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적 관점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생애 중 일어난 중요한 두 사건, 즉 예수의 세례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심에 대해 듣게 된다. 지난 주일(주현절 1째 주일)의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의 세례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 주일(주현절 3째 주일)의 본문은 예수가 베드로와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 성서정과 B해와 C해의 내용도 이와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다만 마태복음 대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이 쓰일 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본문은 매해 주현절 2째 주일 본문으로 사용된다. 왜 그럴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현절이 교회력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주일은 주현절과 연관된 총 10개의 주일 중 3번째에 해당한다. (역자주: 맞는가?) 이번 주일은 앞선 두 주일, 그리고 앞으로 올 일곱 주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안에 오심으로(incarnation) 이 땅에 현현하신 것(epiphany)을 기념하는 큰 흐름 속에 포함된다.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요한복음 본문이 택해졌다는 것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요1:14)라고 성육신과 주님의 현현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것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주현절을 지키는 전통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성탄절을 강조하여 결국 12월 25일을 성탄절로 확정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현현을 더 강조하는데, 이 주제에는 예수의 탄생은 물론 세례, 그리고 가나안 혼인 잔치의 기적까지 포함된다. 서방교회도 결국 1월 6일을 주현절로 지키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 주현절의 중요한 의미는 그날이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을 방문한 날이고, 성탄절기가 끝나는 날이라는 것이다. 동방교회에서도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지만, 동방교회가 주현절을 지킬 때는 예수의 세례를 강조하였다.
주현절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동방과 서방교회가 차이를 보이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선, 서방교회에서는 주현절을 성탄절기가 끝나는 날로 여긴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많은 교회에서 성탄 후 12일 동안 동방박사의 모형과 그들의 선물을 따로 보관해 두었다가 주현절에 그것들을 구유 앞에 진열하는 관습이 있다. (역자주: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관습임) 어린이들은 왜 기다렸다가 그것들을 진열하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 합리적인 답은 이것이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온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 직후에 그것들을 구유 앞에 진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동방박사들은 동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관점도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에게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선 세계적 차원에서 주님이 현현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합리적이고 신학적인 해명이 어린이들의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될까?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마리아의 태 속에 이미 성육하였고 (세례 요한이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알았던 것처럼) 성탄절에 세상으로 태어났다면 (목자들이 본 것처럼), 우리가 주현절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는가? 성탄절로 충분한 것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동방교회에서는 1월 6일 주현절 하루에 예수의 탄생뿐 아니라, 세례, 기적을 모두 함께 기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동방교회의 이런 전통은 성육신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것인지를 드러내는 셈이다. 동방교회는 이런 일련의 사건 모두를 하나로 엮음으로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를 예전적으로 확고하게 구현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성육신은 구유에 놓인 아기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분, 하늘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마3:17)라는 하늘의 음성이 지목한 분, 가나안 혼인 잔치의 기적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요 2:11) 분을 통해 드러난다. 주현절의 진리는 주님이 현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으로 현현한다. 주님의 현현은 곧 성육신이다.
“주현절 이후”라고 명명된 수많은 주일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육신의 깊은 신학적 의미는 단지 구유에 놓인 아기에만 관심을 집중함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탄절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동방박사도 와야 하고, 예수가 요단강가로 걸어오는 것을 봐야 한다. 우리는 구름이 열리는 것을 봐야 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물었던 말씀, 즉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요1:38)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성급하게 구유 앞에 동방박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는 성급하게 답을 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답을 하려고 하기 전에 주현절 후 7주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중 6주에 걸쳐서 산상수훈을 접하게 된다는 것도 유념하자. 우리가 예수가 던진 질문에 확고한 답을 주려고 시도하고 주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한 특별한 절기를 모두 마치기 전에 예수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기다리며 경청하는 것이 바른 자세일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오래된 TV쇼 <세사미 스트리트>에서 네 정사각형 물체를 놓고 “어느 것이 다른 것과 다르고, 어느 하나가 다른 데 속하지 않을까요?”라는 게임을 기억할 것이다. 이 게임을 네 복음서를 두고 한다면, 분명히 요한복음이 결국 다른 것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은 탄생이야기가 없고 대신 성전청결 이야기가 두 개가 있다. 요한엔 비유가 없고 기적을 ‘표적’이라고 한다. 그는 단순하게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을 말하고,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했을 때, 요한은 예수를 좀더 신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그의 독자들이 지상의 예수가 창세전에 존재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잊지 않도록 하려했다.
-오늘 본문에서 명백한 요한복음의 다른 특징은 여러 이야기들에서 특정한 개인에 관한 깊은 통찰력이다. 예수의 세례에서 마태와 같이 예수가 말한 것을 들을 수 없고, 마가나 누가와 같이 관련된 세부사항들을 볼 수 없다. 대신 요한은 예수의 세례에 관한 세례요한의 개인적 숙고를 담고 있다. 마침내 세례요한의 말은 사건의 보고이기 보다는 그 사건의 중요성에 대한 증언이다. 요한은 기적을 표적이라 하는데, 여기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그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증언을 보여 주었는데 세상의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이다(1:34;비고1:7,15,19).
-서언(1:1-18) 다음에 1장 나머지는 연속되는 4일의 구조로 정리되어 있다(1:19-51).
제1일: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바리새인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요한에게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메시야인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인지) 그리고 그의 세례에 관해서(19-28) 물어본다.
제2일: 예수께서 세례 받으러 나와서 하늘에서 성령을 받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자신 보다 앞선 자임을 깨닫고 예수를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어린 양”(29-34)으로 선언하다.
제3일: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선포하다.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의 제자로 따르고 시몬도 제자가 됨(35-42).
제4일: 예수가 두 제자와 갈릴리로 가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뽑아 그들에게 더 큰 일을 보고 경험할 것이라 가르친다(43-51).
전체적으로 요한은 예수운동의 초기국면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다. 1) 예루살렘은 광야에서 세례요한의 활동을 의식하고 있고, 그의 정체성에 관해 놀라움을 갖는다. 2)요한은 메시야가 아니다 3)메시야는 나중에 오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4)하나님의 아들이 왔을 때 요한의 제자들은 더 이상 요한을 따르지 않았다.
-오늘 본문은 제2일과 3일에 해당된다. 이 두 날의 처음에 세례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1:29)으로 선언한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예수를 보자마자 동의했다고 하지만, 요한의 말에서 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은 두 번이나 “나는 이 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31,33). 어린양의 이미지는 보통 희생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하고 공격받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나 다른 유대저작에서는 어린양이 힘 있는 동물로 그려진다. 어린양이 하늘을 다스리고 악한 자에게 심판을 내리며 정의로운 자에게 구원을 가져 온다.
-요한이 예수보다도 약하거나 낮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 어린양과 연관된다. 예수는 요한보다 앞서신 분이신데 왜냐하면 예수가 먼저 계셨고(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요한은 그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사40:3; 요1:23). 하지만 요한의 증언이 이것으로 비중이 적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비록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18), 여러 가지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유대철학자 필로(Philo)의 저작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요한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하나님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자신이 초기 사역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목소리로 증언한다.
-셋째 날의 사건은 이미 요한에 의해 증언된 요한과 예수의 관계적인 위치잡이와 소통한다. 예수의 먼저 선 위치와 그의 증언은 만약에 그의 증언을 바르게 소화했다면, 그들은 예수께 충성을 바쳤어야 한다. 요한의 36절의 감탄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 예수의 질문,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1:38)는 그를 따르는 같은 제자들에게 초청과 조사의 역할을 한다. 예수를 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따르기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찾는 사람이 무엇이며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안드레와 한 사람은 무명인 두 제자는 그날 예수를 따를 뿐 아니라 함께 지냈다(39).
-이미 10시 즉 오후 4시였기에 제자들이 예수와 대화하고 배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였고, 밤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비록 우리는 그 시간에 어떤 토론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을 시몬이 게바(바위)로 이름이 바꾼 것이 이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의 징조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이 변화,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 형성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언(우리의 증언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29)이라는 것을 통해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목회적 관점
그리스도는 지금 세상에서 몸이 없지만 당신의 몸이 있고, / 손이 없지만 당신의 손이 있고, / 발이 없지만 당신의 발이 있다.
당신의 눈은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 그리스도의 동정의 눈이다.
당신의 발은 그 발로 선한 일을 하러 가는 / 그의 발이다.
당신의 손은 그 손으로 지금 사람들을 축복하는 / 그의 손이다.
이 시는 16세기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아비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에게 헌정된 것으로, 그녀의 삶이 마지막을 향하고 있을 때 수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 문헌 자료는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기독교 영성에서 대중적인 입지를 차지했으며, 혹자가 성육신 신학이라고 부르는,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성육신 신학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구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비야의 테레사는 이 성육신 신학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키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성육신하고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도록 요청하며,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쓴 것처럼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4:10)라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성육신 신학의 또 다른 이해를 보게 된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가 오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로 향하게 하고,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증언한다. 나중에 요한이 그의 두 제자와 함께 서 있을 때, 예수가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아라고 말했다(36절).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고, 예수는 자기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구절 전체에서 세례 요한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간증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한다.
여러 해 전,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What Would Jesus Do; WWJD”라는 캠페인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절정이었을 때, 어떤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WWJD 팔찌를 받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 팔찌를 했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곤란해지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청소년 그룹이 끝난 후, 그녀는 팔찌의 의미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 팔찌가,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그의 행동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눈에 확 띠는 신호일 거라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녀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녀의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예수가 실제로 어떻게 하실지를 아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내가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고 우리를 도와줄 광범위한 신자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설명하려고 할 때, 그녀는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예, 하지만 모르시겠어요? 나는 예수가 아니라고요! 나는 완전히 인간이지만, 완전한 신은 아니에요. 나는 내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하나님이 아니니까요.” 그녀 말이 맞다.
나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나는 요즘 몇 년 동안 학생들이 다양한 목회 방법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숙고하며 참여할 때, 심지어 그들이 목회에 대해 더 많은 부르심을 준비할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한다고 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나는 늦여름 각 학년이 시작하고 늦봄 학년이 끝나는 분명한 시작점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종류의 리듬은 나의 영혼에 맞다. 여기 문제가 있다. 졸업.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업을 마치면 교역학석사 Master of Divinity 학위를 받게 된다. 이것을 신적인 지배자 Master of Divine 라고 장난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이름과 학위와 금박도장이 찍힌 졸업증서를 받자마자 졸업장 가장자리에 “진행 중”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같은 문구를 써넣고 싶다.
테레사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메시아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몇 년 전에 좋은 친구요 신학교 동료가 내가 일정과 약속들로 인해 몹시 바빠서 피곤해보이는 것을 걱정해서 나를 억지로 데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긴급상황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를 위해 좋은 소식이 있다고 했다. 당혹스러워서 좋은 소식이 뭐냐고 물으니, 그녀는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네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 완전히 혼란스러워 하니까 그녀가 말하기를, 나에게 더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너는 메시아가 아니야!” 왜곡된 성육신 신학의 진짜 위험성은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진짜 몸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구원을 받고 있다면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WWJD에 대해 많이 묻지 말고 그보다 WWJBD에 대해 묻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세례요한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What would John the Baptist do? 요즘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학생들이 좀 더 세례요한과 같아지려고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봐요, 보세요! 하나님은 살아계셔요.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셔요.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계셔요. 보세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에요!”
설교적 관점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세례 이후[지난 주] 이번 주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세례와 그의 사역의 시작을 만나게 된다. 마태의 세례처럼 요한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증인이고 예수께서 주님이라는 그의 증언은 요한복음의 고(高)기독론 (high Christology)[예수가 하나님의 선재(先在, preexistent)하는 아들로서 이 땅에 내려와 사역을 마치고 부활, 승천했다”는 입장:정체성이 하늘에서 시작. 저기독론-low Christology은 땅에서 시작, 역사적 기독론, 부활 후 하나님의 아들이 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증언은 만남, 제자됨 그리고 관계라는 인간의 이야기를 따라서 서술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 본문은 몇 가지 재미있는 설교적 주제를 제시한다: 세례,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 증인 그리고 전도.
세례 (Baptism)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세례는 보이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는 [요한의]말로 서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학자 Sandra M. Schneiders는 이점을 들어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예수이야기”(Jesusstory)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추정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세례를 서술하는 요한의 관심은 실제적인 세례(그 전날 시행한)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사람들이 예수를 믿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두 제자기 이 말을 듣고 예수 곧 하나님의 아들을 따라갔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온 세례를 설교하는 것은 다른 문제들과 씨름하게 만든다. 왜 요한은 실제적인 세례를 묘사하지 않고 있는가? 이 세례는 마태(혹은 다른 공관복음서들)의 표현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예수의 세례에서 드러난 표적들(signs)은 요한복음의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물대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인들의 세례에 대한 이해는 이 본문을 들을 때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 (The True Identity of Jesus)
이번 성서정과는 예수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몇몇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인정된 복음서중(canonical Gospels) 가장 고기독론입장을 취하고 있고 서두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성서정과는 “아들됨”(Sonhood, the state of being a Son)이라는 놀라운 주장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설교는 이 두 개념 사이의 관계나 아니면 교회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도 좋을 것이다. Jack Miles는 하나님과 예수의 삶을 이야기로 서술하면서 메시아라는 이미지를 양으로 묘사한 것은 왕이라는 기존의 성서적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고, 이 비유를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 (예수를 통해 나타난)은 유월절을 가능케 한 전능자가 아닌 유월절 희생양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Graham Greene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들을 소개하는 많은 이야기를 썼다. 그의 작품 Brighton Rock, The Power and the Glory 와 The Heart of the Matter 등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희생처럼 의식적으로 선택한 희생을 다룬 문학작품이나 희생에 대한 문화적 사례들을 찾아서 소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증언 (Witness)
요한과 관련한 신약성서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거나 그 길을 따르는 것 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이번 설교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복음전도자 요한은 예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그의 증언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진정한 본성이 (true nature of Jesus) 점차적으로 드러나거나 비밀에 부치려하고 있는데 왜 요한복음서에서는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가? 제4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전도 (Evangelism)
설교자의 교회(그리고 전통)가 갖고있는 전도에 대한 인식이 교인들의 이번 성서정과 이해에 영향을 줄 것이다. 전도는 복음주의 전통보다는(evangelical traditions) 몇몇 주류 기독교 전통에서(mainstream Christian traditions) 보다 논쟁이 되고 있지만 이번 주 성서정과는 예수께 나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에 관한 설교를 함에 있어서 적당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흥분(excitement), 예수께서 잠재적 추종자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하는 간단한 명령,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메시아를 만나도록 데려오는 처음 추종자들은 전도에 관한 설교를 하기에 좋은 재료들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하는게 편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교회는 예수가 있기에 교회이고 또 이 본문에서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얻는다: 세례, 그의 사역의 시작, 베드로같은 추종자들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담고있는 그의 죽음과 부활.
비록 우리가 이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이해한다 할지라도, 캔터베리 대주교 Rowan Williams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부활사건을 통하여 용서를 이해하고 예수없이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의 세례, 죽음, 무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이름과 정체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 곧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하는 전도에 관한 설교는 어떻게 첫 제자들이 그들이 알고있는 예수와 그를 중심한 공동체로 인해 얻은 희망, 평화, 기쁨을 가지고 다른사람들을 초대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전도에 관해 공동체가 갖고있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공동체에는 당신의 설교를 살아있게 하는 신실한 증언자들이 있었는가? 이번 주 성서정과는 당신의 신앙공동체 이야기나 그 공동체의 중요한 면을 소개하여 다른 사람들을 와서 보라고 초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