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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22 부활절 세 번째 시4, 행3:12-19, 요일3:1-7, 눅24:36b-48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시4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행3:12-19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요일3:1-7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눅24:36b-48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도입
직업은 못 속인다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직업을 통해 드러나는 습성이 그 사람을 변하게하고 그것이 일상에 녹아져 나오는 모습을 통해 이미지라던가 하는 일을 엿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두 수선공의 눈에는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구두에 시선이 갈 것이고, 미용사의 눈에는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에 눈이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각자의 직업과 위치, 지위에 따라 보는 눈이 다를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목사와 성도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제가 종종 F 매장에 들릅니다. 신발 진열장 앞에 서면 직원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스캔(훑어보는 것)을 뜹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고 있는 신발을 집중 적으로 쳐다봅니다. 고객이 살까 말까 고민하는 차에 “이거 볼 수 있나”라고 하면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가져다 줍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담에 올께요”하면 금새 표정이 변합니다. 그러나 “이것 주세요”라고 하는 순간 또 다른 미소로 상냥해 짐을 느낍니다. 그 직원은 고객을 위하는 것일까 아니면 물건 하나 파는데 집중을 하는 것일까 전자가 된다면 그 매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 같은데 후자에 가까운 듯 한 모습에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본문
오늘 본문에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 난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기해 하며 놀랍게 여겼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이전에 예수를 따르던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비겁하고 부끄럽게 도망했던 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새로운 눈을 갖고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자, 부활의 증인으로 선 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삼대에 걸친 하나님, 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시공을 초월하는 산자의 하나님 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베드로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고, 나와 너의 하나님, 오늘 우리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주목하라고 베드로는 목청을 높입니다.
요한일서에는 그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주목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모습일지 장래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르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참모습 그대로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열된 인간, 죄로 깨끗하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 되고 더불어 죄 없이 깨끗하게 된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고, 어떤 모습이건 사람의 존엄한 가치, 존엄성이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예수는 보이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십자가에 달리기 전 까지 그의 전실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망했던 메시야상과 너무나도 달랐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베드로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곁에서 동거동락하며 따르던 제자들조차 참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은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있는 제자들조차 믿어지지 않는, 믿을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사랑은 그들에게 평강을 나누어 줍니다.
시대상황
지난 주에 노회를 하였습니다. 끝나자 곳곳에서 축하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생각에도 너무 놀랍습니다. 젊은 나이에 위임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이런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쩜 로또에 당첨된 것과도 같다 할 수 있겠습니다. 목사안수 받자 말자 위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들게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축하소식은 곳곳에서 전해 왔습니다. 그 소식과 함께 다들 궁금해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혹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우는 지엠에서 쉐보레로 넘어갔는데..., 많은 동료, 선후배, 심지어 가족까지도 물론 현실을 외면할수야 없겠지만, 대우와 교인수에 너무 민감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쁨으로 축하의 소식을 전하던 이의 표정과 어투는 이내 씁쓸함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임목사가 되는 것은 어쩜 세상적인 기준의 성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의 이상은 자본이 주는 편안함 그 안에 한해서 라는 전제조건을 수반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 압박감 때문이라 해야 할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실 우리교회 형편이 넉넉지 않습니다. 저 역시 경제적 걱정에서 쉬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함께 청소하던 사람을 전도하였습니다. 40대 중반의 나인데, 정말 따뜻한 성품을 지녔고, 어리석다 할 정도로 순진하고 순박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형편이 정말 좋지 못합니다. 삶 전체가 너무나도 의존적인 것 같습니다. 냄새도 많이 납니다. 우리교회가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그가 오면 도움을 줘야 할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그 섬김을 위해 목사가 되지 않았나? 지난 주에는 함께 한다는 것에 생명이 있다고 설교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꿇은 모습에 혐오감이 느껴졌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늘 존엄성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현실 앞에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그 교차된 마음에 죄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이런 모습도 받아주었는데, 하나님은 저의 이런 모습도 받아주었는데, 너무 야비한 모습에 용서를 구합니다.
예전에 찜닭을 할 때입니다. 인근 지역 대부분의 아파트에 배달을 다녔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모니터에 여러 가지 광고가 나옵니다. 광고는 자신의 사업을 알리기 위한 목적, 그로 인한 경제적 수익을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지불해 가며 기꺼이 광고를 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특이한 광고가 있습니다. 행복이 넘치는, 사랑이 넘치는 모모교회입니다. 교회광고는 엘리베이터 뿐만 아니라 신문삽지, 여러 책자, 벽보, 현수막 등등 교회를 알리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선호되고 있습니다. 사업이라든가 기업체는 생존경쟁을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합니다. 여기에 교회마저 그 방법을 택하는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대형교회가 광고료로 지불하는 돈을 뭔가 의미있는 곳에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선가 마가교회도 큰 교회 옆에 있는데 힘들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무엇이 힘들다는 것입니까? 알면서 물어봅니다. 그리고 대형교회의 광고문제 같은 형식의 행정으로 인근 교회들은 적절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도를 걱정한다는 소식을 많이 듣게 됩니다. 서구의 많은 대형교회들이 부도를 겪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노라면 구미교회를 그대로 답습하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미래를 전망하는 많은 학자들이 한국교회에 새로운 눈이 뜨이기를 바라는 듯 본질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고유성, 존엄성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의 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많은 학교가 있습니다. 물론 성격은 다르겠지만 많은 학교 중에 마가학교가 새로운 눈을 뜨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교회중에 마가교회가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항상 가난하게 하는 마가교회의 정체성, 약자와 소외자에 집중하는 일, 어쩌면 교회가 응당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넌지시 외면 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응당해야 할 일을 하는 그것을 독특성이라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정리와 제언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인자가 혹 오늘의 우리가 아닙니까? 십자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도망하였던 자가 혹 오늘의 우리는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여전히 베드로가 행한 기적에만 관심을 갖고 놀랍게 여기는 자가 혹 오늘의 우리는 아닙니까? 목사안수를 받을 때 떨리던 마음, 눈물로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마음, 그렇게 수많은 목회자가 배출되고 있는 지금, 그리고 함께 기뻐하며 다짐했던 수많은 교회, 수많은 성도는 지금, 무엇을 바라 보고 있습니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는 베드로의 그 말, 공허한 외침으로 끝내야 하겠습니까? 그 외침에 응하는 자는 시편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기도
수많은 유혹이 도처에 깔렸습니다. 앉은뱅이를 걷게하고 싶습니다. 로또에 당첨되고 싶습니다. 사업이 대성하고 싶습니다. 공부 잘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말 어렵다면 근처에라도 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까? 현실을 외면 할 수 없는 오늘의 시대, 그 속에 그리스도를 따름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 손과 발을 보고서도 믿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 것처럼 이곳에 친히 서시어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중재기도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기 원합니다. 그 마음으로 열심히 땀을 흘립니다. 결실의 일부를 정성으로 드립니다.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 함께 나눌 수 있게 하시며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희망으로 꽃피게 하옵소서
위탁의 말씀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새로운 눈을 뜨게합니다.
참모습 그대로 보십시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세상의 희망입니다.
자,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축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제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세상에 희망을 나누기로 다짐하는 마가교회 머리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