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이 멋적어서 담임자 소개를 본인의 신앙고백서로 대신 하고자 합니다.
2005년 2월 22일에 대전 빈들감리교회를 사임하면서 남은 목회를 교회개혁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뚤루즈교회 초대목사였던 김용순목사님이 뚤루교회가 문을 닫은 것을 가슴 아파하던 중에 저의 교회 사임 소식을 듣고 뚤루즈에서 목회할 것을 권유하여 뚤루즈사랑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1950년 7월 6일생으로 4남 3녀중 셋째 아들로 인천에서 태어 났습니다. 부친은 인천중앙감리교회 장로님( 허 합장로)이셨고, 모친은 권사님(임정희 권사)이셨습니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 가정새벽기도회를 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 났으나, 부모님의 강요에 견디지 못하여 억지로 예배에 출석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부친은 19살에 예수를 믿으시고 나이 30살에 감리교 장로가 되신 분이시고, 어머니는 증조외할아버지 때 부터 기독교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 셨습니다.) 인천신문사를 경영하셨던 아버님의 덕으로 유년 시절을 별 걱정없이 지냈으나, 어려서 부터 인생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엄하셨던 부친때문에 형성된 내성적인 성격 탓으로 내적인 고민을 누구하고도 의논하지 못한 체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삶의 분명한 목표없이 누구나 거쳐야 할 반항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던 청소년시절을 반항과 방황으로 보냈습니다. 인천 신흥초등학교 인천중학교(1965년졸업), 제물포고등학교(1968년졸업)를 졸업할 때까지 소위 일류학교를 다니며 순탄한 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과 가출하는 소동을 부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학창생활을 했습니다. 자살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라 생각하고, 자살하는 것이 신을 향한 마지막 저항이라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났을 때 남은 인생은 덤의 인생이라 생각했습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손해 볼것 없는 인생이라 생각했습니다. 40까지만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을 낙방하는 좌절을 겪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취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궤변을 늘어 놓으며 인생을 희롱하며 살았습니다. 삶의 허무와 삶의 공허를 견뎌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1972년에 동국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장교후보생에 지원 공군소위로 임관, 군생활을 공군장교로 마쳤습니다. 군생활 중에 1975년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시고 저 혼자 한국에 남게 되었습니다. (박정권 때 제 부친은 1968년 3선개헌 당시에 신문사를 강제로 빼았기시고 고통 중에 지내시다가 빈털털이로 이민을 떠나셨습니다.) 군생활 중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도를 받았습니다.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하셨을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셔서 극적으로 예수를 믿는 신앙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삶의 변화 였습니다.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긴 방황의 인생을 마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부끄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사치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생활을 마치자 미국에 계신 부모님이 미국으로 들어 오라는 소식을 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민수속하는 비용과 비행기 표 값을 보내 오셨습니다.
돈을 받아들고 기도하는데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민가는 비용으로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원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목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던 날 목사가 되면 무소유의 길을 걷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지 못하면 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기숙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 방학에 들어가 기숙사를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잘 곳이 없어 교회 예배당과 다락방에서 잠을 자며 생활을 했습니다. 인천중앙감리교회에서 중 고등부를 지도하는 지도교사로 일하면서 추운 겨울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1979년 12월 겨울에 인천 동암에 있는 성린재활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육촌형님이신 허 숙장로님이 소개해서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재활원 전도사로 가게 된 것입니다. 사례비는 없었으나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장애인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인간도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고 사는 버림받은 장애인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사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절규하며 기도했습니다. 재활원에 가서 첫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설교가 기억납니다. 그 날 설교한 내용은 만남이었습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못된 만남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부모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잘못된 만남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런 만남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십시요. 하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재활원에서의 첫 예배 시간에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 왔는데 장애인 한 명이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는 " 전도사님 언제 떠나실 껀가요?"하고 물었습니다. 재활원 생활 첫 날에 언제 떠날꺼냐는 질문을 받은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앞으로 목회자 소개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
"처음 온 사람에게 왜? 언제 떠나냐고 묻느냐?" 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애우가 3년동안 직원이 34명이 왔다갔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만에 간 사람도 있고 한 달만에 혹은 1년만에 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떠날 사람이면 빨리 떠나라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은 언제 떠날꺼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생각해 본적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친구가 내려 간 후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 하나님 언제 떠나면 좋을까요?" 내 마음 속에서 '저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때 이 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재활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은 장애인들이 나를 향해 이유없이 욕을 했습니다. 나이 어린 장애아들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냉소적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믿음이 있는 친구들이 몇명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이 1년동안은 이유없이 욕만 먹고 산것 같습니다. 몇달이 지나고 봄이 아직 오지않은 늦은 겨울에 믿음있는 친구들에게 수예실에서 새벽기도를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 새벽기도를 드리는 날 4명이 모였습니다. 보모 선생 한 분이 함께 했습니다. 의무적으로 드리던 목요예배를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예배를 드리고 싶은 사람만 드리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생활담당 선생과 총무가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강제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원장님과 의논한 후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기로 한 날 부터 예배인원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자유만이라도 그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장애인들의 재활원생활은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이 재활원에서 살기 위해서는 복종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장애인 7-80명이 집단으로 생활을 해야하니 세상을 향해 증오심만 남아있는 그들을 통제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추운 겨울날 추위에 떨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는 장애우들을 보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함께 추위에 떨며, 함께 먹기 힘든 밥을 먹으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새벽에 수예실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인천 정동에 돌체 소극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공연이 없는 날 소극장에 들어 갔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활원에 있는 누구라고 나를 소개하고 '장애인들도 연극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돌체극장 유용호사장을 만났고, 장애인들을 설득해서 장애인들과 연극을 했습니다. 장애인들이 처음 연극을 한 날 연출을 맡은 장진호(?)연출자가 술을 먹고 찾아 왔습니다. 연극하는 친구들이 장애인 연극을 보고 '장애인데리고 앵벌이 하냐?'고 조롱을 당했다고 술주정을 했습니다. (앵벌이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을 말하는 속어임) 공연을 보면서 사실 학예발표회 수준도 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힘들게 시작한 일인데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관객도 없는 연극이었는데... 연출 조명 분장 그리고 극장대여 모두 아무 보수도 안 받고 한 일인데... 후원을 받아서 포스터도 만들고, 팜프렛도 만들고 참 열심히 했는데... 다시 한 번 하자고 했습니다. 후원자를 구하고 다시 연극을 준비 했습니다. 공연의 주제를 '작은 사람들의 공연'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사람들의 영혼의 외침'이라고 포스타에 글을 썼습니다. 나는 버림받은 영혼인 장애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했습니다. 아무 할 일이 없어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인생을 죽이고 있던 장애인들과 다시 한 번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인천 YWCA 청년들과 함께 장애우들이 합창도 준비했습니다. 만도린 치는 장애우와 피리를 부는 장애우 그리고 키타를 치는 장애우가 연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장애우들이 다시 연극을 연습했습니다. 미문야학(장애인 야학을 시작하고 있었음)을 돕던 대학생들이 잔 일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포스터 붙이는 일, 그리고 티켙 파는 일등... 장애우들을 다구쳤습니다. 초등학교 학예발표회 수준이 되면 절대 안된다고... 그러면 앵벌이가 된다고. (학예발표회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님을 이해하시기 바람) 우리 영혼의 소리를 내자고 했습니다. 여름부터 준비해서 12월에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장애인들과 가까워 졌습니다. 합창을 연습하면서 연극을 연습하면서 가까워져 갔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집고 연극연습을 했습니다. ( 김용순 목사님은 당시 인천중앙교회 청년이었는데 연극과 합창에 참여했습니다.)
12월에 공연날이 잡혔습니다. 첫 날 첫회 공연 하는날, 관객을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했습니다. 나도 합창을 했기 때문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출연진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객석이 캄캄해서 객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합창을 마치고 객석 안으로 들어 가보았습니다. 객석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무대에서는 장애우들이 연극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참 열심히 연습했는데 관객이 없다고 실망하면 안되는데... 함께한 친구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출연진보다 관객이 적은 공연이 계속되었습니다. 공연날짜를 무리하게 9일을 잡아 하루 2회공연으로 18회를 해야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관객은 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공연을 하기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고. 오후 3시 공연을 마치면 저녁을 먹고 저녁 7시 공연을 했습니다. 출연진들이 저녁 먹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봉사자들이 밥을 해오기도 하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사먹기도 했습니다. 지친 장애우 몇명이 관객도 없는데 공연을 중단하면 안되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표를 산 관객과의 약속이고 우리 자신과의 약속이고 또한 하나님과 약속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장애인 공연이라고 동정해서 표만 산건가? 표를 많이 팔았는데 관객은 늘지 않았습니다. 공연날짜를 9일 잡은 것은 무리라는 불평이 계속되었습니다. 못 들은 척하고 공연할 때마다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날 낮 공연에 놀랍게도 객석이 꽉 찼습니다.
출연진들의 마음 속에 조그마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에 150명정도 앉을 좌석이 모자라서 층계 사이 사이에 괸객들이 앉았습니다. 유 용호사장은 돌체 소극장이 세워진 이래 최대 관객이라고 기뻐했습니다. 힘들게 계속되었던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스탭들에게 약간의 사례를 할 수 있었고, 이 번에는 극장 대여료도 낼 수 있었습니다.
장애우들 마음 속에 옛날에 없었던 그 무엇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장애우들의 현실은 여전히 차겁고 어렵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작은 사람들의 공연'이 끝나고 흥분이 가라 앉자 힘든 현실이 장애우들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현실은 달라진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울한 일상은 절망이었습니다. 목요 예배와 새벽기도회는 계속되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믿음있는 친구들에게 교회를 나가라고 종용했지만 교회에 나가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장애인들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믿음들이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친했던(?) 선배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교회가 개척된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목사님과 의논하고 장애인들을 설득해서 개척교회에 장애우들을 나가게 했습니다. 교인이 많지 않았던 개척교회에서 장애우들이 환영을 받았습니다. 담임목사님도 좋아 하시고 교인들도 환영을 했습니다. 장애우들이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성가대를 했습니다. 믿음있는 친구들은 교회학교 반사도 했습니다. 재활원에 속회를 만들었고 목사님이 오셔서 속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니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랐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즐겁게 교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하나 둘 교회를 나가지 않기 시작했고 열심있던 친구들이 힘들어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러냐?'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애우들은 속 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신 선배목사를 찾아 갔습니다. '요즘 장애우들이 교회 생활을 힘들어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대뜸 "허전도사, 장애인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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