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 |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
---|---|
출생 - 사망 | 1873년 ~ 1929년 |
청 목종(穆宗) 동치(同治) 12년인 1873년에 광둥성 신회헌(新會憲) 웅자향(熊子響, 지금의 장먼(江門)시 신후이(新會)구)에서 태어났다.
자는 탁여(卓如), 임보(任甫)이고 호는 임공(任公), 음빙실주인(飲冰室主人), 음빙자(飲冰子), 애시객(哀時客), 중국지신민(中國之新民), 자유재주인(自由齋主人) 등이다.
그의 아버지는 독서를 즐기고 경서를 좋아했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것을 높은 경지에 이르는 길로 생각했다.
12세에 광둥성 광저우(廣州)로 가서 학해당(學海堂)이란 서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양광총독2)인 독원원(督阮元)이 세운 학해당은 건가3) 학풍이 강했다.
여기서 훈고학과 법령제도 외에 고증, 진위 변별, 집일4), 보정 등 고문서 연구에 필요한 여러 활동을 익혔다. 그에게는 무미건조한 팔고문
학해당에서 4년간 학습하며 시야를 넓히고 한학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광서 16년인 1890년, 그가 17세가 된 해에 베이징에서 회시
8월의 어느 날, 친구인 진천추(陳天秋)와 함께 강유위
당시 금문경학대사(今文經學大師)였던 강유위는 자산계급 개량운동의 창시자였는데, 사상이 활발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수많은 젊은이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을 한번 만나면 진시(辰時, 오전 7~9시 사이)부터 술시(戌時, 저녁 7~9시 사이)까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입담이 좋고 말로 사람을 뒤흔드는 강유위는 수백 년 동안 유행해온 구학문(舊學問, 한학(漢學))의 사상 기초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그는 양계초가 현재 근심걱정 없이 편안하게 생활하는 근본으로 생각한 ‘건가의 학문’을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질책했다.
그 논의는 바다의 파도 소리나 사자의 외침처럼 양계초를 놀라게 했고, 누가 찬물을 등에 끼얹는 것 같고 막대기로 머리를 때리며 소리 지르는 것 같기도 해서 양계초는 망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후에 쓴 저서 『삼십자술(三十自述)』에 따르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며, 원망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며, 의심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강유위의 사상과 학식에 매료된 양계초는 학해당을 떠나 강유위에게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강유위가 세운 신식 학당인 만목초(万木草) 학당에서 4년 동안 배웠다. 새로운 세상에 이끌린 그는 고전에 기초하여 새로이 해석한 언론을 들었고 매일 서양 자연과학과 정치학 관련 서적을 읽었다.
학습과 사고를 통해 강유위의 자산계급 개량주의 사상체계를 흡수한 그는 보통 청년에서 중국의 앞날과 운명을 걱정하는 애국주의자로 성장하는 한편, 봉건 서생에서 변법
또한 강유위의 교육사상과 교육 방법을 익히고 근대 교육을 창립하는 선구자로서 도처에 제자를 둔 명사로 성장했다.
덕종(德宗) 광서(光緖) 20년인 1894년에 함께 베이징에 간 양계초와 강유위는 권력자들의 부패와 국정의 어지러움을 직접 목격했다.
이 경험은 변법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한층 불러일으켰다. 그 해 겨울에 고향에 돌아온 양계초는 광둥성 둥관(東莞)에서 강의하며 처음으로 교육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이후 양계초는 강유위를 도와 단체를 조직하고 간행물을 창간했다. 또한 뜻과 마음이 같은 ‘인인지사(仁人志士)’를 모아 선전을 확대하고 유신변법(維新變法)을 추진하여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활동했다.
같은 해 7월에 강유위는 『중외기문(中外紀聞)』을 창간하고 『경보
양계초는 주요 편집자로서 서양 자본주의를 소개하고 변법을 대대적으로 제창했고, 매일 1천 부에 이르는 신문을 베이징의 황족들에게 보내고 그들의 동정을 탐색했다.
8월에 강유위는 정치결사 단체인 강학회
양계초는 이 단체의 서기로서 유신운동을 위해 인재를 모으는데 힘쏟았다. 그러나 봉건적인 완고파가 압박하여 『중외기문』은 발행을 중단했고 강학회도 해산했다.
광서 22년인 1896년 3월 양계초는 강유위의 지시를 받고 상하이에서 왕강년
『시무보』는 강유위의 변법 이론을 선전하고 서양을 따라 배울 것을 호소했다. 부강을 도모하고 위부터 아래로의 개혁을 주장했다.
『시무보』는 양계초의 노력 덕분에 유신파의 대표적인 매체가 되었는데, 그는 유창한 문장으로 유신변법을 주장하여 도시부터 시골에 이르는 많은 이들이 그 문장을 읽고 암송했다.5)
그는 많은 유신 지사와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을 필자로 초빙하여 영향력을 확대했는데,6) 이러한 선전활동은 무술변법
양계초 등은 시무학당(時務學堂)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강연하며 무술변법을 위한 조직을 준비했는데, 자연스럽게 개혁운동의 토대가 마련되어가고 있었다.
광서 24년인 1898년 초, 광서제
3월 양계초를 비롯한 이들은 <거아변법서(拒俄變法書)>를 올려 랴오닝성(遼寧省)의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러시아에 분할해줘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때 강유위가 올린 <상청제제오서(上淸帝第五書)>를 보고 크게 감동한 광서제는 변법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제당(帝黨, 광서제를 옹호하던 정치 일파)에 의지하여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했다.
양계초는 총리아문(總理衙門,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한 기관)에서 상주문(上奏文,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검열하고 새로운 정치에 참가했다.
그해 6월 11일 광서제는 조서를 반포하고, 7월 3일 양계초를 접견하여 서학(西學, 서양학문)을 제창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을 논의했다.
그리고 변법을 설명하고 선전하는 글 <변법통의(變法通議)>를 올리게 하고 6품 관리직을 장려하며 대학당역서국(大學堂譯書局)을 맡게 했다.
8월 초에는 외국서적을 번역하여 펴내는 이들을 양성하는 편역(編譯)학당을 세우는 내용에 관한 양계초의 상주문을 비준했다. 양계초는 이단분
9월 21일에 광서제가 일련의 변법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정치 방면에서는 관리와 백성이 글을 올려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것을 허락하고 관리의 공무 집행을 정리했다.
경제 방면에서는 광무철도국, 농 · 공상총국을 세워 농업, 공업, 상업을 발전시키고 재정을 개혁하려 했다. 문화교육 방면에서는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팔고문
그리고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오늘날의 베이징대학교)을 설립하고 고등 · 중등 학당과 소학당을 세웠다. 신문사와 학회 설립을 허락하고 과학 저작과 발명을 고무, 격려했다.
강유위는 이러한 변법의 주요 지도자였고 양계초는 변법이 실시되는 동안 탁월한 재능과 웅대한 기백을 발휘했다.
그러나 무술변법운동은 폭넓은 사회적 기초가 없었고 실권이 없는 황제가 시행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변법운동은 비록 실패했으나 광서제의 새로운 정치와 관련 주장들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고, 낡은 교육을 개혁하고 새로운 학문을 세우는 일은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사상의 해방은 중국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다.
양계초는 일본에 망명한 후에도 자산계급 중심의 혁명을 위한 계몽 선전을 계속하는 한편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서 24년인 1898년 10월에 요코하마에서 『청의보(淸議報)』을 창간했고, 광서 28년인 1902년 2월에는 『신민총보(新民叢報)』를 창간했다.
두 신문은 유럽과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폭넓게 소개하고 자유와 평등, 민족주의 등 자산계급 사상을 널리 선전하며 봉건주의를 비판했다.
청나라의 암흑을 폭로하고 사상 해방을 제창했으며 자산계급의 신문화운동을 제창했다.
청 정부는 두 신문의 발행을 금지했지만 신문들은 중국 내외에서 널리 유통되었고 판각 인쇄는 1만 수천 부에 달하여 어느 신문이나 잡지보다 영향력이 컸다.
양계초는 광서 24년인 1898년부터 1903년 사이에 두 신문에 80여 편의 문장과 저작을 발표했는데, 그의 문장은 기세가 드높고 필법이 세밀했으며, 문언문 외에 백화문
우아하면서 세속적이고, 유창하고 알기 쉬우며 청신하면서도 의미심장했으며, 도리를 설명하면서도 생기발랄하게 의논을 곁들였다.
문장 서술에 풍부한 감정을 실으면서도 폐습을 없애자는 격문을 담아 어린이와 노인들도 읽고 외웠으며 각계에서 열독했다.
계몽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한 양계초를 사람들은 “여론계의 교자(巧者, 솜씨가 좋은 인물)”라고 불렀다.
양계초는 교육의 필요성을 잊지 않았는데, 1899년 그는 화교 자녀들의 입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증탁헌(曾卓軒), 정석유(鄭席儒) 등과 함께 고등대동학교(高等大同學校)를 세웠다.
같은 해 요코하마에 대동학교(大同學校)를 세우고 고베에 동문학교(同文學校)를 세웠다.
그는 망명생활 중에도 교육 활동을 지속했고 가르침에 있어 게으름이 없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에 시무학당에 다니던 학생 십여 명이 그를 찾아왔는데, 이들은 같이 숙식을 해결하며 다시 양계초의 가르침을 받았다.
광서 29년인 1903년 이후 양계초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보황파의 입장을 지지했고, 1911년 신해혁명
1913년 9월에 진보당 위주의 내각이 구성되었고 양계초는 사법총장을 맡았지만, 이듬해 2월에 내각은 종말을 선포했다.
1915년 말, 중화민국을 배신하고 군주제 부활을 꾀한 원세개
양계초는 당시 2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을 주겠다는 매수 제안을 거절하고 <이재소위국체문제자(異哉所謂國体問題者)>를 발표하여 원세개의 황제 자칭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홍헌 정권은 수립되었고 그는 원세개에 대항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채악
또한 직접 광둥에 가서 광둥과 광시(廣西) 지역의 독립을 촉구했고, 양광도(兩廣都) 사령부에 군무원(軍務院)을 세우도록 했다. 이후 원세개는 전국 백성들의 반대 속에서 죽어갔다.
1917년 말 양계초는 북양정부7)를 떠났다. 1918년에 제3차에 달하는 정계 이탈 선언을 발표하며 정치 참여를 마치고 교육과 학술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1920년 양계초는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공학사(共學社) 설립에 관한 일 때문에 학교 운영 방침, 경비 마련, 교직원 초빙 등을 직접 챙겨야 했다.
청화대학교(淸華大學校) 연구원은 그를 지도교수로 초빙했다. 그와 함께 교편을 잡은 인물 중에는 저명한 고증학자 왕국유
남개대학교(南開大學校), 동남대학교(東南大學校) 등도 그를 교수로 초빙하거나 강의를 요청했다.
1921년 가을 그는 남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중국문화사를 강의했고, 1923년에도 남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여름방학 동안 강의를 맡았다.
1925년에는 청화연구원(淸華硏究院)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26년에는 사법저재관(司法儲財館) 관장으로 임명되어 사법부의 인재를 길렀다.
양계초는 여러 학교와 각종 학술단체의 요청에 응하여 많은 학술강연을 했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동안 역사, 문학, 철학 등 19개 과목을 개설하고 인문과학 이론을 전파했고 학문 방법도 전수했다.
학식이 깊고 넓으며 견해가 예리하여, 강의안을 조금만 정리하면 명저가 되었고, 학생들은 그를 매우 우러러 보았다.
그의 학술 강연은 남다른 특색이 있었는데, 하나는 강연 활동이 매우 빈번했고 다른 하나는 강연 주제 범위가 매우 폭넓었다는 점이다. 강연 때마다 새로운 주제를 선택했고 내용도 충실했다.
그는 특히 과학성과 감흥을 중시했는데, 강연 초고가 그 자체로 탁월한 학술 저작이었다. 수많은 강의를 했지만 그는 전혀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22년 4월부터 1923년 3월 사이에 1년간 순회강연을 했는데, 그의 일생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강연 활동이었다. 강연의 기점은 베이징이었다.
베이징여자고등사범대학교에서 “여자 고등교육에서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몇 학과(我對於女子高等教育希望特別注重的幾種學科)”라는 제목으로 강연했고, 시학연구회에서 “정성두보(情聖杜甫)”라는 제목으로 두보
베이징대학교에서 철학사에 관하여 “호식의 <중국철학사 대강>을 평함”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6월에는 남쪽으로 가서 산둥(山東) 지난(濟南)의 중화교육개진사(中華敎育改進社)의 연례 회의에서 “교육과 정치(敎育與政治)”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여기서 그는 중국에 민주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자산계급의 민주주의를 실시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 남쪽의 상하이,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우시(無錫), 난퉁(南通)에서 강연을 했다.
쑤저우의 동남대학교(東南大學校)에서 “학문의 취미(學問的趣味)”를 강연하고 학문을 우선순위에 놓도록 호소했다.
난징의 금릉대학교(金陵大學校)에서는 “교육 응용의 도덕 공동기준(敎育應用的道德公准)”을 강연하고, 난퉁에서는 과학사(科學社)의 연례 회의를 위해 “과학정신과 동서문화(科學精神與東西文化)”를 강연했다.
10월에 북상하여 톈진(天津)의 청년회에서 “시민 군중운동의 의의와 가치, 베이징 국민의 쌍십절 군대감축운동대회에 대한 감득(市民的群衆運動之意義及價値, 對于雙十節北京國民裁兵運動大會所感)”이란 제목으로 강연하고 이듬해 봄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년 동안 20여 차례의 강연에 수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이런 활동과 수업은 중요한 교육 수단이었고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교육계와 학술계도 그의 활동을 중시하고 환영했다.
1929년 1월 19일 베이징협화의원(北京協和醫院)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중국 근대사에서 양계초는 강유위의 뒤를 따라 나라를 위해 활동하고 변법을 선동한 혁명가, 사상가이자 애국자였다.
뿐만 아니라 학식이 깊고 넓은 학자로서 교육으로 나라를 구하고 ‘새로운 국민’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하여 명성이 높았다.
양계초의 사유는 민첩하고 폭넓은 한편 치밀했다. 그의 학술 저작은 철학, 사학, 문학, 경제, 법률, 도덕, 종교 등 많은 분야를 포함하여 ‘백과전서파’의 기백을 나타냈다.
1918년 이전에는 정무가 바쁜 가운데도 『왕형공(王荆公)』과 『관자전(管子傳)』 등의 인물편을 써서 열정적인 필법으로 두 고대 정치가를 노래했다.
사학 분야에서도 두 편을 저술하여 영향을 미쳤다. 『중국사서론(中國史敍論)』에서 그는 봉건 사학의 4가지 큰 죄행을 열거하며 24사
이 성씨가 흥성하면 저 성씨가 쇠약해지는 ‘상작서(相斫書)’이고 ‘묘지명(墓志銘)’의 집합이며 생기라곤 전혀 없는 ‘사인원(蜡人院)’이라고 했는데, 이 비판은 미신을 타파하고 사상을 해방하는 작용을 했다.
그는 『신사학(新史學)』에서 역사는 인류 사회의 발전 규율을 연구하는 한편,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활동 사이의 인과관계를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8년 이후의 10년은 양계초의 학술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때의 저술로는 『청조 시기 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과 『중국의 근 300년 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등이 있다.
『청조 시기 학술개론』은 6만여 자로 되어 있는데, 며칠 만에 초고를 완성한 책이다. 청나라 건국 이후 200여 년간의 학술, 사상 발전을 계통적으로 총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청나라의 학술을 계몽, 전성, 퇴화, 쇠약의 4시기로 구별했다. 그가 보기에 4시기의 특징은 ‘복고를 해방으로 여겼다’는 점이었다.
그는 각 시기의 학술을 일종의 사조로 여기고 역사를 총체적으로 고찰하는 한편 각 시기와 학과의 대표 인물 및 저작을 평가했다.
1924년에 출판된 『중국의 근 300년 학술사』는 그가 대학에서 가르친 강의안이다. 이 책은 『청조 시기 학술개론』과 자매편으로 불린다.
『청조 시기 학술개론』은 ‘의론’에 치중하고 『중국의 근 300년 학술사』는 ‘역사’에 치중했는데, 후자는 전자의 확충본이다.
이 책에서 그는 풍부한 역사 자료를 응용하고 청나라 때의 철학, 경학, 사학, 고고학, 지리학, 금석학, 문헌학, 미술, 불학(佛學), 문학 등 사회과학의 내용을 반영하는 동시에 역법, 산학, 수리 등 자연과학의 내용도 고찰했다.
그는 건가의 고증학 성과를 긍정하는 기초 위에서 자신의 사상이 굳어져 “세상을 다스리는 데 쓸모 있는” 전통을 점차 포기했었던 결함도 지적했다. 이 두 책은 청나라의 학술, 사상 연구에 선구적 의의가 있다.
사학에서 그는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과 『선진사상사(先秦思想史)』 및 선진(先秦)사회사 방면의 저작을 썼다.
『중국역사연구법』은 1921년에 남개대학교에서 가르칠 때 사용하던 강의안이다. 이 책은 역사 연구의 목적이 ‘자감(資鑒, 바탕[근본]과 거울)’에 있다고 지적하고 봉건 사학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역사적 인과 규율을 탐색하고 역사와 영웅의 관계를 토론하는 한편 역사의 특정 주제 선택과 연구 방법을 논의했다.
『중국역사연구법 보충편(中國歷史硏究法補編)』은 1925년에 청화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가르쳤을 때의 강의안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사학가들이 마땅히 갖춰야 하는 기본 조건을 논증하고 습작 방법을 소개했다. 이 두 책은 양계초 사학 이론의 대표작으로, 중국 근대 자산계급 사학 이론의 경전이다.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는 대학에서 사용한 강의안을 정리한 책인데, 선진시대(춘추전국시대) 각 학파의 정치사상을 실제에 부합하게 귀납하고 각 학파의 특징을 파악했다.
여러 학파 가운데 묵자
『태고 및 삼대의 기재기록(太古及三代載記)』, 『춘추기재기록(春秋載記)』, 『전국기재기록(戰國載記)』은 선진 사회사 분야에 관한 전문적 논평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평과 판단의 핵심을 논의한 이 책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찰과 분별의 측면에 기여했다.
문화사 분야에서는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를 저술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 「사회조직편(社會組織編)」만 남겼다.
「사회조직편」을 보면 가족, 성씨, 계급, 지방자치, 도시 등 부분적인 성질을 띤 저술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나타난 독특한 사상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문학의 문체, 문학사, 소설, 시가 등의 영역 모두에서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그가 창작한 새로운 문체는 문언문과 백화문 성격을 동시에 갖추었다.
이 문체는 중국 내외를 휩쓸어 근대 중국 백화문의 시작을 열었다. 그는 중국 고대문학사를 연구하여 『도연명(陶淵明)』과 『신가헌연보(辛稼軒年譜)』를 씀으로써 고전문학 연구에도 공헌했다.
그는 “소설계의 혁명”을 옹호하고 <소설과 군치 간의 관계를 논함(論小說與群治之關係)> 등을 써서 소설 부흥을 위한 길을 개척했다. 또한 “시문학계의 혁명”을 제창하여 새로운 시를 창도했다.
봉건적 구문학을 비판하고 신문학을 대대적으로 제창하였으며 새로운 문예이론과 근대 문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교육, 과학 연구와 실천적 활동을 통하여 그는 일련의 교육사상 체계를 형성했다. 여기에는 교육의 목적, 주장, 교육 내용, 교육 방법 등의 이론과 견해가 포함되었다.
그의 교육사상은 강유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끝없는 탐색과 관찰, 서양의 새로운 사상 등을 통해 강유위의 사상 체계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다.
양계초는 교육 구국론자이다. 그는 『학교총론(學校悤論)』에서 “중국이 쇠약한 이유는 교육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약한 중국을 강성하게 하려면 시급한 임무는 “국민의 지혜를 개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바로 중국과 서양의 언어 모두에 정통한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다른 나라의 학문에 정통하지 않고 제 나라의 학문에만 정통한 사람은 없고, 제 나라의 학문도 정통하지 못한 채 다른 나라의 학문을 정통한 사람 역시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서양인들은 먼저 본국의 문법을 배운 다음에 여러 다른 나라의 문법을 배운다.
먼저 본국의 지리, 역사 기록, 종교, 기존 도리를 학습해야 하며, 이를 통해 다른 나라의 지리, 역사 기록, 종교, 기존 도리를 깊이 공부할 수 있다.
“이러한 각국 학교의 장소는 같다.”(『학교여론(學校餘論)』) 중국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을 병용하고 융합하여 여러 도리와 사리에 맞게 응용해야만 진정한 인재로 불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양계초는 이런 인재를 “새로운 국민”으로 불렀는데, 이들은 중국과 서방의 도덕 특질(特質)을 겸비한 건전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고대인과 현대 국민의 지식과 수양도 갖추어야 한다.
즉 공덕, 국가사상, 진취모험(進取冒險), 권리와 사상, 자유, 자치(自治), 자존, 의무와 사상, 의력(毅力, 의지), 합군(合群, 한패, 무리), 생리(生利, 이익), 상무(尙武, 무예숭상), 사덕(私德, 개인의 품격), 민기(民氣, 민족정기), 정치능력 등이다.
양계초는 봉건적이고 낡은 교육을 반대하고 신식 학교를 많이 세울 것을 주장했다.
무술유신 시기에 그는 정치에서 변법을 실현하려면 개량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인재를 배양해야 함을 통감했다. 인재를 배양하는 길은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변법이 본질을 모르는 데서 온 해를 논함>이란 글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한마디로 말해 변법의 근본은 인재 배양에 있다. 인재 배양은 학교를 꾸리는 데 있고, 학교 설립은 과거제도를 개변하는 데 있다.”
당송 이래 유지된 과거제도는 이미 케케묵어서 다수의 내용이 시문해법에 제한되고 지식인이 책을 읽는 범위를 제한하여 시야를 좁히므로 실제에 응용할 수 없었다.
실제에 응용하지 못하는 것은 배움이 아니다. 과거 급제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경쟁이 치열하여 지식인들은 도덕이 없을 뿐 아니라 진보적인 행동도 못하게 되므로 인재를 배양할 수 없을 뿐더러 인재를 망친다.
지식인을 선발하는 데 사용하는 팔고문의 폐단은 더욱 크다. “천리를 가면 학자의 두뇌가 저하하고 막혀서 고금을 모를 뿐더러 전 세계도 모르게 된다.”(『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
그가 보기에 이런 현황을 바꾸려면 반드시 신식 학교를 곳곳에 세워야 했다. 그는 일본의 교육을 모방하여 중국의 교육제도를 설계했다.
즉, 5세 이하를 ‘유아기’로 하고 가정과 유치원에서 교육을 받게 한다. 6세부터 13세까지는 ‘아동기’로 하고 소학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14세부터 21세까지 ‘소년기’로 하고 중등교육 혹은 중등 실업교육을 받게 한다.
22세부터 23세까지는 성년기로 하고 대학교육을 받게 한다.(『교육정책사의(敎育政策私議)』)
국민교육, 고등교육, 사범교육, 여성교육, 아동교육 등을 깊이 연구한 그는 학교 교육을 국민교육과 인재교육 두 가지로 나누었다.
국민교육은 오늘날 널리 보급된 교육이다. “일반 국민을 교육하는 것은 원래의 수평선 이상의 지혜와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인재교육은 오늘날의 고등교육이다. “고등 인재교육은 국가와 사회의 기둥을 배양하는 것이다.”(『정부대정방침선언서(政府大政方針宣言書)』)
그는 국민교육을 우선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교육은 모든 이들이 기본적으로 지혜를 갖추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혜는 각 개인이 사회에서 자립하는 수단이다.
가장 총명한 사람도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지혜를 갖춘 사람이 많을수록 국가가 강대해지고 이와 반대인 경우는 국가가 쇠약해진다.
그러므로 국민교육을 먼저 시행하고 그 다음에 인재교육을 해야 한다. 전자는 기초이고 후자는 전자의 제고이다.
그는 국민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규정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항목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학령기 아동은 모두 학교에 입학할 의무가 있고, 둘째는 시민 모두에게는 교육 경비를 부담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의 실질은 일종의 강박교육이다.
“오늘의 중국이 학교를 세우려 하지 않으면 몰라도 학교를 세우려면 기필코 정부가 간섭하는 힘을 빌려서 강박적으로 소학제(小學制)부터 실시해야 한다.”(『교육정책사의』)
그는 국민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생각해냈다. 예를 들어 학교는 법을 통해 각종 세금을 걷어 학교 건립과 유지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교과서가 수업 과정의 표준에 부합한다면 관전(官篆)이든 사전(私篆)이든 모두 사용할 수 있다.
각 성(省)과 시(市)의 학관(學官)은 매년 따로따로 각 학구(學區)를 순시하고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다. 그중 일부는 현대 중국의 교육에서도 실현되었다.
인재교육, 즉 고등교육은 국가 독립과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
“국가가 오늘의 세상에 존재할 때 많은 국민이 고등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출로를 찾지 못한다.”(<남개대학교를 위하여 헌납인도를 권함(爲南開大學勸捐启)>) 그가 보기에 인재교육을 위해서는 세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해야 했다.
첫째는 중국 내에서의 고등교육과 유학의 관계이다. 그는 전자를 위주로 하고 후자를 보충적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옛날에는 단순히 유학에 의거하여 인재를 배양했다.
자연히 관청과 학생들의 수고와 비용이 컸고, 중국 내의 학과목이 독립적이고 건전하지 못하며 결함이 많았다. 그러므로 대학교육을 확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둘째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관계였다. 그는 사립학교를 발전시켜 공립학교와 같이 인재를 배양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사립교육이 여러 이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 교직원을 나라에서 임명하지 않으므로 학교 기초가 정치 국면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다.
정부 정책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학풍이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다. 사회재단이 교육을 뒷받침해준다.
각 지방에 이러한 교육기관이 설립되면 고등교육이 각지에서 골고루 실현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의 사례에서 응용한 것이다.
“구미 각국의 이름 있는 대학은 애초에 80~90%가 사립으로 시작했다.”(<남개대학교를 위하여 헌납인도를 권함>)
셋째는 보통 대학과 전문학교의 관계이다.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많은 학교가 개설되었는데, 양계초는 실업교육을 중시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대학교와 전문학교의 구분은 바로 하나는 ‘학문(學)’이고 하나는 ‘기술(術)’에 있다고 주장했다. “대학에서는 학문을 중시하고, 기술은 학문을 위해 복무한다.”
“전문학교에서는 기술을 중시하는데, 학문에 대한 배움은 실제로 사용하는 데 있다.”(<북경대학교 환영회에 참석하여 발표한 연설사(莅北京大學校歡迎會演講辭)>)
그는 자유강좌제(自由講座制)를 실시하여 강사단을 조직하고 학생들은 과목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전문적으로 배우고, 교사와 학생 간에 자유로이 연구하고 토론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무술변법 이전에도 신식 학당들이 세워졌지만 전문적으로 교사를 배양하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제를 통해 배양된 유교적 인사들이 교편을 잡았다.
이는 당연히 신식 교육의 발전을 지체했다. 양계초는 『변법통의(變法通議)』의 「사범을 논함」에서 사범교육을 제창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낡은 관습을 개혁하려면 지혜의 학교를 세우고 사범학교 수립을 첫째가는 의로운 일로 봐야 한다.”
그는 사범교육을 각 학교의 기초로 봤다. “사범학교 수립은 여러 학교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그가 보기에는 사범학교에서 길러낸 선생만이 교사로서의 기술을 지닌 새로운 학문의 교사였다. 교사는 학술의 근본이고 인재의 원천이었다.
그는 소학, 중학, 대학 교사의 자질을 배양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설계했다.
『교육제도표(敎育制度表)』에서 ‘평범한 사범학교’, ‘고등사범학교’, ‘사범대학교’ 세 등급의 학교를 열거했는데, 이는 나중에 실시된 사범교육 체계를 예고한 주장이었다.
중국의 봉건적이고 낡은 풍속 가운데는 여성을 경시하고 여자학교를 반대하는 경향도 있다.
청나라 말기의 대교육가인 장지동
그러나 양계초는 여자학교를 세울 것을 적극 제창했다. 그는 『변법통의』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두 가지 근본을 제시했다.
즉 “인심을 바로잡고 인재를 많이 배양하는 것”이었다. 그는 두 근본이 ‘초급 배양(蒙養)’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초급 배양의 근본은 ‘엄마 교육’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엄마 교육’의 근본은 바로 여자학교에 있다. 그러므로 여자학교는 나라의 존망(存亡)과 강약(强弱)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자의 무식은 아름다운 미덕’이란 낡은 사상을 맹공격했다. 이는 “천하를 해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동안 여성들로 하여금 “천하일을 전혀 모르게”하고 우매함과 무지를 조장하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자립하지 못하는 국면을 초래했다.
그는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나라와 국민 모두에 이롭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지식 폭을 확대하면 시야를 넓혀 가정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으며, 여성이 문화를 소유하면 자녀교육에 유리하고, 여성이 체육 단련을 하면 후대의 체질을 증진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남녀가 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으므로, 남성이 할 수 있으면 여성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녀의 개성의 차이에 관해서는 “여자의 창조력은 남자들만 못하고 남자들의 정돈 능력은 여자들만 못하다”라고 했다.(<여자고등교육에서 내가 특별히 주의할 것을 희망하는 몇 가지 학과>) 그러므로 여성이 장점을 발휘하는 학과를 많이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서 23년인 1897년,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상하이에서 진경여(陳敬如) 등과 함께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울 것을 계획하는 한편, 각 성의 부(府), 주(州), 현(縣)으로 보급할 것을 계획했다.
당시 작성한 <여자학당을 세울 것을 제창하는 계기(倡設女學堂啓)>와 부록 <여자학당을 세우려는 약간의 규정(女學堂試辦略章)>에서 그는 여자학당의 운영 요지, 교과과정 설치, 교직원, 관리제도, 교육 대상 등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가 <여자학교를 논함(論女學)>에서 설명한 명쾌한 견해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계초는 아동교육도 매우 중시하여 여러 차례 아동교육에 관한 주장을 발표했다. <유학을 논함(論幼學)>에서는 집중적으로 아동교육에 대한 새로운 사상을 표했다.
그는 서양 자본주의 국가의 아동교육 경험을 학습하고 중국의 구식 아동교육을 개혁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중국의 구식 아동교육에는 두 가지 큰 폐단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단순히 기억을 중시하는 것으로, 아동이 이해하건 못하건 그저 주입만 하는 교육이다.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바로 경서를 가르치고, 분별하여 가르친 적이 없고 글짓기를 배운 적이 없는데 강제로 문장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변법통의』)
다른 하나는 ‘때리는 교수(扑敎)’, 즉 도리로 유도하여 가르치지 않고 교수 방법을 강구하지도 않고 체벌을 하며 ‘오로지 회초리와 고함소리에 의거하여’ 아동으로 하여금 학교를 감옥으로, 선생을 옥리로 여기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아동교육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천하의 학문을 마음껏 모두 받아들인 다음 가르쳐야 하며, 천하 서당의 책을 마음껏 모두 받아들인 다음 다시 편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국과 멸종의 위험이 있다. 서양에서는 아동을 교육할 때 천성에 적합하게 하여 점차 심화시키고 체벌을 하지 않으며, 아동의 염치와 심리를 양성하는데 그 방식이 본보기가 될 만했다.”
중국과 서양의 아동교육을 비교한 그는 이처럼 아동교육의 새로운 방안을 설계했다.
양계초의 부세(賦稅, 세금부과) 사상은 백성들의 편의에 중점을 두고 균등한 세금 정책과 경감을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중국의 전통적인 세금징수 정책을 반대하고 이렇게 주장했다.
“서양은 백성들이 꼭 필요한 일용품에는 되도록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편의를 돕는다. 하지만 중국은 높고 무겁게 거두어들이니, 대표적인 예가 소금 전매 같은 정책이다.”
그는 영국의 평등한 세금 정책을 본받아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발전을 우선순위에 두고 재정정책과 조세를 그 위에 놓자는 관점으로, 당시의 상공업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공채(公債)가 일종의 부세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공채가 조세와 다른 점은 “조세는 지금 당장 부과하는 직접적 방법이고, 공채는 미래에 부과하는 간접적인 방법”이며, “우리가 져야 할 의무를 후손들에게 일부분 넘겨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공채가 경제 건설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세는 한때 효력을 보지만, 공채는 여러 차례 힘을 끌어모은다”라고 주장하며, 공채가 후대에 부담을 주지만 후대에 필요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이와 같은 그의 부세 사상은 근대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큰 의미가 있다.
그 밖의 목록학 저서로 『서서제요(西書提要)』, 『동적월단(東籍月旦)』, 『국학입문서요목급기독법(國學入門書要目及其讀法)』, 『독서분월과정(讀書分月課程)』, 『동원저서찬교서목고(東原著書纂校書目考)』, 『요적해제급기독법(要籍解題及其讀法)』, 『불경목록재중국목록학지위치(佛經目錄在中國目錄學之位置)』, 『한서예문지제자략고석(漢書藝文志諸子略考釋)』 등이 있다. 이 책들은 중국의 도서관학(圖書館學)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도서관 사업을 적극 제창하여 1922년에 송파도서관(松坡圖書館)을 건립하고 관장을 지냈다.
1925년에 중화도서관협회(中華圖書館協會)가 설립되자 동사부(董事部) 부장을 맡았고, <중국도서관협회성립회연설사(中華圖書館協會成立會演說辭)>를 발표하여 중국 도서관 사업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나중에는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과 베이징도서관(北京圖書館)의 관장을 맡았다. 『중국도서대사전(中國圖書大辭典)』을 편찬하고자 했는데, 완성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소장한 도서는 매우 풍부했는데 그의 서고인 해당서옥(海棠書屋), 음빙실9)에 2803여 종과 4만 4,470여 책이 있었다. 또한 간행되지 않았던 원고와 개인 서찰, 필기 등이 있다.
후에 양정찬(梁廷燦) 등이 『음빙실장서목초편(飮冰室藏書目初編)』을 편찬했는데 수록된 고서가 1만 3000여 종이었다.
그의 장서는 1929년에 베이징도서관에 기증되었고, 양계초기념관(梁啓超記念室)에 보관되어 있다.
중국 역사상 백과전서 같은 인물인 그는 정치 무대에서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학술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혁명파와 논쟁하며 신문체(新文體)을 활용하여 지식인과 백성들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중화민족’이란 단어와 ‘경제’, ‘조직’, ‘간부’ 등의 새로운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학술 연구 분야는 철학, 문학, 사학, 경학, 법학, 윤리학, 종교학 등으로 매우 폭넓다.
일생 동안 남긴 저술은 약 1400만 자에 달하는데, 대부분의 작품은 1936년 9월 11일에 출판된 『음빙실합집(飮冰室合集)』에 수록되었다.
1901년에서 1902년 사이에 『중국사서론(中國史敍論)』과 『신사학(新史學)』을 저술했다.
유럽을 다녀온 후에는 주로 문화교육 사업과 학술연구에 집중하였고, 주로 선진시대(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청나라 때 학술, 사학과 불학(佛學)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위에서도 종종 언급되었지만 그의 대표적인 저서를 정리하여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제자(諸子)』, 『중국불학사(中國佛學史)』, 『송원명학술사(宋元明學術史)』, 『청대학술사(淸代學術史)』, 『중국문학(中國文學)』,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 『중국사(中國史)』, 『사학연구법(史學硏究法)』, 『불가철학(儒家哲學)』, 『동서교류사(東西交流史)』,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묵자학안(墨子學案)』,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정성두보(情聖杜甫)』, 『굴원연구(屈原硏究)』,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변법통의(變法通儀)』, 『경업여낙업(敬業與樂業)』,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신민설(新民說)』, 『음빙실주인자설(飮冰室主人自說)』,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음빙실주인전집(飮冰室主人全集)』, 『이홍장전(李鴻章傳)』, 『왕안석전(王安石傳)』, 『중국역사연구법보편(中國歷史硏究法補編)』, 『당대집회총집여시인군연구(唐代集會總集與詩人群硏究)』 등이다.
그는 문학이론 분야에서 서양 문화와 문학의 새로운 관념을 도입하여 각종 문체를 만들었는데, 주로 산문, 시가, 소설, 희곡, 번역문학 등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특히 그의 산문은 당시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문체는 5 · 4운동
베이징 둥청구(東城區) 베이거우옌후동(北溝沿胡同)에 있다. 지금의 둥청구 베이신차오 지구(北新橋地區)로 둥즈먼난 소가(東直門南小街) 서쪽에 있다.
이 골목은 명나라 때 학방호동(學房胡同)으로 불렀고, 청나라 건륭제 때에는 관학호동(官學胡同)으로 불렸으며, 선통제
톈진 허베이구(河北區) 민쭈로(民族路) 44호에 있다. 그의 서재인 음빙실(飮冰室)은 허베이로(河北路) 46호에 있다.
광둥성 장먼시 신후이구 차컹촌(茶坑村)에 있다. 그의 출생지이자 소년기에 학습했던 곳이다. 2001년에 양계초기념관이 건설되었다.
이 고택은 1983년에 현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성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근대중국적영향(近代中國的影響)』, 구시이론망(求是理論網)
『음빙실주인(飮冰室主人)』, 양계초(梁啓超), 화문보간문헌수거고(華文報刊文獻數据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