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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묵상글 들 ( 대림 제2주일. - 재구성한 세례자 요한의 설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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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태오 3,1-12 (세례자 요한의 설교)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재구성한 세례자 요한의 설교>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벗들이여!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벗들이여!
회개하십시오!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제멋대로 가던 길에서 돌아서 하느님께로 향하십시오.
제 살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을 걸으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께서(5,48; 6,9: 7,21) 땅을 다스리러 오십니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예레 15,19)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십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한걸음에 하느님께 달려가십시오.
인간의 죄악과 불의로 죽어버린 고사목(枯死木) 그루터기의 죽은 뿌리에서 피어나는,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 ‘지식’과 ‘경외’의 영을 가득 머금은 햇순과 새싹(이사 11,1-2 참조)으로 주님께서 다가오시니, 지금 당장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십시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는”(이사 11,3) 분께서 오시니, 화려하게 덧칠한 부패의 옷을 미련 없이 찢어버리고, 회개의 옷, 청렴의 옷, 정의의 옷, “힘든 일을 하거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 철저히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 입는 옷”, 곧 “세련되지도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낙타 털 옷”(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1, 마태오 복음서 1-13장, 분도출판사, 105쪽)을 입으십시오.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는”(이사 11,3) 분께서 오시니, 독을 품은 감언이설과 진실을 왜곡하는 추잡한 변명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저 ‘사람이 되시어 여러분 가운데 오시는 말씀’(요한 1,14 참조)을 담은 소리가 되십시오. 그리하여 큰 소리로 외치십시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 40,3) 라고.
그분은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러”(이사 11,4) 오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불의한 권력과 추악한 탐욕이 나뒹구는 환락의 도시가 아니라, 짐짓 거룩함과 고상함의 높은 장막으로 두른 위선의 성전이 아니라, 힘없는 이들 근근이 살아가는 척박한 광야로, 빼앗긴 이들 내쫓긴 변두리로, 가난한 이들 한숨소리 그칠 줄 모르는 거친 땅으로 나가십시오.
그분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니”(이사 11,4), 정녕 그분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불의와 위선을 일삼는 권력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서십시오. 두려움 없이 꾸짖으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라고. 정녕 그분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선을 행하다 의롭게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하십시오. 아니, 여러분이 그렇게 죽으십시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벗들이여!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벗들이여!
내가 앞장서가니 나를 따르십시오.
내가 기꺼이 내 뒤에 오실 분이 밟고 지나갈 길이 되리니
벗들 역시 기쁘게 그분의 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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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림 제2주일-Fantastic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우리. 2022.12.04 03:33
# 내용이 올라오질 아니하여 아래 2021년 분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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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5 03:25
대림 제2주일-마음의 문을 열어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길을 곧게 마련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퍼뜩 드는 느낌은 당황과 난감입니다.
우선,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말부터
이미 와 계신데 무슨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것인지,
다음으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도
주님께서 길이시고 주님의 길은 주님이 내시는 것이지
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어떻게 낼 수 있다는 것인지.
그러나 차분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 노래 하나가 떠오르고
다음으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노래는 우리 성가 173번, "Veni Jesu, Amor Mi"인데
직역을 하면 '나의 사랑이신 예수님, 오소서'라는 뜻이지만
우리말로는 '사랑이신 예수님, 내 마음에 오소서'라고 의역하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동네까지,
아니, 우리 집 문앞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의 문 앞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집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은 우리가 열어드리지 않으면
특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곧 주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우리가 스스로 열도록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자유를 존중하신다면
우리도 주님의 그 숭고한 사랑을 존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종종 그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니 문제인 거지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 숭고한 사랑을 감히 개떡같이 여기게 합니까?
그제 얘기했듯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만드는 교만이고,
교만에서 비롯된 지독한 자기애自己愛입니다.
교만은 자기밖에는 아무도 사랑하지도 중요하지도 않고
그래서 주님을 포함한 다른 누구의 사랑도 우습게 여깁니다.
또 제 잘난 맛에 살기에 주님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을 뿐 아니라
주인 노릇하러 오시는 주님은 거북하고 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높은 산이 낮아지라는 것은
교만의 높은 콧대를 꺾으라는 말씀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면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교만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두려움이나 죄책감이나 비하감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을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보다 자기 안으로 숨어들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느님 사랑을 왜곡하는 것도 문젭니다.
사랑의 주님이 아니라 벌 주시는 주님이라면 오시는 것이 두렵겠지요.
주님이 오신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둘러 숨어버리겠지요.
그러니 이쪽과 저쪽으로 위로 아래로 굽어진 마음을 펴는 것이
이 대림절에 우리가 해야 할 준비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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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마음의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회개의 여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후회하다’, ‘보속하다’ 또는 ‘생각을 바꾸다’로 해석될 수 있는 회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즉 회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의 선포는 하느님의 행업에 자신을 여는 것이며 이웃에게 개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인간과 만나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신앙체험의 첫번째 과정입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양심의 가려진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 및 현재의 모든 잘못, 습관, 감정 및 행동 그리고 모든 죄를 주의 깊게 탐색하고 검토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낸 잘못이 무엇이든 참된 슬픔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침묵은 회개의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자신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진보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 모든 친교가 단절된 곳, 아무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으로 철저히 고립되어 극심하게 외로운 곳 바로 그곳에서 회개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표현한데로 회개의 시작은 감각의 밤의 시작이며 회개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좀더 깊이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 삶의 뜻을 더욱 깊이 추구하고 묵상과 기도와 침묵의 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 감정에 사로잡힌 무질서한 상태를 초월하여 보다 더 하느님 사랑에 잠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이 믿음으로써 정화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특히 죄와 자기집착의 문제를 극복하는 단계입니다. 마음의 광야이자 사막이며 골짜기 같은 죄와 자기집착에 벗어나기 위한 버나드 로너간이 말한 3가지 차원의 회개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지성적인 회개입니다. 종교적 회개에 의하여 무한한 사랑을 하게 되며 윤리적 회개에 의하여 자신의 가치가 변화되고 지성적 회개에 의하여 생각의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한마디로 초월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생각을 바뀌게 합니다.
바로 이런 통합적 회개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함이 죄임을 알게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고 자기집착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이것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분의 오심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임을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알코이 (Alcoy) 의 아기 예수
스페인 -1568년
에스코리알(Eskorial) 수도원을 설립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왕 필립 2세에게 성체의 도난 사실을 얄리기 위하여, 사람들은 심지어 마드리드로 전령 기병을 보내기도 했다. 믿음이 깊은 왕은 그 슬픈 소식에 대해서 매우 걱정을 하며 그의 성에서 공식적으로 조기를 달도록 지시했다.
알코이 사람들은 밤이나 낮이나 조금도 쉬지 않았고, 다른 모든 일은 뒤로 미루었다. 수공업자와 농부들은 도난당한 거룩한 성체를 찾는 일을 그들로서는 가장 급박한 크리스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 언덕, 그리고 들판까지도 수색되었고, 도처에서 끊임없이 기도가 올려졌다.
쟝 프레가 그의 염색물들과 수레를 끄는 짐승들을 넣어두었던 마구간 위쪽에서 살고 았던 마리아 미랄레(Maria Miralles) 라는 이름의 한 미망인은 흐느끼면서 사랑스러운 아기예수의 입상 (立像) 앞에 엎드렸다. 이 입상은 옛날에 믿음이 깊은 한 예술가가 그의 조상들을 위해서 조각해 놓은 것이었다. 이 아기예수는 그녀 자신의 청원뿐만 아니라 다른 집 사람들과 이웃사람들의 소원도 들어 주셨다. 이 입상은 섬지어 기근 흑사병, 전쟁과 같은 일반적인 재난의 시기에는, 때때로 공개적인 장소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서 은총과 자비를 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기예수께서는 소원을 들어 주셨다. 성체를 도난당한 것은 알코이 마을 전체에 있어서 가혹한 시련이었기 때문에, 미랄레 여인도 지금 믿음에 가득 차서, 그 은총이 가득한 입상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울면서 간청했다.
“오, 자애로우신 아기 예수여, 우리는 지금까지 찾아보았지만 허사였읍니다. 그 거룩한 성체가 더 이상 도둑들의 수중에 있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그리고 당신께 간청하오니 성체가 숨겨져 있는 장소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소서!"(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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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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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마태 3,11)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1주일>에 ‘그분이 오시니, 기뻐하고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 온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라 하십니다. 곧 그분을 맞이하는데 합당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분”(이사 1,2)으로 소개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신 그분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로마 15,8)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입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입입니다. 자신을 주변으로 밀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곧 “종” 될 자격마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깨달은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셋째 증언>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대림 제2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 구원을 보리라.”
이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준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입니다.
이를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걷고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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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성으로 살아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숨, 영을 불어넣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능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성으로 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갖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영성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은총이 충만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 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새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0).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십니까?” 묻습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면 나는 쏙 빼놓고 다른 사람만이 죄인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비를 청하면 되는 것인데 왜 그리 힘이든지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 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분노, 적개심...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성령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 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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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나왔지만 곰은 끝까지 참았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책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입니다. 하늘세계에서 사는 환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세계를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되신 것과 비슷합니다.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호랑이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은 먹기 힘들었습니다. 잡식동물이 곰에게 쑥과 마늘은 먹을 만했습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호랑이에게 캄캄한 동굴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곰에게 동굴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집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은 단군신화의 세상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환웅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였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시천주(人乃天侍天主)의 동학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의 노예해방에 서명한지 100년이 되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는 공평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에 ‘I have dream'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울리게 할 때 하느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인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환웅의 꿈과 마틴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reams come true!" 20년 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은 기적과 같이 16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환인의 꿈, 마틴루터 킹의 꿈,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꿈은 혼자서 간직하면 꿈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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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습니다. 전화할 수도 없고, 편지를 써도 수신이 가능한 주소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부모님께서는 침묵 중이셨고, 꿈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작정 운전해서 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산소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무기력한 마음마저 더해져 우울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비까지 맞으니 추워서 도저히 산소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미사 가방을 챙기고, 부모님께 인사한 뒤에 차 있는 곳까지 뛰었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산소까지 차를 끌고 갈 수 없었기에, 한참을 비 맞으며 뛰어야만 했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순간, 우울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아주 멋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저를 위로해주고 힘내라며 옆에서 가수가 불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나가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주문받습니다. 비 맞은 제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들이 먹는 계란 후라이가 남았다면서 먹으라며 주십니다. 식당 주인의 배려에 감동하며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외로움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생겼음을 비 맞으며 뛰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노래를 듣고, 계란 후라이를 먹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음을 그래서 외롭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하는 주님과 나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으쌰~”를 외치며 힘차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알려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무기력함과 함께 희망 없는 삶이라며 절망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또 세례자 요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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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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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영혼의 쉼터 사막으로 떠나십시오
‘사막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그가 먹는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지금과 같은 문명시대에 선지자 요한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이 복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스스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고 했는데, 그 외침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줍니다. ‘사막’은 자신만의 영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사막으로 가라’는 것은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소음과 매연으로 점점 오염되고 있는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일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외양은 화려해졌지만 그들의 내면은 점점 낡고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바쁜 세상을 쫒아가느라 한 순간도 자신의 내면, 자신의 마음을 돌아 볼 시간이 없습니다.
‘사막으로 가라’는 것은 세상의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소비 문화가 발달 할수록 자원을 훼손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자원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산림이 훼손되고 생태계가 파괴되어 동ㆍ식물들은 멸종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선지자 요한은, 소비 문명의 산물인 환경파괴에 대한 인간의 각성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요한의 메시지는 사회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건강하게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사막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조용한 공간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바쁜 생활은 자신의 내면과 단절하게 만듭니다.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막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따라야만 합니다. 영혼의 사막으로 들어갈 때만이 비로소 자신을 만날 수 있고 깊은 영혼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영혼 깊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영적인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가난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금식, 절식을 해야 했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먹거리가 풍부해지자 체중과 콜레스테롤이 증가하고, 고혈압, 당뇨병을 예방하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는 선지자 요한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검소한 식사, 금식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빈곤한 사람들과의 사회적 도덕적 연대감은 물론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먹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면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먹고싶은 본능을 조절할 수 있다면 탐욕과 증오, 망상과 같은 인간의 본성도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일이며, 이 길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고 낙오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성인들께서는 복음에 부합되는 자신이 되기 위해 언제나 회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늘나라에 들어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진실된 회개는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입니다. 주저앉아 우는 것으로 회개가 되지는 않습니다. 회개는 지금까지의 삶을 바꾸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니네베 사람들처럼 옷을 찢고 재를 바른 채 재투성이에 올라앉아 단식을 하며 성경과 기도만을 하는 완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바오로성인과 같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말과 칼은 물론 그 동안의 삶을 송두리째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캐오처럼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 바로 하지 않고, 시간이 있을 때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선지자 요한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사막과 금욕, 회개는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수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밝고 열정적인 불꽃’, 그분의 열정은 우리를 주님께 다가가게 하며 그 불꽃은 영광의 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그 불꽃은 어두움을 없애고 여명을 밝힙니다. 그 여명은 사랑의 불꽃을 피워 정결한 마음을 밝힙니다. 그 여명은 바로 정의의 태양이며, 지금 세대에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주님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2. 간절함과 완전한 회개,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회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3. 절제와 회개, 기도를 통한 영적인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선지자 요한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영혼의 휴식지 사막을 찾으십시오. 금욕과 회개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천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수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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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삽시다
-꿈. 공부, 찬양, 회개-
오늘은 대림2주일이자 제41회 인권 주일이며 제12회 사회교리 주간 첫날입니다. 주님 오실 날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둘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오늘 인권주일과 사회교리 주간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면서 제대로 인권을 누리며 살게 하기위한 구체적 처방이 사회교리입니다.
“사회교리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도록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현실을 관찰하고, 복음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성찰하며, 성찰한 바를 구체적인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대로 인권신장과 유지를 위한 사회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공부와 필히 함께 가야할 사회교리 공부입입니다.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후렴의 시편 기도가 이런 우리의 열망을 표현합니다.
“정의가 꽃피는 그의 성대에 영원히 평화넘치리이다.”
정의가 꽃피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은 예언자들은 물론 우리 인류의 가장 깊은 염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도처에서 정의와 평화가 유린되는 세상을 목격하곤 합니다. 어제 국회앞에 모인 민주노총 6000명의 노동자 대회의 다음 구호를 통해 정의와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 지 깨닫습니다.
“죽일테면 죽여라. 어차피 이렇게는 못산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은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청년 자살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제하에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들은 2778명이었고 그중 20대 사망자들은 56.8%인 1579명 하루 4명꼴이며 그 추세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합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입니다.
“자살예방은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삶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역할이지만, 사람은 삶의 일정 조건들이 충족돼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예방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자살 원인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중요하다. 인간은 ‘죽고 싶은’ 충동보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이만 있어도 자살 충동은 크게 줄 수 있다.”
이런 작금의 어둔 현실 앞에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절박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리하여 대림2주일 강론 제목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정했고 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꿈꾸라!”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삶,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삶이요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꿈이 희망이 없으면 곧장 무너집니다. 꿈이 없는 세대는 길을 잃은 세대입니다.
꿈중의 꿈이 궁극의 꿈이 하늘나라의 꿈, 평화의 꿈입니다. 예수님은 물로 성서의 모든 예언자들이 하느님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제시하는 평화의 꿈, 유토피아의 꿈도 우리를 한껏 고무하며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대림시기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이런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고 정의롭고 조화로운 세상일 것입니다.
“늑대가 새끼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무적인 꿈이요 비전인지요! 그대로 성탄 밤미사 때 제1독서에서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와 조화의 세상이 우리의 궁극의 꿈입니다. 이런 평화의 꿈이 있어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안주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한 품위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꿈을, 희망을 잃어가는 오늘날 세대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생생해야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꿈을, 희망을 키워주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 성경공부, 말씀공부요, 졸업이 없는 평생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인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처방인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빛이요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 갈수록 자유로운 삶에 하늘나라의 꿈도 희망도 늘 생생히 지닐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을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성경공부는 꾸준해야 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권하는 바, 매일미사책을 통한 하느님 공부, 말씀공부입니다.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에 간직하며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활화, 말씀의 일상화, 말씀의 습관화에 매일미사책을 통한 공부의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매일미사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 이렇게 부단히 말씀을 통해 영혼을 튼튼히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찬양하라!”입니다.
찬미, 찬양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의 기쁨과 행복도 하느님 찬양에 있습니다. 하느님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찬양의 기도와 삶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제 행복기도중 다음 대목에서도 찬양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주님,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바오로 사도 역시 찬양의 기도를 바칠 것은 권고합니다. 제2독서 후반부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찬양과 감사의 삶과 기도가 샘솟는 영적 삶의 원천이 됩니다. 하늘나라의 꿈도, 말씀공부도 하느님 찬미와 찬양의 기도와 삶을 통해 비로소 실현됩니다. 부단한 찬양의 삶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넷째, “회개하라!”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가 평화의 꿈을 보여줬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씀공부와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회개를 강조합니다. 대림1주일의 주제가 “깨어있어라” 였다면 대림2주일의 주제는 “회개하여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우선 선포한 것도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인생 광야 여정의 순례자들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이어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촉구합니다. 마음으로만 회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회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
하느님의 심판 앞에 일체의 기득권은 무용지물임을 천명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당신 뒤에 오실 예수님께서도 가차없는 심판을 하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과연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알곡의 삶인지, 혹은 회개가 없는 쭉정이의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의 삶이요 알곡의 삶입니다. 구체적 회개의 실천으로 바오로는 서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회개의 은총입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도와주십니다. 이샤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이런 성령 충만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의 은총이요, 우리 또한 성령 칠은을 받습니다. 또한 이런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끊임없는 구체적 회개의 실천으로 이끕니다. 참으로 이런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1.늘 하늘 나라를 꿈꾸는 삶, 2.늘 말씀 공부에 충실한삶, 3.늘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 4.늘 회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성령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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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대림 제2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제2주간은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불을 밝힌 대림초 두 개가 주님께서 좀 더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 복음(마태3,1-12)에서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고 있는 '회개의 세례'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권 주일은 'Imago Dei'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이러한 인권이 잘 보호받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교리'는 이에 대한 '교회의 구체적인 가르침'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두 개의 교리'가 있습니다.
곧 '믿을 교리와 지킬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교리이자, 하나의 사랑(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회교리'는 예수님 말씀에 근거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마태7,21)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마태25,31-46)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29-37)' 등등
'사회 교리란?'
인간노동, 경제생활, 정치공동체, 환경보호 등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고 있는 회개의 세례는 분리되어 있는 두 교리(믿을 교리와 지킬 교리)를 하나가 되게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비참한 이들, 소외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 특히 부와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모든 형제들' Fratelli Tutti, 285항)
모두의 구원인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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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 매일미사 12. 35쪽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다.
-오늘 전례-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한국 교회가 정한 인권 주일이고 사회 교리 주간의 시작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사회를 보는 올바른 눈을 가지게 하는 사회 교리를 배우고 익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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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허가 판자촌은 집 아닌가요" 겨울이 두려운 '구룡마을' 사람들
한국일보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 어제 오후 8:00
“저짝(저쪽) 창문 틈새로 바람이 밤새 들어와 잠도 못 자.”
"무허가 판자촌은 집 아닌가요" 겨울이 두려운 '구룡마을' 사람들© 제공: 한국일보
올해 첫 한파경보가 발령된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 한영애씨 집 처마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여름 폭우 때 망가진 처마를 제대로 수리하지 못해 한씨는 칼바람을 맞으며 겨울을 나야 한다. 강지수 기자
전국 대부분 지역에 올겨울 첫 한파경보가 발령된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 한영애(76)씨 집은 그야말로 ‘냉골’이었다. 말만 집이지 수은주가 영하 7도를 가리키는 바깥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올 8월에는 폭우로 한쪽 벽까지 무너졌지만, 임시방편으로 덧댄 나무판자는 칼바람을 조금도 막아주지 못한다.
'장판 셀프 수리'가 월동 전부
"무허가 판자촌은 집 아닌가요" 겨울이 두려운 '구룡마을' 사람들© 제공: 한국일보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 조경일씨가 집 앞 연탄보일러를 우산으로 덮어놨다. 처마에 새는 비를 막으려 해놓은 임시 조치다. 강지수 기자
구룡마을은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 무허가 판자촌이다. 몇 해 전부터 개발 붐에 밀려 언젠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지만, 가난한 주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수마(水磨), 겨울이면 강추위를 견뎌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강남구와 구룡마을주민자치회에 따르면, 구룡마을에 사는 673가구 중 기초생활수급자(117가구)와 차상위 계층(53가구)은 170가구나 된다.
올해는 특히 겨울나기가 버겁다. 여름 폭우 때 파손된 집을 수리하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와서다. 당시 구룡마을에서 400가구가 수해를 입었는데 20% 넘는 85가구가 아직도 복구를 마치지 못했다. 주민들은 “2구(연탄구멍 2개)짜리 연탄보일러가 한쪽만 작동해 추위에 덜덜 떨고 있다” “곰팡이 슨 벽지와 벽 틈새로 비바람이 샌다” 등 너도나도 고충을 털어놨다.
"무허가 판자촌은 집 아닌가요" 겨울이 두려운 '구룡마을' 사람들© 제공: 한국일보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 박상애씨가 비바람을 막으려 집 지붕 위에 장판, 매트를 올려놨다. 강지수 기자
수해 복구 작업이 더딘 이유는 있다. 강남구청이 피해지원금과 집수리비로 건넨 돈은 가구당 최대 420만 원. 하지만 주민들은 치솟은 인건비와 재료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박상애(84)씨는 집 지붕이 다 망가져 방한용 천막을 설치해야 하는데, 인부 일당이 30만 원이라는 말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직접 주워 온 장판과 매트로 얼기설기 지붕을 메웠다. 박씨는 “바람이 살짝 불어도 장판이 죄다 날아가 하루에도 몇 번씩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지붕을 오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조경일(83)씨 역시 “장판 깔고 무너진 벽을 수리하니 지원금이 금세 동났다”고 한숨을 쉬었다. 연탄보일러가 자리한 처마도 누수가 심하지만 큰 우산으로 덮어놓은 게 고작이다.
"무허가 주택은 피해 보상 없어"
"무허가 판자촌은 집 아닌가요" 겨울이 두려운 '구룡마을' 사람들© 제공: 한국일보
올해 8월 집중호우로 무너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들 가옥. 주민 제공
구룡마을 집들은 무허가라 건축물이 아닌 ‘공작물’로 등록돼 있다. 그래서 재해 파손에 따른 보상금도 못 받는다. 축사 같은 공작물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시설로 분류돼 보상에서 제외된 탓이다. 원래 폭우 피해 가옥은 지자체 실사를 거쳐 침수(200만 원)→반파(800만 원)→완파(1,600만 원) 순으로 차등 보상된다. 구룡마을에도 반파ㆍ완파된 주택이 9가구 있다. 폭우로 집이 절반 넘게 망가진 주민 정모(80)씨는 “‘소나 돼지우리에 산다’는 이유로 보상해줄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사전이 이런데도 강남구 관계자는 2일 “침수피해 가구에 보상금과 수리비를 일괄 지급했다”면서 추가 지원은 없다고 못 박았다.
"무허가 판자촌은 집 아닌가요" 겨울이 두려운 '구룡마을' 사람들© 제공: 한국일보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입구에 무허가 주택을 건축물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강지수 기자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주거빈곤층에 한해서라도 현실적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주거시설의 합법 여부를 떠나 주택 자체가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취약계층의 기본권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구룡마을을 찾은 날 서울시는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공공임대주택 이주비ㆍ이사비 지원 내용이 담긴 ‘촘촘한 주거안전망 확충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다수 주민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한 주민은 “개인 돈을 들여 집을 고치니 옮기라고 뒷북을 친다”면서 이사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다른 주민도 “시장이나 정권이 바뀌면 또 엎어질 공약(空約) 아니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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