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 뉴스를 전하려면 신이 안 날 거 같아요.
『고민되죠. 어깨가 처졌어요. 새벽 1시에 경기 끝나는 걸 보고 오전 1시30분에 잠들었다가 오전 3시에 일어났어요. 축구 중계를 안 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연합뉴스를 참고하면 되지만, 제가 보고 몸으로 느끼고 난 후 축구경기 결과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거든요. 낙관적으로 핑크빛을 칠하는 것도 우울한 감정을 전염시키는 것도, 앵커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색깔이 있다면 철저히 탈색시키고 철저히 中道(중도)를 고수해야죠』
―1시간30분밖에 못 자고 두 시간 생방송을 했으니 피곤하겠습니다.
『뉴스할 때는 별로 못 느껴요. 30분 자고 방송할 때도 많아요. 앵커는 피곤하거나 아프다는 걸 들키지 않아야 할 의무, 아프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체력이 강해야겠네요.
『끊임없이 운동하고, 잘 자고, 잘 먹고 그러죠. 집에서 러닝머신으로 운동합니다. 다이어트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수척한 앵커의 얼굴에서 사람들이 건강한 뉴스 전달을 기대하기 어렵거든요』
그녀는 『기자들은 살찔 여유가 없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배운 것
『기자들은 대개 경찰서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합니다. 사회에서 가장 못 배우고 가난하고 딱한 사정의 사람들을 만나는 데가 경찰서입니다. 그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에 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죠.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빛을 나눠 줘야 한다는 정신을 키우게 됩니다. 13년 전 입사 때나 지금이나 그런 각오로 일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때 119 제복을 빌려 입고 구조대에 섞여 들어가 백화점 설계도를 찾아낸 기자가 바로 그녀다. 남들 다 집으로 가는 야심한 밤, 이상한 낌새를 채고 경찰서 뒷마당으로 가서 불 켜진 강력반 유리창을 까치발로 넘어다보고서 터트린 특종이 지존파 사건이다.
1993년에 입사한 그녀는 1996년 정치부에 배정되어 정당 출입을 시작했다. 남자 기자들 사이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소식을 전하는 女기자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제가 최초로 정치부에 갔다 오고 나서 모든 방송사가 여기자를 정치부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좋은 현상이죠』
그녀가 정치부로 발령난 데다 방송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회출입기자로 배치되자 적잖은 저항이 있었다. 술을 못 마시는 그녀는 폭탄주가 오가는 저녁 술자리에서 끼어들기 힘들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치인의 집을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자신의 저서 「나는 감동을 전하는 기자이고 싶다」에서 정치부 기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최초의 방송사 정치부 女기자
<정치부 기자는 일단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잡듯이, 부지런해야만 정보를 많이 포착할 수 있고, 양질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근성도 있어야 한다. 물었다 하면 끈질기게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모든 정보들을 헛되이 쓰지 않을 올바른 식견이다>
―사회부 3년에 정치부 3년, 6년간 특종을 많이 하셨던데, 金기자의 책을 읽으면서 특종의 비결은 부지런함과 함께 한 번 더 생각하고, 한마디의 말도 흘려듣지 않는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은 思考(사고)하는 습관 덕이라고 봐요. 지금도 하루에 한 시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제 자신과 대화를 가집니다. 「너 오늘 지치지 않았니? 힘들지 않니? 왜 사냐?」 이렇게 묻기도 하고, 저라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지금 우주에서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그런 걸 생각합니다. 목표를 설정하다 보면 조급해지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작은 단서를 잡는 것, 그 비결은 뭘까요.
『퍼즐을 맞추는 거죠. 정공법으로 해야 할지 우회해야 할지, 사람을 시켜서 해야 할지, 지금 참았다가 나중에 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거죠』
「화장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취재해 충실한 기사를 쓰는 것이 시청자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뛰던 입사 4년차 시절, 회사에서 그녀에게 날마다 화장해야 하는 앵커 자리를 제안했다.
그녀는 『심장이 약해 항상 긴장해야 하는 앵커는 할 수 없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넘겼다.
네 번째 앵커 제의를 받고서야 1999년 4월26일 뉴스데스크 앵커 자리에 앉았다.
―「방송의 꽃」이자 「방송인의 꿈」이라는 앵커 자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제 목표는 앵커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에요. 앵커가 목표였다면 앵커가 되는 순간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기자로서 조금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송계의 첫 정치부 여기자, 기자 출신 첫 여성 앵커 등 수식어가 많은데 스스로에게 수식어를 붙인다면.
『「곧지만 온화하고, 강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꿈을 꾸는 기자」라고 붙이고 싶어요』
―취재하면서 질문을 많이 했을 텐데, 자신에게 지금 질문한다면.
『왜 이렇게 많이 먹냐? (웃음) 참 많이 먹어요. 많은 정보를 듣잖아요. 그 정보 안에서 배워야 할 정보가 있고, 듣지 말아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꼭 전해야할 정보, 나중에 전해 줘도 되는 정보, 아예 전하지 않아도 좋은 정보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뉴스, 내가 건강하고 사람들도 살찌게 하는 정보를 전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죠. 기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보를 선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날로그가 대세다』
사회부 기자 시절 태풍피해 현장에서. |
金恩慧 앵커가 수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얻은 결론은 「아날로그가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다. 「HP(휼렛 패커드)」 前 회장 칼리 피요리나, 「이베이」 CEO 맥 휘트먼, 「야후」 CEO 제리 양, 국내 유명 기업의 CEO들과 인터뷰하면서 갖게된 생각이다.
지난 1월 그녀는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를 움직이는 리더들은 오히려 느리고 긴 호흡으로 삶을 채워 간다」는 생각을 담은 「아날로그 성공모드」라는 책을 펴냈다.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변하지 않는 아날로그적 정보를 갖는 건 쉽지 않거든요. 칭찬에 솔깃하지 않고, 비난에 비굴하지 않고, 내가 가진 원칙에 충실하게 사는 건 어느 시대나 관통하는 가치 아닐까요?』
1999년부터 그녀에게 새롭게 밀려든 일은 강연, 청중들에게 그녀가 전하는 핵심은 역시 「아날로그 마인드」다.
―방송은 기자든 앵커든 말로 사실을 전달해야 합니다. 강연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말할 때 어떤 고민을 하시나요.
『어떻게 가장 확실한 말로 진실을 전달할까, 고민하죠. 때로는 화려한 수사가 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이게 하거든요. 어눌한 어투와 소박한 말솜씨의 정치가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압도하는가 하면, 굉장한 말솜씨에도 불구하고 말이 겉도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사실 이면에 있는 진실을 전달해 주고 싶어요』
지금은 신혼 중
그녀는 2001년 스탠포드 대학으로 연수를 가서 1년간 공부하고 왔다. 현재 연세大 언론홍보대학원 휴학 중인데 한 학기를 남겨 놓고 있다.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아 박사과정을 밟을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金恩慧 앵커가 방송하는 시간은 하루 두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방송 준비로 보낸다. 그녀의 기상시각은 새벽 3시. 3시30분에 회사에 도착해서 1시간 동안 신문 12개와 연합뉴스를 살펴본다. 뉴스를 보면서 파트너 정연국 앵커와 담당 부장과 함께 뉴스를 고른다. 4시30분에 메이크업을 하고 앵커 멘트를 써서 오전 6시 정각에 뉴스를 시작한다.
8시에 방송이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9시30분에 그날 방송에 대한 회의를 한다. 오전 10시쯤 퇴근하여 11시부터 두 시간 정도 잔다. 일주일에 서너 번 예전 취재원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기자 출신 앵커인 만큼 기자들이 써오는 기사를 보는 눈이 까다로울 것 같은데요.
『모든 기자들이 앵커 멘트를 써 옵니다. 그 멘트를 보고 기자들과 상의해서 제 방식대로 고칩니다. 꼭 얘기해야 하는 내용인데 기사에 빠진 부분이 있으면 찾아내죠』
―직접 뛴 사회부·정치부·경제부 외에 다른 분야의 정보는 어떻게 얻습니까.
『낮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 얘기를 듣습니다. 운동을 아주 좋아합니다. 골프를 친 지 1년 됐고, 대학교 때는 우슈를 했고, 고등학교 때는 핸드볼을 했어요』
―아무래도 경제 분야가 녹록지 않죠.
『경제부에서 7개월 일했는데, 어려워요. 스탠포드에서도 1년간 경제공부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주로 어떻게 보내십니까.
『신부수업 하고 있어요(웃음). 오후 7시, 8시, 9시에는 TV 뉴스를 집중 분석합니다. 가판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다 훑어보고 밤 11시나 12시쯤 잠자리에 듭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남기
金恩慧 앵커와 남편 兪亨東씨. |
그녀는 지난 3월에 「김&장 법률사무소」 소속 국제변호사인 兪亨東(유형동·35)씨와 결혼했다. 兪변호사는 미국 버클리 대학과 코넬大 로스쿨을 졸업했고, 뉴욕 등지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兪변호사는 이집트에서 출생해 미국에서 자랐으나, 고국인 한국에서 살기 위해 병역을 마쳤다. 『시아버님이 기자 출신이어서 시댁에서 며느리를 잘 이해해 준다』고 한다. 신혼집은 남편의 직장과 가까운 광화문에 있다.
―신혼인데 아침 뉴스 진행 때문에 남편 출근길을 챙겨 주지 못하겠네요.
『남편이 제가 퇴근하는 오전 10시쯤 출근하기 때문에 그때 저랑 바통 터치하죠.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시각이 보통 새벽 2시경입니다. 그때 다시 바통 터치하고 저는 출근하죠』
―하늘을 봐야 별을 딸 텐데….
『(웃음)큰 일이 없으면 토요일과 일요일은 함께 지내요. 주말에 서로 음식을 만들어 줍니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 요리를 배웠어요. 남편은 미국에서 혼자 지내 저보다 훨씬 요리를 잘해요. 저에게 자주 해주죠』
180cm의 훤칠한 키에 호남형인 兪亨東 변호사는 KBS 아나운서로 일했던 유정아씨의 사촌동생이다. 정작 MBC 선배가 소개했고, 만난 지 10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이 좀 늦었는데, 그전까지는 기회가 없었나요.
『20代는 생존을 위해서 여성이나 개인으로서 누려야 할 가치를 많이 유보를 했었어요』
―168cm의 늘씬한 몸매에다 미인이신데, 사랑이 다가오는 걸 인위적으로 막았다는 얘긴가요.
『잘 아시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들과 비슷하면 도태돼요. 남성보다 두 배로 뛰어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제가 특종을 두 배로 많이 하고, 두 배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여기자로서의 계보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일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사랑이 들어올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남편이 존경스러워』
―그럼 남편을 사랑할 여유는 언제 생긴 건가요.
『쑥스럽고 민망하네요. 첫날 약속 장소에 가서 의자에 앉을 때 이 사람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편은 아직도 그날 저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얘기 안 해요. 말을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전에 선을 본 적은 없나요.
『작년에 처음 봤어요. 스탠포드 대학에 가서 혼자 산 것이 생각을 바꾼 계기가 되었어요. 그때 서른으로 넘어가는 시기였어요. 낮에 본 태양과 밤에 본 노을이 달랐어요. 20代는 대낮 중천에 떠 있는 따가운 햇볕이었다면, 30代는 다른 사람을 담는 햇살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회사의 지시와 나 자신의 성취를 생각하며 살았다면, 앞으로는 다른 사람과 만족을 나누면서 기쁨이 배가되는 삶을 살자는 생각을 했죠.
남편이 저랑 동갑인데 생각이 깊어 존경스러워요. 저는 많이 재잘거리는 스타일이죠. 우리 둘 다 AB형인데 남편이 한마디씩 던질 때 많이 놀라요』
그녀는 남편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하는 게 어색하다고 했다. 결혼 전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에 터를 잡은 것 같아요. 전에는 탑처럼 우뚝 솟아 있긴 하지만 쉽게 바람에 흔들리고 가지도 많았는데, 이제는 올곧게 서 있는 고인돌 같은 느낌이 들어요』
―2세는 언제 볼 생각입니까.
『아기를 갖고 싶지만 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결혼에 관해서 이런 정의를 내렸다.
『결혼하기 전은 「데생」이라고 봐요. 연필로 그려 명암과 형체가 뚜렷하니 강렬하죠. 결혼은 수채화를 그리는 작업 같아요. 안 그려져서 눈물을 흘리면 얼룩덜룩해지고 이젤에 눌러 놓지 않아 땅에 떨어져서 뭐가 묻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내 안에서 소화하는 작업이죠. 기자이자 앵커라는 것과 여러 수식어도 중요하지만 이제 친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金恩慧 앵커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플루트를 공부한 음악대학 지망생이었다. 사업가인 아버지는 LP 레코드 3000장을 모은 음악 마니아였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이 音大 입시 비리에 연루된 것에 충격받은 그녀는 플루트를 그만둔 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지 않았다.
그때 入試 비리를 조목조목 치밀하게 분석한 해설기사를 읽다가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수학을 좋아했던 덕택에 어렵지 않게 이화女大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入試 비리」 기사 읽다가 기자 되기로 결심
히딩크 감독과. |
―대학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종교에 심취했어요. 대학 때는 지적인 탐닉을 하잖아요. 호기심이 많아서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렸습니다. 기독교·증산도·도교에 관심을 갖고 우슈도 배웠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끔 묻는 분들이 있는데 「색깔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나는 어떤 색깔인가」 자문해 보는데,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弱者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바쁜데 자신을 위해 어떤 시간을 갖습니까.
『스님들의 글을 읽거나 절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이겠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두드러진 자리에 오르다 보면 시기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합니까.
『제가 누구보다 뛰어나서 앵커를 한다거나, 잘나서 화면에 나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인연의 고리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의식하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인사를 안 하는 후배나 눈을 안 마주치는 선배가 있으면 웃으며 속으로 축복기도를 해줘요.
자리를 고수하려고 욕심을 부린다면, 저에게 다가오는 위협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버겁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죠. 저의 출발점은 따로 있기 때문에 축복기도를 하고 나면 제 마음이 편해지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金恩慧 앵커는 사실상 자신은 출발 때부터 경쟁 상대가 없었다고 했다.
『2000명이 시험 쳐서 PD 한 명과 저 하나 합격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은 기자로서는 처음입니다. 저 같은 케이스는 먼저 걸어간 사람도, 같이 걸어온 사람도 없었습니다.
최초의 앵커는 제2, 제3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제가 잘해야죠. 최고는 최고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래도록 생명력을 간직하려면 제가 열심히 해야겠죠. 진정한 프로들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제가 파이를 키우는 밀알의 역할을 하고 싶어요』
5000여 명이 가입한 金恩慧 앵커의 팬카페(http://cafe.daum.net/LoveGrace)에는 그녀의 클로징 멘트를 매일 받아 적으며 환호하는 팬들이 있다. 지난 6월5일 가나와의 평가戰을 앞둔 날 그녀의 멘트는 팬들로부터 「위트 있다」는 찬사를 들었다.
『사실상의 토고戰에 대비해서 그동안 부상 선수 아끼고 힘도 비축해 왔었죠. 이번 가나戰, 16강 가~나!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대로 말하는 건 포퓰리즘』
5·31 지방선거일에 金恩慧 앵커는 다섯 시간 선거개표 방송을 했고, 다음날 새벽에 출근하여 두 시간 동안 「뉴스 투데이」를 진행했다. 지난 6월1일 「뉴스 투데이」에서 그녀는 한나라당의 압승을 월드컵 열기와 조화시켜 절묘하게 표현했다.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에 레드카드를, 한나라당에 페널티킥을 준 셈인데요. 與野 모두 열두 번째 선수인 국민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이번 선거에서 확실하게 느꼈을 겁니다』
―앵커 멘트를 쓸 때 어디에 포인트를 두십니까.
『앵커 멘트를 흑과 백으로 나눠서 하면 일갈하는 맛이 있어서 통쾌하겠죠. 하지만 모든 걸 단순화시키면 무모함이 주는 위험함이 있습니다. 제 앵커 멘트는 설탕처럼 단맛은 없습니다. 「감칠맛 난다」, 「은은하게 뒷맛이 난다」고 느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대로 말하는 건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그 사람 묵묵하게 갔구나」, 「진짜 가야할 길을 갔구나」 하는 평가를 받는 게 앵커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닮고 싶은 인물로 오프라 윈프리를 꼽았던데, 앞으로 토크쇼를 할 계획이 있습니까.
『제가 너무 많이 웃는 스타일이어서…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제가 딱딱한 뉴스를 하는 걸 어이 없다고 하십니다. 한 인생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파워인터뷰를 하면 좋겠죠』
―지난 4월에 방영된 골프선수 미셸 위와 가진 인터뷰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17세 소녀와 자연스럽고 즐겁게 대화하시더군요.
『사회자나 대담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인터뷰를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져요. 뉴스 안에서, 인터뷰 안에서 철저히 자신은 녹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CNN 인터뷰어 가운데 질문할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터뷰하는 사람이 있어요. 시청자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그러는 거죠. 오히려 지식을 과시하는 인터뷰보다 솔직하고 담백해요.
미셸 위 인터뷰를 할 때는 저도 열일곱 소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앵커라면 고답적이고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벽을 허무는 인터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내가 이 사람이라면 어떤 입장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터뷰했죠』
―金앵커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데다 완벽해 보여요. 허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데요.
『무척 덤벙거립니다. 뭘 잘 흘리고 다녀요. 제 파란색 지갑은 하도 잃어버려서, 이제 우리 사무원이 알아서 「지갑 찾으면 편집 2부로 갖다 주세요」라고 식당에 알립니다. 예전에는 「파란 지갑 보신 분 金恩慧에게 갖다 주세요」 라고 했는데…』
납북된 고상문씨 부인 자살에 충격
그녀는 기자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심한 회의에 빠진 적이 있다. 1994년 7월 국제사면위원회가 「1979년 노르웨이에서 북한으로 납치되었던 고상문씨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녀는 고상문씨의 부인 조복희씨를 인터뷰했다. 고상문씨 송환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번졌지만 온 국민의 뜨거운 염원에도 불구하고, 냉랭한 남북관계로 인해 좌절됐다. 그 취재로 金恩慧 기자는 「이 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 정치부 기자로 열심히 뛰고 있던 그녀는 「조복희씨가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심정을 「나는 감정을 전하는 기자이고 싶다」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부인은 나에게 기자로서의 성취감도 갖게 해주었지만 펜을 놓고 싶다는 마음도 처음 들게 했다. 일로써 성취감을 얻는다는 것이 어쩌면 취재를 받는 사람의 행복과는 反비례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뒤 한동안 나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지냈다. 취재에 대한 의욕도 생기지 않았고 설혹 취재가 잘 된다 하더라도 기쁘지 않았다. 그런 방황에서 헤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 일로 그녀는 특종의 문턱에 설 때 특종의 성취감과 인간적인 번뇌 사이에서 한발 물러설 줄 아는 기자가 됐다고 한다.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는 2001년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대생들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1위」에 선정됐다.
―요즘 경제난에다 취업난으로 젊은 사람들이 풀이 많이 죽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용기가 될 말을 해주시죠.
『「잡보장경」에 있는 말씀으로 대신할게요.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튀고 돋보이는 게 화려하고 성공의 보증 같지만 늦게 피는 꽃이 오래 간다고 하잖아요. 시간이 갈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늦게 피어 오래 갈 기회조차 없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죠. 좁은 곳만 보지 말고 눈을 돌려서 또 다른 선택을 찾아보면 여러 길이 있어요. 취업문은 좁지만, 나름대로 공부나 사업, 네트워킹을 통해서 나를 발견한다면 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꿈은 콘크리트처럼 굳은 게 아니라 진흙처럼 빚어 가는 것 아닐까요』
―이미 많은 성공을 이루었는데 앞으로 어떤 인생이 펼쳐질 걸로 기대하세요.
『이 나이에 성공을 말하는 건 섣부르죠.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기자가 되는 여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로서 채워야 할 「2%」가 많습니다』●
첫댓글 브라보~ 울 카페 얘기 나왔네여 ㅋㅋㅋ
넘 사진 잘 나오신 것 같아여..은혜님의 매력을 잘 알구 쓰신 것 같구여..미소님 좋은 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