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병마가 찾아든 것은 30세경부터였다. 저혈압에 심장 이상이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저혈압 증상이었다. 어떤 경우 혈압이 60∼90, 60∼70 정도로 떨어지면 천장이 뱅뱅 돌고 구토가 났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맥을 짚어보면 뛰는듯 마는듯 약했다. 이와 함께 심장이 늘 쿵닥쿵닥 뛰었다. 당연히 마음은 늘 불안했다. 혈압이 낮고 심장이 안 좋으니 빈혈증세가 뒤따라와 항상 어지러웠다. 매년 서너 차례는 빈혈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러면 하루, 이틀 입원했다가 기운을 차리면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체중이 급격히 느는 것이었다. 56킬로그램 내외를 유지하던 체중이 66킬로그램을 넘어섰다.
하혈을 시작한 것은 39세 때부터였다. 어느 날 갑자기 하혈을 한 뒤 한 달에 20일 내외는 생리를 하듯 하혈을 했다. 병원에 가 보니 혹이 생겼다고 했다. 물론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자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그즈음 올케 언니가 자궁암으로 죽었는데 그 죽음을 목격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의사들은 나쁘다. 어차피 죽을 것을 배나 가르지 말 것이지…."
설상가상으로 3살 난 딸이 또 중병에 걸렸다. 힘이 없고 얼굴이 창백하며 간혹 기침을 했다. 병원에 가니 폐결핵이라고 했다. 아이는 통원치료하며 폐결핵 약을 계속 먹었다. 그런데 증상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다시 검사를 했다. 이번에는 백혈병이라고 했다. 또다시 검사를 했다. 이번엔 악성 빈혈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 속 어디에선가부터 현대의학에 대한 불신이 싹터왔다. 그리고 의사들의 무성의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물론 많은 환자를 대하니 피곤하기도 할 터이지만 폐결핵이나, 백혈병이나 그 당시에는 모두 치료가 어려운 중병이었다. 특히 백혈병의 경우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그런데 오진이라니!
명은 하늘에 달렸다고 나는 생각하고 아이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 뒤 4년 동안 나는 민간요법을 공부했다. 딸의 악성 빈혈을 불과 1주일 만에 고쳤다. 악성 빈혈에는 비타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헤모글로빈을 먹이고 야채를 갈아 먹였다. 나는 기가 막혔다. 불과 7일이면 고칠 병을 괜히 병원에 다니며 고생시켰다 싶어 아이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병원을 불신하고 양약을 잘 안 먹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웃집에 의사 아들을 가진 할머니가 있었다. 그 집엔 약이 없었다. 나는 이상하게 여겨 왜 약이 하나도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할머니 대답이 아들이 약을 절대 못 먹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느리에게도 절대 복강수술을 못하게 한다고 했다.
채식을 많이 하고 따로 비타민을 섭취하며 나름대로 민간요법으로 내 병을 치료하려고 했으나 차도가 크게 없었다. 나는 1985년, 1987년, 1988년 세 번에 걸쳐 다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내가 실려가면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이번엔 죽을 것 같다고 의사나 간호원들이 쑥덕거리곤 했다.
1987년 입원했을 때였다. 그땐 허리 디스크까지 겹쳐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종합진찰 결과, 1차로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고 2차로 자궁 종양을 제거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수술 날짜가 잡혔다. 병원에 1주일 머무는 동안 나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검사한다고 이리저리 짐짝처럼 옮겨다니는 것도 피곤했고 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곤두서서 잠이 오지 않았다. 수술을 하루 앞둔 날 밤 나는 곰곰 생각했다. 과연 수술을 해야 하는가. 그때 왜 수술 후 죽은 올케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나는 갑자기 절대 수술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내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던 내가 움직이다니. 나는 다음날 아침 병원을 빠져나왔다. 허리가 으스러질듯 아팠다. 그러나 나는 절대 수술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한 발 두 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날 밤 여드레 만에 단잠을 잤다. 나는 나름대로 침을 맞고 허리 교정을 받으며 디스크 치료를 해나갔다. 가족들은 난리였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말했다. 내 목숨은 내가 관리할 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이럭저럭 1987년이 지나갔다. 잊을 수도 없는 1988년 12월 24일. 새벽에 몸이 무지무지 아팠다. 그러다 25일 밤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뇌졸중이었다. 온몸이 마비되었다. 나는 병원에 실려가 15일간 입원했다. 그러나 마비증세는 풀리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에게 퇴원하겠다고 졸랐다. 가족들이 말을 들을 리가 있는가. 나는 끝까지 고집했다. 결국 가족들은 내 고집에 져주었다. 나는 퇴원 즉시 침술원에 입원했다. 역시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침술원에서는 며칠 후 할미꽃 뿌리 삶은 물로 단술을 해주었다. 그 물을 먹으니 설사가 나왔다. 그래도 어쩐지 몸이 개운하고 좋아져 계속 먹었다. 설사도 계속 나왔다. 60일 정도 있다가 침술원을 나왔다. 그때는 반신불수의 상태였다.
한약을 먹으면 퉁퉁 붓고 머리가 아팠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정말 송장 칠 준비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다들 나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아직 내 명이 남아 있는 것 같고 내가 몰라서 그렇지 분명 회생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그즈음 신부님 모친을 통해 장 선생님이 자연의학교육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연의학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이상했다. 생식, 단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쏠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여지껏 들어온 말은 이걸 먹어라, 저걸 먹어라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먹지 말라니. 그게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또 매일 음식을 익혀만 먹어왔는데 날것으로 먹으라니. 신기하면서도 어쩌면 여기에 내 병을 고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 시작된 첫날 "단식은 칼을 대지 않는 수술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낀 공감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는 교육 첫날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먹고, 감잎차로 비타민C를 보충했다. 볶은 소금을 수시로 먹었다. 아침, 저녁으로 마그밀 4알을 먹고 관장을 했다. 단식 3일 만에 명현반응이 나타났다. 가장 몸이 아플 때의 증상이 그대로 나타나,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막연한 의식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서 가야 한다. 이게 마지막 방법이다.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소금을 집어먹고 물을 마셨다. 그러니 잠시 뒤 정신이 돌아왔다.
4일, 5일, 6일이 고통 속에 지나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런데 6일째 되는 날 밤, 누우니까 땀이 쫙 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7일 새벽 1시부터는 마지막 명현반응이 나타나는데 진이 빠지면서 온몸이 마비되었다.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도 혼자 계속 되뇌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나갈 수 있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절대자에게 기도를 올리며 고통과 싸웠다. 이게 마지막 고비다, 이게 마지막이다, 져서는 안된다…. 장 선생님이 올라와 내 발뒤꿈치를 잡고 두들겼다. 그리고 죽염과 야채효소를 내게 먹여주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내가 살아나다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가만히 손을 들어올려 보았다.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살며시 일어나 보았다. 몸이 일으켜졌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나는 계단 난간을 잡고 가만가만 마당으로 내려갔다. 마당에 내려간 나는 평생 흘려도 다 못 흘릴 눈물을 혼자 쏟아내었다. 가슴이 후련하고, 이제는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나를 감싸왔다.
강당에 들어가니 40분 합장수행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 앉아 손을 합장한 채 이마 위로 들어올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며 40분 합장수행을 마쳤다. 40분 합장수행이 끝난 순간 장 선생님이 내 등을 치며 말했다. "이젠 다 끝났다."
교육이 끝난 뒤부터 나는 생식에 들어갔다. 냉온욕, 풍욕, 자연의학 6대 운동을 열심히 시행하는 도중 몇 차례에 걸쳐 명현반응의 고통이 나타났지만 그것은 고통의 여진에 불과했다. 나는 명현이 일어날 때마다 단식으로 증상에 대항했다. 55∼56킬로그램의 정상체중을 늘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자연요법으로 소생한 뒤 나는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암, 당뇨, 고혈압 등 불치의 질병을 앓는 환우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력은 다해 주었다. 말기 암환자가 낫고, 당뇨환자가 정상인이 되었으며 고혈압 같은 증상이 쉽게 잡히니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도 고마웠다. 소문이 나고 점점 많은 환우들이 날 찾아왔다. 늘 피곤한 상태였다. 생식도 하지 못하고 환우들과 생활하며 하루하루 지내기에 급급했다. 과로에 시달리고 과식을 하니 어느덧 몸무게가 60킬로그램으로 늘어났다.
나의 불규칙한 생활, 자연법을 어긴 생활을 내 몸은 용서하지 않았다. 1993년 3월 6일 병이 재발해 나는 병원에 실려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머리가 그렇게 아프고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데 기계로 검사하면 정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몇 번이고 검사를 하더니 병원에서는 나를 정신과로 넘겼다. 정신과로 보내져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았다. 그러자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한의원으로 갔다. 역시 소용이 없었다. 나는 다시 단식에 들어갔다. 나의 잘못된 생활, 영양과잉의 생활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26일간 단식을 했다. 재발이 되니 처음보다 더욱 두려웠다. 이번엔 꼭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즈음은 과로와 과식을 피하고 가급적 익혀 먹는 음식을 절제한다. 그리고 소식을 하며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나와 같이 병마의 고통을 겪고 있는 환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내 몸을 믿으라는 것, 즉 자연치유력을 믿으라는 것이다. 내 병은 내가 고치는 것이지 아무도 고쳐줄 수 없다. 다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살아날 수 있다는 강한 믿음과 고통을 이겨내고 치료를 위해 운동하고 노력하며 절제할 수 있는 정신력만 있다면 세상에 난치병이란 없다. 누가 난치병을 말하는가. 그 전에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의학적 소견
박춘자 씨가 2기 민족생활학교 교육을 받으러 왔을 때, 나는 순간 내 능력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제발 돌아가 달라고 말했다. 그는 반신불수에다가 부정맥으로 얼굴은 붉은 홍당무처럼 되어 있었다. 게다가 신우염이 심해 신장은 퉁퉁 부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본인이 끝까지 우겨 교육장에 남았다. 그는 교육중에도 몇 번이나 쓰러져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쓰러질 때마다 증상이 조금씩 약해져 혹 살아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의 경우 소뇌경색증으로 어렸을 때부터 뇌에서 피가 조금씩 새어나와 빈혈도 심했다. 그런 정도의 빈혈이면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플 텐데 견디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의 신체이상 원인은 과식과 과로, 이로 인한 변비였다. 당연히 혈액순환이 안되고 혈액이 탁해져 각종 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는 단식기간중 몇 번의 명현반응을 일으켰는데 마지막 명현반응 때에는 온몸이 마비되는 뇌졸중 증상으로 무척 애를 먹었다. 그때 기를 잡아주고 죽염과 매실 농축액을 먹였는데, 두 보조약제의 효능을 나는 박춘자 씨를 보고 다시 확인했다. 물론 본인의 강한 의지가 소생의 원동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지금 부산에서 자기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단식》, 정신세계사, pp.249-256
첫댓글 단식이 건강에 매우 좋더군요
그러나 조심, 금식은 영양부족을 유발 합니다. 단식도 너무 오래하면 나뻐요.
병은 의지로 고치지 못하고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의지로 고칠수 있다는건 악으로도 , 또는 악발이가되면 병이 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