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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쓰던 시대는 1세기 말이었는데, 당시 교회는 세 가지 큰 위협에 처해 있었습니다. 첫째는 황제숭배의 강요이고 둘째는 유대교의 핍박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들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의 생존과 직결된 위기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위기의 때에 일곱 교회에 필요한 서신을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중에서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각 교회의 형편을 잘 알고 계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개별적으로 처방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처방전을 하나씩 손에 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받고 더욱 더 건강한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1-7)
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가장 먼저 편지한 이유는 그곳이 소아시아 선교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행19:10). 오늘날 UBF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시카고 UBF나 한국의 종로센터와 같은 본부센터요, 여러 개척 교회를 섬기는 모 센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절을 다시 봅시다.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꽉 붙들고 계십니다(사41:10). 암울한 상황 가운데 있는 일곱 교회를 늘 살피며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본부센터로서 위기에 처한 일곱 교회를 책임져야 했고, 그 책임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에베소교회에 말씀하십니다.
2절을 봅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본부센터로서 감당해야 하는 모든 수고를 아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자신들이 황제 숭배로 인한 핍박과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믿음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 생각했습니다. 매순간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지만 ‘우리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책임감 하나로 버텼습니다. 그 수고(hardwork)와 인내가 너무 컸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의 수고와 인내를 다 아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의 수고와 인내를 알아주지 않을 때 무척 섭섭합니다. 열심히 하다가도 마음이 싸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수고를 다 아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위로와 소망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진단하시고 처방하시면서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든가 ‘약해졌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누군가 그들에게서 처음 사랑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까? 우리는 보통 쓸모없는 것들을 버립니다. 다 쓴 볼펜도 버리고 먹다 남은 음식 쓰레기도 버립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있어서 처음 사랑은 더 이상 쓸 만한 무언가가 되지 못했습니다. 거추장스럽고 짐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세상과 우리는 사람들의 겉모습만을 칭찬합니다. 회사에서도 그 사람의 업적을 기초로 상을 주지만, 그가 얼마나 회사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 바삐 움직이고 정해진 십자가를 수고와 인내로 감당하는 것 자체로 만족할 때, 더 이상 처음 사랑은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당시 에베소는 자칭 사도라 하는 순회전도자들이 많았고(2:2), 영지주의 이단사상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이단사상과 싸우기 위해 늘 긴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 사이에도 사랑이 식어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외적인 적과 싸우느라 더 이상 내면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원래 에베소라는 말은 ‘긴장을 놓다’, ‘될 대로 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 말대로 이제는 싸우기도 지쳤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형식적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을 버린 그들에게 주신 경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긴다’ 는 말은 교회를 없애버린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는 문제는 2% 부족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아주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교회에 아주 가난한 한 사람이 출석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내용도 약간의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그를 피하기 시작했고 목사님마저 그에게 은근히 나가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가난한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옮겨야 할까요?’ 이런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걱정하지 마라! 나도 그 교회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였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도 출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저런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건강에 위험신호가 오고, 통장계좌는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여기 저기 기업들은 문을 닫고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위기의식을 갖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고민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힘들고 고달픕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진정한 위기가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우리 안에 처음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 없을 때 그 동안 우리가 피땀 흘려 이룬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Nothing). 사랑 없이 일하고 사랑 없이 신앙생활하고 사랑이 없이 가족들을 위해 사는 일은 얼마나 고달프며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있을 때 우리 삶은 얼마나 새롭고 신비롭고 감격스럽습니까? 야곱은 라헬에 꽁깍지가 씌어 7년을 하루같이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을 회복하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시급하며 중요합니다. 지난 여름에 새로운 부서로 옮겼습니다. 한 편으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기대가 되기도 했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 보니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장비는 엉망이고 사람들은 의욕을 잃고 연구소장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제 바로 위 상사가 짐을 싸는 턱에 졸지에 이 모든 골칫거리들을 떠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후로 늘 위기의식과 어떻게 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을지 하는 고민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현재 회사가 많이 어려운 처지에 있고 월급이 깎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올해 년 말이나 내 년 쯤엔 회사가 송도로 옮겨 가는데, 같이 가야 하는 것인지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것인지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제 능력과 상황에는 한계가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제게 수양회 말씀을 섬기라는 것은 발밑에 지뢰를 밟고 있는데 머리 위에 시한폭탄 하나를 얹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자신은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해도 사촌 동생이 안쓰러워서 전 재산 100원을 동생에게 건네는 측은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대로 다들 잘 사는 것으로밖에 안보입니다. 제 안에 다시금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비록 능력이 다소 떨어지고 문제거리들로 괴로울지라도 제가 이 모든 것들을 제 안에 있는 사랑으로 능히 감당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5절 상반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먼저 주님을 맨 처음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 때를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벌레보다 못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감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죄 문제와 인생문제로부터 구원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절로 나오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를 생각할 때 현재 나의 신앙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그토록 주님을 사랑했는데, 나는 지금 어떠한가?’ 그때는 십자가 말씀을 들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데, 어느 순간 십자가 말씀을 들어도 그냥 멍하거나 졸립기만 합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드리겠다던 맹세는 기억 속에서 아련하기만 하고 주님께 드리는 약간의 헌금도 아까워 집니다. 처음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회개의 심정이 생깁니다. 그때를 생각할 때 우리는 돌아가야 할 자리를 알게 됩니다. 그 아름답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잘못했으니까 무조건 고치라 하지 않으십니다.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생각함으로 그 마음에 회개의 소원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격적인 분이시며 사람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의 소원을 가진 이들에게 예수님은 명하십니다.
5절을 다시 봅시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가질 것을 명하십니다. ‘처음 행위를 가진다’는 말은 ‘처음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은 말씀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사랑했기에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무엇보다 에베소 교회를 개척한 사도바울은 양들을 사랑했고 동역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눈물과 기도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형제와 동역자들을 위한 눈물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형제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 또한 그들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소원을 가진 일로 만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감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열매 맺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눈물 흘리고, 입술로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 삶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한정미 목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년간 오늘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어제 목양소감에서 들었듯이 지난봄에는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렇게 힘썼을 때 처음 사랑을 많이 회복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메시지를 쓰기 위해서 오랜만에 말씀을 투쟁을 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생각하라는 말씀 속에서 첫사랑을 기억해 내려고 생각을 쥐어 짜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머리는 다시금 회사일로 생각이 옮겨져 있곤 했습니다. 억지로 생각을 쥐어 짜내는 중에 저는 과거 학부시절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체험한 이후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들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려다가 부모님의 핍박이 있었지만, 모든 슬픔을 이기고 서울행 버스에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상한 심령이 충만해서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를 극복하고 열심히 전도에 열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이런 열정과 사랑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적의 집중포화를 맞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패잔병의 슬픈 신음소리만 제 안에 가득합니다. 제가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행위를 가져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모임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 안에는 지난 봄 부터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갈등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학창시절과 달리, 풀타임 시절과 달리 사랑이 식어진 우리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사랑이 있는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2. 끝까지 충성하라(8-11)
8절을 봅시다. 요한은 이제 서머나 교회에 편지를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와 비슷한 해안 도시로 인구가 10만 정도 되는 에베소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였습니다. 요한은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면서 주님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소개합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에 처해 있다는 점을 잘 아셨습니다. 신자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 무신론자로 몰려서 핍박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므로 장사를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핍박 또한 서머나 교회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는 당장의 어려움을 견디는 일이 우선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래 걱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위기의 시대속에서 실제로 겪는 어려움도 있지만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며 겪는 심리적인 고통이 더 큽니다. 서머나 교회는 다가올 더 험난한 고난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절 상반 절을 보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8절을 다시 봅시다.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는 예수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입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신자들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통치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신자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는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광중에 거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죽음을 이이게 합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이 자신들을 지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절망과 허무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무기력해집니다. 늘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으로 시달립니다. 또한 사람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쾌락적이 됩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싸우기 보다 현실 도피적이 됩니다. 두려움은 얼마나 파괴적입니까?
이제 10절 하반 절을 보면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현재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죽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말씀하시다니, 이 말씀은 너무 야속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서머나 교회가 궁핍한 가운데 있지만 충성을 바쳐야 할 분은 로마 황제나 물질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한 분 이심을 분명히 붙들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굶어 죽는 다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고 예수님께 충성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그 어떤 귀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주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면 자꾸 잘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럴수록 두려움은 커지고 그래서 생명을 잃어 버리고 실상은 죽은자처럼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생명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학창 시절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인 안이숙씨는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었지만 죽을 각오를 했고, 그의 삶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성공한 뒤에 죽으면 살리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은 이상하게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하면 이상하게 영광이 사라지고 초라해 집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생명을 잃으면 살지만,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요즘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죽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 고생할 바에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기도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제가 이 말씀을 의지하여 두려움과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맺는 말: 7절과 11절을 보면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세기 말 초대교회가 당하는 핍박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 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처음 행위를 가지고 죽도록 충성함으로 핍박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앞에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려면 처음 행위를 가지고 죽도록 충성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2009년을 한 해를 시작하면서 말씀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대한 충성심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병든 세상에서 승리하며 장차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