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마태복음 21 : 28 – 32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가겠나이다’라고 말하고 가지 아니한 맏아들과 ‘싫소이다’라고 말하고 그 후에 뉘우치고 가서 일 한 둘째 아들의 비유는 당시 교권주의자들 뿐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교훈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장로들은 산헤드린의 의원들이며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사회, 교육을 맡은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불구자들을 고치시는 것들을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15)이라고 했습니다. ‘이상한’의 원어는 ‘비상한’, ‘놀라운’, ‘찬양할 말한’이란 뜻입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백성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더욱이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으시고, 무엇보다도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한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12,13)
시편에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라”(시8:2)는 말씀을 기억하고,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소리 지른 것을 보고 그들은 노했습니다.
‘노하여’란 분노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겁을 먹고 마음속으로 두려워 떨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예수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맹인과 불구자들을 고친 것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의 권위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상한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비상 모임을 갖고 의논하였을 것이며,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을 대표로 예수께로 보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로부터 대표로 보냄을 받은 그들은 예수님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제지할 뿐 아니라 조사해서 범법자로 체포하고 나아가서 죽이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실 때는 그들은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전 체계를 위협하자, 예수를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위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허용한 것이므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낸 것은 그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누가 이 권위를 주었으며 네가 무슨 권위로 하느냐고 물은 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적절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한다면 신성 모독한 죄로 정죄하고자 하는 두 가지 함정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라’고 하시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고 묻고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그들은 요한을 죽인 사실을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고,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25-26)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27)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고 하시며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당시 최고의 교권주의자들의 불의와 위선적인 믿음을 폭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말씀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며 ‘맏아들’은 모든 종교적 특권을 갖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인 그들을 가리키며, ‘둘째 아들’은 그들이 죄인으로 취급하는 세리와 창녀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애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28,29)란 말씀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와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를 단적으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어야 했던 최고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성직자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지배하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부인하며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으로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물며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들의 것으로 빼앗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39)
둘째 아들도 역시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싫소이다’라고 일언지하에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싫소이다’고 하며 거절했으나 곧 뉘우치고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고 포도원으로 가서 일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녀를 상징하였습니다. 당시 세리와 창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듣고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둘 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고는 했으나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합당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굳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아버지의 뜻에 가깝게 행했는지를 따진다면 당연히 둘째 아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셨고 그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31)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다’는 말씀은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는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즐겁고 빠질 수가 없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도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기에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에 ‘먼저’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순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라는 말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빠지고 하다가도 늦게나마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탕자가 맏아들보다 먼저 아버지께서 베푸신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맏아들이 후에 잔치에 참석하였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고’와 ‘믿고’,란 단순한 세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하느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던져져 영벌을 받느냐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끝내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믿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믿지 않고 돌아가서 공회에 보고하고 의논하여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끝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음부에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는 늦게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중에 있다는 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이 권위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섬기는 자 같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 맏아들과 같은 자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끝내 믿지 아니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합시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아버지의 뜻대로 일합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