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59]환상의 ‘벗길맛’ 겨울여행 3박4일
거의 예고없는 친구들의 고향 내방來訪은 반가움을 넘어 감격적이기까지 했다. 지난 금요일이 그랬다. 소위 ‘벗길맛’ 원조멤버 3명이 서울에서 모하브(MOHAVE)를 몰고 내려오는 길에 마침 부여 친구 문상을 하고 내 고향 오수식당에 나타난 것이다. ‘벗길맛’은 ‘벗따라 길따라 맛따라’의 약자로, 최소 분기별로 3박4일정도 여행을 하며 즐기자는 취지로 만든 친구들의 임의 조직이다. 남자친구들끼리 만나면 빠지지 않는 화제가 여자이지 않던가. ‘벗길맛’은 ‘누구누구는 벗길만하다’로 변질되면서 킬킬대는 이름도 되었다. 회원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도 있지만, 안되면 한두 명인들 ‘만나면 좋은 친구’이니 무슨 상관이랴. 그동안 코로나시국이라 여행하기가 좀 거시기해 적조했음은 어쩔 수 없었던 일. 순천에서 달려온 친구와 4km여를 걸어 만난 게 6시20분. 오리주물럭이 어찌 맛이 없었겠는가. 그날 만남 자체가 ‘벗길맛’3박자(벗과 길과 맛)에 딱 부합됐다. 첫째날 저녁, 사랑방에서 한두 시간 ‘버티기’를 하며 회포를 풀다. 속칭 ‘섰다’로 불리는 버티기를 아시리라. 삼팔광땅, 장땅에서부터 삥땅까지. 그 아래로 1-2(헌병), 10-4(장사), 4-1(새삥), 10-1(장삥), 9-1(구삥), 4-6(새륙), 다음엔 아홉근, 여덟근 순이다. 판이 끝나면 딴 돈의 50%는 관례적으로 손실을 보전해 주므로, 큰 부담은 없다.
둘째날 아침, 홀아비인 내가 차려준 아침은 ‘시래기 선지해장국’이다. 이윽고 10여km 떨어진 청웅면 ‘산림왕山林王’ 친구를 점심때쯤 만나 면사무소 옆 다슬기탕 맛집을 가다. 해파란 국물에 부추 다슬기탕, 맛이 장난이 아니다. 이 친구는 엄청난 빅마우스big mouse에다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이다. 입만 열면 무슨 얘기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다. 게다가 교훈적인 얘기도 많다. 언제 찾아도 처음 본 것처럼 늘 반긴다. 은행 지점장으로 정년퇴직하기 전 10여년 동안 나무 심는 것을 취미로 삼더니 취미가 어느새 특기가 되어 인생 제2막을 신나게 살고 있다. 세상에나, 포클레인작업이 재밌어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몰랐다던가. 그 땀방울, 결코 헛되지 않은 구슬땀일진저. 우리도 무언가 10년만 미쳤었으면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다가온다.
저녁 6시, 남원 친구가 하는 주막집 ‘선녀와 나무꾼’이다. 묵은지 닭찜 두 냄비. 6인 이상은 한자리에 안되므로 두 테이블로 조금씩 떨어져 앉다. 운봉에 사는 경찰관 출신 농사꾼이 최근 장인상을 당했는데, 뒷풀이 삼아 자리를 만들었다. 벗길맛 회원들은 정보가 빠른 게 특징이다. “그래, 그러면 이번에 친구들도 볼 겸 겨울여행을 하자”며 내려온 길. 서예 30년 공력의 친구가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방立春傍을 머릿수대로 써왔다. 친구의 마음씀씀이가 예쁘고 고맙다. 이 친구는 최근 전북서예비엔날레에도 초대받은 작가이다. 그 친구 바람대로 올 한 해 우리 모두 건강하고 뜻하는 일 순조롭게 풀리는 행운이 따르기를 빌어본다. 올해는 2월 4일이 입춘이다. 엊그제 추위도 없이 지나간 대한大寒은 24절기의 끝으로 신축년辛丑年 한 해가 저물었다. 이제 24절기의 맨처음 절기인 입춘을 맞아 비로소 임인년壬寅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헤어짐은 늘 아쉽지만, 벗길맛 친구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밤 7시 반 출발, 200여km의 거리. 목적지는 광주대구고속도로를 거쳐 산청-사천-통영을 거쳐 거제도 지세포항 근처의 어느 아파트(스타힐스). 승용차 두 대로 2시간을 내리 달려 9시 반 도착. 한 친구의 형수가 친구의 지원 전혀 없이 순전히 ‘자수성가’ 하여 장만한 ‘별장용 아파트’란다. 방이 3개나 되니 활발하기 그지 없다. 친구의 말이 진심일까? 애인하고 오면 언제든 무상으로 쓰게 해주겠단다.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맛이라니? 버티기 또 한판. 순전히 재미다. 웃고 웃으며 주고받는 현찰 사이에 우정은 더욱 곰살궂다. 코를 심하게 고는 친구는 외톨이가 된다.
벗길맛 겨울여행 나흘째 아침. 거제도가 제주도 다음으로 강화도보다 더 큰 섬인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초행길 새벽녘에 맞은 지세포항과 남해바다. 실제 지명 ‘지세포’를 확인한 것도 수확. 예전 강남사거리의 ‘지세포 횟집’을 몇 번 출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곳 출신이 했을까? 최근 양재역 근처에서 지세포식당을 발견했다. 거제도는 장생포이고, 울진 근처에는 고래잡이로 유명한 장승포가 있다고 한다. 대우조선 옥포공장 골리앗크레인도 처음 보았다. 보느니 듣느니 처음이 많다. 아침은 우리의 고장 전주의 콩나물해장국. 청양고추를 한 숟갈 넣으니 별나게 맛있다.
오전엔 외포항 근처 대계大鷄마을의 김영삼 전대통령 생가와 기록전시관 관람. 26세로 국회에 진출, 9선을 한 감感의 정치인,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정치 9단’으로 불린 정치인, 90년 부도덕한 ‘3당합당’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IMF 위기를 초래했지만,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실시, 중앙청 철거 등 공도 적지 않았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록도 남기고‘대도무문大道無門’휘호를 잘 썼다. 巨山이라는 호는 그에게 너무 컸으나 섬소년이 꿈을 키워 끝내 ‘거제에서 청와대까지’꿈을 이룬 정치인을 보며 그와 비견할 작금의 정치인이 있을까 싶다. 멸치잡이로 부富를 이룬 부친 덕을 가장 많이 보았다던가. 생가는 틀도 좋고 뷰도 좋았다.
외포항의 건대구 덕장도 볼만했다. 꾸덕꾸덕 말린 건대구 1마리에 2만5천-3만원. 손 큰 친구는 5마리를 흥정하여 친구들에게 1마리씩 안겼다. 비단장수 닮은 왕회장 친구가 사줄 바에 대구아가리젓갈도 1병씩 넣으라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은 덩달아 횡재. 알고 보니 거제주민인 형수가 받은 거제시의 재난지원금 카드란다. 아내 카드로 친구들에게 생색을 낸다며 킥킥댄다. 아무튼 좋은 일. 1951년 중국인 포로였던 사람이 개업을 했다는 ‘중화원’이라는 맛집 중국식당에서 점심. 탕수육도, 삼선짬뽕도 맛있다. 구경할 것 다하며 맛있는 것 다 먹으며 호강에 되받친 여행 나흘째.
오후엔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다. 한국전쟁의 또 하나의 아픈 상처, 포로수용소. 아프다.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우리 아버지뻘 세대들의 고난이 실감난다. 포로 교환을 앞두고 북이냐, 남이냐, 제3국이냐로 고민하던 사람들. 이념이 대체 무엇이길레 포로세계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무고한 군인들이 무수히 죽어나갔던가. 작가 최인훈은 소설 <광장>으로 그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하지 않았던가. 이 땅에 다시는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면 안되거늘, 선제타격 논란은 또 무슨 말인가. 계룡산 모노레일은 휴일이어서인지 인파가 붐며 포기하고, 학동흑진주몽돌해변으로 향했다. 어찌 그리 고만고만한 검은 자갈들이 1km가 넘게 해변을 덮고 있을까. 남는 게 시간뿐이므로 돌탑도 쌓아보며 친구들과 걷는 맛이 쏠쏠하다. 다음에는 꼭 아내하고 손 잡고 걸어봐야지, 속으로 다짐한다.
기대하는 만찬. 아파트 주인친구가 초대한 만큼 쏘겠단다. 부부가 한 자리에서 15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지세포항 막썰이횟집. 대자 7만5천원. 가성비가 짱이다. 싱싱한 고등어회라니? 맛있다. 아름다운 밤, 행복하다. 버티기도 유난히 잘되는 밤, ‘삼팔(3-8)광땅’을 두 번이나 잡았다. 노련한 친구의 구땅(9-9)을 장땅(10-10)으로 잡아 누르는 맛이라니? 완전히 ‘흐흐’다. 물론 가보(아홉근)를 잡고도 망통(0)이나 따라지(1근)에 판을 내주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처음 해보는 노름 아닌 노름이 재밌다. 밤이 깊어간다.
사흘째 아침, 어제 먹은 백년식당에서 ‘갑오징어불고기’를 시켰다. 이제 짐을 챙겨 떠나야 할 시간. 30분을 달려 둔덕골의 방하마을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기념관을 찾았다. 400년쯤 되는 팽나무가 멋지다. 불행히도 기념관은 월요일이라 휴관. 시비 몇 개를 어루만지다 ‘청마우체통’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는 시를 기억하시리라. 그는 시조시인 이영도씨와 20여년간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땅에 ‘플라토닉 러브’로 우뚝 선 유부남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 극작가 유치진은 그의 친형이다. <깃발>이라는 시비를 보며 친구들 앞에서 낭송해본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런 여행 아니면 어떻게 이 골짝의 유치환기념관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한 친구가 말한다. 이번 여행은 나흘에 걸쳐 정치(김영삼기록전시관)-역사(포로수용소유적공원)-문화(유치환기념관)여행을 한 동시에 맛집 여행(오리주물럭-다슬기탕-묵은지닭찜-콩나물해장국-원조화교 탕수육-막썰이회-갑오징어불고기-임실 순대국과 팥죽)도 함께 했으니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도다. 핫핫핫. 대체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럴 것이로다. 우리의 환상적인 벗길맛 겨울여행 3박4일의 일기.
첫댓글 입춘대길 건양대경!
유붕자원방래 불역막호!
벗길맛!
^아주 멋나고 잼나게 보이는 모임^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기도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