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신심이 좋은 남자나 여인이 이 비밀하고 신비한 진언을 잠깐이라도 귀기울여 들으면 몸에 있는 백천만의 죄가 다 없어지리라.
이 다라니는 십악업과 오역죄를 없애주며, 가이없는 큰 죄를 저질러 자기 몸에 죄가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여 하늘도 용인하지 아니하고 땅이 실어주지 아니할 죄업으로 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할 곳이 없는 사람의 죄업조차 없애준다.
만약 자애롭고 순한 남자나 여인이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고자 이 불정심다라니의 진언 글귀를 보고 사람을 청하여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기를, 날마다 아침에 부처님을 향하여 향을 피우고 이 다라니를 외우면 이러한 사람은 마침내 지옥에 떨어져 죄를 받지아니하며, 백년이 되어 목숨을 마칠 때에도 마음이 산란하지 아니하여 시방의 거룩한 보살들을 뵙게 될 것이다.
이 때 보살들은 저마다 연화대와 깃발과 수레바퀴같은 양산을 가져와 그 광명이 집에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보살들이 이 사람을 맞이하여 정토에 나게 될 것이다.
또 믿음이 좋은 남자와 여인이 이 불정심자재왕다라니경을 보고 듣고 베껴쓰고 읽고 외우면 그 사람의 모든 번뇌가 앞 길을 막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혹시 재산이 흩어지거나 구설이 다투어 일어나거나 집안이 편안하지 아니하거나 혹은 다섯가지 길이 막혀 괴이한 악몽을 많이 꾸거나 질병이 몸에 붙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거든, 오로지 아침마다 이 다라니를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공양하며 외우도록 하라.
그러면, 항상 관세음보살의 가이없는 위신력과 금강밀적(금강역사)이 밤낮으로 이 사람을 둘러싸고 지켜줄 것이며 모든 소원을 다 원만히 이루어 줄 것이다.
또 만약 믿음이 좋은 남자나 여인이 온갖 소원을 구하거나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일체종지)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고요한 곳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관세음보살을 마음에 생각하되, 다른 데 마음쓰지 말고 이 다라니경을 일곱번 외우라.
그러면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게 없으며 또 모든 사람의 사랑을 얻게되며 모든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조선 말기, 고(高)씨 성을 가진 한 젊은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온몸이 곪아터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어져 나가 양쪽 엄지손가락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쫓겨나게 된 그 젊은이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한술 밥을 빌어먹으면서 모진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젊은이는 정자나무 밑에서 한 노스님을 만났고, 기도성취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병에 대해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걸린 문둥병도 나을 수 있습니까?"
"고칠 수 있다마다.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10만번만 외우면 능히 나을 수 있지."
"스님, 저에게 그 주문을 가르쳐주십시오."
노스님은 자상하게 그 주문을 써 주고, 직접 여러차례 읽어 주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 아리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다냐타 아바다 아바다 바리바제 인혜혜
다냐타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바리 마수다 못다야 옴 살바작수가야 다라니
인지리야 다냐타 바로기제 새바라야
살바도따 오하야미 사바하
젊은이는 곧바로 동네 앞에 있는 개천가로 가서 잔돌 10만개를 모았습니다. 젊은이는 아침저녁, 동네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외우는 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한 번 외우고는 돌을 하나 치우고, 또 한 번 외우고는 돌을 하나 치우고..... 이렇게 하다보니 돌 10만 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그날 밤 그는 감미로운 한 편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젊은이를 찾아와 두 팔로 안더니, 개천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정성껏 온 몸을 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끼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토록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문둥병이 깨끗이 치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일러준 노스님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만나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의 절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노스님은 찾을 수가 없었고, 그와같은 노스님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젊은이가 불연(佛緣)이 깊음을 느낀 여러 스님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권했습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일 것이오. 은혜를 갚으려거든 출가하여 중이 되시오."
젊은이는 마침내 출가하여 덕산(德山)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경상북도 경주 석굴암에서 일평생을 기도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10만번 외워 목숨을 구하고 불치병을 치료한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이처럼 언제까지 해야할지 모르는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10만번이라는 한정된 숫자를 두고 기도하는 것도 좋은 방편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중한 병에 걸렸거나 큰 장애가 있는 분이라면 이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정성껏 외워보십시오.
10만번의 숫자 속에서 녹아내리는 업장! 업장만이 녹아내리면 거기에 청량이 있고 자유와 해탈이 있습니다.
부디 신심을 일으켜 한 번 부딪쳐 볼 일입니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간 기도(祈禱) (일타큰스님의 기도성취 영험담 모음집)
..................................................................................... 나의 행자시절
불은에 보답하기위해 했던 출가 -범행스님 (속리산 법주사조실, 수원 팔달선원조실)
나이 스물일곱 덜컥 폐병에 걸리고 말았다. 폐가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화학공장을 경영했던 까닭에 폐병이라는 무서운 병마에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었다. 지금이야 약이 좋아 폐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드물지만 천구백사십년대 말의 폐병이라는 것은 불치의 무서운 병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아버님과 큰형님, 넷째 형님이 모두 폐병으로 인해 돌아갔는데, 집안이 넉넉했던 터라 큰 형님은 일본의 대학병원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목숨을 읽고 말았으니 내게 찾아온 폐병은 곧 죽음을 의미 하고 있었다. 별다른 치료방법도 없었으므로 공기 좋은 곳으로 가 요양이나마 할 요량으로 대둔산에 있는 태고사를 찾은 것이 출가에의 인연이 될 줄이야.
태고사는 일고여덟분의 스님들이 주석하여 참선수행을 하고 있던 조용하고 풍광이 좋은 절이었다. 촛대바위가 절경인 그곳에서 평소에 가까이하던 철학 서적을 읽으며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조실스님께서 내 방엘 들러 물으셨다.
'그래 무슨책을 그리 읽고 있소'
그렇게 조실스님과 토론이 시작되었다. 여러 사업으로 꽤 재산가였던 내 아버님은 '일본말 배워 그들 하인 노릇 하려 하느냐'며 자식들을 학교엘 보내지 않았다. 해서 나는 일찌감치 경영에 눈을 떴고, 그 틈틈이 세계문학전집이나 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웬만한 인생살이엔 말문 안 막힌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날 조실스님의 방문 후 내 밑천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스님과의 토론이 이어졌던 한 주일후엔 내 스스로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땐 몰랐으나 훗날 알고보니 그분이 일관했던 말씀은 '공도리空道理'였는데, 무슨 수 세상사를 관통하는 불법의 논리를 대응할 수 있겠는가.
병에 걸려 절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집 사람들을 내심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말 절집 생활이란 말이 아닐 만큼 가난했고 대처승이 많았다. 스님네들이 절에서 엿을 고아 가지고 오거나 튀각 같은 것을 해가지고 신도집에 오면 쌀 한말씩 얻어가곤 했고, 조그만 사찰에선 볏단을 얻어다 먹고 살았던 시절이었으니 불법이 무엇인지 모르던 내 눈에 그들이 그저 천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독립군 출신이며 만공 스님의 상좌였던 조실 포산 스님의 '공도리'가 나를 압도했던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불법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나는 문학서적도 남의 팔자얘기나 듣는 것 같아 시들해 졌고 토론에서 번번이 패하기만 했던 철학책에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럴 즈음 조실스님께서 비로소 내게 그곳에 온 이유를 묻더니 조그만 책 한 권을 내놓았느데,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牟陀羅尼經'이었다.
'이 경 속에 있는 관세음보살모다라니주'를 일심정념으로 꿈속에서도 송주할 수 있도록 정진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고 그대의 병이 나을수 있다.'
이미 불법의 깊은 진리에 관심이 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스님을 깊이 믿고 있었으니 그 분의 말씀에 뭐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그날부터 앉으나 서나 누워서나 일념으로 주력을 하기 시작했다.
불법에 있어 주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조실스님을 믿고 전심전력으로 주력에 몰두했으니, 나중에는 태고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주력이 실려 있는 듯 주력과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한 달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삼주쯤 지났을 때였을까.
나를 돌보아주었던 의사가 내 몸을 진찰해 보더니, '아, 이 선생 병이 다 나았군요'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반가워 일어서니 법당 안이었다. 비몽사몽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날아갈 듯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순간 불전에 나도 모르게 무수히 예배를 드렸다. 그 불치의 폐병이 그렇게 씻은 듯이 사라졌으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한 가피, 헤아릴 수 없는 대은혜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처님 법을 믿고 수행 삼매에 들었을 때 오는 그 무한한 가피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 가피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는 경험한 이만이 알 것이다. 나는 그때 경험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고 그 후로도 어떤 인연으로 선을 하게 될 때까지 줄곧 서른 해를 주력으로 수행을 삼았다.
아무리 성취하기 어려운 일도 내게 맡겨지면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 주력수행은 나와 뗄 수 없는 인연이 깊은 수행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피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몰아의 경지로 수행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이 바라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부처님법이 무엇인지 공부해 자신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정진하다보면 자연히 부처님법이 내 것이 되어 실생활에 실천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가만 보면 부처님법을 알려고 노력하고 수행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저 뭔가 이루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기만 한다. 기도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부처님 법을 깊이 체득하고 원을 세워 수행정진하다 보면 업장이 녹아 어려운 일을 미리 막기도 하는 것이다. 경전을 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수행이 제대로 되는 것이어서 나는 신도들에게 경전을 익혀 불법이 무엇인지 알고 수행에 들어가라고 이르고 있다. 경전을 공부하며 스스로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 수행이 빛이 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참회하며 수행에 매진해야 한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후 곧 포산스님을 은사로 오계를 받고 절집사람이 되었으니 사실 나에게 행자시절이란 것이 생략된 셈이다. 글쎄 굳이 행자시절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포산스님의 공도리를 들으며 불법에 끌렸던 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찬 없는 밥 먹어가며 주력삼매에 빠졌던 그 시간들과 그후 태고사를 떠나 계룡산 용화사로 들어가 다시 주력으로 수행하며 지낸 몇 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 사제인 탄성스님이 문득 입적했다 하여 법주사엘 다녀왔다. '인욕보살'이었던 그도 세월이 가니 그렇게 갔다. 어느덧 불가에 들어와 쉰해를 넘겼고 다시 여든을 넘겼다. 세상 은 날이 갈수록 존재 아닌 소유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난리법석인데,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입산한 이 출가수행의 길에서 얼마만큼의 힘을 세상에 회향했을까. 어쩐지 그 일을 생각해도 흡족하지 않다.
출처: 인터넷 월간海印(www.haein.or.kr)에서 옮김 ....................................................................................
- 범행 스님(속리산 법주사조실·수원 팔달사 조실)
부처님은 ‘버려라’했는데 왜 달라고만 합니까?
최신 가요가 울려 퍼지고 올 겨울 유행을 예고하는 형형색색의 옷과 액세서리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수원 팔달로 로데오거리. 젊은이들의 들뜬 열기로 가득한 로데오거리에서 한 발만 물러서면 도심수행도량 팔달사를 만날 수 있다.
길 하나 차이로 거리의 번잡스러움은 간데없고 산사의 고요만이 팔달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 팔달사를 40여 년간 지키고 있는 조실 범행 스님은 전날인 11월16일 법주사에서 결제법어를 내리고 온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법을 청하는 자리를 물리치지 않았다.
진성은 물들지 않아 본래 원만한 성품이고(眞性無染本自圓性) 다만 망령된 생각을 여읜 즉 부처와 같으니라(但離妄念則如如佛)
어제 법주사에서 결제에 드는 수행자 200여 명을 만나고 왔습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수행자들이 결제 기간 동안 ‘본래 자기’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게송을 들려줬습니다.
결제에 들지 않는 재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본성(本性)은 본래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무명(無明)에 싸여 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려울까요?
처음 지구가 만들어졌을 때 이 지구는 너무나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땅에는 곤충과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고 초목 과수도 아름드리 우거져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과일, 좀 더 많은 곡식, 좀 더 많은 고기를 원하기 시작하면서 농약을 쓰고 비료를 주고 땅을 파헤치면서 땅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기반인 땅이 죽는데 어떻게 사람이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달픈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妄想) 공상(空想)에 사로잡혀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五欲樂)에 집착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욕심을 끊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이뤄지지 않으니 성내는 마음, 즉 진심(瞋心)이 생기게 되고 이 진심을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癡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이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제 스스로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대로 안 되면 부처님께 ‘무엇을 해주십시오’ ‘무엇을 이뤄주십시오’ 하고 자꾸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버리라’는 것인데, 왜 자꾸 부처님께 바라고 이루려 합니까?
하루 밥 세 그릇 이상 있으면 오히려 귀찮은 겁니다. 재산을 잔뜩 집에 쌓아놓으면 도둑맞을까 걱정만 되잖아요? 내가 노력해서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속을 썩게 마련이고, 늘 ‘살기 힘들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탐심(貪心)을 내지 말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쉬어야 합니다. 나보다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조금 더 가지려 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진정한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자들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합니다. 계를 지키고 없는 사람에게 늘 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바로 들여다보고 인욕하며, 수행에 힘써 마음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부처님께 복을 구할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나눠주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늘 수행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수행이라고 하면 참선이나 간화선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에는 다 외도(外道)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선 외에도 많은 수행법이 있지요. 저는 그동안 수차례 법문을 통해 제가 불문(佛門)에 들어와 수행했던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저는 부잣집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몸이 너무 약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술 담배도 멀리한 채 화학공장을 경영했습니다. 비누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하루는 실험을 하다 공장에서 염소가 터지는 바람에 폐가 나빠졌어요.
우리 집안은 아버님과 두 형님, 작은어머니까지 모두 폐병으로 돌아가셨기에 폐병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렇게 살다 젊은 나이에 각혈하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에 뛰어들기도 했지요. 그런데 구사일생 살아난 거예요.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어요.
그 후 요양이라도 할 생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10권을 싸들고 금산 태고사를 찾아 갔어요. 당시 태고사에는 포산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스님과 3주 동안 문학과 철학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부처님법 앞에서 그동안 내가 배운 문학이나 철학이 가진 한계를 뚜렷이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지요.
출가 후 포산 스님은 저에게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佛頂心觀世音菩薩母陀羅尼)’를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생사의 위대한 법을 일러주신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 가고자 잠도 자지 않고 다라니를 외웠습니다.
그렇게 5주 정도 지났을까,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다라니를 외우고 있는데 주치의였던 일본인 의사가 나타나 ‘이제 다 나았구나. 아주 잘 됐다’고 말하더군요. 깜짝 놀라 깼는데, 정말 거짓말 같이 기운이 나고 아픈 것도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가피력으로 지금껏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후 서울 선학원에서 조실로 계시던 금오 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됐는데, 스님은 늘 ‘참선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주력 수행에만 매진했던 터라 처음엔 참선이 잘 되질 않았어요. 그래도 스승의 말씀을 따르고자 틈틈이 참선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공주 마곡사의 토굴에서 정진하게 됐는데, 그때 참선이나 주력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이러한 제 경험을 바탕으로 늘 불자들에게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매진하면 부처님 가르침과 통한다고 말합니다.
염불이든 주력이든 참선이든 자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지극한 마음으로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실 겁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도(道)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자라고 하면서 부처님 생애도 제대로 모르거나 경전 한 줄 읽지 않는다면 어찌 큰 가르침을 얻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참선한다고 벽만 보고 있으면 깨달음이 얻어집니까?
그리고 스님들이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경전이나 선어록을 봐도 모르던 부분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깨쳐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깨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깨친다’는 것은 인연법을 제대로 안다는 것과도 같은 말입니다.
흔히 불자들은 ‘인연이 없다’ ‘인연에 따라 이뤄진다’고 말을 하며 인과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인연법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인연, 즉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因果)라고 하지요. 인과란 철저한 것입니다. 미래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과거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똑바로 보면 됩니다. 불교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신통력 있는 종교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알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을 깨닫기 위해서는 한 생을 버려서라도, 한 생에 이룰 수 없다면 누생(累生)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도를 깨치고 말겠다는 굳은 서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부처님께 복 빌고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참불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그것만이 크나큰 부처님의 자비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범행 스님은
“난 풀들을 만나는 게 참 좋아요. 풀들이 날 보고 ‘스님,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난 이 풀 한 포기를 뽑거나 나뭇가지를 칠 때도 ‘얘들아, 미안하다. 이걸 잘라야겠구나’하고 얘기해줘요.”
전날 법주사까지의 장거리 이동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범행 스님은 기자를 데리고 직접 사찰 곳곳을 안내해주셨다. ‘호랑이 담배 피는 모습’이 담긴 사찰 벽화와 씨앗으로 심어 지금은 아름드리로 자란 은행나무, 전국 곳곳에서 모종을 얻어와 심고 가꾼 백목단ㆍ작약 등을 일일이 일러주던 스님은 “거짓없는 자연처럼 사람들도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고 바르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여든 다섯이라는 세수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빛을 간직한 스님에게 건강 비결을 여쭙자 “특별히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오후불식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답하셨다.
1921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5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55년 봉은사 주지, 56년 선학원 중앙선원 장, 57년 서울 조계사 주지, 68년 불국사 주지, 71년 대한불교신문사 사장, 75~91년 재단법인 선학원 1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수원 팔달사와 보은 법주사 조실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 말, 전라도 완주 땅에 살았던 한 여인은 평소에 열심히 불교를 믿고 <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외웠다. 하지만 그녀는 태어난 자식이 두 살만 되면 죽어버리는 고통을 세 번씩이나 겪어야만 했다.
처음과 두 번째 자식을 잃었을 때는 스스로 '죄 많은 여인'이라 자책하면서 관세음보살께 더욱 매달렸는데, 세 번째 자식마저 죽었을 때는 관세음보살이 오히려 야속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녀는 실성한 여인처럼 날마다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심한 관세음보살을 탓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주절주절 외우는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한 노승이 어깨를 툭치며 말을 거는 것이었다.
"젊은 보살,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스님, 자식을 셋이나 잃은 저입니다. 슬퍼하지 말라니요? 스님이라면 저와 같은 경우를 당하였을 때 평온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여인이 화를 내며 반문하자, 노스님은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하였다.
"젊은 보살, 당신 몸에서 태어났다가 죽은 세 아이는 바로 당신의 원수요"
"원수라니요? 나의 자식이 나의 원수라니요? 도대체 어떻게 된 원수입니까?"
"지금부터 삼생(三生) 전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느 양반집 본부인으로 있을 때 새로 들어온 소실을 질투하여 독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 당신은 부처님을 믿으며 참회하였지만, 독약을 먹고 억울하게 죽은 소실은 귀신이 되어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이생에서 결혼을 하자 그 원귀(寃鬼)는 당신의 자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임신한 당신의 몸을 극도로 괴롭히다가 끝내는 태어나기 직전에 죽어 산모인 당신을 죽여버리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스님,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습니까?"
"그것은 젊은 보살이 관세음보살을 성심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위신력 때문에 원귀는 당신의 뱃속에서 죽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나곤 하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아이들이 꼭 두 살이 되어 죽는 것이었을까요?"
"두살난 아기는 재롱이 한창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죽으면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스님, 제 몸에서 태어난 그 아이들이 비록 원한을 갚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저의 뚫려버린 가슴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인이 다시 흐느끼기 사작하자 스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젊은 보살이 울고 불고 하는 그 자체가 원수의 보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소? 당신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있는 이 순간에 원수는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이 말씀 끝에 여인은 정신을 가다듬어 합장하고 참회하였다.
나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 방황하는 영가시여,
부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극락왕생하소서. 나무관세음보살 ......"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깊이 참회하자 노스님은 지팡이를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복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 여인은 말하였다. 너는 삼생 전에 나를 독살한 원수이다.
그동안 나는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네가 관세음보살을 깊이 신봉하고 모다라니를 매일 외웠기 때문에 밤낮없이 선신(善神)들이 옹호하고 있어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그대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관세음보살께서 노스님의 몸을 나타내어 너를 깨우쳐 주시니, 이제 지난 원결을 모두 풀고 떠나가노라. 앞으로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
말을 끝낸 원귀는 차츰 멀어져 갔고, 옆에 서 있는 노스님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원결을 푼 여인은 더욱 지극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신봉하였으며, 그 뒤 효성스런 아들 둘을 낳고 한평생 병고없이 잘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