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09월 19일 | 글 |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ㆍsungook@chass.utoronto.ca | 이 글은, 결론 만 제외하곤, 『한국과학사학회지』1997년 12월호에 실린 같은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최근 '과학 전쟁'(Science Wars)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제목의 필자의 긴 논문을 1/3로 축약한 것이다. 이 글에서 각주는 모두 생략했다. 보다 자세한 논의와 참고문헌은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과학전쟁"(Science War)은 최근 몇 년간 북미와 유럽의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서 화제와 논쟁의 대상이었다. "소칼의 날조"(Sokal's Hoax)와 과학전쟁에 대한 기사가 뉴욕타임스, 디 차이트, 르 몽드지와 같은 영향력 있는 신문은 물론, 사이언스(Science)와 네이쳐(Nature)같은 전문 과학학술지에 게재되었고, 1996년 가을 독일 빌레펠트에서 열린 유럽과학기술사회학회에선 과학전쟁이 학자들 사이의 규범을 어기고 서로를 헐뜯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개탄한 성명서가 채택되기도 했다. 과학전쟁이 주로 과학자와 인문학자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기에, 많은 지식인들은 이것이 스노우(C.P. Snow)가 30년 전에 지적한 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사이의 간극을 넓힐 뿐만 아니라, 이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도 과학사회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에 과학의 사회성과 객관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글은 "과학전쟁"에서 나타난 중요한 논쟁점들을 분석적,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있다. 필자는 먼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기본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고, 과학전쟁의 주요한 사건과 이슈들을 정리한 뒤에, 과학전쟁의 주요 논쟁점들을 세 가지로 분류한 후 각각에 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 결론에선 국내에서 벌어진 논쟁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다.
과학전쟁의 전사(前史): 사회구성주의와 그 비판자들 "자연과학은 얼마나 확실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한가지 답은 과학이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뉴튼의 만유인력 법칙은 지구에서도, 달에서도, 화성에서도 참이고 300년 전의 영국에서 참이듯 1997년의 한국에서도 참이다. 이러한 예에서 과학은 과학자라는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적て국소적 맥락(social and local context)은 물론, 그것을 만든 과학자를 초월해서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부각된다.
그렇지만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역사적으로" "모든"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주장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무엇보다 한 시기의 과학 지식이 자연에 대한 객관적, 보편적 진리라면 과학의 진보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엽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뉴튼물리학이 절대적인 진리이고 이에 근거한 물리학의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믿었지만 이후 상대론과 양자물리학의 발전은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보였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과학이 진보했고 또 지금도 계속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과거와 현재의 과학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과학이 보편적 객관적 진리라면 명백하게 잘못된 과학이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19세기 물리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주를 꽉 메우고 있는 "에테르"(ether)의 존재를 믿었지만, 20세기 물리학자중 이를 믿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세 번째로, 과학이 사회와 문화를 초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에도 명백한 사회성과 문화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 영국의 물리학과 프랑스의 물리학은 뉴튼의 힘(force)을 어떻게 해석하는 가를 놓고 대립했으며, 19세기 후반의 영국과 독일의 전자기학도 그 기본 개념과 테크닉에 있어서 상당히 달랐다.
이런 역사적 예들은 과거의 과학이 불완전했듯이 현재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과학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자연의 실재를 한 측면에서 이해한, 실재의 한 모퉁이만을 이해한 불완전한 지식임을 시사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을 역사 속에 위치시켰을 때 과학은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객관적, 보편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과학 철학자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철학적인 명제로 정교화시켰다. 콰인(Williard V.O. Quine)은 과학의 이론이 실험데이터에 의해 충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충분하게 결정된다는 "불충분결정론"(underdetermination theory)을 설득력 있게 제창했고, 핸슨(R.N. Hanson)은 과학자의 관찰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을 제시했다. 한편, 1962년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는 과학사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과학 지식이 누적적으로 진보한다는 믿음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쿤은 한 시대의 과학적 가설, 법칙, 이론, 믿음, 실험의 총체를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명명했는데, 그에 의하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의 전이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종교적 개종과 흡사한, 비합리적인 과정이었다. 또 쿤은 이 패러다임의 변환을 통해 새롭게 얻는 것도 있지만 잃어버리는 과학도 많음을 보였으며, 오래된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의 관계를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으로 특징 지우면서 패러다임의 전이가 단선적인 "진보"로만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했다.
쿤, 콰인, 핸슨 등의 철학적, 역사적 주장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 데이빗 블루어(David Bloor), 배리 반스(Barry Barnes), 데이빗 에지(David Edge), 도날드 맥캔지(Donald McKenzie), 스티븐 쉐이핀(Steven Shapin)등 에딘버러 대학의 과학학 프로그램 멤버와 해리 콜린스(Harry Collins), 트레버 핀치(Trevor Pinch) 등에 의해 사회과학적인 명제로 정리되었다. 실험 데이터가 과학 이론을 충분히 결정하지 못한다는 불충분결정이론은 사회적 이해관계(social interest)가 실험 데이터와 결합해서 이론을 결정한다는 "사회적 결정론"으로 변형되었다. 이에 덧붙여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과학이 객관적, 보편적이 아니라 주관적, 사회적임을 보이는 증거로 원용되고 쿤의 불가공약성은 과학에서의 서로 다른 주장들의 진위가 단지 상대적(relativistic)일 뿐이라는 상대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데이빗 블루어는 과학이론의 발달이 사회적 요소에 의해 인과적으로 설명되어져야 하고, 이 사회적 요소가 성공한 과학과 실패한 과학, 합리적인 과학과 비합리적인 과학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폈다. 이렇게 과학의 내용이 사회적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는 과학사회학의 주장은 이후 블루어가 명명한 대로 "스트롱프로그램"(Strong Program), 또는 SSK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과학지식의 사회학),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 of science),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 social constructivism), "에딘버러 학파"라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과 미국에서 기존의 과학사회학을 빠르게 대체해 나갔다.
과학이 객관적, 보편적인 진리라면 이데올로기, 철학, 종교, 정치て경제て군사적 이해와 같은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진리의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SSK 과학사회학은 이에 대한 대답을 두 가지 다른 방향에서 찾았다. 하나는 과학의 법칙, 이론이 실험 데이터만으로는 충분히 결정되지 못한다는 "불충분결정론"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다른 사회적て문화적 요소들이 과학자의 실천, 판단에 개입하면서 과학 연구의 결과가 "안정적인 것으로 됨"(stabilize)을 보이는 것이었다. 과학적 요소와 사회て문화적 요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비슷비슷한 요소로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향은 진리와 이데올로기, 참된 과학과 오류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함으로써 사회て문화와 과학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 과학이 문화의 일부임에 동의해도, 실재론자(realist)들은 과학을 패션과 같은 유행으로만 볼 수 없는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과학이 자연의 "실재"(reality)를 포착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튼의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단순히 다른 자연관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보다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것인데, 그 이유는 뉴튼의 물리학이 자연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만유인력"을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나 문화가 과학의 인식론이나 진리의 발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구성주의의 근본 명제는 결국 과학은 자연의 실재를 포착하는 것이라는 실재론의 전제와 매끄럽지 않은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몇몇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실재론"(anti-realism) 또는 "비실재론"(irrealism)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들은 실재에 대한 과학지식이 자연에 존재하는 무엇을 마치 동전을 줍듯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구성된 것"(constructed)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1980년대를 통해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와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이 대표적인 반 실재론자의 진영을 형성했다. 라투어는 스티브 울거(Steve Woolgar)와 함께 저술한 실험실 생활(Laboratory Life, 1979)에서 인류학의 방법론을 원용, 미국의 사크 연구소(Salk Institute)라는 유명한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실천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라투어는 사크 연구소 연구원들이 노벨상을 수상한 TRF라는 호르몬의 발견이 서로 다른 두 연구 팀 사이의 절충(negotiation)과 합의(consensus)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 콜럼부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듯 발견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피커링은 쿼크의 구성(Constructing Quarks, 1985)에서 물리학자들이 20세기 입자물리학의 최고 개가라고 간주하는 기본 소립자 쿼크(quark)의 발견이 '이것이 있다면 입자물리 이론과 실험에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라는 입자물리학자들의 기대와 합의가 만들어낸 구성된 "결말"(upshot)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실재론의 경향은 "과학적 진리는 과학자들이 참이라고 공유한 믿음"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극단적인 구성주의의 명제의 기초가 되었다.
상대주의적 구성주의, 또는 SSK 과학사회학은 80년대와 90년대를 통해 과학사회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방법론이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참신한 시각을 제공했다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연구는 과학지식의 절대성의 신화를 깨버림으로써 왜 과학에서 논쟁이 많은가, 왜 과학자들간에도 중요한 이슈들 --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 에 대해 합의가 어려운가라는 문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시각을 제공했다. 이들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논쟁점을 놓고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의 명제, 주장이 사실 그렇게 튼튼하지만은 않은 기반 위에 서있음을 보였던 것이다.
과학전쟁은 1990년대 초엽 이들의 연구를 몇몇 과학자들이 비판하면서 불이 붙었고, 이제 그 본격적인 논쟁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과학전쟁" 개괄, 1992-1998 1980년대를 통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 과학문화학의 연구와 주장을 몰랐거나, 알아도 무관심했거나, 관심이 있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이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에 대한 과학자의 반론은 영국 런던대학의 생의학 교수인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가 저술한 과학의 비자연적 본질(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이라는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 개설서였다. 책의 첫머리부터 월퍼트는 과학이 특별한(special and privileged) 지식임을 강조했다. 그는 과학이 우리의 시각, 경험, 직관 등에 의존하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비자연적"(unnatural) 사고 -- 수학의 사용, 복잡한 실험 데이터의 해석, 추상적 개념의 사용 등을 요구하는 --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상식에 반(反)하는 과학의 특성이 과학을 일반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이런 몰이해가 상대주의적 과학사회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월퍼트가 과학이 비자연적인 특별한 지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의도하는 바는, 과학과 다른 지식사이의 위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과학이나 인간의 다른 지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자들의 입장을 견제,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SSK 과학사회학을 "반-과학"(anti-science), 이들을 "과학을 단지 수사학, 설득, 권력의 추구"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고, 이들의 상대주의가 현대 과학과 원시 사회의 신화적 자연관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인류학의 (몰)이해에서 기원했다고 역설했다. 월퍼트는 신화적 자연관과 근대 과학의 차이를 길게 설명하면서 과학적 분석은 실재(reality)에 닻을 내리고 있고, 따라서 객관적이며, 결과적으로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지식이라고 단언했다. 과학의 진보는 사회て문화적 요인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과학자의 노력과 사고에 근거한 내적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과학이 사회て문화적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는 모든 주장을 상대주의, 회의론으로 돌리고 있다.
월퍼트의 책이 나온 다음 해 과학자사회에서 스타급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전자기력과 약력의 통일로 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태초의 삼분간의 저자)가 최종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 재판, 1993)이라는 저서에서 과학에 대한 제반 철학적 입장과 사회구성주의를 다시 비판했다. 먼저 그는 근대 철학이, 특히 20세기 과학철학이 과학자에게 미친 영향이 거의 전무하다고 하면서 과학에서 철학 무용론을 강조했다. 철학이 과학에 미친 영향의 과소평가는 곧바로 철학이외의 다른 사회て문화적 요소가 과학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과학의 진리는 실재에 대한 과학적 '타협'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합의"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이 그의 표적이었다. 와이버그는 20세기 후반의 입자물리학의 발전을 사회구성주의의 방법론으로 기술한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의 쿼크의 구성(Constructing Quarks)을 주 비판 대상으로 선택한 뒤, 입자물리학의 이론, 법칙, 심지어는 몇몇 "실재"(entity)가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피커링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1994년은 본격적으로 과학전쟁이 불붙기 시작한 해였다. 이 해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생물학 연구소인 우즈홀 (Woods Hole) 해양생물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낸 폴 그로스(Paul Gross)와 럿거스 대학의 수학자인 노만 레빗(Normal Levitt)이 SSK 과학사회학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고등미신(Higher Superstition)이란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기서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과학론자, 페미니스트 과학론자, 극단적인 환경론자, AIDS 활동가, 다문화주의자(multiculturalist)들을 싸잡아서 신좌익의 뒤를 잇는 "강단좌익"(academic left)으로 규정, 이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난했다. 강단좌익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골자는 1) 강단좌익 대부분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2) 과학에 대해 조금 아는 경우도 과학을 (의도적으로) 오해한 경우가 태반이며, 3) 이런 무지와 오해는 과학을 왜곡된 모습으로 그리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 과학사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로스와 레빗은 고등미신의 출판의 여세를 몰아 1995년 여름 뉴욕 과학아카데미의 후원 하에 초대형 학회를 개최했고, 주로 과학자들로 구성된 발표자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을 UFO 광신론자, 창조론자, 민간의료와 같은 대체의료(alternative medicine) 신봉자와 함께 싸잡아서 "반과학"(anti-science)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대항해서 그로스와 레빗의 고등미신의 대표적인 표적이었던 "소샬텍스트"(Social Text)의 편집인 앤드류 로스(Andrew Ross)는 자신의 소샬텍스트의 한 호를 "과학전쟁"이라는 제목하에 출판하는 계획을 세웠고 샌드라 하딩, 스탠리 아로노위츠같이 역시 고등미신의 비판의 대상이었던 저자들의 반론을 모은 뒤 1996년 봄에 이를 출판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소샬텍스트의 "과학전쟁" 호에 논문을 기고했던 기고자 중 한 명인 앨런 소칼(Alan Sokal)이 자신의 논문이 엉터리 날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것이다. 소칼의 인터뷰는 과학사회학 진영에 터진 "폭탄," 소칼의 "화염병"등으로 묘사되며 유력 일간지의 문화면과 사회면을 장식했고 과학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소칼은 스스로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좌익지식인, 국제주의자임을 자청하고 있는 뉴욕대학의 수리물리 교수였다. 그는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이 과학을 상대적, 주관적으로 만들고 이것이 "진리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합의하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사회이론의 기반이 되는 것을 참기 힘들었음이 자신이 "날조"를 택한 동기라고 밝혔다.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과학에 대한 주장의 허구를 밝히기 위해 엉터리 논문을 써서 이들의 학술지에 출판하는 방법을 택한 소칼은 "경계선을 넘나들기: 양자 중력의 변형적인 해석학을 위해서"(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s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라는 이해하기 힘든 제목에 각주가 100개가 넘고 참고문헌이 200개가 넘게 달려있으며 다른 논문이나 책에서의 인용으로 가득한 긴 논문을 써서 소샬텍스트에 기고했다.
이 논문에서 소칼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을 간단히 소개한 뒤에 아직도 과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양자중력이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며 해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에선 해방적인 포스트모던 과학의 특징으로 1) 비선형성(nonlinearity)과 비연속성의 강조, 2) 인간과 자연, 관찰자와 대상, 주체와 객체의 구분의 초월과 해체, 3) 근대과학의 특징인 정적인 근대과학의 특성과 위계의 해체, 4) 상징과 표현의 강조, 마지막으로 5) 전통과학의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를 부정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소칼은, 만일 포스트모던한 사회구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이 학문이 엄격한 사고보다는 그럴듯한 입발림과 과학자를 자신들의 동지로 얻을 수 있다는 이점만을 선호한다면 이 엉터리 논문을 눈치채지 못하고 출판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소칼은 이러한 논리의 허구의 증명을 통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세계는 존재하며, 이 세계의 특성은 단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사실과 증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소칼은 합리적 사고와 자연, 사회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정확한 분석이 사회의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싸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소칼 사건은 "와이즈 사건"(Wise Affair)라고 불린 충격적인 사건의 전주곡이었다. 소칼의 날조가 밝혀진 후 스티븐 와인버그는 "뉴욕 서평지"(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긴 글에서 소칼을 칭찬한 뒤에 소칼의 날조가 모든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 허무맹랑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와인버그에 대해 몇 사람이 같은 잡지에 반론을 게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 교수 노턴 와이즈(Norton Wise)였다. 와이즈는 1997년 초에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 (아인슈타인이 재직했던 곳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연구소)에 있는 사회과학스쿨의 과학학(Science Studies) 교수직에 추천되었다. 과학사학계에서 와이즈는 명성과 실력을 인정받는 학자였지만, 고등연구소의 과학자들과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와인버그의 반대로 임용이 무산되었다. 이 과학학교수직은 브루노 라투어도 추천되었다가 과학자들의 반대로 임용이 무산되었던 자리기도 했다.
과학전쟁의 세 가지 논쟁점에 대한 분석적, 비판적 평가 과학전쟁에서 논쟁자 사이의 의견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던 첫 번째 문제는 사회나 문화가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라는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트롱프로그램, SSK 과학사회학은 사회て문화가 과학의 내용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출범했다. 그렇지만 대부분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과학전쟁에서 SSK 과학사회학을 비판했던 과학자들도 과학자의 과학활동이 사회적 활동이고, 이는 제반 사회적 영향하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과학의 내용, 진리"가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에 매우 비판적이다. 과학의 이론이나 법칙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어렵게 "발견"하며, 과학의 방법이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과학자의 주관, 편견, 믿음을 하나씩 제거해서 순수하게 객관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있는 이들에게 이런 과정에서 사회て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변수로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가지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과학을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진리의 발견으로만 기술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맥스웰 전자기학을 예를 들어보자. 뉴튼 역학과 더불어 고전 물리학의 기본인 맥스웰의 방정식은 전류와 이 주변의 자기장의 관계를 그 일부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전류는 언제부터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는가? 전류는 19세기 초엽 볼타가 전지를 발명한 이후 과학자들의 도구(tool)이자 연구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그 이전까지 전기를 연구한 수많은 과학자에게 전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 전반부를 통해서 과학자들은 전류를 구성하는 실재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했지만 이것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밝혀내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맥스웰은 전류라고 부르는 것은 에테르(공간을 메우고 있는 가상적인 실재)의 전자기 장(場)이 만들어낸 하나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이러한 가상적인 실재인 에테르의 특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더 놀라운 것은 이 방정식의 조합으로부터 "전자기파"라는 새로운 종류의 파동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유도되었다.
이렇게 인공과 자연이라는 것은 실험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과학자들의 실천과 기구를 매개로 복잡하게 얽혀서 발전하는 형태를 보인다. 만일 과학자들의 실천이 자연에 존재하는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서 궁극적인 실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점에서 가능한 이론적, 실험적, 기술적인 제반 요소를 취사선택해서 그 시점에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적인 자연을 가장 잘 기술하는 이론,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이 과정에 사회て문화적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허셸이 1800년 적외선을 발견한 이후 독일의 물리학자 리터는 조금은 신비적인 독일 자연철학의 "극성"(polarity) 이론에 근거해서 붉은 색의 밖에 적외선이 있다면 보라색의 밖에는 자외선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눈에 안 보이는 자외선의 화학반응을 검출함으로써 이 존재를 확인했다. 리터는 허셸의 적외선, 자신이 알고 있던 빛의 다양한 화학반응, 독일의 독특한 자연철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스펙트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과학자의 실천 속에서 과학적 요소와 사회て문화적 요소 사이의 간극은 상당히 좁아짐을 볼 수 있다.
과학전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두 번째 문제는 "카오스 이론이 포스트모던주의를 지지하는가"라는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의 사회て문화적 함의에 대한 것이었다. "버터플라이 효과"에서 볼 수 있는 카오스 이론의 상호연관성, 비선형성, 무질서 속의 질서의 추구와 같은 특성이 거대 담론을 해체하고, 분절된 개체간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고, 복잡한 경험을 단순화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철학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리오타드(Lyotard)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에 의해 지적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차이는 특히 소칼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소칼은 앤드류 로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이유가 양자중력과 같은 첨단 과학이론이 해방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한다는 자신의 날조된 입발림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연 과학과 사회て문화이론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로스와 레빗 역시 자신들의 고등종교에서 과학에서 사회 문화적 함의를 찾으려고 하는 대부분의 시도를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기원한다고 결론지었다.
"자연"에 대한 추상적인 과학이 "사회"의 규범이나 윤리, 사람이 사는 방식에 대해 직접적인 함의를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약 100여년 전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이것이 4차원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았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세계는 3차원의 공간과 이것과 무관한 시간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그의 철학, 사회이론에서 자연과학의 해석에 대해 잘못이나 실수를 범했다고 해서, 그 철학, 사회이론이 전부 틀렸다고 비난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데리다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해석이 과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고 그의 모든 철학체계가 전부 엉터리인 양 몰아붙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볼테르가 뉴튼 과학에 무지했다고 사상가로서의 그를 경멸할 이유는 없다. 이는 역으로 상보성이론에 입각한 닐스 보어의 원자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너무 단순했다는 사실에서 그의 상보성 이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과학으로부터 얻어진 철학적, 종교적, 사회 문화적 함의는 제한적인 함의로서 받아들여야지 그것이 과학에서 얻어졌다고 무조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과학은 과학이고 사회는 사회이기 때문에 무조건 잘못되었다 하는 것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와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소칼이나 그로스와 레빗은 주로 인문학자, 특히 포스트모던 인문학자들이 과학의 의미를 자신들의 철학, 사회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왜곡했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음에 반해 불확정성 원리의 철학적 의미를 설파한 하이젠버그나, 상보성이론의 사회적, 역사적 중요성을 주장했던 닐스 보어, 비평형 상태의 화학의 철학적, 인식론적, 사회적 의미를 대중을 상대로 홍보한 프리고진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대한 태도는 "과학에 대해선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조금 확장하면 "과학의 사회적 이용, 그 결과, 책임에 대해서도 과학자가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과학지상주의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생각이다.
과학전쟁을 통해서 논란이 되었던 마지막 이슈는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에 대한 것이다. 소칼은 SSK 과학사회학자들이 자연에 실재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어떤 설명도 다 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SSK과학사회학의 몇몇 극단적인 주장을 SSK 과학사회학의 전부, 또는 대표적인 주장이라고 간주한 결과였다. SSK 과학사회학자 가운데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자연과학의 진리가 단순히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에 불과하며 따라서 현대 과학이나 고대의 신화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필자가 아는 바로는, 아무도 없다. 많은 경우 이들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진리, 법칙, 새로운 실재(entity)들이 많은 경우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며 이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합의"가 개입될 수도 있다는 (또 종종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TRF(thyrotropin releasing factor)라는 호르몬의 발견에 대한 라투어의 반실재론은 비판의 표적이었고, 이를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SSK 사회학자들은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인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유래했다. 그렇지만 라투어가 던진 문제는, 사크연구소의 과학자들이 한 번도 검출된 적이 없었던 TRF라는 물질을 언제, 어떤 방법을 통해 발견했음을 알게 되었고, 왜 다른 과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라투어는 당시에 사크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다른 그룹의 과학자들과 같은 주제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발견했고, 이 두 그룹사이에서 서로의 데이터를 놓고 그 데이터의 정당성에 대해 논쟁이 있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어느 순간 두 그룹이 어떤 특별한 종류의 데이터가 TRF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동의했음을 알아냈다. 라투어의 분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과학적 "발견"이라는 것은 종종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과학자 사회 속에서 인정된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과학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이런 복잡한 사회적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한 측면에서 보면 "실험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기기의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에 대한 두 팀의 합의는 TRF라는 호르몬을 존재하게 했다"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라투어는 이를 "TRF가 이 두 그룹의 합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구성주의의 명제로 표현했고, 이는 과학자들의 공격 이전에 SSK 과학사회학, 과학철학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분명한 것은 반실재론을 신봉하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많은 SSK 과학사회학자들이 스스로를 상대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자들과 대다수 과학자들과의 차이는 아마도 과학자들이 "과학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반면, 과학사회학자들은 이에 대해 매우 유보적인,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과학이 발전하고 있다는 역사는 우리에게 한 시대에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되던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오류로 판정되고 잊혀지는 예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에도 데카르트의 역학, 플로지스턴 이론, 뉴튼의 빛의 입자설, 칼로릭 열이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힘의 보존 법칙, 에테르 이론 등 수 많은 과학이론, 법칙이 이후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러한 예를 보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있는 이론 중 50년 뒤에도 살아남을 이론이 무엇일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과학자와 SSK 과학사회학자의 입장의 차이는 "과학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과학은 한 시기에 자연현상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로 바꾼다면 상당히 좁혀질 것이다.
결론을 대신해서 1997년부터 북미와 유럽의 학자들은 과학전쟁이 서로를 헐뜯는 식이 아닌 과학자와 과학연구가 사이의 대화와 토론을 증진시킴으로써 과학과 사회의 이해를 높이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국내에서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오세정 교수와 국민대학교에서 과학사회학을 전공하는 김환석 교수사이에 『교수신문』의 지면을 통해 과학의 객관성과 사회적 영향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발단은 현대과학이 일으키는 제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참여해서 과학의 민주화를 꾀해야 한다는, 사회구성주의의 대안적 과학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김교수의 주장을, 자연에 대한 보편적,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과학에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은 있을 수 없다는 오교수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각각 세 번에 걸친 입장 개진과 한림대 송상용 교수의 정리로 매듭지어진 이 논쟁은 서구의 과학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인신공격과 비방이 없었고, 과학자와 과학사회학자와 같은 과학학연구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현금의 입장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이후 과학과 과학학(Science Studies)사이의 접촉의 더 풍부한 접면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전쟁"은 국내에선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세정 교수와 김환석 교수의 각각의 입장과 그 차이는 그들의 글에 충분히 자세하고 친절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국내 논쟁에서 언급된 "과학"이 -- 예를 들어 19세기 빛의 속도에 대한 실험과 상대론의 탄생, 아인슈타인의 광량자 이론, 산소의 발견 등 -- 현대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서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과학에는 이런 "엄밀한"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보통 담론과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덜 엄밀한 과학도 많다.
얼마만큼의 음주가 산모에게 해로운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이산화탄소인가 아니면 수증기인가? 동성연애는 유전인가 아니면 사회적 환경이 만든 것인가? 여성 과학자보다 남성 과학자가 많은 것은 남-녀의 두뇌차이에 근원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한 것인가? 다중인격이란 정신분석학의 개념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 아닌가? 식수에 포함될 수 있는 화학물질의 기준치는 누가 어떤 근거로 정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과 관련된 과학분야의 -- 소위 의학과 생물학과 같은 "사람에 대한 과학분야"(human sciences)가 대부분이지만 환경학, 독성학(toxicology), 화학의 일부도 포함하는 -- 지식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과학 내적인 요소와 사회문화적 (그리고 종종 정치경제적) 요소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그려지지 않는다. 과학과 정치는 뭉뚱그려져서 이런 과학내용을 규정하고, 이렇게 구성된 과학은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 사회 전반에 다시 큰 영향을 미친다. 과학지식과 권력(power)의 상호작용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역으로 지식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그런 예이다.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이란 얘기가 보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영역은 빛의 속도의 측정이나 산소의 발견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인간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학일 것이다. 이런 과학지식의 형성과정에 대한 과학사회학자들의 분석과 과학의 사회적 영향에 관심이 있는 과학자들과 시민의 만남은 보다 지식과 정책을 동시 형성함으로써, "민주적인" 과학과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기술사회학의 뿌리내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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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과학기술이 우리의 사회구조와 일상생활에서 지니는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이미 널리 상식화되어 있다. 오늘날 회자되는 ‘정보지식사회’ 혹은 ‘생명공학 세기’라는 용어들 속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과학기술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학문적 이해는 비교적 최근에야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그 체계와 깊이는 미흡한 점이 많다. 다만 과학기술에 관한 사회적 연구 혹은 줄여서 ‘과학기술과 사회’(Science, Technology & Society) 내지 ‘과학기술학’(Science & Technology Studies)이라고 불리는 학제적 분야가 서구에서는 기존의 ‘두 문화’ 혹은 개별 분과학문의 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합학문으로서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면서 1970년대 이후 맹렬히 성장하고 있는 중이어서 기대를 던져주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과학기술학에 대한 관심이 커가고는 있으나 대학의 완고한 ‘두 문화’와 학과별 체제는 이러한 학제적 분야가 싹트고 성장하는 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국내의 대학에서는 과학기술학이 종합학문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과학과 기술에 관한 역사, 철학, 사회학, 경제학, 관리학 등 개별 학문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자기 영역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식으로 각개약진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서구에서 과학기술학이 하나의 종합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동력을 제공하고 각 학문간의 매개고리 역할을 했던 것이 과학기술에 관한 사회학적 접근이었는데 반해, 국내에서는 이 부문의 취약으로 인해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필자는 평소 안타깝게 여겨 왔다. 다행스럽게도 작년과 올해 국내에서도 몇 권의 번역서와 국내 사회학자에 의한 저서들이 출간되어 이런 공백을 메우는 데 기여를 하였다. 예컨대 로버트 K. 머튼의 <과학사회학>(Merton, 1998), 앤드루 웹스터의 <과학기술과 사회>(Webster, 1998), 위베 바이커 등의 <과학기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Bijker, et. al., 1999), 데이비드 블루어의 <지식과 사회의 상>(Bloor, 2000) 등이 번역되었으며, 이영희교수의 <과학기술의 사회학>(2000), 윤정로교수의 <과학기술과 한국사회>(2000), 그리고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에서 펴낸 <진보의 패러독스: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하여>(1999)가 이에 해당한다.
이 글은 그중 올해에 출간된 블루어, 이영희, 윤정로 이 세 사회학자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최근의 과학기술사회학이 지니는 특징과 쟁점들을 논의하고 국내에서의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이는 이제야 막 싹이 튼 국내에서의 과학기술사회학 연구를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앞으로 이 중요한 분야에 더 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들어 좋은 연구성과를 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고 기술결정론이 학계에서마저 팽배한 곳에서 과학기술사회학을 통하여 이런 고정관념과 그로 인한 현실적 폐해들을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필요성은 절실하기 때문이다.
2. 데이비드 블루어의 <지식과 사회의 상>
2년 여 전에 필자가 서울대 물리학과 오세정 교수와 더불어 과학의 사회적 구성에 대하여 <교수신문> 지상을 통하여 논쟁을 벌였을 때, 필자는 정작 국내에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저서가 없다는 점을 아쉽게 느꼈었다. 그리고 소위 ‘과학전쟁’으로 유명해진 미국 물리학자 소칼(A. Sokal)의 저서 <지적 사기>의 번역본이 올해 초에 출간되면서 주목을 끌었을 때도, 이제 과학지식사회학은 국내에 제대로 학문적인 소개도 안된 채 오해로 점철된 이데올로기적 비판부터 받는구나 하고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이런 아쉬움과 탄식을 덜어줄 책이 번역되어 나왔는데, 과학지식사회학을 최초로 열어 젖혔던 에딘버러학파 ‘스트롱 프로그램’(Strong Program)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데이비드 블루어의 <지식과 사회의 상>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을 사회적 요인과는 무관하게 과학 내적인 논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것으로 보았던 전통적인 과학철학과, 과학지식의 내용보다는 과학활동의 제도적 조건을 규명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기능주의적 과학사회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과학연구의 기획이다. 그중에서도 ‘스트롱 프로그램’은 사상과 지식의 사회적 기초를 탐구해온 지식사회학의 접근을 과학지식의 설명에 확장하여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는 데 특징이 있다. 지식사회학은 마르크스(K. Marx)의 이데올로기 이론이나 뒤르켕(E. Durkheim)의 종교사회학 연구에서 시작되었고,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의 막스 셸러(M. Scheler)와 칼 만하임(K. Mannheim)에 의해서 본격적인 학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기존의 지식사회학에서는 대체로 종교나 정치사상 및 철학을 주로 다루어 왔을 뿐 자연과학은 초사회적인 보편성을 지닌다고 보아 탐구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그런데 ‘스트롱 프로그램’은 자연과학 역시 사회적 기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경험적인 분석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블루어에 의하면 과학지식사회학의 방법론적 원칙은 다음의 네 가지이며, 이를 따를 때 다른 모든 과학분야들과 다름없는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지식을 낳은 원인을 밝히는 인과적 설명을 추구하고(인과성: causality), 둘째로 참된 지식/거짓된 지식 모두를 설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공평성: impartiality), 셋째로 참/거짓 지식 모두에 대해 동일한 유형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하고(대칭성: symmetry), 넷째로 이러한 원칙들은 과학지식사회학 그 자체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성찰성: reflexivity)는 것이다. 블루어는 이러한 원칙이 지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객관적 방법이란 점에서 지식사회학 일반의 원칙이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과학을 비판하거나 까발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과학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블루어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초판이 나온 지 2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과학주의자들의 거센 비판에 시달려 왔고 그 가장 최근의 사건이 ‘과학전쟁’이다. 그러나 자연을 칭송하거나 비판하려는 규범적 태도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과학을 ‘반자연’이라 부르지 않듯이, 과학을 칭송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과학지식사회학을 ‘반과학’(anti-science)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스트롱 프로그램’에 대한 과학주의자들의 비판은 오해에 기반한 피상적인 것이 아니면 자신이 추구하는 기득권과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한 숨은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보다 주목해야 할 학문적 비판은 1990년대 초반 이후 과학기술학 내부에서 나타났는데, 특히 프랑스의 미셸 깔롱(M. Callon)과 브뤼노 라투르(B. Latour)에 의해 제창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과의 논쟁은 과학지식사회학의 목표와 방법은 물론 과학기술학 전반의 방향과 성격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심오한 쟁점을 담고 있다(Latour, 1993; Bloor, 1999; Latour, 1999).
블루어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자연에 대한 지식은 사회를 통해 구성된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인다. 즉 합리주의적 과학철학에서는 자연 자체가 진리를 체현하고 있고 이러한 자연이 천부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감각(과 이성)에 자신을 반영한다고 주장하지만, 블루어는 자연 자체는 도덕적으로 공허하거나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참된 지식 즉 ‘진리’이냐에 대한 판단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제도화된 하나의 규약(convention)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지식이건 거짓 지식이건 모두는 사회적 종류의 원인을 갖는다. 이에 반해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라투르는 블루어가 합리주의적 과학철학 못지 않게 자연/사회라는 근대적 인식론의 이분법에 매달려 있다고 비판한다. 즉 ‘자연’과 ‘사회’라는 기존 개념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고서 단지 ‘자연’에 부여되었던 과학지식의 결정력을 ‘사회’에 부여하는 것으로 대체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투르에 의하면 ‘자연’이 무엇이고 ‘사회’가 무엇인지는 미리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이질적 행위자들이 과학적 실천(예: 실험) 속에서 서로를 매개하고 번역하여 만들어지는 연결망의 결과이다. 따라서 ‘자연’이든 ‘사회’든 중립적인 것은 있을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과학의 설명변수는 아니며, 설명변수가 있다면 그것은 이질적 행위자들의 이러한 행위일 뿐이다. 이에 대해 블루어는 비인간에게 인간과 같은 행위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소박한 실재론에 빠지는 일이며, 스트롱 프로그램에서도 자연이 과학지식에 아무 영향을 못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규약을 통해 다양하게 이론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중 어느 주장이 옳은지는 쉽게 결론을 내릴 성질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쳐야 할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면에서 이번에 번역된 블루어의 저서는 국내에서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둘러싼 논의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더욱이 번역자인 김경만교수가 까다로운 내용과 표현의 원저를 아주 성실하게 비교적 무리 없는 우리말로 번역을 해주어 독해의 어려움을 크게 덜어준 것에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더 많은 과학기술사회학의 명저들이 연이어 번역되기를 희망한다.
3. 이영희의 <과학기술의 사회학>
블루어의 저서가 새로운 과학사회학을 열어젖힌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면, 국내의 학자가 쓴 과학기술사회학 분야의 첫 저서가 이영희교수의 <과학기술의 사회학>이다. 이교수는 본래 노동사회학․산업사회학이 주된 관심분야였으나, 필자의 권유로 지금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 합류한 이래 필자와 더불어 국내에 과학기술사회학을 소개하고 4년 전부터 ‘과학기술과 사회(STS) 연구회’를 만들어 이 분야의 확산에 함께 노력해온 처지라 이번 저서 출간은 필자에게도 감회가 남다르다.
이교수의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제1부에서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다루고 있다. 특히 블루어의 저서가 예시하듯 최근의 과학기술사회학에서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의 공과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어 흥미롭다.
제2부에서는 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사회적 쟁점들을 노동, 조직, 여성, 정보화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2장에서는 신기술의 도입이 작업조직에 어떤 변화를 미치는지 분석하고, 3장에서는 정보통신기술의 확산에 따른 기업조직 및 생산방식의 변화와 그로 인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 4장에서는 과학기술과 여성 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 접근을 소개하고 있으며, 5장에서는 정보사회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소개하고 바람직한 정보사회 형성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하여 기존의 정책과는 다른 새로운 함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6장에서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경제주의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가 과학기술정책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7장에서는 과학기술 대중화의 새로운 모델로서 시민참여에 기반한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를 소개하고 있다. 8장에서는 우리나라 국가혁신체제의 구조와 문제점을 ‘엔지니어링’의 관점이 아니라 ‘기술-사회 연결망’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최근에 서구에서도 과학기술사회학의 실천적 함의와 관련하여 관심이 높은 과학기술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9장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조하는 ‘시민과학론’의 논리와 실천을 소개하고 있으며, 10장에서는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해서 그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11장에서는 기술논쟁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의 사례로 몇 해 전 국내에서 뜨겁게 전개되었던 전자주민카드 논쟁을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2장에서는 기존의 지배적 생산패러다임인 기술중심적 생산체제가 아니라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생산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조건에 대하여 유럽에서 진행된 논의와 그것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이교수의 저서가 척박한 국내의 학계 풍토에서 어렵게 과학기술사회학의 중요한 주춧돌 하나를 놓은 노작(勞作)이라고 평가하지만, 몇 마디 비평을 덧붙임으로써 앞으로 이교수의 작업은 물론 국내 과학기술사회학 연구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약간의 시사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러 가지를 논의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필자가 생각할 때 이교수의 저서가 지니는 핵심적인 강점과 약점 하나씩만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책 전체를 통해 관통하는 정신과 문제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기술사회학을 단지 또 하나의 ‘학문을 위한 학문’ 즉 아카데미즘으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현대사회에서 낳는 여러 문제와 위험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해결을 돕는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실천적 학문으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사실의 서술이나 문제점 분석에 그치지 않고 책의 곳곳에서(거의 모든 장에서) 실천가능한 ‘대안’의 제시에 애써 노력하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이를 과학기술과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데서 찾고 있는데, 즉 과학기술이 보다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을 하려면 과학기술을 전문가의 통제에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대중이 참여하는 민주적 통제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과학기술에 관한 의사결정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 여성, 시민단체와 일반대중 등이 참여해야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기술의 개발과 활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일반적 논리가 바로 ‘시민과학론’이고 그 구체적인 제도화와 모델로서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기술영향평가, 합의회의, 과학상점, 대안적 생산체제 등이다. 이 면에서 사회학적 논의에 기반한 그의 과학기술론은 흔히 오해되듯 ‘반과학’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민주적인 통제와 재구성 즉 ‘대안과학’(alternative science) 내지 ‘과학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science)라 부르는 것이 옳다. 필자 역시 이러한 관점에 완전히 동의하며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의 최대의 강점은 여기에서 우러나온다고 보고 싶다.
필자가 이교수와 의견을 달리 하고 따라서 이 책의 약점으로 꼽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는 34-43쪽까지 적지 않은 분량에 걸쳐서 사회적 구성주의의 문제점과 그 극복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가 사회적 구성주의의 긍정적 가치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과학기술정치에 미칠 수 있는 여러 위험들 때문에 비판하는 조심스러운 자세가 신중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좀더 철저한 반론을 거쳐 그의 견해가 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회적 구성주의의 인식론적 특징을 상대주의, 가치중립성, 반실재론의 세 가지로 꼽고 이것이 민주적 과학기술정치의 실천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초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사회적 구성주의자들 스스로가 거듭 부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판단적 상대주의(judgmental relativism) 내지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과학지식사회학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사회학자로 하여금 옳은 지식, 그릇된 지식에 대한 판단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진리주장을 상대화시켜 분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정치의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요청되는 규범적 가치의 개입을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봉쇄하고 있기 때문”(37쪽)이라는 것이다. 둘째, 지나친 상대주의는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수준에서의 실천적 판단과 개입의 준거를 상실케 할 뿐 아니라,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를 가져옴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존의 억압적인 권력질서를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셋째, 과학논쟁 분석에서 연구자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현실 논쟁적인 이슈에 대한 완벽한 가치중립적인 연구가 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성주의의 핵심적 주장의 하나가 바로 과학지식의 가치중립성 부정이면서 정작 과학지식의 연구자에게는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도록 기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역설적이라고 꼬집는다. 넷째, 콜린스(H. Collins)와 울가(S. Woolgar) 등 일부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실재론(anti-realism)은 과학지식의 구성과정 자체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념이 실재하는 대상과 얼마나 조응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끝없는 상대주의의 함정과 실천적 행위의 준거 상실을 초래한다고 통렬히 반박한다. 다섯째, 급진적 기술철학자인 랭던 위너의 비판(Winner,1993)을 인용하면서 이교수는 사회적 구성주의가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과정을 분석하는 데만 초점을 맞출 뿐, 과학기술이 발생시키는 정치경제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들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섯째, 현재의 사회적 구성주의는 지나치게 난해한 인식론의 덫에 빠져 원래의 실천적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이제는 아카데미즘에 함몰되고 말았다는 실천지향적 이론가들(예컨대 Martin, 1993; Sclove, 1996)의 비판 역시 타당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한 마디로 사회적 구성주의가 지루한 인식론 논쟁과 아카데미즘에 함몰되어 실천적 가치를 상실한 것은 블루어에 의해 과학지식사회학의 핵심적 원리의 하나로 제시되었던 ‘성찰성’의 문제 때문이라고 이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과학지식의 분석에 적용했던 것과 똑같은 접근을 과학지식사회학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성찰성의 원리가, 단지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비판에 귀를 열어놓아야 한다는 자기 성찰성의 의미를 뛰어넘어 연구자 자신의 연구결과도 상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사회적 구성주의는 뚜렷한 신념체계와 입장을 가지고 추구되었던 실천적 과학기술운동의 논리와는 처음부터 양립되기 힘들다는 것이다(40쪽). 따라서 이교수는 과학기술사회학이 보다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적 구성주의의 몇몇 방법론적 원칙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즉 사회적 구성주의 내에서 일부 연구자들이 취하고 있는 극단적인 상대주의, 가치중립성, 그리고 대칭성의 원칙들은 참/거짓, 바람직한 것/아닌 것에 대한 연구자의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대폭 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이런 방법론적 원칙들 대신에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집단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덜 상대주의적이고, 비가치중립적이며, 비대칭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것”(42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과학기술학을 연구하고 있는 홍성욱교수는 이미 한 서평에서 ‘성찰성’의 문제 때문에 상대주의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홍성욱, 2000). 성찰성이란 내 지식의 한계를 생각하고 인정함으로써 내가 비판하는 대상이 범하는 잘못을 내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기 위해서이며, 따라서 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성찰성이 궁극적으로 귀결될 수 있는 도덕적, 정치적 상대주의에 커다란 위험이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상대주의란 흔히 오해되듯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사회구성원 사이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고 역사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홍교수의 이러한 지적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런 지적에 이영희교수가 충분히 공감하고 설득되거나 자신의 핵심적인 문제제기에 답이 되었다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답을 내려 하기보다는, 왜 이교수(및 기타 실천적 지향의 과학기술학자들)가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이런 문제들을 불편하게 느끼고 제기할 수밖에 없는지를 나름대로 판단하여 제시함으로써 우회적으로 해결의 실마리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영국의 과학사회학자인 이얼리가 지적하듯이 표준적 과학관인 실증주의와 대비되는 과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는 두 부류의 주된 입장들이 공존해왔는데, 그건 정치경제학적 관점과 사회적 구성주의의 관점이다(Yearley, 1988: 11-13).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속적이고 근본적으로 구조화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우선 그러한 이해관계는 어떤 종류의 과학이 추구되어야 할 건지, 예컨대 핵물리학과 유기화학중 어떤 분야가 더 자금과 인력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 작용한다. 만일 어떤 과학분야들이 상업적 이익이나 연구자에 대한 보상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분야들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기가 십상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핵심적 주장은 과학지식이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고려사항에 의해 걸러지고 선별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잠재적으로 이용가능한 지식이 정치경제적 이유 때문에 철회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표준적 과학관과 다른 이유는 분명하다. 즉 여기서는 지식이 발전하는 어떤 단일한, 미리 정해진 경로란 없으며, 따라서 과학의 경로는 중립적이고 초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맥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맥락이 달랐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다른 모습의 과학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사회적 구성주의의 관점은 과학지식이 자연실재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며 실험과 관찰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에서부터 출발한다. 물론 과학지식은 경험적인 기초를 지니고 있고 관찰과 실험에 의존하지만, 단지 그것들을 넘어서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과학은 세계에 대한 창조적인, 그러나 불가피하게 부분적인 묘사일 뿐이다. 자연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증거에 의해 충분히 결정되지는 않는다. 과학철학자인 뒤엥(P. Duhem)과 콰인(W. Quine)은 이를 “증거에 의한 과학이론의 불충분 결정”(the underdetermination of scientific theories by the evidence) 명제라고 불렀다. 원칙적으로 증거는 항상 다른 방식들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과학사학자인 쿤(T. Kuhn) 등이 지적하듯이, 과학이론을 검증하는 잣대로 삼는 관찰데이타 자체가 이론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이론적 패러다임에 의존한다(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른바 “관찰의 이론의존성”(the 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명제는, 과학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관찰데이타의 축적에 의해 발전한다는 표준적 과학관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과학이론이 증거에 의해 불충분하게 결정되고 증거가 이론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가 특정한 과학이론을 선택하게 만드는 기타의 요인(들)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만일 사회적 요인들이 과학의 구성부분이라면 표준적 과학관은 부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많은 사회학자들이 과학지식의 내용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에 대해 탐구해 들어갔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례연구들은 과학지식이 결정되는 데 크고 작은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작용했음을 밝혀 냈는데, 예컨대 어떤 경우엔 과학자의 사회계급적 배경이 특정 과학이론을 선호케 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례연구에서는 실험결과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것이 과학자들간의 협상에 의해 이루어짐을 보여 주었다.
위 두 가지 형태의 과학사회학적 분석은 모두 사회적 과정과 과학발전간의 연관에 천착을 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최근까지 서로 고립된 채 작업을 해왔다. 물론 그 부분적 이유는 그들의 관심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은 주로 순수과학을 연구의 초점으로 삼았는데, 이는 과학의 인식론적 핵심에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밝혀내는 것이 그들 접근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경제학적 접근에서는 제약이나 정보기술과 같은 분야를 연구해 왔는데, 이는 과학자들의 특정 연구경로 추구로부터 초래되는 사회적 결과가 가장 현저한 곳이 이들 분야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경제학적 접근이 지니는 비판적 호소력은 과학기술이 효력이 있고 강력하다(때로 사회에 위험을 초래할 만큼)고 보는 입장에서 나오기 때문에, 과학지식이 단지 하나의 ‘구성물’(construct)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여서 얻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표준적 과학관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사회적 구성주의가 정치경제학보다 더 급진적인 측면이 있다. 필자는 이영희교수가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이 두 접근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교수는 이 두 접근을 어느 정도 모두 받아들이고 있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의 관심이나 관점에 있어 사회적 구성주의보다는 정치경제학적 접근에 더 친화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책에서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대표 이론가중 하나인 랭던 위너의 사회적 구성주의 비판을 수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책 39-40쪽).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 구성주의를 취하는 학자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술사회학 연구에 뛰어들면서, 이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적 접근과 상호 관심분야가 달라 연계나 비교가 어려운 일은 사라졌다. 기술사회학에서는 정치경제학적 접근이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의 전형적인 논지는 기술적 인공물 혹은 설계를 선택하는 것이 단지 기술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연구로서 널리 인용되는 것이 노블의 수치제어(NC) 공작기계 연구(Noble, 1985)와 코완의 냉장고 연구(Cowan, 1985) 등이다. 기술선택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은 따라서 실제로는 열등한 기계가 우수한 기계 대신에 정치경제적 이유 때문에 선택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설득력을 갖는다. 예컨대 앞의 노블의 연구에서는 수치제어 공작기계가 기록재생(record playback) 기계 대신에 경영자에 의해 선택된 것은 숙련노동자를 제거해주기 때문이었고, 코완의 연구에서 우수한 가스냉장고 대신에 열등한 전기냉장고가 선택된 것은 전기회사의 막강한 지원 덕분이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에서 의아한 점은, 그것이 비판하고자 하는 기술변화 모델의 전제인 “단일한 최우수 기술이 있다”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사회적 고려들이 올바른 기술적 고려들을 압도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 요인들이 없다면 기술에 대한 결정은 어떤 논란도 없을 문제라고 암묵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입장은 기술선택을 ‘초사회적’인 것으로 만들고, 기술선택이 사회적으로 오염되었다는 증거를 특정 기술의 선택을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사회적 구성주의를 취하는 기술사회학자들은 이런 순수한 기술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보통 기술적 ‘우수성’이라고 하는 기준조차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핀치와 바이커의 자전거 발달에 대한 연구(Pinch & Bijker, 1987) 혹은 맥켄지의 미사일기술 연구(MacKenzie, 1990)는 이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기술에 관한 의사결정의 민주화에도 중요한 함의를 지니는 사실이다. 만일 순수하게 내적인 기술적 논리가 없다면, 기술적 권위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고려사항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적 전문성을 이유로 의사결정(예컨대 유전자조작식품의 안전성 평가)에 대한 배타적 특권과 비전문가의 참여 거부를 주장하는 전문가의 자기 옹호는 근거가 희박한 것이다. 하버마스(J. Habermas) 등 비판이론가들의 우려와는 달리, 현대사회는 기술적 합리성이 다른 모든 합리성을 배제하고 국가를 지배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는 내적인 기술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조차 사회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간주하고 전문가지배(technocracy)에 맡겨버리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정치경제학적 접근과 사회적 구성주의 접근은 상당한 공통 분모를 갖고 있으나, 표준적 과학기술관에 대한 비판으로 볼 때 전자가 후자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불철저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은 과학에 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제한적인 요인들에 국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정치경제적 요인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예컨대 태양중성자 논쟁(Pinch, 1981)이나 중력파 논쟁(Collins, 1975)에서 보듯 과학논쟁에서는 아무 명백한 경제적 혹은 정치적 요인이 논쟁의 결과를 좌우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옹호자들은 과학기술적 생산물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적 결과들은 그러한 생산물들의 파급효과로부터 때때로 야기된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단지 사회적 구성물로 취급된다면 어떻게 이들 파급효과가 분석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사업적 전망과 같은 명백한 정치경제적 요인들의 영향이 기술적 의사결정을 압도할 수가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사기술뿐 아니라 많은 민수기술들이 이런 방식으로 정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만일 여건이 다르다면 순전히 기술적인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떤 과학적 혹은 기술적 결정도 사회적 구성의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행기의 속도나 탱크의 화력을 평가하는 것은 태양중성자의 유입량을 측정하는 것 못지 않게 증거에 의해서는 불충분하게 결정되며 따라서 사회적인 협상으로 보완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구성요소들이 과학기술의 엄청난 정치경제적 결과들을 낳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영희교수가 정치경제학적 접근에 경도된 결과 사회적 구성주의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도 너무 조급하게 부정적 평가를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성찰성’ 문제 때문에 처음부터 실천적 과학기술운동의 논리와 양립되기 힘들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가 없다. 자신의 연구결과(혹은 실천)도 상대화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 성실성과 개방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지, 사회적 구성주의의 약점과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대체 정치경제학적 접근은 어떤 인식론적 근거에서, 과학기술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영향을 주지만 자신의 견해는 그러한 이해관계를 떠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는가? 아마도 이교수는 지식에는 어떤 초사회적인 토대가 있어야 든든한 신뢰를 줄 수 있고 그에 기반한 실천운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사실상 표준적 과학관과 그리 먼 생각이 아니다. 인간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원래 ‘그 자체’로 우수한 특정 지식이나 도덕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서 모든 지식이나 도덕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 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지식과 도덕을 선택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고 또 실제로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사회적 합의’는 권력, 계급, 인종, 성, 학력 등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집단들이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민주적인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다 높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힘이 센 집단의 손에 좌우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식과 실천이 사회적 구성물임을 인정하는 것은 그러한 지식과 실천의 타당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이교수가 우려하듯 “실천적 판단과 개입의 준거를 상실케” 하기는커녕, 초사회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진정으로 민주적인 실천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이교수가 지향하는 ‘과학기술의 민주화’에 훌륭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줄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김환석, 1999).
4. 윤정로의 <과학기술과 한국사회>
윤정로교수의 책은 13편의 논문을 크게 3개의 주제로 묶은 것이다. 우선 제1부는 국내에서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서구의 과학기술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에게 현실 적합성이 있는 과학기술사회학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부분이다. 1장에서는 정부주도 아래 추진된 우리나라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과 의사결정 방식에 내포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다루고 있다. 즉 경제성장 위주의 도구적․결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인 ‘문화’의 일종으로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기존의 효율주의적․배제적 의사결정 방식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참여지향적 방식을 정착시키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조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장은 현재 국내의 사회학계가 처하고 있는 현실적 조건 하에서, 과학기술사회학을 사회학 교과과정 내에 포함시키는 데 고려해야 할 사안들을 지적하고 구체적으로 학부과정 강의계획안을 예시하고 있다. 3장은 미국 중심의 초기 과학사회학에서 주요한 연구 주제였던 과학의 보상체계에 대한 업적을 정리하고 평가함으로써 서구 과학사회학의 태동 과정을 소개하고, 이러한 서구의 논의가 국내의 과학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를 탐색하고 있다. 4장에서는 1970년대 유럽에서 대두하여 현재 서구의 과학사회학을 주도하고 있는 과학지식사회학의 특징을 검토하고 있다.
제2부는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의 관계를 분석한 글들을 모은 부분이다. 5장은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국내 반도체산업의 발전과정을 정부와 재벌․외국자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한 글이다. 6장은 세계화와 기술보호주의의 파고 아래서 독자적 기술능력 없이 기술집약형 산업구조로의 개편 불가피성에 처한 한국의 현실을 놓고 과학기술 기초연구의 육성방향과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일본의 군수산업과 첨단기술 개발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본 7장과 8장에서는 탈냉전 이후의 변화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를 고찰하고 있다.
제3부는 윤교수의 최근 관심사라고 밝힌 과학기술과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9장은 국내 과학기술계의 저조한 여성참여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서구의 페미니스트 이론과 실천의 성과를 배경으로 국내의 현실을 짚어보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 10장은 전국적 통계자료와 대덕연구단지의 여성 연구원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서 국내 과학기술계에서의 여성의 위상을 실증적으로 규명하려 시도한 글이다. 11장은 정보화의 진전이 여성의 삶에 갖는 의미를 살펴본 글로서, 지금까지 드러난 성별 정보격차와 사이버스페이스 문화의 문제점과 함께 일터와 가정,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여성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를 논의하고 있다. 12장은 국내에서 정보화에 가장 뒤 처진 집단중 하나인 전업주부의 컴퓨터 수용과정을 심층면접 자료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정보격차의 원인을 밝히고 종래의 정보화 추진방식에 대한 반성 및 개선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장은 편리한 가전제품의 도입으로 대변되는 가사기술의 발전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가사노동 수행방식에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분석한 논문이다.
앞의 이영희교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윤교수의 책에 대해서도 필자가 느끼는 강점과 약점 한 가지씩만을 언급하면서 비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교수의 책 전체가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실천지향성 아래 이에 과학기술사회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관통하고 있다면, 윤교수의 책은 그런 강한 실천지향성보다는 한국에서 과연 과학기술사회학이 성립할 수 있으며 어떤 문제를 다루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여러 모로 탐색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과거에 그 자신과 주위(과학기술자와 동료 사회학자)에서 가졌던 과학기술사회학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을 하고 있다. 첫째, 서구는 이미 1960년대부터 환경문제, 군비확장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이 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의 필요성이 부각되었지만, 한국도 최근 정보화, 지식기반사회 등의 담론과 더불어 유전자조작, 생명복제, 벤처 열풍 등이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탐구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고 있다. 둘째, 과학기술은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갖는 분야인데 왜 굳이 한국의 과학기술에 대해 분석해야 하는가 하면, 과학기술에 관련된 제도와 관행, 과학기술지식의 생산과 유통방식 등이 사회마다 다양하며 그 결과 동일한 과학기술의 파급효과도 사회와 집단에 따라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교섭과정을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 과학기술을 ‘사회적’ 문제로 이해하고 실천적 대응을 모색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윤교수는 강조한다. 이에 따라 윤교수가 정리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사회학을 위한 기획은 그의 책 제1장의 결론 부분에서 언급하듯이, “한국사회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인문학적․사회과학적 문제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진지한 지적 탐구작업”(34쪽)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이와 같은 윤교수의 문제 설정에 대하여, 자칫 서구 학문의 일방적 수용과 추종에 머물기 쉬운 주변부 학자들의 학문적 식민성을 경계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담은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특히 과학기술사회학처럼 국내에 뿌리가 없고 서구에서도 새롭게 부상한 학문일수록 그러한 일방적 서구 추종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이런 자의식이 국내의 학자들에게 요청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구의 새로운 학문과 이론을 우리 실정에 맞지 않다거나 한때의 학문적 유행이라 하여 쉽게 거부하고, 우리끼리 우리만의 독자적인 학문을 하자는 폐쇄성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학문적 낙후와 정체성에 빠지는 일일 뿐이다. 이 면에서 윤교수의 자세는 서구의 발전된 학문인 과학기술사회학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되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거르고 다듬어야 한다는 ‘학문의 토착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윤교수의 책이 지닌 가장 큰 강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윤교수는 이를 구체적으로 대학의 교육과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사회학의 교과목 분석과 운영방안은 물론 심지어 강의계획안의 예시까지 친절하게 책에 실어 놓았다(제2장). 이는 현재 국내의 대학에서 과학기술사회학이 얼마나 수용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사람들과, 앞으로 과학기술사회학을 대학에서 연구하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유용한 지침을 제공해 주리라 생각된다.
굳이 윤교수의 책에서 약점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쉬운 점은 정작 위에서 스스로 밝힌 지향점과는 달리 책의 내용에서는 과학기술과 관련한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별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반도체산업과 과학기술 기초연구, 그리고 과학기술에서의 여성문제 등이 다루어져 있지만, 이것이 위에서 설정한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과학기술과 한국사회: 구조와 일상의 과학사회학>이란 책의 제목에 값을 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과 관련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핵발전, 환경파괴와 유전자조작을 비롯한 위험(risk)의 문제, 생명복제와 인간게놈연구로 불거진 생명윤리의 문제, 정보화에 수반되는 전자감시사회의 도래, 전문가주의의 팽배로 인한 비민주적 의사결정,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문제들은 모두 빠져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물론 윤교수 혼자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것은 무리이며 그 스스로 차후의 작업으로 남겨두고 있다고 누누이 양해를 구하고 있으므로 이 정도만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그가 최근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밝힌 과학기술과 여성문제에 대한 분석에 대하여 한 마디 비평을 남기는 것이 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과학기술 속에서의 '여성과 젠더' 문제가 새로운 실천과 학문의 영역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과학기술의 제도와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과학기술학 일반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급성장을 해오고 있다. 오늘날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은 서구 사회를 넘어서 역사적․사회구조적 맥락이 다른 다양한 사회로 관심을 넓히고, 과학기술계의 성차별 문제를 넘어서 과학기술지식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으로 그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면서, 다양한 이론화 작업과 더불어 여성의 과학기술 진출과 참여를 확대시키기 위한 실천적 프로그램의 기반을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관련 외국 저서의 번역(Hubbard, 1994; Keller, 1996; Wertheim, 1997; Cowan, 1997; Wajcman, 근간)뿐 아니라 국내의 저자에 의한 저작(예컨대 오조영란․홍성욱, 1999)까지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단순히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여성인력 진출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수행된 종래의 정책보고서들(김명자, 1995; 김영옥, 1996; 김정자 외, 1998)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과학기술과 젠더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스트들에 따르면 근대의 과학기술은 남성의 문화이자 남성권력의 한 원천이라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과학기술의 인식론을 발전시키는 것을 그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과학기술분야에서 여성에게 차별적인 교육기회와 고용관행을 시정하려는 노력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최근의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이 현대 과학기술의 내용을 문제삼게 된 데는 윤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사회적 구성주의’의 영향이 큰 역할을 하였다(285-286쪽). 과학기술이 초사회적인 보편적 합리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 요소와 결합되어야만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회적 구성주의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과학기술의 내용이 ‘젠더’(gender)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인식으로 쉽게 연결이 되었다. 윤교수의 언급을 인용하자면,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서구 문화 속에서 과학기술이 ‘남성다움’과 결합되고 ‘여성다움’과는 분리되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남성다움이 ‘역사적 우연’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밝히고 과학의 신화를 그 기원에서부터 무너뜨리고자 한다. 과학기술의 ‘남성다움’이라는 신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자연과학의 인식론이라고 본다. 객관성․합리성․보편성․가치중립성으로 대변되는 과학의 인식론과 방법론이 그 지향점과는 달리 젠더 이데올로기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진정으로 젠더 중립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286쪽).
필자는 윤교수가 이처럼 서구의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 논의를 국내에 소개하고 여러 글을 통해 과학기술과 여성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지만, 사회적 구성주의와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좀더 치밀한 분석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 사실 양자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친화적인 것만은 아니고, 앞에서 정치경제학적 접근과 사회적 구성주의 사이에 긴장이 존재했던 것처럼 여기에도 긴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양자가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일반적 명제에 대해서는 대개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 때 ‘사회적’이라는 개념이 무얼 의미하느냐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구성주의에서는 거시적․미시적인 폭넓은 사회적 요인들을 이에 포함시키면서 ‘젠더’ 요인은 그중의 하나로만 고려하는 반면에,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에서는 젠더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혹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치 정치경제학적 접근에서 주로 ‘계급’ 요인을 강조하던 것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젠더’로 대체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구성은 실제로 젠더 요인과 거의 무관한 경우들이 많고 다른 사회적 과정들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이 주로 백인 남성학자들이며 그들의 기존 연구주제와 분석 속에는 젠더의 중요성이 별로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는 어느 한 쪽이 우월한 것이라기보다 서로의 모자란 점을 다른 쪽이 채워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문제는 일부 페미니스트들-특히 ‘페미니스트입장론’(Standpoint Theory of Feminism)을 옹호하고 있는 하딩(Harding, 1986) 등-이 주장하는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의 개념이다. 입장론은 과학을 포함한 지식생산에서 여성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권력에서 소외되어 지배당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관점에서 수행되는 지식생산은 덜 편파적이고 덜 부분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노동계급 관점의 우월성과 이것만이 총체성에 입각한 ‘진정한 과학’을 가능케 한다는 인식과 얼마나 일맥상통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관점이 더 ‘우월’하고 더 ‘강한’ 객관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그러한 우월성이나 객관성의 정도를 잴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이고 초사회적인 기준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말이다. 한마디로 이는 앞서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문제점에서 지적했듯이, 자신이 비판하고자 했던 표준적 과학관의 가정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셈이다. 다시 사회적 구성주의가 이에 대한 해독제가 되어줄 수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이러한 ‘우월성’의 기준 역시 사회정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강한 객관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객관성’(another objectivity)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제안할 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관점에 선 지식이나 모두 가치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중 어느 것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는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실천지향성과 관련하여, 이영희교수도 지적하듯이(그의 책, 제4장) 현재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은 단순한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여성해방’이라는 정치적 지향성을 뚜렷하게 갖는 연구기획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면에서 분명히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고 비판받는 사회적 구성주의보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지식의 형성에 대한 객관적 해석보다는 그것의 향후 변혁가능성에 주목한다. 즉 인식론과 정치를 분리하지 않고 특정한 과학기술적 주장에 대한 규범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견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입장은 비성찰적인 독단의 함정(예컨대 “나는 여성의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옳다”식의)에 곧잘 빠질 위험성도 존재한다. 자신의 지식과 주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 역시 사회적 구성물임을 인식함으로써 오히려 다른 지식이나 주장이 지닌 가치에도 진정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보다 나은 민주적 이상을 향해 연대와 협력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자세이다. 현재 사회적 구성주의가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에 비해 실천지향성에서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그것의 본질적 한계라기보다는 그것이 오랫 동안 자신의 인식론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따랐던 실제 연구자들의 개인적 성향을 나타냈던 것뿐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아이바(Aibar, 1996)가 랭던 위너의 비판에 맞서 지적하듯이 사회적 구성주의는 본질적으로 아카데미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기보다는 이제부터 그것의 실천적 잠재력을 얼마나 어떻게 우리가 개발하느냐에 그 유용성이 달려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의 이론과 실천을 보다 심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훌륭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회적 구성주의와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은 둘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상호침투를 통해 서로의 장점과 경험을 배우는 자세가 현재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된다.
5. 종합평가: 과학기술사회학은 국내에 뿌리를 내렸는가?
이제까지 올해 국내에서 출간된 세 권의 과학기술사회학 저서들에 대한 논평을 통해 각 저서가 지닌 특징과 장점 그리고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 세 권의 저서가 출간됨으로써 국내의 맥락에서 성취된 바를 간략히 종합평가를 해봄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크게 두 가지의 측면에서 평가를 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세 저서가 국내의 종래 과학기술관과 정책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지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세 저서의 출간이 지니는 학문적 기여의 측면으로서 특히 과학기술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국내에 뿌리를 내리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하였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먼저 세 저서는 과학기술을 보는 사회학자의 관점을 본격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그동안 국내에서 일반사회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마저 팽배하였던 과학기술에 관한 여러 고정관념과 신화들에 도전하고 이를 무너뜨리며 훨씬 현실적이고 풍부한 관점으로 바꿔 놓는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와 기업 및 언론의 주도로 ‘과학기술’하면 경제성장과 국제경쟁력을 위한 핵심수단이고 따라서 선진7개국(G7)으로 우리가 진입하는 지름길이라는 식의 도구주의적 과학기술관만이 팽배하였다. 여기에 학계에서마저 ‘과학은 보편적 진리’라고 굳게 믿는 표준적 과학관과 ‘정보사회론’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결정론이 팽배하여서, 현대의 과학기술이 갖는 사회․문화적 성격과 환경파괴를 비롯한 여러 위험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민감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만능주의와 물질지상주의 그리고 이로 인한 ‘복합적 위험사회’로 치달아 왔던 것이다. 그 어떤 학문적 관점도 이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 못하던 차에, 새롭게 등장한 사회학적 관점은 과학기술이 단지 보편합리성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고 하나의 ‘문화’라는 통찰을 제시하면서 지금의 과학기술이 유일한 것도 가장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깨닫게 하였다. 특히 과학기술과 민주주의의 관계, 과학기술과 페미니즘 그리고 대안적 과학기술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는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적이고 성평등하며 환경친화적인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 과학기술에 관한 올바른 관점이 매우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학적 관점과 쟁점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위 세 권의 저서는 앞으로 국내의 과학기술 논의와 정책에서 과학기술을 단지 중립적 도구나 생산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현상이자 문화로 파악하는 보다 풍부하고 바람직한 관점을 잡아나가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 과연 위 세 저서가 과학기술사회학의 풍부한 잠재력과 통찰을 국내에 온전히 뿌리내리게 하는 데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블루어의 책은 번역서이므로 그것이 얼마나 해당 분야의 중요하고 가치있는 책이며 번역은 얼마나 제대로 되었는가의 여부만 검토하면 되겠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일단 합격점을 주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책은 과학지식사회학의 대표적인 저서이고 번역 역시 무난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국내 사회학자에 의해 쓰여진 두 책은, 물론 과학기술사회학의 ‘토착화’ 면에서 우리에게 더 가치있는 책이며 척박한 국내의 환경에서 이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쓴 노작들이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우선 현재 과학기술사회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구성주의를 충분히 제대로 소개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교수의 책에서는 이를 다루면서 스트롱 프로그램, 경험적 상대주의 프로그램, 실험실연구,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행위자-연결망 이론, 기술의 사회적 형성론을 포함하고 있고, 윤교수의 책에서는 스트롱 프로그램과 경험적 상대주의 프로그램 그리고 실험실연구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은 양자 모두 이와는 좀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두 학자가 보이는 공통점은 사회적 구성주의의 긍정적 기여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을 하면서도, 그것이 추구하는 상대주의와 성찰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인식론적 논쟁에 빠져 실천지향성을 상실할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에 대해서는 양자가 모두 크게 환영을 하고 있다. 또한 주목할 점은 사회적 구성주의가 비판하면서 출범하였던 머튼의 과학제도사회학에 대하여도 한국에의 현실적합성을 지적하면서 역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구성주의의 학문적 접근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수용하되 그 실천적 가치에 대해서는 매우 미온적이거나 정면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두 교수의 저작이 국내에서 과학기술사회학의 선구적 업적인 동시에 앞으로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후속 연구들이 이루어질 것을 예상하고 또 기대할 때, 현재 서구에서 이 분야의 핵심을 이루는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한 두 교수의 입장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두 교수가 사회적 구성주의의 수용에 대해 대체로 미온적이고 한국사회에 대한 현실적합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구성주의처럼 새롭고 논란이 많으며 또 그 안에 다양하고 변화하는 입장을 포함하고 있는 패러다임을 어떤 획일적 이미지로, 혹은 이제까지의 모습으로만 예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전에 자신이 사회적 구성주의의 심오한 통찰과 함의 그리고 다양한 지류를 충분히 소화하고 있는지 먼저 점검을 해야 할 것이다. 흔히 사회적 구성주의가 인식론적 탐구에 빠져 있고 ‘성찰성’같은 자기모순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러한 깊은 모색이 없이 어떻게 현대 과학기술의 사회적 성격을 핵심에서 파헤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론 역시 사회적 구성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논의했으므로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둘째로 새로운 과학기술사회학은 다만 기존의 과학관을 해체하고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모태인 사회학 자체에도 커다란 혁명적 함의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과학기술사회학은 단지 기존의 사회학적 이론이나 모델을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쿤의 과학혁명론이 사회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회학교과서들은 아직까지 표준적 과학관 모델에 입각하여 사회학의 연구방법과 이론구성을 설명하고 있다(Lynch & Bogen, 1997).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이 이론과 관찰데이타의 관계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도 대체로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기술사회학은 이러한 기존의 사회학 모델을 비판하고 쿤 이후의 새로운 과학관을 자신의 인식론적․방법론적 토대로서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학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Fuller, 1995). 따라서 과학기술사회학은 기존의 과학기술관에 대한 도전이자 기존의 사회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과 그것의 의의를 이영희교수와 윤정로교수의 두 저서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사회적 구성주의만 하더라도 기존의 사회학에 대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되겠지만, 특히 사회학의 핵심인 기존의 ‘사회’라는 개념에 도전을 하면서 이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구성하는 이질적 연결망(혹은 그냥 ‘콜렉티브’) 개념으로 대체하려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시도(Latour, 1987; Callon & Law, 1997)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두 교수는 물론 여타 모든 국내 사회학자들의 관심을 촉구하며 앞으로 진지한 탐구와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사회학의 뿌리내리기를 위하여 가장 절실한 작업은 물론 이론적 탐구만이 아니라, 국내의 과학기술계와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을 사회학자가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교수가 이 면에서 정보화, 작업조직, 전자주민카드 논쟁, 반도체산업, 여성과학인력, 가사기술 등의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루어주기는 하였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핵발전소, 환경호르몬, 유전자조작식품, 생명복제, 인간게놈연구, 수돗물 불소화, 경부고속철도 등 아직 사회학자의 분석을 기다리고 있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은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이 정부 관료와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거나 시민단체나 종교계에 의한 반대로 끝없는 대립만 반복된다면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희생은 엄청날 것이다. 과학기술사회학자들이 이에 뛰어들어 과학기술의 사회․문화적 성격을 감안한 보다 세련되고 풍부한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이 민주적으로 결정되도록 촉진해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21세기가 인간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과학기술 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과학기술사회학이 진정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일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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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구성물'이 아니다‥옹호·비판의 단순화 넘어야 |
본격서평_'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홍성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1999, 39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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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은 상당히 유명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간 후 단 두 번의 서평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책이 처음 나와서부터 주목을 받았다기보다는 점차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거기에 더해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치밀한 논의가 점점 더 필요해지는 최근 현실에 비해 그런 논의를 담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많지 않고 그런 책에 대한 우리 인문사회학계의 관심이 홍교수의 책이 나왔던 1999년에는 비교적 높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생산에서 문화로'의 시각은 잘못
기존의 두 서평에서 제시된 논점을 따라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한다. 출간 후 얼마 안돼 ‘중앙일보’(99년 11월 11일자)에 실린 과학사를 전공한 김기협 선생의 서평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행위에 대한 美 법원의 판결로 서두를 시작한다. 김기협 선생은 이 책이, 기술이 발전되는 과정이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그것의 산업화라는 단순한 도식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미 개발된 기술이나 사회적으로 투자된 간접자본에 제한을 받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는 기술발전의 ‘경로의존성’을 분명하게 부각시켰다고 지적한다. 3벌식 타자기가 2벌식 타자기에 비해 더 효율적이라는 점이 ‘객관적’인 사용실험에서 아무리 자주 입증되어도 이미 2벌식 자판에 익숙한 사용자가 다수인 상황에서 3벌식 기술은 경쟁력이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경로의존성’을 잘 보여준다. 김기협 선생이 보기에 홍 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자신의 컴퓨터 운용체계에 웹브라우저를 통합시켜 한 묶음으로 파는 행위가 왜 경쟁업체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지를 ‘경로의존성’의 개념으로 잘 설명했다고 평가한다. 전체적으로 이 서평은 홍교수의 책이 ‘경로의존성’과 같은 유용한 분석도구를 사용하여 과학기술이 오늘날 겪고 있는 급격한 위상변화의 여러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급격한 위상변화는 책의 제목과 연결시킬 수 있다. 즉 과거에는 생산력의 원천으로 간주되던 과학기술이 현재는 문화현상으로 그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홍 교수가 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에서 문화로서의 과학기술로 급격한 위상변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책의 서문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현대 과학기술이 생산력으로 기능하는 측면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홍교수의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는 생산력에 도움을 주는 기능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사회문화적 기능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화현상으로서 과학에 대한 본격적인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홍교수의 전반적 견해는 과학기술이 문화현상으로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는 과정 자체가 급격했다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이 이해되는 방식이 지나치게 생산력 위주였으므로 과학기술의 문화적 위상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시급하다는 지적으로 읽혀야 한다.
과학사회학자이자 시민과학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김환석 교수가 ‘문학과사회’(2000년 봄호)에 쓴 서평은 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김 교수는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을 비롯하여 90년대 말에 출간된, 과학기술을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내용을 담은 4권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우선 이 4권의 책 모두 21세기가 시작된다며 호들갑을 떨던 매스컴의 주요 화두였던 ‘적응하라, 아니면 도태될 것이다’에 대한 심각한 반론을 제기한다고 본다. 즉 과학기술 발전만이 살 길이라는 과학지상주의적 시각에 대해 페미니즘과 과학사회학의 새로운 흐름이 사회구성주의라는 체계화된 반론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시각이 과학기술의 새로운 전개가능성을 비침으로써 기술의 필연적 발전경로를 가정하는 사회진화론적 시각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가 그것이 과학비판에 얼마나 본격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은 자연스럽다. 우선 김교수는 홍교수가 최근 과학기술사, 과학기술철학, 과학기술사회학의 중요한 쟁점을 ‘과학전쟁’, 급진과학운동, 토마스 쿤, 보일-홉스 논쟁,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여성과 기술, 몸과 기술, 인간 복제, 사이버 스페이스, 새로운 기술경제학 등의 광범위한 주제를 통해 논의했다는 점을 이 책의 장점으로 꼽는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주제를 소화해서 연구할 수 있는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칭찬하지만, 정작 김 교수는 이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저자가 일관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 책이 과학기술을 그다지 큰 문제가 없는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가 과학기술 자체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 혹은 사회에 대한 과학자들의 몰이해,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의사소통의 결여에 있는 것으로 독자에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김 교수는 홍 교수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보다는 화해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김교수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을 극복해야 할 권력과 지식담론으로 상정하고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나 시민참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비판적 논의에 쏠려있다. 이 점은 김교수가 함께 논의하고 있는 다른 책, ‘진보의 패러독스’(당대 간, 1999)에 가장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지금은 ‘시민과학센터’로 이름이 바뀐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에서 엮은 책으로서 보다 실천적인 문제에 대해 과학기술을 민주화하고 과학기술정책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 책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연구가 과학기술의 민주화나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시민참여에 도움이 되는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 그 존재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김 교수는 마치 사회구성주의나 페미니즘이 과학기술의 민주화 운동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진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회구성주의는 과학지식의 성격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고 연구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논의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적용뿐 아니라 내용에서조차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 들어있다는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비평 계열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과학기술학 연구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이 원용되는 경우에는 실제로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과학기술의 다양한 측면이 단순히 과학맹신적이라거나 권력지향적이라는 도식으로 간단하게 묶일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고, 과학기술이 발전해 온 양상 역시 사회진화론적 시각의 기술결정론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서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기술학이 보여주는 과학기술의 풍부한 역사적, 철학적 사례들은 과학기술의 ‘객관적’인 연구방식이 세계에 대해 절대적 참을 제공해주는 이상적 방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단순히 ‘구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작동하는 이런 복잡한 방식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과학을 옹호하는 사람이나 과학을 비판하는 사람 모두 과학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홍 교수의 논의는 이런 국내외의 상황에서 과학의 다양한 모습들과 그것의 함의를 과학기술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근거하여 차분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즉 과학비판 사회운동의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여러 측면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성과물로서의 의의를 갖는 것이다. 홍 교수는 과학기술사를 전공했지만 과학기술철학과 과학기술사회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이는 과학기술과 같은 복합적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적인 덕목일 수 있다. 그러므로 홍교수의 논의방향이 우리 학계에서 보다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발전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다양한 분석도구와 시각을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욱/한양대·철학 | *************************************************************************************
쟁점서평:『지식과 사회의 상』(데이비드 블루어 지음, 김경만 옮김,한길사刊) |
2001-08-29 14:5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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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석 / 국민대·과학사회학
2년 여 전에 ‘교수신문’ 지상을 통하여 필자가 서울대 물리학과 오세정교수와 더불어 과학의 사회적 구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을 때, 필자는 정작 국내에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저서가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느꼈었다. 그리고 소위 ‘과학전쟁’으로 유명해진 미국 물리학자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의 번역본이 올해 초에 출간되면서 주목을 끌었을 때도, 이제 과학지식사회학은 국내에 제대로 학문적인 소개도 안된 채 오해로 점철된 이데올로기적 비판부터 받는구나 하고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이런 안타까움과 탄식을 덜어줄 책이 번역돼 나왔는데, 그것은 과학지식사회학을 최초로 열어 젖혔던 에딘버러학파 ‘스트롱 프로그램’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데이비드 블루어의 ‘지식과 사회의 상’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을 사회적 요인과는 무관하게 과학 내적인 논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것으로 보았던 전통적인 과학철학과, 과학지식의 내용보다는 과학활동의 제도적 조건을 규명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기능주의적 과학사회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과학연구의 기획이다. 그중에서도 ‘스트롱 프로그램’은 사상과 지식의 사회적 기초를 탐구해온 지식사회학의 접근을 과학지식의 설명에 확장하여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는 데 특징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지식사회학에서는 대체로 종교나 정치사상 및 철학을 주로 다루어 왔을 뿐 자연과학은 초사회적인 보편성을 지닌다고 보아 탐구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그런데 ‘스트롱 프로그램’은 자연과학 역시 사회적 기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경험적인 분석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블루어에 의하면 과학지식사회학의 방법론적 원칙은 다음의 네 가지이며, 이를 따를 때 다른 모든 과학분야들과 다름없는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지식을 낳은 원인을 밝히는 인과적 설명을 추구하고(인과성), 둘째로 참된 지식/거짓된 지식 모두를 설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공평성), 셋째로 참/거짓 지식 모두에 대해 동일한 유형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하고(대칭성), 넷째로 이러한 원칙들은 과학지식사회학 그 자체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성찰성)는 것이다. 블루어는 이러한 원칙이 지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객관적 방법이란 점에서 지식사회학 일반의 원칙이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과학을 비판하거나 까발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과학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블루어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초판이 나온 지 25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과학주의자들의 거센 비판에 시달려 왔고 그 가장 최근의 사건이 ‘과학전쟁’이다. 그러나 자연을 칭송하거나 비판하려는 규범적 태도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과학을 ‘반자연’이라 부르지 않듯이, 과학을 칭송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과학지식사회학을 ‘반과학’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다 주목해야 할 학문적 비판은 1990년대 초반 이후 과학학 내부에서 나타났는데, 특히 프랑스의 미셸 깔롱과 브뤼노 라투르에 의해 제창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과의 논쟁은 과학지식사회학의 목표와 방법은 물론 과학학 전반의 방향과 성격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심오한 쟁점을 담고 있다.
블루어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자연이라는 실재는 사회라는 창을 통해서 지식화된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인다. 즉 합리주의적 과학철학에서는 자연 자체가 진리를 체현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블루어는 자연 자체는 도덕적으로 공허하거나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소위 ‘진리’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제도화된 규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지식이건 거짓 지식이건 모두는 사회적 종류의 원인을 갖는다. 이에 반해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라투르는 블루어가 합리주의적 과학철학 못지 않게 자연/사회라는 근대적 인식론의 이분법에 매달려 있다고 비판한다.
라투르에 의하면 ‘자연’이 무엇이고 ‘사회’가 무엇인지는 미리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이질적 행위자들이 과학적 실천(예: 실험) 속에서 서로를 매개하고 번역하여 만들어지는 연결망의 결과이다. 따라서 ‘자연’이든 ‘사회’든 중립적인 것은 있을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과학의 설명변수는 아니며, 설명변수가 있다면 그것은 이질적 행위자들의 이러한 행위일 뿐이다. 이에 대해 블루어는 비인간에게 인간과 같은 행위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소박한 실재론에 빠지는 일이며, 스트롱 프로그램에서도 자연이 과학지식에 아무 영향을 못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규약을 통해 다양하게 이론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중 어느 주장이 옳은지는 쉽게 결론 내릴 성질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쳐야 할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면에서 이번에 번역된 블루어의 저서는 국내에서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둘러싼 논의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돼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더욱이 번역자인 김경만교수가 아주 성실하게 비교적 깔끔한 우리말로 번역을 해주어 독해의 어려움을 크게 덜어준 것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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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사샘, 책 쓰는 데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