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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 5 구간(계리재~부련이재)
1. 산 행 일 : 2011. 6. 11(토)
2. 산 행 지 : 경남 사천 ---> 봉대산(409m)
3. 날 씨 : 흐림(무더운 날씨, 장맛비 예보, 비는 오지 않았음)
4. 참 가 자 : 김명자, 노승애, 박봉하, 박상호, 이용준(5명)
5. 준 비 물 :
[1] 전 체 :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6. 회 비 :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7.7km, 7시간 30분 소요
[2] 산행길잡이
이번 구간은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에 위치한 「계리재」를 출발하여 「부련이재」까지 이어지는 마루금 산행이다.
계리재 아래 오른쪽에는 '진주축협 생축사업장'이 있는데, 정맥은 왼쪽으로 100여m 내려선 다음 오른쪽 산으로 붙는다. 170.1봉 삼각점은 수풀에 가려 확인할 수 없다. 217봉부터는 능선에 가느다란 소나무들이 빼곡이 자라며 길이 좋아진다. 계리재에서 새로 난 2차선 포장도가 지나는 6번 군도까지는 약 2시간 걸린다. 6번 군도에서 능선으로 붙는 길은 왼쪽으로 10여m 간 다음 푹 파인 곳을 따라 비스듬히 올라서야 한다. 도로를 내며 절개지가 생겼는데, 바위 상태가 불안정해 조금만 건드려도 허물어지기 때문에 곧장 치고 오르는 것은 위험하다.
무선산까지는 20분 정도 거리지만, 정맥은 무선산 정수리를 비껴간다. 무선산에서 돌장고개까지는 아주 수월한 길로 1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
1002번 지방도와 통영-대전간 고속국도가 지나는 돌장고개는 금곡리쪽으로 5분 정도 내려가 굴다리를 이용해 고속국도를 건너야 한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채석장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오고 이 도로를 약 5, 6분 오르면 마루금으로 진입하는 통나무 계단이 나온다. 이후로는 잡목도 없고 송림 숲이 계속 이어져 비교적 완만한 오르내림의 산책길 수준이며 최근에 세운 이정표가 정맥 길을 안내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310봉과 5구간 최고봉인 봉대산(409m)에는 헬기장이 하나씩 있으며 봉대산을 내려서면 곧바로 삼베마을과 고성 갈림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고성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등산 안내도, 51번 철탑을 지나 양전산에오르게 되는데 선답자에 따르면 삼각점이 있다고 하는데 풀에 덮여서인지 확인을 하지 못했다.
돌장고개에서 부련이재까지는 능선에서 전혀 물을 구할 수 없다. 그러나 길 상태는 야주 양호한 상태로 야간 산행을 하더라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3] 구간별 거리
계리재(3번군도)--0.7km--170.1봉--2.3km--봉전고개(6번군도)--0.7km--무선산(277.5m)--3.5km--돌장고개(1002번도로)--0.3km--191봉--3.6km--357봉--3.4km--객숙치--0.6km--봉대산(409m)--1.7km--양전산(310.9m)--0.9km--부련이재(176m, 9번도로)
[4] 산행 코스 및 시간
(1) 산행지 이동
① 교통편 : 금호고속
② 이동경로 : 수원터미널(06:40) ∼ 경부, 대전통영고속도로 ∼ 진주(10:10/10:15) ∼ 계리재(10:40)
(2) 산행코스
계리재(10:50) → 170.1봉(11:15) → 봉전고개(12:05/12:10) → 무선산(12:35) → 274m봉(12:52/점심/13:30) → 돌장고개(14:15) → 채석장(14:30/14:40) → 임도삼거리(15:25) → 310m봉 헬기장(16:10/16:20) → 객숙치(17:00) → 봉대산(17:20/17:30) → 양전산(18:20) → 부련이재(18:35)
(3) 산행 후
부련이재(18:50) ∼ 금곡면(19:00 ∼, 식사 및 숙박)
8. 산 행 기
[1] 산행전
(1) 심야버스를 이용해 봅시다.
지난 산행 때(4구간)는 룰랄라 길이였는데 이번 구간부터는 산의 고도와 기복이 심하고 雪上加霜으로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때라 지난 산행 때「金」曜日 심야버스를 이용해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했으면 어떠냐는 의견(윤사장)이 있었다.
산악대장이 深思熟考 하여 답변(2011. 6. 2)을 카페에 올렸는데 ‘일정을 계획하다 보니 전날 서울까지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과 12시 심야버스로 이동 후 새벽 5~6시경 산행을 시작한다 해도 오후 1~2시경 종료되면서 3시간 정도 한 낮 더위를 피할 수 없고 산행 종료 후 긴 오후를 허비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는 바 심야버스를 이용할 경우와 비슷한 약 3~4시간 정도의 더위만 극복하면 될 수 있을 것 같아 예정대로 위와 같이 계획했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널리 이해하시고,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으시면 다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2) 산행 참가자 근황
지난 5월 일반산행(하동 성제봉) 후 산행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낙남정맥 5, 6구간 산행계획이 카페에 올랐다. 노부장이 가장 먼저 참가신청(6. 3)을 했고 신청 마감일(6. 8)이 임박(6. 7)해 김명자부장도 이번 산행을 해 보겠다고 한다. 안교장과 윤사장, 장부장은 개인 사정이 있어 산행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한다. 평소 늘 함께했던 사람들이 빠지니 허전하고 썰렁하다. 박사장에게 전화, 함께 참여할 것을 권하고 가겠다는 댓글(6. 7, 15 : 00시경)을 올렸다.
(3)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는데
산행 전날(6. 10) 카페를 방문해 보니 ‘산행지인 진주 금곡면과 고성 영현면에는 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내일(11일) 비 올 확률 06시경 90%, 12시경 70%, 이후 30%로 오전까지 비가 오고, 최고기온은 23도 정도 이므로 출발하여 2시간여 시원한 빗줄기를 맞으면 됩니다. 심야버스를 이용했으면 긴 시간 비 맞을 뻔 했네요. ㅋㅋ’라고 우천 산행 준비를 하라는 대장의 글이 올라와 있다.
여름날 산행을 어렵고 부담을 주는 것이 산행 끝날 때까지 3~4ℓ 물을 지고 다니는 것인데 이번 산행에는 간식과 도시락은 물론 우중 산행을 대비해 갈아입을 옷과 우의 등을 곁들여야 하니 그 무게를 감당할 일이 난감하다.
(4) 버스 출발 시간이 임박했는데
6월 11일 05 : 00시 기상, 아침 식사를 한 후 집에서 출발, 06 : 10분경 집사람의 도움을 받아 수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곧이어 김명자, 노부장, 대장이 도착했는데 차 출발시간이 임박(06 : 30분경)했는데도 박사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로 확인을 해보니 좀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아무리 급히 달려도 차 출발 시간(06 : 40분)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그래서 기사에게 3, 4분 출발 지체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不可하다며 가는 도중에 승차를 할 수 있도록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라고 한다.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터미널을 빠져나와 권선중학교 정문 앞에서 박사장을 간신히 승차시켰다.
[2] 산행 들머리 계리재
수원 버스터미널을 출발하여 10 : 10분경 진주 고속버스 터미널 도착.
10 : 30분경 택시로 오늘 산행 출발지 『계리재』로 이동
11 : 05분경, 정촌면과 문산읍경계인『계리재』에 도착을 했다. 이 재는 부락 옆 산이 닭실이고 북산이 씩(너구리)실이므로 이 부락 지형에 따라 「계리재, 제리재 또는 소음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오늘 비올 확률이 90%라 했는데 염려했던 비는 오지 않고 오히려 햇볕이 강렬해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고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땀과 더위로 힘든 산행을 해야 할 것 같다.
택시에서 내려 산행 준비를 한 후 『계리재』출발, 도로를 따라 5분여를 내려가 오른쪽 산으로 올라붙었다. 그물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는 마루금을 따라 오르니 밤나무 단지가 나온다. 후미로 오는 박사장을 기다리며 잠시 휴식, 박사장이 마루금으로 진입하여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3] 산딸기
11 : 25분, 삼각점이 있는 170.1봉을 지나
11 : 30분, 안부(성황당 안부 4거리)를 통과하여 잠시 오르니 편안한 평지 길로 이어지다 다시 능선봉으로 오르게 된다. 산딸기 철인지 길옆으로 빨갛게 익은 딸기가 유혹을 한다. 見物生心이라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잘 익은 딸기 몇 알을 따 입안에 넣으니 새콤달콤한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4] 鳳田고개
11 : 45분, 시멘트 경계석이 있는 안부를 지나 묘가 있는 봉(11 : 50)에서 좌로 진행.
12 : 00시경 다소 가파른 봉(217m ?)에 올라 휴식. 휴식도 잠시, 217m 봉을 뒤로한지 약 2, 3분 24번 송전탑을 지나
12 : 25분경, 통나무 계단과 이정표(낙남정맥, 실봉산 / 낙남정맥, 무선산 0.9km // ↑ 봉전마을 / 인담마을 ↓ )를 세워 놓은 2차선 포장도로(6번 郡道)인 『봉전고개』에 내려섰다.
『봉전고개』는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 봉전마을과 금곡면 인담리를 이어주는 고개다. 『봉전고개』가 위치한「진주시 정촌면 관봉리 봉전(鳳田=너무니=여물동)마을」은 관봉리(官鳳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무선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의 뒷산이 鶴이 밭에 내려앉는 형태이기 때문에「봉전(鳳田)」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백호 등은 「학등」이고 좌청룡은 「무선산」이다. 우백호 등 밑에 용청사(龍淸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석탑만 남아 있으며 좌청룡인 무선산 중턱에 진(陳)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다. 그리고 무선산 밑 중턱에 용바위와 용이 등천했다고 하는 굴이 있다.
[참고자료 1-①] 진주시 정촌면(鼎村面)
지형을 보면 새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형태 같기도 하고, 곰이 서쪽을 향해 편안하게 누워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위치를 보면 북쪽이 가호동과 인접하고 동북쪽은 문산읍, 서북쪽은 내동면, 남쪽은 사천시 사천읍과 경계를 하고 있다.
조선조 전기인 1402년 이래 진주목 남면의 정촌·지공·가차례리였고, 1864년에는 진주목의 정촌면·지공면·가차례면이 되었다.
1895년 진주목이 진주군이 되고 1906년 진주군 속면의 개편때 정촌면(鼎村面)·지공면(枝貢面)·가차례면(加次禮面)을 정촌(井村)이라는 어구를 쓰게 되었는데 정촌면의 전신인 鼎村面의 鼎자에서 目을 지우고 井村面이라고 하고 원 鼎村面은 鼎洞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10개리중 가좌리와 호탄리는 진주시로 이속되고 옥산리와 동물리는 문산읍에 이속되어 현재 화개리·관봉리·소곡리·예상리·예하리·대축리로서 6개 법정리와 19개 행정리로 되어 있다.
1995년 1월 1일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하여 진주시 정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출처> 진주시 정촌면 홈
http://www.jinju.go.kr/county/jeongchon_03.htm
[참고자료 1-②]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官鳳里)
본래 진주(진양)군 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봉전동, 상동 일부와 사천군 북면의 관율동 일부를 병합하여 관율과 봉전의 이름을 따서 관봉리라 하여 정촌면에 편입됨
<출처> 한국지명총람 경남편 Ⅱ p583
[참고자료 2-①] 진주시 금곡면(金谷面)
조선조 전기까지 진주목(晋州牧) 남면(南面) 송곡리(松谷里). 인담리(麟淡里). 금동어리(金冬於里).성을산리(省乙山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금동어리(金冬於里) 는 송곡리(松谷里)에 합했다가 인조1년(1623년)에 다시 나누었다.
순조32년(1832년)에는 인담리(麟淡里)를 성을산리(省乙山里)에 합하여 송곡리(松谷里). 금동어리(金冬於里). 성산리(省山里)라 하다가 고종1년(1864년) 이후 구한말 때까지는 송곡면(松谷面) 금동어면(金冬於面). 성산면(省山面)이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진주군(晉州君) 송곡면(松谷面). 금동어면(金冬於面). 성을산면(省乙山面) 등을 통폐합하여 금곡면(金谷面)이라 하였다.
그리고 송곡면(松谷面) 정자동(亭子洞). 홍정동(鴻亭洞). 이곡면(耳谷面) 이곡동(耳谷洞). 성을산면(省乙山面) 하인담동(下仁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각 일부로서 정자리(亭子里)라 하고, 송곡면(松谷面) 일부로서 송곡리(松谷里)라 하고, 송곡면(松谷面) 송곡동(松谷洞). 홍정동(鴻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 가토동(佳吐洞). 각 일부로서 검암리(儉岩里)라 하고 금동어면(金冬於面) 우봉동(牛峰洞). 가토동(佳吐洞). 검암동(儉岩洞) 각 일부로서 가봉리(佳峰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상인담동(上仁覃洞). 하인담동(下仁覃洞). 송곡면(松谷面) 홍정동(鴻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 각 일부로서 인담리(仁覃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동례동(東禮洞). 신대동(申大洞). 두문동(斗文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 각 일부로서 동례리(東禮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두문동(斗文洞). 석계동(石界洞). 성산동(省山동). 신대동(申大洞). 고성군(固城郡) 오읍곡면(吾邑谷面) 동동(東洞). 서동(西洞) 각 일부로서 두문리(斗文里)라 하고, 성지산면(省之山面) 장지동(長芝洞). 죽곡동(죽곡동) 성산동(省山洞) 각 일부로서 죽곡리(竹谷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성산동(省山洞). 덕계동(德溪洞) 각 일부로서 성산리(省山里)라 하여 법정리 9리(里)에 행정리 21개리(里)를 다음과 같이 명명 [검암리(儉巖)에 엄정(儉巖). 운문(雲門). 차현(車峴). 신담(新潭). 가봉리(佳峰)에 가봉(佳峰). 우봉(牛峰). 송곡리(松谷)에 송곡(松谷). 정자리(亭子)에 정자(亭子). 홍정(鴻亭). 시평(枾坪). 인담리(仁潭)에 인담(仁潭). 상인담(上仁潭). 동례리(東禮)에 동례(東禮). 신대(申大). 두문리(斗文)에 두문(斗文). 세경(洗鏡). 석계(石界). 죽곡리(竹谷)에 장재(長財). 죽곡(竹谷). 성산리(省山)에 성산(省山). 덕계(德溪)] 하였으며. 1939년 10월1일 진주군이 진주시와 진양군으로 분리 되었으며. 1995년 1월1일 법률제4774호로 진양군과 진주시가 도농복합형의 진주시 금곡면으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참고자료 2-①] 진주시 금곡면(金谷面) 인담리(仁潭里=인담, 어진못)
본래 진주(진양)군 성을산면의 지역으로서 좋은 못이 있으므로 어진못 또는 인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페합에 따라 상인담동, 하인담동과 송곡면의 홍정동 일부와 금동어면의 검암동 일부를 병합하여 인담리라 해서 금곡면에 편입됨. 고려 때 인담부곡(仁潭部曲)이 있었음.
※ 어진 못 : 인담에 있는 못.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이지 않아 「仁潭」이라 하였음.
<출처> 한국지명총람 권 9(경남편 Ⅱ) p. 492
[5] 신선이 춤을 추고 놀았던 무선산(舞仙山)
『鳳田고개』2차선 포장도로를 횡단하여 최근에 설치해 놓은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 송림 숲속으로 들어섰다.
『봉전고개』를 뒤로한지 25분(12 : 50분), 「무선산 0.1km / 돌장고개 2.89km / 진주 와룡산 9.20km」이정표를 세워 놓은 삼거리에 도착했다. 우선 배낭을 내려놓고 박사장과 함께 마루금 우측에 위치한『무선산(舞仙山) / 仁潭 서쪽에 있는 산』을 찾았다. 100m 거리라 다소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약 30여m를 진행하니 잡초와 칡넝쿨이 무성한 평지에「무선산 정상 / 해발 277.5m」라 쓴 스텐 표지판을 세워져 있다. 정상 표지판 뒤로 깃대를 세워 태극기를 달아 놓았으며 삼각점과 의자 두 개도 설치되어 있다.
이 산 밑에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못이 있는데, 이 못에 선녀들이 내려와서 목욕하고 이 산에 가서 춤추고 놀았다 하여 이 산을 『무선산(舞仙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선답자의 산행기에 따르면 「신선이 춤을 추던 무선산은 표고는 277.5m에 불과하지만 6구간 최고봉이다.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한 눈에 다가오고 두량 저수지가 발 아래로 보여 가히 신선이 춤추고 놀 만한 풍광이 펼쳐진다.」라고 했는데 무성한 잡초와 칡넝쿨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景觀과 眺望이 全無하다.
[6] 冷麪 食事
『무선산』정상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풀며 휴식을 취한 후 『돌장고개』로 걸음을 옮겼다.
13 : 35분경, 묘 2기가 있는 곳(274봉?)에 도착을 했다. 먼저 도착한 대장이 후미로 오는 우리를 기다리며 점심식사를 거의 끝내고 있다. 배도 출출하고 오늘 점심식사로 박사장이 나누어 준 냉면사리와 육수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는데 얼른 배낭을 내리고 도시락과 냉면을 꺼내 점심식사 준비를 했다.
1회용 사발에 냉면 사리와 육수, 다대기 고추장, 냉면용 무채를 넣고 함께 버무려 먹으니 맛이 일품 중 일품이다. 산행 중 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해보는 재미 --- 냉면과 육수를 지고 다니는 부담만 없으면 더운 여름날 산행 중 식사로는 최고가 될 것 같다.
[7] 돌장고개
14 : 10분, 느긋하게 쉼을 취하며 점심식사를 하고 출발. 200m 안팎의 산을 두 개 정도 넘어 인동(仁同) 장(張)씨의 묘를 지나
14 : 40분경, 2차선 포장도로가 가로지르는 『돌장고개』에 내려섰다.
『돌장고개』는 100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오른쪽(서쪽)은 경남 사천시 사천읍 금곡리, 장전리, 구암리, 선인리고 왼쪽[동쪽]은 경남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를 지나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 영화리, 영대리 쪽으로 이어진다.
선답자들에 따르면 차도를 건너 절개지 위에 올라서면 두문리 이정표석(물레돌)이 세워져 있다고 했는데 방향을 잘못 잡고 간 때문인지「이정표석(물레돌)」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표석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돌장고개』가 위치한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 석계마을의 지명과 관련이 있어 소개를 한다.
「어느 산인지 지금은 알 수 없는 천태산, 혹은 청태산의 여장사 마구할머니(靑台山馬駒)가 물레질 할 때 물레 돌로 쓸려고 사천 큰골(현 사천시 두량), 혹은 동해에서 바위 3개(1개는 머리에 이고, 1개는 지팡이로 짚고, 1개는 치마에 담고)를 가지고 오다가, 작은 것들은 고성 영오와 사천 구암숲에 하나씩 버려 버리고, 치마에 담아오던 큰 바위는 지금의 위치까지 가지고 와 심어두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진양군(진주시)과 사천군(사천시)의 경계석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7년 사천 공군부대에서 이 돌을 뽑아 가자 석삼수(石三壽)씨가 진양군청에 항의해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게 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3]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斗文里)
1914년, 진주군 성을산면 두문동(省乙山面斗文洞) · 석계동(石界洞) · 성산동(省山洞) · 신대동(申大洞), 고성군 오읍곡면 동동(吾邑谷面東洞) · 서동(西洞) 각 일부로서 두문리(斗文里)라 하였다. 두문리는 두문(斗文), 세경(洗간), 석계(石界)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구역 개편 시 금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 두문(斗文) : 두문의 이름은 드물, 드리무, 입물, 더문, 도무리, 두무리라는 말로 책에서 전하여 오는 점으로 보아 두문리라는 이름이 만들어 진데는 사연이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영현면에서 흘러드는 도산천(都山川)과 영오면에서 흘러드는 군산천(群山川)이 합하여 지는 지점인 것으로 보아 도산천의 도와 군산천의 무리(群)를 합하여 도무리가 두문리의 유래인 듯도 하고, 현재 더문골이란 곳이 옛날 두문리 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물이 잘 들어오지 않자 차차 낮은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으로 보아서 드무리라는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책에 들입(入)자 말물(勿)자로 하여 입물이란 이름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이 들지 말라는 뜻이 있는 듯도 하다. 또 더문이란 말은 드물다는 경상도의 벙언인 것으로 보아 물이 잘 들어오는 일이 드물어서 사람 살기가 좋다는 뜻도 되므로 결국 도무리 또는 두무리로 되었다가 훗날 글을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음이 비슷한 두문리로 바꾸어 한자의 두의 뜻은 많다 좋다 대단하다는 뜻이 있으므로 글이 좋다, 글을 잘한다는 의미로 두문리로 바뀌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또 두문리는 삼면이 강으로 막히어 있어 막을 두(杜)와 면할면(免)을 써서 두면으로 부르게 되고 두면은 마을을 보호한다, 액을 면하게 한다는 등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대문이 없는 마을이다. 약 백 년 전에 학문의 열기가 높으면 선비와 벼슬 할 사람이 많이 난다고 하여 두문리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약 오백년 전부터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는 김해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출처> http://www.jinju.go.kr/county/geumgok_07.htm
○ 석계(石界) : 석계는 돌곶이 또는 돌곶이라 불리어진다. 석계라는 뜻은 진양군과 사천군사이의 경계돌로서 표시를 하고 큰돌을 꽂아 둔데서 돌로 경계를 표시했다는 뜻으로 석계라 하고 돌을 꽂아 두었다는 뜻으로 돌꽂이 마을 또는 돌곶이라 불리어진다고들 한다.
또는 마구 할머니 물레돌이란 전설도 있다. 옛날 마구 할머니가 물레돌을 하려고 두 개를 갖고 오다가 하나는 작아서 구암마을 앞에 버리고 큰 것은 현 위치에 두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청태산마구(靑台山馬駒) 할머니는 여장사(女壯士)였는데 힘이 얼마나 세었던지 동해바다에서 물레돌을 하려고 돌 두 개를 가져온 것이 하나는 구암마을 앞에 꽂힌 작은 것이요, 나머지 하나는 돌꽂이 고개에 꽂힌 큰 돌이다. 1977년에 사천 공군부대에서 이 돌을 뽑아 가버린 것을 알고 석삼수(石三壽)가 진양군청에 항의하여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게하여 현재에 이른다.
<출처>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
http://www.jinju.go.kr/county/geumgok_07.htm
[8] 客宿峙 가는 길
『돌장고개』바로 앞쪽에는 4차선 대전~통영간 고속국도가 지나가고 직벽에 가까운 절개지라 횡단하여 건널 수가 없다. 그래서 1002번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진행을 했다. 도로를 따라 약 50여 m를 내려가니 컨테이너 집이 있는데 사람들이 출타를 했는지 대문이 굳게 닫혀 있고 개짓는 소리만 요란하다. 산행 중 물이 떨어졌거나 부족할 경우 이 집에서 물을 구하면 될 것 같다.
14 : 47분경, 굴다리 통과하여 채석장 사무실 입구에 도착했다. 뽕나무에 까만 오디가 탐스럽게 달렸다. 견물생심이라 가던 길 멈추고 손과 입이 까맣게 물들도록 오디를 따먹고 그늘을 찾아 휴식을 가졌다.
박사장, 이곳에서 탈출을 하겠단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부련이재까지는 절반도 오지 않았고 시간도 많이 남아 산행을 종료하기에는 너무 아쉬워 『객숙치』까지만이라도 가자고 했는데도 어렵다고 한다. 어쩔 수 없어 물과 간식을 제외한 물품을 박사장에게 맡기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고개 마루로 올라섰다.
고개 마루에는 이정표(낙남정맥, 돌장고개 0.83km / 낙남정맥, 부련이재 10. 37km)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다. 묘지 봉을 지나 왼쪽에 과수원이 자리한 임도를 따라 내려가 오른 쪽 아래로 금곡저수지가 보이는 안부에 도착(15 : 30분경), 쉼 없이 진행.
15 : 45분경, 밤나무 단지를 지나 다소 가파른 봉에 올랐다 내려서서 임도와 나란히 가는 마루금을 따라 진행하다보니 잡목 속으로 길이 사라져 보이지를 않는다. 길을 잘못 가고 있다 싶어 다시 되돌아 나오니 한배 표시기가 임도쪽으로 달려있다.
16 : 20분, 임도로 내려서서 임도를 따라 진행,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고개 마루에는 수도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대형 물통도 설치를 해 놓았다.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
5, 6분 후 후미 도착, 함께 5분여를 더 쉼을 취하고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보니 길 좌우로 두릅나무가 지천으로 보인다. 이 지역 사람들은 두릅 순에 관심이 없는지 한차례 꺾어간 흔적도 없다. 5월 중순에 이곳을 통과했더라면 배낭이 차고 넘칠 수확이 있었을 것 같다. 이왕지사(已往之事), 막연히 내년을 기약해 본다.
임도를 따라 걷기를 6, 7분, 임도삼거리에서 임도를 버리고 숲길로 진행, 무명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16 : 52분경 넓은 공터를 지나
16 : 55분경, 「낙남정맥, 돌장고개4.33Km / 낙남정맥, 부련이재6.87Km / 장령산」이라 표시된 이정표를 세워둔 곳에 도착했다. 부련이재까지 6.87km면 부지런히 걸어도 2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 같다.
17 : 05분, 무명봉(지도상 357봉?)에 올랐다 내려서서 다시 급 오름 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7 : 25분경, 몇 개의 마루금 표시기가 있는 봉(310m 봉)에 올라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 7, 8분 후 후미 도착, 5분여를 더 쉬고 다시 출발.
17 : 40분경, 헬기장을 지나
17 : 55분경, 의자와 이정표(사천시 방향 / 봉대산 정상3km / 삼베마을 주차장 2.5km)를 세워 놓은 삼거리 능선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잠시 고르고 다시 출발,
[9] 객숙치(客宿峙)
18 : 27분경, 작은 바위와 돌이 널려 있고 우측으로 마을이 보이는 작은 공터봉에 올랐다 안부로 내려섰다.『客宿峙』다.
『客宿峙(=객숙재)』는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대실 남쪽에서 사천군 정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골이 하도 깊고 멀어서 길손들이 이 고개에 있는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넘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골을 「객숙골」이라고도 한다.
<출처> 진주시 / 진주가이드 / 지명유래 / 금곡면 죽곡리
http://www.jinju.go.kr/county/geumgok_09.htm
『돌장고개』를 출발할 때 『客宿峙』쯤에서 탈출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客宿峙』에 당도해 보니 빠져 나갈 길이 없다. 대장에게 전화(노부장)를 해 보니 봉대산 정상에서 「삼베마을」주차장으로 탈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객숙치에서의 탈출을 접고 약 10여분을 진행(18 : 36분)하니 「낙남정맥, 돌장고개 8.33km / 낙남정맥, 부련이재 2.67km」라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대장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봉대산 정상에서 삼베마을 주차장으로 빠지지 말고 부련이재로 진행을 하라고 한다.
[10] 봉대산(鳳臺山)
이정표를 뒤로하고 잠시 진행하니 오늘 산행의 최대 고비인『봉대산(409m)』오름길 통나무 계단이 나온다. 다리도 뻐근하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염방 훔치며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랐다.
18 : 54분, 드디어 『봉대산(409m)』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마루금에서 좌측으로 약 10m 정도 벗어나 있는데 오늘 산행 중 처음 대하는 정상석(낙남정맥, 봉대산 / 409M / 사천시, 2010. 11)과 이곳을 다녀간 산꾼들이 달아놓은 표지기를 비롯하여 잡목과 잡풀이 무성한 가운데 산 아래로 시가지(금곡면?)도 눈에 들어온다.
『봉대산(鳳臺山, 409m /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은 진양, 사천, 고성 3개 군을 포옹하여 웅장하게 솟은 명산이다. 이 산은 금곡면의 주봉으로 전설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竹谷」에는 옛날에 대나무가 무성했는데 그 대밭에는 鳳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天地開闢이 있자 鳳은 鳳臺山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는데 그 후 물이 빠진 자리에는 대나무가 없어지고 깊은 골짜기가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鳳이 앉아있는 밑이라는 뜻에서 鳳下竹林이라 불렀으며 대나무가 있는 골이라는 뜻에서 「竹谷」으로 불리어 오늘에 이른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대나무가 있다.
[참고자료 4-①] 죽곡리(竹谷里)
1914년, 진주군 성을산면 장지동(省乙山面長芝洞) · 죽곡동(竹谷洞) · 성산동(省山洞) 일부로서 죽곡리(竹谷里)라 하였다.
○ 죽곡(竹谷) : 죽곡리는 본래 성을산면의 지역으로서 대나무가 많으므로 죽곡 또는 대시이라 하였다 한다.
○ 장재(長財) : 부자마을이라는 뜻에서 장재실이라 불리어지기도 하고 지혜스러운 마을이라하여 장지(長智)라고도 불리어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보다 서기(瑞氣)로운 징조(徵兆)가 비친다, 선(善)하고 신비(神秘)함이 많다는 뜻이 있는 지초지(芝)로 바뀌어 불리어 왔다. 지(芝)는 난초와 비유되는 화초로서 군자나 대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1990 마을 이름 개명시에 장지(長芝)마을 총의에 의하여 다시 옛날 이름인 장재실(長財實)로 개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참고자료 4-②] 성산리(省山里)
1914년, 진주군 성을산면 성산동(省乙山面省山洞)·덕계동(德溪洞) 각 일부로서 성산리(省山洞)라 하였다.
○ 성산(省山) : 성산은 안산이 성봉(省峯)이요, 동쪽에 을산(乙山)이 있어서 이 두 산의 이름을 따서 성을산이 되고 한때는 면의 이름으로 성을산면이 되었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을산면이 없어지면서 가운데 을자를 빼고 성산으로 바뀌어 성산리로 불리우고 있다. 성봉은 생김새가 베를 맬 때 쓰는 솔과 같이 생겼다 하여 솔봉이라 불리어지므로 메산(山)과 더불어 말이 만들어지면서 솔메가 되고 변음이 되어 솔미라고 불리어지지만 정확히는 솔메가 맞다. 한편 솔매라고도 부르는데 일설에 의하면 성산은 사방의 산이 높고 솔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란 말도 있다.
오늘 산행 중 최고봉이요 진양, 사천, 고성 3개 군을 포옹하는 명산인 봉대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카메라가 없어 흔적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11] 부련이재를 향하여
봉대산 정상에서 주변 景觀을 살피고 되돌아 나오니 넓은 헬기장이 있다. 헬기장을 가로질러 내려서니 「삼베마을 주차장 3.5km / 고성군 방향」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대장이「부련이재 2.67km」로 진행하라고 한 까닭을 알겠다.
[참고자료 4-③] 죽곡마을(삼베마을)
▶ 위 치 : 경남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 개 요 : 진주시 금곡면에 위치한 죽곡마을은 오래전부터 삼베의 전통성을 이어오고 있는 곳으로 60~70대 할머니 약 20여명이 400년 전통방식 및 가내수공업 형태로 삼베를 짜며, 전통삼베 생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삼베는 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폭 넓게 사용된 직물로서 선진외국에서는 '밀레니엄직물' 또는 '신이 인간에 남겨준 마지막 건강 직물'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삼베의 기능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삼베를 이용한 상품의 종류도 2,000여가지나 된다고 한다.
죽곡마을은 주민들이 삼 삼기부터 삼베를 짜기까지, 마을입구 왼편에 위치한 공동작업장인 다목적회관에서 공동으로 작업하며 현재 20여 농가가 삼베를 생산하고 있다. 이 곳에서 삼베말리기와 삼베를 짜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삼베짜기 체험과 삼베구입도 가능하다. 다목적 회관은 삼베도구의 간이전시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마을 진입로에 김유신.최치원의 영정과 홍유후.설총,문창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인 남악서원이 있으며 마을 면적은 약 2,000평이 조금 넘고, 총 75가구에 170여명이 살고 있다.
▶ 죽곡삼베마을의 개장
삼베를 주제로 한 문화, 체험, 음식이 어우러진 농촌체험마을인 금곡면 ‘죽곡삼베마을’이 지난 29일(2008. 10. 29) 개장했다.이날 개장식은 정영석 진주시장을 비롯한 사회단체장,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죽곡삼베마을 방문객센터 앞에서 열렸다. 죽곡삼베마을은 삼베를 비롯한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우수한 삼베를 홍보하기 위해 총 사업비 22억을 들여 조성됐다.죽곡삼베마을에는 삼베공동작업장과 농특산물판매장, 삼베전시장, 단체숙박시설, 잔디광장 및 야외무대 등이 설치돼 있다. 이 마을 조성에 진주시는 시설분야를, 한국관광공사에서는 농촌체험 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했다.이 마을에서는 삼베체험(전시관 견학, 염색, 소품 만들기), 문화체험(한문교실, 예절교실, 목공예 제작, 활 만들기), 체력단련(봉대산 등산), 음식체험(삼닭백숙과 두부 만들기), 농촌체험(감 따기, 밤 줍기), 생태체험(야생화 관찰) 등 다양한 체험행사를 즐길 수 있다.한순기 문화관광과장은 “삼베로 소재로 한 농촌체험장이 드문 희소성을 잘 활용해 농촌을 활성화하려고 죽곡삼베마을을 조성했다”며 “도시민과 자라나는 아이들이 다양한 체험을 통해 농촌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진주신문(http://www.jinjunews.com)
[12] 양전산(陽田山)
19 : 10분, 봉대산을 내려 선 송림 숲 평지에 도착해 보니 사천시에서 설치해 놓은 대형 낙남정맥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부련이재 2.5km라고 되어 있는데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위치 확인을 하고 쉼 없이 진행. 5, 6분 후 51번, 52번 송전탑을 지나
19 : 30분,「處士 慶州金氏 重玉」묘가 있는 봉을 지나 또 하나의 봉에 올랐다. 『양전산』이다.
『양전산(陽田山, 310m)』은 경남 고성군 영현면 영부리와 상리면 고봉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 산의 양지쪽에 밭을 많이 일구었다 하여 『양전산(陽田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양전산』은 경상남도의 3개시군(4개면)이 접하고 있는 산으로 낙남정맥 주능선의 오른쪽(동쪽)은 진주시 금곡면(金谷面)이고 왼쪽(서쪽)은 사천시 정동면(正東面)이 된다.
[13] 부련이재
19 : 45분, 고성군 상리면 고봉리와 영현면 영부리를 잇는 2차선 포장도로로 오늘 산행의 목적지인『부련이재』에 도착을 했다. 한 시간 전쯤 미리 도착한 대장이 우리를 반긴다.
오늘 산행은 낙남정맥 5구간을 산행하는 동안 自意半 他意半으로 처음 완주를 해 본 산행이다.
[참고자료 5-①] 고성군 상리면
상리면(上里面)은 삼한시대(蔘韓時代)에는 변한(弁韓)의 성한(星韓)땅이었으며 소가야(小伽耶) 때에는 보령향(保寧鄕)에 속하였고, 고려현종(高麗顯宗) 9년(1018년)에 고성현(固城縣)으로 개칭되면서 "상리(上里)" 또는 "오산(烏山)"으로 호칭하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정할 때(고종 32년, 칙령 제98호) 고성군 상서면(上西面)으로 조정되었으며 행정구역을 고봉(古鳳), 봉곡(鳳谷), 비고곡(比古谷), 가슬(歌瑟), 오산(烏山), 동산(東山), 가동(柯洞), 척정(滌亭), 무이(武夷), 망림(望林), 구미(龜尾), 선동(仙洞), 자은(自隱), 부포(夫浦), 조동(槽洞) 등 15개 동리를 관할하였고 면사무소는 가동에 두고 있었다.
1913년 12월 19일에 오산리(烏山里) 13번지로 이전하여 면정을 보아 오다 이듬해(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 경남 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 조정할 때 상리면(上里面)으로 개칭하고 행정리를 9개 고봉(古鳳), 가슬(歌瑟), 오산(烏山), 조정(槽亭), 동산(東山), 무선(武仙), 망림(望林), 자은(自隱), 부포(夫浦)로 조정하였다.
1934년 5월 20일에 면의 교통 및 지리적 중심지인 조동리(槽洞里) 388번지에 면 청사를 이전 신축하였고 1938년 행정구역 재조정 시 "가슬"을 "신촌(新村)"으로 "조동"을 "척번정리(滌煩亭里)"로 행정지명을 바꾸었으며,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법정리 9개리에 17개 행정리 28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1982년에 현청사를 신축하였다.
상리면내에는 면의 최고봉인 무이산(武夷山) 일명 청량산(淸凉山(해발 525m) 정상(頂上) 암벽아래 신라 성덕여왕(聖德女王) 5년(서기 688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문수암(文殊菴)이 있으며 문수암의 괴암 절벽사이에 새겨진 문수보현불상이 유명하다. 특히 주변의 절경과 한려수도(閑麗水道)의 전망이 과히 일품으로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고성군 홈 / 일반형황 / 지명유래
http://www.goseong.go.kr/01goseong/0205.asp#m
[ 참고자료 5-②] 고봉리 상촌리 고봉(古鳳)마을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윗마을을 고곡(告谷)이라 하고 아랫마을을 봉곡(鳳谷)이라 이름하여 1,600년 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 고곡과 봉곡의 앞자를 따서 고봉(古鳳)이라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옛날 활(弓)을 쏘았다는 사정거리가 있고 건너편 산에 과녁판을 세웠던 것과 앞산에 "재"자가 붙은 건물이 있었기에 잿간이라는 이름이 유래되기도 하다.
[마을의 형성(形成)] 고봉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1,600년을 전후하여 맨 먼저 고성이씨(固城李氏)가 입주하고 다음으로 거창유씨(居昌劉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전주이씨(全州李氏), 평강채씨(平康蔡氏), 남평문씨(南平文氏), 경산전씨 등 현재 10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고봉 마을은 인근 사천시(泗川市) 정동면(正東面)과 경계하고 이쓰며 북쪽은 영현면과 접하고 있고 동서북(東西北)이 산으로 에워싸인 산골 마을로서 토질은 비옥하나 수원(水源)이 넉넉하지 못하다.
201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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