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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점(落點)
점을 찍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관원의 임명 절차로 벼슬아치를 뽑을 때 임금이 뽑을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던 일을 말한다.
落 : 떨어질 락(艹/9)
點 : 점 점(黑/5)
낙점(落點)은 ‘점을 찍다’라는 뜻이다. 즉, 여러 사람들 중에서 훌륭한 인물을 골라 뽑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앉히는 것을 말한다. 여러 후보가 있을 때 그중에 마땅한 대상을 고름. 또는 조선시대에, 이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 임금이 이조에서 추천된 세 후보자 가운데 마땅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던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吏曹)에서,무관은 병조에서 판서 이하 당상관들이 모여 도력장(都歷狀:조선시대 관리들의 복무 성적을 기록한 서류)에 따라 심사한다. 조선 초기부터 재직 관리의 복무 성적을 매년 6월과 12월에 심의하고 결정하였는데 이들을 합쳐서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하였다. 도력장(都歷狀)은 도목정사(都目政事) 중에서 관리의 성적 기록표를 가리키는 말로, 일찍이 신라 때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데서 비롯하였다.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은 각각 3명의 인재를 추천할 의무를 가졌다. 천거(薦擧)란 관리로 등용할 수 있는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며 인재를 추천하는 사람을 거주(擧主)라고 했다. 만약 추천된 사람이 관리로 임명되었더라도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추천을 했던 거주가 연대 책임을 지도록 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사람을 추천하는 일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조(吏曹)와 병조에서는 이렇게 추천을 받은 사람들을 두고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적격 후보자 3명씩을 3년마다 신춘 첫 달인 정월에 선발한 뒤 삼망(三望)을 올린다. 그때 왕은 이 3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그 중 가장 적격자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붓으로 점을 찍었다. 이것을 낙점(落點) 또는 비하(批下)라 하였고 그 결과는 조보(朝報, 오늘날의 官報)에 발표하였다. 점이 찍힌 사람의 편에서 보면 수점(受點)으로 되지만 점을 찍은 왕의 편에서 보면 낙점(落點)으로 되는 것이다.
등용문(登龍門)과 낙점(落點)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때 정의파 관료의 대표적 인물로 이응(李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청주자사(靑州刺史), 촉군태수(蜀郡太守), 탁료장군(度遼將軍)을 거쳐 하남윤(河南尹, 하남 지방의 장관)으로 승진하자 그의 고속출세를 시기하던 환관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참소를 당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투옥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력자의 추천으로 다시 복직한 후 사예교위(司隸校尉, 오늘날 경찰청장)가 되어 퇴폐한 환관 세력과 맞서 싸우면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 나갔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태학(太學)의 청년 학생들은 그를 존경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응'이라 평했으며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이를 `등용문'이라 일컬으며 몹시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 後漢書 李膺傳).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의 주해(註解)에는 이 등용문의 고사를 언급하고 있다. 용문(龍門)이란 황하(黃河) 상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인데 양쪽 기슭이 가파른 절벽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어 마치 문(門)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흐르는 여울은 어찌나 세차고 빠른지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이 협곡 아래에는 큰 폭포가 있어 매년 늦은 봄에 잉어들이 각 물줄기를 따라 몰려들어 격류를 거슬러 위로 뛰어오른다. 용문을 뛰어오른 잉어는 곧바로 용이 될 수가 있다. 뛰어오르지 못한 잉어는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가 그저 잉어로 남게 된다. 매년 용문을 통과하는 잉어는 72마리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리어도용문(鯉魚跳龍門), 즉 등용문의 고사가 생겨났다.
그후 용문에 오른다는 이 말은 과거에 급제(及第)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에 서는 일을 말하게 되었다. '등용문'에 반대되는 말을 '점액(点額)'이라 한다. '점(点)'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인데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물고기를 말한다. 즉, 점액(点額)이란 용문(龍門)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 잉어가 상처만 입고 이마에 점이 찍혀서 돌아간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요한 시험에서 낙방하거나 경쟁에서의 패배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선량들을 뽑는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저마다 자신이 우리들을 대표할만한 인물이요 적임자라고 때로는 자랑하면서 때로는 읍소하면서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각 정당의 추천을 받을 때까지 이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을 알리는데 주력해 왔고 그 결과 마침내 어렵게 공천이라는 1차 관문을 통과했다. 이들의 행보를 보면서 등용문의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용문을 오르기 위해 폭포에는 수많은 잉어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 몇 마리가 1,2차 관문을 통과해서 최종 대결에 나선 것이다. 승부는 이제부터이고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는 승자는 오직 한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吏曹)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판서 이하 당상관들이 모여 도력장(都歷狀)에 따라 심사한다. 조선초기부터 재직관리의 복무성적을 매년 6월과 12월에 심의하고 결정하였는데 이들을 합쳐서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하였다. 도력장은 도목정사 중에서 관리의 성적기록표를 가리키는 말로, 일찍이 신라 때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데서 비롯하였다.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은 각각 3명의 인재를 추천할 의무를 가졌다. 천거(薦擧)란 관리로 등용할 수 있는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며 인재를 추천하는 사람을 거주(擧主)라고 했다. 만약 추천된 사람이 관리로 임명되었더라도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추천을 했던 거주가 연대 책임을 지도록 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사람을 추천하는 일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조와 병조에서는 이렇게 추천을 받은 사람들을 두고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적격 후보자 3명씩을 3년마다 신춘 첫 달인 정월에 선발한 뒤 삼망(三望)을 올린다. 그때 왕은 이 3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그 중 가장 적격자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붓으로 점을 찍었다. 이것을 낙점(落點) 또는 비하(批下)라 하였고 그 결과는 조보(朝報, 오늘날의 官報)에 발표하였다.
이번 선거에 출마한 이들을 두고 이제부터 우리는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투표용지에 등재된 이름 옆에 낙점(落點)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선택은 끝이 난다. 잘 못 뽑아놓고 또 다시 4년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각자가 신중해져야 한다.
오늘날에는 투표권을 가진 우리가 이 시대의 왕(王)이요, 동시에 우리가 한 사람만을 낙점하여 우리 군민의 대표로 나랏일을 잘하라고 국회로 추천을 하게 되므로 낙점의 잘잘못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하기 때문이다. 잘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벼슬, 낙점과 제수
연전에 우리 시삼촌께옵서 동지상사 낙점을 무르와, 북경을 다녀 오신 후에, 바늘 여러ㅅ쌈을 주시거늘
이 글은 조선시대의 탁월한 수필, 조침문의 일부이다. 여기에서 ‘낙점을 무르와’는 낙점을 받았다는 말이다. 낙점(落點)은 조선시대에, 이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 임금이 이조에서 추천된 세 후보자 가운데 마땅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던 일을 말한다. 현재는 여러 후보가 있을 때 그중에 마땅한 대상을 고른다는 의미로 쓰인다.
조선실록 세종조에 신하는 하비 대신 낙점을 주장한다. ‘청하건대, 감사의 예에 의거하여 평안도 절제사는 판영변(判寧邊)을 겸임하며, 함길도 절제사는 판길주(判吉州)를 겸임하게 하시고, 하비(下批)의 절차로 임명하던 절제사도 다른 예에 따라 〈삼망을 갖추어〉 낙점하는 절차를 시행하게 하소서.’ 이때 하비(下批)는 관리를 임명할 때에 세 후보자[三望]를 갖추지 아니하고 한 사람만을 상주(上奏)하여 임명하는 일이다.
3품 이하의 당상관(堂傷官)을 임명할 때는 구전(口傳)으로 임명한다. 구전이란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인물을 천거하면 임금이 이를 승인하던 제도로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할 때 3망(三望)을 올려 낙점(落點)을 받던 제도와는 다르며, 한꺼번에 많은 관원을 임명하던 방법이다.
조선시대 벼슬을 얻는 방법으로 제수(除授)가 있다.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을 제수라 한다. 한글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에는 “이제 그 도적을 잡으려 하다가 잡지 못하고 도리어 병조판서를 제수하심은 이웃 나라에도 창피스러운 일입니다”라는 부분이 등장한다.
가사문학의 제1인자인 정철의 관동별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江湖애 病이 깁퍼 竹林의 누엇더니, 關東 八百里에 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이야 가디록 罔極하다.’
정철이 창평, 지금의 담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려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한다. 이 경우를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표면에 삼망(三望) 중에서 낙점을 받았는지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관찰사 벼슬을 제수받았다고 해석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높은 벼슬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능력과 통치권의 적절한 안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도 많다. 높은 벼슬을 하려고 시대에 따라서는 다양한 비리가 끼어들기도 한다. 삼망에 들기 위해 권모술수가 동원이 되고, 교묘히 천거를 하여 낙점을 받도록 하기도 하였다. 어느 시대나 비리가 없던 시대는 없나 보다.
조선시대의 낙점 제도나 제수의 형식은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명자의 낙점이나 제수의 방식은 객관적 자료가 갖는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삶을 전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객관적 자료로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인성이나 지도력 등 관리자의 판단을 반영한 등용제도는 조선시대를 500년간 유지하게 한 힘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수치가 불만을 줄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점수를 산출하는 방식이나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주관적 평가보다 동의하기 어렵게 된다. 낙점의 방식이나 제수의 형식이 현대에 주는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자치단체장인 지방관 임용 절차는 어떠했을까
봉건시대에는 어느 나라나 개인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다. 특히 조선처럼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었으므로, 지금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기 어려웠다. 남자는 벼슬을 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날리는 입신양명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여자는 시부모를 잘 모시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현모양처가 이상적 인물형이었다.
조선시대 남자의 꿈은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이지만, 양반계층 이외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보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그런데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과거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초 과거 응시자의 숫자는 1회에 10만 명 정도였는데, 19세기 말 과거제도가 폐지될 무렵에는 20만 명을 웃돌았다. 이렇게 많은 수험생 가운데 급제하는 숫자는 한 회에 평균 20명 정도였다.
벼슬하기 위해 반드시 과거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 공을 세운 일이 있는 사람의 후손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고, 학문이나 덕행이 뛰어난 인물에게 관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높은 벼슬에 올라갈 수 없었으므로,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하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해도 높은 벼슬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과 급제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략 1만5000명 정도인데, 현종 때까지 280년 동안 약 6600명이 급제했고, 숙종부터 고종까지 220년 동안에는 약 8400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단순한 통계만 보더라도 후기로 가면 갈수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삼천(內三千) 외팔백(外八百)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조선시대 서울의 벼슬자리가 3000개고, 지방의 벼슬자리가 800개라는 뜻이다. 이 숫자는 조선시대 내내 별로 변동이 없었다. 800개의 지방 벼슬 중 330개 정도가 우리가 ‘원님’이라고 부르는 지방관 자리다.
조선시대 지방관은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장과 비슷한데, 행정권 이외에 사법권과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다. 지방관에 임명되면 부임하기까지 여러 가지 부수된 절차가 있었는데, 이 절차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춘향전'에도 신관사또의 부임과정에 관한 대목이 있어서, 이를 역사 자료와 함께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관리 임용 절차의 시작은 서울에서
요즘 ‘신관사또 부임행차’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제주도의 정의현감을 위시해 울산도호부사, 남원부사, 나주목사, 고창현감 등의 부임행차가 바로 그것이다. 각 지역에서 재현하는 행사를 보면 대체로 해당 지역에 신관사또가 부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부임행차 재현은 주로 자치단체에서 열리는 축제의 하나로 기획하는 것이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령이 발령을 받고 부임하는 전반적 절차의 시작은 먼저 서울에서 이뤄진다.
수령(守令)은 다른 말로 원(員)이라고도 하는데, 백성이 말할 때는 존경하는 의미로 ‘원님’이라고 불렀고, ‘사또’라고도 했다. 수령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나온 것으로, 태수(太守)와 현령(縣令)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에 ‘태수’라는 벼슬은 없었지만, 지방관청의 우두머리를 말할 때는 수령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등 각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관리가 바로 수령이다.
왕이 관리를 임명하는 절차의 첫 단계는 ‘삼망(三望)’이다. 어떤 벼슬자리가 비게 되면 관련 부서에서 3인의 후보자 명단을 작성해 왕에게 올리는데, 이것이 삼망이다. 임금은 세 사람의 후보자 명단을 보고, 그 가운데 한 명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서 임명한다. 임금이 점을 찍는 것을 낙점(落點)이라고 한다. 만약 왕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으면 추가로 후보자를 선정해 명단에 올리도록 했으나, 대체로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골랐다.
수령을 임명하는 절차도 마찬가지여서, 임금이 세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을 낙점하는 것이다. 신임 수령이 확정되면 이 소식을 새로 임명된 사람과 그 고을에 알리는데, 이 일은 경주인(京主人)이 담당했다. 경주인은 각 지방에서 서울에 둔 연락사무실의 책임자로, 새 수령이 임명되면 바로 그 사람에게 연락해 필요한 절차를 밟도록 했다.
새로 수령으로 임명된 사람이 해야 할 몇 가지 절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궐에 가서 임금에게 감사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를 사은숙배(謝恩肅拜)라고 하는데, 임금을 직접 뵙고 인사를 하기도 하나, 직접 만나지 못하면 승정원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향해 절을 했다.
그 다음에는 지금의 신원조회에 해당하는 서경(署經)이라는 절차가 있었다. 본가와 외가 그리고 처가에 천민과 혼인한 사실이 있는가를 조사하는 것으로, 벼슬을 받은 당사자가 작성해 제출한 서류를 해당 관청에서 확인한다. 서경을 통과하면 서울의 여러 관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정해진 절차 중 하나였다.
이런 절차가 끝나고 출발하기에 앞서 신임 수령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하직숙배'라고 한다. 앞에서 본 사은숙배와 마찬가지로, 하직숙배도 임금을 직접 만나지 못해 승정원의 관리인 승지에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직숙배 자리에서 중요한 일 하나는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외우는 것이었다.
수령칠사는 수령이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로, 농업과 잠업을 성하게 함, 인구를 늘림, 교육을 일으킴, 군대의 의무를 공평하게 함, 세금 등을 균등하게 함, 소송은 간결하게 처리함,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없앨 것 등이다. 이 일곱 가지를 잘못 외우거나, 내용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벼슬이 떨어지기도 했다.
부임지로 출발 전 비공식 절차 '신연'
서울에서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면 모든 공식적 절차가 끝난 것이다. 이제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가면 되는데, 여기에도 비공식적 절차가 있었다. 신임 수령으로 어떤 사람이 발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경주인이 지방의 고을에 알리면 20여 명의 부임지 관속이 서울에 올라와 신임 수령을 모시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신연(新延) 또는 신영(新迎)이라고 하는데, 관속들이 수령을 부임지까지 모시고 가는 전 과정을 '신연맞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연행차는 공식적 절차가 아니므로, 이 과정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었다. 이 신연행차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있다. 목민심서는 12편으로 돼 있는데, 그중 첫째가 관직을 받고 고을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할 때까지 필요한 내용을 써놓은 ‘부임’편이다. 부임편은 다시 6개 조로 나뉘는데, 각 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벼슬을 받아 부임하는 수령은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비용을 줄이는 일에 힘써야 하는데, 부임행차에 드는 비용도 줄여야한다.
2. 부임할 때 의복이나 기타 장비를 새로 마련하거나,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서적은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3. 임금과 여러 관료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과 신연하러 온 고을의 아전과 하인을 대하는 태도 등을 잘 알아둬야 한다.
4. 서울을 떠나 임지로 갈 때 미신을 믿어 길을 돌아가면 안 된다. 그리고 지나는 길에 들르는 고을 수령들과 잡담이나 하며 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5. 임지에 도착하는 날짜를 점을 쳐 정하지 말고, 날씨가 좋은 날로 정하면 된다. 그리고 관청에 도착하기까지 지나는 길에서는 엄숙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6. 부임한 다음날부터 바로 업무를 시행한다. 고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확한 지도를 그려서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고을의 민폐를 파악하고, 소송을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지침을 만든다.
위 여섯 가지 조목 가운데 셋째에 신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다산은 수령이 신연관속을 처음 만날 때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집안 식구나 하인이 이들 신연관속과 말을 하지 않도록 할 것과 인사가 끝나면 바로 관속을 그들이 묵는 처소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특히 신연관속의 우두머리인 이방(吏房)이 고을 예산을 빼돌리는 방법을 기록한 책자를 바치고, 그 내용을 신임 수령과 상의하는 것이 관례인데, 수령이 된 자는 이방과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산은 강조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신임사또를 맞이하는 이 신연은 계속됐다. 신연맞이는 수령이 아랫사람들에게 권위를 보이기 위한 것인데, 다산 정약용 조차도 이 부조리한 관례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1890년 운양 김윤식이 쓴 글에서는 이 신연행차 제도를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꼽았다. 김윤식은 고을 이방이 “아전과 노비를 데리고 수백 리 혹은 천리 먼 땅에 가서 신관을 맞이해 오는데, 일행의 복식과 기구 및 왕래하고 머무는 비용과 신관의 행차 비용 모두 공금을 유용해 조달한다”라고 했다.
수령이 부임하는 일과 관련된 기록은 모두 양반 지식인의 기록밖에 없지만, '춘향전'을 잘 읽어보면 백성의 눈높이에서 신연행차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변사또의 부임 과정을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연관속이 늦게 상경하자 쫒아낸 변사또
춘향전에서 새로 남원부사로 발령받은 인물은 남촌 호박골에 사는 변악도다. 서울의 원본에는 변악도인데, 전주에서 나온 책에서는 발음이 변해 변학도가 됐다. 원본에서 신임사또의 이름을 ‘변악도’라고 한 것은 이름만으로도 그 인물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성인 ‘변’은 소변이나 대변의 ‘변’을 연상시키고, 이름의 ‘악도’는 문자 그대로 ‘악(惡)한 도(道)’라는 의미다.
변사또가 사는 곳을 서울 남촌 호박골이라고 한 것도 변사또가 그리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다. 남촌은 남산 기슭으로, 지체 높은 양반의 거주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천만 뜻밖의 연줄 덕분에, 말망낙점(末望落點)하였다”라고 했다.
앞에서 관리를 추천할 때 삼망 제도가 있다고 했는데, 첫째로 추천된 사람을 수망(首望), 둘째를 부망(副望), 셋째를 말망(末望)이라고 한다. 말망은 세 명의 후보자 가운데 가장 뒤처진 사람인데, 말망이 낙점을 받은 것을 ‘말망낙점’이라고 한다. 변악도는 세 사람의 후보자 가운데 꼴찌였는데, 연줄 덕분에 운 좋게 남원부사가 됐다는 말이다.
변악도가 낙점됐다는 소식을 들은 남원에서는 신임사또를 모시고 올 신연관속을 서울로 보낸다. 남원의 신연관속은 13일 만에 서울에 도착해 변사또의 집에 가 인사를 드렸다. 변사또는 신연관속이 늦게 올라온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매우 화를 내면서 이들을 나무란다.
그리고 늦게 온 하인에게 남원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보자 남원에서 온 하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일 임금님께 절을 올려 조정에 하직인사를 한 다음 각 관청을 돌면서 윗분들에게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모레 오전에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면 자연히 날씨가 나쁜 날도 있고, 또 공주나 전주 같이 감사가 있는 큰 고을에 들르면 관찰사에게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혹간 경치가 좋은 곳에서는 놀이라도 하게 되고, 지나는 길에 있는 여러 고을에서 묵게 되니까, 이렇게 천천히 내려가면 한 보름 정도 걸려야 남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연행차의 경비에 대해 신연하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연행차 때 사또를 모시러 올 때나 관청의 공무로 서울을 다녀올 때 출장 경비는 자기가 부담하게 돼 있어 주막에서 외상으로 먹고 다니거나 심지어는 굶고 다닐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높은 이자를 주고 경주인에게 돈을 빌리므로 빚이 많습니다. 그리고 관청에서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자주 곤장을 맞습니다.”
소설 속에서 신연하인이 하는 이 말은 앞에서 양반 지식인 정약용이나 김윤식이 생각하는 신연제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는 차원이 다른, 이 제도로 고통 받는 당사자의 솔직한 발언이다. 신연에 드는 경비는 공금으로 지불하게 돼있으나, 실제로는 춘향전의 신연하인 말처럼 개인이 부담한 것이 사실이다. 소설 내용은 당대의 사실적 기록이 많으므로, 당대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규정으로 정해진 것보다 소설 내용이 더 정확한 경우가 있다.
신연의 규모는 대략 20명 정도다. 춘향전에서는 남원에서 올라온 기간이 13일이고, 서울에 며칠 묵은 후 다시 15일 정도 걸려서 돌아가는 것으로 돼 있다. 약 한 달 동안 이들이 쓰는 경비는 법률의 규정에는 공금이라고 돼 있지만, 결국 남원 고을 백성에게서 착취하는 돈이다.
신관사또는 부임 사흘째부터 업무 시작
서울에 올라가 신임사또를 맞이해온 신연행차가 고을 경계에 이르면 해당 고을의 관속들이 전부 나와 신관사또를 맞이한다. 여기에는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는 군사 퍼레이드도 함께 펼쳐진다. 춘향전에서 신관사또를 맞이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인물은 육방아전, 집사, 마병, 통인, 관노, 급창, 다모, 방자, 도훈도, 기생, 좌수, 별감, 장교 등인데, 남원에서 관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다 나온 셈이다.
신관사또 행렬은 부임지 백성들에게 수령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엄숙하게 행진하는데, 춘향전에서는 그 행렬을 “깃발과 창검은 서릿발 같고, 살기가 하늘을 찌를듯하다”라고 묘사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들에게 엄숙하게 보이기 위해 수령은 “말 위에서는 눈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몸을 비스듬히 하지 말며, 의관을 정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백성에게 무섭게 하느라고 눈을 궁굴궁굴” 굴린다고 했다. 두 책을 통해 신임사또 중 변사또처럼 백성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눈을 크게 뜨고 굴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수령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결코 엄숙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신관사또는 일반적으로 부임한 지 사흘이 되면 업무를 시작하는데,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부임 첫날부터 기생점고를 한다. 기생점고도 업무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업무인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줬다가 받아들이는 환상이라든가 세금에 관련된 문제 등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다. 이를 본 이방아전은 “이 사또 알아보겠다. 사또가 아니요, 백설이 풀풀 흩날릴 제 깔고 앉는 개가죽방석의 아들놈이로다”라고 욕한다.
19세기 신임 수령 부임과 관련한 당대 실정은 지식인의 저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소설에서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 落(떨어질 락/낙)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洛(락)으로 이루어졌다. 풀(艹)잎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떨어지다를 뜻한다. 各(각)은 목적지에 도착하다, 안정되는 일, 음(音)을 나타내는 洛(락)은 시내가 아래 쪽으로 흘러가는 일, 초두머리(艹)部는 식물을 나타낸다. ❷형성문자로 落자는 ‘떨어지다’나 ‘떨어뜨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落자의 생성과정은 비교적 복잡하다. 落자의 갑골문을 보면 비를 뜻하는 雨(비 우)자와 ‘가다’라는 의미의 各(각각 각)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각(떨어질 각)자가 본래 ‘떨어지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각자는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다’를 표현한 것이다. 소전에서는 落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각자와 落자를 서로 혼용했지만 지금은 落자만 쓰이고 있다. 落자는 나뭇잎이나 비가 ‘떨어지다’를 표현한 것으로 각자에 艹(풀 초)자를 더해 의미를 확대한 글자이다. 그래서 落(락)은 풀이나 나무의 잎이 떨어지다, 떨어지다, 떨어뜨리는 일 등의 뜻으로 ①떨어지다 ②떨어뜨리다 ③이루다 ④준공하다 ⑤두르다 ⑥쓸쓸하다 ⑦죽다 ⑧낙엽(落葉) ⑨마을 ⑩빗방울 ⑪울타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떨어질 추(墜), 떨어질 타(墮), 떨어질 운(隕), 떨어질 령(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탈 승(乘), 들 입(入), 날 출(出), 더할 가(加), 미칠 급(及), 더할 증(增), 얻을 득(得), 회복할 복(復), 덜 손(損), 더할 첨(添), 오를 척(陟), 오를 등(登), 더할 익(益), 들일 납(納)이다. 용례로는 선거에서 떨어짐을 낙선(落選), 성적이 나빠서 상급 학교나 상급 학년에 진학 또는 진급을 못 하는 것을 낙제(落第), 떨어진 나뭇잎을 낙엽(落葉),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맥이 풀리는 것을 낙담(落膽), 세력이나 살림이 줄어들어 보잘것이 없음을 낙탁(落魄), 문화나 기술 또는 생활 등의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을 낙후(落後), 천거 또는 추천에 들지 못하고 떨어짐을 낙천(落薦), 경쟁 입찰 따위에서 입찰의 목적인 물품 매매나 공사 청부의 권리를 얻는 일을 낙찰(落札), 말에서 떨어짐을 낙마(落馬), 여럿이 줄을 지어 가는 무리에서 함께 가지 못하고 뒤로 처지는 것을 낙오(落伍), 과거에 떨어지는 것을 낙방(落榜), 높은 곳에서 떨어짐을 추락(墜落),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죄를 범하여 불신의 생활에 빠짐을 타락(墮落), 기록에서 빠짐을 누락(漏落), 이리저리 굴러서 떨어짐을 전락(轉落), 당선과 낙선을 당락(當落), 성하던 것이 쇠하여 아주 형편없이 됨을 몰락(沒落), 빠져 버림을 탈락(脫落), 물가 따위가 갑자기 대폭 떨어짐을 폭락(暴落), 물가나 시세 등이 급히 떨어짐을 급락(急落), 지키는 곳을 쳐서 둘러 빼거나 빼앗김 또는 적의 성이나 요새 등을 공격하여 빼앗음을 함락(陷落),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가는 봄의 경치로 남녀 간 서로 그리워 하는 애틋한 정을 이르는 말을 낙화유수(落花流水), 가지가 아래로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를 낙락장송(落落長松),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해롭게 함을 이르는 말을 낙정하석(落穽下石), 가을이 오면 낙엽이 펄펄 날리며 떨어짐을 낙엽표요(落葉飄颻), 몹시 놀라 얼이 빠지고 정신 없음을 낙담상혼(落膽喪魂), 끓는 물에 떨어진 방게가 허둥지둥한다는 뜻으로 몹시 당황함을 형용하는 말을 낙탕방해(落湯螃蟹), 낙화가 어지럽게 떨어지면서 흩어지는 모양을 낙영빈분(落英繽粉), 지는 달이 지붕을 비춘다는 뜻으로 벗이나 고인에 대한 생각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낙월옥량(落月屋梁) 등에 쓰인다.
▶️ 點(점 점, 시들 다)은 ❶형성문자로 奌(점, 다), 点(점, 다)은 통자(通字), 点(점, 다)은 간자(簡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占(점)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일, 黑(흑)은 검은색의 뜻으로 點은 검고 작은 표, 틀린 글자 따위를 검게 칠하는 일, 또 더럽히는 일, 나중에 표를 하다, 불을 붙이다 따위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點자는 '점'이나 '얼룩', '불붙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點자는 黑(검을 흑)자와 占(점치다 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占자는 거북의 배딱지(腹甲)에 나온 점괘를 그린 것이다. 點자는 본래 ‘불붙이다’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아궁이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불쏘시개가 필요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點자에 쓰인 占자는 발음 외에도 불쏘시개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點자는 때로는 '점'이나 '얼룩'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이는 재가 날려 얼룩이 묻거나 구멍이 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點(점, 다)은 (1)작고 둥글게 찍는 표 (2)사람의 살갗이나 짐승의 철 또는 피륙 따위에 있는 빛깔이 다른 둥근 얼룩 (3)유우클릿의 기하학(幾何學)에서 주어지는 기본 개념의 하나 길이, 너비, 두께도 없이 위치만 있는 것 (4)어느 속성이나 측면의 개별적인 부분이나 요소 등의 뜻으로 ①점(點: 작고 둥글게 찍은 표) ②흠, 얼룩 ③물방울 ④권점(圈點: 후보자의 이름 아래에 둥근 점을 찍던 일) ⑤측면(側面) ⑥시간(時間) 단위 ⑦점찍다 ⑧고치다 ⑨불 붙이다, 켜다 ⑩점철하다 ⑪지시하다 ⑫조사하다, 검사하다 ⑬징집하다, 징발하다 ⑭가리키다 ⑮끄덕거리다 ⑯따르다 ⑰더럽히다, 욕되다 ⑱떨어지다, 떨어뜨리다 ⑲붓다(살가죽이나 어떤 기관이 부풀어 오르다) 그리고 ⓐ풀잎이 시들다(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낱낱이 검사함을 점검(點檢), 점의 수효 또는 성적을 나타내는 숫자를 점수(點數), 낮에 끼니로 먹는 음식을 점심(點心),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이 서로 이어짐 또는 그것들을 이음을 점철(點綴), 등심지에 불을 켜 당김이나 등에 불을 켬을 점등(點燈), 불을 켬을 점화(點火), 시각장애자가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게 만든 부호 글자를 점자(點字), 많은 점을 줄지어 찍어서 이루어진 선을 점선(點線), 등불을 켰다 껐다 함을 점멸(點滅), 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일을 점고(點考), 여기저기 점점이 흩어져 있음을 점재(點在), 멀리 점점이 이룬 경치를 점경(點景), 평점을 붙임을 점부(點附), 하나씩 자세히 조사함을 점사(點査), 관심과 흥미가 집중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초점(焦點), 시간의 흐름 위의 어떤 한 점을 시점(時點), 비거나 허술한 부분을 허점(虛點), 서로 다투는 중요한 점을 쟁점(爭點), 곡선 또는 곡면과 접선과의 공유점을 접점(接點), 좋은 점으로 보다 뛰어난 점을 장점(長點),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를 관점(觀點), 점수를 매김을 채점(採點), 가장 중요한 점을 요점(要點), 활동의 발판이 되는 점을 거점(據點), 처마의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으로 작은 힘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예상하지 못했던 큰 일을 해냄을 이르는 말을 점적천석(點滴穿石), 쇳덩이를 다루어 황금을 만든다는 뜻으로 나쁜 것을 고쳐서 좋은 것으로 만듦의 비유 또는 옛사람의 글을 활용하여 글을 지음을 이르는 말을 점철성금(點鐵成金),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의 꽃이 피어 있다는 뜻으로 여럿 속에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또는 많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오직 하나 뿐인 여자를 이르는 말을 홍일점(紅一點), 많은 여자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의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청일점(靑一點), 뜨거운 불길 위에 한 점 눈을 뿌리면 순식간에 녹듯이 사욕이나 의혹이 일시에 꺼져 없어지고 마음이 탁 트여 맑음을 일컫는 말을 홍로점설(紅爐點雪), 용문 아래에 모인 물고기가 뛰어오르면 용이 되고, 오르지 못하면 이마에 상처만 입게 된다는 뜻으로 과거에 낙방한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용문점액(龍門點額), 장승요가 벽에 그린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즉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완성시키다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화룡점정(畵龍點睛), 글자의 점 하나와 획 하나라는 뜻으로 아주 작은 부분의 글이나 말 따위를 이르는 말을 일점일획(一點一劃), 문장이 썩 잘 되어서 한 점도 가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을 문불가점(文不加點), 단 하나의 자기가 낳은 자식을 일컫는 말을 일점혈육(一點血肉)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