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유학 당시 장익 신부(오른쪽 네 번째, 전 춘천교구장 주교), 유학생들과
함께한 조규만 주교(오른쪽 두 번째).
▲ 조규만 주교(오른쪽 가운데)가 2006년 1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주교
서품식에서 기도하고 있다.
▲ 조규만 주교가 2013년 4월 제4대 평화방송·평화신문 이사장 취임미사에서 강론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 2014년 12월 서울구치소에서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를 주례한 조규만 주교가
최고수(사형수) 손을 잡아주며 인사하고 있다.
조규만 주교는 1968년
소신학교(성신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본당 주임이었던 고(故) 이창숙 신부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결정적이었다. 이 신부는
“왜 소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내지 않았느냐. 신학교에 가야지”라고 했고, 조 주교는 이에 “네”라고 응답했다.
소신학교 시절 6년
내내 반장이었던 조 주교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와 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나 그를 가르쳤던 교사들은 조 주교를 ‘우직하고
꾀부리지 않는 성실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군종 신부 꿈꿨지만 “유학가라”는 말씀에
“네”
조 주교는 아버지 조시환(아우구스티노)씨와 어머니 지복련(클라라)씨 슬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 주교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개신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결혼하면서 가톨릭 신자가 됐다.
군인이던 아버지 영향을
받은 조 주교는 1982년 사제품을 받은 뒤 군종 신부가 되고 싶어 했다. 연희동본당 보좌를 지내며 그런 마음을 먹고 있던 조 주교에게
경갑룡(당시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는 유학을 권했다. 이번에도 그는 역시 “네”라고 답했다.
훗날 조 주교는 “하느님께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셨다. 나는 유학이라는 걸 꿈꿔 본 적이 없었지만, 로마로 유학 가서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게 됐다. 사제로 살아가는 데는 그것이 훨씬 도움됐음이 틀림없다”고 회고했다.
조 주교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유학하며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귀국한 그는 가톨릭대 신학대 교수로
부임했다. 신학교에서 지낸 시간은 조 주교에겐 사제 생활의 황금기였다. 조 주교는 신학생에게 큰형 같은 존재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신학생들과
축구 경기를 하며 함께 몸을 굴리고 땀 흘릴 줄 아는 사제이기도 했다.
겉으론 딱딱해 보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사랑과 정이 많다는
게 제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그는 당시 200여 명이던 신학교 전교생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 “조규만 주교님은 항상 어머니 같은 따뜻한 사랑으로 사제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사제가 어머니 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 주교가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임명돼 신학교를 떠날 땐, 그를 형처럼
따르던 신학생들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조 주교는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원리원칙을 지키는 덴 철저했다. 특히 신학적으로도 가톨릭
교회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전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조 주교를 아는 이들은 “조 주교가 맡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하고 할 말은 분명하게 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부드럽지만 강직해서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 동기 신부는 “조 주교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조 주교는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재임하던 중 2006년 1월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됐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교 표어로 택한 조 주교는 주교 서품식 때 ‘제가 여러분을 위해 있다는
것은 저를 두렵게 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저를 기쁘게 합니다’라고 말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말을 빌려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는 언제나 사제, 신자들 곁에서 함께 했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맡아 진행
조 주교가 잊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유머다. 그는 강의나 강론할 일이 있을 때면 늘
우스갯소리를 하나씩 준비해 오곤 했다. 진지하게 강론을 이어가다 “요즘 이런 말이 있답니다”라며 준비한 우스갯소리를 들려줘 딱딱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풀곤 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무덤덤하게) 툭 던지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노력해서 준비한 이야기”이라고
귀띔했다.
우스갯소리 하나도 철저히 준비할 만큼 조 주교는 주교 직무를 세심하게 수행했다. 우직하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성품으로
교구장을 보좌했고, 2014년엔 서울대교구 총대리가 됐다. 또한 2014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사목방문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던
것도 조 주교 역할이 컸다. 조 주교는 당시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최일선에서 여러 교구와 각계각층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했다. 조
주교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주셨기에 일이 잘 진행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청소년·청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
조 주교는 또 청소년 담당 교구장 대리, 2006년
신설된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며 청소년ㆍ청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는 2007년
제주교구에서 제1회 한국청년대회를 성대히 개최하며 한국 교회 청년 사목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매년 12월 성탄 때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았던 조 주교는 노숙인 복지시설, 소년의 집, 구치소 등에서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을
몸소 전했다.
조 주교는 2014년 4월 열린 제1회 한국가톨릭교육실천네트워크 배움콘서트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성경」 「가톨릭교회 교리서」 「준주성범」”이라고 답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버킷리스트)이 무엇이냐는 물음엔 “은퇴하면 기도학교를
세우고 싶다”고도 했다. 교회 가르침과 기도. 그의 삶을 지탱해 온 두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