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윤중강님이 가끔 옛날 신문기사를 찾아 페이스북에 올립니다. 별다른 해설도 없이 ...
현대어로 풀이해 보겠습니다.
조선극장의 주인공 조천이라는 대 예술가의 각색과 촬영감독하에 기생을 주인공으로 동극장의 해설자 부스러기들과 표파는 자 같은 일등 배우들이 총 출연하여 강명화의 실사를 촬영하였다는 <비련의 곡>것을 며칠밤 계속 상영하였다. # 예술이란 이름을 씌워 마취를 시켜 놓고 돈 한 푼이라도 박박 긁어 가기에 눈깔이 뒤집힌 자에게 예술의 양심을 물을 여지가 있으랴만은 # 아무리 이매망령(귀신의 종류임) 대낮에 날뛰는 세상이기로 조선 고유의 미풍을 흙칠하고 변환사기술로(영화를 가리키는 듯) 예술을 모독하며 가난한 조선사람의 돈을 빨아들여서 사복을 채우려 하는 흡혈귀 같은 자들의 죄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 그러나 남을 꾸짖기 전에 그래도 무슨 위안이나 얻을까 하고 조선극장으로 몰려 들어가는 민중이 한없이 불쌍하다할 것이다.
<비련의 곡>
일본인 하야카와가 제작한 통속 신파물. 1923년 설립된 동아문화협회의 두 번째 작품. 명월관 기생 강명화 동경 유학생 장병천과 사랑에 빠지나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자결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라 한다.
'매일신보'는 '보통 유행하던 천박한 퇴폐 기분을 고조한 것 1925.1.1 ' 이라고 보도함.
통속적이라고 비판을 받기는 하였지만 작품에 대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설에 가까울 정도로 막말을 쏟아 내는 것은 요즘 기준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래 실제 이야기를 보면 남주인공 장병천의 아버지 장길상은 매우 고지식한 인물이어서 자식이 기생과 연애하는 것을 결사 반대한 것 같습니다. 신문의 내용도 아버지가 가진 돈의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비련의 곡 실제 이야기>
그시절 그연애
경성 최고의 스캔들
1920년 7월 5일 경성 종로 관수동의 요릿집 금강원에서 소동이 있었다. 모 상회의 박 아무개가 금강원에서 친한 손님들과 술을 한 잔 했다. 박 아무개는 2시간 가량 술을 마신 뒤 바람 쐬려 나오다가 진작부터 눈독을 들이던 기생 강명화가 마침 다른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박 아무개는 얼른 금강원의 뽀이(남자 종업원)를 불러 강명화를 조용한 방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뽀이는 당장 조용한 방은 없고 지금 이 방이 빈 터이니 여기서 보시라 하고 박 아무개와 강명화를 방에 남겨두었다.
박 아무개와 함께 왔던 일행은 아무리 기다려도 박 아무개가 오지 않자 뽀이를 불러 빨리 찾아오라고 난리를 쳤다. 그러다가 크게 다툼이 일어나 한 명이 접시에 머리를 맞아 유혈이 낭자해지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 번 보면 넋이 나가게 만드는 미모의 기생 강명화는 1900년생으로 본명은 강도천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11살에 기생이 되어 17세에 서울로 왔다. 대정권번(권번은 기생 조합을 가리킴)에 들었고 서도잡가와 시조를 잘하는 명창이었다. 예쁘고 사교성이 좋은데다가 노래도 잘 해서 경성의 한량들은 그녀가 부르는 <수심가>, <배따라기>를 들으려고 2~3만 원의 거금도 아낌없이 내었다고 한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캡쳐
<비극적인 내용인데 드라마 OST는 좀 가볍네요>
많은 경성의 사내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려 했지만 성공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 행운의 주인공은 경일은행의 주인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이었다. 장길상은 한강 이남 최고 부호라 일컬어진 장승원의 큰아들이었다. 셋째가 대한민국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장택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승원은 독립자금 요청을 거부했다가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의 지시로 1917년에 암살된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거부 집안의 아들과 사귀게 되었으니 돈 걱정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장길상은 수전노였고 아들에게도 허튼 돈은 일체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1919년에 만나 장래를 약속했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서 강명화는 여전히 기생 일을 해야만 했다.
장길상은 아들이 기생과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고는 노발대발했다. 둘 사이를 강제로 끊어놓으려 하자 장병천은 1921년에 강명화와 함께 일본 도쿄로 도망쳐버렸다. 여비는 강명화의 패물을 팔아서 마련했다.
도쿄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신학문을 배우기로 작정한 뒤 장길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길상은 처음에는 아들이 혼자 유학을 간 줄 알고 돈을 보냈지만 이내 강명화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지원을 끊었다.
살 도리가 없었던 강명화는 서울에 있던 집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한숨 돌리는가 했지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두 사람의 내막을 모르는 조선 유학생들이 시비를 걸어왔던 것이다. 부호 집 도령이 기생 첩을 끼고 호화 유학 생활을 한다는 시비였다. 장병천이 린치를 당하는 것을 본 강명화는 부얶으로 달려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서는 자기 손가락 하나를 잘라버렸다.
“나는 장씨 문중의 사람이니 결코 헤어질 수 없다!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고생하며 학문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강명화의 기세에 놀란 유학생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공론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목숨의 위협이 느껴지자 두 사람은 유학을 포기하고 경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경성으로 돌아와 장길상을 찾아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사정했으나 매몰차게 내쫓길 뿐이었다.
강명화는 기생인 자신 때문에 장병천이 집안에서 대접 받지 못하고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결코 장병천과 헤어질 수도 없었다.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여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겠어요.”
강명화가 이렇게 말하면 장병천도 할 말이 없어서 같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1923년 5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강명화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 했는데, 집안 식구들이 눈치를 채서 간신히 말릴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던 강명화는 6월 6일 밤에 장병천을 만났다.
“몸이 불편하니 온양 온천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어요.”
영화 '강명화' 포스터
그러면서 그녀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요구를 했다.
“도무지 입을 게 없으니 옷과 구두를 좀 사주세요.”
나들이 가는데 좋게 치장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장병천은 옥양목 일곱 벌과 흰 구두를 사주었다. 장병천이 집으로 와서 강명화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강명화는 어머니를 붙들고 한참을 울다가 인력거를 타고 용산역으로 갔다. 장병천은 남대문에서 차를 타고 용산역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온양 온천에서 꿈 같은 사흘을 지낸 후 강명화는 몰래 쥐약을 먹었다. 강명화는 창백해진 얼굴로 장병천을 붙들고 말했다.
“독약을 먹었어요.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안아주세요.”
놀란 장병천이 강명화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당시 의술로는 강명화를 살릴 수 없었다. 강명화는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순간에 장병천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강명화는 창백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장병천을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 중에 가장 사랑하는 파건...”
파건은 장병천의 별호였다.
장길상은 강명화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줬다. 이제 현실적인 위협이 전혀 없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제물과 제문을 지어서 직접 빈소에 나와 예를 치렀다.
이 사건은 당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당장 한 달만에 강명화와 장병천의 사연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한다고 나섰을 정도였다. 이걸 두고 볼 장길상이 아니었다. 연극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나중에는 연극을 하겠다고 장길상을 협박하는 일도 생겼다. 물론 장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본 장병천은 제정신일 수 없었다. 그의 꿈에 강명화가 보이면 며칠씩 앓아눕기 일쑤였다.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강명화의 친한 친구를 자주 만났다. 세간에서는 그 친구가 강명화와 비슷하게 생기고 살짝 걷어올린 머리 모양까지 똑같이 하고 다니기 때문에 장병천이 그녀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여전히 방탕한 남자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기생이 강명화의 친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전의 강명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된다. 물론 장길상은 아들이 여전히 화류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그에게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다. 백만장자의 가난뱅이 아들이 바로 장병천이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구나. 죽으면 명화와 합장을 해다오.”
이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는 결국 강명화가 죽은 지 넉달 여만에 똑같이 쥐약을 먹고 말았다. 총독부의원 1등실에 실려갔으나 그를 살릴 수는 없었다.
신분이 없는 세상이었으나 사실은 신분이 모든 것을 갈라놓는 세상에서 강명화는 결국 죽음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23세였다.
이 두 사람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는 당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1924년에 <강명화 실기>가 출간되고 그 후 <강명화전>, <강명화의 설움>(1925), <여의괴 강명화전>(1927), <절세 미인 강명화전>(1935) 등 출간이 줄을 이었고 일본에서도 <비련의 곡>(1924)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967년에 윤정희, 신성일 주연으로 <강명화>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주제가는 이미자가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