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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소수림왕의 불교 공인과 태학 설립 그리고 율령 반포
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 재위)은 대국 고구려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다. 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이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 왕이 되어,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고 법령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국격을 높이는 3박자 정책이었다. 그의 고구려는 조카인 광개토왕에 와서 화려한 결실을 맺는다.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 왕위에 올라
소수림왕 없는 광개토왕은 생각할 수 없다. 소수림에게 광개토는 조카였다. 아들 없이 죽은 소수림을 이어 그의 동생 고국양왕이 등극했고, 광개토는 고국양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계만으로 광개토의 소수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림왕이 즉위하던 371년, 고구려는 일찍이 없었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인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제군이 평양성까지 쳐들어와 벌인 전투에서였다. 다행히 35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충분한 정권 이양 훈련을 받은 소수림이었다. 그렇기는 하나 남쪽으로 백제의 위협과 북쪽으로 만주 지역의 복잡한 정치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왕위에 있었던 기간 불과 13년, 그 사이에 그는 이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광개토는 그런 바탕에서 고구려 대국의 문을 활짝 열었다.
부왕이 전쟁 중에 사망하는 절대 위기를 소수림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전해지는 역사상의 몇 가지 사실들로 우리는 그의 시대를 구성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실들은 고구려의 국격이 만들어지는 데 무척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는 것들이다. 372년 불교공인과 태학의 설립, 373년 율령의 반포가 그것이었다. 소수림왕은 사상과 교육과 법률의 틀을 즉위 3년 안에 발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유사한 고구려의 불교 공인
서양에서 313년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이라는 큰 사건으로 기억된다.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를 만나 자신의 동생과 결혼하게 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공인하기로 한다. 이른바 밀라노칙령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진흥 정책을 쓴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내전에 내전을 거듭하는 전쟁 끝에 권력을 잡은 콘스탄티누스에게 확고한 권력 기반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는 여기에 기독교의 힘을 이용하기로 한다. 황제는 교회의 권위와 하느님의 권위에 따라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공인 10여 년 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가 동양으로 오면 불교로 바뀐다. 종교의 정치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묻노라면 그것은 거의 틀림없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꼭 60여 년 뒤, 고구려도 같은 상황을 맞고 있었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지 2년 되는 임신년(372)은 곧 동진(東晉)의 함안(咸安) 2년으로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또 4년 갑술년(374)에 아도(阿道)가 진(晉)나라에서 왔다. 다음 해 을해년(375) 2월에 성문사(省門寺)를 짓고 그곳에 순도가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짓고 그곳에 아도가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비롯된 바이다.”
먼저 [삼국사기]가 쓰고 [삼국유사]가 그대로 인용한 고구려의 불교 전래 사실이다. 불교의 전래가 왜 하필 소수림왕 때인가. 우리는 그 답을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비교하며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교의 정치적인 효용에 눈을 떠,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해
이 시기의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이다. 위(魏) 나라를 이어 진(晉) 나라가 중국의 정통왕조를 이었으나, 북방 오랑캐에게 쫓겨 동쪽으로 달아나 동진이라 이름 하고 있을 때, 장안(長安)은 전진의 부견이 차지하여 도읍을 삼고 있었다. [삼국사기]가 거추장스럽게도 동진의 연호를 가지고 연대를 나타낸 것은 사대주의의 한 표현이지만, 중원의 실질적인 주인은 전진이었다. 바로 그 나라에서 불교가 전래된다.
그런데 이것은 전래일까. 혹 소수림왕이 먼저 손을 내밀어 적극적으로 초빙한 것은 아닐까. 고구려는 실질적인 중국의 패자인 전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앞의 왕 때에 고구려를 괴롭히던 전연(前燕)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드디어 370년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전연의 태부 모용평(慕容評)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시켰다.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위한 조치였다. 소수림도 아버지의 이러한 정책을 충실히 지키며, 남쪽으로 백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무렵 중국의 불교는 도약의 시기였다. “혼돈된 사회상은 불교로부터 해답을 요구함으로써 영혼불멸설∙인과응보설∙전세윤회설 등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게 하는 불교 교의가 발달”(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하여 있었다. 이렇게 발달한 불교를 고구려는 중국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장점을 살려 왕이 전도승을 맞이해 사원을 세우고 승려와 신자들을 키웠다. 이 점이 중국 쪽에서 전파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근거이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를 원용하여 만드는 왕의 불교적 권위였다.
국가의 공인 이전에 민중 사이에서는 이미 불교가 전파되어 있어
그러나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이때에, 고구려가 비로소 불교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문명교류사 입장에서 종교의 전파는 초전(初傳)과 공전(公傳)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초전은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수수되는 전파이다. 종교적 사명을 띤 전도자들의 비공식적인 전도는 상당 시간 앞서 진행된다. 이에 따라 저변에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국가는 공인이라는 절차를 마련한다. 고구려에도 꽤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일연은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이라는 책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탑이 있다”라고 쓴 다음, 노인들이 말하는 신이한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둘러보려 이 성에 이르렀소. 다섯 색깔의 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을 헤치며 찾자, 한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지. 가까이 가면 곧 사라지고, 멀리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 보였소. 그 곁에 흙으로 된 3층 탑이 있었다오.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무엇인지 잘 몰랐소.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았지만 오직 마른 풀만 남았고,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지. 다시 파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새긴 글도 발견했고. 왕을 모시던 신하가 알아보고 말했소. ‘이것은 부처님의 탑입니다.’ 왕이 자세히 말하라고 재촉했소. ‘한(漢) 나라 때 있었습니다. 저 이름은 포도왕(蒲圖王)입니다.’ 왕은 부처님을 믿게 되어 7층 목탑을 세웠지. 뒷날 불법이 시작될 때에 이런저런 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소.”
일연은 여기서 고구려 성왕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포도왕은 물론 부처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탑은 아소카왕이 온 세계에 불교를 전하려 세운 석주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법령의 3박자 정책으로 나라의 근간을 다져
소수림왕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절을 짓고 승려를 받아들였으나, 자신의 순수한 불심에 따라 행한 일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고구려의 불교 공인은 정치적인 목적의식이 더 뚜렷해 보인다. 불교 공인과 함께 태학을 설립한 것은 하나의 방증이 된다. 태학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키워,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배출할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받아들인 셈이다.
바로 다음 해인 373년,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춘 것은 소수림이 펼친 정책 개발의 완성이었다. 율(律)은 형법법전, 영(令)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라 알려져 있다. 불교∙유교∙법령의 3박자 정책은 이렇듯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소수림왕이 북쪽의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문명을 받아들인 다음, 백제의 예봉(銳鋒)을 꺾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불과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13년간의 본인, 7년간의 동생을 거쳐, 한 사람의 조카이자 한 사람의 아들인 광개토왕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소수림왕 없는 광개토왕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 천하의 기반을 다진 소수림왕
고구려는 한민족사에 있어 특별한 존재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족의 웅대한 기개를 표현할때 대표적으로 쓰이는 대명사이자, 우리의 자부심으로 알고 있는 나라이다. 고구려는 서북으로는 동몽골, 동으로는 연해주, 북으로는 흑룡강 너머, 서로는 요하를 넘어 북경에 이르는 대영역을 보유한 국가였다.
고구려의 최대판도를 이룩한 이는 고구려의 영웅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 시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강자였다. 그 시기를 팍스 코리아나 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북쪽에는 유연 유목제국, 서쪽으로는 북중국의 강자 북위, 남쪽으로는 한족정권 남조, 그리고 동으로는 천손의 나라 고구려가 있어 4강체제를 이루며 동아시아 평화질서를 구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북위와 남조계 국가를 제어하며 막대한 국익을 챙겼다. 분열된 중국왕조는 고구려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음을 뜻한다. 그러니 팍스 코리아나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이 삽시간에 동북아를 통일하며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그의 백부이자, 고구려 17대 임금인 소수림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수림왕이 다진 내치가 없었다면 광개토태왕의 외정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소수림왕(小獸林王) 일명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인 그는 355년(고국원왕 25)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소수림왕의 아버지인 고국원왕은 고구려 역사상 불행한 군주였다. 작전을 잘못 세워 선비족 전연에게 수도를 유린당하고, 부왕인 미천왕과 자신의 생모와 왕비가 전연에 잡혀 갔기 때문이다. 미천왕의 시신과 왕비는 돌려 받았으나 자신의 어머니는 13년 동안이나 전연에 억류되었었다. 고구려는 미천왕 때 축적된 강력한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선비족 전연의 간계에 의해 북방정책이 제약당했다.
결국 고구려는 북진에서 남진으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고구려가 전연에 발목이 묶인 동안 전진이 크게 일어나 삽시간에 북중국을 통합했고, 또한 남쪽에서는 백제가 끊임없이 북쪽으로 진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북진은 결과적으로 고구려에 있어 위협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고국원왕은 백제를 공격했으나 참패당하고,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부왕이 죽고, 국력이 피폐한 상태에서 제위에 오른 소수림왕..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총체적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한 그의 고뇌와 고심은 컸으리라....
일단 그는 즉위하자마자 내정부터 정비하기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불교를 수용한 것이다. 재위 2년인 372년 소수림왕은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을 보내 불교 승려 순도와 불상, 불교경전을 보냈다. 또한 재위 4년에 동진에서 승려 아도가 오고 이듬해엔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주지로 삼고, 아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주지로 삼았다.
소수림왕은 왜 생소한 종교인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을까? 그것은 불교를 통해 분열된 고구려의 국론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였다. 즉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당시 여러 나부들의 제각각이던 고구려의 사상계를 통합하려는 것임을 뜻했다. 또한 불교에는 왕즉불 사상이 있는데 이는 왕은 곧 부처라는 사상으로, 왕즉불 사상은 고국원왕의 전사로 약화된 왕권을 고양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불교이론 중에 전륜성왕이란 사상이 있다. 불법으로 세상을 지도하는 왕중의 왕이란 뜻이다. 아마 소수림왕은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삼국지』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모든 대가들은 자체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고 그들이 이름을 왕에게 아뢰었다. 경대부의 가신은 회동좌기에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에 들 수 없었다"
이 기사가 뜻하는 게 무엇일까? 이는 고구려가 6대 임금 태조대왕 때 고대국가로 진입하기는 했으나 고구려 나부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관리임용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소수림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모든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사상통합과 아울러 왕즉불 사상을 내세워 침체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소수림왕은 재위 3년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율령을 반포한 것은 각 부족에 대한 국왕의 장악력이 강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율령의 반포는 국가가 종래의 관습법에서 벗어나 초부족적인 법, 즉 법을 성문화한 것을 뜻한다.
율령 반포를 고대국가 성립의 중요한 한 근거로 삼는데서 알 수 있듯이 율령반포는 고구려가 기존의 지방분권적인 관습법에서 벗어나 하나의 법체계를 이룩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했음을 보여준다.
소수림왕은 재위 2년 태학을 세웠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태학을 세우고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태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북사』와 『주서』에 그 단서를 제공하는 기록이 있다.
"서책은 『오경』과 『삼사』와 『삼국지』와 『진양추』가 있다"
오경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말하는데 이 서적은 논어, 맹자와 더불어 유학의 핵심서적이다. 이런 서적들이 고구려에 체류한 외국인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이들 책들이 고구려에 광범하게 유통되었음을 뜻한다. 소수림왕은 태학에서 자제들에게 유학에 관한 사항을 가르친 것이다. 일례로 한나라에서 유학을 국교화하였는데 그것은 유학이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는데 중요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구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나무를 베거나 말에 먹이를 주는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사통팔달한 거리에 각각 커다란 구조물을 설치하여 이를 '경당'이라 하고, 자제가 혼인하기 전에 주야로 여기서 독서하면서 활쏘기를 즐겼다. 책은 오경(五經)과 『사기』, 『한서』, 범엽의 『후한서』, 『삼국지』, 손성의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이 있었고 또 『문선』이 있어 이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경당의 설치는 소수림왕 대 경당 설치와 더불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태학은 왕권강화의 이념적 역할을 한 곳이었다. 독서와 무예를 익히던 경당과 태학은 왕권강화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각 나부가 지니고 있던 군사력을 광개토태왕이 통합할 수 있었던 데는 무력만이 아니라 태학과 경당 등이 지닌 이념과 교육적 측면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아버지인 고국원왕때 고구려는 모용씨의 전연에게 일격을 받아 도성이 함락되고 남녀 포로 5만여명과 왕실 가족이 잡혀가고 선왕이신 미천왕의 묘가 파헤쳐져 그 시신이 볼모로 끌려가기도 했으니 고구려사상 이보다 더한 참상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후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유시를 맞아 전사함으로서 고구려의 국가 통치력은 단번에 흔들리고 휘청거려진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우러러보고 부러워하고 위대하다고 칭하는 광개토호태왕과 장수태왕 이전에 소수림왕이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고구려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 대륙 북방의 패자였던 '전진(前秦)' 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여 전진의 제도와 문화의 수입에 노력하여 372년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하였으며 같은 해 태학(太學)을 설립하였고 그 이듬해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375년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 해에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준비하던 그는 전년에 고구려에 온 중 아도(阿道)를 위하여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는 등 주로 내치에 크나큰 힘을 쏟았다. 고국원왕의 태자로서 아버지를 잃고 바로 즉위해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구려라고 하는 제국을 다스렸던 소수림왕, 그의 치세 기간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무너져가는 고구려를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고구려가 대륙을 진동하게 하는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2007년 방영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에서는 소수림왕을 늙고 병약한 군주로 묘사했다. 태왕사신기를 제작한 김종학, 송지나 이 두 사람은 무슨 의도로 소수림왕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소수림왕은 늙고 병약한 군주가 아니라 백제와 전연의 침입으로 약화된 고구려의 힘을 비축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여 훗날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낳게 만든 위대한 군주였다.
소수림왕은 4세기 당시 가장 뛰어났던 '수성형 군주' 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치세 기간이 끝나고 고국양왕때의 시험 기간을 거친 고구려는 훗날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호태왕이 즉위함으로서 소수림왕 시기의 내정 정비로 비축된 힘을 사방으로 분출하여 고구려의 위명을 천하에 널리 떨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수림왕이 없었다면 광개토태왕의 대제국 건설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수림왕을 기억하고,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