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밥을 먹었다.
방금한 따끈따끈한 밥은 참 고소하고 맛있다.
백제땅으로 답사를 다녀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2박3일 답사를 다녀와 보니 내가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는 일에 그래서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는일에 내가 연루되어
있었다. 꽁꽁묶여 있었다. 참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다행히 내가 해명할 기
회가있어서 있는 대로 해명했는데 들은 사람들이 알아 들었으면 다행이고, 몰라도 그만이다.
살다보니 그런일도 있구나 하고 마음에서 정리된 일인데 그간 며칠은 참으로 신경을 안쓸래
야 안쓸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내선에선 상황 끝!! 정리되었다. 그래서 오늘밤엔 내게 남
겨진 숙제를 하려고 책상앞에 앉았다. 밥까지 잔뜩먹고 제대로 될지......
1.하염없이 긴 하루
지난 4월 26일 돌이켜 본다. 2박3일 집을 비운다는 걱정에 이것저것 준비해 놓느라고 채 두
시간도 자지못하고 답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버스에서 좀 자야지 했는데 잠도 오지 않았
다.버스 창밖이 밝아오고 한참 봄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노라니 어느새 두루뭉실한 산세의 충
청도 서산 땅에 닿았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이 답사의 첫코스다. 저수지를 지나 용현계곡에 접어드니 먼저온 버스들
이 길을막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계곡위 다리를 건너 한쪽 벼랑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을향
해 계단길을 오른다. 보호각이 씌여진 마애불 앞 작은 뜰에는 수학여행온 학생들이 가득해
우리일행과 섞였다. 나는 뒤에서 우물거리고 있다가 학생들이 서서 보는 틈을 비집고 들어
가 보호각 문틀을 잡고 쪼그리고 앉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생각하고 세분의 부처님을 이
리보고 저리본다.지금이야 보호각도 씌우고 앞에 사람들이 오기쉽게 길도내고 작은 뜰도 만
들었지만 이 마애삼존불이 새겨질 당시는 계곡위의 바위벼랑일 뿐이다.
게다가 바위중에서도 가장 단단하여 다루기가 힘든 화강암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얽힌 서
양조각들은 모두 대리석이다.대리석에 비하면 화강암이 훨씬단단하고 다루기도 힘들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가운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반가상의 미륵보살,오른쪽은 보주를 받들
고 있는 관세음보살로 보는데 세분을 조각한 조각의 깊이가 깊어서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세
분 부처님의 얼굴표정은 너무나 선명하다. 가운데 부처님의 코 높이는 20cm가 넘는다고 하
니 그 화강암 바위를 깎아가며 저 세분의 생명을 이끌어낸 그석공의 공력은 나로서는 상상조
차 되지 않는다. 보호각 문틀을 잡고 앉아서 세분의 부처님과 돌아가면서 눈을 맞춰보고 웃
음을 보고 하늘거리는 옷깃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어보고 영원히 진리의 기쁨으로 타오르
는 광배의 불꽃을 보다보니 어느새 내입도 헤벌쭉 벌어져 웃고 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아는 얼굴이 없다. 아차! 모두 내려간 모양이다.나도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다 일행의 끝자락
을 잡고 한마디 아는체를 한다. "옛날에요, 문화재 관계자들이 이부근에 마애불이 있다고해
서 조사를 나왔대요, 그래서 이동네 노인분에게 이산에 부처님 새겨진것이 어디 없냐고 물었
더니 그노인분이 '글쎄유 저 위에 올라가면 산신령님 한분이 새겨져 있는데유 양옆에 본 마
누라와 첩을 데리고 있어유. 첩이 지볼에 손으로 찌르며 용용죽겠지 하니까 본마누라가 화가
나서 손에 장돌을 쥐고 던질라고 그래유' 하더래요. 그래서 이 마애불을 찾았대요."
했더니 듣고 있던 그 일행이 하는말이 "글쎄 그래도 본마누라 얼굴표정은 화난 표정이 아니
고 웃고 있던데 절대 화난 얼굴이 아니야." 그래 그랬구나. 보주를 쥐고 있는 관세음보살님
을 화가나서 장돌을 쥐고 던지려는 본마누라라고 보면 볼수도 있을텐데 너무나 밝게 웃고계
신 그모습이 선명하니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오는 이 일화가 혹 허구일수도 있겠구나 생
각이 든다. 서산마애불에서 내려와 용현계곡을 따라 조금더 들어가 보니 저 멀리 곧게 뻗은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온다. 제법 큰 들판이 펼쳐진 그곳이 보원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때
창건되어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어느때 폐사가 될때까지 오랜 세월을 자리해온
절이다 보니 그 세월만큼 영광도 높았을테고 오욕도 깊었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물들
로 봐서 이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서 지금 이 절
에 남아있는 석물은 모두 명물이어서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하였다는데 통일신라때 만든 당간
지주 고려시대 석탑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오층석탑 역시 고려시대때 만든 석조가 있다.
고려초 고승인 법인스님의 사리탑과 비석도 명품으로 남아있다.
현존하는 돌확 석조중 가장 크다는 보원사의 석조를 보며 물통이다 목욕통이다 하고있다보니
그수려하게 잘생긴 외모에 아깝게 금이 간것이 보였다. 어느해 겨울 그속에 물을 빼지 않고
그냥 놔뒀다가 물이 어는 바람에 석조도 함께 얼어서 깨졌다고 하니 결코 치장하지 않은 외
모에 당당한 품위를 담고 백제의 멋을 전해주던 보원사 터 석조의 그 오랜 세월이 너무 안타
깝다. 그외에도 1968년도에 보원사터가 발굴될때 백제시대 금동여래입상이 하나 발견되어
공주박물관에 가있고 우리나라 철불을 대표하는 철불한분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
되어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속에 많은보물을 품고있던 보원사터에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것
은 당간지주 오층석탑 석조 법인국사의 사리탑과 비석이지만 나머지 빈터가 결코 허허롭지
않다. 차지도 덥지도 낳은 4월의 부드러운 바람이 새벽머리부터 일어나 강원도 동쪽 끝에서
부터 지금의 충청도 서산땅 옛 백제의 절터이건만 유난히도 푸근한 이 용현계곡 자락에 이르
러 서성이는 우리들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깊고 깊은 백제의 이야기를 그리하여 우리들
은 천년에서 천오백년을 거스르는 시간여행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 발길은 개심사
로 향한다. 개심사로 향한 흙,돌길을 오르전 초입은 저위에 규모가 그만한 절이 있다고는 예
상할수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그져 저위에 작은 암자 하나쯤 있겠구나 싶은 풍경이다. 아름
다운 소나무들 사이로난 비탈길을 오르다 보니 긴 네모꼴 연못이 우리를 맞는다.
연못가에는 온갖 나무들이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데 연못 앞에 당당히 서있는 배롱나무 한
그루는 아직 새잎을 낼 시기가 아닌지 셀수없이 구불구불 뻗어있는 빈가지 끝까지 생명력만
을 뻗치고 있다. 아직은 빈가지지만 때만 되면 붉은 빛 목백일홍을 한꺼번에 피워내려고 하
는 생명력이 보는 이의 눈에 이글거린다. 연못위에 놓여진 나무다리를 건넌다.
그 천진한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굳이 한자말로된 절이름을 풀이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씻어지
고 마음이 열리는 듯하다. 나는 오래된 절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 주심
포계 다포집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대웅보전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힘차고 천연덕스럽게
휘어진 기둥으로 이루어진 심검당에 이끌려 댓돌위에 올라가 마루에 앉았다. 대웅전까지 올
라갈 생각도 않고 이 오래된 나무마루에 올라앉아 절밥 한그릇 얻어먹고 그대로 누워 잠들
고 싶다. 그러나 이곳은 "심검당" 수행하는 스님들의 마음의 칼을 가는곳인데 내마음속엔 먹
고자는 것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심검당의 고요를 빌려 잠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절집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린다.
이제는 마음이 급해진다. 빨리 모든걸 보고 일행들 뒷꽁무니를 따라 늦지 않게 내려가야 하
니 말이다. 여기저기 작게 난 길들을 따라 다니다 보니 종이 걸려있는 종루의 기둥조차도 심
검당 기둥들 처럼 휘어져 있다. 휘어진 저 기둥이 어찌 곧게 뻗은 기둥보다 더 당당하여 더
힘있게 보이는 지 참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우리 부부는 나중에 나무집을 짓고 사는것이 꿈
인데 저 휘어진 기둥을 흉내내어 우리집에도 저런 기둥을 세워보는 일이 가능해질까?
해우소를 가르킨 예쁜 글씨와 화살표를 따라가서 일부러 볼일도 한번 봐 본다. 귀한 경험을
한번 해본다고 한일이 절집에 수선 떤것도 모자라 오물까지 보태주고 온거이다.
아름다운 미로속을 헤매이듯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일행을 따라 내려왔다. 마음이 들떠
서 이것저것 보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아뿔싸 개심사 답사의 절정인 삼신각까지 가보지 못했
구나 연구사님 뒤 꽁무니에 차분히 따르던 일행들은 삼신각에 올랐다 내려온다 했다.
가서 본것과 안본것은 글씨한자 차이지만 보고 안보고의 차이는 세계하나의 차이다 자 이제
발길은 조선시대 성곽중 가장 온전히 보존된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둘레2km,높이5m의 이읍
성은 성 외부는 돌로 내부는 흙으로 쌓여진 성이다.
조선시대의 읍성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도 있도 조선말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때의 사연과 상
처가 그대로 남아있는곳이다 일제시대에는 면사무소가 되어 일제의 신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읍성내부에 동헌을 복원하고 조선시대 병영체험 이벤트를 갖는등 읍성안에 들어서면
조선시대로 잠깐이나마 돌아갈수 있는 분위기다.
수덕사로 향한다.
고려 충렬왕34년에 건립된 수덕사 대웅전은 현재 정확한 청건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맞배지붕에 주심포 형식을 하고 영주 부석사처럼 배흘림 기둥을 가진 건물이
다. 절집의 건축양식에 대한 공부가 안되어있던 나로서는 아는 만큼 보이다고 더 이상 보이
지 않았다. 더볼수 없으면서도 마음의 욕심은 끝이없다. 수덕사는 한국불교에서"禪之宗刹"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들어서 익히아는 선승인 경허스님.만공스님 벽초스님을 길러
낸 곳이다. 특히만공스님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않으면 잠이 안온다 한 일화나
어느 험한 산길을 한 스님과 가다가 그 동행승이 힘들어서 더이상 못간다 했더니 그때 마침
옆에서 화전을 일구던 부부를 보고는 냅다 달려가 그여자를 덥석 안고 입맞춤을 했다. 당연
히 놀란 남편은 쇠스랑을 들고 저 중놈들 죽이다고 쫓아왔을테고 엉겹결에 스님과 동행승은
고갯마루까지 힘든지 모르고 한숨에 달려왔다는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런 만공스님
이 계셨고 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정혜사가 수덕사 경내에서 덕숭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를 따라가면 나온다. 수덕사를 돌아나오며 그져 마음만 아쉬워 뒤돌아 정혜사 쪽에 눈길을
줄 뿐이었다.
2.백제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다음날 4월27일은 한성,공주에이어 백제의 세번째 도읍지였던 부여에 닿았다.
먼저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무량사 부터 들었다. 목숨을 셀수
없고 지혜를 셀수없는곳이 바로 극락이니 무량사에 들어온 우리는 바로 극락세계에 온것이
다. 조용한 아침 기운에 2층으로 이어진 극락전과 그앞의 오층석탑과 석등을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이 그대로 극락이다. 더 바랄것이 없었다.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에 이절에서 지냈던 모
양이다. 극락전 뒤로 가니 작은 전각이 몇개 있는데 그중하나는 산신각이고 당호없이 지어
진 전각안에 김시습이 직접그린 자화상인지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듯 하지만 따로 김시습을
위한 전각이 모셔져 있다. 그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천재적재능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쓰지않고 세류의 잘못된 흐름을 바로 잡으려는데 쏟아부었다는 것이그
어떤영웅의 모습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뚜렷이 오래 남아서 인가보다..자이제 본격적으
로 부여입성이다. 부여국립박물관 앞에서 문화재해설사를 만나 부여문화를 안내받았다.
박물관안에서는 당연히 백제지역에 산재해 있던 온갖 보물이 모여있고 그래서 결코 빠뜨려서
는 안될 최고의 답사지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능산리 고분군 옆 능산리 절터 공방자리에서
발견되어 세기의 보물로 일컬어지는 '금동용봉 봉래산 향로'를 운좋게도 조용히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문득 백제라는 나라는 삼천궁녀가 뛰어내린 낙화암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떨기
꽃으로 머리속에 부각되었다. 이런 향로를 만들수 있는 정신세계와 예술혼을 지녔던 백제는
그 극치의 정점에서 뚝뚝 떨어져내린 한떨기, 꽃이었다. 물론 의자왕대에 이르러 내부적을
문란해지고 쇠잔해지긴 했겠지만 백제는 한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 나타나는 세기말적이 병리
를 보이지 않은채 외세인 당나라의 힘을 끌어들인 나당연합군에 의해 아름다움을 간직한채
처연히 막을 내린것이다. 이제 부여 백제에서 결코 지나칠수 없는 유물을향해 발길을 돌려보
자. 정림사지 오층석탑을(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에서 유홍준은 "백고가 불여일부 즉 고고
춤 백번보다 부루스 한번이 더 낫다고 세속에서 말하듯이 100개의 유물과도 바꿀수 없는 위
대한 명작" 이라고 칭송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미학의 상징적 유물로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꼽은 것이다.
정림사지 부근에 버스가 다다르자 창밖으로 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담히 잘생긴 탑
의 외모를 멀리로 보면서 영화'외출'의 찰영현장에서 언뜻 배용준의 모습을 봤을때처럼 가
슴이 뛰었다.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탑이 익산 미륵사탑이라고 한다면
정림사탑은 이제 석탑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치를 확고히 한 의미있는 탑이면서 우아한 아름다
움도 품어내는 탑이다. 감은사탑이나 석가탑을 머리속에 기준으로 삼고있던 내게는 정림사지
탑 1층의 탑신부가 다소 길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나 당당함이 덜해보였다. 어쨌든 생명없
는 돌로 만든 정림사지탑이나 생명있는 배용준이나 아름답고 세련되고 잘생긴것은 좋은 것이
다. 눈맛도 시원하고 마음도 흡족하여 이제 등을 돌려 나오는데 답신부에 새겨진 글씨가 눈
에 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을 멸망시킨후 승리감에 도취되어 그 수려한 탑에 글을 남긴
것이다. 우아하고 수려한 백제문화의 정점에 생채기가 난 것이다. 괜히 한마리 바싹마른 매
처럼 생긴 미국의 부시나 검은 살쾡이 같아 보이는 미스.라이스가 떠오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냥 중얼거려본다. '당나라놈 소정방 남의 나라에 와서 한일도 없이 공
만 내세웠네. 멋있는건 알아가지고.쯧쯧쯧'
3.우리의 피라미드-무령왕릉
공주,웅진은 위례성에서 도읍을 옮겨와 다시 사비성으로 도읍이 옮겨가기전까지 63년동안 백
제의 도읍지였다. 내게 공주는 다른 그 무엇보다 무령왕의 환영으로 가득한 곳이다. 우리집
식구들을 억지로 끌고(?)전시회나 여행을 다닌중에 가장 호응이 좋았던것은 몇년전 서울예술
의 전당에서 있었던 '이집트 미이라전'이었고 또한 공주 송산리 고분에 있는 무령왕릉에 갔
을 때였다. '미이라전'에 가기 앞서 투탕카멘왕의 피라미드를 처음 발굴했을때에 얽힌 괴이
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누누히 했기 때문이고 무령왕릉 역시 발굴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이 많
기에 나자신이 그 이야기에 빠져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침 튀기며 설명하고 얘기했기 때문이
리라 .역시 유물을 유물만으로 보는것보다는 아무리 작고 하찮은 유물이라도 거기에 얽힌 스
토리를 알고 본다면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로 다시 보여지는 것 같다. 백제왕가의 묘역이었
을거라고 짐작되는 송산에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이 무너져 그자리는 소나무가 그득
한 야산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제1호분부터 6호분까지 환전히 도굴되어 그안
에 있었던 유물은 몽땅 일본으로 빼돌려져 우리로선 그안에 유물이 어떻게 얼마만큼 있었는
지 짐작조차 할수 없다. 다행히 그때 일본놈들이 발견하지 못한 무령왕릉은 1971년 7월5일
여름 장마철이 시작되기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무덤안으로 물이 스미는 것을 방지하기위
한 배수로공사 도중 한 인부의 삽이 무령왕릉의 벽돌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1500년의 정적속
에서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책에서 처녀분으로 발굴되어 벽돌로 밀폐되어 있는 아직 세
상에 열리지 않은 상태의 무령왕릉 입구사진을 보았다. 나는 지금도 그 사진을 한참씩 들여
다 보는데 아직 열리지 않아서 1500년의 세월을 그너머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입구사
진은 성철스님이 거쳐하시는 암자를 향해 걸어가시는 뒤모습 사진과 자기살에 파고들어 죽
을 아픔을 주는 모래를 끌어안아 영롱한 진주알로 만들어낸 진주조개사진과 더불어 내의식
을 사로잡는 3장의 사진이 되고 있다. 1971년 7월8일 아침 발굴단 간부였던 당시 공주박물
관 김영배 관장과 국립박물관 김원용관장이 현장에서 무령왕릉의 맨위 벽돌 한장씩 뜯어냈을
때 안에 있던 찬공기가 스며나오면서 따뜻한 바깥공기에 일순간에 결로현상을 일으켰다고 한
다. 그것은 자동차에어컨을 틀었을때 흰수증기를 내뿜는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한다. 세상에
서는 이 현상을 가지고도 기이하고 괴이하게 이야기가 만들어져 한동안 떠들썩했지만 직접
발굴에 참여했던 두 책임자가 겪은 불행한 일을 우리는 우연의 일치라고 할수 있을까? 공주
박물관 김영배관장은 현장인부에 의해 무령황릉이 발견되기 하루전인 7월4일 밤 산돼지에게
쫓겨 도망다니다가 결국은 집에까지 따라온 돼지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
단다. 그리고 사흘뒤 무덤을 열고 들어가 무덤 맨앞에서 만난 돌짐승이 꿈속에서 본 그 산돼
지의 모습과 같았을때 얼마나 놀랐을까? 그리고 발굴책임자였던 김원용관장은 무령왕릉을
판 다음해인 72년에 뜻하지 않은 일로 파산이 되었고 남의 차를 빌려터고 무령왕릉으로 가다
가 길에서 아이를 치는 등 불행한 일이 연속되었다고 한다. 세간에 큰무덤을 파면 액이 따른
다는 말이 있다는데 과연 그래서 그런일이 생긴걸까? 하여튼 그런 숱한 이야기와 삼국시대
무덤으로서는 언제 어떻게 누구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를 알수있는 오로지 한 하나의
무덤이라는 것등. 하고 들을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자 이제, 나는 이야기 하나만 덧붙이
며 셋째날 공주답사의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무령왕과 왕비의 부장품으로 발견된 금팔찌
가 있다 별치장을 하지 않았는데 우아하고 싫증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그것과 꼭같은
디자인으로 팔찌를 해서 끼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의 두아들이 결혼할때 며
느리들에게 그 팔찌를 해주고 싶다. 누구일지 나의 며느리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그우아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팔찌를 기꺼이 즐겁게 받을것이다.
카페 게시글
┏문화 답사자료실┛
3일동안 1500년전 다녀오기
orch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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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1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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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쓰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네요. 다시 한번 공부하고 갑니다.
글쓴이의 생각이 많이 담겨 값진 답사기가 된 것 같습니다. 여러 곳을 개괄하는 것도 좋지만 한 곳을 집중적으로 음미해 보는 것이 보다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읽는 즐거움 또한 행복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적극적이심 또 한번 배울랍니다.
느낀점을 공유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