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여호와를 섬길 이유 본문 : 여호수아 24장 16~33절 김양재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 설교, 유언입니다. 찾아오셔서 저희에게도 똑같은 여호수아의 마음으로 말씀하여 주옵시고 저희가 깨달을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 시간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번 주에도 천인공노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보험금 6억원을 타내기 위해서 남편의 오른쪽 눈을 핀으로 찔러 실명시키고, 자기 어머니도 눈을 찔러서 실명시키고, 오빠에게 염산을 뿌리고, 집을 불사르고....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한 주도 안 빠지고 일어납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예화를 가져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주 사건이 일어나는 우리나라와 전세계를 봅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학 연구팀이 청소년 9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전체적인 자료가 많은데, 신앙 안에서 자란 자녀와 비신앙인 가정에서 자란 자녀를 비교해 보니 신앙 안에서 자란 자녀가 부모와의 관계가 월등히 좋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러가지 조사항목 중에서 예를 들어 '커서 엄마처럼 살고 싶은가' 물었을 때 신앙인 아이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어머니를 존경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신앙인 아이들의 월등하게 많은 비율이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비율은 좀 떨어집니다. 또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재미있는가' 물었을 때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에 대한 대답이 신앙인 아이들이 월등히 높았고, 아버지에 대한 대답이 좀 떨어지고, 비신앙인 아이들은 훨씬 더 떨어졌습니다. 자녀의 친구 관계를 알고 있는가, 매일 온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가, 스포츠 게임과 가족들의 놀이 등에 자녀들과 함께 동참하는가, 모든 질문에서 신앙인 가정이 월등하게 높은 비율을 나타냈습니다.
제가 날마다 영혼 구원을 부르짖는 것은 개인구원은 가정구원, 사회구원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개인의 구원이 가족의 구원을 가져오고, 사회의 구원을 가져오고, 세계의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한 사람의 헌신으로 그 가정이 변하고, 우리나라가 변했습니다. 황무지였던 이 땅에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이만큼 달라졌습니다. 저 역시 한 사람의 구원을 놓고 애통절통했던 것이 오늘날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놓고 한 번도 애통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도 안 변하고, 온 집안 식구도 결코 안 변합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서를 읽어오면서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에서는 세일산을 소유로 주고 끝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애굽에서 노예생활도 하게 하시고,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요단도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등 여러 전쟁도 거치고, 홍수도 오고.. 그런 사건을 많이 주시지만 그 사건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이 갈라지게 하시고, 아모리에게는 왕벌을 보내셔서 때마다 돕는다고 했습니다. 사건을 많이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돕기 때문에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다. 너희들은 선택해라. 아무 힘도 없는 아모리인들의 신을 너희가 섬기겠느냐.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러분에게 선택을 하라고 합니다.
정녕 여호와를 섬길 이유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왜 섬겨야 합니까. 첫째, 종의 자리에서 나오게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7절 -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종 되었던 우리를 나오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정녕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을 죄에 매여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모든 자를 놓아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가 없는 우리는 모든 것이 종노릇합니다. 자식의 종노릇, 남편의 종노릇, 명예의 종노릇, 돈의 종노릇, 인정받는 것의 종노릇, 교양의 종노릇, 부모의 종노릇 다 종노릇을 합니다.
종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의지가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만족도, 행복도 없습니다. 모든 드라마의 부모들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가 주제입니다. 그래서 로보트처럼 자식을 사랑하고,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다가 배반 당하고, 나중에 허무하다고 외치는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창세기부터 보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의 형벌로 우리에게 저주를 주셨습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수고와 남편을 사모하는 것을 형벌로 주셨고, 남자에게는 땀 흘려 수고해서 식물을 먹을 수밖에 없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예수가 없으면 그것은 형벌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는 여자들이 자식과 탯줄로 엮어져 있고, 그것을 좋은 모성애로 부릅니다. 그러나 모성애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자식에게 종노릇한다는 말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일생 동안 사로잡혀서, 내가 좋아서 종노릇을 합니다. 그 자식들은 커서 결코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고마워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지 않는 사람은 부모를 사랑할 수도 없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물론 모성애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무의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입니다. 모성애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고도 인류가 이 정도로 지탱이 됐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드러내지 않은 하나님 때문에 모성애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심리학자 에릭슨이 히틀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정식학적 분석을 했는데 히틀러는 아주 난폭한 아버지와 모성애가 지극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남편의 매질에 시달리면서도 아들을 감쌌습니다. 그 사랑이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의 난폭함은 히틀러에게 강한 증오심과 살인 충동을 심어주었고, 어머니의 그 지극한 인내와 보살핌은 강인한 극기심과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증오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발작을 하는 바람에 온 유럽을 피바다로 물들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모성애는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난폭함과 하나님이 없는 모성애는 똑같이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 가정이 죄로 출발되었기 때문에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결코 없습니다. 죄가 들어왔을 때의 상태를 기억해 봅시다. 뱀이 와서 여자를 꼬였고, 여자가 남자를 꼬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인의 후손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날마다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발뒤꿈치를 날마다 상하게 하는 것을 결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결정적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부부간의 문제가 있고, 무슨 문제가 있어도 그것은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그 뱀의 머리를 탁 밟으시면,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면 그 때부터 소망이 있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지 않는 가정은 99%도 아니고 100% 뱀의 사주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전부 다 뱀의 말을 듣고 살기 때문에 100%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호르몬인 테스톡스테론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길게 가봐야 30개월을 못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무와 덫이 돼서 아름다워 보이고 얼마나 나에게 해를 끼치는지를 모르니까 이방인과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채찍과 가시가 되어서 힘들게 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테스톡스테론이라는 사랑의 호르몬에 눈이 멀어서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고, 환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가 없는 가정은 살아갈 수록 망할 일밖에 없습니다. 99%도 아닙니다. 예수가 없는 가정은 100%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그랬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냥 돈이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돈 떨어지고, 병 걸리고 그러면 사랑의 현주소가 다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자란 가정의 자녀들은 그래도 관계가 좋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택한 자녀이기에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탈출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탈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왔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탈출하려고 하는데 애굽 사람들은 열 가지 재앙이 와도, 심지어 자기 맏아들을 죽여도 한 사람도 안 나갑니다. 끄떡을 안 합니다. 피바다가 되고 맏아들이 죽어도 자신이 가진 부와 이집트의 나일강이 모든 것을 해줄 것 같아서 절대로 나오지 못합니다.
저희 친정은 이북에서 14대를 살았습니다. 6.25 전쟁이 나도 땅들이 많아서 아무도 못 내려오셨습니다. 친정 집안에서 제일 별 볼 일 없는 저희 아버지만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와서 이렇게 살 줄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그 땅을 두고 내려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북에서 내려올 때도 힘든 사람들만 내려왔지 있는 사람들은 못 내려왔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와도 강퍅한 애굽은 절대로 안 따라옵니다. 믿고 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 지진 2년 전에 아모스 선지자가 '너희는 망한다. 30년 후에는 완전히 망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재앙이 계속 오는데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자녀에게 사로잡히고, 남편에게 사로잡히고, 병에 사로잡혀서 벧엘과 길갈에서 허무한 예배를 드립니다. 가서 빨리 내 죄를 회개해야 할 텐데, 내 죄는 보지 않고 자식과 남편에게, 돈에 사로잡혀서 벧엘과 길갈에서 허무한 예배를 드린다고 한 것이 아모스서 말씀입니다.
고난이 오면 다 믿을 것 같죠. 안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이 심판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고, 그것이 전형적인 종의 모습입니다.
종된 우리를 홍해를 통해 꺼내주셨으니 너무나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기 14장에서 홍해를 건너고 15장에서 미리암이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16장에 오니까 광야에서 "애굽의 고기가마가 생각난다~ 너희가 왜 우리를 끌어내서 여기에서 주려 죽게 하느냐"고 금새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도 49:51, 48:52... 이렇게 조금씩 달라져가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예수 믿었더니 주려 죽게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제가 우리들교회에 환난 당하고, 원통하고, 빚진 자들 오라고 외쳤더니 우리들교회가 굉장히 부자인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들교회에 왔다가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만 받으면 다냐. 오라고 했으면 뭔가 도와줘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돕고, 안 돕고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을 통해 돕더라도 성령이 그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왜 안 도와주느냐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냥 떠나면 될 줄 압니다. 이스라엘을 계속 잘 살게 하려면 곧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되는데 뭐하려고 광야에 40년을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못 도와주지만, 카드 빚도 못 갚아주지만 그래도 저는 환난 당하고 원통하고 빚진 자들을 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다 갚아 나갑니다. 잠시 지나면서 보면 스스로 다 갚아 나갑니다.
어떤 자매는 남편이 외도를 하고 이혼하자고 하니까 외국에 이민을 가서 애들 데리고 살아야 겠다, 돈도 하나도 안 준다고 합니다. 남편이 바람피운 지 얼마나 됐는가 물었더니 서너달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서 생활비를 받아야지 벌면 얼마나 벌겠는가 했습니다. 그랬더니 본인이 학원강사를 하는데 수요일도 못 오고, 수요예배도 못 오고, 얼마를 벌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에 와서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 오기 위해서 80만원 주는 직장을 접고, 15만원 버는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남편이 생활비를 보내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시면 그렇게 주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걱정을 하십니까. 믿음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징징 거리고 울면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가만히 있어야지 하나님도 놀라셔서 얼른 응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가난한 동네에 가서 만원을 집집마다 뿌렸습니다. 모르는 돈이 뿌려져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집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몰랐습니다. 저녁이 되도록 아무도 안 집어가니까 그냥 집었습니다. 둘째 날도 또 만원씩 뿌렸습니다. 집을까 말까 하다가 또 집었습니다. 셋째 날도 뿌리고 집고.. 이러다가 '야~ 이게 공짜구나'하고는 넷째 날부터는 기뻐서 기다렸습니다. '돈이다~ 돈~'하면서 일주일 내내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3주째가 되면서는 이제 당연히 집어 넣습니다. 그러다 한 달이 됐을 때 돈을 딱 끊었습니다. 그랬더니 집집마다 '나는 왜 안 주냐. 우리 집만 뺏지!'하고 불평을 하면서 악을 썼다는 겁니다.
복음도 똑같습니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받고는 너무 좋았다가, 그 다음에는 '그런데 왜 안 줘요. 예수 믿었는데 왜 돈도 안 주고, 병도 안 고쳐줘요. 왜 나를 안 돕는 거예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 되었던 과거를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홍해를 건넜으면 굶어죽어도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왜 우리 집만 안 준다고 합니까. 딴 집도 다 안 줬는데 우리 집만 안 준다고 불평을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왜'는 없습니다.
둘째,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19절 -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하고서는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나도 싫은 나'를 발견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 끊는 거야. 나는 왜 이렇게 포기를 못하는 거야' 이런 마음이 저희들에게 다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의롭게 칭해주셨지만 성화해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애굽의 가치관을 누리고 싶어하고, 감정에 춤을 추고,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애굽 때문에 기쁘고, 돈 때문에 기쁘고, 이쁜 것 때문에 기쁘고, 병이 나아서 기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면 떨어져도 기쁘고, 병에 걸려도 기쁘고 완전히 다른 가치관에서 누려야 되는데 여전히 똑같은 애굽의 가치관을 누리기 때문에 여러분을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나와 내 가정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니까 백성들은 '우리도요. 우리도 섬기는데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섬기기는 뭘 섬기냐, "능히 못 섬기리라"고 했습니다. 능히 못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인데 너희가 섬기겠는가 그런 뜻입니다. 내가 그렇게 섬긴다고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너는 못 섬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두려운 말이지만, 그것이 사랑의 말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했을 때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하신 것이 사랑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안 되는 것 때문에 평생 치사한 감정을 겪으면서 간다고 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처절하게 고백하면서 가는 겁니다. 날마다 눈을 뜨면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을 미리 가르쳐주셨으니까 다행입니다.
뭐든지 확신을 하는 사람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확신을 하는데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는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치우칩니다. 치우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치우치는 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증오입니까? 증오는 그래도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겁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중학교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길 가다가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저렇게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가. 내가 명색이 목사인데 가서 피우지 말라고 해야지'하고 갔는데 가보니까 애들이 너무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말을 안 합니다. 내가 아무리 목사라도 말을 못합니다. 애들이 덤벼들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 개척해 놓고 유명을 달리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우리 손자나 아들이 서서 담배를 피운다고 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험상궂어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야~~!!'하고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힘도 안 되는 우상에게 복 받겠다고 가서 섬기는 꼴을 못 봐주시는 겁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정녕 섬기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남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섬김의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섬기고, 배려하는 것이 나타나는 모습이 경건입니다.
나는 이방신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24절 -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베드로후서 1장 3절 말씀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섬기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남들을 섬길 수 있고, 이방신을 안 섬길 수 있겠습니까.
신기한 능력으로 경건에 속한 집사님 두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집사님도 아니고 믿은 지 몇 개월 된 초신자 아무개 성도님입니다. 그분이 1~2년을 직업을 못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덤프트럭 사무실을 할 때 3천만원을 가지고 도망갔던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24톤 트럭을 빌려 줄테니 밤에 운전을 해서 기름값만 제하고 하루에 2~30만원씩 벌어쓰라고 제의를 하더랍니다. 트럭 운전을 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일이고, 돈 벌 수 있는 길이니까 당장 가야 할텐데 수요예배, 목장예배에 참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대리운전, 잡부 일까지 하고 있는데 순간 너무나 갈등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시편 1편을 묵상하는데 부인이 1~2절을 외우라고 하더랍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외우고 나서 보니까 '주님, 저는 악인이군요'하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생활은 힘들어도 지금까지 가느란 줄을 잡고 있는데, 다른 게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꼬이니까 악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 힘드니까 그 3천만원은 힘 되는 대로 조금씩 갚으라'고 했답니다. 그 사람이 돈 주려고 전화한 것도 아니고, 그 사람 멱살 잡아봐야 나올 것도 없고... 이것을 안다는 게 축복입니다. 그래서 큐티가 신기한 능력이고, 말씀이 능력입니다. 어려울 때 누가 와서 뭔가 제시하면 일확천금이 올 것 같아서 요동하기 쉬운데 이렇게 분별이 되는 겁니다.
다른 집사님도 예전에 파출부를 하셨는데 일하던 집주인이 삼백만원을 꾸어갔다고 합니다. 일년도 더 모아야 되는 돈인데 그동안 갚지를 않더니 연락이 와서 '우리 집에 날마다 일하러 와주면 삼백만원을 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게 돈을 갚는다고 부르는 것이겠는가. 나를 일 시켜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생각이 들어서 갚을 마음이 있으면 갚고, 말려면 말라고 했답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이렇게 당당합니다. 돈이라고 거기에 엎어지지 않습니다. 부자들이 엎어지는 돈에 엎어지는 것이지 하나도 없는 분들이 이렇게 칼 같이 적용을 합니다.
또 5일 전에는 야간 현장을 한달 동안 봐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그것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남들은 '저 사람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할지 모르지만 그분이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주님, 다 보고 계시죠. 되돌아 갈 수도, 정지할 수도, 주저 앉을 수도 없는 현재의 상황을.. 구하고 건져주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신앙 생활 시작했는데, 아들딸도 다 교회에 오게 했는데 제가 주저앉으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정지하면 우리 딸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되돌아가면 우리 마누라는 어떻게 합니까. 주님, 저희 모두 건져주시고 구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무리 힘들어도 가느다란 줄이 튼튼한 밧줄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들 공동체에 잘 붙어있겠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또 다른 분은 직장을 못 구하고 있어서 저희가 다 같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텔 요리사에 응시했다가 취직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호텔은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니까 갈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은 정말 부인의 기도제목이었는데 수요예배, 목장예배 두어번 참석하고는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일을 지키기 위해 그 일을 거절했습니다.
교회 나온지도 얼마 안 되는 분들이 이렇게 신기한 능력으로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 무서운 적용을 하셨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바꿔주시고, 우리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저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영국 성공회 수장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둘이나 낳고도 이혼을 쉽게 했습니다. 일반인도 말씀을 본다면 하지 말아야 될 이혼을 쉽게 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혜택으로 불쌍한 사람들 돕겠다고 해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랬지만 이혼을 하고 마지막에 아랍의 어느 부자와 결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혼을 하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모슬렘과 결혼하는 것을 그래도 막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믿음의 지도자들이 이혼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영국 왕가에 이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 국가임을 부르짖는 그 나라의 지도자들도 이혼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데 우리들교회에서는 이렇게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밥이 나오냐? 밥이 나옵니다. 떡이 나오냐? 떡이 나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다이애나보다 이렇게 적용하신 분들을 축복하리라고 믿습니다.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내가 받은 혜택을 나누어주는 것,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 신은 섬기지도, 절하지도, 이방인과는 혼인하지도 말라고 하신 그것부터 지키라는 겁니다.
세 번째, 우리를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25절 -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말씀을 전할 때 모든 것을 다 준비해서 매끈하게 전하면 그것이 율례와 법도를 베푸는 것일까요.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 마음에 녹아지지 않습니다. 율례와 법도를 베푼다는 것은 은혜로 마음이 녹아지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모로서 자식들이 마음이 녹아지게 해야 합니다. 목자가 되어서 목원들의 마음이 녹아지게 해야 합니다.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결코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녹아지지 않습니다. 앵무새처럼 외울 뿐입니다.
D.L 무디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복음적인 설교로 영혼을 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방에서 무디를 강사로 모셔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무디를 초빙하기 위해서 준비위원회가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무디를 강사로 데려오려고 회의를 열었는데 젊은 목회자 한 사람이 일어나서 '무디밖에 강사가 없느냐. 성령이 무디에게만 임하는가'하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존경받는 원로목회자 한 분이 일어나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무디에게만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이 시대에 무디를 독점하고 계신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성령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쓰셔야 합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성령이 운행하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왜 안 될까, 생각하기 이 전에 여러분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물이 갈라진 기적으로 요단을 건너고 길갈에 돌을 세웠습니다. 길갈의 돌 이후에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8장에 실로에 회막을 세우고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겜에서 조상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며 이 증거의 돌로 서로가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손정원, 김은찬 부부의 아이 승우가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여러분이 모두 증인이 되셨습니다. 오늘 선언한 것에 대해 서로가 증인이 됐습니다. 요즘 인터넷 시대에 전세계에 설교와 큐티나눔이 전파되고, 또 목장모임으로 서로가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대로 되어가는 우리들교회이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이 '우리들교회에 뜨거움이 있었어.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었어. 기가 막힌 적용을 했었어'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보았는데, 이것을 보고 배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 나누어진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우리가 죽어도 기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학교에서는 '성서체험전'을 보러 갔습니다. 성막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고 합니다. 50년을 교회에 다녀도 성막을 못 보다가 몇 년 전에 처음 재현한 것을 보았는데 우리 아이들을 복이 많습니다. 출애굽기에도 25장부터 40장까지가 성막 이야기, 역대상의 솔로몬 성전, 에스겔 40장부터 성전 이야기, 그리고 계시록에도 성전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 말씀을 코끼리 뒷다리 만지듯이 읽으면서 등대가 뭐고, 물두멍이 뭐고, 바다는 또 뭔가 그랬는데 그것들을 다 원형처럼 재현해 놨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그것을 봤으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본 것을 떠올리면서 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주일학교 아이들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입장료가 만원인데 그런 일에는 좀 써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기억하라,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례와 법도를 베푸는 삶은 무엇입니까. 말씀에 젖어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 19, 21, 23, 26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가로되,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수아가 가로되..."하고 나옵니다. 그동안은 계속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가 나왔는데 마지막에 죽기 직전이 되니까 "여호수아가 가로되"가 나옵니다. 성경을 늘 읽고 있는 사람은 그냥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말이 대단한 신비의 말이 아닙니다. '오늘은 전쟁이 난다' 무슨 대단한 예언이 아니라 오늘 여호수아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냥 반복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너고, 증거의 돌을 세우고.. 지금까지 쭉 있었던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구속사이고, 우리의 간증입니다. 제가 이렇게 반복을 핻려도 여러분이 적용을 못하는 것은 아직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어렵다고 합니다. 애굽같은 사람들은 제가 날마다 똑같은 소리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도 여호수아를 읽으면서 말씀이 꿀송이 같고 은혜를 받는데 성경을 공부로 읽으려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나의 출애굽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해도 부족합니다. 툭 치면 나오는 나의 출애굽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그런 간증이 없이 공부만 하려고 하니까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9절 -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여호수아가 "모세의 시종"으로 불리다가 일백 십세에 죽는 마지막에 딱 한 번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고 갔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람의 종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렇게 마지막에 여호와의 종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늘 모세의 시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가 계속 되더니 마지막에 하나님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주신 아버지 다윗의 권위를 마음대로 끌어내린 압살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래서 틀렸어요. 저래서 틀렸어요. 밧세바와 간음한 주제에 무슨 왕이 될 수 있어요'하면서 끌어내린 압살롬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사단의 종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사는 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다 기억하길 원하지만 31절을 보십시오.
31절 -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성경의 한 장을 뒤로 넘겨서 사사기 2장 10~11절을 보겠습니다.
사사기 2장 10~11절 -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너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을 했는데 금새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태신앙 3, 4대라고 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믿는 자의 수천대의 축복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부지런히 여호와를 섬기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냥 '섬겨, 섬겨'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본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본을 보여야 합니다. 집안에서도 힘든 사람은 다 믿는 사람 차지입니다. 사회에서도 힘든 사람은 교회 차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노인 문제를 책임져야 하고 장애우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상대하기 힘든 사람을 누가 하겠습니까. 사랑을 가지고 있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야 여호와를 섬길 수 있습니다.
미국 NBC의 기상 캐스터인 엘로커는 친 자녀와 입양아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글을 '가이드포스트'지에 기고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엘로커의 부모인데 엘로커의 형제가 6명인데 그 중 세 명이 친 자녀이고, 세 명은 입양아라고 합니다. 거기에 수양아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굉장히 부자인가 했더니 뉴욕시의 버스 기사였습니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그 아버지가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임시직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을 자식이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얼마나 사람을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지에 대한 한계는 없단다' 자식이 많아질 수록 그 가정의 사랑도 커졌습니다. 한 명을 입양할 때마다 사랑도 너무나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일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부모 지도자가 율례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법도를 베푸는 삶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사를 하고 있는 것이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밖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보이신 본을 생각하면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한 부담이 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살 때 자녀들이 정녕 여호와를 섬기게 될 줄 믿습니다.
32절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야곱이 죽기 전에 금 일백개를 주고 세겜을 샀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꼭 돌아오라고, 지금은 애굽으로 가도 이곳이 약속의 땅이니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몰라서 돈이 좋아 애굽에 갔지만 그래도 돌아오도록, 지금은 자녀들이 예수를 안 믿어도 내가 장애우를 돕고, 노인사역을 돕고, 교회를 돕고, 금 일백개의 헌신을 했을 때 400년이 지난 후에라도 내 자녀들이 약속의 땅에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를 했지만 이 약속의 땅에 돌아와서 묻혔습니다. 내가 헌신한 그 부분에서 자녀가 축복을 받게 돼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이 율례를 베푼 삶입니다. 떠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200만 명이 지금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한 사람이 이름 없이 돌아가셨는데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헛것은 없습니다. 주님 때문에 쓴 것은 헛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3절 -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모세의 시종은 여호수아이고, 여호수아의 시종 격은 엘르아살입니다. 엘르아살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높은 사람인데 그는 아론의 아들이기 때문에 유다 땅에 묻혀야 제대로 묻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따라서 에브라임 산지에 장사됩니다. 정녕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따라가는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있다는 것 또한 베푸는 삶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례와 법도를 베푸는 삶에 가시적으로도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서를 끝맺으며 여호와를 정녕 섬기기로 결단하십니까. 불신결혼을 안 시키기로 결단하십니까.
나를 종 되었던 애굽에서 꺼내주신 그 분에 대해 감사하십니까.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때문에 내가 주님을 섬기기로 결단하십니까. 이제 율례와 법도를 베푸는 삶이 되기로 결단하십니까.
다같이 이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내가 무엇이관대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인생이 되었는지요. 애굽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였는데 주님께서 종 되었던 나를 인도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주제를 알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옵소서. 무서운 적용을 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 신기한 능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었지만, 다이애나 왕비도 아니지만 이렇게 한 가지 적용한 것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율례와 법도를 베풀기 위해 은혜로 녹아지는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야하는데 참으로 그러지 못해서 나는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만 주님께서는 너는 능히 섬기지 못하리라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그러나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서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믿으라고만 하고 하나도 희생이 되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주시고 말씀을 통하여서 은혜로 녹아지는,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 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오니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두루마리를 입혀주셔서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능히 힘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