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가명 박순천
- 박순천은 1898년 경남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에서 시골 한학자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1898년은 청일전쟁으로 중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비를 시해한지 3년이 지난 해였다. 아버지(박재형)은 넉넉한 지주였으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개화된 인물이었다. 박순천은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한문서당에 다녔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10살때(1908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부산진에 있는 호주미션계의 일신여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한일합방의 경험과 기독교의 개화사상은 박순천이 학창시절에 자연스럽게 반일감정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원래 본명이 명연(命連)이었던 그녀는 '순천'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전에 박순천은 마산, 진주, 거창일대에서 활동중인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쉽게 세브란스의전학생인 이갑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서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소식을 듣고 3.1운동거사를 위한 마산책임자가 되었다. 마산에서의 거사는 장날을 이용하여 3월 5일 일어났다. 박순천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일단 철원의 친구오빠(최용구)집으로 피신하였다. 이날 이후 철원에서 '만세꾼이 도망왔다'는 소문이 나돌자 최용구부인은 당황하여 동네부인들에게 '내 친정동생인데 전라도 순천에 시집갔다 소박을 맞고 돌아왔다'고 꾸며댔다. 그래서 모두 그녀를 순천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명연이란 이름이 아닌 순천으로서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박순천은 피신중에 동경으로 가 1920년 길강여의전(吉岡女醫專)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고 일본형사에 잡혔다. 1년형을 살고 1921년 8월 24살의 나이로 출옥하였다. 형을 사는 동안 박순천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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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변희용과의 평범한 생활
- 일본에서 잡힌 박순천은 먼저 우시꼬메형무소에서 지냈다. 이때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동경유학생 조직인 '학우회(學友會)'에서 면회를 왔는데 이 당시 총무였던 경응대(慶應大) 경제과 학생이었던 변희용이 있었다. 박순천에게 변희용은 낯선이름은 아니었다. 마산에 있을 때 마산교회의 목사가 박순천의 신랑감으로 변희용을 거론하였기 때문이다. 철장사이를 두고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은 새로운 생활의 출발을 의미하였다.
변희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로 와 중외일보기자가 되었다. 1925년(28살) 12월 24일 두 사람은 무교동의 지금 태화관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첫아이를 낳고 시댁인 고령으로 들어가 13년간의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이곳에서 박순천은 시골아낙네로서 모심기, 밭매기, 타작 등의 농사일을 하면서 6남매를 키웠다. 다른 정치인들과 다르게 1925-1938년까지 13년간의 시골생활은 해방이후에 친일행각에 대한 시비가 거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간에 13년간의 시골생활은 그녀의 정치생활은 있어서 전화위복이 되었다. 1938년 은둔생활을 청산한 박순천은 1940년 일본여자대학의 여공보전과에서 배운 것을 살려 조선공예사와 금강전구공장에 여공감(女工監)으로 일했다. 변희용은 광산업을 하였다. 그리고 1936년 동아일보정간사건을 계기로 황순덕, 박승호와 함께 1940년 10월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여숙을 설립하였다. 황신덕이 교장이 되고 박승호, 안현민, 방신도 등이 교사가 되었는데 박순천은 전력 때문에 교사인가가 나지 않아 부교장격으로 서무를 맡게 되었다. 해방후 변희용은 성균관 대학교 경제학과교수로 활동하면서 박순천을 보좌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변희용은 4.19혁명시 4.26교수시위에 참가했고 그후 약 1년간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있다가 정년퇴임하여 평교수로 근무하였다. 66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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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방후 대한부인회 활동과 부인신보 창간
- 해방후 좌우가 총망라된 건국준비위원회가 형성되었다. 이에 발맞춰 여성단체도 8월 17일 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박순천, 황신덕, 박승호, 조원숙, 유영준, 정칠성, 김순실, 신금옥, 이규영, 이각경, 유각경, 박원경 등 140여명이 모여 건국부녀동맹을 만들었다. 해방후 첫 여성단체인 건국부녀동맹은 교육계, 종교계, 전문직종인 등 각계각층의 여성이 총망라되었는데 대부분은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조원숙, 정칠성, 김순실, 신금옥, 이규영)과 기독교계 여성들(박순천, 황신덕, 박승호 등)이었다. 위원장에 유영준, 부위원장에 박순천이 각각 선출되었다. 박순천, 황신덕 등은 '우리나라는 이미 있던 나라인데 지금 또 무슨 <건국>이냐'며 단체이름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9월 9일 미군정이 들어온 이후 차츰 자신들의 세력을 정비하기 시작한 우익세력들은 한민당을 만들었다. 박순천은 우익여성단체의 대표역활을 하면서 '정부를 세우는 것이 무엇이 그리 급하냐 해외임시정부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해도 되지 않는냐'며 한민당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였다. 비록 유각경, 박원경이 따로 떨어져 나와 우익여성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어도 박순천, 황신덕은 계속 건국부녀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건국부녀동맹이 점점 좌익적 성격을 띄기 시작하자 1945년 12월 8일 동아일보에 성명서를 내고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중 신탁통치만이 강조되어 정계로 좌익-찬성, 우익-반대로 극단적으로 양분하였다. 건국부녀동맹을 탈퇴한 박순천은 1946년 1월 반탁운동을 계기로 '반탁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체제로 전개하기 위해' 김활란, 송금려, 손정규, 이숙종과 함께 독립촉성중앙부인단을 결성하여, 황기선을 회장으로 박순천을 부회장으로 뽑았다. 2월에는 한국애국부인회와 합류하여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통폐합하였다. 박순천이 회장으로 뽑혔다. 독촉애부로의 통합은 미군정이 미소공위가 열리기전 우익세력들을 통합시키려는 시도였다. 즉 46년 2월 1일 중경임시정부중심의 '비상정치회의준비위원'와 이승만의 '독촉중앙협의회'가 합작하여 '독촉국민회'와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다. 독촉애부는 독촉국민회의 산하단체로서 이승만의 정치적 입장을 추종하는 정치활동을 벌렸으며 1946년 반탁운동, 1947년 단정수립지지운동에 집중하였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는 48년 2월에 대한부인회로 이름을 바꾸고 박순천이 초대회장이 되었다. 독촉애부는 정치활동과 함께 부녀활동도 열심히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사회정화운동차원에서 생활간소화운동, 음식간소화운동, 강연회,교양강좌를 통한 계몽화운동들과 정부보조활동차원에서 유엔한위대표단을 대접하는 일 등을 하였다. 그러나 생활간소화운동은 당시 대중적 현실과 동떨어지는 중류층 유한부인들의 활동수준이었다. 계몽화운동은 신탁통치반대를 주장하는 내용이나 남한단독선거를 앞두고 선거참여를 권장하는 이승만지지단체 수준이었다. 또한 여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유엔한위원들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려는 행위 등은 문제가 많았다. 특히 남한만 총선거를 원하는 이승만의 정략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유엔한위 대표단 대접활동은 남한의 여성대표라 할 수 있는 모윤숙, 김활란, 박승호, 황신덕, 박순천이 나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수 있는 부인신보를 발행하였다. 대한일보의 판권을 얻고 운영자금은 모금 30만원과 은행융자 1백만원으로 시작하였다. 부인신보는 독촉애부의 중앙과 지부활동 상황, 주요지도인물들의 여성운동에 관한 해설, 선전기사, 가정생활과 관련된 교양정보 등을 줄 다루었다. 박군천이 사장이 되고 최태응, 임옥인, 구상씨 등이 편집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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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2대국회의원으로의 등장과 이승만과의 결별
- 박순천이 품은 독림운동가로서 이승만에 대한 환상은 정치활동 속에서 보이는 이승만의 일관되지 않은 정책과 인책 등 일련의 과정 속에서 깨어져 나갔다.
우선, 1948년 1월 유엔한위 의장 메논박사가 한국에 오자 이승만은 박순천을 비롯해 모윤숙 등 몇몇 여성지도자들에게 특별부탁을 했다. 잘 대접해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우선 실행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지시만 내렸을뿐 그에 따르면 비용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점, 이승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여성의 힘을 강조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부녀활동을 위한 담화조차 없었던 점, 1948년 5.10선거시에는 박순천이 종로갑구로 입후보하였다. 국회의원 등록마감 몇일을 앞두고 돌연 이승만은 '종로갑구 남녀 입후보자들은 이윤영에게 양보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후 박순천이 이런 편파적 처사에 대해 해명을 듣고자 하였으마 오히려 이천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고 추천하였다. 바로 이런 독단적 처우를 강요했다는 점, 초대 국회가 성립된후 한민당을 등한시하고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자신의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포하였던 점, 박순천이 감찰위원이 된 후 얼마 안 있어 조선피혁부정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52트럭 분의 피혁이 행방불명이 되었음을 밝히고 그 책임선상에서 임영신상공장관의 파면결의안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영신상공부장관의 파면결의안이 체결되자 오히려 정인보감찰위원장을 권고 사임시키고 감찰위원회의 기능을 위축시켜 직책조차 분담할 수 없게 하였던점 등 이승만의 실정과 독선은 박순천이 제2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게되는 원인도 되었다. 1950.5.30선거를 통해 제2대국회의원에 당선된지 몇일 안돼 한국전쟁이 터졌다. 정부의 무책임한 피난행각과 한강교 파괴로 남하를 주저한던 박순천을 적치하에 남게 되었다. 서울 수복이후 적치하에서의 박순천의 행적은 국회내에서 계속 문제가 되었다. 1951년 1.15 국회가 다시열리자 박순천은 반이승만활동그룹인 공화구락부에 소속하여 이승만실정에 대한 비판자가 되었다. 특히 1.4후퇴과정에 9만여명의 제2국민병을 굶겨죽거나 병들어 죽게하여 비참한 희생자를 낸 국민방위군사건이 방위군간부들이 쌀과 부식비 등 50억원을 횡령하여 국회내 신정동지회로 정치자금이 유입된 사실을 밝혔다. 또한 대한부인회회원들은 위문반을 편성하여 부산 등지의 수용소안에 있던 방위군들을 위문하였다. 전쟁기간중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등 이승만의 실정에 대해 책임정치구현만이 건전한 정치를 지향할 수 있다는 단정하에 박순천이 소속했던 공화구락부,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국회의원 123명의 서명날인을 통해 내각책임제개헌공작을 추진중에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세력을 국제공산당으로 몰아 체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박순천은 결정적으로 이승만과 결별을 하였다. 재선을 시도하는 이승만은 52년 7월 4일 발췌개헌안을 국회의원들의 기립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다. 이때 박순천은 양병일, 윤담의원과 함께 투표하지 않고 퇴장하였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후 이승만은 '국민회, 청년단, 부인회간부들은 모두 자유당에 가담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박순천은 다른단체들의 결정과는 다르게 자유당에 가담하지 않고 부산에서의 전국대회를 통해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사회사업만 전념하겠다;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이승만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들의 결과로 박순천은 야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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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민주당 활동과 최초의 여성당수
- 이승만과의 결별은 3대의원의 낙선과 진헌식 내무장관이 '박순천이 회장으로 있는 동안에 부인회를 보조해 줄수없다'는 공언에서 알수 있듯이 자금출구의 차단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박순천은 대한부인회의 회장자리를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54년 11월 27일 개헌안 표결에서 135명표를 사사오입이론을 도입해 통과시키자 격분한 범야세력은 61명의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이것을 통해 민주당을 만들었다. 박순천은 이제 야당으로서 민주당에 창립대회에 참여하였다. 55년 9월 18일 민주당창당대회가 열렸다. 이제는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여당과 신익희를 정점으로 하는 야당으로 양분되었다. 이들의 격돌은 56년 5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났다. 이승만은 이기붕과 나오고 민주당은 대통령으로 신익희, 부통령으로 장면이 나왔다. 박순천은 신익희, 장면, 곽상훈, 조병옥과 함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아래 전국유세를 하였다. 그러나 신익희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민주당내의 신 구파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신 구파의 갈등 속에서 박순천은 민주당을 계속적으로 지탱시키는 것에 집착하여 4.19, 5.16의 격변의 시기가 지나고, 62년 12. 31 정쟁법에 풀려난 이후에도 63. 1.3 이상철, 조재천, 홍익표, 김상돈, 김대중 등 30여명이 민주당 재건을 위해 이름을 빌려달라고 해도 선선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1.7 홍익표와 함께 '새당을 만드는데 다리를 놓아 주고는 물러앉겠다'는 박, 홍성명을 내고 이들을 도왔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박순천은 당의 재건을 위해 허정의 국민의당과 합류하여 민주당을 재건하고 최고대표의원이 되었다. 65.3월 한일국교정상화문제로 인해 민주당과 민정당과의 통합하여 민중당이 창당되어 최고대표의원으로 뽑혔다. 민주당의 재건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오히려 그녀를 우유부단한 정치인으로 받들었다. 비록 당수로의 지위에 있었지만 당원을 이끄는 리더라기 보다는 자리에만 있는 허수아비와 같았다. 한일협정조인후에 민중당의원 62명의 전원사표제출문제나 내부에 명정회라는 조직이 생겨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67년 대통령선거를 맞아 야당통합논의가 나왔지만 박순천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민주당 유진오, 신한당 윤보선, 총재에 이범석, 백낙준만의 4자회담을 통해 67.2.7 신민당을 만들어 당수에 유진오, 대통령후보에 윤보선을 선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의에 의해 박순천은 당수자리를 내주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