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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 제121권
비명(碑銘)
1.기자묘 비명 병서 (箕子廟碑銘 幷序)
2.유명조선 국학신묘 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學新廟碑銘 幷序)
3.묘엄존자 탑명(妙嚴尊者塔銘)
4.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5.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성녕대군 변한소경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幷序)
6.유명조선국 증 충근 익대 신덕 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義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 幷序)
7.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숭록대부 밀산군 시 공효 박공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祿大夫密山君諡恭孝朴公神道碑銘 幷序)
8.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감춘추관사 세자부 길창부원군 시 익평공 권공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世子傅吉昌府院君諡翼平公權公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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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1.기자묘 비명 병서 (箕子廟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선덕(宣德) 3년 무신년 여름 4월 갑자일에, 국왕 전하가 전지(傳旨)를 내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해 이기고, 은나라의 태사(太師)를 우리나라에 봉하여 그가 주나라에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고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우리나라가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중국과 같이 비길 수 있음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이 되는데, 이는 오직 기자(箕子)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돌아 보건대, 그의 사당은 좁고 누추하여 앙모하기에 맞지 않다. 우리 부왕(父王)께서 일찍이 중수(重修)하기를 명하였고, 내가 그 뜻을 받들어 독려하여 이제 낙성(落成)을 고(告)하였으니, 마땅히 돌에 새겨서 오래도록 후세에 보여야 하겠다. 사신(史臣)은 그 글을 지으라.” 하였다. 신(臣) 계량(季良)은 명을 받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신은 그윽히 생각하오니, 공자(孔子)는 문왕(文王)과 기자(箕子)를 《역경》 〈명이괘(明夷卦)〉의 상사(象辭)에서 열거하였으며, 또 삼인(三仁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으로 일컬었으니, 기자의 덕은 너무 커서 칭찬할 수도 없다. 옛날 우(禹) 임금이 홍수와 토지를 다스릴 때 하늘이 홍범(洪範)을 내려주셔서 떳떳한 인륜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그 말은 일찍이 우(虞)나라나 하(夏)나라의 글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고, 천여 년을 지난 기자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설되었다. 그때에 기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진술하지 않았다면 낙서(洛書)의 하늘과 사람에 관계된 학문을 후인들이 어디에서 알았겠는가. 기자가 사도(斯道)에 공을 세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기자라는 이는 무왕의 스승이다. 무왕이 그를 다른 곳에 봉하지 아니하고 우리 조선에 봉하였으므로, 조선의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친히 기자의 교화를 받아, 군자는 큰 도(道)의 요점을 얻어 들을 수 있었고, 백성들은 지극한 다스림의 은택을 입을 수 있어서, 그 교화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하늘이 우리나라를 후하게 하여 어질고 착한 이를 주어 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인력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전(井田)의 제도와 팔조(八條)의 법이 밝기가 해와 별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천 년 뒤에서도 그 당시에 있던 것과 같아서 공손히 우러러볼 때 저절로 사모함을 마지못하는 바가 있다. 우리 공정왕(恭定王)께서는 총명하여 고사(古事)를 상고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즐겨 보았으며,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지혜롭고 어진 자질로써 성인의 학문에 밝아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도(道)에 대하여 정신으로 회통(會通)하고 마음에 융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정왕(恭定王)은 시작하시고, 우리 전하는 이어 닦아서 기자에게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는 예를 이룬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실로 전대의 군왕들이 짝할 수 없는 바이다. 경사(卿士)와 서민들이 서로 이끌고 일어나서 이에 따르고 이를 행하여 천자의 밝은 빛에 가까워져서 그 펴서 주신 복에 참여함을 얻은 것이 의심이 없으니, 아, 장하시도다.
약간의 집을 짓고 거기에 소속(所屬)된 전지(田地)를 두어서 자성(粢盛)을 제공하게 하고, 복호(復戶)시켜 청소에 응하게 하였으며, 부윤(府尹)에게 명하여 향사(享祀)를 삼가 받들게 하였으니, 묘궁(廟宮)의 일은 대체로 유감이 없을 것이다. 신 계량(季良)은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올리도다.
명에 이르기를,
아, 기자여 / 嗚呼箕子
문왕의 무리로다 / 文王爲徒
진실하도다 홍범이여 / 允也洪範
상제의 훈계를 펼쳤네 / 帝訓是敷
은나라 스승만이 아니라 / 匪直師殷
실로 무왕의 스승이었네 / 實師武王
은나라는 그를 버려 멸망하였고 / 殷棄以亡
주나라 그를 찾아 창성하였네 / 周訪以昌
위대하다 천하의 / 大哉天下
안전과 위태함을 그 몸에 매었는데 / 身佩安危
거두어 동쪽으로 오셨음은 / 歛而東來
하늘이 우리를 편애함일세 / 天其我私
가르치고 다스림에 / 以敎以治
여덟 조목으로 법을 삼았으니 / 八條其章
우매한 자 뉘 아니 밝아지며 / 孰愚不明
유약한 자 뉘 아니 강해졌으랴 / 孰柔不剛
《한서》에 칭탄하기를 / 漢書稱美
길에서는 흘린 물건을 줍지 않는다 하였고 / 道不拾遺
동이로 하여금 중화 같게 하였다고 / 俾夷爲華
당나라에 비가 서 있네 / 唐有其碑
열심히 힘쓰시는 우리 임금께서 / 亹亹我王
끊긴 학문 빛나게 이었네 / 光紹絶學
마음은 그 이치에 계합하고 / 心契其理
몸으로는 그의 법을 실천하시도다 / 躬行其法
아버지 지으시고 아드님 이으시니 / 旣作乃迷
사당집 의젓하여 날아갈 듯 솟았네 / 祠宇翼翼
높다란 그 마루에 / 有峙其堂
기자의 신주 봉안하고 / 神御攸寧
세시로 향사 올려 / 歲時享祀
공경하고 치성하네 / 克敬克誠
아, 소신은 / 嗟嗟小臣
끼친 글에 잠심했더니 / 潛心遺經
이제 왕명 받들고 / 今承王命
머리 조아려 명을 쓰노니 / 稽首撰銘
성대한 덕의 광채 / 盛德之光
억만년 길이 빛나리 / 彌萬億齡
하였다.
2.유명조선 국학신묘 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學新廟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영락(永樂) 7년 기축년 가을 9월에, 국왕 전하(國王殿下)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여 이렇게 말하셨다. “우리 선고(先考)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일찍이 국가를 창건하고 한양에 수도를 정한 다음 급히 문묘(文廟)와 학궁(學宮)을 세운 것은 선성(先聖)을 존숭하고 문교(文敎)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큰 왕업을 받들어 이에 이루어진 법을 좇아서 묘궁(廟宮)을 중수하게 하였는데, 이미 준공하였다. 학관(學官) 최함(崔諴) 등이 돌에 글로 써서 장래에 드리워 보기를 청하였으니, 네가 이를 쓰라.” 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황공하여 물러나와 그 유래를 상고하였다.
갑술년에 태조가 수도를 세우니, 그 종묘 사직과 조정과 시장, 성곽과 궁실의 제도가 다 그 마땅한 바를 이루었다. 즉시 문묘와 학궁의 경영을 계획하여 왕도의 동북쪽 구석에 터를 잡으니, 산은 우뚝하고 흙은 기름지며 물은 고리처럼 돌아 흐르고, 그 위치는 남쪽을 향하였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신(臣)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공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공장(工匠)을 모으고 재목을 장만하여 정축년 3월에 경영을 시작하였고, 무인년 7월에 일을 완성하였다. 선성(先聖)과 십철(十哲)은 높은 집에 모시고, 종사(從祀)하는 이들은 곁채에 배정하였다. 학궁은 문묘의 뒷편에 있고 중간에는 명륜당이 있다. 좌우편에 협실(夾室)이 있고, 길다란 낭무(廊廡)를 양쪽 협실의 남쪽에 붙여 지었다. 왼쪽 협문의 동쪽에 마루가 있고 행랑이 있다. 스승과 생도의 위치와 정록청(正錄廳)의 처소 등이 한 가지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집의 규모는 크고 시원하게 트였으며 얽고 쌓은 것은 견고하고 질기다. 모든 방옥(房屋)으로 된 것을 크거나 작거나 간수(間數)로 계산하면 96칸이나 된다. 밭을 두어서 자성(粢盛)을 제공하고 생도의 늠급(廩給)을 충당하게 하였으며, 부리는 자에게 복호(復戶)하여 청소(淸掃)에 응하고 심부름에 넉넉하게 하였다. 문묘와 학궁의 일은 완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경진년 2월에 불타버렸다.
그 해 11월에 전하가 송경(松京)에서 즉위(卽位)하였다. 학궁에 나아가 선성께 전알하고 장자를 학궁에 취학하라고 명하였다. 을유년에 환도(還都)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친히 치전(致奠)하였다. 3년이 지난 뒤 정해년 정월에 문묘의 옛터에 신축할 것을 명령하였다. 성산군(星山君) 신(臣) 이직(李稷)과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惣制) 신(臣) 박자청(朴子靑)이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독려해 살피고, 마음으로 계획하며 손으로 지시하여 공장(工匠)과 공장의 우두머리를 권려하니, 4개월 만에 문묘가 낙성되었다. 높고 깊고 단아하고 커서 옛 것에 비하여 더 좋았다. 신주(神廚)를 묘(廟)의 서쪽에 만들었으며, 동문과 서문을 동서장(東西墻)의 아래에 만들었다. 전지와 노비를 더 주니, 밭은 만여 묘(萬餘畝)에 이르렀고, 노비는 3백 명을 세게 되었다.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 신 하륜(河崙)의 헌의(獻議)를 들어 증자(曾子)와 안자(顔子) 두 공을 배향위(配享位)로 올리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의 자리에 올리니, 묘궁(廟宮)의 제도는 더욱 유감이 없게 되었다.
신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성인의 도는 커서 칭찬할 수도 없다. 비록 억지로 말하는 바 있을지라도 그것은 천지나 일월을 그리는 일과 비슷한 것이 되지 않는 자는 거의 드물다.
우리 공부자(孔夫子)는 주(周)나라의 말년에 탄생하시어 여러 성인들을 집대성하여 절충하고 모든 왕자(王者)의 큰 법을 만들어서 가르침을 드리웠으니, 공(功)은 교화의 처음에 지극하였으며, 덕택은 다함이 없이 흘러간다. 인간이 생긴 이래로 그 보다 더 성대한 이는 없다. 재여(宰予)가 말한 ‘공자는 요순(堯舜)보다 더 어질다.’ 한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당(唐)나라 때부터 그 이래로 하늘에 즈음하며 땅에 서리어 문묘(文廟)의 모습이 서로 바라다 보이며, 높여 향사함이 어그러짐이 없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풍속은 예의를 숭상하고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에 심복하여 떳떳한 인륜이 펴지고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의 갖춤이 중국에 필적하여 우리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살고 싶어한 뜻이 있었던 나라였다. 그러니 문묘와 학궁을 경영해 세우고 문교를 일으켜 존중함이 처음부터 다른 나라에 비할 바 아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좇아서 큰 업(業)을 초창(草創)하여 문득 우리나라를 소유하고, 수도를 정한 처음에 즉시 성현의 제사를 숭상하며 유술(儒術)을 일으키는 것을 먼저하였다. 이는 그의 덕을 존중하고 도를 즐겨하는 정성이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다스림을 낳는 근원과 급히 하여야 할 당면의 임무에 우뚝히 뛰어난 견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손을 위한 계책을 남김이 넉넉함을 드리워서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고 나라의 명맥을 장구하게 한 바 있다. 아, 지극하도다. 전하께서는 어질고 효도스럽고 겸손하고 공경하며, 강장(剛壯)하고 건전하며 밝고 지혜스러워서 크게 선왕의 업을 이으시고, 정사하시는 여가에 경전과 사서(史書)를 즐겨 보아 매양 밤중이 될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여 격물 치지(格物致知),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궁극히 하며, 가져서 지키고 채워서 이루는 도를 극진하게 하시니, 이러한 임금은 전고(前古)에 찾아보아도 대체로 전연 없거나 겨우 있거나 할 뿐인 것이다.
지금은 세도가 바야흐로 형통하고 문화가 밝게 베풀어져서 이시에 훈친(勳親)과 대신, 백관과 여러 관부(官府)에서부터 숙위(宿衛)하는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마음 두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우리 태조가 문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켜 인재를 양육하였으며, 우리 전하가 전왕(前王)의 업을 넓히고 크게 만들어서 몸소 위에서 실천하여 많은 선비들을 고무하고 이 백성들을 새롭게 만드신 것이, 그렇게 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학업을 익히는 학궁이 있고, 제사를 받드는 문묘(文廟)가 있다. 주선하고 오르내리며 공손히 우러러 대하고, 보고 느끼고 개발하며 부지런히 힘써서, 마치 문을 거쳐서 마루에 오르고 마루에 올라서 그 방에 들어가기를 찾는 것처럼 차례로 덕을 이루고 재기(材器)를 달성하여,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자가 잇달아 나온다면, 점차로 전진하여 삼대(三代) 때에 인재(人材)의 일어남이 성대하였던 것과 같은 상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다만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꿔서 한때만을 환하게 빛내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실로 우리 조선의 종묘 사직에 대한 만대의 복이 될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아, 거룩하신 선성 문선왕이시여 / 於穆宣聖
때에 응해 탄생하시어 / 應時而生
복희에서 주까지를 / 包羲迄周
집대성 하시었네 / 集厥大成
생민이 있은 뒤로 / 自生民來
뉘 능히 그렇게 크고 성하랴 / 孰盛與京
빛나도다. 그를 높여 제사하는 사당이 / 赫哉崇祀
온 천하에 고루 퍼져 있네 / 周于普天
더구나 기자가 봉해진 나라는 / 矧曰箕封
예의를 우선하여 / 禮義惟先
빈객에 읍양하고 조두 벌려 제사함이 / 揖讓俎豆
옛부터 좋은 풍속이 그러하였다네 / 從古則然
하늘이 내신 태조께서는 / 天錫太祖
신성하고 문무겸전하여 / 神聖武文
상제의 명을 밝게 받고 / 昭受帝命
대훈업 이루었네 / 克集大勳
의젓하고 성스러운 나라의 새 수도를 / 翼翼神都
한양의 언덕 위에 자리잡아 정하시고 / 惟漢之原
학궁을 세웠으니 / 迺經學宮
성묘가 그 가운데 있다네 / 聖廟在中
치전하고 천신하는 제례의식 가르치니 / 奠薦講肄
많은 선비 그림자처럼 따라 모였네 / 多士景從
밝고 밝은 우리 임금께서 / 明明我王
선왕의 업을 이어받고 공을 더욱 보태시니 / 纘緖增功
성학을 계속해서 밝힌 공이 / 緝熙聖學
고금에 드물도다 / 古今罕同
크고 환한 새 성궁에 / 有倬新宮
증자 안자를 승사하고 / 躋祀二公
원자가 학궁에 입학하니 / 元良入學
나라의 근본이 융성하네 / 國本攸隆
우리 태조 창건하고 우리 임금 지으시어 / 我作我述
선성을 존숭하고 / 先聖是崇
많은 인재 길러내니 / 人林是育
교화가 아름답게 되었네 / 風化是懿
누군들 타고난 본성이야 없으랴만 / 孰無秉彛
스스로 포기하여 본성을 잃는 것이니 / 而自暴棄
사람은 날마다 학문이 진보하고 / 人日進學
세상은 날마다 다스림에 나아간다면 / 世日趨治
삼황 위에 올라서고 오제의 덕도 다할 것을 / 登三咸五
기일을 확정하여 기대할 수 있겠네 / 刻日以俟
화산은 높고 높으며 / 華山嶙嶙
한강물 흘러흘러 / 漢水亹亹
나라와 함께 끝이 없이 / 與國無疆
선성의 향사를 받들 것이니 / 惟聖之祀
비석에 말을 새겨 / 窮石琢詞
영원히 보게 하노라 / 于永厥視
하였다.
3묘엄존자 탑명(妙嚴尊者塔銘)
변계량(卞季良)
우리 태조(太祖) 원년 겨울 10월에, 사(師)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송경(松京)에 왔다. 태조가 이달 11일 탄신날로써 법복(法服)과 기구(器具)를 갖추어, 사(師)를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변지부무애종 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 묘엄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扶無礙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에 봉하였다.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ㆍ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오교(五敎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계율종(戒律宗)ㆍ열반종(涅槃宗)ㆍ법성종(法性宗)ㆍ화엄종(華嚴宗)ㆍ법상종(法相宗))의 여러 절의 승려들이 다 있었다. 사가 왕사(王師)의 좌석에 올라 소향(燒香)하고 축복을 마친 뒤에 불자(拂子 먼지털이)를 일으켜 세워 대중(大衆)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세(三世)의 모든 불설(佛說)이 이르지 못하였으며, 역대의 조사(祖師)들이 전도하지 못하였다. 너 대중들이 도리어 알 수 있을까. 만약 심사(心思)와 구설(口舌)로써 계산하고 비교하여 이야기하는 자는 우리 선종(禪宗)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유교에서는 인(仁)이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말하지만, 그 용(用)은 한가지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를 갓난애기를 보호함과 같이 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지극히 어진 마음과 크게 자비한 마음으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히 성수(聖壽)는 끝이 없고 자손들은 길이 장성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 개국한 처음을 당하여 형법(刑法)에 빠진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어 모두 용서하셔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인수(仁壽)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무궁한 복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좋게 여겨 즉시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 그때에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이 시(詩)를 지어 사(師)에게 보내 왔는데,
착하신 임금은 용이 하늘에 날고 / 聖主龍飛天
왕사께서는 부처가 세상에 나오심일세 / 王師佛出世
라고 하였다.
임금이 회암사(檜嵒寺)의 나옹(懶翁) 스님이 있던 대도량(大道場)에 사(師)를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북쪽 벼랑에 수탑(壽塔)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사의 스승 지공(指空)의 부도(浮圖)가 있는 곳이었다. 무인년 가을에 사가 늙었다고 하여 사임하고 돌아가 용문(龍門)에 살고 있었다. 임오년 5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께서 또 회암사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또 사임하고 금강산에 들어가더니, 을유년 9월 11일에 입적하였다. 3년 만인 정해년 겨울 12월에 임금이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명하여 사(師)의 유골을 회암(檜嵒)의 탑에 두게 하였다. 또 4년 뒤의 가을 7월에 시호(諡號)를 무엇무엇이라 했다. 상왕(上王)이 태조의 뜻을 임금에게 말하니, 임금이 신 계량에게 명하여 그 탑을 이름짓고 또 명(銘)을 쓰라고 하였다.
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자 문득 소제(掃除)를 하였으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서는 남이 감히 앞서지 못하였다. 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간혹 잠을 자게 되면 마치 종이나 경쇠를 쳐서 깨우는 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때에 석연(釋然)히 깨닫는 바 있어서 스승을 찾아 질의하고 싶은 마음이 급급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몸을 빼쳐 연경(燕京)으로 달려가 서천지공(西天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말하기를, “3천 8백 리에 친히 화상(和尙)의 면목을 뵈었습니다.” 하니, 지공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사람을 모두 죽이겠구나.” 하였으니, 이는 허락한다는 뜻이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다음해인 갑오년 정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서 나옹(懶翁)에게 참례하니 나옹이 한 번 보고 깊고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령(霧嶺)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서 두 번째로 나옹을 서산영암사(西山靈嵒寺)에서 뵙고 두어 해를 머물렀다. 그가 선정(禪定)하고 있을 때에는 밥 먹을 때를 당하여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니, 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었느냐.” 하니, 사(師)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옹(翁)이 하루는 사와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가 말하기를,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느냐.’ 하니, 수좌가 대답이 없었다. 이제 누가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대답하겠느냐.” 하였다. 사가 곧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니, 옹이 문득 그치고 갔다. 그날 밤에 사가 옹의 방에 가니, 옹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에게 속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였다. 뒤에 사에게 말하기를,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너와 나는 일가(一家)를 이루었구나.” 하였다. 또, “도(道)가 사람에게 있으면 코끼리에게 상아가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날 네가 어찌 남의 앞에 나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사가 그 얻은 바를 이루었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우리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손[客]과 주인의 글귀를 머금기도 하며, 몸이 불조(佛祖)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偈)를 지어 송별한다.” 하였다. 그 게송(偈頌)에 말하기를,
이미 주머니 속에 따로 세계가 있음을 믿어서 / 已信囊中別有天
동쪽 서쪽에서 삼현 쓰는 것을 일임하여 둔다 / 東西一任用三玄
누가 너에게 참방한 뜻을 묻는 이가 있거든 / 有人問你參訪意
앞문을 타도하고 다시 말하지 말라 / 打倒面門更莫言
하였다. 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그 글귀에 말하기를,
옷깃을 나누매 특별히 상량할 것이 있으니 / 分衿別有商量處
누가 속의 뜻이 다시 현묘함을 알리요 / 誰識其中意更玄
너희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 任你諸人皆不可
내 말은 겁공을 꿰뚫고 통하리라 / 我言透過劫空前
하였다.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전조(前朝)의 말기에 명리로써 사를 불러 봉하여 왕사를 삼고자 하였으나, 사가 번번이 가지 않더니 마침내 조선 태조 원년인 임신년에, 태조의 지우(知遇)가 있었으니, 사(師)의 거취(去就)가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스스로 나옹선사(懶翁先師)의 진영(眞影) 찬(讚)을 지어 말하기를,
지공의 1천 칼과 평산 절의 처림대사의 꾸짖음에 / 指空千劍平山喝
공부로 선택되어 어전에 설법했네 / 選擇功夫對御前
최후의 신령한 빛 사리를 남기시어 / 最後神光遺舍利
삼한의 조실에서 천만년을 전하리라 / 三韓祖室萬年傳
하였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 전독(轉讀)의 불사(佛事)를 연복사(演福寺)에 개설하고 사(師)에게 주석(主席)을 명하였으나, 사가 무인년에 사퇴한 뒤로부터는 여러 사람을 대하는 데 게을러져서 비록 임금의 명령일지라도 사양하고 다시 회암사(檜巖寺)로 갔다가, 곧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서 진불암(眞佛菴)에 머물렀다. 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이 때 화엄종의 중 찬기(贊奇)가 송경의 법왕사(法王寺)에 있었는데, 꿈에 사가 공중(空中)의 불정(佛頂 석가모니 부처의 정수리[頂])의 연화(蓮華) 위에 있는데, 부처와 연화의 크기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꿈을 깨어서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기어 절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꿈 이야기를 하니, 듣는 자들이 그것은 심상한 꿈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부고가 왔는데, 사가 입적한 시간이 바로 그 꿈을 꾼 때였다. 사가 지은 인공음(印空唫)은 문정공(文靖公)이 그 첫머리에 서문(序文)을 썼으며, 인간(印刊)하여 이룩한 대장경(大藏經)을 용문사(龍文寺)에 봉안하였는데, 문정공이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사는 성질이 문채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며, 스스로 봉양(奉養)하는 것을 매우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어 희사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8만 가지의 행 중에서 젖먹이의 행이 제일이 된다.” 하면서, 모든 행위를 그 젖먹이처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그가 사람을 접대하는데 공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탑을 자지 홍융(慈智洪融)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또 이어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사의 도가 우뚝히 높으심이여 / 師道之卓
보통 생각할 바가 아니다 / 匪夷所思
선각의 적통이요 / 禪覺之嫡
태조의 스승이었다 / 祖聖之師
사께서 평상시엔 / 師在平居
아이와 같다가 / 嬰兒之如
구안한 이를 만나면 / 具眼之遇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버티었다 / 箭鋒相拄
옷 한 벌 바리때 한 개로 / 一鉢一衣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었다 / 謙謙自卑
나라에서 존숭함이 상대가 없었으나 / 尊崇無對
누구가 있는 듯이 삼가하시고 / 若或有之
세상에 나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는데 / 或去或就
그 행동이 구차하지 않았다 / 先不見苟
하늘이 주신 수명은 / 天錫佛壽
79세였으니 / 七旬有九
어디에서 오셨던가 / 來也何從
돋는 해 품에 품고 / 日射懷中
어디로 가셨는가 / 去也何向
연화 위의 하늘이로다 / 蓮華之上
경건한 그의 무리 / 虔虔其徒
행적을 표창할 것을 기획하니 / 圖表厥跡
천지 사이 견고한 것은 / 兩閒之堅
돌보다 오랜 것이 없도다 / 無久惟石
비석에 명을 새겨 / 刻此銘章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垂示罔極
하였다.
[주-D001] 사대(四大) :
불가에서 말하는 인체를 구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4대 원소.
4.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착한 아들과 뛰어난 손자를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매, 우리 태종(太宗)으로써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 되게 하셨다. 아, 장하다. 어찌 사람의 작위(作爲)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이로구나. 그것은 상(商)나라의 왕실(王室)에 어진 임금과 착한 임금이 이어 일어난 것과, 주(周)나라의 왕가(王家)에서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은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오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벼슬한 휘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6대 손인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만에 태종 임금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가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잘 하였다. 원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잔하게 되니,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다. 공을 쌓고 어진 덕행을 누적(累積)하였음이 그 유래가 장구하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 낳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특하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슬기로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 20도 못 되어서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정치는 산란하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나라의 서울에 조회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가 훙(薨)하니, 태종이 제릉(齊陵)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의 행차에서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며 모시었다. 공양왕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 들과 더불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외치고 태조를 추대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로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갑술년 여름에,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조회하게 하라고 명령하니, 태조가 우리의 태종이 경서에 능통하고 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만족하였으므로, 예를 갖춘 우대를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몸이 편찮았는데 권신(權臣)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가 곧 일어날 것 같으므로 태종이 낌새를 밝게 살펴 제거해 버렸다. 그때에 종친들과 장군과 재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의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였다. 박포만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의 벌에 처하였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공정(恭靖)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일이 다 우리의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比等)하였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니, 황제가 충성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전대로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袞冕) 9장(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을 주었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내리어서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그때부터 뒤에는 황제의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하여 쉬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국왕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번번히 ‘지성이라.’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태종이 애모함을 그지없이 하였다. 양암(諒闇 임금이 거상(居喪)할 때에 있는 방)에 거처하면서 초상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매우 슬퍼하고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예부 낭중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서서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추증하였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은 자가 상언(上言)한 것이 있었다고 하여 담당 관사(官司)에게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본래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는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 달콤한 이슬)가 함흥부 월광구미리(咸興府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의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어 진하(進賀)하였으나 임금이 받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禔)가 패덕(敗德)하다고 해서 세자의 직위를 해제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함이 없어서 국민들이 촉망(囑望)한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중국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하였다.
이해 8월에 임금이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을 주청(奏請)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부왕(父王)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號)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으로 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찬성(贊成) 신 이종무(李從茂) 등을 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상왕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다. 칙서(勅書)의 사연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며,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다. “부왕이 돈후하고 노성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였으며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었다.” 하였다.
9월에 공정(恭靖)이 죽자, 전하가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역월의 복제[易月之制]를 마쳤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알리었더니, 다음해 4월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였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하여 몸을 훼상(毁傷)함이 예(禮)에 지나친다고 하여 거상 기간을 날을 달로 계산하는 역월의 복제를 좇기를 명하였으나 전하가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장사 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服制)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太后)를 광주(廣州) 수읍(首邑)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陵)을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신축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太宗)에게 품의(禀議)하고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지 않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으며,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함은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았다. 사대하는 일은 천자가 그의 지성을 칭찬하였으며,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의 도(道) 있음에 심복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제하였다. 덕과 예(禮)를 우선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淫事)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였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하였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없애버리니, 모든 사적(事績)은 다 빛이 났다.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산물은 풍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성대하도다. 그가 상제(上帝)의 사랑을 얻음이 융숭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감로(甘露)를 내리는 상제의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다음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 들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년을 거상(居喪)할 것을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왕위에 있은 것이 19년이었다. 한가롭게 살며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크고 작은 신료들과 아래로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목이 쉬도록 호곡(號哭)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더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6일 경자(庚子)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하였다. 유언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부고(訃告)가 가니, 황제가 슬퍼하여 정사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 와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돈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서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부음이 멀리 들려오니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낍니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께서 부의(賻儀)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리었다. 대체로 우리 태종(太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전하의 효성이 지극함이 앞뒤에서 서로 받들어서 천심을 잘 누렸기 때문에 마지막과 시초의 즈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하게 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姓)은 민씨(閔氏)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障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 만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복(扑)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딸이다. 선을 쌓음으로써 흘러나오는 경사가 맑고 덕 있는 이를 낳게 되었으니, 총명하고 지혜스러움이 남에게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매 배필을 가려서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건지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나, 태후는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가정의 공궤(供饋)에는 삼가하여 그의 공부를 힘쓰게 하였으며,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였다. 첩(妾)과 시녀들을 예(禮)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하여졌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정할 즈음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큰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하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여 정비(靜妃)로 봉하였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명나라의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황제의 하사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의 호(號)를 올리었고,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차분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경건한 덕을 타고났으며 태종을 잘 도와서 내치(內治)에 전심하였다. 20년 동안 궁궐 안에서의 용의(容儀)는 엄숙하고도 화목하였으며, 또 착한 아들을 낳아서 종사(宗社)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흥하자 빈(嬪)과 시녀와 첩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婦)가 모(母)의 거동을 본받음이 지극하였도다. 4남 4녀를 낳았으니,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제(褆)이며, 다음은 이름을 보(補)이니 효녕대군(孝寧大君)으로 봉하였다. 그 다음은 종(種)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였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혜옹주(貞惠翁主)로서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이름을 인(禋)이라고 하며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큰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숙정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비(裶)인데 경녕군(敬寧君)으로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인 온(溫)의 딸이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첫째는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효녕(孝寧)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前判中軍都摠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성녕(誠寧)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다. 물론 같은 이씨가 아니다. 정경공주(貞慶公主)가 딸 넷을 낳았으니, 첫째는 돈녕 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中淹)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름을 담(聃)이라고 하며 한성 소윤(漢城小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경녕(敬寧)이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공녕(恭寧)이 병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신은 적이 살펴보니, 우리 태종(太宗)의 큰 덕과 높은 공이 본래 이미 모든 임금들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나, 배필의 어지심과 내조의 공도 또 촉도 신지(蜀塗莘摯)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고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 있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겨 길이 뒷 세상에 밝혀 보이고자 하여, 전하가 신(臣) 계량에게 명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손으로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 天眷海東
우리 태종을 내려주셨네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쓰는 태종이여 / 亹亹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조근하여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하였네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적계 형을 높여 세자되게 하였네 / 嫡長是尊
형제간의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鬩墻
우애가 오히려 두터웁네 / 友愛猶惇
효제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도 드물었네 / 從古罕聞
그 덕은 후하고 / 維德之厚
그 공은 성대하니 / 惟功之懋
하늘이 매우 밝게 살펴 / 天鑑孔昭
거듭하여 보우하시네 / 式申保佑
휘황한 금보가 / 煌煌金寶
전후에 빛나고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도착하매 / 帝誥荐臻
내 드디어 왕위를 받았네 / 我乃龍受
할아버지 훈계를 지켜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아름답게 문채나네 / 煥乎郁郁
상중에 여막살며 / 遭喪居盧
애모함이 망극하여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사대하니 / 抵事朝廷
황제가 지성이라 칭찬하였네 / 帝稱至誠
경건하게 승사하니 / 肅肅承祀
신명이 감응하고 / 感于神明
교린에 도 있으니 / 交隣有道
왜국이 복종하며 / 倭邦來庭
왕씨 후예 돌보아 / 存䘏王裔
편안히 살게 하였네 / 俾遂其生
안팎이 태평하기 / 中外又安
20년이 되어가니 / 垂二十齡
윤택한 감로가 / 浥浥甘露
해마다 함부에 내리었네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湜) 폐하시고 덕 있는 이에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길이 천수를 누리며 / 期享永年
이 땅에 군림하시기를 기약하였는데 / 父臨下土
그 어찌 빈천을 재촉하여 / 何促賓天
병이 낫지 않는가 / 一疾莫愈
슬프다, 착하신 아들 / 哀哀聖子
슬퍼함이 가이없어 / 痛悼無比
3일 동안 철선하고 / 徹膳三日
상심을 못이기며 / 不勝摧毁
거상 중의 모든 절차를 / 凡百喪事
예대로 지키었네 / 維禮之履
황제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자 보내 사제하고 / 遣使以祀
높이는 시호 주며 / 贈謚褒崇
후한 부의 내리시니 / 賜賻優隆
조문의 예를 완비함에 / 恤典之備
신하들 기뻐하네 / 喜溢臣工
신의 태후 생각 같아 / 思齊太后
진실로 화순하네 / 允也肅雝
가만히 도와 사직을 안정시켜 / 密贊定社
큰 총명에 배필하고 / 克配亶聰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제주 되게 했네 / 俾主宗祐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 乾健离明
공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하고 바르심은 / 坤厚柔貞
원경의 법칙이네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슬 같은 벗이요 / 琴瑟以友
죽어서도 같이 장사하였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 같도다 / 于嗟其麟
종묘 제사 / 緜緜宗祀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 / 臣拜獻詞
옥 같은 굳은 돌에 이 사연 새기어서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 없이 / 萬代不磨
우리나라 빛나게 하리라 / 昭我東垠
하였다.
5.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성녕대군 변한소경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영락(永樂) 16년 무술년 봄 2월 5일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誠寧大君)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측근 신하가 왕지(王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성녕대군 종()이 죽었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또 아들도 없으니, 그를 슬퍼하는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그의 무덤 길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여서 조금이나마 그의 구천(九泉) 아래에 있는 정혼(精魂)을 위로함이 있게 하고, 또 나의 무궁한 슬픔을 막게 하라.” 하였다. 신(臣) 계량은 엎드려 명령을 받들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대군의 휘는 종()이니, 세자(世子)의 동모(同母) 아우이며, 형제의 차례로는 넷째이다. 을유년 가을 7월 임인일에 낳다.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치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잡스러운 장난에는 담담히 좋아하는 바 없으니, 왕과 왕후 양궁(兩宮)께서 몹시 사랑하였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또 활쏘기 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되니, 장년이며 능한 자도 다 그를 추중(推重)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에까지도 다 도리를 얻어 모든 것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전하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 기거하고 음식 먹는 데까지도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갑오년 정월에는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고, 정유년 9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의 위계(位階)를 주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좌군 동지 총제(左軍同知摠制) 성공(成公) 휘 억(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금년 정월 19일에 병이 드니, 양궁께서 근심이 극심하여 기도하고 구료(救療)하고 약쓰는 등의 일을 성심껏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졸하자 매우 슬퍼하여 이틀 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다. 종친(宗親)과 모든 신료들과 아래로 노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 없었다.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조위의 말씀을 올리고, 또 수라 들기를 청하니, 이튿날 다만 죽을 올리라고만 명령하였으며, 정사 보는 것을 3일 동안 중지하였다. 그때 전하가 애통해함이 지나쳐서 몸과 기운이 조금 평안치 못하게 되니, 기로(耆老)들과 대신들이 고기 반찬을 드시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두 번 세 번 더욱 부지런히 주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고, 소찬(素饌)으로 30일을 마쳤다. 대군 변한국공(大君卞韓國公)으로 추봉(追封)하고 소경(昭頃)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주무관(主務官)이 장사의 절차를 갖추어서 이해 4월 을유일에 고양현(高陽縣)의 북쪽 산리동(酸梨洞) 진방(震方)의 산기슭에 장사 냈다. 그의 제택(第宅)에 사당을 세우고 또 후사(後嗣)를 세워 그의 제사를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장사하고 제사하는 예는 대체로 유감됨이 없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는 아들이 되어서는 어버이에게 그의 효도를 다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아들에게 그의 자애(慈愛)를 다하였다. 지금 대군(大君)의 상사에 성심은 간절하고 지극하며, 애통해함은 다함이 없고 생각하는 것은 깊고 멀어서 근본과 결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것은 비록 타고난 천성의 덕에서 나왔지만 인륜의 도를 지극히 한 것이다. 아니면 또한 대군의 자질과 품성이 우뚝하여 행동과 실지가 서로 맞기 때문에, 전하의 사랑함이 이와 같이 지극함을 얻은 것일 것이니, 대군은 어지시었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명이 짧았으니 아,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신이 일찍이 《논어》를 읽다가 공자 같은 성인도 먼저 죽은 아들 이(鯉) 때문에 우는 일을 면치 못한 것을 진실로 유감으로 여겼더니, 이제 소경(昭頃)이 졸하니, 하늘의 혼은 또 바르지 못한 것도 있음을 의심하게 되었다.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쓰노라.
명에 이르기를,
소경의 자질은 / 昭頃之質
옥같이 깨끗하고 볕처럼 온화하다 / 玉潔陽和
소경의 행실은 / 昭頃之行
효도하고 우애 있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 孝悌柔嘉
명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 敏而好學
양궁의 권애함이 더함이 있었다 / 眷愛有加
하늘은 어찌하여 덕을 부여하고 / 天胡賦德
수명은 빼앗는가 / 而奪之年
아, 성스러운 아버지여 / 嗚呼聖父
슬픔이 천지에 가득하네 / 痛彌天淵
진실로 바르지 못함이여 / 信乎靡定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 孰便其然
품질을 높여서 그를 봉군하고 / 崇秩其封
후사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네 / 立後以祀
해와 달은 이미 밝고 / 日月旣良
산과 시내는 아름답도다 / 山川其美
그의 몸 그윽하게 감췄으니 / 其藏其密
길이길이 평안하리라 / 其永寧哉
묘도에 비 세우고 명을 새겨 / 刻銘墓道
슬픔을 밝히노라 / 用昭厥哀
하였다.
6.유명조선국 증 충근 익대 신덕 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義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영락 11년 임진년 겨울 10월에, 의정부 좌정승 진산(晉山) 호정 선생(浩亭先生)이 계량(季良)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나의 선고(先考)께서는 덕을 심으시고는 스스로 그 열매를 먹지 않고 복록을 후인에게 넘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자(小子) 내가 두 번이나 공신들의 회맹(會盟)에서 피를 마시었으며, 벼슬은 모든 신료들의 우두머리에 있습니다. 또 은전을 입어 삼대(三代)에 소급하여 봉증(封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후세의 자손들에게 보여 선대(先代) 분묘의 소재를 알게 하여, 감히 혹시 잘못 전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니, 그렇다면 마땅히 글월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 못하였으니, 그대는 글을 지어주게.” 하므로, 계량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니, 공(公)의 성은 하씨(河氏)이고, 휘는 윤린(允潾)이며, 자는 소개(所開)이니, 진양(晉陽)의 대족(大族)이다. 선대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고려의 현종조(顯宗朝)에 공이 있어서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증직을 받았다. 증조고의 휘는 부심(富深)인데, 급제하였으나 숨어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조고(祖考)의 휘는 식(湜)인데, 증(贈)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원군(晉原君)이다. 고(考)의 휘는 시원(恃源)이니, 증(贈) 순충 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정승 판병조사(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다. 승봉랑(承奉郞)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정(鄭) 휘 균(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원(元)나라 지치(至治) 신유년 4월 정사일에 공(公)을 낳았다.
나이 일곱 살 때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울고 부르짖어 슬픔을 다함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 경오년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하였다. 계유년에 그 고을의 장자(長者)인 증 숭록대부 의정부 찬성사 강공(姜公) 휘 승유(承裕)가 공에게 말하기를, “선대에서 나라에 공이 있는 자는 그의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는 것이다.” 하고, 자기의 딸을 공의 아내로 주었다. 찬성은 성품이 엄격하여 공이 아버지처럼 섬겼다. 지정(至正) 갑신년에 처음으로 충목왕(忠穆王)의 조정에 벼슬하여 식일도감록사(式日都監錄事)가 되었다. 정해년 봄에 강씨(姜氏)가 길몽을 꾸고 난 뒤에 임신하여 겨울 12월에 아들을 낳으니, 지금의 정승공(政丞公)이다. 기축년에 선관 승(膳官丞)에 제수되고, 임진년에는 승진하여 선관 영(膳官令)이 되었으며, 병신년에는 문하 녹사(門下錄事)로 천관(遷官)되었다. 고려의 말기에 국가의 창고가 텅 비어서 문하부(門下府)의 아침 저녁 식사의 비용을 녹사에게 일임시켜 풍족하고 조촐하게 하라는 책무를 담당시키니, 녹사된 자는 대개 녹사직이 해면되기를 비는 자가 많았는데, 공은 심력을 다하여 헤아려 장만하고,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으므로 부관(府官)이 칭찬하였다. 무술년에 선덕랑(宣德郞) 북부 영(北部令)에 임명되었다. 경자년에는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와 복제(服制)를 마쳤다.
계묘년에는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가 되니, 위계(位階)는 조봉랑(朝奉郞)이었다. 그때가 바로 공민왕 13년이다. 위왕(僞王 덕흥군(德興君))과 첩목아(帖木兒 첩목아불화(帖木兒不花)이니 곧 최유(崔濡)이다)가 몽고와 중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하였으므로, 각 도의 우리 군사들이 서북(西北)에 모이니, 위왕(僞王)이 패주하였다. 그 장수들이 왕래하는 길이 다 숙주(肅州)를 거치게 되었는데, 공이 그들을 대접하기를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그 해는 흉년이어서 돌아오는 군사들이 굶주려서 얼굴에 부황 빛이 나는 자가 많았다. 공이 봉록을 감액하여 그것의 여분과 또 고을 사람 중 저축이 있는 자에게 권유하여, 서로 도와서 구제함으로써 보전하여 살게 한 바가 많았다. 정사를 하는데 인(仁)과 서(恕)를 근본으로 삼아 가혹한 세금이 없어지고 형벌이 줄어드니 아전과 백성들이 덕을 입었다. 그가 교체되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을사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정승공이 과거에 급제하고 다음 해에 사관(史官)이 되니,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 벼슬하는 아들이 있고, 나는 늙었으니 다시 벼슬하고 싶지 않다.” 하고,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함께 금강사(金剛社)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한가히 노닐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그때 왜구가 한창 치성하였다. 공이 족인(族人)에게 이르기를, “우리 고을은 서쪽과 남쪽이 바닷가에 있어서 섬의 왜구가 해마다 오기만 하면 서쪽과 남쪽 사람들이 먼저 그 해를 입는다. 형세가 반드시 읍리(邑里)에 미치게 될 것이니, 마땅히 북촌(北村)으로 이사하여 그 칼날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정사년 가을에 가족을 이끌고 가서 동곡(桐谷)에 집을 마련하였더니, 다음 해 가을에 왜구가 과연 읍리에 들어와서 온 경내가 소란하고 어지럽게 되어 겁박과 약탈을 당한 자가 많았다. 공은 동곡에서 강성현(江城縣)의 산성(山城)으로 들어가서 온 집안이 홀로 안전하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정승공이 그때 대사성이 되어 있었는데, 재상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섬 오랑캐가 자주 오는데 늙은 어버이가 그때마다 산성에 들어가게 되어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지금의 순흥 부사(順興府使)는 선비입니다. 바라건대, 저 자신이 물러나고 그를 대사성에 대신 임명한 뒤, 저의 부친을 순흥 부사에 임명하여 안전함을 얻게 하소서.” 하였다. 재상이 그의 말을 의롭게 여겨 경신년 봄에 공에게 부사(府使)를 제수하니, 위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다. 이보다 앞서 공은 일찍이 첨설관(添設官)을 받고 누차 전임하여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부사가 되니, 그 자급(資級)이 같았다고 한다. 부임한 뒤에는 인자한 정사를 베풀어서 백성들이 바야흐로 사모하고 즐겨하였는데, 병이 들었다. 9월 24일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60이고 아들도 또한 성장하였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소. 하물며 인생의 길고 짧음은 천명 아님이 없어서, 모두 결국은 다함에 돌아가는 것이고 다만 선후가 있을 뿐이니 상심하지 마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숨이 끊어졌다. 정승공이 영구(靈柩)를 모시고 진양(晉陽)에 돌아가 그 해 12월 갑신일에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의 북쪽에 장사하니,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와의 거리는 불과 몇 보이다.
과거에 정승공이 아버지의 병 기별을 듣고 약을 준비하여 길을 배나 빨리 달려 2일 만에 도착하였으나, 임종에 미치지 못하였다. 가슴을 치고 땅을 구르며 매우 슬퍼하여, 밤낮을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관(棺)은 전목(全木)을 쓰고 곽(槨)은 일곱 치 두께로 하였으며, 모든 상장(喪葬)의 용구(用具)는 일체 《주자가례》에 의거하고 불교의 법식은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국조(國朝) 무인년에 이르러, 정승공의 정사(定社)의 공으로, 공에게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 진양백(晉陽伯)을 추증(追贈) 하였으며, 임오년에는 좌명(佐命)의 공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을 가증(加贈)하였다.
공은 자품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여, 망녕된 말을 하지 않고 또한 농담도 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가산(家産)을 경영하는 데 뜻을 둔 일이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으며, 족친(族親)간에 친목하고 향당(鄕黨)에 화순하여 항상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공의 선고(先考)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백부(伯父)가 노비와 땅을 고루 분배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아우와 조카가 관가에 고소하고자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어찌 감히 숙부와 송사를 다툰단 말이냐.” 하며, 힘껏 말렸다. 백부가 죽자 아우와 조카가 전에 소송하려고 하던 말을 강경히 주장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종형제 간에 서로 소송하는 일도 또한 옳지 않다.” 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종형제가 서로 소송하여서 드디어 분재(分財)하게 되었다. 정승공은 받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 선고께서 하지 않으셨던 바인데, 내가 감히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아들들에게 주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여러 아들들이 받는 것은 곧 내가 받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강씨(姜氏)는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행동은 예와 법을 따랐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받들고, 화순함으로써 남편을 섬겼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는 엄격하면서도 너그러웠으며, 족친과 인척들을 대우하는데는 은혜스럽고도 두루하였다. 을해년 여름에 병으로 눕자, 정승공이 그때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있었는데, 휴가를 청하여 역말을 달려 3일 만에 도착하여 약을 먼저 맛보고 올리니, 강씨는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아서 흡족하게 너의 영광스러운 봉양을 받았으니, 약을 먹고 살기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공이 울며 권하니, 7월 4일 정승공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늙고 젊음에 달려 있지 않다. 너와 너의 맏누이가 모두 무사할 때에 이제 내가 먼저 가니, 어찌 스스로 다행하지 않겠느냐. 구태여 여러 가지 약을 강권할 필요는 없다.” 하고, 이튿날 죽었다. 향년 76세였다. 9월 병오일에 공의 묘(墓) 남쪽 몇 보 쯤 되는 곳에 부장(附葬)하였다. 무인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은 휘 윤(崙)이니,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수문전대제학 영경연서운관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書雲觀事監春秋館事世子傅)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성산 이씨(星山李氏) 휘 인미(仁美)의 딸에게 장가들어, 병술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딸은 정순대부(貞順大夫) 연안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에게 시집갔다.
정승의 아들은 이름을 구(久)라고 하며, 중군도총제부 도총제(中軍都摠制府都摠制)의 벼슬에 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終德)에게 시집가고, 차녀(次女)는 좌군도총제부 총제(左軍都摠制府摠制)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서남(庶男)이 셋이 있으니, 첫째는 이름을 연(延)이라고 하며, 의흥시위사 대호군(義興侍衛司大護軍)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녀(庶女)가 셋 있으니, 첫째는 지곡산군사(知谷山郡事) 김질(金秩)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중군 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여서(女婿) 유 연안부사(柳延安府使)의 아들은 이름을 정(汀)이라고 한다. 통덕랑(通德郞) 형조 정랑(刑曹正郞)이다.
내가 생각해 보니, 정승공의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과, 명망과 지위와 공훈과 사업의 성대함은 그에 비길 사람이 없다. 진실로 일찍이 그 발원의 오래됨이 있는 것이다. 아, 진양공(晉陽公)의 선을 쌓고 덕을 이룸은 마땅히 그 응보를 누려야 할 것인데, 그것을 자신의 몸에 향유하지 아니한 것은, 어찌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기 위하여 늦춘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면 보답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더니, 나는 진양공에게서 그것을 징험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천만년에 이르기까지 그 끼치신 덕택의 오래감과 남은 경사의 영원함이 또 다함이 있겠는가. 아, 거룩하도다.
명(銘)에 이르기를,
흐름이 긴 내는 / 有流斯張
그 원천이 깊고 / 維畜其源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 有枝斯茂
그 뿌리가 튼튼한 것이다 / 維固其根
훌륭하도다. 하씨 집안이여 / 懿哉河氏
진실로 덕 높은 가문이로다 / 實維德門
우뚝이 높은 선조 좌사낭중은 / 卓彼左司
뛰어나게 나라에 공훈이 있었으며 / 克有殊勳
적선함이 두터워서 / 乃厚其積
후손의 복을 열었도다 / 以啓後昆
인후하신 진양공은 / 振振晉陽
부지런히 덕을 닦았네 / 維德是勤
인륜을 중히 여겨 지친간의 소송을 막으니 / 厚倫息訟
그 의로움에 사람들이 감복하고 / 人服其義
왜란을 미리 알고 집을 옮겨 피난하니 / 移家避寇
그 선견지명을 사람들이 탄복했네 / 人服其智
인자한 그의 정치 두 고을에 베푸시니 / 惠于二州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모하여 의지하였네 / 民慕怙恃
어질고 의롭고 지혜까지 있었으니 / 仁義且智
높은 벼슬 밝은 기쁨 누려 마땅하건마는 / 顯融是宜
거두어 물러나가 시골집에 살면서 / 歛而家居
끝내 나아가지 않았네 / 竟莫以施
당신의 착하심에 하늘이 복 주시어 / 天錫爾類
영명하고 어진 아들을 낳았네 / 克生英賢
성주의 지우를 받아 / 遇我聖主
우리 조선 도우시니 / 以相朝鮮
안위의 국가 정세를 / 安危呼吸
담소하며 지적하였네 / 談笑指陳
차분히 낭묘 위에 앉으시니 / 從容廊廟
백 가지 제도가 새롭게 되었네 / 百度維新
그 무게 태산같고 / 泰山其重
그의 도량 바다같아 / 滄海其容
훈덕의 으뜸이며 / 勳德之魁
유학의 종장일세 / 斯文之宗
임금이 이르시기를 정승은 / 王曰政丞
나와 덕이 같으니 / 實予同德
정사와 좌명에 / 定社佐命
그의 큰 공 아름답다 하셨네 / 予懋丕績
삼대에 걸쳐서 관작을 추증하니 / 追爵三世
그들의 위계가 모두 다 높도다 / 並峻其秩
훈호를 이미 주고 품계도 정해 주어 / 旣勳而階
영의정부사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높이고 / 領府維崇
비위에도 작을 추증하여 / 錫之妣爵
진한국대부인을 봉하였네 / 辰國是封
잠덕이 크게 나타나니 / 不顯潛德
죽었으나 살아 있네 / 雖死猶生
진산은 드높고 / 晉山峩峩
진수는 서늘한데 / 晉水泠泠
저 무덤자리 우러러보니 / 瞻彼坎麓
길한 기운 가득하다 / 維吉之叢
고위와 비위를 / 維考維妣
함께 그 속에 장사하였네 / 俱葬于中
면면한 남은 경사 / 緜緜餘慶
끝이 어찌 있으리요 / 曷其有終
비석에 병을 새겨 / 刻銘窮碑
영원한 후세에 알리노니 / 以告無期
이것을 밝게 보는 후손들이 / 昭玆來裔
누군들 공의 공덕 생각하지 않겠는가 / 孰不公思
하였다.
7.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숭록대부 밀산군 시 공효 박공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祿大夫密山君諡恭孝朴公神道碑銘 幷序)
김수령(金壽寧)
밀산군(密山君) 박공(朴公) 중손(仲孫) 자(字) 경윤(慶胤)이 졸하여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의 여러 아들들이 상락(上洛) 김수녕(金壽寧)에게 명(銘)을 요구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젊었을 때 우리 집에 내왕하여, 우리 선군(先君)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청하건대 그의 덕을 밝히고 공로를 빛나게 하여 사라지지 않게 해 주시오.” 하였다. 이 때 수녕도 또한 어머니의 상중에 있었으므로 서로 붙잡고 울었으며 또 사양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상고하여 보건대, 박씨(朴氏)는 신라에서 시작되었다.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신라의 시조가 되었음은 역사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의 후손들이 삼한(三韓)에 퍼져 있으며 대대로 명망이 높은 이가 있었으나 밀양에 사는 자들이 가장 현저하여서 명망 있는 가문이 되었다. 고려의 말기에 판도판서(版圖判書)가 있어서 휘를 사경(思敬)이라고 하였는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되며, 인후한 군자였다. 판서가 침(忱)을 낳았으니, 우리나라 조정에 들어와서 우리의 태조를 섬겨서 공로가 있었다. 이름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에 실리고, 벼슬은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전서(典書)가 강생(剛生)을 낳으니, 유아(儒雅)한 것으로 명망이 현저하였다.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이 있었으며, 의정부 찬성사를 추증하였다. 찬성이 공(公)의 아버지를 낳았으니, 그의 이름은 절문(切問)이다. 행실이 돈독하며 문장에 능하였고, 졸하매 벼슬은 교서 정자(校書正字)였다. 공의 덕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의 호를 주고, 의정부 좌찬성을 가증(加贈)하였다.
처음에 공의 비(妣) 정경부인(貞敬夫人) 왕씨(王氏)가 임신하였는데, 태몽에 집 채 만한 큰 소를 보았다. 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찬성에게 말하니, 찬성이 말하기를, “장차 창성(昌盛)하려면 징조가 반드시 먼저 보이는 것이니, 내 생각에는 아이가 있다면 우리 집안을 중흥시킬 것이오.” 하였다. 부인에게 아이를 잘 거두어 양육할 것을 부탁하고 졸하였다. 그뒤 7개월 만에 공을 낳았다. 뛰어나고 명랑하고 영리하고 특이하여 어릴 때에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금 성장하게 되어서는 스스로 책을 끼고 다니며 글 읽을 줄을 알았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 국자감시(國子監試) 즉 진사를 뽑는 과거)에 합격하고, 다시 어진 스승과 벗들을 추종하여 노닐며 학문을 닦고 문장을 수련하여 선덕(宣德) 을묘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뽑히어 집현 박사(集賢博士)에 보임(補任)되고, 부수찬 지제교에 승진하였으며, 다시 사헌 감찰 이조 좌랑에 전보(轉補)되어 춘추관을 겸직하게 되니, 더욱 명성이 있었다. 그때 성관(星官 천문을 관찰하는 관원) 등이 학문이 흐리멍텅하고, 기술이 없으므로 세조(世祖)가 근심하여 특별히 공의 벼슬을 굽혀서 서운 판관(書雲判官)으로 삼았다. 공이 능히 천기(天機)를 연구하고 묘리(妙理)를 궁구하여 조그만 차실(差失)도 없으니, 스스로 기교 있는 역관(曆官)이라고 자부하는 자도 그에 앞서지 못하였다.
누전(累轉)하여 이조 정랑이 되고, 지제교를 잉임하였으며, 첨지통례(僉知通禮)로 동첨사(同詹事)를 겸임하였다. 세조(世祖)가 말년에 병으로 정사에 게을러져서, 군기(軍機) 이외의 일은 모두 세자에게 보고하여 결정하도록 하교하였다. 동궁(東宮)에 있어서 명령의 출납(出納)은 첨사(詹事)를 경유하였는데, 공이 그 직책을 잘 수행하여 세상의 여론이 더욱더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사인(檢詳舍人)이 되고, 재차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이 되었으며, 세 번째 들어가서는 집의가 되었다. 그가 사헌부에 있어서는 홀로 고상한 성명을 갖고 분발하여 온 힘을 다하니, 조정의 기강이 정숙해졌다. 낭관이나 사인(舍人)이 되어서는 단정하고 고아하여 은연히 임금을 보필하는 대신의 기상이 있었다. 재능 있는 관리로 승진하여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겸직하였으며, 얼마 안 되어 뽑히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경태(景泰) 계유년 봄에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았는데, 그때 공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겨울에 지금 임금께서 내란(內亂)을 평정하는 데, 공(公)이 추요(樞要)의 위치에 있어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곁에 도와서 성취하게 되어, 모계(謀計)는 적절하고 일은 이루어져서 공의 공로가 컸다. 드디어 병조 참판 지경연사를 제수하고 때의 어려운 일은 공을 기다려 진정하였다. 공로를 기록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응천군(凝川君)을 봉하였으며, 그의 얼굴을 그려서 맹부(盟府)에 잘 간직하였다. 병조로부터 한성 부윤에 옮겼으며, 다시 사헌부에 들어가서 대사헌이 되었다. 공조ㆍ이조ㆍ형조ㆍ예조 등 4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고치어 밀산군(密山君)을 봉하였다. 가는 곳마다 능히 대강을 파악하여 지키고 까다롭고 자잘한 것에 힘쓰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천거하고 형옥(刑獄)을 의논하는 데 공평하게 하고 아첨하지 아니하였다. 대강을 다스리고 빈객을 접대하며 제사를 받드는 일이 찬연하게 빛이 나서 볼만하였다. 세상에서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천순(天順) 병자년 봄에, 과거의 시관(試官)을 맡았으며, 승진하여 의정부 우참판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좌참판에 승진되었다. 기묘년 봄에 또 과거의 시관이 되었고, 전후를 통하여 무릇 세 번이나 과시(科試)를 고선(考選)하였으므로 명사를 많이 알았다. 가을에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상사를 당하였다. 애통함을 극진히 하여 몸이 바짝 마르고 여위어서 뼈만 남았다. 상기(喪期)를 마치매 다시 밀산군(密山君)을 봉하고, 위계(位階)를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렸다. 성화(成化) 2년 여름 5월 병신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부고를 듣고, 임금이 매우 상심하여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상가(喪家)에 가서 조문하게 하였으며, 사제(賜祭)하고 부의를 내려주었으며, 이름을 공효(恭孝)라고 하는 시호와 바꾸었다.
군(君)은 성실한 선인으로 온후하고 화락하다. 매양 선군(先君)이 살아계실 때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여 살지 못 할 것같이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는데, 효도를 돈독하게 하여 그의 뜻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였으며, 형을 섬기는 것을 어버이 섬김과 같이 하였다. 일족과 인척의 급함을 구원하는 데에 재물을 기울여 스스로 힘을 다하였다. 산업은 겨우 족하기만 취하고 따로 넉넉하기를 요구하지 아니하였다. 스스로 실내에 있을 때나 접대하고 서로 사귀어 노닐 때나 한결같은 마음을 가져 변함이 없고 몹시 열렬하게 하지도 않거니와 또한 특별하게 남과 다른 행동을 하지도 아니하였다. 정사에 종사하는데 능통하여, 일에 당면하여도 여유가 있으며, 일찍이 조그마한 낌새도 형적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공훈과 명성이 더욱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게 낮추었다. 여러 번 권력 있는 직책을 맡았으나 문에는 잡된 손이 없었다. 항상 집에 거처하면서 글을 지어 아들을 훈계하였는데, 대개 고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와 좋고 나빴던 형적을 논한 것이었다. 또 술을 경계하는 명을 지어서 좌석의 옆에 걸어 놓아 스스로 경계하고 인하여 여러 아들들을 편달하였으니,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심원한 뜻이 있어서 또한 세상의 훈계가 될 만하였다고 한다.
그해 7월 임진일에 예를 갖추어 교하현(交河縣)의 북쪽 탄포(炭浦)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장사하였다. 부인 남평현 문씨(南平縣文氏)의 무덤과 더불어 같은 언덕이나 광혈(壙穴)은 다르다. 부인은 즉 공조 정랑(工曹正郞) 문승조(文承祚)의 딸이니, 맑고 아름다우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덕 높은 남편에게 배필이 되어 어진 아들을 양육하였으며, 집안을 바르고 마땅하게 다스렸다.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이름을 전(栴)이라고 하며, 부평 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이다. 차남은 미(楣)니 한성서윤(漢城庶尹)이다. 삼남은 건(楗)이니 승정원 우승지이다. 둘째와 막내가 모두 문학(文學)에 역량이 있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부조(父祖)의 업을 이어받아 이루었다. 막내가 바로 수녕(壽寧)과 동년 급제하였다. 맏딸은 또한 먼저 몰하였다. 차녀는 전설사 수(典設司守) 유오(柳塢)에게 시집갔다.
부평 도호부사가 첨지중추 윤삼산(尹三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름을 인열(仁烈)이라고 한다. 음직(蔭職)으로 통사랑(通仕郞)에 제수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한성 서윤이 지돈녕 강석덕(姜碩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으며, 우승지가 서윤(庶尹) 최윤(崔昀)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전설사 수 유오(柳塢)가 딸 하나를 낳았다. 사직(司直) 윤린(尹磷)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박씨의 선조는 / 繄朴之先
일찍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 肇降自天
그 전통 유구하여 / 有遠其傳
끊임없이 귀인이 나왔다네 / 繩繩衣冠
삼한에서 명망을 떨쳤는데 / 望于三韓
그 중에 밀양이 으뜸이라네 / 莫盛密山
판도판서공은 어질고 후덕함이 / 版圖仁厚
옛사람의 그것과 필적한다오 / 古人與偶
몸소 수고하시어서 후손에게 덕을 덮어 주었으며 / 劬躬燾後
찬성에 이르러서는 / 爰曁贊成
베푸심은 많았으나 보답을 가벼웠더니 / 施重報輕
정사는 공을 기다려 형통하였네 / 政待公亨
공은 탄생이 기이하였으니 / 公生也奇
소 꿈이 상서로웠네 / 夢牛維禨
찬성공이 길몽이라 점치더니 / 贊成占之
공은 과연 그 가문을 세가로 만들었네 / 公世其家
덕이 높이 올라가니 빛남이 성대하여 / 揭德振華
이름을 성균시와 대과에 걸었네 / 名拄賢科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효도하고 공손하며 / 事親孝恭
남을 대우하는 것은 관대하였고 / 待人則容
임금을 받드는 데는 충성을 다하였네 / 奉上則忠
얼신이 오래 교만하여 / 孽臣昔驕
조정에 해독을 끼쳐서 어지럽히니 / 毒亂于朝
임금이 그 요망함을 제거하여 / 王殄厥妖
크게 놀라운 공을 드러내실 때 / 丕顯神功
참여하여 도운 이는 오직 공이어서 / 贊贊惟公
큰 종정에 공훈을 새기었네 / 勒勛景鍾
공의 명성은 높고 높건만 / 公名隆隆
공은 더욱 상을 주어 몸을 낮추었네 / 公愈匑匑
그리하여 편안하게 하니 / 以克保庸
마음가짐 부드럽고 담박하였네 / 游心冲泊
사치를 경계하고 검약한 것을 즐겨하여 / 徵汰憙約
자손에게 약석이 될 훈계를 남기었네 / 遺誡藥石
선한 이가 반드시 창성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 善不必昌
중년으로 세상을 떠났다네 / 中身云亡
저 하늘을 우러러보니 / 粤瞻蒼蒼
아름다운 자손들이 / 藹藹蘭蓀
공의 가문에 빽빽하게 섰으니 / 森立公門
공은 길이 존재하시도다 / 公乎長存
이에 명의 글을 새겨 / 爰刻銘章
아름다운 광채를 드리우노니 / 式垂休光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으리라 / 與國無疆
하였다.
8.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감춘추관사 세자부 길창부원군 시 익평공 권공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世子傅吉昌府院君諡翼平公權公碑銘 幷序)
신숙주(申叔舟)
적이 들으니, 뿌리가 깊은 것은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먼 것은 흐름이 반드시 길다는 것은 영원한 이치다. 나의 벗 권공(權公)은 휘가 람(擥)이며, 자(字)는 정경(正卿)이니, 그의 선조는 본래 김씨(金氏)였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에 알지(閼智)가 시림(始林)에서 탄생하여 김씨라고 일컬은 것은 일이 지극히 기이하다. 그의 후예가 박씨(朴氏)ㆍ석씨(昔氏)와 더불어 교대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휘가 행(幸)이라는 사람에 이르러서 안동군(安東郡)을 지키다가 고려 태조에게 인정을 받아 비로소 권(權)이라고 사성(賜姓)하고 안동부로써 식읍(食邑)을 삼았으며, 벼슬은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9대를 지나 복야(僕射) 휘 수평(守平)에 이르러, 맑은 덕이 있어서 세상에 드러났다. 복야가 한림 학사 휘 위(韙)를 낳았는데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를 잘 안다고 알려졌다. 학사가 찬성(贊成) 휘 단(㫜)을 낳았다. 네 고을을 다스렸으며 다섯 도의 안찰사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호를 몽암(夢菴), 시호를 문청(文淸)이라고 하였다. 문청이 시중(侍中) 휘 부(溥)를 낳았으니, 공훈과 덕이 세상에 으뜸이었다. 영가군(永嘉君)을 봉하니, 영가는 즉 안동이다. 호를 국재(菊齋), 시호를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휘 고(皐)와 휘 희(僖)는 삼대에 걸쳐 봉작을 승습하였다.
희가 휘 근(近)을 낳으니, 성리학으로써 우리나라 사람들을 개발하였다. 도덕과 문장이 전배(前輩)들보다 높이 뛰어났다. 명나라의 태조 고황제가 한 번 보고 존경하여 소중하게 여기었으니, 이름이 온 중국에 떨치었다. 벼슬이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길창군(吉昌君)에 이르렀다. 호를 양촌(陽村),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좌의정(左議政)을 추증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이 휘 제(踶) 옛 휘 도(蹈)를 낳으니, 문장이 대를 이었다. 장원급제로 뽑혔으며, 우리 세종 임금이 중하게 믿는 바이다. 벼슬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다. 호를 지재(止齋), 시호를 문경(文景)이라고 하였다.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을 추증하였으니, 공의 고(考)이다. 모두가 공(公)으로 인해서 증작(贈爵)이 있은 것이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영락(永樂) 병신년 5월 을미일에 공을 낳았다.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을축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천여 년이 된다. 대대로 드러난 공과 아름다운 덕이 있어서 고관(高官)을 맡았으니, 어찌 이른 바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흐름이 길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크고 트이고 넓고 우아하며, 뜻이 크고 기이한 꾀가 많았다. 책을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서 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반드시 상당(上黨) 한공 자준(韓公子濬)과 함께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번번히 머물러 글을 읽고, 문장을 지어 회포를 풀었다.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으니, 나이 35세가 될 때까지 오히려 뜻이 커서 운치 있게 노니는 것만을 일삼았다.
남이 권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단번에 잇달아 삼장(三場)을 장원급제하였다. 지금 임금이 그때 바야흐로 잠저(潛邸)에 있으면서 명령을 받고 《무경(武經)》을 주해(註解)하고 있었다. 공이 시종(侍從)이 되니 임금이 공에게 큰 재간이 있음을 알고 지극히 관대하였다. 그때 권간이 세력을 농간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흔들렸는데, 공이 먼저 큰 계책을 세우고 또 자준(子濬)을 추천하니, 임금이 곧 두 분에게 맡겨서 기획을 짜고, 충신과 의사를 불러 모아 모발에 빗질 하듯, 곡식의 싹을 호미로 매듯하여 드디어 대란을 평정하였다. 논공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주었으며, 임금이 즉위하여서 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주었으니, 공이 모두 제1등이었다.
처음에 간사한 무리들이 서로 얼켜서 안팎으로 번갈아 선동하여 포학한 불꽃이 치성하였다. 그런 것을 한 치의 병장기도 한자의 칼날도 쓰지 않고 한갓 충의만으로 스스로 분기하였다. 비록 천명의 돌아감이 있고 참 임금이 천운에 응하였다고는 하나, 진실로 공의 계책과 덕망이 앞뒤로 도와서 성취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충의의 무리들이 한편으로 지지하여 하루아침이 못 되어 이렇게 청명한 천하를 이루어 종묘 사직을 안정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정난(靖難)하고 좌익(佐翼)하여 모두 훈렬(勳烈)에 으뜸되는 것이 마땅하다. 차례를 초월하여 동부승지를 임명하였다.
우리나라 법에 과거에 급제한 자는 상례에 따라 연회를 열어서 그의 어버이를 영화스럽게 하여 주기로 되어 있다. 공이 대부인을 위하여 영친연(榮親宴)을 개설하니, 학같이 흰머리를 가진 어머니가 마루 위에 있고 고관대작이 문전을 메웠다. 임금이 그때 영의정과 더불어 또한 잔치에 참석하여 친히 대부인에게 축수하니, 영화가 온 세상에 빛났다. 이조 참판에 임명하고 길창군(吉昌君)을 봉하니, 길창은 또한 안동의 땅 이름이다. 임금이 즉위하자 황제의 고명(誥命)을 청하기 위하여 공이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숙주(叔舟)도 또한 함께 갔다. 공은 풍채가 거룩하여 바라보기만 하여도 덕과 도량이 있는 것 같아서 중국 사람들이 사랑하여 사모하고 존경하여 예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고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기뻐하여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모두 원종공신(元從功臣)의 호를 내리고, 공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집현전대제학(吏曹判書集賢殿大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승진시켰다. 여러 번 승진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겸판이조사(判中樞院事兼判吏曹事)가 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허(氣虛)한 것을 근심하여 매양 복잡하고 번극한 것을 싫어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한가하게 살기를 비니, 임금이 손수 편지를 써서 회보하기를, “경과 나는 서로 마음과 덕이 합치한다고 하는 정도로써 논할 수는 없다. 실로 하늘이 낳게 한 것이다. 경이 터럭만큼이라도 사심이 있었거나, 나에게 터럭만한 욕심이라도 있었다면, 물불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몸과 처자를 잊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여 드디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경이 실로 공업의 주인인 것이다. 이제 경이 은거하여 산수의 취미를 찾아 가려고 하는 글을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경이 어찌 하늘이 맡긴 임무를 벗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우찬성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광보국 우의정을 제수하고, 좌의정에 승진시켰다.
정난(靖難)하던 처음에 있어서 간사한 무리를 내쫓고 현능(賢能)한 이를 발탁하며, 굽은 것을 바로잡고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는 데는 공이 실로 흉금을 열어 임금을 인도하고 은밀히 보좌하였다. 정승이 되어서는 관대하고 여유 있고 즐겁고 간이하며, 방정하고 엄격하며 침착하고 태연하였다. 힘써 기성(旣成)의 법을 준수하였으며, 그 대체를 보존하고 그 세절(細節)은 생략하였다. 경륜을 다하지 못하고 마침내 병으로 해임을 빌어 정승을 면하였다. 그러나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모두 사람을 보내어 가서 자문하였으며, 먹을 것을 내리고 문병하는 사자가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병이 점점 위중하여지니, 내의(內醫)를 시켜 약을 지키게 하고, 태관(太官 궁내에서 백관의 찬선(饌饍)을 맡은 관원)은 부엌일을 잇달게 하여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화(成化) 원년 을유년 2월 갑신일에 졸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반찬을 들지 않고 정사를 정지하였다. 부증(賻贈)에 더함이 있고 관에서 장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크고 작은 관원과 인민들이 높고 애석해 하여 탄식과 슬픔이 길에 차고, 친구들은 달려가 부르짖으며 슬퍼하였다.
나는 매양 공과 더불어 벼슬과 영화가 성대하고 가득해졌다고 하여 다투어 물러나기를 빌고자 하였더니, 공이 마침내 먼저 실천하여 어지러운 티끌 속에서 벗어나, 충정하고 유연하게 심신을 보양하게 되었으므로, 마땅히 높은 수를 길이 누릴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일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이치도 또한 신빙하기 어렵단 말인가. 처음에 공이 물러가실 때, 면관(免官)의 허가 문서가 밤에 계하(啓下) 되었으므로 숙주가 일어나서 비지(批旨)의 제목을 보고 앉은 채 아침을 기다렸더니, 공이 과연 시 두어 편으로 스스로 자랑하기를,
지금부터는 한 승상이 부럽지 않구나 / 從今不羨韓丞相
한 필 말로 서호길 홀로 오가리 / 匹馬西湖獨往還
하였다. 나는 시를 보고 망연자실하였다. 일찍이 해마다 봄을 완상하자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공의 집은 남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복숭아와 오얏의 꽃이 만발하여, 붉고 흰 꽃빛이 눈앞에 찬란하였다. 한 번 상춘(賞春)의 자리를 열었을 뿐, 내가 해마다 북방의 진영을 순시 독찰하였으며, 돌아오면 일이 번잡하였고, 공도 병에 들어서 두 번 다시 약속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 나 또한 평소의 뜻대로 벼슬에서 물러남을 얻었으므로 무거운 짐을 벗고 조용히 노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공이 가시어 다시는 공을 따라 노닐 수 없게 되었으며, 죽음과 더불어 같이 가버렸구나. 아, 슬프도다.
공은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의 손자인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원(原)의 딸에게 장가들 었다. 영원군부인(寧遠郡夫人)으로 봉하였다. 2남 8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걸(傑)이라고 하며, 보공장군(保功將軍) 행충좌위호군(行忠佐衛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건(健)이니 어리다. 맏딸은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청원군(淸原君) 한서귀(韓瑞龜)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우사어(右司禦)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사헌 감찰(司憲監察)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행 호군(行護軍) 남이(南怡)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은 풍저창 직장(豐儲倉直長)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시조로부터 세상을 빛나게 한 남은 경사가 공에게 이르러 더욱 커졌다. 이미 크게 하고, 그의 수(壽)를 인색하게 함은 어찌된 일인가. 일찍이 듣건대, 베푼 것이 두터운 자에게는 보답이 융성하다고 하였는데, 공의 덕을 기르고 복을 흘러 보냄이 오히려 아직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가지의 무성함과 흐름의 장원(長遠)함은 이미 징험하였다. 또 장차 그것을 기대하는 것인가. 4월 정유일에 충주(忠州) 수읍(首邑)의 서쪽 미법곡(彌法谷) 선공(先公)의 무덤 아래에 장사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악석(樂石 깨끗하고 견고해서 악기를 만들 수 있는 돌)을 다듬어, 장차 공의 훈덕(勳德)을 길이 전하고자 하매, 공의 서랑(婿郞)인 청원군(淸原君)이 나에게 부탁하여 글을 청하였다.
아, 공의 벼슬의 경력이라든가 훈업이라든가, 임금의 권애(眷愛)가 돈독하였던 것 등은 따로 나라의 사기(史紀)에 있을 것이니, 본래부터 여기에 자세히 기술할 필요가 없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친척을 대우하고 친구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다는 것도 비록 기록할 죽간(竹簡)과 비단을 쌓아 놓더라도 또한 다 기술할 수는 없다. 우선 대략 줄거리만 기술하고, 마침내는 슬퍼하고 애석해 하는 심정을 적는데 귀결될 뿐이다. 숙주는 공과 더불어 나이가 서로 비슷하여 젊을 때부터 같이 교유하면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주겠다고 농담으로 다투어 자랑하였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구나. 아, 슬프도다. 황천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이 글을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 슬프다.
명에 이르기를,
멀도다 공의 시조가 / 遠矣公始
시림에서 처음 나서 / 出自始林
고려의 초기에서 / 高麗之初
김을 권으로 바꾸었네 / 權而改金
경사를 누적하고 광택을 흘려 보내 / 積慶流光
초헌과 관복으로 차림 마주 보며 잇달았네 / 軒冕相望
어떤 이는 공덕으로 / 或以功德
어떤 이는 문장으로 / 或以文章
아름다움 이어받고 꽃다움 전하더니 / 襲美傳芳
공에게 이르러서 더욱 펼쳐졌네 / 至公彌張
뿌리 깊어 가지 크고 / 相深源遠
근원 멀어 흐름 길다 / 枝茂流長
공이 처음 분기할 때 / 公奮厥初
글읽기만 일을 삼고 / 讀書爲業
높이 높이 뛰어나서 얽매이지 아니하며 / 卓犖不覊
호수와 산을 찾아 떠돌아 노닐더니 / 湖山浪跡
단번에 과거삼장 장원급제 하였으니 / 一擧三魁
하는 일 광방하고 종적은 기이하다 / 事曠跡奇
대군자는 / 知大君子
이와 같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네 / 所謂如斯
권간들이 정권 훔쳐 / 權姦竊柄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며 / 噓寒吸熱
정권을 농락하였네 / 操握弄機
화가 종사에 미치게 되었더니 / 禍及宗祐
거룩한 우리나라 하늘이 돌보시어 / 天眷大東
우리의 성철하신 임금을 낳아 주시고 / 生我聖哲
도와서 같이 구원할 / 贊襄共濟
어진 보필을 내리셨네 / 錫之良弼
천명과 사람 마음 돌아감이 뚜렷하여 / 天命人歸
촛불에 나방 같은 권간들이 영향을 받았네 / 影響蛾燭
간흉을 제거하고 / 芟夷姦兇
준걸한 인재를 골라 뽑아 / 簡拔俊特
어지럽고 혼잡한 것은 분석하여 떼어내고 / 析離紛庬
막히고 정체된 것은 열어 인도했네 / 濬導滯塞
저들의 빼앗고 훔치던 것 물리치고 / 祛彼敓𣀮
우리의 윤택함을 펼치었네 / 敷我需澤
공은 묘당에 들어가 정승이 되어서는 / 入相廟堂
도덕을 넓고 크게 세상에 선양하니 / 恢弘道德
임금은 공에게 시귀인 양 앞길을 묻고 / 君有蓍龜
나라는 공에게 주석처럼 의지하였네 / 國有柱石
하늘이 어찌하여 서러워하지 않고 / 天何不愸
공의 연령 그렇게도 빠르게 빼앗는고 / 而奪其齡
우리들의 우정은 진정 즐겨하여 / 嬉戱眞情
아교와 옻칠처럼 망형의 사이였네 / 膠漆忘形
그대를 아껴하고 그대를 슬퍼함은 / 惜公慟公
공에서 그러하고 사에서도 그러하네 / 我公我私
슬프다. 공이시여 / 嗚呼公乎
여기에서 끝나는가 / 而止乎玆
죽고 삶은 변화하고 / 死生變化
가는 세월 머물지 않아 / 逝者不留
봄철은 제대로 동산을 지나는데 / 春過東山
나 홀로 서주에서 통곡하네 / 痛哭西州
덕과 공을 기록함은 / 記德銘勳
큰 솜씨가 없음이 부끄러워 / 愧乏鉅手
다만 평생의 정의만 진술하여 / 但列情素
후인에게 보일 뿐이네 / 以示于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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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권 끝.
첫댓글 좋은 자료들과 함께 합니다.
변계량(卞季良)과 신숙주(申叔舟)의 글들이 많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잘 가져 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