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가 제도 오딘으로 귀환하자 키르히아이스는 이제 동맹 전체의 권력을 손에 넣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사태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진전되어갔다. 고등판무관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한 키르히아이스가 첫 번째로 내놓은 것은 “동맹의 내정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라인하르트가 오딘으로 돌아간 후 처음으로 열린 동맹의 국무회의 석상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국무회의가 레벨로의 주도로 시작되자마자 키르히아이스는 첫 번째로 발언권을 신청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발언했다.
“분명 제게는 동맹 정부의 모든 회의를 방청하고 그 결과를 확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라트 평화조약에 명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행성동맹의 내정자치권에 대한 간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 동맹국 정부의 각종 회의에 일체 참석치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오딘에 계시는 로엔그람 공작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 회의 내용은 정리해서 차후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자기가 할 말을 마친 키르히아이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어안이 벙벙해 있는 동맹정부 요인들을 그대로 두고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그는 평화조약의 준수를 위한 동맹군의 전함 해체 및 군사시설 폐쇄 등의 업무에만 관여할 뿐 동맹의 내정에 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동맹정부의 회의를 방청하지 않음으로서 내정자치권을 한층 더 보장해주겠다는 키르히아이스의 선언은 동맹 조야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조약안은 누가 읽어보아도 제국 고등판무관의 위치를 동맹의 총독으로 놓고 있었다. 그것을 굳이 고식적으로 해석하여 동맹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키르히아이스의 태도는 그들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가 참가하지 않음에 따라 동맹 정부의 요인들은 예전처럼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의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군에게 보내는 것은 회의의 결과뿐인 만큼, 그 과정에서 어떤 토의가 오갔는지는 밝힐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동맹 정부에의 간섭을 그만둔 키르히아이스는 동맹 시민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다. 방송 채널의 각종 대담프로그램에 출연하는가 하면, 신문이나 잡지와의 인터뷰도 일절 마다하지 않았다.
자연히 키르히아이스의 인기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원체 잘생긴 얼굴에다가 부드러운 태도, 라인하르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따뜻함까지 겸비한 그의 인기는 상승일로를 걷기만 했다. 어느새 동맹 시민들은 3만 척의 함대를 지휘하여 동맹령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바로 그라는 것을 잊고 마치 미남스타에게 열중하듯 그에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르히아이스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노래, 드라마, 영화 등이 잇달아 만들어지는가 하면 길거리 노점상에서까지 그의 브로마이드 사진이 팔릴 정도였다. 보다 못한 판무관부의 요원들이 단속에 나섰지만 키르히아이스 스스로가 단속을 중단시켰다. 동맹 국민들이 자신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얼마 안 가서 라인하르트가 황제로 등극하고 키르히아이스가 원수로 승진하자 그의 인기는 더욱 더 올라갔다. 스물 두 살의 청년원수, 게다가 엄청난 미남이니 말해 뭣하겠는가? 당시 행성 하이네센에만 8만개가 넘는 그의 팬클럽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맹 국민들을 놀라게 한 그의 행동은 이런 것만이 아니었다. 공무에서 거의 손을 뗀 키르히아이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유행성동맹군 예비역 원수 얀 웬리의 집을 찾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퇴역하여 연금생활로 들어간 얀이었지만, 키르히아이스의 방문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 스스로 키르히아이스에게는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기도 했고,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율리안 민츠도 이때 키르히아이스를 다시 만났는데, 이때 키르히아이스는 2년 전의 그 옛날 이젤론에서 있었던 율리안과의 만남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 그에게 감격을 안겨주었다.
얀의 집을 방문한 것은 키르히아이스에게 뭔가 남들이 모르는 즐거움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첫날 저녁 늦게야 얀의 집을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르히아이스가 바로 그 다음날 얀을 호텔 샹그릴라의 제국 고등판무관부로 초청했던 것이다. 전략적 신격이나 전술적 능력이나 전혀 질 것이 없는 두 사람이니 만큼 주고받을 이야기는 무수히 많았고, 덕분에 한껏 흥분한 얀이 같이 초청받았던 프레데리카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로 키르히아이스와의 이야기에만 열중할 정도였다. 특히 키르히아이스가 들려준 라인하르트의 과거 출전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였다. 거기에서, 아스테이트에서 맞붙기 이전에도 자신과 라인하르트가 수차례 전투를 벌였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때 벌어진 제6차 이젤론 공방전에서 3000척을 이끌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던 그 제국군 사령관이 황제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르셨군요?”
“정말이지 그럴줄은….”
“뭐, 피장파장입니다. 저희도 그때 황제폐하를 포위, 궁지에 빠트린 장본인이 얀 원수 각하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뿐입니까? 제4차 티아매트 전투에서, 행성 레그니츠아에서 맞붙었던 사실도 서로 몰랐으니까요.”
“그땐 정말이지, 저희 사령관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당시 함대 사령관이던 파에터 중장께서는 제 계획을 실용성이 없다면서 각하시켰는데 황제께서 그걸 그대로 써먹으셨으니, 제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하하, 전쟁이란 게 다 그런 거죠.”
“하긴…귀공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리 원망할 것도 없긴 하군요.”
이런 식으로 키르히아이스는 거의 모든 여가시간을 얀 웬리와 함께 보냈다. 자연히 동맹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국의 통치가 동맹에 대해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졌다.
이 모든 행동들이 키르히아이스의 치밀한 계획 아래 행해진 것들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키르히아이스로서는 귀찮게 동맹 정부의 회의를 방청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직접 듣지 않더라도 거기서 오간 이야기들은 모두 그의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동맹이 망한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동맹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제국에 줄을 대지 못해서 난리가 난 상태였고, 이들의 입을 통해서 동맹 정부의 모든 기밀사항들이 판무관부로 흘러들어오고 있는데 굳이 귀찮고 번거롭게 회의석상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론플레이도 마찬가지였다. 키르히아이스는 예전 유년학교 시절부터 사교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던 라인하르트를 대신해서 웃는 얼굴로 세상을 대하는데 이골이 나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거만한 행동이 사람들의 기분을 뒤엎어 놓으면, 그것을 다시 정리하는 것은 언제나 키르히아이스의 몫이었던 것이다. 지금 동맹에서 그가 하고 있는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는 언제나 차가운 냉소만을 던지는 라인하르트 대신 미소를 지어 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것,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동맹 국민들은 제국에 정복당한 현실 대신 환상속의 왕자님 같은 그의 모습을 좇으며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꿈에 빠져 있었다.
물론, 자신의 캐릭터를 이용하는 사업자들에게 로열티를 받아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액수가 1년에 500만 마르크에 달했다는 기록이 현존하고 있다.
얀과의 접촉도 마찬가지였다. 키르히아이스는 얀이 분명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확증을 잡기까지는 얀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예 어떤 행동도 꾸미지 못하도록 자신이 그의 옆에 붙어서 다녔던 것이다.
물론 그것 하나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목적은 제국에 반대하는 동맹의 주도 세력이 얀을 친제국인사로 판단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늘 제국 판무관과 붙어 다니는 얀, 그리고 지극하게 대접받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은 얀의 정치적 성향이 제국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었다. 자연히 그들은 얀으로부터 멀어질 것이고, 유사시에도 함께 행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얀 역시도 키르히아이스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딱 잘라 방문을 거절할 핑계도 없고, 적극적으로 '나는 제국이 싫다'고 천명하고 다닐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키르히아이스의 계획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구경할 뿐이었다.
첫댓글 우와 정말 기다렸습니다. 키르히아스가 설마 라인하를트를 배신하는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