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부슈카 시장은 러시아 불법 경제의 창구였다. 상인들은 경찰과 세무관들의 눈길을 피해 나무 밑에서 불법복제 CD를 거래하거나 밀수한 스테레오 제품들을 트럭 짐칸에 싣고 팔았다. 그러나 요즘 고르부슈카 시장은 광명의 세계로 나왔다. 옛 소련 시절의 한 TV 공장을 개조해 만든 소비자 전자제품 쇼핑몰에는 최첨단 완전평면 TV 시청실을 갖춘 호화 가전제품 매장, 이동전화 가게 등 2천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다.
매일 7만5천명이 이 쇼핑몰을 방문한다. 쇼핑몰의 최대 지분 소유자의 대변인 이고르 토카르는 “이곳은 유럽 최대의 음악·비디오카세트, 음악 CD, DVD 매장일 것”이라며 고르부슈카는 더 이상 러시아의 창구 내지는 러시아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러시아는 완전히 별개 나라다. 모스크바는 모스크바일 뿐”이라는 것이다.
15년 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개혁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이래 러시아는 정상적인 시장경제 국가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실제론 모스크바는 상당히 전형적인 유럽지역의 수도가 되고 있는 반면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들은 헛되이 진정한 변화를 기다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도시 번영을 이룩한 다른 ‘오아시스’들 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도 포함되지만, 오직 모스크바만이 러시아 전역의 전통적 중심지 위상을 활용해 현대적인 서비스 경제를 구축해가고 있다.
공식적으로 모스크바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에 비해 3배 더 많지만(2002년 5천5백달러) 대다수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격차가 그보다 더 크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 등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이는 두가지 완전히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모스크바의 언론계 거물 올레크 크리푸노프는 “문제는 이 모스크바라는 ‘기관차’가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들을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기관차’의 나머지 칸들을 떼어내 버리고 빠른 속도로 떠나가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중심적 위상은 중앙정부 입안자들이 사소한 결정까지도 도맡았던 소련 시절에서 비롯됐다. 소련이 붕괴되자 재벌총수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지만 그들 역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연줄에 의존한다. 이제 새롭게 생겨난 시장의 법칙은 사업·금융·연예·언론·무역·문화·패션이 점점 더 모스크바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뉴욕·워싱턴·LA가 한데 합쳐진 것 같다. 모스크바의 한 러시아 은행에서 일하는 미국인 버나드 서처는 “모스크바는 항상 러시아 제국의 중심에서 주변 지역의 좋은 것들을 빨아들이는 기생충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내 모든 은행 자산의 84% 이상이 모스크바에 몰려 있다.
1억4천5백만 인구 중 약 7%만이 모스크바에서 살지만 2002년 러시아 GDP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21%였다. 1997년의 14%에 비해 비중이 더 커진 것이다. 부유층과 개인사업이 모스크바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격차는 그보다 더 클 것이다. 세계은행의 경제전문가 크리스토프 루흘은 “러시아에서는 어디서나 임금 수준을 낮춰서 신고하고, 고임금층은 아마도 더 많이 낮춰서 신고할 것이다. 특히 민영 부문은 더 많은 것을 감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모스크바의 돈 중 많은 부분은 멀리 시베리아, 또는 태평양상의 사할린섬에서 채굴한 석유로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가스프롬 같은 러시아 석유회사들은 본거지를 둔 도시(보통 모스크바)에 세금을 낸다. 모스크바는 쭉 뻗은 새 도로를 내고 도모드예도보 공항을 호화롭게 개조하는데 돈을 쏟아붓고 있다. 반면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들은 황폐화되고 있다. 게다가 각종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이익금이 입금되는가 하면, 호황을 누리는 서비스 경제의 주춧돌이 되는 새로운 전문 직업인 계층을 창출하고 있는 곳이 바로 모스크바다. 2000년 서비스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러시아 경제의 45%, 모스크바 경제의 75%가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재벌총수를 대체할 중소기업가 계층을 새로 만들어내지 못한 점을 개탄하고 있지만, 그같은 우려는 대체로 모스크바 외의 지역에나 적용된다. 보험사·헬스클럽·신문판매대·시장조사기관, 그리고 부호들이 자주 출입하는 고급 식당 벨리 크바드라트 같은 레스토랑 등 러시아의 모든 중소기업 중 4분의 1은 모스크바에 있다. 모스크바의 또다른 특징적인 사업으로는 부유층 자제를 위한 새로운 개념의 생일파티 대행업체들을 들 수 있다. 그 업체들은 해리 포터를 테마로 한 떠들썩한 파티를 기획하거나 고객에게 파티용 코끼리를 대여한다.
한편 건설업체와 건축 설계사들에게는 신흥 부자들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모스크바 도처에는 펜트하우스(꼭대기층 고급 아파트), ‘지능형 건물 관리 서비스’, 실내 수영장, 스케이트장들을 갖춘 새로운 주거용 초고층 빌딩들이 산재해 있다. 모스크바 교외 지역에서는 소박한 집, 디즈니랜드처럼 괴기스럽게 꾸민 집 등 새 가옥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계 은행 델타 크레디트는 초기 단계에 있는 주택 구입자금 대출시장에 뛰어든 세 회사 중 하나로 지금까지 8천만달러를 대출해줬는데 대출상품 판매는 연간 1백50%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제임스 쿡 행장은 말했다.
이런 거래의 97%가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모스크바 중산층에게는 해외여행과 도요타나 포드 차 소유가 기본이 돼가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ROMIR의 옐레나 바슈키로바는 모스크바에서는 이제 “서구 사회와 다를 게 없는” 광고 스타일이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있는 모든 이동전화의 약 40%는 모스크바인들이 소유한 것이다. 소매업도 호황이다. 스웨덴 가구 소매업체인 이케아의 러시아 지사 대변인 이리나 바넨코바는 “모스크바는 확실히 러시아가 아니다. 세계 전역의 다른 매장들과 비교할 때 우리 모스크바 매장은 런던·파리·뉴욕 매장들과 대등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점점 더 국제화돼가는 모스크바는 (새로운 제도의 도입으로 이주 수속이 복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골의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 결과 모스크바는 고령화돼가는 농촌 지역과 더더욱 조화를 못 이루고 있다. 모스크바대 경제학도인 비탈리 마슬로프(20)는 더 이상 러시아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 마슬로프는 자투리 시간에 각각 별개의 개인사업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일을 도와서 번 돈으로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취미인 디스코 볼링을 즐긴다. 그는 “서구 도시들과 비교해볼 때 모스크바가 더 박진감이 넘치고 개발이 덜 됐으며 장래성이 더 크다. 나는 서구 도시보다 모스크바가 더 낫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모스크바는 분명 더 흥미진진하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부(富)는 모스크바 한곳, 그중에서도 몇몇 사람들의 수중에 집중돼가고 있다. 러시아 투자 중개업체인 UBS 브런즈윅의 2002년 조사 결과 64개 최상위 개인회사 중 54개 회사를 8개의 ‘금융산업그룹’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산업그룹은 모두 모스크바에 기반을 둔 재벌총수들을 뜻한다. 현재 큰 논쟁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러시아가 캐나다처럼 “문명화된 자원경제국”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원이 풍부한 독재국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루흘은 말했다. 그는 “만일 지금처럼 부의 집중이 타파되지 않으면 러시아는 나이지리아처럼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추세가 승리를 거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낙관론자들은 모스크바의 부는 곧 조금씩 분산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케아 같은 대형 소매업체들은 지방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카네기재단의 앤더스 애슬룬드 같은 경제전문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예카테린부르크, 그리고 돈강 유역의 로스토프 등 러시아의 일부 다른 대도시들이 모스크바의 아성에 도전할 채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UBS 브런즈윅 워버그의 애널리스트 피터 분은 러시아 나머지 지역의 성장률이 “모스크바만큼이나 높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여기에 의문을 표한다.
미국인 은행가 서처도 마찬가지다. 그는 러시아의 시골은 기껏해야 번영을 누리기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모스크바를 따라잡을 정도로 번영을 누릴 수 있을까. 그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금 추세로 볼 때 러시아는 두개의 상이한 경제체제, 더 나아가 상이한 경제문화를 지닌 나라로 부상하고 있다.
모든 대기업들이 모이는 모스크바에서 기업들은 서로 협력하고 견제하면서 자신들과 모스크바를 부유하게 만든다. 지방에서는 지금도 재벌총수가 종종 막강한 지방정부 수장과 결탁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는 발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 모스크바는 점점 더 유럽의 현대 도시처럼 발전할지 모르지만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뒷걸음질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