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화요일. 블라디보스톡
예기치 않은데서 일이 생겼다. 중국이나 러시아에 입항하면 으레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한데 정말 일이 생긴거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선박검사에 문제가 있어 600달러나 되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검사관이 별것도 아닌 것을 침소봉대한 까닭이다. 문제를 삼자면 뭘 못하겠는가.
대리점 직원인 빅토르가 그러는데 현지에서 식수 보급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거 큰일났다. 식수 탱크는 180톤. 90명분 하루 소비량은 약 15톤인데 불과 40여 톤 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 시모노세키 항구는 일주일 후에 입항 예정이니 최소한 60톤이 더 필요하다.
식수 보급선이 두 척인데 모두 수리 중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따지자, 왜 늦게 요청하냐고 되려 반문한다. 하긴 그렇다. 그러나 요청을 안 했달 뿐이지 대체 식수 보급이 안 되는 항구가 어데 있는가. 그러니까 너무 당연한 일이라 요청을 안한 것이다. 고개를 갸웃뚱 하더니 혹시 해군 보급선을 이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장담은 할 수 없으니 알아보고 다시 전해주겠다고 한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11시경 최재근 총영사와 음기영 영사가 오셨다. 어제 식사 약속을 했던 참이다. 실습 교수 두 분과 학생 대표 셋, 그리고 선장인 나까지 모두 여섯 명이다. 현대호텔 지하 레스토랑은 지난번에 와본 곳이다. 휘닉스 황 사장과 한인회 회장이신 이범준 씨가 미리 와 계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사이 현지 소식도 전해 들었다. 교민은 400여명이고 한, 러간의 교역은 대략 4억불 수준이라고 한다.
나는 생선조림을 시켰는데, 전채로 파전이 나오고 주 요리는 광어찜이었다. 주로 한국인이 고객이라 우리 입맛에 맞게 요리되었다.레스토랑 바로 옆이 KT 사무실인데 인터넷 서비스가 되니 이용하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3년 전에는 없었는데 최근에 개설했나 보다. 거 잘 됐다. 지금까지 쓴 항해일기를 서재에 올려야겠다. 혹시 메일이라도 한 통 왔을까?
식사 후 학생들은 인터넷을 하겠다며 헤어졌고 두 분 교수님과 나는 배로 돌아왔다. 내일 관광을 마친 후 다시 들러봐야겠다.왜 일제 중고차만 수입하는가 했더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중고차 수출업체에 보조금을 준다고 한다. 만약 보조금이 없다면 우리가 유리할 것이다. 음 영사 말에 의하면 진즉 한국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측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보조금을 준다면 모든 업체에 공평하게 줘야 하는데, 남미 쪽은 보조금이 없어도 수출이 원활하다. 그렇다고 이곳만 따로 지원할 수 없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지원을 했어야 한다.중고차는 알짜배기 수출품이다. 단순히 차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수리와 정비에 필요한 부품까지 수출할 수 있으니 부수적인 수입이 쏠쏠할 수밖에 없다. 음 영사는 정부측의 판단 미스라고 했다.지난 달 일본 토야마 항구 갔더니 러시아 배들마다 일본 중고차를 선적하더니 이곳에선 하역 작업하느라 분주하다.
외국에 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더니 일본차를 보자 괜히 배가 아프다. 그러나 다행히도 버스는 모두 한국산이다. 거의가 10년 넘은 고물 버스들인데 여하튼 블라디보스톡 시내는 온통 국산 버스가 질주한다. 차체에 “2002년 월드컵 환영” “전주 - 군산 직행” “신림동” 등 문구가 지우지 않을 채 그대로 남아있다. 나중에 알았는데 승용차는 일제가 90%고 버스는 우리 차가 80%를 차지한다고 한다.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기어이 장대비가 쏟아진다.
기상 팩스를 보니 북한에서 이곳까지 전선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야간은 전기가 부족해 어둡고 낮은 날씨가 흐려 어둡다. 사방이 온통 회색 빛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연인들이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러시아 여인들은 하나같이 늘씬한 키에 미녀들이다. 내 눈엔 모두 모델 수준이다. 대련 여자들 역시 빼어난 미녀들인데 이곳 여자들은 그 보다 더 예쁘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인데, 러시아 여자들은 좀 어렵게 살더라도 돈이 생기면 우선 옷부터 산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이다 보니 대개는 단벌인데 비록 한 벌을 입더라도 마음먹고 예쁜 옷을 구입한다는 거다. 그러잖아도 미녀들인데 옷 매무새까지 어우러져 너무 예쁘다.
6월 25일 수요일 비
자정. 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밤늦은 시간에 당직 서느라 당직 실습생과 승무원의 표정이 피곤한 기색이다. 인적이 끊긴 부두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잠못 들고 있는 여름밤. 캔 맥주가 벌써 두 개째다. 오랜만에 차이코프스키를 듣기로 했다. 7월 중순으로 예정된 5회 토요음악감상회는 차이코프스키 곡을 중심으로 감상할 예정이다. 마침 러시아에 들렀으니 이번 기회에 집중적으로 차이코프스키를 감상해야겠다.
오늘은 블라디보스톡 관광이 있다. 두 대의 버스에 40명씩 분승하다. 내가 탄 버스의 안내는 현지 고려인인 이 선생과 극동대학에서 나온 미쓰 리자가 맡았다. 오전은 극동수산대학을 방문하고 오후엔 다운타운을 지나, 전망대, 수족관과 박물관, 잠수함 순서로 관광할 예정이다. 고려인인 김 니콜라에비치 부총장을 방문하고 기념 촬영을 한 후 학내 견학이 시작됐다.
점심은 수산대학 직원식당에서 했다. 흑맥주 한 병. 콩, 과일, 으깬 생선을 섞은 수프가 먼저 나왔다. 특이한 건 수프 위에 잘게 썰은 아스파라거스 잎이 얹혀있다. 캐비어가 곁들인 연어 훈제 두 조각. 삶은 콩, 밥, 팥을 넣은 빵과 무설탕 빵 하나씩. 야채를 섞은 삶은 돼지고기 요리 한 접시. 샐러드. 마지막으로 차가 나왔다.
걱정했던 식수는 다행이 해결됐다. 결국 수리중인 식수선 이용은 불가능해 비상수단으로 탱크로리를 동원한다고 했다. 엊그제 총영사 님 일행과 식사 중에 휘닉스 황사장이 “식수선이 어려우면 탱크로리로 하면 되겠네요.” 해서 모두 웃었는데, 농담이 진담이 되었다. 탱크로리 한 대에 5톤 분량으로 필요한 120톤을 싣기 위해서는 총 24회 왕복해야 한다.
뱃생활 30년에 탱크로리로 물 보급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 값은 1톤에 4. 9달러로 우리와 비슷하다. 우선 오늘 20톤을 먼저 싣고 내일 나머지 100톤을 싣는다. 희안한 건 모든 경비를 미리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원래 모든 경비는 대리점에서 지불하고 마지막 계산시 전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미리 현금을 줘야 한다니 별스럽기도 하다. 그것도 항목마다 일일이 현금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는 식이어서 너무 불편하다.
6월26일 목요일 흐림
갑판원 J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상태다. 원래 술이 약한데 얼마나 마셨는지 엉망으로 취했다. 한동안 동료들과 실랑이를 벌이는가 했더니 비틀거리며 배 밖으로 나간다. 항해사를 시켜 얼른 데려오게 했다. 저이가 왜 저러지? 화가 버럭 났다. 낯선 땅에서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걱정 됐다. 조용히 달래서 재우다.
술 마시다 파트너한테 퇴짜 맞았다고. 취한 상태로 갔으니 어떤 여자가 좋아할까. 그러나 당사자인 J는 상심이 컸나 보다.노총각인 J는 출항 전에 여자 문제로 고민이 컸다고 한다. 나름대로 선도보고 교제도 열심히 하는가 했는데 어째 하는 족족 성사가 안 됐다. 그러나 최근에 만난 여자는 달랐다고 한다. 언젠가 나에게 결혼까지 생각한다고 귀띔한 적이 있다. 휴대폰 통화며 옷치레 신경 쓰는 등 부산하더니 얼마 전부터 시들한 눈치였다. 적극적으로 대시하는듯했지만 여자 쪽 반응이 별로인가 보았다.
얼른 운전 배우고 옷 깔끔하게 입어라, 매너는 점잖아야 하느니, 마음에 들면 강하게 밀어 붙여라, 어쩌고저쩌고 너도나도 긴급 처방을했지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봐 이번에도 틀린 것 같았다. 술에 찌들인 얼굴을 누가 좋아할까. 이해는 갔다. 이국 여자에게조차 퇴짜를 맞았으니 얼마나 낙심이 컸을까. 하지만 이게 어데 한국인가.
저런 상태로 거리에 나갔다간 영락없이 철창 신세다.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가. 속으로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금욕적인 사회 분위기다. 몇몇 직원들과 모란봉 식당을 찾았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유일한 북한 식당인데 부두에서 불과 10분 거리다. 로비에 들어서자 러시아인뿐이다. 잘못 들어왔나 해서 간판을 살펴봤지만 분명 모란봉이다.
로비엔 매화꽃 그림 걸개가 있었다. 사전 연락 없이 10여명이 일시에 들어오자 식당 측은 당황 되나보았다. 작은 테이블이라 두 곳으로 나눴다. 알고 보니 북한이 경영하는 식당이 아니었다. 예전엔 북한에서 운영했다고 하는데 러시아인이 인수했나 보다. 도중에 나갈 수도 없는 일이라 엉거주춤하니 앉았다.메뉴판이 온통 러시아어 뿐이라 뭘 알아야 주문하지. 영어는 전혀 안 통한다. 그렇다고 함부로 주문할 수 없는 일.
한국에선 한 가지 음식만 주문하면 온갖 반찬이 세트로 나오지만 대부분 나라에선 일일이 시켜야 한다.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일본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세트 주문에 익숙한 탓에 여러 메뉴가 나오면 번거롭다. 그러나 여기선 각자가 좋아하는 것만을 시킬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가령 수프만 하더라도 여러 종류이고 빵이니 후식, 전채까지 고루 있어 취향대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음식문화가 다른 걸 어떡하나.
여하튼 뭐가 됐든 빨리 시켜야지 메뉴판 들고 뜸들이면 무조건 싫어하고 민망해 한다. 그럴 것 없는데도 말이다. 주문도 주문이지만 시킨 음식이 약간만 늦어도 난리다.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을 어째 그럴까. 그러다 식사가 들어오면 한순간에 뚝딱 끝난다. 어쨌든 메뉴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선택해야 한다. 비싼 돈 들여 외식하는데 왜 함부로 시키나? 서로 상의하고 생각해 보고 천천히 시켜야 한다.
한동안 메뉴판을 넘기며 망설이던 통신장이 “이거 잘 못 들어왔네요” 그런다. 특급 레스토랑이라 음식 가격이 만만치 않다. 숙의 끝에 메뉴를 결정했다. 각자 취향에 따라 선택해야겠지만 요리 내용을 모르니 동일한 메뉴를 주문하기로 했다. 우선 수프는 토마토에 생선을 넣은 토마토 수프. 에피타이저로 삿뽀르 맥주 4병, 샐러드를 넣은 연어 요리 2킬로. 메인 메뉴는 버섯에 치즈를 넣은 스텁 커틀릿 11인분. 추가로 무설탕 빵 약간과 미네랄 워터 2병을 주문했다. 11명 식사비는 총 3만5천 5백 루블, 한화로 14만원이니 1인당 13,000원짜리 식사다. 이곳 물가로는 제법 고급스런 식사였다.
특급 수준인 현대호텔 레스토랑의 경우 1인분 식사비가 통상 10달러 전후이니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잠시 후 토마토 수프가 나오는데 달랑 두 그릇 뿐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두 그릇 시키지 않았냐고 한다. 양손의 손가락 하나씩 벌렸으니 나는 11이었지만 그녀는 손가락 두 개였으니 두 그릇으로 이해한 거다. 서비스걸이나 우리나 한참 웃었다. 버섯에 치즈가 덮인 스텁 커틀릿 맛이 좋아서 모두들 만족했다. 토마토 수프 덕분에 많이 웃고 즐긴 점심식사였다.
6월 28일 토요일 흐림
어제 오후 출항했다. 원래 출항 시간은 10시 예정이었지만 식수 보급이 늦어져 오후 7시가 다 돼서야 출발했다. 무려 아홉 시간 지연된 셈이다. 출항 시간은 정확히 지켜져야 하는 게 불문율이다. 다음 항구 입항에 따른 스케줄이 있어서다. 대리점은 예정된 시간에 출항 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첫 날부터 식수가 문제더니 출항 날까지 이 지경이다. 차로 온다 배로 온다 오락가락하더니 결국 탱크로리가 왔다. 급한 나머지 두 대에서 세대로 늘렸다.
140톤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없어 90톤만 받았다.여름날씨치고 너무 변덕스럽다. 원래 블라디보스톡의 기후는 변화가 무쌍하다고 한다. 우기라 더 그럴 것이다. 항구를 빠져나오자 바람이 더욱 거세 진다. 기상 팩스를 보니 동해 쪽이 문제다. 서해를 통과 중인 998밀리바 저기압은 지금 20노트 빠른 속도로 동진 중이다. 계산해 보니 오늘 동해 상으로 빠질 것 같다. 저기압이 완전히 지나가면 항해해야겠다. 이틀째 묘박 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