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康有爲
2003년 2월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겨울비가 내리는 靑島空港에 내렸다. ‘知己’란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가? 나는 그를 만나러 일행을 따돌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글을 통하여 ‘知己’를 얻었으나 초면인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분에 넘치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청도를 떠나 서울로 돌아와 나는 근 10개월을 은둔하다시피 하였다. 그동안 책 한권이 나왔고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醫書의 번역을 끝냈다. 내 마음 속은 연락을 끊고 지냈던 ‘知己’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 찼었다. 이제 그 미안함을 다소나마 떨치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어서 기쁘다.
靑島를 떠나며 내내 생각했던 知己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靑島에 관한 몇 편의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제 그 첫 번째 글을 그에게 바친다. 토요일 밤 12시부터 월요일 오전 8시까지 무려 32시간을 나는 꼼짝하지 않고 이 글을 썼다. 내 작업이 얼마나 이어질 것인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는 틈틈이 知己를 생각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싶다.
靑島에 관한 글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또 한 명의 知人을 그리워해야 한다, 연락이 되지 않아 안타까운 자전거 맨 수로님의 우정을 잊지 못한다. 그에게도 늘 감사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닦달하는 어떤 여인이 있다. 사실은 그의 힘이다. 그는 이번 주말 내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의 덕분에 우정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가 있었다.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康有爲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청도에 있는 ‘康有爲故居’를 지키는 孫昆麗 女史의 아름다움과 친절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강유위에 관한 소중한 자료를 내게 주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이 글을 청도에 사시는 분이 읽고 혹시 ‘康有爲故居’를 지나시면 글 값을 손여사에게 드렸으면 한다.
‘有爲’라? ‘無爲’가 아니고 ‘有爲’라? 그의 이름은 이미 치열한 그의 삶을 암시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옳다는 신념을 관철하고야 마는 사나이의 신념이 그 이름에 묻어 있었다. 청도에 관한 이야기를 嶗山으로 할까? 康有爲로 할까 망설이는 동안 나는 결국 ‘有爲’에 이끌리고 말았다. 이미 太淸宮에 관한 짧은 글을 남겼으나 본격적으로 청도를 탐색하는 마음을 ‘有爲’에 담는다.
康有爲(1858~1927)는 廣東省 南海縣에서 태어났으므로 康南海라 불렀다. 原名은 祖詒, 字는 廣廈, 號는 長素 또는 更生이다. 어렸을 때 계몽교육을 받은 그는 또래에 비해 博聞强記하여 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엄격한 봉건주의적 전통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三綱五倫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윤리도덕을 익히게 되었다. 소년시대의 康有爲는 讀書를 열심히 하여 제법 이름을 얻었지만 八股文을 중시하던 과거에 응시하여 여러 차례 낙제를 하였다.
康有爲는 朱次琦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어 儒學에 전념하는 것보다 佛學이나 道學에 빠져 출세를 위한 노력을 등한시하였다. 그 후에는 名士였던 張鼎華를 알게 되어 근대유신사상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1879년 말 그는 英國이 홍콩을 점유하게 되자 조국의 山河가 허물어지는 것을 슬퍼하게 됨과 동시에 서방의 자본주의 정치와 문화를 접촉하게 되면서 그것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1888년 6월 康有爲는 蔭生의 자격으로 향시에 응시하여 서울로 올라가 진보적인 사대부와 관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애국적인 열정을 토로하며 변법에 관한 주장하였다.
1888년 12월 10일 康有爲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위의 냉소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光緖帝에게 제1차 상소를 올렸다. 그것이 정치를 개혁하여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유명한 『上淸帝第一書』이다. 이 상소는 불행히도 황제에게 전달되지 않았지만 대신에 康有爲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높여 주었다.
몇 년이 지난 후 康有爲는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 사회의 변혁을 이루는 필요조건임을 깨닫고 교육사업을 통하여 정치적 유신을 도모하여 중국의 진흥을 이루고자 하였다. 1891년 그는 광주에서 경세치용을 교육목표로 하는 長興學舍를 열었고 나중에는 이 학교를 유명한 萬木草堂으로 발전시켰다. 康有爲는 이러한 교육사업을 8년 동안 계속하였다.
康有爲와 학생들의 노력으로 萬木草堂은 점차 뛰어난 學風을 자랑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시사적이 문제에 관심이 높았으며, 독립에 관한 사고와 상호계발을 통한 의식화 교육에 치중하였다. 萬木草堂은 새로운 형태의 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康有爲의 변법사상에 영향을 받아 유신정치를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집단으로 발전하였다. 梁啓超, 徐勤, 麥孟華 등은 康有爲의 제자들로서 나중에 유신운동의 핵심인물이 된다. 이 단체가 학술과 문화적인 면에서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제1차 상소가 실패로 돌아간 후 康有爲는 봉건세력의 완고한 반발을 깊이 깨닫고, 학술방면에서 통치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변혁의 역량을 기르는 것이 여러 부문에서의 투쟁능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康有爲는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학설 가운데에서 武器를 찾기 위해 今文經學을 이용하였고, 古代의 제도를 통하여 제도를 개혁하는 사상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투쟁의 일환으로 《新學僞經考》와 《孔子改制考》를 편찬하여 유신운동의 이론체계를 확정하였다.
1894년 중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갑오전쟁이 발발하였다. 갑오전쟁은 중국에 엄청난 재난과 자극을 동시에 주는 계기가 되었다. 馬關條約에 규정된 일련의 굴욕적인 조항들은 애국심에 불타는 중국인들을 비분강개하게 하였다. 康有爲는 제1차 상소에 이어 다시 무려 18,000여자에 이르는 『上今皇帝書』를 지어 會試에 참가한 각 省의 擧人들과 연명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公車上書』이다.
1895년 5월 29일 康有爲는 13,000여자에 이르는 제3차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같은 해 6월 30일 그는 또 10,000여자에 이르는 제4차 상소문을 올렸다. 1897년 11월 독일이 膠州灣을 침공하자 康有爲는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廣州에서 北京에 도착하여 12월 5일 6,000여자의 상소문을 올려 황제에게 膠州灣事件을 다급함을 알리는 한 편, 신속히 국정을 개혁하기 위한 변법을 시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1898년 1월 29일 康有爲는 光緖帝에게 제6차 상소문을 올려 황제가 빨리 태도를 결정하여 구습을 버리고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百日維新’이라 불렀던 변법강령이다. 1898년 3월 12일 康有爲는 제7차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렸고 이로써 중국은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상소문을 통하여 황제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강유위는 지식인들에 대한 변법역량을 고취시키는 애국적인 유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성취는 학회를 열고, 학당을 일으키는 동시에 신문을 간행하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3자가 서로 역량을 결집시킴으로써 성과가 높아졌다. 1895년에서 1898년에 이르기까지 강유위를 따르는 국내외의 지식인들로 조직된 학회가 103개, 학당이 185개, 신문이 64에 이르러 애국, 개혁, 진보사상을 확대시키는 뒷받침을 하였다. 이들은 열렬히 국내외를 진동시킨 百日維新을 환영하였다.
1898년 6월 중국의 자본가계급이 일으킨 변법유신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관해 11일 光緖帝가 頒布한 『明定國是』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中外의 여러 대소 신하들과 왕공에서 사족과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마땅히 노력을 기울이고 분발하여 웅지를 키우라! 聖人의 경학을 근본으로 삼고 또 이 때에 필요한 모든 西學을 채집하여 실력을 길러야 한다. 쓸모없이 헛된 공론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 온 힘을 다해 뜻을 이루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겉치레를 하지 말고 말장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기회에 우리는 쓸모없는 것을 유용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해 9월 21일 慈禧太后가 정변으로 물러나고 光緖帝는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이 정부는 103일 동안 유지되었다. 역사상으로 이것을 ‘百日維新’이라 한다. 康有爲는 저술을 통하여 光緖帝에게 신사상을 불어 넣어 變法維新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변법운동은 질풍노도처럼 격렬하게 전국을 흔들었고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변법운동이 격렬해지자 봉건적인 수구파의 권익을 대표하던 慈禧太后는 몰래 자기 세력을 모아 정변을 일으키고 光緖帝를 구금하는 한 편 다시 수렴청정을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譚嗣同, 康廣仁 등 6명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기세등등하던 百日維新이 완고한 봉건세력에게 진압될 때, 康有爲는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이미 대역부도한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더 이상 조국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분노와 슬픔을 안고 영국국적의 상선 重京號를 타고 홍콩으로 달아났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그는 해외를 떠돌게 된다. 그는 여러 대륙의 30여개 나라를 떠돌았고 그가 다닌 길은 장장 30만Km를 넘었다.
당시의 중국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義和團運動이 발생한 후 淸政府는 “中華의 풍부한 물질적인 힘을 모아 다른 나라의 환심을 산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미 ‘서양인의 정부’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孫中山을 중심으로 하는 자산계급의 혁명파를 자극하여 무력으로 淸政府를 전복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康有爲는 保皇派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保皇派가 시대적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새로운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康有爲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자산계급 혁명파들은 연합하여 동맹을 맺은 다음, 淸政府의 정치적 강령을 확실히 뒤엎기 위해 保皇派의 지도자 康有爲와 그 추종자들과 격렬한 사상논쟁을 펼쳤다. 역사발전의 순리적인 진행에 발맞춘 혁명파의 세력을 날로 강대해졌다. 그 때 康有爲는 부패한 봉건주의의 속박을 떨쳐버리지 봇하고, 봉건전제주의의 강시를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려하였다. 그는 역사발전을 목숨을 걸고 방해하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淸王朝가 멸망한 다음 康有爲는 마치 초상을 당한 것처럼 완고하게 立憲君主制라는 이상을 버리지 않고 슬퍼하였다. 그는 홀로 《不忍》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시대를 거스르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孔子를 기치로 내걸고 ‘孔敎會’를 조직하여 인심을 얻고 國運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의 꿈은 여전히 舊王朝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중화민국이 건국한 이후 康有爲는 張勛의 復辟運動에 참여하여 1917년 7월 1일 張勛과 함께 復辟을 戱劇의 펼쳤으나 몇 일후에 이 희극도 핍박을 받아 중단되었다. 康有爲는 이로서 몸도 명성도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康有爲와 靑島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19C 말 독일이 膠州灣을 침공했을 때 康有爲는 비통한 마음으로 光緖帝에게 變法을 진언하여 강렬한 자신의 애국심을 나타냈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난 다음 북경의 청년학생들이 ‘12개 조약을 철폐할 것’, ‘山東을 다시 돌려 줄 것’, ‘靑島를 다시 돌려 줄 것’을 요청하자 康有爲는 『국적을 주살하고 학생들을 구해야 한다(請誅國賊救學生電)』는 글을 발표하여 제국주의에 강점된 한 줌의 흙이라도 되찾아야한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晩年의 康有爲는 해외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張勛의 復辟運動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한 다음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남은 생을 청도에서 살고자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노년의 삶을 살다가 죽었다.
1917년 10월 초 康有爲는 天津을 지나 靑島에 도착하였다. 당시 靑島는 일본제국주의가 强占을 하고 있었다. 辛亥革命이 발생한 다음 淸朝의 皇族과 관료들은 이곳 靑島로 도망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恭親王 溥偉를 謁見하였다. 康有爲도 이 때 靑島로 왔지만 오래 살지는 않았고 곧 靑島를 떠나 대련으로 갔다. 그러나 靑島의 아름다운 해변과 도시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靑島를 “푸른 산과 푸른 숲, 파란 바다와 남색의 하늘이 중국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내가 본 靑島도 康有爲의 느낌과 같았다. 康有爲의 느낌에 나는 또 다른 아름다운 느낌이 있다. 그것은 이곳 靑島에 우연히 알게 된 나의 知己와 친절하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우정이다. 靑島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나는 이 아름다운 우정을 자세히 밝힐 것이다.
1922년 12월 10일 中日 양국정부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중국정부는 靑島를 돌려받았고, ‘膠澳商埠’라고 부르는 ‘督辦公署’를 설립하였다. 1923년 여름 康有爲는 다시 靑島로 돌아와 膠澳商埠의 督辦 熊炳琦의 접대를 받았다.
이 때 康有爲는 靑島의 여관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7월 10일 그는 이런 글을 써서 집으로 보냈다.
“지금 내 한 몸을 客棧에 두고 있지만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 곧 집을 얻으면 다시 연락을 할 것이니 즉시 청도로 오면 좋겠다.”
여관생활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으므로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집을 하나 얻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그는 독일이 점령을 하고 있을 때 제독관저로 사용하던 주택을 얻었다. 康有爲는 그 집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집은 비록 작지만 정원이 아주 넓다. 푸른 바다와 파도가 불과 백 보 앞에 보인다.”
“풍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더운 여름에도 열기가 없다.”
康有爲는 이 집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해 7월 1년의 전세계약이 끝나자 그는 이 집을 매입하여 오랫동안 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1924년 康有爲는 “갑자년 유월에 독일의 제독이 살던 집을 샀다”라는 시를 지었다.
截海爲塘山作堤 茂林峻岺樹爲薺
壓嚴舊日節樓在 以落吾家可隱棲
바다를 가로 막은 높은 산들이 제방을 이루고
우거지 숲은 높은 산등성이 사이에 냉이처럼 붙어있네.
암울했던 시절은 이 집 속에 남아있지만,
지금은 내 집이 되었으니 숨어 살 만 하구나!
康有爲는 이 집을 ‘天游園’이라 불렀다. 그것은 聖恩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부의황제가 결혼을 할 때 그에게 써 준 ‘天游園’이라는 3글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康有爲는 자녀들과 함께 靑島에서 독서를 하며 지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다시 그 때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80년대에 靑島市 人民政府는 이 건축물의 정식 명칭을 ‘康有爲故居’라 하고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하였다. 최근에 시정부는 예산을 들여 이 건물을 다시 보수하였고 국내외의 관광객들에게 참관을 허락하였다.
康有爲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靑島의 풍경이 마치 仙境과 같다고 하였다. 1917년에 처음 청도에 온 이래 192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의 세월을 그는 청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며 살았다. 그는 그 느낌을 여러 편의 시로 남겼다. 대부분은 조국의 산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묻어나는 것들이다.
바다 위에 갑자기 神仙山이 나타나더니
금빛 푸른빛 대궐이 그 사이를 물들이네.
……
산자락에 기댄 누각이 해변에 서있는데
푸른 파도가 넘실넘실 하늘가에 닿았구나.
……
내 지금 이 궁궐에 엎드려 힘을 다해 싸우고자 하니
온갖 이해를 수 만 마디 말로 따져볼까 하노라.
1917년에 지은 이 한 수의 시는 청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일의 청도침공을 반대하여 ‘公車上書’를 올릴 때를 회고한 것이다.
康有爲는 靑島 부근의 嶗山을 아주 사랑하였다. 그는 嶗山의 巨峰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直上嶗山巓 夾道萬卉繁
奇石起攫搏 滿山洪濤飜
곧장 노산 꼭대기에 오르는데,
길가에는 온갖 예쁜 풀들이 무성하네.
신기한 돌들이 손에 잡힐 듯
온 산 가득 파도처럼 넘실거리네.
이 시는 嶗山의 기묘한 모습을 맑은 마음에 비추어 읊은 것이다. 이 시의 ‘奇石起攫搏 滿山洪濤飜’이라는 구절을 읽고 나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嶗山은 대부분이 土山인 우리의 산과 달리 기암괴석에 그대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이 신기하다. 기묘한 모습에 놀라 하나를 바라보다보면 또 다른 기암이 동공에 가득하다. 저녁 무렵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산굽이들이 마치 망망대해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보는 것처럼 嶗山의 기암은 끝없는 파도처럼 시야에 가득하다. 현실정치의 장벽을 넘지 못한 老政客은 嶗山의 끝없는 奇巖의 물결을 바라보며 덧없음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직 남은 열정을 奇巖에 새겼을까?
康有爲는 靑島에서 유명한 海岬匯泉에서 파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海水冥蒙望石磯 怒濤高拍入雲飛
飛帆渺渺和雲水 島嶼靑靑日落時
바닷물은 깊고 푸른데 자갈돌을 바라본다.
성난 파도가 휘몰아 때리더니 구름처럼 날아오르네.
나는 듯 미끄러지는 돛단배는 구름 속으로 가물가물
크고 작은 섬들은 해가 져도 또렷하구나.
청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너무 맑아서 두렵다. 내가 찾았던 2월은 아직도 남은 겨울 냄새가 해풍에 실려 코끝을 싸늘하게 스쳤다. 겨울바다는 차갑게 뿌리치고 돌아서는 여인처럼 몸서리쳐지지만 바위에 부딪치며 날아오르는 파도는 구름처럼 포근하기도 하다. 康有爲도 그 바다를 보았을까? 부딪쳐 흩어지는 성난 파도가 해안을 무너뜨릴까 두렵지만, 마침내 눈송이처럼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왕조의 흥망성쇠를 부질없다 생각했을까?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입헌군주가 과연 그리도 시대의 요구에 맞지 않았을까? 일본이 그러했고, 지금도 유럽의 대부분 선진국들이 아직도 형식적으로 입헌군주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과연 미국식 민주주의나 프랑스식의 민주주의가 인류가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민주주의일까? 나는 그리도 험악하다는 군사독재시대를 살았지만 때로는 朴正熙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는 둔감한 백성이지만 때로는 우리 정치판이 싸움을 말릴 어른이 없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는 아이들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총격전으로 번지던 태국의 정변이 국왕의 한 마디로 잠잠해지고 타협을 했던 사례를 보면서 어쩌면 康有爲가 염원했던 입헌군주제도가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康有爲는 靑島의 아름다움을 자기의 증손자에게 전하며 이런 시를 남겼다.
海氣蒼蒼島嶼回 山巓樓閣抗崔嵬
茂林峻岺百馳道 重入仙山畵里來
바닷바람이 선선하게 크고 작은 섬들을 돌아오고
산꼭대기 누각은 자기가 더 높다고 우긴다.
우거진 숲과 빼어난 산이 이리저리 치닫는 것은
仙山으로 다시 들어와 붓질을 하려는 것이겠지.
康有爲는 자신을 孔子와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치적 행보를 멈추고 고향 曲阜로 돌아와 교육사업을 펼쳤던 孔子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靑島에서 남은 여력을 다해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남은 인생이 그 뜻을 펼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노산의 산자락에 줄줄이 이어진 연봉들과 우거진 숲을 一筆揮之로 그려버린 신선처럼 자신도 빼어난 인재를 얻어 광활한 중국대륙을 누비는 유능한 재목으로 키울 수가 있다는 희망을 이 한 수의 시에 담은 것 같다.
康有爲는 靑島에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대학을 설립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曲阜大學’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좋은 날을 골라 그는 스스로 曲阜를 찾아가 공자의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魯城이 둘러싸여 있고 沂水가 흐르는 형세를 갖춘 천하절경을 골라 대학을 설립하기에는 청도가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그는 曲阜大學이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구체화되자 그는 먼저 靑島에 預科를 두기로 하였다.
당시의 膠州商埠 督辦 高恩洪은 원세개의 北洋政府에서 교육총장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靑島가 수복이 되자 정규대학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북양정부의 수령 吳佩孚의 도움을 받아 舊 萬年兵址를 이용하고 각 지방에서 자금을 모아 1924년 8월에 사립청도대학을 먼저 설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康有爲가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이 실현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세웠던 이 계획은 나중에 상해에서 天游書院을 설립하는 기초가 되었다.
康有爲는 상당한 문화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근대적인 공공박물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일찍이 百日維新의 구처적인 강령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다. 光緖帝도 이 계획을 수긍한 적이 있다. 그 후 강유위는 해외로 망명을 하게 되어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각국의 정치제도를 살펴보는 틈틈이 적지 않은 진귀한 자료들을 매입하였고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와 박물관을 열어 그곳에 비치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靑島에서 康有爲는 비교적 공간의 여유가 있는 天游園을 이용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국내외의 문물들을 전시하였다. 그는 근대적인 박물관의 전시방법을 채택하여 설명문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나타냈으며, 외국인들이 와서 보고 유명해지자 여러 가지 전시품을 사갔다.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내가 康有爲故居를 방문했을 때 강유위에 관한 자료를 열람하고 싶었지만 의외로 별로 남은 것이 없어 서운했던 적도 있다. 그곳에 근무하는 孫昆麗 女史는 이름처럼 아름답고 친절했지만 이국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자료가 없음을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했다. 대신 개장이 금지된 康有爲의 침실과 독서를 하던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허락을 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쓸 때 참고로 한 康有爲에 관한 자료는 孫昆麗의 배려로 어렵게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나의 게으름처럼 나는 孫昆麗와 약속한 저녁식사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다음날 康有爲故居를 찾은 나는 결례를 사죄하고 孫昆麗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그 필름이 없어져 사진을 보내지 못했다. 아마 다시 청도를 찾아야 한다는 숙명이리라! 비행기 시간 때문에 황급히 떠나는 나에게 孫昆麗는 고이 보관했던 嶗山茶를 한 통 주었다.
첫댓글 같은 여행을 해도 이렇게 값지게 할 수 있다니요... 언제 상해는 한번 안 오십니까? 30년대 상해, 절강지역을 풍미했던 거상과 조폭들의 역사는 한번 안 다뤄보시렵니까...(혼날라나??)
거상이나 조폭이나 좀 거리가 멀지만 장~님께서 환잉해 주신다면 상해를 한 번 들려볼까합니다. 딸이나 진배없는 아이가 마침 상해에 있어서 겸사로---. 그 애 좀 잘 보살펴주이소.
스프링님에게서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이 정도 이 실줄은 요즘 많은 여러것에 숙연해 집니다...
좋은글인데....박정희의 향수에서 확 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