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을 때 북한이 반복되는 홍수와 가뭄으로 엄청난 기근을 만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북한의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동포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천 만 불이 넘는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잠시 뒤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우선 북한 동포들에게 양식을 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회를 열어 교회가 건축 때문에 재정적으로 참 힘들고 어렵지만 힘을 다해 북한 동포를 위하여 한번 헌금을 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당회의 허락을 받아 교인들에게 북한 동포를 위해 한번 힘껏 헌금을 해 보자고 광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너무나 헌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얼마를 헌금하자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최소한 1억원은 헌금하게 해 주십시오. 1억원이 힘들다면 하나님 십만 불을 헌금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는 1불이 약 900원 정도 할 때였기 때문에 1억원이 나오면 1억원이라고 이야기 하고, 만일 9천 만 원 밖에 나오지 않으면 십만 불이라고 이야기 할 작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그 다음 주일 헌금 때 꼭 1억 원의 헌금이 작정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와 교인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정말 최선을 다한 헌금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예배당 건축보다 북한 동포에 대한 생각을 정말 더 많이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저 돈을 북한에 보내면 우리 동포 몇 명이 살 수 있는데 생각을 하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을 하면서 꽃도 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북한 동포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꽃을 달고 임직식을 한다는 것이 너무 사치하게 여겨졌고 정신없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당회 서기를 하시던 장로님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준을 북한 동포에다 맞추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임직식에 꽃을 다는 일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북한 동포를 불쌍히 여기고 저들을 돕고 섬기는 일을 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정도가 있고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정도와 한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북한 동포만 이야기 한다면 우리의 소비생활은 자꾸 위축이 될 것입니다. 소비생활이 위축이 되면 산업이 위축될 것이고 산업이 위축되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북한 동포를 도울 수 있는 힘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북한 동포를 생각하고 저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옳으나 너무 기준을 심하게 잡아 임직식에 꽃 하나 다는 것까지 시비를 걸 정도가 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생활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도리가 있습니다. 그 도리를 다 하지 아니하고 생활의 여유를 즐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생활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도리만 강조하다가 무조건 생활의 여유를 즐기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생활의 여유를 즐기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는 금욕주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 금욕주의적인 원칙을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훌륭한 것으로 결정한 후 그 기준에 미달하는 모든 사람을 다 기준미달자로 치부합니다. 그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가?’ (마 9장) 우리는 그와 같은 질문 속에서 당시의 사람들도 금욕주의적인 삶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금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건치 못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광야에서 금식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에 대하여 예수님은 필요 이상의 평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필요하면 하지만 금식만이 훌륭하고 경건한 것이라는 편견이 예수님에게는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으리만큼(마 11:19)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은 ‘생활의 여유를 갖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입니다. 물론 맥아더 장군이 이야기하고 있는 생활의 여유는 경제적인 여유를 말하는 것 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꼭 경제적인 여유가 마음의 여유에 반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도리’와 ‘삶의 여유’는 참으로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삶의 도리’도 중요하지만 저는 ‘삶의 여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의 ‘여유’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유’를 부정시하고 죄악시하며 무조건 ‘도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도리’를 가르치십니다. 특히 여유 있는 자의 여유 없는 자에 대한 도리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특별한 경우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고 가르치시는 도리에는 한계가 있고 기준이 있습니다. 그 도리의 기준과 수준이 절대로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도리에는 기준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하나님은 가진 자들이, 다시 말해서 여유 있는 사람들이 밭에서 추수를 할 때 자기 밭이라고 다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남겨 놓고 추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만치 않은 수준의 도리를 말씀하십니다.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남겨 놓으라고 하심은 최소한 가난한 자를 위하여 20% 이상을 쓰라는 말씀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였고 보편적인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보편적인 기준은 전자이지 후자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유 없는 자에 대한 도리를 다한 여유 있는 자의 여유를 인정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유와 그것을 즐김’은 아직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생활의 여유 자체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즐긴다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중 ‘생활의 여유를 갖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문은 참으로 다루기가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삶의 도리’만 강조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삶의 여유와 그것을 즐김’도 건강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여유와 그것을 즐기고 사는 복을 주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금욕주의적인 사고방식 속에는 남이 여유를 가지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곱게 보지 못하는 옹졸함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유와 그것을 즐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특별히 도리를 잊지 않은 자의 여유와 그것을 즐김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비천한 것이나 악한 것으로 무조건 매도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그것을 즐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모든 은혜와 축복을 더 하여 주시는데 그것을 즐길 줄 모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죄악시 하면서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모데 전서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축복을 감사함으로 받고 그것을 주 안에서 즐기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을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첫째, 즐기고 누리는 모든 여유와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 줄 알고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둘째, 여유 없는 자에 대한 여유 있는 자의 도리를 다하라. 그리고는 하나님이 주신 여유와 은혜와 축복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잘 놀 줄을 모릅니다. 저는 잘 웃을 줄을 모릅니다. 저는 장난을 잘 칠 줄 모릅니다. 저는 춤을 전혀 출 줄 모릅니다. 저는 사람들과 격의 없이 잘 어울릴 줄을 모릅니다. 저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준에 의하면 아주 목사다운 사람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저와 같은 모습을 ‘점잖고 경건하다’라고 흔히 생각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참 못 마땅하고 하나님께 죄송스럽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같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데 그것을 생각하면 밤낮 기뻐하고, 밤낮 감사하고, 밤낮 노래하고 춤을 추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마음껏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의 삶을 만끽하고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마땅한 바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왕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레셋에서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는 날 너무 기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게 그리고 신나게 춤을 추었는지 속옷이 벗어져 하체가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보고 심중에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삼하 6:16) 그리고 다윗을 비아냥거리며 흉을 보았습니다.(삼하 6:20) 그때 다윗은 미갈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 6:21)
우리에게는 다 미갈과 같은 컴플랙스가 있습니다. 춤추고 뛰노는 것을 경건치 못하고 점잖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적이고 유교적인 것에 더 가까운 생각합니다. 저는 생각은 그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났는데 아직도 몸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이와 같은 말씀이 시편 60편과 108편에 똑같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뛰노시겠다는 말씀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뛰노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려냈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모습이었다기 보다는 다분히 유교의 가부장적이고 점잖은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부처를 닮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한 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는 말씀이 저는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우리는 뛰 놀아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앞에서’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도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도리도 알지 못하고 무조건 여유를 즐기고 뛰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여호와 밖에서 뛰노는 것을 비판하다가 무조건 여호와 안에서 뛰노는 것 같이 불경시하며 죄악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남과 세상을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도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무엘하 6장 23절에서 보면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의 의미는 여호와 앞에서 뛰노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고,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된 삶을 즐기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겼음으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축복으로 허락해 주신 삶을 즐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즐기는 것을 즐겨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하나님의 보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뛰놀고 춤추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점잖은 것은 건방진 것입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도리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고 뛰노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유 있는 자의 도리를 담당하고, 여유 있는 삶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안다면 그 여유를 즐길 줄 알아야만 합니다. 도리를 담당하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즐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녀를 위한 기도문에서 ‘생활의 여유를 갖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도문도 매우 기독교적이고 신앙적인 기도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편견을 깨트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도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여유 없는 사람들의 가난과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고, 저들에 대한 책임과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자신만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세상과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똑 같이 무조건 사람들의 여유와 그것을 즐김을 시기하며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싫습니다. 저들 또한 세상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난하고 여유 없다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저는 싫습니다. 참 세상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감사와 도리와 즐김’이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자녀를 위한 기도문에서 이야기한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은 감사와 도리가 포함된 즐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 5:19)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라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 6:2)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삶의 여유를 누리고 즐기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악한 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교적이고 불교적인 경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당부하신 도리를 담당한 후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만끽하며 항상 기뻐하며 주 안에서 뛰노는 밝은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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