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 정재서 옮김, 이산(2004)
이 책 겉표지에 등장하는 중국배우 공리의 사진은 영화 <국두>의 한 장면이다. 자신이 목욕하는 걸 관음증적 시선으로 훔쳐보는 구멍(카메라의 렌즈)을 향한 돌아섬. 그것은 주체가 ‘보여지는(구경거리)’ 것에 대면함으로써 ‘보여지는 것을 보는’ 주체로의 이행을 가리킨다. 반대로 자신이 보여지는 대상이라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스스로 보여짐으로 구성되는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미 보여짐의 자기는 보여짐을 보는 자기를 승인함으로써 자기를 다른 자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음증적 시선이 투사되는 그 구멍으로 되돌아오는 대상의 응시는 나의 존재를 타자를 위한 존재에 대립시킴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나를 위한 존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힘든 투쟁의 시도를 예감케 한다.
레이 초우가 주목하는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을 향한 비판에 대한 시선의 문제는 서양을 관객으로 동양을 전시물로 왜소화하는 시각을 통해 동양 역시 관객이라는 사실을 사장시킨다는 것이다. 관객과 전시물의 이항구조는 단지 그 역할과 자리를 뒤바꾼다고 해서 서양의 응시가 해체되거나 동양의 전통적 기원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에 이어서 레이 초우의 책을 한 권 더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외부의 한계를 그저 힐난조로 비난하기에 앞서 그 비난하는 주체의 자리, 즉 내부의 영역에서 그 한계의 표식을 철저하게 탐구하는 저자의 태도가 신용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양의 응시에 대한 응시로서의 몰입,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서양(능동적 시선)과 동양(수동적 구경거리)의 피해의식의 발견을 통해 동양 그 자체에도 능동적 시선과 수동적 구경거리의 이항구조가 온존하고 있음을 은폐한다. 그런 점에서 내부의 자기 검증을 통과하지 않은 외부를 향한 비판은 오리엔탈리즘과 공범관계에 있다.
중국에 있어 수동적 구경거리에 선행하는 수동적 구경거리. 그것을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이라고 말한다. 내재적 비판의 틀거리로서 원시적 열정이 출현한 것은 문화적 위기감(전통적 문화기호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위협) 대한 보완적 알리바이 속에서이다. 물론 여기서 ‘원시적’은 ‘후진성’과 ‘전(정)통성’의 양면가치적인 색채를 동시에 띠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단지 ‘원시적 열정’이 서양의 응시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현대 영화를 분석하면서 저자는 제 1세계 영화건, 제 3세계 영화건, 제 1세계의 언어와 영화이론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일반 이론’으로의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 탈식민주의 문화에 대한 연구의 증가가 혁명적이기는 하나, 위와 같은 위계 서열이 강요되지 않음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시적, 전통적 이미지를 실어 날아가는 장치가 영화라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즉 현대 중국영화가 공산주의 시절 이전의 시골마을이나 인민들의 생활양식을 필름에 담아내도 그 영상은 영화적 미디어로 매개되어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으로의 회귀는 영화의 모든 구성요소가 선행하는 그 때부터 미학화, 정치화될 수 있다. “사실, 오래된 문화가 자신과 다른 타자의 시간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미적 대상’이 되고 ‘원시적인 것’이 되는 바로 그때, 저 원시적 열정의 이면에 기원과 시원(始源)을 발명하고 싶어하는 동시발생적인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다(65쪽, 강조-저자)” 따라서 미적 대상으로서의 노스탤지어와 이상주의의 이중의 욕망은 과거의 회고이자 미래의 예고를 함의한다. 이는 현대 중국 영화가 집착하는 원시적 열정이 중화사상이라는 문화영역을 해체하기도 하지만, 그 문화영역의 일부로 머물러 있으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서양 제국주의는 모든 비서양문화를 타자의 위치에 놓고, 비서양문화의 가치를 서양에 비해 ‘이차적’인 것으로 보지만, ‘제 3세계’ 내셔널리즘의 과업은 ‘이차적’인 것이 된 문화 자체를 근원적인 것, ‘제 3세계’ 국가의 역사와 ‘가치’의 때묻지 않은 기원으로 (재)발명하는 것이다(104쪽)” 이렇게 영상을 통해 매개된 전통문화의 노스탤지어의 전경들은 순수성과 토착성의 자기희생을 긍정함으로써 자기긍정으로 전화된다. 오리엔탈리즘의 방어기제로서의 전통으로의 회귀와 집착이 공동체의 긍정적 형식으로 이국화 되는 것이다. 레이 초우에게 있어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제 3세계의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토착주의가 여전히 우리에게는 민족적 ‘원재료’가 그 자양분으로 남아있다는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원재료’가 됨은 물론이고 그들 스스로의 원시적인 역사를 직시하는 것을 미화하고 번역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에 매개되어 영상화되는 중국적 ‘차이’는 그것이 이국적인 표상을 통해 상징적 요소를 갖춘 내러티브에 봉쇄됨과 동시에 이러한 봉쇄는 폐쇄적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레이 초우는 현대 중국 영화의 원시적 열정의 원재료가 단지 서양의 ‘기원적’ 상품물신을 재구성하는 결과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묻는 것 같다. “벤야민이 말하는 의미에서, 황토풍경의 ‘아우라’-대지, 하늘, 농민들의 조용한 생활방식-는 우리가 그것을 영화 스크린에서 보는 순간 사라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테크놀로지나 상품화를 거친 (‘오리지널’의) 재구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148쪽)” 그러나 문화-횡단적인 미디어의 동시대성은 그것이 문화간의 번역을 향한 욕망을 추동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항 대립 구조의 오리엔트를 비판하기 위한 내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농촌 여성은 단순한 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의 타자의 타자-서양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으로, 거기에서 중국의 벽지로, 다시 거기에서 벽지의 여성으로 옮겨가는-이다(153쪽)” 즉 ‘길은 사람이 다녀서 생긴 것’에 반하여,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으로서의 기존의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예외를 만들고 주체성이 도청, 검열, 기록, 감시되는 균질공간에 틈새를 열어 공시적인 폭력이 배제해온 통로를 다시 여는 것이다. 즉 구체성의 기제(미디어의 테크놀로지화)를 기반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자연을 담아내는 것은 단지 인위적인 제 2의 자연을 생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테크놀로지를 빌어 수행되는 국가의 공식 선전과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대응하는 영화적 기표로서의 환상은 공식 담론체계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를 통해 생산되는 환상의 기표로서의 원시적 열정의 전복성을 우리는 주체의 소멸을 통한 침묵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타자의 타자로서의 무의식적인 측면이 침묵할 때 정작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쯤에서 양면가치성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즉 근대 중국의 국민문화에 관한 글쓰기가 미적으로 약자에 심취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국민문화의 구축이 권력부여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면, 약자가 미학적으로 처리됨으로써, 약자를 구경거리로 관찰함으로써 어떤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다. 이 구경거리의 관객은 동정의 형식으로 막대한 감정적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고, 동시에 긍정적인 국민문화는 약자 자체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이 동정은 긍정적인 국민문화의 확고한 토대가 된다. 이렇게 나르시시즘이라는 배타적인 자기 탐닉을 타자에 투사하는 것은 (프로이트에게서 본 대로) 보는 주체의 위치를 형언할 수 없는 미적, 감정적 쾌락을 지닌 것으로서 안정시키거나 강력하게 하는 하나의 방책이 된다. 이런 쾌락은 약자와의 ‘연대’라는 환상을 통해, ‘통일된’ 공동체 형성을 가져온다(206쪽, 강조-저자)” 이것이 원시적 열정이 재생산하는 결여의 재정치화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두 번째 측면은 원시적 열정의 시각화를 통해 중국 당국이 감추려고 하는 허물을 현대의 중국영화들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원시적 열정은 전통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그 전통을 미디어를 매개로 노출하고 전시한다. 이렇게 분절된 문제를 통해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이 생산하는 민족지의 치부를 경멸하는 토착민을 이렇게 비판한다. “... 달리 말하자면, 이런 경멸적인 표현은 외국인을 본다는 행위를 이미 그 자체의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 외국인이 보는 것을 보거나 상상하는 토박이, 외국인의 주목을 받는 자기와 똑같은 토박이들을 보거나 상상하는 토박이의 행위를.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권위를 부여하고, 가치 자체를 부여할 힘이 있다고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한편으로, 그런 경멸을 품은 사람들은 타자가 그런 보는 행위를 하면 그것을 즉시 규탄하는 일이 자주 있다(235쪽, 강조-저자)” 원시적 열정은 그 과잉적 양식 속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그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 기초한 관음증적 시선을 무대화함으로써 서양의 응시와 동양의 응시, 외부와 내부의 오리엔탈리즘적 경계를 비판하기도 한다.
레이 초우는 이런 교착 상태로부터 시작되고 지연되는 양면가치성을 문화 간의 번역의 문제로 치환한다. 중국 현대영화에 나타나는 ‘원시적 열정’은 포스트콜로니얼 세계에서 어떻게 분배되고 어떤 이미지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 원시성을 노출하고 전시하는 것은 서양의 응시에 대한 전리품으로서 배반인가? 아님 토착주의에 입각한 방어 기제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그러나 내 생각에 문제는 결국 기존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나 국민국가가 이러한 전지구적 문화-횡단으로서 노출된 영화 기표의 생산에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이다. 응시의 ‘기원’을 서양에 찾건, 전통미학의 자생적 민족문화로 소급해 나아가건, 균질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에 방치된 지식의 문제를 설명하기에 이 틀은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관음증적 시선이 투사되는 구멍을 향해 돌아서는 <국두>의 여배우 공리의 응시는 우리가 보는 방식은 우리가 보여지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한다. 레이 초우가 민족지적 영화의 기표에서 발견하는 긍정성은 단지 민족지의 대상이었던 사람들과 자기자신의 문화를 민족지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을 통해 ‘주관적 기원’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보여지고 있는 상태에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서양의 응시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상태를 보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표상하고 자기를 다른 자(서양의 응시에 노출된 즉자가 아닌)로 조직하는 방식을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여지는 응시를 적극적으로 응시하는 행위를 통해 성립된다. “즉 번역작업은 그 대부분이 ‘이질적인 것’을 ‘토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정이 따르는데, 그것은 ‘토착적인 것’이 ‘고유한’ 참조점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번역은 이질적인 것이 ‘토착적인 것’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오염시키는 걸 허용하는 과정이다(282쪽, 밑줄-인용자)” 그래서 문화상호 간의 번역 문제는 단지 통상적으로 언어를 통한 번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서양(오리지널), 동양(번역)의 관계도 그 관계의 역전의 일방통행로도 아니다. 힘의 불균형을 인정하되, 기원에 대한 개념과 문화들의 동시대성을 인정함으로써 미디어에 매개된 ‘원시적 열정’이 단지 전시대상과 관찰대상으로서의 이국화된 기표가 아니라 동시대의 번역과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번역과제는 그 동시대성을 분절한 결과 떨어져 나오는 권력구조의 공시성(전세계적인 착취)에 대항하는 정치적 저항의 한 형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