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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라파타르, 생애의 고지(高地)에 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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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HIMALAYA ; Sagramatha National Park
2017—[Khumbu Himal] EVEREST.B.C. TREKKING — (6)
* 사진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두 번 클릭하면 원본의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
▶ 2017년 4월 21일 (일요일) * [EBCT 제6일] -(1)
<쿰중>→ <몽라>→ <포르체>
* [쿰중마을의 아침] — 간밤에 내린 눈으로 환상적인 설경을 이루다!
오늘은 트레킹 제육일째 되는 날이다. 이른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 쿰중호텔의 2층 방, 창문을 열어보니 마을은 온통 하얀 설경(雪景)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사이 많은 눈이 내린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약 10분이 지나고 나서 마을의 뒤쪽 설산[Khunde] 봉우리에 황금빛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히말라야의 일출은 주변의 가장 높은 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설산 정상의 황금빛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밝은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카메라를 챙겨들고 마당으로 내려와서 와서 주변의 눈 덮인 산들과 마을의 풍경을 감상했다. 동쪽으로는 탐세르쿠(Thamserku, 6,618m)와 캉테카(Kangteka, 6,783m) 설산연봉이 장엄하고 남쪽으로 콩데(Kongde)의 설봉, 그리고 마을의 뒤쪽의 산은 어젯밤 내린 눈으로 하얀 눈옷을 입고 있었다. 주변은 가지런한 돌담과 밭, 그리고 마을과 골목길이 모두 순백(純白)의 눈이 뒤덮여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화(童話)의 세계를 이루었다. 문밖의 돌담을 따라 나가서 보니, 우리가 유숙한 쿰중호텔의 눈덮인 풍경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어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온 세상은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 주었다. 쿰중마을의 이른 아침, 뜻하지 않은 설경에 그윽하고 신선한 안복(眼福)을 누렸다.
아침 해가 뜨기 전, 왼쪽의 캉데가(6,783m)와 오른쪽 탐세르쿠(6,618m) 설봉의 장엄경
'말안장'이라는 뜻을 지닌 캉데카가 더 높지만 탐세르쿠가 앞에 있어서 더 높게 보인다
줌을 잡아 당겨 카메라에 담은 설봉의 풍경 ; 정상에 아침햇살이 깃들기 시작한다
우리가 유숙한 쿰중호텔[롯지]의 설경
산으로부터 아침 햇살이 내려오는 쿰중마을
숙소인 쿰중호텔 앞에 있는 마일러 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이른 아침 김장재 사장이 마일러집 주장을 빌려서 끊인 구수한 된장국과 압력 밥솥에 지어낸 따뜻한 쌀밥, 그리고 갖가지 반찬을 곁들여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다. 어제의 점심과 저녁식사,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모두 김 사장의 솜씨로 차려진 식단이었다. 우리도 각자 라면이나 밑반찬 등을 준비해오기도 했지만 김 사장은 압력밥솥에 쌀까지 따로 준비해 왔다. 아무리 요리 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스스로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 대원의 정성에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히말라야의 오지(奧地)에서 대하는 따뜻한 한국식 밥상은 맛있는 미감 이상의 감동(感動)이었다.
눈내린 아침, 눈부신 햇살이 내리는 쿰중 마을 ; 2015년 대지진으로 다시 지은 집이 많다
오늘의 트레킹에 돌입하는 대원들 (가운데 마일러 부인과 아들, 제일 오른쪽이 우리의 현지 가이드 빠샹) [마일러 집앞]
마일러 부인 비알라가 우리에게 연황색 카타를 목에 걸어주었다. '카타'는 손님을 환영하거나 환송하는 극진한 예우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집 앞의 길 한 가운데 있는 자연석 마니월(Mani Wall) 앞에서, 마일러 부인과 아들 그리고 전 대원이 모여 서서 기념 촬영을 했다. 하늘이 청명하고 날씨는 화창했다. 간밤에 내린 눈이 그대로 있는 아침이어서 아주 산뜻하고 신선한 기분이었다. 오늘의 일정(日程)은 이곳 쿰중(Khumjung, 3,780m)을 출발하여 사나사(Sanasa)에서, 쿰비율라(Khmbi Yul Lha, 5,761m) 거봉의 산허리를 휘감고 나아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몽라(Mong Lha)을 넘어 포르체탱가를 경유하여서 두드코시[강]를 건너 포르체(Phorche, 3,810m)까지 가는 경로이다.
* [쿰중마을의 힐러리 스쿨 탐방] — 에베레스트 초등자 힐러리의 휴머니즘
그런데 이곳 쿰중에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세운 학교가 있다. 바로 ‘힐러리스쿨(Hillary School))’이다. 오늘의 일정의 시작은, 쿰중의 힐러리 스쿨을 탐방한 후 트레킹에 들어가기로 했다. 1953년 에베레스트을 초등한 에드먼드 힐러리는 영국 왕실로부터 경(卿)의 작위를 받고 ‘힐러리재단’을 설립하여 네팔의 오지 마을에 병원이나 학교를 설립하는 등 세상을 떠날 때까지 네팔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를 했다. 쿰중의 ‘힐러리스쿨’은 그가 세운 학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학교이다. 셀파족이 거주하는 남체와 쿰중은 쿰부히말의 거점 마을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에베레스트의 관문 루클라에 공항을 건설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네팔 사람들은 그의 공덕(功德)을 잊지 않는다. 롯지의 식당에는 어디를 가도 그의 사진이 붙어있고 남체의 에베레스트 갤러리에도 힐러리에 대한 사진을 가장 중심에 게시하여 기리고 있었다.
쿰중마을의 한 복판 길 - 마을의 남쪽에 있는 <힐러리스쿨>로 가는 길
배구네트가 쳐져 있는 <힐러리스쿨>의 바깥 운동장
<힐러리스쿨>의 교문과 교사 전경
쿤데 설봉 아래 쿰중마을 (<힐러리스쿨> 정문에서 촬영)
<힐러리스쿨(Hillary School)>은 마을의 남쪽 끝, 쿰중에 남체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요일이고 또 이른 아침이라 교정은 인적 없이 정적(靜寂)만이 흐르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마을의 골목을 벗어나자, 하얗게 눈이 쌓인 너른 운동장에 네트가 쳐져 있는 배구 코트가 있고 그 안쪽에 작은 출입문이 있는데 그 문의 기둥에 ‘Khumjung High School’이 씌어 있었다. 바깥의 운동장에서 교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크고 작은 교사(校舍)들이 좌우로 죽 세워져 있는데, 그 중 오른 쪽의 2층으로 된 ‘Golden Jubillee House’는 2011년에 세워진 것이다. 힐러리재단에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단층으로 된 ‘Computer Classroom’은 2007년 ‘한국알파인크럽’에 세워준 것이었다. 그 내력이 현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광장 좌우로 즐비하게 세워진 교사(校舍)들이 있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모두 잠겨 있어 건물 안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힐러리스쿨>의 교사(校舍)
그리고 교사 건물이 끝나는 남쪽의 광장 중앙에 ‘힐러리 경의 흉상(胸像)’을 모셔 놓았다. 가로 세로 7m의 정도의 정방형의 석단(石壇)을 쌓고 그 한 가운데 2m 정도로 쌓은 돌탑 위에 힐러리 경(卿)의 동제(銅製) 흉상을 모셔 놓았다. 동상 아래의 돌탑 위에 있는 흰색의 안내판에, ‘에드먼드 힐러리경(Sir. Edmund Hillary) / 1919~2008 / 쿰중학교의 실립자이며 후원자’라고 영문으로 적혀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리 동상(銅像)
*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 에드먼드 힐러리 이야기]… 인류사적 쾌거!
☆… 1953년 5월 29일 오전 6시30분. 33세의 뉴질랜드 청년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는 네팔의 셰르파(Serpa) 족(族) 가이드인 텐징 노르게이(Tenging Norgay, 당시 38세)와 함께 (후에) '힐러리 스텝'으로 이름 붙여진 험난한 수직 빙벽(높이 12m)을 지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정상에 올랐다. 그들의 등정 소식은 나흘 뒤 전 세계에 알려졌다. 마침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戴冠式) 날이었다. 여왕은 그에게 기사(騎士) 작위를 내렸다. 2013년,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의 일이다.
▲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북위 27도 59분 동경 86도 55분)
티베트 말로는 초모롱마(Chomoungma), 네팔어로는 사가르마타 불린다.
▲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오른쪽)와
네팔의 셰르파족 가이드인 텐징 노르게이 당시 캠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AP연합뉴스]
☆… 에드먼드 힐러리 (Edmund Percival Hillary, 1919.7.20~2008.1.11)는 뉴질랜드 출신의 등산가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최초 등정하여 인류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원래 양봉업자였지만 뉴질랜드의 남알프스에서 등반기술을 습득하고 로우(J.Lowe)에게 빙벽등반 기술을 배우며 등산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뉴질랜드의 가르왈 원정대에 참가, 처음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접한 이래로 1952년에 초오유산 원정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 [에드먼드 힐러리의 인간미]…겸손과 관용
☆… 평소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탐험가로서의 명예가 아니라 네팔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에도 그의 탐험은 계속됐다. 1965년까지 히말라야의 열 봉우리 등정을 마쳤고, 58년엔 개조한 트랙터를 타고 남극 원정에 나서 남극점을 밟았다.
그는 1967년 네팔의 셰르파들을 돕기 위한 ‘에드먼드 힐러리 히말라얀 트러스트 재단’을 설립하고 수백만 달러를 모금해 병원과 학교를 지었다. 평생 120차례나 네팔을 찾았다. 그의 재산은 재혼한 부인과 함께 사는 오클랜드의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2층집이 전부였지만 매년 25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아 셰르파 족을 돕는 데 썼다. 그의 첫 부인과 딸은 1975년 히말라야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라.” 늘 이야기하던 자신의 철학을 삶의 끝자락에서도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75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인 『모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는 이러한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2008년 1월 11일, 세상을 뜨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가 좋아하는, 내 삶의 출발점인 고향 바다에 닿고 싶다”였다. 그래서 자신의 유골을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영광을 안겨준 산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생 탐험을 마친 그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인간’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겸손과 관용’이라는 교훈이었다.
▲ 뉴질랜드는 1982년 5달러 지폐에 힐러리 경의 초상화를 넣었다.
* [원근의 설경 속에서 시작하는 트레킹] — 쿰비율라 산록의 길, 사나사 갈림길,
오전 8시 45분, <힐러리스쿨> 탐방을 마치고 본격적이 트레킹에 들어갔다. 다시 쿰중마을 한 복판의 길을 지나왔다. 날씨는 청명하고 화창했다. 파란 하늘에서 밝은 햇살이 내리는 아주 쾌청한 날씨이다. 따뜻한 양지에는 눈이 녹기 시작했다. 길가의 가게 앞에 나와 있는 여인이 이 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었다. 같이 나와 있던 네 명의 아이들이 “나마스테!” 하고 아침 인사를 건네며 활짝 웃었다. 화사한 표정에 맑은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히말라야 아이들의 햇살미소
마을을 빠져나와, 길 한 복판에 있는 작은 마니스토운이 지나면서 금방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정표(里程標)가 서 있다. 오른 쪽 아래로 내려가면 사나사(Sanasa)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리로 내려가면 길은 남체에서 탱보체로 가는 에베레스트 메인로드에 합류하게 된다. 우리는 그 길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여 팡보체를 경유하여 포르체, 교쿄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탱보체를 경유하는 길은 귀로(歸路)로 여정이다.
쿰중마을에서 북쪽으로 바라다 본 아마드블람(6,814m)의 위용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로 들어서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동쪽으로 거대한 산봉이 압도해 왔다. 바로 탐세르쿠(Thamserku, 6,618m)와 캉테카(Kangteka, 6,783m) 설산연봉이었다. 가까운 산록에는 어젯밤에 내린 눈으로 아름다운 설경을 펼치고 있고, 건너편의 거봉들은 만년설에 덮여 눈부신 햇살을 받아서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트레킹은 왼쪽의 쿰비율라(Khmbi Yul Lha, 5,761m) 거봉의 산허리를 감고 난 길을 따리서 가는 길이다. 우리가 산행하는 쿰비율라 산줄기와 저 탐세르쿠 연봉 사이에는 두드코시(Dudh Koshi) 계곡이다. 에베레스트 베아스캠프로 들어가는 트랙은 이 계곡의 기슭의 길을 따라서 나 있는 길이다.
두드코시(Dudh Koshi)는 쿰부히말의 중심을 이루는 물줄기이다. 그 원류는 초오유 베이스캠프가 있는 응가줌바빙하에서 시작하여 그 아래 교쿄와 돌레를 경유하여 내려오는 물줄기로, 풍기탱가에서 임자콜라의 물이 합류하여 내려오는 장대한 계곡의 물이다. 임자콜라는 임자체와 로체빙하에서 비롯된 물이, 페리체 아래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의 쿰부빙하에서 비롯되는 계곡물과 합류하여 내려오다가, 풍기탱가에서 두드코시에 합류해 들어오는 것이다.
* [맑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산록의 길] — 히말라야 보법 ‘비스타리 비스타리’
얼마간 산록의 길은 평탄했다. 이(李) 대장이 길을 안내하면서 히말라야 보법을 다시 한번 이야기 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는 것이었다.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고 난 후에, 영국의 한 기자가, “그 험하고 높은 산을 어떻게 올라갔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한 말은,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고 했다. 특별한 비법(秘法)을 예상한 질문에 그의 대답은 너무나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한 발 한 발 걷지 않으면 올라갈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산길은 해발 고도 3,800고지의 벼랑길이다. 이미 심한 고소증(高所症)이 가슴을 압박해 오고 있다. 모든 대원들이 마음의 결의를 다지고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급하게 쏟아져 내리는 급경사의 산록의 길, 그 벼랑길이 아득하게 산모롱이를 돌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은 산록은 이미 눈이 녹아버렸다. 대원들은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한참 오르막길을 차고 오르고 나서 잠시 뒤를 돌아보니 쿰중마을은 있는, 산곡의 뒤쪽으로 웅대한 순백의 설산이 파란 하늘에 솟구쳐 있다. ‘타르티카’와 ‘콩데’였다. 동쪽의 탐세르쿠 연봉은 우리의 가는 길에 함께 하고 있었다.
뒤로 보이는 삼각예봉이 아마드블람(Amadablam, 6,814m), 가까운 오른쪽 설봉이 캉데가(Kangdega, 6,783m)
우리가 머물다 온 쿰중마을과 그 뒤쪽의 콩데 설봉
* [천 길 벼랑길에서의 조망] — 담세르쿠-캉데가 설봉의 장엄경
한참을 가다가 앞을 바라보니, 가파른 경사의 거대한 바위 벼랑에 두 개의 길이 보인다. 아래에 나 있는 너른 길을 탱보체 가는 길이요, 그 가파른 위쪽 바위 벼랑에 나 있는 소로(小路)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포르체 가는 길이다. 바라만 보아도 아찔한 산길이다. 큰 오르막 고개를 넘어서니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철봉으로 가드레일을 해놓은 계단 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높은 절벽 계단에 10마리가 넘는 야크 카라반이 몰려오고 있었다. 수십 킬로의 짐을 등에 진 야크의 행렬, 좁은 길에서 바로 마주치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피할 수 있는 공간에 있는 곳에서 기다렸다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몸은 항상 산록의 위쪽으로 피해야 한다. 벼랑 쪽에 있다가 야크의 짐에 부딪히게 되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대장의 설명이다.
[오늘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왼쪽 위 바위벼랑의 길] - 쿰중에서 사나사-몽라-포르체를 지나 팡보체를 경유하여 EBC로 가는 길
* [오른쪽 아래의 길] - 남체바자르에서 출발 사나사-탱보체를 지나 팡보체를 경유하여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로 가는 길
야크를 지나 보내고 급경사의 돌계단 길을 치고 올랐다. 아득한 산록의 벼랑 길 위에서 돌아보니 멀리 쿰중 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콩데의 설봉이 도도하게 솟아있다. 발아래 벼랑의 아래쪽에는 두어 채 집들이 있는데, 사나사(Sanasa) 마을이다. 쿰중에서 내려와 탱보체 가는 길과 만나는 지점의 롯지마을이다. 우리가 오르내리는 산길은 험난했다. 바위 벼랑에 경사가 급한 길을 치고 올라오는 돌길이 이어진다. 대원들의 간격이 많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간 김장재 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나아갔다. 가이드 파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김준섭 대원과 김미순 대원과 호산아[필자]는 뒤따라오는 대원들의 보행 상태를 살피며 속도를 조절해나갔다. 기원섭 대원은 가는 곳 요소요소마다 사진을 찍고 캠코더로 동영상을 담으니 보행 속도가 더욱 느리다. 기(奇) 대원 옆에는 카일러가 동행하고 있다. 이진애 여사와 신은영 양이 함께 따라오고 후미에서 이 대장이 오고 있었다.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캉주마(Kyangjuma) 롯지마을- (사나사(Sanasa) 바로 위에 있다)
멀리 설산 콩데와 쿰중마을 / 왼쪽 벼랑 아래 집들이 사나사 마을 - 고소증이 엄습하여 무거워진 몸
후미의 이 대장과 대원들
* [장대한 설산의 장관] — 설산미봉 ‘아마다블람’ 장대한 ‘타부테피크’
바위 벼랑의 가파른 산길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 너른 평지의 길에 올라서 선두와 후미의 전체 대원들이 합류하여 휴식을 취했다. 파란 하늘,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고산의 길목, 히말라야 봄날의 서늘한 바람결이 이마의 땀을 훔치고 간다. 아, 그런데 북쪽으로 열린 시공에 하늘을 찌르는 산봉이 보인다.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의 예리한 거봉이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 서쪽으로 거대한 타부체피크(Tabuche Peak, 6,367m)와 촐라체(Cholache, 6,335m) 설산 연봉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맑은 하늘이 열리고 시공(時空)이 맑아 타부체피크와 아마다블람 사이로 멀리 로체(Loche, 8,414m) 연봉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동쪽은 여전히 강테카, 탐세르쿠 설산의 솟아있고 남쪽으로는 콩데 설봉이 자리하고 있으니 참으로 히말라야 만년설의 거봉들이 바라보이는 지점이다. 사면으로 병풍을 두른 설산거봉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우리의 이(李) 대장이 ‘탱보체 길’보다 ‘포르체 길’을 택하여 트레킹 로드를 잡은 것은 오래된 히말리스트의 경륜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가고 있는 쿰비율라(5,765m) 산록의 길에서 바라본 쿰부히말 설산 고봉의 장관과 깊은 두드코시 계곡
왼쪽의 설봉이 타부체피크(Tabuche Peak) / 가운데 뒤에 보이는 삼각예봉이 아마드블람(Amadablam)
멀리 가운데 계곡(임자콜라)의 왼쪽 흰구름 앞에 있는 로체(Loche, 8,414m) -네팔과 티벳의 국경에 위치해 있다.
오른쪽에 설봉 캉데가(Kangdega, 6,783m) / [사진 중앙] 캉데카에서 뻗어내려온 산즐기 위가 탱보체.
오늘 트레킹에서 대면한 아마다블람(Amadablam)에 대해 이 대장의 설명이 곡진하다. 해발 6,856m의 아마다블람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설산 암봉이다. 네팔 쿰부히말의 한 가운데 솟은 아마다발람(Amadablam)은 스위스의 중부 알프스 마터호른(Matterhorn, 4,478m),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993m)와 함께 세계 3대 미봉(美峰)으로 꼽힌다고 했다. 이상배 대장이 이 아마다블람에 대해 각별한 것은 ‘자신이 2004년 겨울에 저 날카로운 산봉을 등정’했기 때문이다. 이 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마다블람(6,856m)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골짜기를 찾을 때마다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히말라야의 보석 상자’입니다. 내가 몸소 올랐던 거봉(巨峰)이기도 하지만, 쿰중을 지나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아마다블람은 깊고 넓은 골짜기 탱보체 곰파의 우측 건너편에 위치해 있는데, 우아하고도 화려한 장관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줍니다. 이러한 진경(珍景)을 두고 아마다블람을 ‘어머니의 목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을 마치고 아마다블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깊었다.
* [왜 히말라야 트레킹인가] — 대자연의 시간 속에서 구가하는 영혼의 자유
이제 길은 평탄하고 넓었다. 대원들이 거의 같은 보조로 걸었다. 앞의 사야가 열렸다. 오늘 산행의 제1포인트인 몽라(Mong Lha)가 아득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멀리 뒤쪽에,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체(Phortse) 마을이 장엄한 타부체피크(Tabuche Peak)와 촐라체(Cholatse) 설산연봉의 산록의 아래에 안겨 있는 모습도 아련하게 시야에 잡히기도 했다. 히말라야의 ‘거리’는 아득하기 그지없어서 마음이 조급하면 더 힘들다. 그저 묵묵히 걷다 보면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백 걸음이 되고, 다시 그것이 천 걸음이 되어, 때가 되면 마음의 지향하는 바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人生)이 그런 것처럼. 그 길은 때로 평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단하고,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이 목적지 이룰 수 없으니, 애드먼드 힐러리의 말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人生)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히말라야의 산길을 걸으면서 생의 지혜와 철학을 몸으로 느낀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늘 조급하게 헐떡거리며 나아가는 문명의 시간에 길들어 있다. 그것이 오직 세상을 잘 사는 일이라고 당연히 생각해 왔다. 여기, 숨쉬기조차 어려운 험난한 산길을 천천히 걸으며 마음은 오히려 여유와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몸으로 느끼는 느림의 미학이다. 대자연의 시간 속에서 나의 영혼은 지금 자유(自由)를 구가한다.
장엄한 타부체피크(Tabuche Peak)와 촐라체(Cholache) 설산연봉의 산록 아래 포르체(Phortse) 마을
앞에 보이는 왼쪽 산기슭 눈이 희끗희끗한 평평한 산 능선이 오늘의 중간 경유지인 몽라(Mong Lha)이다
* [몽라가는 길] — 대협곡 건너 보이는 설산과 탱보체 근방
발걸음이 무거운 여정 속에서, 시야를 떠나지 않는, 두드코시 건너편 탐세르쿠와 캉데카 설봉의 위용은 더욱 가깝게 다가와 있다. 더욱 거대하고 장엄하다. 걷다가 바라보고 쉬다가 바라보며 가는 길이니, 눈부시게 빛나는 설봉(雪峰)의 파노라마를 이마와 마주 하며 걷는 산길이 장관이다. 뜨거운 가슴을 더욱 충만하게 한다. 앞을 내려다보니 건너편 캉데카 산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Danda] 위에, 큰 사원[Gompa]있다. 바로 탱보체(3,860m)가 선명하게 시야에 잡히는데 그 산줄기는 임자체콜라와 풍키콜라 사이의 절벽[Na야] 위에 있다. 그 유명한 탱보체와 풍키텡가로 이어지는 길은 우리가 귀로(歸路)의 여정으로 잡은 곳이다.
동쪽으로 건너다 봉는 탐세르쿠-캉데가 설봉의 장관
쿰부희말 임자콜라(계곡)의 좌측 설봉이 타부체피크 / 가운데 뒤쪽 예리한 설봉 아마드블람 / 그리고 오른쪽 캉데카 거봉
오른쪽의 캉데카에 완강하게 뻗어내려온 산능선 위에 쿰부히말 최대 사원(곰파)이 있는 탱보체 / 그 우측 계곡이 풍기콜라
다시 얼마간 길은 평탄하게 이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 길을 거대한 산의 가파른 기슭에 위치해 있다. 상하 좌우의 아름답고 장엄한 설산과 계곡의 풍경을 조망하며 걷는 길은, 참으로 쾌적한 기분이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 듯한 고요한 산록의 길, 멀쩡한 하늘 아래 힘들게 숨쉬고 걷는 길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이 가슴에 벅차오른다. 세상 속에서 무엇인가 채울려고 했던 마음이, 무언가 맑은 기운으로 충만해 있는 느낌이다. 맹자는 이것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약간의 고소증으로 가슴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시야에 정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쿰비율라 거봉의 산록의 허리를 감아도는 길이다. 비록 높은 산허리를 감고 돌지만 길은 완만하고 편안했다.
곧은 마음을 길러서[敬以直內]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차게 되는 것, 호연지기!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 맹자(孟子)는 군자가 덕(德)을 갖추는 근본 바탕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호연지기는 맹자 사상의 중요한 덕목으로, 인간이 참다운 심성(心性)을 갖추기 위해서 반드시 체득해야 할 명상수련의 핵심이다. 맹자 특유의 심오하고 적극적인 논리로 개진된 양기론(養氣論)이다. 그런데 이 호연지기는 무엇이며, 호연지기는 어떻게 기를 것인가? 우선『맹자』‘호연지기장(浩然之氣章)’-(공손추·상,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공손추가 묻는다)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합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그 기(氣)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곧은 마음으로 길러서 해침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차게 된다. 그 기(氣)는 의(義)와 도(道)에 짝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쭈그러든다. 이는 의로움을 거듭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니, (하나의) 의로움으로 갑자기 취하는 것이 아니다. 행한 것이 마음에 만족스럽지 아니함이 있으면 쭈그러든다. (敢問何謂浩然之氣 曰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則餒矣)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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