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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해 최수모 친구 자서전5
<공군 친구들과 생가 마을에 가다>(1)
서강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더 이상 연장이 불가능한 입영통지서를 마지막으로 받았다. 신입생 시절부터 정기적으로 입영통지서를 받았었지만, 학업을 마칠 때까지 세 번의 연장이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연장이 불가능했고, 변수가 없는 한 꼼짝없이 육군 사병으로 병역의무를 해야 했다. 당시 우리 학교는 ROTC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장교로 가는 길은 없었다.
그런데 학교의 담이나 벽의 이곳저곳에 장교 모집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해군 학사장교와 공군 학사장교였다. 그리고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는, 학사장교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기존의 입영통지서는 자동으로 소멸된다는 것이었다.
초조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험 일정이 빠른 공군에 응시하였다. 의무 복무 기간이 육군 해군보다 길어 총 4년 6개월이었으나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합격하게 되어 만 가지 시름이 날아가고 설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일한 과정과 절차로 삼백 수십여 명의 대학 졸업생이 대전 교육사령부에 모여 공군 학사장교 64기 동기의 인연을 이루었다. 모두 자기 고향과 학교를 대표하는 학사 출신의 싱싱한 청년들이었다. 우리는 5개월 동안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숙식, 동일한 훈련을 수료하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영원한 전우로 거듭났다.
훈련 중 경험한 에피소드도 많았고, 임관 후 실전 부대로 흩어져 4년 동안 각자 경험한 에피소드는 밤을 새워도 다 풀지 못할 만큼 무궁무진하다.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여러 종류의 소모임이 생겨났다. 그중에 나는 당구나 골프에는 재주도 취미도 없어, 등산모임인 ‘청산회’에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뒤뚱거리고 숨차하는 나를 잘 수용하고 편달하여 주어서 정을 붙이니, 드디어 정회원이 되어 10년 세월의 훈장을 달게 되었다.
청산회 회원이 되어 참여 횟수를 늘려가는 동안, 나는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졌다. 체중이 과하고 운동이 부족해서 매번 따라갈 때마다 힘이 들었다. 어느 때는 숨이 차고 어느 때는 다리가 아팠다. 항상 나 때문에 속도는 느려지고 쉬는 횟수는 늘어나고 거리는 짧아지고, 따라서 미안함은 쌓이고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걸음을 걷자마자 지게를 지고, 십 오리 산골짜기 등하교길을 뛰어서 다니고, 나뭇짐과 풀짐을 지고 산비탈이 닳도록 다니던 화려한 체력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마도 사관후보생 시절 훈련을 받으면서 이러한 작태를 보였다면 당연히 낙오자 감이고 열외 감이고 퇴교 감이다. 그런데도 계속 대열의 늘어진 꽁무니 한 자락을 유지하고 있음은 친구들의 우정 어린 배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일행 중에서 한두 명은 항상 처져서 나와 보조를 맞추고, 나를 받쳐주는 일이 아예 정형화되었다.
내가 청산회 카페의 등산 모임에 참가 기표를 하고, 약속장소에 나가면, 만나자마자 몇 사람이 반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도 ‘항모’가 나왔으니 우리는 오늘 마음 놓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말이다. ‘항모’는 청산회 총무가 붙여준 별명인데, 항공모함의 준말이다. 친구들도 전날의 음주 등으로 컨디션에 자신이 없다가, 꼴찌 담당인 나를 본 순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 말의 참뜻에는 나의 미안함을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음을 안다. 출발하자마자 걸음이 빨라지면 나는 바로 쳐지기 시작한다. 이유는 내가 심부전이라서 똑같이 무리해서 빨리 걸으면 가슴이 따가워지기 때문인데, 그 얘기를 들은 친구는, “그럴 때는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무조건 주저앉아 쉬어 가자”라고 한다. 그리고 절대로 무리하지 말란다. 고마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지만, 항상 ‘내 조 대로’ 천천히 간다.
그런데 ‘빈대도 낯짝이 있다’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산에를 따라다니면서 항상 신세를 진 기분이고,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등산하는 전날부터 작은 준비를 한다. 그것은 중간에 친구들이 나를 살펴주느라 앉아서 쉴 때,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작은 먹을거리를 지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곶감과 담금주와 마늘빵과 사탕과 과자 등이다. 실제로 산행 시에 당분 보충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런 중에 언젠가 나의 고향 내가 태어난 생가터 이야기가 나왔다. 그곳은 해발 700여 미터의 첩첩 산간의 오지라고 소개를 하니, 친구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곳을 한번 가보자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가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초에 가기로 했다가 임박해서는 사정상 가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하고 아쉬운 일이다.
나의 생가터를 같이 가기로 한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개인 역사를 나와 함께 또 쓰게 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묘하게 인연이 이어진다. 이 소중한 인연의 강물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기에는 참으로 나를 선동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因緣生起/모든 형상이 생기하고 소멸하는 법칙)이다.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연기(緣起)’는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다. 이걸 조금만 더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연기란 ‘인연을 맺고(緣)’ 결합을 해서 ‘일어난다(起)’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어떤 조건에 의해서 생기고 사라지는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에 있다.
둘째, 모든 존재는 자신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고, 소멸할 때도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법’이라 한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성립하는 것이다.
셋째,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세상에 우연히 생기거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고,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없다. 다만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작년(2019년) 10월, 나의 생가를 방문한 친구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사회적 명사들이었다. 각자 분야별로 일가를 이룬 전문가 내지는 저명인사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이 산간 벽촌에 1박 2일을 작정하고, 고생과 안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은 그들과 나와의 ‘인연생기(因緣生起)’, 이것을 빼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들이 나의 생가를 방문함으로써 나도, 내 고향 이실도, 영광스럽고 빛나는 역사 한 페이지를 새로 쓰게 되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상주행 버스를 타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고향을 먼저 서면으로라도 소개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상주시에서 발행한 ‘상주의 문화재’ 중 축약된 서너 페이지를 복사하여 일정표와 함께 한 셋트 씩 돌렸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주는 예로부터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가 된 그 상주이고, 오랜 세월 곶감과 흰쌀과 누에고치가 특산물이었던 ‘삼백의 고장’이다. ‘상주의 문화재’란 홍보 책자에는, 상주의 시목(市木)이 감나무이고, 시화(市花)는 장미이며, 시조(市鳥)는 까치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상주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성립되어 3세기경 신라에 복속된 사벌국과 이 시기에 소멸된 고령 가야국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상주는 영남의 고도(古都)요, 고도읍(古都邑)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상주(上州)로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사벌주(沙伐州)로 전국 9州 중의 하나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전국 8牧 중의 하나이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상주 목사가 관찰사를 겸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상주 감영이 대구로 이전할 때까지 중요한 대읍(大邑)이 되었다.
예로부터 상주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오곡이 풍성하고 민심이 순후한 고장이다. 상주를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 유역에는 분지와 충적평야가 드넓어 땅이 비옥하고, 수륙 교통이 교차하는 요충지였기에 다른 지방보다 생활이 더 풍요로워, 인심이 순하고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 선비 고을로 자리 잡았다.
중부 내륙 고속국도를 달려 상주 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택시 3대로 나누어 타고, 1차 목표지점인 용포 고개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용포는 상주의 안산인 해발 805.7미터의 갑장산(甲長산)을 가운데로 두고, 동남쪽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낙동면을 돌고, 북쪽으로는 청리면을 돌아서 두 지역이 경계를 이루면서 만나는 고갯마루이며, 갑장산의 어깨에 해당한다. 또한 용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나의 생가가 있는, 이실 마을로 올라가는 삼거리 길목이다.
청리역에서 용포로 가기 위해 옥산·김천 방향으로 500미터쯤 가다가, 청리초등학교와 청리중학교 사이의 왼쪽 지류로 갈라져서, (내가 초등학교 4년과 중학교 3년을 다닌) 청하2리 영마(역마) 동네 앞을 지나게 되는데, 그 청하리와 옥산·김천 방향의 마공리 하초리 사이의 일대 조양산 아래에는,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고분군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영남 북부 지역의 신라 묘제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한다. 경부고속전철 차량 제작 건설부지 공사 중 이곳에서는 2,800여 점의 토기, 자기, 철기, 청동기, 기와,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교가 가사에도 녹아 있다. 청리초등학교 교가에는, “조양산 억센 줄기 정기를 타고 낙동강 맑은 흐름 쉴 새 없도록”하는 구절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청리중학교 교가에도 이렇게 들어가 있다. 나는 그걸 지금도 기억한다.
“갑장산 높은 봉과 서산을 안고, 정중히 자리 잡은 우리의 모교, 굳세게 자라거라 청리중 학도, 슬기에 가득 찬 몸 나라의 등불, 그 이름 빛나 거라 청리 중학교”
택시 기사의 재량에 따라 1호 차는 낙동면으로 해서 용포로 올라가고, 2호 차는 청리면으로 해서 가기로 하였다. 내가 탄 3호 차는 청리역 앞에서 시장도 볼 겸, 포항에서 자차로 오는 친구 정 총장을 만나기 위해, 청리까지만 갔다.
청리역을 출발한 차가 그 옛날 파발마의 휴식지점이었던 영마(역마)를 지나고, 양짓마(양지마을)를 지나 저수지를 끼고 달리니 순식간에 용포 고갯마루가 보인다. 옛날 걸어서 다닐 때는 청리역에서 저 고갯마루까지는 중간의 저수지를 기점으로 평지길 한 시간, 비탈길 한 시간, 도합 두 시간의 거리였다. 지금은 포장된 이 길을 한 시간 반 간격으로 마을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탄 차로는 여기 저수지까지가 10분이요, 저기 고갯마루까지가 10분이다.
저수지부터 고갯마루까지 가면서, 왼쪽으로 한 마을이 있고, 오른쪽으로 세 마을이 있다. 해평, 평짓마(을), 정꼴 마을이 바로 그 세 마을이다. 저수지를 경계로 해서 위에 있는 마을들을 청상리(靑上里)라 하고, 아래에 있는 마을들은 청하리(靑下里)라 한다. 아래위 모든 마을에는 ‘삼백(三白)의 고장’답게 집 주변이나 밭이나 감나무가 지천이다. 때가 때인지라 여기저기 아직 수확하지 않은 감들이 붉게 물들어 탐방객의 눈길을 즐겁게 한다.
용포 고갯마루에 금방 도착한 차가 급경사가 시작되는 이실 쪽으로 접어든다. 차에서 보니 먼저 온 일행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갑장산의 남쪽 어깨를 타고 올라가는 셈이니, 이 산을 소개하지 않으면 결례일 것이다.
갑장산은 상산 삼악(三嶽)의 하나로 상주의 안산(安山)이며, 서쪽에 상산을 앉히고, 그 품이 흡사 큰 연못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연악(淵嶽)이라고도 알려진 명산이다. 갑장산이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이 산의 동편 승장 폭포에 있던 승장사에 잠시 머물며, 영남 제일의 명산이라 한 데서 생겼다 한다.
갑장(甲長)산은 조선조까지 상주 관아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절경이 많아 사대부들의 유상처(遊賞處)로 시문(詩文)의 창작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있는 연악서당(서원)은 학문의 전당이 되어, 이곳을 지나는 명인들의 시문을 많이 보존한 서실이 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갑장산은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었다.
탐방객 일행이 이실로 가는 경사진 비탈길을 흐물흐물 굼벵이처럼 오르는 모습을 차 안에서 보고 있자니, 서울 근교 산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라 참 미안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신대장(헌병 전대장 출신)이 이상하다, 평소 백두대간을 혼자 주파하고 다니던 건각인데 오늘은 맨 뒤에 처져서 흐느적거린다. 옆으로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컨디션 난조라고 SOS를 보낸다. 나머지 일행들을 길가에 줄줄이 늘어놓고 신대장만 차에 태우고 먼저 전진한다. 급경사 200미터 정도가 끝나면 거기서부터 목적지까지는 굽이굽이 열두 구비지만, 거의 돌고 도는 평지길이다. 길 위와 길 아래는 숲이고 골짜기다. 그 옛날에는 노루와 꿩이 수시로 보이던 곳이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들어갈 수는 없고 길에서 손이 닿는 산초나 산 복숭아가 눈에 띄면, 벌초하러 와서 채취한다.
길의 높낮이와 상태를 수시로 알려주는 나에게, 운전하는 정 총장과 뒤에 앉은 신 대장이 한마디씩 한다. “완전히 개천에서 용 났구먼!” “히야! 이런 데도 있었네!” 차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는 ‘돌티재’ 주차공간에 잠시 머물게 하고, 나는 산소에 소주 두 잔과 과자 한 봉지를 놓고 참배를 했다. 누군가 같이 참배하겠다고 했었는데, 아직 미도착이니 혼자 할 수밖에.
조부모 산소에서 생가터까지는 500 미터 남짓이지만, 오목한 큰 골짜기 하나를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집 양지’에 있는 증조부모 산소 밑을 지나 200미터만 가면 내가 태어난 안이실 생가 마을이다. 한창 번창했을 때는 집이 19 세대까지 늘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뒷집 ‘아지매’였던 구십의 안노인이 백 년 넘은 토담집에서 홀로 살며, 주말마다 서울과 구미에서 들리는 자식들을 맞이한다.
백 평 정도 되는 나의 생가에는 할아버지의 토속 신앙인 귀물바위가 있다. 그리고 작은 우물 하나, 백 년이 다 된 고염나무와 감나무만이 아직도 매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서 있다. 밤나무와 살구나무는 오래전에 자연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오동나무와 소태나무는 어느 몰상식한 작자가 돈이 될법해서 그랬는지 무단으로 베어내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내 보살심(보살같은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지 않고 있다. 그 외에는 옆집과의 경계에 돼지감자가 무성할 뿐, 다른 것은 없다. 아, 뒷집의 그 ‘아지매’가 우리 마당 한구석에 더덕을 몇 포기 심어 놓았더라. 가을이 되면 우리 집 감도 그녀의 차지다.
우리 집 주위에는 앞줄에 네 집, 뒷줄에 세 집으로 일곱 집이 아랫마을을 이루고 있었었다. 앞에서 보아 왼쪽의 집은 여자 동갑내기 ‘모개’네 집인데, 그녀의 아버지는 째보이면서 포수이기도 해서, 가끔 우리 할아버지에게 노루고기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그 집은 송아지만큼 큰 사냥개가 두 마리나 지키고 있어서 가고 싶어도 자주 가지 못했다. 그 사냥개는 언젠가 윗마을 친구한테 놀러 가는 나를 덮쳐서, 이후로 나는 강아지만 보아도 개라면 무서워하는 트라우마를 안긴 악몽의 개다.
내가 그 집을 꺼리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집 뒤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여 거기에는 뱀이 우글거릴 것이라고 늘 상상하였다. 그래서 대나무 숲 뒤로 나 있는 길은 자주 다녔지만, 그 대숲에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점은 또 있다. ‘모개’는 얼굴이 참 고운 아이였는데 왜 이름을 못생긴 모과를 뜻하는 ‘모개’로 지었는지 모른다. 아마 첫아이가 딸이라서 시부모에게 눈치가 보여서 엄마가 지레 ‘모개’라고 불러 구박을 줄이려는 의도였는가? ‘모개’는 그 뒤 영원히 초등학교도 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오른쪽 두 집 중, 우리 바로 옆집은 같은 최가네 친척인데 매년 보릿고개 춘궁기만 되면 그 집 아주머니가 우리 할머니에게 양식을 꾸러 오는 것이었다. 돌아가고 나면 할머니는 구시렁대면서 나무랐다. 할머니의 나무라는 이유는 살림살이가 알뜰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집에 가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눈치 없이 ‘갱시기’를 한 그릇씩 얻어먹는 때가 있었는데, 하얀 쌀과 콩나물과 무 배추를 넣고 끓인 것인데 그 ‘갱시기’의 맛은 천하일품이었다. 그때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나는 손수 그 ‘갱시기’ 맛을 재현하여 먹어보고 있지만, 도무지 그 맛이 안 난다. 하여튼 우리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가 부엌 바닥에 둘러앉아서 그릇이나 바가지를 손에 든 채로 먹는 나물밥과 그 집의 ‘갱시기’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밥은 쑥이나 산나물 위에 드문드문 보리쌀이 보이지만 그것은 밥이라기보다 나물로만 된 나물무침이나 다름없었다.
근검절약을 위하여 김장에 고춧가루도 생략하던 우리 어머니, 동네에서 몸서리난다는 소리를 들은 우리 어머니까지도 항복한 할머니였으니 얼마나 지독한 분이었겠는가. 그런 할머니였지만, 귀한 맏손자인 내가 치마폭에 따라다니면서 ‘수루매(오징어)’나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대면, “수루매가 어데 자꾸 나오는가!” 하면서도 수루매나 벌레 먹은 곶감, 밤, 대추가 사시사철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1972년, 내가 공군 학사장교 훈련 중에 79세를 일기로 선종하셨다. 아버지께서 관보를 치는 바람에 나는 삼백 수십 명 동기생 중 유일하게 2박 3일의 특박을 나가게 되어, 혹독한 훈련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것은 순전히 장손자를 염려한 할머니의 가피력(加被力 :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의 증명사진을 확대하여 보관하고 있다. 그 사진은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하던 시절, 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 할머니가 타작을 하다가 머리에 티끌이 묻은 채로 찍은 유일한 사진이며 얼굴의 주름살은 테레사 수녀의 그것과 비슷하다.
‘갱시기’집 옆의 오른쪽 끝집은 초등학교를 같이 입학한 불알친구 ‘학우’네 집이다. 뒷줄의 세 집 중 왼쪽 집은 90세 노인이 혼자 사는 ‘성모’네요, 가운데 있는 집은 내가 방학 숙제를 도맡아 해준 ‘영숙’이 아지매네 집이고, 오른쪽 집은 ‘뒤깐’네 집이었다. ‘뒤깐’이란 이름이 지어진 연유는, 뒷간(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아서 그리 지었다 하는데, 나중에 정식 이름이 ‘점희’로 지었다.
그 옛날 옹기종기 아담하던 마을은 논도, 밭도, 학교 가던 길도 모두 숲으로 변하여 사라지고 없다. 앞산 음달에 4월까지 보이던 얼음도, 커다란 새가 하얀 뱀을 물고 하늘로 나르던 희한한 광경도, 동네 어귀 큰 소나무와 거기 매달린 그네도, 공터에서 높이 날던 연도 모두 다 과거로 사라지고 없다. 그야말로 제행무상(諸行無常/우주 만물 삼라만상은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변하고 소멸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 즉 만물은 모두 변한다는 것. 허무하다는 뜻이 아님에 유의할 것)이다.
2020. 4/5~4/8 염창동 우거에서 法 海
첫댓글 법해가 공군 장교 동기생들의 등산 모임 친구들과 그의 고향 청리면 이실 마을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세월 너머 아득한 옛 고향을 찾아 그 정취와 인정을 회상하는 그의 다정다감한 감수성과
고향 상주에 대한 자부심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분량이 길어서 두 번으로 나누어서 싣습니다. 오늘이 그 첫 번째 글입니다.
내 큰 아부지댁도 그 어디입니다.
김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외남으로 이사를 하여 중학교는 최수모씨랑 같은 청리 중학교에 다녔지요. 이 글을 읽으니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하여 가슴이 서늘합니다.
아. 같이 밥이라도 먹을 걸.
그리 생각은 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막걸리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엮으면 상당 부분 날실과 씨실이 엮일 터. 안타깝습니다.
청리 중학교를 등하교 할 때 그 먼 길을 하늘과 너른 벌판을 편도 한 시간 남짓 오가며 담은 수많은 추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 숨쉬는데 왜 그렇게 고즈녁한지. 막힌 듯 길이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싶으면 길이 막히고, 그 막막함이 내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최수부씨가 등산 할 때 싸 온 된장 넣어 구운 부침개 맛을 잊을 수 없어 가끔 혀로 입안을 위로하곤 했습니다.
지금 화장경을 지나고 있겠지요.
넉넉한 인품에 툭툭 던지는 말투가 큰 오빠 같았던 수부씨라 화장경 아래로 흐르는 황천담에 반영되는 죄의 영자가 많지 않을 듯합니다. 부디 수부씨를 기억하는 친구들일랑 망각의 강을 건너도 잊지 말길 기도합니다.
지금은 많이 뜸해졌지만 50대 60대에동기들의 혼사가 많았을 때에 서울에서 수모동기를 만나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씩 웃어주던 생각이 나는군요. 행사에도 많이 참석하여 다정다감하던 친구인데 갑자기 별세하니 많이 안타깝군요, 담임선생님이셨던 전장억선생님에게도 충성했던 친구라고 들었는데, 고향을 생각하는 좋은 글을 올려준데 대하여 감사드리며 하늘나라에서 천복을 누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