훈련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럴지라도 직접 당하면 당황하기 쉽습니다. 그들의 수고를 상상해봅니다. 정말 대단하다 싶습니다. 아무튼 한 사람의 맘먹기에 따라 많은 사람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지킵니다. 영화 ‘하이재킹’(Hijack 1971)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족보
옛날에 '뿌리'라는 장편 TV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질 아는 대로 미국에는 많은 유색인종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은 아마도 흑인일 것입니다. 본래 미국의 원주민이 아닙니다. 멀리 바다를 건너왔지요. 잘 아는 대로 노예로 팔려왔던 것입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험악한 세월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그것을 추적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게 시청하였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뿌리가 있고 그것에 대해 궁금하게 마련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부모를 찾아 올라가면 바로 자기의 조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추적할 수 있을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자료가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오랜 세월을 지나며 분실되고 없어집니다. 현재 우리는 자기 이름의 앞의 성을 가지고 조상을 짐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족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족보도 어느 선까지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흔히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 일반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빌 2 : 5 - 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본체시다, 그런 예수님에게 족보가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 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7 - 8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어떻게요?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도 있겠지요. 그래서 족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일반 사람과는 다릅니다. 당연히 족보도 다릅니다. 이제 그것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 족보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뿌리를 알아가며 더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누구로 부터 시작합니까? 마 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입니다. 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였을까요?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홍수로 한번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노아가 있습니다. 왜 아담이 아니고 노아도 아니고, 노아의 아들 셈도 아니고 아브라함일까요? 사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눅 3 :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하면서 여기서는 족보가 거꾸로 올라갑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요셉입니다. 그 어머니가 마리아이고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가 요셉입니다. 마 1 : 18 - 19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여기서 예수님은 특별하게 잉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부부가 되기 전에 이미 잉태됩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과 예수님은 사실 상관있는 사람들입니까, 상관없는 사람들입니까?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요셉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실제 법적으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조상을 시작하는데 아담도 아니고 노아도 아니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이 악해지자 노아의 가족을 남겨주고 심판하십니다. 그 노아의 후손도 하나님의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없이 살까, 아마도 그것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로 한번 혼이 나자 다시는 물에 빠져죽지 말자, 하고 무슨 짓을 합니까? 바벨탑을 쌓아 올립니다. 제아무리 비가 와봐라, 우리는 더 높이 올라간다 하는 식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버리시고 그 자손들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언약하십니다. 창 17 : 2 - 5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하시고 열국의 아비로 세우십니다. 누구를? 아브람을. 이름까지 바꿔주십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미 그를 저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서 부르실 때부터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 12 :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도록 하십니다. 누구의 표상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출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아들이신 예수님도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복의 근원으로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전에는 아브라함을, 다음 수천 년 후에 예수님에게로 직임을 잇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제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를 보겠습니다. 눅 3 : 23 - 24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 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누구의 족보가 나옵니까? 사실은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가 기술됩니다. 그 끝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눅 3 :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 그 첫사람이 아담이란 말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수님은 세상 법적으로는 육의 조상을 가지신 사람이시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씨로 오셨음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 1 :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는데 그 나심은 특별합니다.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사람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로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쉬운 일이었을까요? 마리아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처녀가 잉태한다,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됩니다.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음행을 하였다는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율법에 의거하여 돌에 맞아 죽거나 집에서 쫒겨나거나 합니다. 당시 버림받은 여인은 살길이 막막합니다.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마리아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될 요셉도 그 믿음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먼저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잉태할 것을 예고해줍니다. 마리아가 깜짝 놀라지요. 아니 저 아직 남자와 결혼도 안 했는데요. 천사가 대답합니다. 눅 1 :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마리아가 결정합니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의 씨요, 약속의 씨요, 하나님의 씨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마 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다윗의 자손이 도대체 몇 명인데 왜 꼭 예수냐? 하는 것입니다. 일단 다윗에게 아들이 몇이나 있었는가 한번 보겠습니다. 대상 3 : 1 - 9 보겠습니다. 성경의 이런 부분은 평생 교회에서 읽기는 힘들 것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이 이러하니 맏아들은 압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소생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 여섯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라 거기서 칠년 육 개월을 치리하였고 또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입할과 엘라사마와 엘리벨렛과 노가와 네벡과 야비야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 아홉 사람은 다 다윗의 아들이요 저희 누이는 다말이며 이외에 또 첩의 아들이 있었더라" 다윗의 자손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예수가 그리스도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얼마 전에 설교한 말씀 기억하십니까? 제목이 무엇이죠? '왜 예수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몇 명인데 왜 하필 예수가 그리스도여야 하는가? 예수님 오셨던 당시 예수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 사람은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라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가 하고 다니는 행색부터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툭하면 그들이 목숨처럼 지키며 사는 율법을 자꾸 어깁니다. 그러잖아도 미운데 그가 하는 율법에 대한 태도에 반박할 거리도 없습니다. 자존심까지 상합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억압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가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겉모습은 보잘 것 없어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백성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줍니다. 그들이 여태 들어온 말씀과 같다? 다르다? 다릅니다.
말씀을 들은 백성의 태도를 보겠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일반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한번 교회를 선택하고 나면 잘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용납해주려 하지 않습니다. 왜 왔다리 갔다리 하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그럴 바에야 다른 교회로 가라고 문전박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교회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또한 목회자를 분별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다 하나님이 인정하셨다고 하면 좋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분명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고 이 교회와 저 교회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데 하늘 이야기보다는 세상 이야기를 전하는 곳도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세상 이야기 듣고자 옵니까? 우리가 왜 교회에 나옵니까? 하나님 말씀, 성경을 들으려고 온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온 줄로 압니다. 땅 이야기야 어디서든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이야기는 모릅니다. 그래서 알고자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자 앞에서 보았듯이 다윗의 자손이 이름만 나온 것도 13명입니다. 그런데 첩의 아들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후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가운데서 예수가 선택되었습니다. 왜요?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아는 사람은 마리아와 아비 요셉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요? 아무튼 예수님도 나이가 30이 될 때까지는 평범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사실 그때까지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눅 3 : 21 - 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처음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왔지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말씀을 들고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눅 4 : 13 - 15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믓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사실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고전 15 :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첫사람은 마귀에게 지고 실패하였지만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시고 하늘의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 백성에게 하늘의 소식, 하나님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문제는 백성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다행히 열두 제자가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 3년 목회에 12명 얻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고난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남들 다 도망가는데 그 제자들은 어떻게 십자가 아래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하였듯이 예수님은 여태 백성들이 들은 율법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역사 시작을 보겠습니다. 마 4 :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 이야기하십니다. 여태 들어본 이야기다? 아니다? 아니지요. 여태 들은 이야기는 안식일에 이런 것은 해라 말라 등등 율법 강해입니다.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왜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니까. 누구만 할 수 있다? 오직 예수님만. 왜요? 예수님만 거기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로서 오신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의 약속대로 행하시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날개를 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의 형체를 입고 오셨습니다.(빌 2 : 8)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아예 믿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오직 말씀을 따라 보고 믿은 것입니다. 요 1 :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답이 어디 있다고요? 모세의 율법, 선지자들의 글 속에 있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근거로 다시 오시는 그 분을 찾아야 합니까? 오직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말씀하셨고 성경대로 일하셨기에 메시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한 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신약 곧 새 언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지요. 어떤 모습으로 오시기를 기대합니까?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정작 오셨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 하시는 사역을 보며 깨달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시 백성의 목자들이나 일반 백성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핍박하고 나아가 죽이려고 공모하였습니다. 물론 결국은 그들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는 어떨까요? 그것도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한 마디로 믿음이 있겠다, 없겠다?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때문에 성경을 그리고 오늘날 특히 신약, 곧 새 언약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르면 초림 때 유대인들이 하던 대로 오시는 그 분을 핍박하고 쫓아낼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다시 오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그저 막연히 재림을 믿고 있으면 똑같은 짓을 하게 된다 그 말입니다. 분명 언제 오시는지는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오시는지, 어디에 오시는지, 왜 오시는지 등등은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말이 됩니까? 속으로는 오지 마시옵소서, 하면서 신앙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요? 하늘나라보다 여기가 더 좋은 걸요. 우리의 신앙이 진실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고 있는지 그것부터 자문자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잘 다니고 봉사도 헌금도 기도도 잘 하고 있으니 안심입니까? 착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 새겨들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정신 차려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식하면 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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