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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7월 27일 염화실 인터넷방송 법문 시작 하겠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 계절에 좀 휴가도 갔다 오고, 또 공부하는 이 시간도 좀 빼 먹기도 하고, 이렇게 쉬어가시며 하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글을 올리시면서, 수업시간 빼 먹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지요. 가끔 빼 먹는 사람이 끈기 있게 오래 공부하지요. 너무 열을 많이 내다가 갑자기 또 싫증이 나서 다 집어던져 버려지는 그런 예들이 많지 않습니까. 무슨 일에나 다 그렇지요. 조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마음 쓸 것이 없습니다. 너무 열중 하는 것을 오히려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어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여유를 가지고, 그 대신에 오래 끝까지 해야 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도 공부할 때 한참 열심히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면 어쩌나... 그런 염려를 하면서 하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스스로 브레이크도 걸면서, 그동안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는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게 살았지만, 그 대신에 아니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끊임없이 꾸준히 안하는 것 같으면서도 늘 해오는 생활이었다고나 할까요.
우리 불자님들 잘 아시지요? 거문고를 타는 사람에게 ‘마치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거나 또 너무 느슨하거나 하면 온전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 잡아함경 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소나라고 하는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도대체 전진이 아니 되어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신도로서 물질적인 보시나 행하고, 복을 짓는 편이 않을까? ‘부처님의 가르침! 이것 아무리 해봐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이래서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환속을 해서 어떤 물질적인 보시나 승단에 하고, 그래서 복을 짓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부처님이 그러한 소나 비구의 마음을 아시고,
“소나야, 그대는 세속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거문고를 탈 때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줄을 너무 조이면 소리가 잘 안 나지요.” “줄을 너무 늦추면 어떻더냐?” “역시 그래도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공부도 그와 같아서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하게 열을 내서 한다던지, 또 너무 느슨하게 아예 잊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게으르게 한다면, 그것도 역시 정진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알맞게 자기의 근기와 체력과 또 어떤 자기의 심성과 이런 것들을 잘 살펴서 거기에 알맞게...”
그건 뭐 자신밖에 알 수 없는 거예요 사실은...
“스스로 조절을 잘하면서 하는 그것이 오래 가고, 좋은 성과도 거둬들인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그러한 유명한 이야기를 우리 불자님들도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집안일도 그렇고요. 어떤 일에든지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개인마다 다 다르지요. 얼마만치 어떻게 하는 것이 너무 조이는 것이냐? 또 어떻게 하는 것이 너무 느슨하게 하는 것이냐? 이런 것은 꼭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근기와, 각자의 취향과, 불교라면 불법에 대한 이해의 정도와, 스스로 느끼는 재미와 이런 것에 따라서 다 다를 수가 있는 것이지요. 달라야 당연한 것이고요. 그런데 경전의 말씀은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실천하고 해서 정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최상의 어떤 경지!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늘 기대를 하고 있거든요. 다른 경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법화경에서는 최후로 당신이 정복한 인간 최고의 경지! 그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일러주고 미래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깨우치도록 해주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희망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도 그것을 희망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글쎄요. 저도 걱정을 조금은 하는 것이 경전 공부도 저 나름대로는 정법 구현을 위해서 다른 불교를 전하는 것이 저에게도 소득이 크고, 듣는 사람도 가장 이익이 있다는 계산하에서 하는데, 전번에도 얼핏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어떤 분이 그랬어요. 복 짓고 뭐하고 하면 집안이 잘 되고, 가정생활이 좋고,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도움도 되고, 보탬이 되고, 무엇인가 어떤 제 삼의 힘이 있어서, 개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복을 빌고 하는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스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너무 어렵게 가르치지 않느냐? 이런 말씀을 직접 하셨어요.
전번에도 얼핏 말씀드렸지만, 그래요. 제대로 된 불교를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실은 크게 흥미를 못 느끼고 지루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간혹 그렇게 법화경 공부에 간혹 그런 마음이 들면, 쉬어도 좋고, 안 들어도 좋고, 그러면서 한번 씩 가끔 들어와서, 또 이렇게... 너무 잊어버리지나 말고, 가끔 한번 씩 와서 다시 들어보고, 다시 생각해 보고, 융통성 있게 공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이익을 얻을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너무 최 상승 법문이라고, 최 상승 경전이라고, 좋다고만 생각을 해서 이런 식으로 강의는 하고 있습니다마는, 듣는 사람은 자유니까요. 듣는 사람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조절해 가면서 공부하셔도 좋습니다. 마치 소오냐 라는 비구에게 부처님이 거문고 다루는 법을 말씀하셨듯이, 법화경 공부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도 그런 것은 한번쯤 적용해서 살려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말뚝 信心(신심)” 이라는 불교용어가 있거든요. 그것은 사전에도 없고, 경전에도 없는 불교어가 많습니다. 口傳(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그런 불교가 있잖아요.
역사가 오래다 보니까, 경전에도 없고, 기록에도 없고, 그러면서도 또 상당한 교훈이랄까, 이런 것들이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뚝신심 이라는 것도 없어요. 어떤 조사어록에도 없어요. 구전으로 전하는 불교라고 저는 “口傳佛敎”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사찰에서 우리 스님들이 처음에 아주 말뚝 신심, 그야말로 막 밀어붙이고, 신심이 나서 그냥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위험천만 하다는 것이지요. 오래 가지 못한다 해서 옛 어른들이 아주 염려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것이고요. 信心 한참 내서 하는데 그것을 말리면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려는 하는 것이지요.
너무 열중하는 사람들은, 어른스님들은 꼭 “저 사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염려는 하지만, 말릴 수도 없습니다. 또 할 때 하라는 권고도 없지가 않으니까요. 일정한 것은 없지요. 정말 無有定法(무유정법)입니다. 우리가 불교에서 좋은 말들을 많이 배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유정법! 고정된 어떤 법칙은 없다. 신심명 에도 그런 것이 있지요.
窮極(궁극)의 자리, 究竟(구경)의 자리, 最上(최상)의 자리, 가
자장 이상적인 것은 구정개칙 이라. 固定(고정)된 법칙
이 없다. 고정된 법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 여러 번 그런 말씀 나오지요.
아뇩보리가 아뇩보리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보리]이니라.
무유정법 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고정된 법이 없는것!
그것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법이다. [아뇩보리]라는 것
은 고정된 법이 없다. 뭐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해도 역시 어떤
고정된 법칙은 없다 그렇습니다.
신심명에, 구경이요 궁극의 자리는 구경의자리, 궁극의 자
리, 가장 이상적인 경지는 ‘구정개칙’이라! 어떤 고정된
법칙이 없다는 것이지요. 참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오늘은 ‘약왕보살 본사 품’ 231쪽 ‘보살의 화생’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지금 약왕보살 이야기를 꺼냈는데, 약왕보살의 과거생의 이야기를 부처님이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생의 보살로서의 이름은 “일체중생 희견 보살이다.” 그랬어요. 일체중생 희견 보살일 때의 그 부처님은 ‘일월 정명 덕’ 여래다. 아직도 그 이야기가 계속 되어 지고 있는데, 어제 이 일체중생 희견 보살이 부처님께 소신공양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몸을 태우는 공양인데,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라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면, 내 의지로서 내 몸과 목숨을 다 던져서 스스로 연소하고, 스스로 회향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참 소중한, 사람의 몸을 받아서 정말 소중한 삶을 제대로 그 가치 껏, 그것을 쓸 줄 아는 삶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끼지요. 돈도 아끼고, 건강도 아끼고, 뭣도 아끼고, 인생도 아끼고, 몸도 아끼고, 그렇게 아껴서 그것이 영원히 아껴지면 참 다행이겠는데, 결국은 그렇지 못하고, 50보, 100보로 그저 결국은 던지고 갈 그런 몸 인데, 제대로 한번 자기 의지로서 자기 인생을, 시원스럽게 쓰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것이 아까운 일이지요. 그것이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돈 잔뜩 벌어 놓고 제대로 의미 있게 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아까운 일이겠습니까? 돈보다 천배 만배 중요한 이 몸을 받고,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 이 인생을 한번 의미 있게 써 보지 못하고 끝낸다면, 그것은 사실 돈을 수백 억 모아놓고 못 쓰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까운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 과거생에 야광보살 이라고 일체중생 희견 보살 이라고 하는 이가 소신공양! 정말 의미 있는 일에 몸과 목숨을 다 던진, 그런 권고사항으로서의 소신공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뒤에 가면, 사실 몸을 태울 때는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된다는 내용이 나와요. 무엇인가 하니, 팔을 태웠는데 팔이 다시 예전처럼 솟아났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 쯤 되어야 사실은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태울 자격이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이 말씀의 저변에는 그야말로 말뚝신심으로 무턱대고 그렇게 아까운 손을, 정말 이렇게 경전에서 말한 대로 그렇게 태우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정말 그것은 말리고 싶어요. 뒤에 손가락을 하나 태우거나, 팔을 태우는 것이 어마어마한 공덕이 된다는 그런 말도 나와요.
법화경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면, 참 아주 삿되게 공부하는 길로 빠지기 일쑤이고, 제대로 공부하면 참 아주 더할 수 없이 좋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법화경이 참 어려운 경전이고, 그러면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경전이기도 하고, 또 위험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p,231
(4) 보살의 화생(化生)
6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이렇게 법공양(法供養)을 하여 목숨이 다한 뒤에 다시 일월정명덕 부처님의 국토(國土)에 태어나는데, 정덕왕(淨德王)의 가문에 결가부좌 하고 홀연히 화생(化生)하였느니라.
‘홀연히 화생하였다.’ 이 말이에요.‘결가부좌 한 채로.’ 몸은 이미 부처님께, 향을 먹고 향을 바르고 이렇게 해서 오래도록 몸을 태워서 소신공양을 다 올려버렸지요. 그런데 목숨이 다 하자마자 다시 ‘정덕왕,’그 나라 왕의 집안에 ‘결가부좌 하고 화생하였다.’ 화생의 의미도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또 하나의 화생은, 우리가 胎(태). 卵(란). 濕(습). 化(화) 할 때 변화해서 생기는, 중생의 태어남을, 또 달리 해석하고 그렇지요.
그리고 곧 그 아버지를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대왕이시여, 지금 마땅히 아십시오. 내가 저 곳에서 경행(經行)하면서 온갖 색신(色身)을 나타내는 삼매를 얻었습니다. 큰 정진을 부지런히 행할 때 사랑하는 몸을 버리고 세존께 공양한 것은 가장 높은 지혜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최상의 지혜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표현을 했어요. 정말 진실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에 보탬이 되는 데에 이 몸을 던져서 희생을 했다면, 그 사람을 두고 얼마나 오래도록 찬탄을 하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여기에 ‘정덕왕의 가문에 결가부좌 한채 홀연히 화생해서,’그 생을 크게 간격 없이 그대로 이어가게 되고, 또 더 훌륭한 삶을 펼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말 燒身(소신)할 정도로 정말 가치 있는 일에 목숨을 던졌다면, 죽은 뒤에도 찬사가 따르리라... 얼마든지 합리적인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도 합니다.
7 이 게송을 말하고는 아버지에게 말하였느니라. ‘일월정명덕부처님께서는 지금도 계십니다. 내가 먼저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중생들의 말을 아는 다라니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법화경의 팔백 천만 억 나유타. 견가라. 빈바라. 아촉파 등의 게송을 들었습니다.
여기 ‘나유타. 견가라. 빈바라. 아족파’ 라는 것은 전부 숫자의 단위인데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수천억 수조에 달하는 그런 숫자의 게송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숫자의 개념으로 말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인도에는 숫자가 아주 많이 발달을 해서요. 우리는 억. 조. 경. 이렇게 얼마 안 나가는데, 인도에는 그 단위가, 100 몇 가지의 단위가 있습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이런 식으로 단위가 정말 많습니다.
그 가운데 나유타니 견가라니 빈바라니 아촉파니 이런 것들이, 열두 번째 들어 있고, 열네 번째 들어 있고, 열여섯 번째 들어 있고, 이런 식으로 숫자의 단위에 해당은 됩니다마는, 우리의 숫자의 개념으로 계산을 하면 몇 조의 게송 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저는 지금도 돌아가서 이 부처님께 공양하려 합니다.’ 저~ 전생에 벌써 그렇게 소신공양을 올렸지요. 그리고 또 가서 공양하겠다는 그런 말씀을, 아버지인 대왕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집에 화생을 했기 때문에 굳이 아버지라고 하는 의미가 그렇지요. 그러니까, ‘대왕이시여...’이렇게 불렀습니다.
(5) 부처님의 처소에 나아가다
8 이렇게 말하고 나서 칠보로 된 대에 앉아 칠 다라수 높이의 허공에 올라가서 부처님이 계신 곳에 이르러 머리를 숙여 발에 예배하고 열 손가락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느니라. ‘존안이 매우 아름다우시고 광명이 시방에 비치십니다. 제가 일찍이 공양하였는데 이제 또 친근(親近)합니다.’
재빨리 다시 화생해서는 또 부처님에게 찾아가서 합장하고 부처님을 그렇게 찬탄하는 말이지요.
‘존안이 매우 아름다우시고 광명이 시방에 비치십니다.’ 부처님을 그렇게 찬탄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공양하였는데 이제 또 친근해서 또 공양하려 합니다.’ 이런 이야기이지요. 그렇지요. 정말 가치 있는 일이고, 좋은 일이고, 자기 삶에 확신이 서는 그런 일이라면 어디 한두 번 하고 끝낼 일이 아니잖습니까? 죽어서 또 세세생생, 우리가 불교에서는 世世生生(세세생생)이라는 말을 하지요.
정말 세세생생 태어나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확신이 서는 일에는 당연히 그렇게 이어져야 됩니다. 다른 것 할 것이 있습니까? 사실...
저도, 정말 불법공부하고 또 출가해서 승려 생활 하는 것! 과거 생 에도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지금 생에도 하고, 다음 생에도... 잘하고 못하고는 그 때 일이고, 어쨌든 하리라고 믿고, 할 계획이고 그렇습니다.
계획이 내 의식 속에서 기억이 되 든 안 되든, 그것과는 관계없이 현재의 마음은 늘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체중생 희견 보살 도 그런 삶을 사는 것 이지요.
우리가 [世世常行菩薩道(세세상행 보살도).]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이 때 일체중생희견보살이 게송을 말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느니라.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아직도 세상에 계십니까?”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저는 소신공양하고 죽었다가 다시 이렇게 또 돌아 왔는데, 아 세존은 아직도 그대로, 일 월정명덕 부처님은 그대로 아직도 전생에 보던 부처님으로 그냥 계시네요.” 이런 이야기 이지요.
여래가 부촉하고 열반에 들다 이것이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일체중생희견 보살이, 정말 부처님의 일을 위해서 몸을 다 바치고, 또 돌아와서 또 역시 그런 일을 하겠다고, 願力(원력)을 세우니까, 일월정명덕 부처님이 그냥 있을 수가 없지요. 정말 이런 제자! 이런 훌륭한 제자 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일체 것을 다 부촉을 해도, 충분히 修行(수행)할 수 있는 그런 지혜를 가졌고, 원력을 가졌고, 어쩌면 부처님보다도 더 잘해나갈 수 있는 보살이다 하는 생각이들 정도 입니다.
(6) 여래가 부촉하고 열반에 들다
9 이 때 일월정명덕 부처님께서 일체중생희견 보살에게 말씀하셨느니라.“선남자여, 나는 열반할 때가 되었고 멸진(滅盡)할 때가 되었으니 그대는 평상을 깔아 놓아라. 내가 오늘 밤에 열반에 들리라.”
부처님이 열반에 들것을 예고를 합니다. 이 법화경의 결집이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최후로, 그동안 설하신 모든 경전을 종합적으로 최종 정리 하면서, 일불승의 삶으로 귀결 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반경과 법화경과의 관계를 이 법화경속에서는 아주 자주 볼 수가 있어요.
또 다시 일체중생희견보살에게 일렀느니라. “선남자여, 내가 불법을 그대에게 부촉(咐囑)하노라.
불법을 다 맡긴다 이거지요. “내가 열반에 들더라도 이제 그대 같은 제자가 있는데, 무엇을 염려 하겠느냐” 이런 부처님의 마음이 아주 역력히 보입니다.
또 모든 보살 대제자들과 최상의 깨달음의 법과 또 삼천대천의 칠보세계와 여러 보배나무와 보배 대와 시중드는 천신들을 모두 그대에게 맡기노라.
불법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보살 대제자들! 최상의 깨달음의 법! 또 삼천대천의 칠보세계와 여러 보배나무와 보배 대와 시중드는 천신들’까지도 전부 다 맡긴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의 소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정말 부럽고, 한 번쯤 이런 소임을 맡았으면 하는 욕심이 날 정도지요.
내가 열반한 뒤의 사리(舍利)까지도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마땅히 널리 선포하되 공양을 많이 베풀고 여러 천 개의 탑을 세우라.”
부처님이 참, 정말 그럴듯한 제자를 만나서, 모든 것을 이렇게 다 부촉을 하는 장면입니다.
일월정명덕 부처님께서 이렇게 일체중생희견 보살에게 분부하시고 밤이 늦은 뒤에 열반에 드시었느니라.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당부 할 것 다 당부 하고 열반에 드셨는데, 이런 것을 보더라도, 글쎄요.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 사리가 나올지, 사리가 나오고 나서 탑을 세워야 하는지 어쩐지, 정말 이 경전이, 경전의 이야기대로 순수하게, 석가세존이 열반에 들기 전에 모든 것이 완성된 경전 이라면, 이런 예측은 할 수 없지요 사실은...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있었어야 말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난 것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특히 대승경전, 물론 소승경전 아함부 경전도 成文化(성문화) 된 것! 글로 이렇게 정리된 것이, 부처님이 열반 하시고, 한 300년쯤 경과한 뒤에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口傳(구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전으로, 구전으로 300년이란, 10대지요. 1대를 30년으로 친다면, 10대를 거쳐 오면서, 그렇게 구전으로, 구전으로 전해 내려와서 비로소 이제 성문화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제자들의 뛰어난 깨달음과 어떤 능력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훨씬 더 아름답게, 또 여법하게 편찬하고 결집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좀 더 못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못하게는 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깨달은 분들이 계속이어져 내려왔고, 거기에 부처님의 설법을 토대로 해서, 자신의 깨달음이 거기에서 플러스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더 이경전은 아주 잘 발전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경전 발달사측면에서 보고, 연구하는 입장도 있어요. 우리가 순순하게 이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또 信仰(신앙)하고, 또 거기에서 사유하고, 그래서 깨달을 것을 깨닫는 것 외에도 학문적으로, 또는 발달사적인 안목으로 경전을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은 보통 부처님 열반하시고, 500년, 600년이 경과한 뒤에 결집이 된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부처님 이야기를 하던지 간에 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가 하나의 표준이 되어서, 記述(기술)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석가모니 부처님 역사가 환하게 알려져 있고,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달리 어떤 전혀 상상치도 못한 삶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절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에, 그리고 그 분이 열반 뒤 사리 공양하는 문제, 사리를 나누는 문제 또 탑을 세우는 문제, 이런 것이...
이야기인즉슨, 부처님 열반 하시기전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불교가 많이 발전한 과정들이 대승경전 속에는 아주 역력히 들어나 있지요. 이런 입장을 우리가 이런 마당에서 빗대어 이야기할 것은 아닌데 참고로 들어 두시라는 것입니다.
(7)보살이 부촉을 받들어 행하다
10 이 때 일체중생희견보살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보고 매우 슬프고 괴로웠느니라. 부처님을 사모하여 곧 해차안 전단향 나무를 쌓아서 부처님의 몸을 공양하여 사르고, 불이 꺼진 뒤에는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 사천 보배 항아리에 담아 팔만 사천 탑을 쌓았느니라. 높이가 삼 세계(三世界)요, 표찰을 세워 장엄하고 번기와 온갖 일산을 드리우며 수많은 보배 풍경을 달았느니라.
말하자면 ‘팔만사천 보배 항하리에 사리를 담고, 그 항하리, 항하리 마다 팔만사천 탑을 쌓았다.’ 대개 이런 경전에 근거를 해서 우리나라의 탑도, 나중에 보수 하느라고 보면, 대개 사리함이 있고, 사리 항아리가 있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 이 경전에 근거를 해서 만든 것이지요.
이 때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다시 생각하였느니라.‘내가 비록 이렇게 공양하였으나 마음은 오히려 흡족하지 못하니, 내가 이제 다시 사리에 공양하리라.’
얼마나 신심이 지극 했으면, 또 자기가 하는 일이 정말 보람 있는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고, 자기 인생을 정말 멋지게 사는 일이라는 그런 소신이 있으면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더 신심이 우러나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공양 했지만, 이것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이것이지요. 그리고는 ‘사리에 공양하리라.’하고 모든 보살 대제자들과 천신. 용. 야차 등 모든 대중에게 말하였느니라.‘그대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생각하라. 내 이제 일월정명덕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하려 하노라.’이렇게 하고 공양을 어떻게 하는가?
11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곧 팔만 사천 탑 앞에서 백 가지 복으로 장엄한 팔을 칠만 이천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여 성문을 구하는 수없는 대중과 한량없는 아승지 사람들로 하여금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고 모두 온갖 색신을 나타내는[現一切色身] 삼매에 머물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과거 생에 소신공양을 올렸고, 그래서 소신공양 올리고 나서는 어떤 이야기가 표현이 되는가 하니, ‘모든 보시 중에 가장 존귀하고, 가장 으뜸이니 여래에게 법으로서 공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이런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지요. 거기에 늘 주안점을 두어야 됩니다. 법공양 이라는 의미에서...
법을 존중하고, 아~! 부처님 법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얼마나 가치 있기에 이렇게 되는가. 궁극적으로는 법을 드날리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법공양이 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방편을 모방한다면, 자기의 능력 모두를 바쳐서 정말 진정 법공양 하는데 써야 된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리에 공양하리라.’하고 모든 보살 대제자들과 천신. 용. 야차 등 모든 대중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일심으로 생각하라. 내 이제 일월정명덕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하려 하노라.’이렇게 말하고 나서 팔만 사천 탑 앞에서 팔을 태우는데, 칠만 이천년 동안 태워서 공양을했다. 그렇게 하므로 해서 성문을 구하는 수없는 대중과 한량없는 아승지 사람들로 하여금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고 또 現一切色身三昧(현일체색신삼매)에 머물게 했다 는 그런 표현 인데, 삼매가 독특하지요.
과거 생에 燒身供養(소신공양) 할 때도 현일체색신삼매 입니다. 일체색신을 나타내는 삼매! 태워서 없애는데, 오히려 모든 몸을 다 나타 낼 수 있는 삼매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정말 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다 획득하는, 얻어내고 획득하는 그런 이치지요. 몸을 태워서 없애므로 해서, 또는 팔을 태워서 없애므로 해서 모든 몸을 다 나타낼 수 있는 삼매지요. 이것도 우리가 잘 깊이 있게 생각을 하고, 해석을 하면, 아주 멋진, 보다 더 좋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내용이지요.
몸을 태우는 데, 몸이 나타나는 삼매를, 그것도 또 ‘일체 몸을 나타내는 삼매를 얻었다.’ 뭔가 이해가 될 만한 내용 아닙니까? 사실은, 우리가 챙길 때 잃게 되고, 버릴 때 얻게 되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그런 이치이지요. 대야에다 물을 떠놓고 밀면 어떻습니까? 남을 향해서 밀면 물이 나에게 오고, 당기면 그 물은 반대쪽으로 출렁거리고 가버리는 그런 이치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생활과 연관 시켜서 좋은 교훈으로 삼아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내용이입니다.
이렇게 일체중생희견보살은 과거생 에도 소신공양!
몸과 목숨을 바쳐서 불법을 전하는데 다 썼고, 또 금생에도 두 팔을 다 태워서 부처님사리에 공양을 올렸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글쎄 이러니까 이 법화경신앙을 이런 부분만을 보고, 정말 깊은 뜻은 도외시 한 채, 이런 부분만을 보고, 이것을 흉내 내는 예들이 있어요.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또 그것을 좀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내일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마는, 팔이 저절로 다 살아나버려요. 그래야 사실은 연비를, 팔을 태울 자격이 있고, 손가락 을 태울 자격이 있습니다. 여기는, 그런 것 도 살펴야 되는데, 본인의 법력이 그렇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태워 놓고는,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 후회를 한다든지 하는 예들이 있지요. 그런 이야기는 내일 다시 이어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록: 다경. 정리: 대원성.
첫댓글 돈보다 천배 만배 중요한 이 몸을 받고,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 이 인생을 한번 의미 있게 써 보지 못하고 끝낸다면, 그것은 사실 돈을 수 백억 모아놓고 못 쓰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까운 일이 아닐까?☜ 설법.
<금강경>- 무유정법(無有定法) 고정된 어떤 법칙은 없다..... <신심명>- 구경궁극(究竟窮極) 부존궤칙(不存軌則) 구경인 궁극의 자리엔 고정된 법칙이 없다.정진할때 말뚝신심(口傳佛敎)으로만 밀어부칠것이 아니고,거문고 줄고르듯 공부해야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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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매정할손 정전이여... 다행히 끝부분만 휘리리~ㄱ.
진여혜님! 아~아! 不存軌則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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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버리면 크~으~게 얻고, 작게 버리면 크게 얻고... 버린다는 생각없이, 저~엉말 지성공양! 땅에다 씨뿌리느건 추수를 위한 투자인데, 그냥, 그냥 무엇을 기대하는것 없이 올리는 지성공양과 투자파종이 오늘의 저의 화두 입니다.
여래에게 법으로서 공양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고 가장 으뜸된 보시이다..._()()()_ 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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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일체색신삼매'에 머물게 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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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몸을 나타내는 三昧를 얻었다..._()_
..스스로 자기의 근기와 체력, 심성 등을 잘 살펴 너무 조급하게 열을 내지도 말고, 너무 느슨해서 아예 잊어버릴 정도로 게으르지 않게 조절하여 오래 오래 가는 말뚝 신심을 이어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이 오래 못가고, 더 귀중한 것들을 놓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참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게으르지는 말아야겠죠. 점점 가속도가 붙고,거움도 느니까... 늘 감사합니다. 대원성님. 하영 소가수다 양 ^^
일체색신 삼매! 모두 버렸을 때에 모두 얻을 수 있는 이치이다. 감사합니다. _()()()_
큰 정진을 부지런히 행할 때 사랑하는 몸을 버리고 세존께 공양한 것은 가장 높은 지혜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_()()()_
“現一切色身三昧(현일체색신삼매)에 머물게 했다” 팔을 태워서 없애므로 해서 일체 몸을 나타내는 삼매를 얻었다... 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다 얻어내고 획득하는 그런 이치...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내가 비록 이렇게 공양하였으나 마음은 오히려 흡족하지 못하니, 내가 이제 다시 사리에 공양하리라.’ ....감사합니다..._()()()_
부처님이 정복한 인간 최고의 경지! 그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일러주고 미래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깨우치도록 해주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희망...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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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一切色身三昧 ... 대원성님! 고맙습니다... 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성문을 구하는 수없는 대중과 한량없는 아승지 사람들로 하여금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고 모두 온갖 색신을 나타내는[現一切色身] 삼매에 머물게 하였느니라..._()()()_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현일체색신삼매
일체중생희견보살은 과거생에도 소신공양을 했고, 금생에도 두 팔을 다 태워서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을 올렸다는 이야기 - 화생하고, 저절로 살아 날 자신이 있을 때 소시공양을 하라.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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