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간 남석교 고려견의 집을 찾아줍시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긴 세월이다. 그 기나긴 백년을 온전한 기억으로 살아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찌 운이 좋아 하늘의 점지로 백수를 넘는 이가 기네스에 오르기도 하지만, 사철가 노랫말처럼 <팔십을 산다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근심 걱정 다 제하면 사십도 못사는 게 인생>이란다. 지금, 그 인생의 짧은 봄이다!
10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삼키면서 한적하던 내륙의 작은 도시 청주에도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터진 봇물 밀려들 듯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쯤이다. 조선을 요즘 말로 ‘완전 재팬化’ 하기 위해 일본은 그들의 종교를 사무라이 칼날 위에 얹혀 들여오는데 神道를 통하여 국토는 물론이고 조선정신까지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 각 도시마다 神社를 짓는다. 도시중의 길지(吉地)를 찾아내어 마침내 왜 귀신들을 들여 앉히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시작한 것이란 말이다.
청주에 선 첫 神社는 문화동 당산이었는데 지금의 천태종 명장사가 있는 지역이다. 1930년대가 되어 일제는 당산 神社를 우암산 삼일공원 남쪽골짜기인 지금의 불교수도원 자리로 옮긴다. 이 땅은 당시 충북 제일의 부자였던 민영은의 소유였는데 일제는 민영은에게 토지교환을 요청하였고 이에 불감청 고소원이던 민영은은 즉시 땅을 내어주었고--- 바꾼 토지 위에 일제는 신사를 민영은은 자신의 별장을 지었다.-연못정원까지 있던 이 별장에 청주에서 잘 나가는 왜인들과 조선인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사진도 몇장 남아있다.-
1930년대 남석교가 모랫 속에 매몰된 후 다리 끝에 서있던 네 쌍의 고려견상 돌기둥이 신사가 있던 당산으로 옮겨져 왜귀신 문지기 노릇을 했는데 마침내 해방이 되어 1951년 전쟁통에는 그 중 두 쌍이 용암사 주지스님의 도력(?)으로 청주대학교 구내의 용암사로 옮겨진다.
나머지 두 쌍은 도지사 관사로 옮겨졌다가 그 중 하나는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채 충북대교정에 남아 있고 한 마리는 유기견이 되어 어딘가 외롭게 떠돌고 있는지 행방을 모른다.
서울 광화문 앞에는 덩치 큰 해태석상이 있다. 한때는 그 해태가 화재를 막아주는 신령스런 동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만든 이의 본디 의도는 法과 正義의 수호동물로 만들어 세운 것이었다. 몇해 전 높다란 좌대 위를 용감하게(?) 올라가 해태의 목덜미 아래 잔등을 쓰다듬어 본 적이 있었는데 손끝에 돋을 새김한 해태의 뿔이 만져졌다. 불의를 보면 감췄던 뿔을 세우고 악을 무찌른다는 상징성을 새겨놓은 것이다. 그 해태는 상상 속의 동물인데 비해 생활속에 반려견으로 살아 온 청주의 고려견상은 어떠한가?
그 형상을 읽어보면 이렇다. 망주석 형태의 팔각 돌기둥 위에 늘어진 귀, 착한 눈망울, 말려있는 꼬리, 큰 발톱과 커다란 방울을 달고 살짝 고개를 돌린 우리나라 토종개가 올라앉은 형상이다. 이는 남석교를 지나는 길손과 청주민의 안녕과 복을 전해주는 청주정신의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말이 나온 김에 솜씨 있는 석수에게 크고 작은 고려견상을 만들게 하여 주민센터 입구에 구청입구에 시청 앞에 서문다리에 그리고 차량진입을 막는 볼라드로 세우면 좋겠다. 그리고 남석교 자리 네 귀퉁이에 모형 석상을 만들어 세우자. 그러면 햇볕을 받기만 해도 곧 국보급 보물인 남석교와 더불어 청주사람의 상징이 되어 큰 사랑을 받게 되리라.
새로 봄이 왔다. 발길을 청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보자. 그리고 고려견의 머리를 한번 씩 쓰다듬어 보자. 그러면 고려견 목에 달린 돌방울에서 아름다운 고렷적 방울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첫댓글 석교동의 유래도 남석교에서 유래된 줄 알고 있네 우리나라 표준시가 동경시로 바뀌기전까지 석교초등학교 정문 도로 동경127.5도 남중시로 사용한 것등 역사로 증명 됨 남석교의 복원 및 국보지정 운동도 직지 찾기 운동도 병행 함이 좋을 듣하이 남석교 고려견상 청주대학교에 보았네 친구 이번 괴산 봄나들이 같이가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