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평점: ★★★★★]
'로코테라피'라는 정신분석 심리학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자신의 체험담을 생상하게 기록한 자전적 체험수기.
저자인 프랭클 박사 본인과 수용자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겪은
가족의 죽음과 굶주림, 혹독한 추위와 핍박 속에서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와 같은
시련에 대한 내용과 이를 극복하여 인간의 삶의 의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로고테라피'를 발견하고 로고 테파리의 기본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책.
이세상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최고의 책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조지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이디쓰 와이스코프 조웰슨은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행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부터,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받고 명령받아 왔다.
지금의 나는 시련을 겪고 있어서 행복하지 않는데,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불행해 보이는데,
세상은 모두 행복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누구나 한 번쯤을 겪어 본즉한 느낌일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얻으려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 처럼, 어떤 행동 즉 일의 결과로서 나타는 것이며,
우리가 웃을 때 웃는 이유가 잇는 것 처럼,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찾아 쫓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발견하는 존재이며,
이는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에게 억지로 '치즈, 김치'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웃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행동을 '과잉의도'라고 부르며, 그러한 과잉의도때문에 우리 자신이 더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일단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되면,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 줄 뿐아니라, 시련을 견딜수 있는 힘도 주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 전체가 갖는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반문도 나올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로코테라피에선느 3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이다. (일)
두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경험과 성취 그리고 사랑0
마지막으로, 피할 수없는 시련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다. (시련과 고통)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이유는 무엇일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자문을 한다.
삶에게 의미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것 처럼 삶에게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내 삶이 바로 나 자신인 것처럼, 그 질문에 답하는 것도 역시 나 자신이어야 한다.
다시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첵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게 의미를 묻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삶이 우리이게 질문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답은
'말'로써가 아닌 책임감을 갖고 삶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는 바로 우리의 행동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두번째 물음처럼,
삶의 의미라는 것이 인간삶의 전체가 갖는 의미가 중요한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영화를 감상할 때, 영화의 수천가지 장면중에서 어느 장면은 중요하고 어느장면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화속의 수천개의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가 있고,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체의미는 드러나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 영화전체를 이해할 수 없지 않는가?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난다.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우리가 삶에 대해 답하는 일과 경험, 사람과의 만남(사랑) 등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시련에 대해서는 무조건 시련과 고통이 있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시련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니는가,
의미에 대한 의지,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취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없고, 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자유는 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고3이고, 취업준비생이라면
이러한 상황은 바꿀 수 없을 것이며, 원해서 얻어진 상황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을 것인가라는 것은 순전히 나의 자유이며,
그에 대한 대답은 나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책임도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갖고 그냥 고3 야간 자율학습 때 음악을 듣거나 잠을 자는 태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시간에서 능동적으로 공부를 하는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순전히 나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지의 발현이 곧 행동으로 표현되며, 이러한 행동을 왜 하였는가라는 질문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지금 닥친 시련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나의 모습에서
바로 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나도 모르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