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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韓信, ?~196년) 북벌을 시작하다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장량 역시 이를 권하자, 유방은 장이(張耳)를 감군으로 삼아 병사 3만과 함께 보내주었다. 한신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방과는 별개로 장이, 조참을 옆에 둔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6.1. 초한전쟁의 분수령, 정형전투(井陘戰鬪)
한신이 위표를 격파했을 때가 8월이었다. 그런데 9월 무렵, 한신은 대(代)를 평정하고 있었다. 본래 대나라는 진여(陳餘)의 땅이었으나 진여가 조나라에서 조왕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대나라는 그의 측근이었던 재상 하열(夏說)이 지키고 있었다. 한신의 군대가 몰려오자 하열이 한군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연여(閼與)에서 대패하고 한신에게 사로잡혔다.
대나라 정벌의 과정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뒤에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계책을 내놓을 때 '한신이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한군의 일방적인 공세에 대나라의 군대가 처참히 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 유방은 사정이 급했는지 한신의 부대에서 정예병들을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그렇다면 한신의 부대는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예병이 모두 빠지고 신병들과 위나라, 대나라에서 군사를 개편한 오합지졸의 군대란 이야기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을 위해 조참에게 따로 군사를 맡겨 오성(鄔城)에 주둔한 조나라의 별장 척장군(戚將軍)을 공격케 했다. 또한 대나라에서의 교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며 대나라 땅에도 군을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신의 군세는 3만은커녕 실질적으로는 2만 내외의 오합지졸 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 등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쪽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격파하려고 했다. 이에 조왕 헐(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등은 20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막으려고 했다. 이때,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조왕과 진여(陳餘)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듣자하니, 한의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붙잡았으며,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張耳)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수레가 굴러 다닐 수 없고, 기병이 대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백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군대의 군량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는 신에게 뛰어난 병사(奇兵) 3만을 빌려주시면, 샛길을 따라 그 수송대를 끊겠습니다. 족하께서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채를 높게 쌓고 적과 더불어 싸우지 마십시오. 적은 앞에서는 싸울 수 없고, 퇴각해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이 병사로 그 배후를 끊고, 들판에서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君)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우주방어로 일관하면서, 따로 별동대를 뽑아 적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해서 박살을 내버리자는 것이었지만, 진여는 싸움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냥 싸워도 우리가 이길 텐데 비겁하게 그런 방법까지 써야겠나?"(...)이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것만 보면 인의도덕만을 내세우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주인공이 되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송양공(宋襄公)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진여가 송양공을 따라한 멍청이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병법에 기초한 이유가 있었다. 진여는 이좌거의 계책에 반대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즉, 조나라의 군대가 실제 20만이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한군의 몇 배에 달하기에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제압해야 주변 국가들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공격만 해도 절대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진여의 영지인 대나라가 한신에게 털린 상황이니 잡병 더미에 불과해보이는 한군을 최대한 빨리 섬멸하고 실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여의 입지가 아무리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조왕의 신하에 불과하니,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앞세워 단기결전 후 실지 회복을 노리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그리고 조왕 또한 이러한 진여의 생각을 받아들여, 진여를 대장으로 삼아 한군을 상대하도록 하였다. 당시 양측 군대를 비교했을 때 조나라군이 수도 몇 배는 더 많았고 훈련도 더 잘 되어 있었으며, 자기네 영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과 보급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여의 계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석적이었다. 상대가 한신이었다는 걸 감안하지 못했을 뿐. 한신은 첩자를 보내 염탐하였는데, 첩자로부터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좌거의 계책은 멀리 원정군을 이끌고 온 한신으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대처법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 소식을 접한 후 한신은 지체없이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당시 조나라군은 정형구(井陘口)의 누벽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한신은 정형의 약 30리 앞에서 야영을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몸을 가볍게 한 경기병 2천을 따로 선별하여 그들 모두에게 한군의 깃발인 적기를 나눠주며, 정형 앞 샛길을 통해 몰래 병사들을 산으로 보낸 후 조나라 군대가 있는 누벽을 보게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누벽(壘壁)을 비워놓고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그 사이에 빨리 조나라 누벽으로 들어가서 조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
게다가 이후 어떤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모두가 경악할 만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투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형의 조군 앞에는 '면만'(綿曼)이라 불리는 강이 있는데, 이를 면만수(綿曼水)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신은 가뜩이나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오합지졸의 군사들 중 1만 정예군을 따로 조직하여 이 면만수를 건너게 한 뒤, 강을 뒤에 두고 진영을 치게했다. 오래전부터 손무(孫武), 오기(吳起), 사마양저(司馬穰苴) 등 기라성과 같은 전쟁병법가들은 물론 많은 명장들이 강을 뒤에 두면 퇴로가 없어 전멸하게 되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금기와 같은, 심지어 일반 병졸들도 알고 있으며 절대 해서는 안 될 기본 중의 기본인 등에 강을 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을 펼친 것이다. 그러고서는 한술 더 떠 오합지졸의 1만 정예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과 노약자들로 부대를 구성하였다.
배수진만으로도 이미 요단강을 눈 앞에 둔 것과 같은데 적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아주 대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것이다. 만약 이때 진여가 군사를 보냈으면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우려하였으나 한신은 한 군리(軍吏)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조나라군이 먼저 나올 일은 없을거라 단언했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점을 골라 누벽을 쌓았다. 또 저들은 우리의 대장기와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진여는 한군을 이곳에서 전멸시켜 한 번에 끝내고자 하니, 한군이 병력을 나누더라도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며, 그 말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한군의 배수진을 보고 진여는 물론 일반병사들까지 웃었으며, 진여는 "역시 한신 저 놈은 병법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 라고 여겨 한군이 가까이 공격해 오면 전군을 보내 일거에 소탕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신은 날이 밝자 모든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에 모여서 잔치를 하자!"
실로 패기 넘치는 발언이었고, 당연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각한 병력차와 물자 부족 및 보급 문제 그리고 도무지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전으로 이길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도 건성으로 "네, 네"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한신은 앞서 진영에 남겨둔 병력을 제외한 군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장이와 함께 몸소 직접 조나라 군대에게 북을 울리며 도전하였다. 물론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비웃기만 했으며 당연히 이 도전을 받아들여 출격하였다. 그러나 비록 한군도 두려워하며 출정할 때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으나, 이미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니 그들 또한 인간이였기에 살고는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고서는 오로지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신이 노렸던 점이었다. 살기 위해 미친듯이 싸우는 군사들의 패기(霸氣)와 살기(殺氣)란 실제로 엄청났다.
그래서 수적으로도 매우 우세한 조나라 군대였지만 이러한 한군의 저항에 놀라 쉽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한 채 전투가 지속되어 그 사기가 크게 꺾였다. 허나 전력차가 워낙 컸으며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한군은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것이 연기가 아님을 숨기기 위해 적은 병력으로 오랫동안 싸웠으며, 도망칠 때도 리얼함을 보여주기 위해 대장기까지 버리고 강가에 쳐둔 진까지 도망쳤다. 비록 초반의 완강한 저항에 눌리긴 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과 도망치는 리얼함에 속아 넘어간 진여는 요새에 있는 군대까지 모두 출격시켜 도망치는 한군을 추격해 섬멸하려 하였다.
한신, 장이를 비롯한 한군이 도망쳐 강가에 있던 진영에 이르자 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하였고, 진여가 정형에 있던 조나라의 모든 병마를 이끌고 누벽을 비운 채 나오자, 한신은 강가에 진을 쳐둔 1만의 정예병과 합세하여 20만 대군에 맞섰다. 그리고 이제 진짜 도망갈 곳조차 없음을 알게 된 한군은 강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질적으로는 밀리지만 목적 의식 자체가 다른 한군은 살고자 하는 일념하에 미친개처럼 싸웠고 조나라 군대는 한군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철수하여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군대의 배후로부터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진영에는 이미 한군의 적색 깃발이 도배되어 휘날리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 새벽녘 양쪽 산에 숨겨둔 2천의 경기병들이 줄곧 매복해 있다가 조나라 군대가 한신의 말대로 정말 누벽을 비운 채 전군이 공격을 나가자 한신이 진영에 합세하여 배수진에서 미친듯이 버티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매복해 있던 경기병 2천이 우회하여 적의 누벽을 급습한 것이었다.
이렇게 한신의 예상대로 모든 계책이 성공했고, 조나라 군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던 누벽이 한군에게 점령된 것을 보자 아연실색했다. 허와 실을 모르는 조군은 한군이 이미 누벽을 점령해 돌아갈 곳도 없는데 누벽에 휘날리는 많은 수의 깃발을 보자 얼마나 많은 수의 한군이 후방에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포위된 채 뒤에서 한의 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 생각하여 그 공포감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와해되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러한 광경을 본 진여가 병사 몇 명의 목을 베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조군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왕과 진여도 급히 도주하였다. 이렇게 조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한신은 조군을 추격하였고 뒤에 누벽을 점령한 병사들도 함께 공격해오자 앞뒤로 협공을 당하자 조군은 이제 퇴각하여 도망치기 바빴으며 오히려 조군이 강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곳 정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한신과 한군은 계속해서 조군을 추격하여 지수(泜水) 부근에서 진여(陳餘)의 목을 베었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결국 반나절 만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하루 아침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정말 한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나라 진영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전투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한신의 용병술에 탄복하면서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한신의 전술을 믿지 못한 자신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의문어린 표정과 어조로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릉(山陵)을 오른편으로 해 등지고, 수택(水澤)을 앞으로 해 왼편으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라고 명령하시고, 조나라를 깬 뒤에 잔치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았으나, 허나 결국은 이겼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전술입니까?"
그러자 한신은 여제껏 장수들이 의문을 품어왔던 전술에 대한 질문에 웃으며 명쾌히 답했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 수 있고, 망지에 놓은 다음에야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평소부터 훈련받은 사대부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시장 바닥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을 죽을 땅에 두어서 사람마다 자신을 위해 싸우도록 만들지 않고, 이제 그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쓸 수 있겠는가?"
한신이 이것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라 하였지만, 배수진(背水陣)은 줄곧 금기처럼 여기던 전술인데 한신이라 하여 어찌 이것을 몰랐겠는가? 허나 한신의 말처럼 그가 이끌던 정예병은 유방이 모두 데려갔고 새로 편성된 군사들은 어딘가의 정예병이 아닌 시장 바닥에서 놀던 사람들을 급히 모아 만든 오합지졸의 부대였다. 위나라와 대나라에서 모병된 군사들도 많았기에 한군에 대한 애착이 없어 살 길이 생기면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며 기존 한나라의 군사들 또한 신병이기에 조금만 패색이 보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신 또한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병법을 응용하여 군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그 능력을 극대화시켜 죽기살기로 싸우게 하였고, 한편으론 상대의 생각을 읽어 과감한 행동으로 진여와 조나라군을 방심하게 만들고 자만하게 하여 계획을 손쉽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즉, 한신은 이러한 한군의 상황과 진여의 심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따져 계책에 계책을 더한 용병술을 썼으며,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이자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도 계속 쓰이는 금기가 아닌 전략적 배수진(背水陣)의 정의를 만들었다.
이 조나라와의 정형전투는 전략, 전술적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초한전쟁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한신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 명성과 위세를 떨쳤으며, 동시에 한신이 북방에서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반면 항우는 전선이 늘어져 북쪽에 적을 두게 된 탓에 군을 나눠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유방에게는 세력 확장과 함께 불리했던 전세를 슬슬 유리하게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방 자신에게 한신이라는 두려운 존재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후대에 한신의 이 배수진을 얼치기로 따라하려다가 강가를 피로 물들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좋은 예로 읍참마속의 그 마속이 있으며,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이 얼치기 양산형 배수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얼치기 배수진과 한신의 배수진을 비교해보자면, 한신의 군사들은 애초부터 상식적이고 규칙적인 전술을 운용할 수 없는 잡배들이었기에 한신으로서는 뭔가 변칙수(배수진으로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인 생존의지를 자극함)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이러한 잡졸들의 의지만으로는 전술적 승리를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2000의 경기병을 활용하여 적의 사기와 진형에 거대한 충격을 가한 것이다 (일단 성이 점령당했다는 것에 놀라고, 양쪽에서 포위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진형이 형편없이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적은 군사와 보잘것없는 구성성분(군사 대부분이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합지졸)을 최대한 알뜰하고 살뜰하게 활용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승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지, 아무 때나 쓴다고 이길 수 있는 전술은 아니다. 쉽게 생각해도, 적군이라고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한신의 배수진은 오합지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생존 의지)을 통해 활용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린 것이지, 아무 정예병이나 강물 앞에 들이붓는 것이 아니다. 정예병들은 그 외에도 다르게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적이 보다 신중하여 위에서 언급된 이좌거의 계책대로 성문을 걸어잠그고 한신이 말라죽기를 기다렸더라면 이러한 전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전략에는 운도 따라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2. 연나라를 항복시키다
한편 한신은 정형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에게는 천금(千金)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광무군을 포박해 데리고 왔는데 한신이 직접 광무군의 포박을 풀어주며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자신은 서쪽을 향한 채 광무군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있음을 설명하고 광무군에게 "내가 북쪽으로 연나라를 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허나 광무군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들으니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무용(武勇)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나라를 존속하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은 패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어찌 큰 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신이 광무군을 설득하고자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지만 우나라는 망했고, 그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현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임금이 그를 등용했는지 안했는지, 그의 계책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성안군이 그대의 계책을 들었다면 나와 같은 자는 벌써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광무군이 주저하자 한신이 강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의 계책에 따르겠으니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한신이 진심으로 부탁하자 광무군이 말했다.
"신이 들으니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다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번은 맞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신의 계책이 반드시 채용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충심껏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며 한신에게 계책을 올렸다.
"원래 저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鄗城)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대의 기세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다해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한(漢)과 초(楚)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제(燕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
즉, 사실 이미 한신의 군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게 된다면 그 어려운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꼴이니 그렇게 되면 결국 연나라도, 제나라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형전투의 승리와 조나라 평정으로 인해 지금 한신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모두가 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없이,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면 저쪽에서 항복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이 옳다고 여겨 그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연나라의 왕 장도(臧荼)와 신하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6.3. 잠자다가 군사를 빼앗기다
한신과 장이는 진군을 멈추는 대신 하수를 통해서 넘어와 조나라 땅을 넘보는 초나라 군을 쫓아내고, 그 대가라는 구실로 사람들을 징발해 유방에게 보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방 쪽은 한신과 달리 상당히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형양에서 1년 넘게 항우의 공격을 근근히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에 가까워진 것. 급한대로 진평(陳平)의 계략을 이용하여 범증(范曾)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눈앞에 있는 항우의 군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기신(紀信)이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시선을 끌고, 본인은 관중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에 다시 군대를 모집하여 성고(成皐)로 진입했지만, 항우의 공격이 너무 강력하여 당해 6월 즈음에 하후영과 함께 간신히 몸을 피해 황하를 건너 한신과 장이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급박해지면서는 한신이 원군을 보내 구원해주었다는 언급이 없는데, 유방은 이로 인해 한신이 미심쩍어졌는지 한신이 있는 소수무에 도착하고도 일부러 하루를 머물러서 새벽에 일어나서는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과 장이는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많은 역사에서는 지방에 파견된 군대에서는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마땅한 호위부대 하나 딸려있지 않은 군주가 찾아오면 장수에게 이래저래 휘둘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쁜 뜻을 품은 장수라면 군주가 비명횡사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은데, 그런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유방은 순식간에 지휘권을 손에 넣어 군권을 장악했다.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유방에겐 이상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또한 멋대로 군대를 강탈해 간 유방이 치사하게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주군이 지휘하는 본진 쪽이 무너지기 직전인데도 먼저 원군을 보낼 생각은 않고 잠이나 잘 만큼 한신과 유방 사이의 연결이 약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웃기는 점은, 이때 한신의 옆에 있었던 건 다름아닌 자기가 죽을 상황인데 원군을 안 보내줬다고 절친 진여와 원수가 된 장이였다는 것.
6.4. 역이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유방의 명령대로, 한신은 조참, 부관, 주설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평원(平原)으로 이동했다. 이때, 아직 한신이 도착하기 이전, 역이기가 먼저 유방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떠났다.
역이기의 화려한 언변을 들은 제왕 전광(田廣)은 싸워봐야 더 나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역하(歷下)에 주둔하고 있던 제나라 군사들의 경계를 풀게 했다. 이대로라면 싸우지 않고도 한나라가 제나라를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는 상황. 그리고 한신 또한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하여 항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그만두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 잘하는 제나라 출신의 변사였던 괴철(蒯徹)이라는 인물이 유방이 한신에게 말도 없이 제나라를 설득했다거나, 군사를 멈추라는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는 궤변과 함께 이대로 공을 역이기에게 빼앗길 셈이냐고 한신을 충동질했다.괴철의 말에 넘어간 한신은 즉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신이 그전부터 무슨 생각이었는지야 추측할 뿐이지만, 이때 한신의 입장이 아주 위태로웠다고 볼 수는 있다. 한신이 원군을 보내지 않고 시간을 끄는 사이 한신이 당초 맡겠다고 했던 양면전선 역할을 이미 팽월이 알아서 다 하고 있었다보니 제나라가 피해없이 평정되면 굳이 2전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신을 써야할 필요가 줄어든다. 유방 입장에선 군사를 거둬서 형양쪽의 방비를 굳히고 상황을 봐서 팽월 쪽에 군사를 더해 초나라의 후방을 휘저으면 그만이었기에 북방 쪽에 그리 사활을 걸 이유가 없어진 상황이었으며, 제나라와 동맹을 맺어 이쪽 전선이 안정되면 유방에게 신뢰를 잃은 게 드러난 한신의 거취도 대단히 붕 떠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자 한신은 모조리 엎어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신이 제나라를 치기로 한 결정은 한신 본인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불행에 밀어넣은 시발점이 되어버렸다.
제나라는 한껏 준비를 하고 싸워도 승부가 어떨지 모르는 판에,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다 기습을 당했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한신은 황하를 건너 역하(歷下)에 있던 제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격파해 크게 승리하고 제나라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패주하는 적을 파죽지세로 쫓아 결국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역이기는 제나라 사람들과 좋게 술자리를 가지면서 주연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놀란 전광은 역이기에게 "지금 당장 저 한신의 군대를 오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삶아 죽여주마."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역이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불구, 기개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개의치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망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을 위해 무슨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소?"
결국 역이기는 인생 최대의 하이라이트 시기에 삶아져서 죽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사마천은 전담열전(田儋列傳)에서 "참으로 심하도다, 괴통(蒯通)의 지모여!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회음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 두 사람을 망하게 만들었다."고 하며 괴철을 비난했다.
만일 이때 괴철이 한신을 꼬셔대지 않았다면 제나라 전씨는 유방에게 무난하게 항복했을 테고, 연왕 장도나 조왕 장오(張敖)처럼 이성왕에 임명되면서 가문을 좋게 보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괴철의 이 제안 때문에 제나라는 박살이 났다.
사마천은 이 일이 제나라 전씨를 몰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신을 교만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때 역이기는 유방의 승낙을 받고 제나라에 파견되었으므로 한신의 이 행위는 한왕 유방의 뜻을 분명하게 거스르는 행위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한신에 대한 유방의 분노, 이후에 왕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한신의 행태 등이 여기서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그 전까지는 전략적 판단을 구실로 제나라와 싸우기를 미루면서 군사도 보내지 않더니 이제와서 유방 핑계를 대고 역이기까지 죽여가며 제나라를 억지로 공격했으니 주변에서 보기엔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듯. 그동안 자기가 주장한 내용을 스스로 부정한 셈일 뿐더러 그동안 유방을 기만했다고 말하는 꼴이다.
여담으로 초한대전이 모두 끝난 후 황제가 된 유방은 오호도라는 섬으로 도망가있던 제왕 전광의 숙부 전횡에게 '그대를 왕으로 삼아줄 터이니 지난 날의 아픔은 잊자'고 하며 낙양으로 올 것을 명하고, 역이기의 동생 역상에게도 전횡에게 해코지할 경우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전횡은 두 명의 식객과 함께 낙양으로 오던 중 '천자께서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내 손으로 직접 삶아 죽인 자의 동생을 죄스러워 어찌 본단 말인가. 이제 낙양이 멀지 않았으니 여기서 내 목을 베어 가져간다면 썩지 않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결해버렸다. 유방은 눈물을 흘리며 죽은 전횡을 왕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고 두 식객을 도위로 임명했으나 그 두 식객마저 전횡의 무덤 앞에서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한신의 행동은 전씨와 역씨에게는 이토록 상처였고 비극이었다.
6.5. 용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나면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한신은 유방의 부하이고, 유방에 적대한다면 붙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항우였고, 전광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항우 역시 한신이 초나라 북쪽을 완전히 평정하는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항우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에게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용저는 군대를 이끌고 전광과 합류했다.
이때, 용저가 한신과 겨루기 전, 어떤 사람이 하나의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 한신이 이끄는 군대의 기세가 엄청나 싸우면 형세가 좋지 못하니 싸움은 피하고, 제왕 전광을 내세워 항복한 제나라의 성들을 설득하고, 초나라 20만 대군의 기세를 보이면 항복한 성들이 모두 다시 분위기를 보고 들고 일어날 것이며, 후방이 막히게 되는 한신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박살나버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저는 이렇게 말하며 사망 플래그를 세웠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 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
한신이 초나라 군대에 있었던 적이 있었으니, 용저 역시 한신의 막장 시절 이야기는 들어본 것으로 보인다. 용저는 한신의 찌질한 일화들을 들먹이며 그를 무시했고, 즉시 교전을 벌이기 위해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했다.
이때, 한신은 밤중을 틈타 1만 개의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를 잔뜩 넣어 모래 주머니를 만든 뒤, 강의 상류에 가서 그것을 던져 물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용저의 군대에 싸움을 걸다가,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달아났고, 이를 본 용저는 기뻐하며 말했다.
그 와중에 한군이 재차 반격을 가하자 용저는 전사했고, 사령관이 죽으면서 초나라 군대도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제왕 전광도 달아났고, 한신은 도망치는 부대를 성양(城陽)까지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BC 203년, 마침내 한신은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5개국을 모조리 평정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