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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3659]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매화 시 8수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매화 시 8수에 대하여
퇴계는 1569년 3월4일 선조 임금에게 사직 인사를 하고
도성을 떠나 동호의 몽뢰정에서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배로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서 묵었는데
고봉은 봉은사까지 따라와서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 때 퇴계는 그가 쓴 매화 시 8수를 고봉에게 주면서 화답해 달라고 한다.
고봉은 1569년 3월 15일자 편지에 화답하는 매화시 8수를
동봉하여 퇴계에게 보낸다. 이 차운 시는 <고봉 집 속집 1권>에
퇴계 시 원운과 함께 실려 있다.
< 퇴계의 매화 시 8수>
그러면 먼저 퇴계선생 매화 시〔退溪先生梅花詩〕8수를 살펴보자.
이 8수는 , 각기 다른 시기에 2수씩 네 번 지어진 것이다.
처음 1,2수는 독서당 동호(東湖)의 망호당(望湖堂) 아래에 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쓴 것이다. 망호당은 한강 주변 독서당의
부속 건물이다. 퇴계는 1541년에 사가독서를 하며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 후로도 자주 이곳을 찾았다.
1545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퇴계는 물러날 뜻을 굳히고
1546년 2월에 귀향을 결심한다. 그가 남쪽으로 떠나는 날에
막 꽃이 피어나는 매화를 만나 술을 가지고 찾아가서 이 시를 쓴 것이다.
제1수
망호당에서 매화를 심방하다 望湖堂尋梅
망호당 아래의 한그루 매화야 望湖堂裏一株梅
널 보고자 몇 번이나 말 달려 왔나 幾度尋春走馬來
천 리길 남쪽으로 떠날 제 널 버리기 어려워 千里南行難負汝
또 찾아와 흠뻑 취해 곁에 누웠네. 敲門更作玉山頹
여기에서 옥산퇴(玉山頹)는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용지(容止)〉에 “혜강(嵇康)의 자태가
마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선 것처럼 빼어나 그가 술에 취해서
넘어지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여기서는 퇴계가 매화를 이별하매 석별의 정을 못 이겨
술에 취했음을 말한 것이다.
제2수
재차 앞의 운을 써서 경열에게 답하다 再用前韻答景說
듣자하니 저 호숫가에, 매화 이미 피었으나 聞道湖邊已放梅
흰 안장 호방한 객이, 아직 오지 않았다오. 銀鞍豪客不曾來
가엾어라 초라한 이 몸, 남으로 가는 길이니 獨憐憔悴南行客
임과 함께 한번 취해, 저무는 것도 모르련다. 一醉同君抵日頹
(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쓴 매화시첩 -
망호당 매화시... 국역 퇴계전집에 있다.)
제3, 4수는 퇴계가 1566년(명종21) 중춘에 소명의 사면을 빌며
예천 동헌에 머물면서 뜨락의 매화에게 묻는 시이다.
〔丙寅仲春 乞辭召命 留醴泉東軒 問庭梅〕그는 명종의 소명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다가 병으로 사직을 하고 예천에 머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매화 시 두 수를 지었다.
제3수
정자중의 서한을 받아보고 진퇴가 어려움을 더욱 한탄하며
시를 읊어 매화에게 묻다〔得鄭子中書 益歎進退之難 吟聞庭梅〕
매화의 고절함은 고산을 일컫거늘 風流從古說孤山
무슨 일로 이 관가에 일찍이 옮겨왔나 底事移來郡圃間
마침내는 스스로가 명리에 그릇 얽혀 料得亦爲名所誤
내가 늙었다 해서, 속이지를 말아다오. 莫欺吾老困名關
제목의 정자중은 퇴계의 문인인 정유일을 말하며,
시에서 고산(孤山)은 송나라 때 은자인 임포(林逋 967~1028)를 가리킨다. 그는 자가 군복(君復)으로 서호(西湖)의 고산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서화와 시에 능하였고
특히 매화시가 유명하다. 장가를 들지 않아 자식이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짝을 삼으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사후에 화정선생(和靖先生)이란 시호를 받았다.
제4수 매화를 대신하여 대답하다〔代梅花答〕
나는 관가에 있으면서 고산 생각 간절하고 我從官圃憶湖山
그대는 구름 시내에 나그네 꿈 짓는구나. 君夢雲溪客枕間
서로 만나 한번 웃으니 하늘이 점지함이라. 一笑相逢天所借
신선 학과 사립문에 아니 와도 좋을 것일세. 不須仙鶴共柴關
제5. 6수는 예천에 있을 때 매화를 보았는데 그 후 수십 일 만에
안동 도산에 이르니 산 매화가 처음 피었다.
이 매화를 퇴계가 보고
기뻐서 지은 시이다.
제5수
1566년 병인년 계춘에 소명을 사양하고 산에 돌아와
매화에게 묻다〔丙寅季春 辭召命 還山問梅〕
묻노라 이 산중에, 두 그루 백옥 신선 爲問山中兩玉仙
어이 봄 빛 기다리어, 온갖 꽃 필 때 이르렀나. 留春何待百花天
이제 서로 만났으나, 양양 객사 같지 않아 相逢不似襄陽館
추위를 비웃으며 , 나의 앞에 다가오네. 一笑凌寒向我前
시에서 양양은 예천(禮泉)의 옛 이름으로 양양관은 그곳의 객사를 말한다.
제6수 매화를 대신하여 대답하다〔代梅花答〕
나는 바로 포옹이라 환골한 신선인데 我是逋翁換骨仙
그대는 요동에 돌아온 학이라 하늘에서 내려왔네. 君同歸鶴上遼天
서로 만나 한 번 웃음 하늘이 이미 허락하니 相逢一笑天應許
양양관의 매화와 전후를 비교하지 마시게. 莫把襄陽較後前
여기에서 포옹(逋翁)은 송나라 때 은자인 임포(林逋 967~1028)를
말하는 데 임포의 시 “산 동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는 너무나 유명하다.
2구의 요동에 돌아온 학은 정영위(丁令威)를 말한다.
정영위는 본래 요동(遼東) 사람으로 영호산(靈虎山)에서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는데, 그가 뒤에 학으로 변하여 성문 앞의
큰 기둥인 화표(華表)에 앉아 있었다. 이때 어떤 소년이 활로 쏘려고
하자 학이 날아서 공중을 배회하며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영위로다. 집을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야 돌아오니,
성곽은 옛적과 같은데 백성은 그때 사람이 아니로구나.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즐비한고.’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제7수와 8수는 1569년 3월초에 선조 임금의 윤허를 받고
서울을 떠나는 퇴계가 1568년 7월부터 1569년(선조2) 3월까지
8개월간 한성 우사에 있으면서 늘 책상에서 마주보던
매화와 떠남을 서운해 하며 지은 시이다.
제7수
한성 우사에서 분매와 증답하다 漢城寓舍 盆梅贈答
다행히 이 매선이 나와 함께 서늘하여 頓有梅仙伴我凉
객창이 소쇄하여 꿈마저 향기로워라. 客牕瀟灑夢魂香
동으로 돌아갈 제, 그대와 함께 못하니 東行恨未携君去
서울 티끌 이 속에서, 고이 보전하시게. 京洛塵中好艶藏
제8수
매화가 대답하다 盆梅答
듣건대 도선께서, 우리를 푸대접한다 하니 聞說陶仙我輩凉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 待公歸去發天香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願公相對相思處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 玉雪淸眞共善藏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기사년 모춘 3일 계로(溪老). 나의 고향 예안(禮安)은 영남의 가장 북쪽에 있다. 육로로 새재〔鳥嶺〕를 경유하여 가면 남행(南行)이라 하고 수로로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돌아가면 동행(東行)이라 하니, 모두 예안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고봉의 차운시 8수>
이러한 퇴계의 매화시 8수를 받은 고봉은 1569년 3월15일에
퇴계에게 쓴 편지에 8수의 차운 시를 동봉한다.
먼저 3월15일의 편지를 보자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강 위의 이별은 꿈결처럼 아득하였습니다. 양근(楊根)에서 돌아온 김 별좌(金別坐)에게서 선생의 행색(行色)을 듣고는 슬프고 그리운 마음 갑절이나 더했습니다. 그 뒤 가시는 동안 건강은 어떠하셨는지요? 그리는 마음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쯤은 이미 고향 가까이 가셨을 것이니 귀향의 흥취(興趣)가 더욱 아름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근근이 이 몸만 보존하고 있을 뿐이니 다른 것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매양 모시게 될 날이 멀어졌음을 생각할 적마다 저의 마음이 절로 슬퍼집니다.
보내 주신 〈매화편(梅花篇)〉을 보고 삼가 그 운(韻)을 사용하여 저의 생각을 표현한 시(詩) 한 편을 올리니 웃으며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밖에 많은 생각을 글로는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살피시기 바랍니다. 삼가 절하고 이만 줄입니다.
1569년 3월 15일 후학(後學) 대승(大升)은 절하며 올립니다.
퇴계 선생의 매화시에 우러러 차운하다〔仰次退溪先生梅花詩〕
칠언절구 8수
제1수와 2수 (운은 1구 매, 2구 래, 4구 퇴이다.)
선생의 그윽한 마음 한매에 의탁하고 先生幽契託寒梅
서울의 풍진 속에 우연히 홀로 왔네 京洛風塵偶獨來
돌아갈 흥 호연하고 봄도 저물지 않으니 歸興浩然春不暮
성긴 그림자 쇠퇴함 달래 줌이 어여쁘네 定憐疏影慰摧頹
맑은 창가에 한 가지 매화 환히 피었는데 晴牕深著一枝梅
나는 벌 찾아오는 것 허락지 않네. 不許遊蜂取次來
오늘의 이별 부질없이 괴로워하노니 今日別懷空自苦
백 잔 술 마셔 마구 취해 쓰러지네 百觴澆下任欹頹
제3수와 4수 (운은 산, 간, 관이다.)
공은 매화 찾아 고향 산으로 돌아가는데 公欲尋梅返舊山
나는 영화 녹봉 탐하여 풍진에 머무르네. 我貪榮祿滯塵間
향 피우고 닻줄 매는 곳 어드메냐 燒香繫纜知何處
비바람 어둑한데 홀로 사립문 닫았노라 風雨冥冥獨掩關
3월 10일에 비바람이 매우 심했는데 멀리 간 배를 생각하며
홀로 깊은 방에 있으면서 이런 말을 썼다. (원주)
호수 위 황량한 집 푸른 산 의지하니 湖上荒廬倚碧山
여윈 매화 긴 대나무 창살에 비치네. 瘦梅脩竹映牕間
지금도 봄소식 옛날과 같으리니 祗今春信應如舊
공명의 관문 뚫지 못한 내가 부끄럽네. 愧我功名未透關
제5수와 6수 (운은 선, 천, 전이다)
아스라한 맑은 모습 학 위의 신선인데 縹緲淸標鶴上仙꽃다운 마음 짐짓 봄 하늘에 드러냈네 故將芳意露春天
누가 정실이 연기와 빗속에 드리움을 동정하랴 誰憐鼎實垂烟雨
심어서 나온 좋은 싹이 눈앞에 있네. 種出嘉萌在眼前
정실(鼎實)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역할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퇴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고개 너머 차갑게 피어 있는 매화는 바로 적선 謫仙이라. 嶺外寒梅是謫仙
고고한 향기와 나그네 자취가 각각 천성을 보전하였네. 孤芳羈跡各全天
어찌하면 달빛 아래서 우리 그윽한 회포를 열고 何當月下開幽抱
복희씨가 괘를 긋기 전의 이야기를 해 볼까. 說到羲皇畫卦前
매화는 적선 謫仙이라. 고고한 향기와 나그네 자취가 천성이네. 고봉이 퇴계의 성품을 이렇게 매화에 비유한 것이다. 적선은 죄를 짓고 인간세상으로 쫓겨 내려온 천상의 선인이다. 이 시에 나오는 복희씨는 주역의 8괘를 처음으로 만든 전설적인 인물로서 몸둥이는 뱀이고 얼굴은 사람이며, 소의 목과 호랑이 꼬리가 달렸다고 <열자>라는 책에 전한다. 공자는 <주역>을 좋아하여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는데, 특히 복희씨가 괘를 긋기 전의 뜻에 심취했다고 한다.
제 7수와 8수 (운은 량, 향, 장이다.)
남몰래 서리를 이겨내고 달빛 띠고 서늘한데 暗傲霜寒帶月凉
작은 창가에 배양되어 은은한 향기 풍기누나. 小牕培養發微香
얼음의 자세 명년을 기다려 감상하리니 冰姿擬待明年賞
정원지기에게 부탁건대 부질없이 감추지 마오. 報道園丁莫謾藏
늠름한 높은 절개 더위 물리치고 서늘한데 稜稜高節撥炎凉
바람 불고 안개 자욱해도 향기 사라지지 않네. 風動烟香不廢香
봄날에 온갖 꽃 난만하게 피어나면 春攬百花從爛熳
물가 숲 아래에 깊이 감추리라 水邊林下且深藏
<퇴계의 답장 편지>
고봉의 차운시 8수를 받은 퇴계는 1569년 4월 2일에 고봉에게 답장을 보낸다.
명언에게 절하고 답합니다.
동호(東湖)의 배위에서 정답게 얘기했던 것이 꿈결 속에 되살아나는데, 나를 전송하느라 봉은사(奉恩寺)까지 따라와서 하룻밤을 묵은 뜻이 더욱 깊게 느껴집니다. 서로 술에 취하여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천 리의 이별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서한과 시를 받으니 다시 얼굴을 대하는 듯 하여 지극히 위로되고 다행스러움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여강(驪江: 경기도 여주를 말함)을 지나면서부터 사나운 바람과 심한 비로 뱃길에 매우 어려움이 있었으나, 충주(忠州)에서 육지로 올라 눈 덮인 길을 걸어 영(嶺)을 넘었는데도 오히려 다른 병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고향 산천에 들어와 보니 한창 바쁜 농사일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여 이 또한 스스로 뜻을 붙일 만하였습니다.
앞뒤를 돌아보건대 성은(聖恩)을 입고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부끄럽고 두려움이 더욱 깊어집니다. (중략)
앞으로 서로 만날 날이 요원하여 기약이 없으니, 대업(大業)을 더욱 닦아 아주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르도록 힘써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시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보답하는 시를 지어 별지(別紙)에 기록하였습니다. 삼가 회답합니다.
기사년(1569년) 4월 2일 황(滉) 돈(頓).
지난번에 드린 〈매화시(梅花詩)〉8절(絶)은 각각 감흥이 담겨 있기는 해도 다 익살에 가까운데, 뜻밖에 화답하여 천 리 밖에 있는 나에게 부쳐 주었으니, 서로 사모하는 뜻을 그 속에서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 실로 깊습니다.
최근에 도산(陶山)으로 돌아와서 매화를 보고 또 두 수의 시를 지었는데, 영공(令公)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다시 써서 보내니, 한번 웃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편지에서 언급한 퇴계가 쓴 두 수의 매화시가
어떤 시인지는 아직 찾지를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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