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일부의 사찰에서 우담바라꽃이 피었다며 요란하게 TV방송도 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찰로 몰려 들고 하였으나, 전문가들에 의해 곤충의 종류인 '풀잠자리의 알'이라는 해명의 보도로 일어난 소동이 있었다.
'우담바라'는 인도북부에 자생하는 식물로서 불교의 경전에서 유래되어 지금의 우리들이 알게된 식물에 대한 이름인데, 산스크리트어로 'Udumbara'를 한자어로 음역한 것이 우담바라(優曇婆羅)라고 한다. 불교경전의 내용에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을 하면서 "부처를 만나는 것과 직접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담바라 꽃을 보는 것과 같다"는 예를 든 내용에서 유래된다고 할 수 있다.
(대열반경)
“선남자여, 마음대로 물으라. 지금이 물을 때이니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겠다. 그 까닭을 말하면 부처님을 만나는 어려움이 우담바라꽃과 같고, 법도 그러하여 듣기 어려우며, 12부 경전에서 방등경이 더욱 어려우니, 그러므로 전일(全一)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느니라.”
(법화경)
“왜냐하면 여래의 출현은 우담바라꽃처럼 드물며, 대해를 표류하는 나무 구멍에 가끔 떠오르는 거북의 머리가 쏙 들어가는 경우처럼 드문 일이기 때문이옵니다.”
(장아함경)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하라. 여래가 때때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마치 우담바라꽃이 가끔 한번씩 피는 것과 같다.”
불교인들이 우담바라꽃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를 찾아 본다면, 불교의 사상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인도의 경전을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중국에 없는 식물이기에 이해가 부족한 이유로 '허공에 피는 꽃' 또는 '삼천년에 한 번 피는 꽃'이라든가의 신비화된 가상의 꽃으로 와전이 되어 우리나라에 불교와 함께 전해지게 된 이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석가모니 부처가 예언한 미래불(未來佛)인 미륵의 출현에 관한 불경의 내용이다.
『월장경』은 6세기에 인도 사람인 「나랜드 라야사(那連堤耶舍,나연제야사)」가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말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죽음을 앞두고 설법한 것이라고 한다.
나의 수명은 이제 얼마 길지 않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나의 제자들도 그리고 내가 설파하는 진리를 들어 준 많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나의 교리는 무너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멸망하고 만다. 우선 나의 사후 5백년간은 올바르게 전도될 것이다. 그 후 1천년 동안은 조금 시들어지나 그래도 교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말법대에는 크게 무너져서 얼토당토 않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장아함전륜성왕경』
그 때에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리니 이름은 「미륵」이라 하리라.
위의 내용에 비롯되어 불교인들이 갈망하는 궁극의 대상을 찾아 본다면, 성불이라는 깨달음을 통한 열반의 목적과 미래의 부처인 미륵을 만나는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두 이야기가 심적작용의 바탕이 되어 현상으로부터 거꾸로 답을 찾으려 하는 조바심에 의해서 우담바라꽃이 피면 미래의 부처인 미륵(彌勒) 부처를 만날 수 있는 지금의 때가 아닌가 하는 염원을 이루어 보려는 심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담바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전에 뒤져보았더니, 뽕나무과의 무화과나무의 일종으로서 암수 딴그루의 꽃을 숨기는 은화식물(隱花植物)이라고 한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도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라고 하여 무화과(無花果)라고 이름하였지만, 실상은 열매로 보이는 것이 꽃이게 되는 셈인데 과거 사람들은 열매로만 보이고 숨겨진 꽃을 볼 수 없었던 이유로 무화과라 이름을 하였을 것이다. 암수 딴그루로서 교접(交接) 여부를 기준으로 보면 계란의 무정란과 유정란의 차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도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로 알았던 입장으로 보면, 신비의 나무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주적 시각으로 우주의 시작 또한 자웅동체로서 비롯되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지구 또한 우주적 시각으로 하나의 생물체라 할 수 있다. 지구라는 하나의 생물체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주인공은 인류이며, 의식과 문명의 성숙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열매를 맺으려 하는 중에서 갖게 되는 우리의 인생인 것이며, 이의 축적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이 낳음의 연속 중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쉬이 인식하여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가 존재함에 따른 암수의 구별을 하는 이해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의 실상은 매 순간마다 교접(交接)을 통하여 낳음을 연속하는 와중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교접의 대상으로서 원인자격인 수컷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작용케 하는 자연의 섭리로서 무형의 성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암컷은 눈에 보이는 세상인 물질계라 할 수 있으며, 변화가 되어진 현상이 곧 낳음인 것이다.
과거인류로부터 전해져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신(神)이라는 존재 또한 이 무형의 성질에 관한 이해를 가진 과거 자연문명의 사람들에 의하여, 세상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개념으로서 원인자격으로 설정하여 가상의 주재신(主宰神)으로서 신격화(神格化) 하여 지칭하게 된 유래라 할 수 있다.
우연찮게도 우담바라처럼 이 무화과나무는 성경의 3장 6절과 7절의 내용에도 나오는 나무이다.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꾸 삼천포로 빠질려고 한다.
이 지구는 우주가 영원의 시간을 통하여 피워낸 꽃이기도 하며, 우주의 보석이기도 하며, 우주의 성질이 현화된 생명의 왕국인 우주의 정원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불가에서 말하는 우담바라꽃이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우담바라꽃의 세상인 것이다.
지금의 과학적 상식으로 보면, 지구 밖의 새로운 태양계와의 거리가 수십 또는 수백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하며, 우주공간의 평균온도는 영하 270도 정도라고 한다. 가까운 달의 최고표면온도는 영상 123도 정도이고, 최저표면온도는 영하 233도 정도라고 한다.
한 번씩 목욕탕에 가게 되면 열탕에서 잠수를 즐겨하는 편인데, 경험적 실험을 해 본 결과에 따르면, 물 속에 잠수를 해서 2~30초만 지나도 숨이 차서 죽을거 같아서 못견디고 올라 와야만 한다. 심지어, 눈을 떠서 물 속에 있는 것을 똑 바로 보려고 해도 흐릿하게 보이는데다가 숨까지 차서 답답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무조건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큰 숨을 들이켜야만 한다.
속담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반대어-저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어차피, 우리는 헤아릴 수도 없는 영원의 과거인 없음(無)에서 지금 우리는 이 지구에서 태어나 짧은 일생을 통하여 우주를 보고 느끼며 살게 된다.
이렇게 볼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맛을 볼 수 있고,
또 느낄 수 있으며,
생각 할 수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이롭게만 느껴진다.
이 지구 밖은 그야말로 죽음의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지구와 같은 새로운 터전으로 가려면 1분도 아닌 빛의 속도록 수십년 또는 수백년을 가야 한다니, 더군다나 이 100년도 못 사는 이 육체를 가지고 어디를 얼마나 가서 새로운 곳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단 말인가?
나는 이 지구가 좋다. 비록, 사깃꾼과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이 지구가 좋다. 마음 통하는 사람끼리,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끼리 사는 이 곳이 나는 너무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땅에 살면서 우주에 존재하는 사명이 있지 않은가.
우주가 깨어난 '나'라는 정체성을 깨달음과 동시에 모두의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인류가 가질 완성된 미래문명을 이루어내기 위한 주춧돌을 이루는 구성 성분으로서의 작은 역할로서 삶의 소명이 있지 않은가.
내 삶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자연의 감정이지 않은가. 나는 나의 감정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느낀다. 확성기의 깔때기 처럼 그들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 나는 함께 동요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나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동질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에 존재한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은 마음으로는 지옥처럼 고통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기쁨의 이야기와 함께 함이 좋다. 이 모든 이야기는 자연의 이야기이며, 자연의 일부인 나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 추울 때나 엄청 더울 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도 안락한 곳에서 아무런 수고로움이 없이 편히 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 마음 마저도 변화와 안주하려는 자연의 본성적인 성질에서이니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이 두 마음을 굳이 부정할 수도 없다. 그냥 그 때마다 내 속에 있는 두 마음과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함께 즐기는 수 밖에..^^!
그대는 우담바라 꽃을 본 적이 있는가..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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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우담바라 [優曇婆羅] :【명사】[불교] 불교 경전에 보이는 상상의 꽃.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담바라 : (영화 제목 가운데에도 《우담바라》가 있다. )
우담바라(산스크리트어: उडुम्बर uḍumbara)는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꽃이다. 인도에 나무는 있지만 평소에는 꽃이 없다가 3000년마다 한 번, 여래(如來)가 태어날 때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에만 그 복덕으로 말미암아 꽃이 핀다고 한다. 우담화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