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예견은 세상을 바꾼다 테러에 대한 대응 → 영국에서 유럽으로 확산 (글로벌 반응) : 승객의 자유 무한정 제한
무기력한 자들의 권력 또는 은행들의 평판훼손 리스크 독일 환경단체 반핵활동 → 불가리아 핵발전소 무산 위기 → 금융권의 융자계획 철회
위험한 배아는 배제된다 암 발생 개연성 소인의 유전자 선별 → 유전적 선별에 대한 관대화, 후유증에 대한 근심
런던과 뉴욕, 도쿄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지역문제인 런던, 뉴욕, 도쿄의 침수를 막으려면 전 지구적 이니셔티브, 즉 ‘글로벌 협상’ 필요 → 새로운 타협공식 필요 (미국의 참가, 재화가 편중되어 있는 글로벌 정의 타협)
전선 변화 기후정치에서 패러다임의 변화 : 시장주권이 기후재앙에 직면해 치명적인 위협 → 초국적 경제는 환경공학과 재생가능에너지 시장 경쟁 유리한 출발점 차지 경쟁 / 시민사회운동과 대기업들의 새로운 동맹 / 국가와 자본간 신자유주의적 동맹 대기
세계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경쟁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핵발전소 대안 제시 → 안전한 대안과 위험한 대안간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위험한 대안들 가운데 하나 선택
세계의 탈안전화 또는 슐츠가 참전하다 우리는 글로벌 위험사회의 혼란과 모순, 상징, 상반 감정의 양립, 불안, 아이러니, 그리고 감추어진 희망을 파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체험하고 괴로워한다
1. 리스크
리스크의 의미론 : 근대 초기에 시작된 현대화 과정에서 결정, 불확실성과 개연성의 의미가 중요해진 것과 관련
미래의 위험과 연관 - 종종문명의 성공에서 비롯
탈유토피아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동원 가능 - 기후변화에 대항하는 세계주의 활동, 시민사회운동, 국가와 대기업 사이의 변하는 동맹관계
리스크의 두 얼굴인 기회와 위험은 산업화과정에서 대륙과 해상무역과 함께 시작되면서 주제로 부상
리스크란 한 사회를 작동시키는 동력학의 관습적인 인지방식과 사고방식 → 미래의 개방성, 불확실성, 장애물과 직면, 종교나 전통 자연의 막강한 힘에 더 이상 구속받지 않으나, 유토피아의 치유력에 대한 믿음도 상실
리스크가 등장하자 신의 지위 및 이와 관련된 혁신적인 결과 포기 → 신이 없는 상황에서 리스크는 많은 것을 기약하지만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함 펼침 →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 세계의 존재와 미래는 결정을 전제한다
확률론 등장 : 계산할 수 없는 것 통제하려는 시도
철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리스크의 양가성 탐구
리스크라는 범주는 지식/ 무지, 참/ 거짓, 선/ 악의 분명한 구분을 초월하는 세계 제시 → 유일한 진리는 수많은 상대적 진리로 쪼개짐 → 리스크라는 범주는 불확실성과의 관계 표현 (더 많은 지식 때문에 불확실성 발생)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나 불확실성의 지혜는 리스크 때문에 영향력 확대
소설의 역사나 사회과학의 역사는 모두 리스크의 역사적 형태변화로 서술될 수 있다. → 베버의 합리화 이론이나 푸코의 권력이론에서처럼 발자크의 소설에서는 제도적 형태, 지배를 확장하는 형태가 집중 조명
오늘날 리스크의 의미론은 특히 기술이나 경제 또는 자연과학 언어와 정치언어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 → 리스크의 공론화는 유전학, 생식의학, 나노공학 같은 자연과학의 발전 속도에 문화적 환상이 유린당했다고 생각 →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에 관한 우려, 과학이 쉽게 무력화할 수 없는 우려가 연구의 자유를 제한하려 함 → 리스크에 대한 공적 담론이 자체 역동성 전개 → 리스크는 ‘매개 주제’ → 이를 통해 과학과 정치, 경제의 분업 새롭게 조정)
2. 위험사회
- 급격한 현대화 과정으로 인해 위험사회에서는 현대화가 이룬 성과들의 결과가 주제 ․ 리스크를 계산할 수 있는 조건이 여의치 않고 위험을 제도적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리스크의 새로운 위험성 발생 ․ 정치영역에서 도덕적 분위기 발생 → 찬반양론의 공적인 전개 → 과학과 기술의 기능 변화 → 과학과 기술의 지배력 커질수록 전문가의 권위 하락 → 리스크 담론에서 언론과 의회, 사회운동, 정부, 철학자와 법률가, 작가들의 발언권 획득 → 갈등이 새롭게 제도화 - 새 시장 개척이나 정복 또는 새 기술의 개발과 응용시 발생하는 모험에 “위험계약”으로 대처하는 것은 사회적인 발명품 → 해상무역시대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회행위의 모든 분야로 확장되고 완벽한 형태로 발전 → 개인에게 ‘리스크’로 결과됨 →시스템으로 인한 위험, 통계적으로 서술 가능, ‘계산할 수 있는’ 사건 유형 → 초개인적인 보상규칙과 예방규칙으로 규제 - ‘리스크 계산’은 자연과학과 기술과학, 사회과학을 서로 결합 (흡연자 리스크, 핵발전소 리스크, 건강관리 문제, 경제적 리스크와 실업, 교통사고, 노화 등의 리스크 적용) - 산업적 결정의 부작용과 비용을 예방, 완화하려는 국가 보증 리스크 계약은 위험한 부작용이 체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예방, 보상하는 일에 개인 참여 ․ 국가 사회 차원의 리스크 계약을 체계적으로 분명하게 위반하는 곳에서는 합의 대기 → ‘위험사회’의 범주는 산업에서 발생한 위험이 통제할 수 있고 보상할 수 있다는 리스크 계약의 핵심 이념을 의문시하는 과정을 주제로 설정 ․① 현재와 미래의 세상은 미증유의 위험이 가득하지만 그런 조건아래서 우리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세상 ② 현대가 산출한 위험을 세상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 현대사회가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졌고, 현대가 실패하거나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승리했기 때문에 그렇다 ◇ 위험사회 (p28~29)
3. 글로벌 위험사회
◇ 리스크와 재앙 - 리스크는 재앙의 예견 : 미래사건의 발전의 가능성을 논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상황을 눈앞에 보여준다 - 재앙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반면, 재앙 예측은 시간이나 공간이나 사회의 측면에서 구체화된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 리스크라는 범주는 가능성의 현실로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 이는 한편으로 사변적인 가능성과 구분되고, 또한 이미 닥친 재앙과도 다르다.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순간, 리스크는 재앙으로 변화 - 리스크는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있는, 우리는 위협하는 미래 사건이다 - 이 상존하는 위협이 우리의 기대를 규정하고 우리의 머리를 점령하며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 힘이 된다. - 글로벌 리스크는 글로벌 리스크의 현실 연출이다 : 글로벌 리스크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연출을 통해서 재앙의 미래는 현재가 된다 ․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테러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글로벌 연출과 그 연출에 뒤이은 정치적 예측이다 → 권리의 제한은 그런 경험의 산물이며 그 경험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예상함으로써 나타난 결과 - 글로벌 위험사회는 근본적으로 ‘위험사회’의 명제를 뛰어넘는다
◇ 리스크의 문화적 인식과 위험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 리스크와 재앙의 구분은 우리가 과거보다 더 안전한 세계에 사느냐가 근본문제가 아니라, 파괴와 재앙의 연출된 예견이 예방행위의 의무를 부과한다는 측면을 부각 (국가) - 리스크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가 아닌 ‘합리주의적 이해’가 종종 문제시된다. ․ 리스크에 대한 합리주의적 이해는 자연과학, 공학, 심리학, 경제학, 의학에도 통용 ․ 리스크는 대체로 아무런 의심 없이 객관적인 현상으로 여김 → 가설검증, 모델 제시, 여러 집단의 인지와 대응 조사 (리스크에 대한 예방은 과학적 측정과 계산이 가장 적합하다는 가정에서 출발 - 모든 비전문가들을 전문가들로 만들면 문제 해결된다) - 재앙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예상하는 일은 점차 과학적 계산방식에서 탈피 - 리스크가 계산할 수 없으면 없을수록 문화적으로 달라지는 리스크 인지가 더 중요 → 리스크와 리스크의 문화적 인지의 차이는 사라진다, 즉 동일한 리스크가 나라와 문화의 관점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실’이 되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세계화로 인해 이러한 문화적 인지 차이는 배타적인 확신으로서 더욱 부각된다 → ‘리스크 문화의 충돌’, 문화적으로 다른 ‘리스크 현실들(리스크 인지)’의 충돌은 21세기 세계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 - 세계 주민의 동의 없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문화와 과거, 상황, 종교 간의 대립이 글로벌 리스크를 판단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히스테리나 의도적인 불안정치를 적절한 공포 및 예방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짐 - 글로벌 리스크는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죽음과 고통을 개인적인 운명으로 또 집단적 운명으로 일상화한다 - 리스크의 현실성은 리스크가 이론이 분분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리스크는 개별 집단과 주민들의 상호모순적인 평가 속에서 사실이 된다. ․ 리스크의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척도가 있다는 생각은 리스크가 문화적인 인식과 평가의 결과로 시급하고 현실적인지 아니면 비현실적이어서 무시해도 되는지가 결정된다는 점을 간과한다. - 인정될 만한 리스크는 인정된 리스크이다. 이 말은 리스크가 더 객관적이고 더 시급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그 리스크의 현실성은 문화적 평가에 더 의존한다는 점을 전할 뿐이다. → 리스크의 객관성은 리스크 인지와 리스크 연출의 산물 → 리스크는 우리 자신의 문화적 인지를 반영하는 것 → 서로 상충하는 문화적 확신 속에서 또는 지금 생겨나고 있는 글로벌 연대의 지평 안에서 글로벌 리스크는 현실이 된다
◇ 글로벌 리스크의 유형 - 생태학적 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테러리스크, 개인의 전기적 리스크(‘위험사회’에서 서술) - 생태학적․ 경제적 위험과 테러 위협의 근본적 차이 : 후자는 우연이 의도로 대체된다는것 → 리스크 계산의 합리적 토대 파괴/ 우연의 자리를 의도가 차지/ 선의 대신 악의 등장 - 생태학적 위기와 글로벌 금융 위기의 공통점 :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변증법 속에서, 현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정의 우연한 부작용 - 리스크의 계산 가능성은 도덕적 배경에서 도출 (잠재적 재앙은 우연히 발생한 것) → 새로운 기술의 공적인 정당화에 분기점 마련 → 기술적 발전의 위험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우연 외에도 의도를,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 외에도 테러 위험을 즉, 악용될 가능성 고려해야 한다 - 9․ 11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우월함에도 서구사회가 상처받을 수 있음을 일반인의 의식에 각인 → 우연한 사고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하지만 테러에는 전적으로 무방비 - 위험사회학뿐만 아니라 위험사회 자체가 딜레마에 빠짐 → 리스크 분석의 위험성은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위험을 생각해내는 일이 의도와 달리 위험 자체의 산파 역할
◇ 신앙화한 재앙의 예견은 21세기의 사회 개념을 바꾼다 - 글로벌 위험사회란 모든 것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결정으로 변하는 사회나 리스크-관리 사회 또는 리스크-담론 사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험사회는 현대를 주도한 통제의 이념, 즉 결정에서 비롯된 부작용과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념이 흔들리게 된 정황, 또 예측하기 힘든 리스크를 계산할 수 있는 리스크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나 그것으로 인해 다시금 새로운 예측 불가능성이 발생하는 상황 → ‘불확실성에 대한 성찰성’ - 글로벌 위험사회는 ‘세계주의적 계기’를 탄생시킴 → 배제된 것으로 보이는 타자와 우리를 대면시킴/ 국경을 무너뜨리고 토착민과 이방인을 섞는다 → 일상이 세계주의적이다 - 불확실성의 성찰성과 세계주의적 계기라는 두 경향은 21세기 ‘사회’의 전반적인 메타-변동을 암시한다 (11장)
․ 글로벌 리스크의 연출과 경험, 갈등은 국가와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공동생활과 행위의 토대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변화시킴 ․ 미래가 현재 안에 이미 통합되어 있는 방식, 리스크를 내면화함으로써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띠는지, 기존의 제도가 변형되는 방식, 새로운 조직 형태가 만들어 내는 방식 인지 가능 ․ (비의도적) 大리스크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 (의도적) 테러 공격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한 예상이 늘 공적인 관심사 ․ 보편적인 문화 변동이 완성 → 자연이나 자연과 사회관계를 다르게 이해하고, 우리와 타자, 사회적 합리성, 자유, 민주주의와 정당화, 개인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지구적 책임윤리가 요청 → 새로운 문화운동에서 옹호자 발견/ 사회집단과 기업들은 이런 거시윤리학의 필요성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활동을 조율하고, 리스크 평가에서 서로 경쟁 → 새로운 정체성 창출, 법률제정, 경제․ 사회․ 정치적 국제기구 창설 - 글로벌 리스크의 확대된 의미는 중대한 문제 야기 : 온갖 종류의 새로운 관념과 두려움, 불안, 희망, 행동규범, 신앙갈등이 리스크와 결합 → ‘리스크 인물’, ‘리스크 집단’에 대한 기본권 위협 → 인지와 의사소통의 새로운 경계 발생, 국제적 해결 노력 → 현실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구성하려는 작업이 시작되는 동인/ 사회학의 근본 개념을 새로 규정하는 데 리스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
◇ 막스 베버와 존 케인스 또는 무지의 중요한 역할을 의식에서 배제하다 - 위험사회에서 글로벌 위험사회로의 도약을 베버와 케인스에서 확인 - 베버에게는 리스크를 다루는 현대적 방식에서 통제논리학이 승리 → 현대의 근본 원칙의 발전과 특히 과학적․ 경제적 합리성의 급진화로 인해 전제통치의 위험 확대 → 희망과 근심의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 → 리스크 합리성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비의도적 부작용은 합리화와 시장지상주의를 가속화하는 방법으로 낙관적으로 해결하려 함 → 그는 불확실성의 카오스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관료주의,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현대를 일종의 감옥으로 변질시킴 (성공적인 위험 합리화의 논리적 결과) :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상황은 더 나빠질 것임 - 도구적 합리성은 정치를 탈정치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서서히 침식 - 골칫거리는 결정 자체가 아니라 그 결정의 결과이다. 이 위험한 결과는 알지 못하고 알수도 없었다는 변명 속에 전개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미래로 연장하고,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래 속에서 과거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 리스크의 현실은 예기치 못한 것을 직시하라고 강요 ․ 프랭크 나이트, 케인즈 - 리스크의 제어 합리성은 결과나 부차적 결과, 부차적 결과로 인한 부작용 등의 불확실성에 적용될 수 없다. 다른 불확실한 리스크를 통해 리스크의 불확실성을 막을 수는 없다. 모든 합리적인 제어 노력은 ‘비합리적’이고 계산할 수 없으며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여러겹의 통제장치의 마련은 리스크의 원천이 되고 다른 부작용으로 연결 가능 - 리스크는 이해득실을 따지고 지금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성찰의 한 모습 → 결정의 시점에서 알 수 없었던 ‘부작용’은 무지의 외피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를 확장하면서 시공의 경계를 뛰어넘는 환경위기라는 모습으로 나타남 - 21세기에 탄생된 ‘세계주의적 시각’에서 글로벌 위험사회가 나온다. 모든 근본적인 위험은 세계위험이 되었고, 모든 개인의 상황은 인류가 처한 상황의 원인이며 결과가 된다. → 이로 인해 사회와 정치, 역사의 변화가 시작
제2장 개념 정의관계는 지배관계이다 : 누가 무엇이 리스크인지 결정하는가
“이 장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위험사회 개념을 개진할 것이다.”(55)
1. 리스크는 시간을 초월하는가
위험사회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들. - 위험사회를 말하는 대신 그 반대를 부각시켜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기아와 전염병 같은 위험은 꾸준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유아 사망률의 감소, 늘어난 수명, 사회복지국가의 성과, 의료기술 등-> 이 모든 것은 인간 실존이 더 안전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닌가?) - 기후재앙이나 금융위기, 화학공장의 대형 사고에서 테러리즘까지 이른바 ‘새 리스크’가 나타난 것은 맞지만, 그러한 재앙의 개연성은 극히 낮아 몇 분의 1퍼센트도 안 된다. -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리스크는 새로운 세상과 시장의 탐색에 반드시 필요한 기본 ‘추동 원칙’ 즉 ‘잔여 리스크’가 아닌가? 리스크 없는 진보가 가능한가? - 리스크를 극적으로 과장하는 언론의 행태는 자신들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스펙터클의 연출이 아닌가? - 리스크는 기술과 자연과학의 권한 영역에 속하지 사회학이 접근하는 분야는 아니지 않은가?
2. 리스크 계산: 열린 미래 앞에서 예측할 수 있는 안전
“산업기술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는 의도적인 결정의 결과이다.”(57) -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해 사적 혹은 국가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 또한 계산을 근거로 내려지는 결정인데, 여기서 위험은 진보의 불가피한 결함으로 여겨진다. -> “위험은 운명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든 것, 인간의 손과 머리의 합작품이며, 기술 지식과 경제적 이익 계산의 결합에서 나온다.”(이것이 전통적 리스크와의 결정적 차이)
· 이러한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해 “리스크 계산”이 도입된다. 리스크 계산은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58) ① 발생되는 리스크가 ‘개인화’되지 않게 한다. 즉, 개인의 책임이 아닌, 시스템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재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계기는 정치적 규제를 요구하게 되고, 따라서 정치적인 행동반경이 생겨난다(“리스크 계산은 이런 방식으로 기술시대의 수학적 윤리를 상징한다.”). ② 보험 지급은 귀책사유와는 무관하게 약정되고 실행된다. 보험 비용의 정도는 기업가에게 예방조치를 취할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다. -> 리스크 계산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 상태를 예상하고 그것을 계산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3. 리스크와 위험: 조직적인 무책임성
하지만 “유전공학적· 인간유전학적 변화. 제한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 금융 시스템의 붕괴, 테러와 생태학적 파괴 등의 현실적 도전에 직면하여 국민국가의 단위에서 개진된 기존 위험론의 토대는 무너진다.” -> “산업사회는 20세기 후반부터 인간에 의한 지상 위의 모든 생명의 자기파괴라는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종류의 가능성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60) - ‘잔여위험사회’는 보험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 큰 위험은 리스크 계산을 지탱하는 세 기둥을 무너뜨린다.(61) ①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전 세계적 피해, 그리고 회복 불가능한 피해는 돈으로 보상할 수가 없다. ② 결과를 예상하고 통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최악의 사고를 대비할 수 없게 되었다. ③ ‘사고’는 시간적·공간적으로 한계가 없고,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사건이 되어, ‘끝없는 페스티벌’이 된다. -> 이는 위험에 대한 정상 기준, 측량 방법, 계산의 토대 등이 사용 불능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비교는 하지만, 사실상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는 꼴이 되며, 마치 계산된 것처럼 나오지만 그 계산은 맞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은폐의 기제로 전락한다. 즉 “‘조직적인 무책임성’이 나타난다.”(61) 이러한 문제는 “21세기 초의 도전을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산업사회에서 얻은 개념과 처방으로 다스리려 한”대서 유래한다.
· 따라서 역사적 발전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노선이 유럽에서 충돌한다.(62) - 한편으로는 기술적-관료적 규범과 통제의 완벽화에 근거한 높은 안전수준과, - 다른 한편으로는 법· 기술· 정치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위험 확산이 그것이다.
4. 지배관계로서의 개념 정의관계: 누가 무엇이 리스크인지 결정하는가
· ‘예기치 않고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증가하는데, 현행 법규범은 피해의 원인 제공자를 규정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는 사람은 명백히 드러나지만 그 고통의 인과적 과정을 명확히 증명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명확한 부작용’으로 둔갑해 버린다.
· “세계는 현대사회의 승리(더 많은 산업, 새로운 기술)에서 비롯된 메가-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법· 과학· 정치에서 현재 통용되는 원칙에 따라 제도화된 국가적 안전 약속에 의해 그것을 적절하게 증명할 수도 없고, 그 원인을 규명하거나 보상할 수도 또 (예방차원에서) 관리할 수도 없다는 것이 위험사회의 핵심 모순”이다.(65) - 게다가 리스크는 실제 일어날 수 있지만 꼭 일어난다고 확신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강한 비현실성의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따라서 ‘현실성’은 지식과 무지에 관해 결정을 내리는 규범에 따라 극적으로 과장되거나 극소화될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거나 단순히 부정될 수도 있다. -> 따라서 리스크는 특정 권력관계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 정의 투쟁/ 개념 정의 갈등의 성격을 지닌다.
· 예를 들어 ‘리스크 생산국’과 ‘리스크 수용국’ 간의 국제관계를 보면 이는 명확히 알 수 있다. - 국경을 넘어 위험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막을 법규범이 없을 경우 그 리스크는 은폐된다. 즉 위험이나 파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자신들과 상관없는 비현실적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리스크 수용국’이 되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어떤 나라에서는 (그곳의 지배적인 개념 정의관계와 문화적 인지에 따라) 위험하다고 비난받는 것이 또 다른 나라에서는 대체로 무해하다고 여겨진다.
· 리스크 개념 정의의 권력관계는 네 가지 문제를 통해 조명할 수 있다.(67) ① 누가 생산품과 위험, 리스크의 위험성이나 무해성을 결정하는가? ② 원인과 차원, 행위자들에 관한 어떤 종류의 지식 또는 무지가 이와 연관되어 있는가? ③ 위험에 대한 지식과 무지가 불가분의 관계이고 모든 지식이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면 도대체 개연적인 세상에서 무엇이 ‘증거’로 인정되는가? ④ 한 국가 또는 여러 국가 안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누가 결정하는가? - 제도화된 규범은 어느 특정 집단에게 자신들의 해석과 이익을 다른 집단의 의지에 맞서 관철할 수 있는 권력 기회를 열어준다. ‘개념 정의 수단의 소유자’는 학자와 법관들이고 이들이 책임 및 보상 요구 가운데 어떤 것을 인정하고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을지 결정한다. -> 하지만 이것은 서로 다른 ‘응집 상태’를 낳는다. 리스크 개념 정의는 전문가와 법관에 의해 규정되면서 우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것은 곧 반복되는 이견에 의해 자명함을 상실하고 탈마법화되면서 정치화된다. “한쪽에서는 계급투쟁이, 다른 한쪽에서는 리스크 개념 정의의 갈등이 양쪽 모두에서 대안들과의 공적인 대결이 이루어지면서 지배규칙의 ‘자연스러움’은 사라지고,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재발견된다.”(70)
5. 위험사회에서 기술과 자연과학의 역할
지배적인 개념 정의 관계는 기술과 자연과학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한다.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하여 무엇을 허용할 수 있고 허용할 수 없는지를 여론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한다.
예측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결과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한 새로운 연구윤리에 관한 공개 토론과 무수한 국가 자문기구들은 기술과학이 생산 혹은 개입하는 위험의 정도와 범위를 인식하지 못한다. 참여하는 주류학자는 대부분 원인 제공자들이고 이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한다.
- 적절한 비유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자전거 제동장치를 부착하는 꼴
위험이란 문제에서는 누구도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리스크 예측은 반드시 문화적 수용자를 전제해야 한다.
㉡새로운 지식은 하루아침에 위험에서 정상상태로 변할수 있다.
6. 사화의 생태학적 갈등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모든 고통,고난,폭력은 이제까지 "타자"에게 행해진다.
궁핍이 그렇고 전쟁이 그렇다. 위계질서가 있다는 말이다.
글로벌 위험은 "타자의 종말"을 가져오고,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
국민국가안 또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보호 구역과 사회적 분화를 없앤다.
-> 어떤이는 리스크를 생산해 이익을 얻고, 다른 사람은 건강 혹은 경제적 생존을 위협받는다.
=== 이부분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타자에게 행해진다는건가 그렇지 않다는건가?
!!!! 양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세계경제가 리스크로 이익을 보는 자와 손실을 보는 자로 나누어지면, 이런 양극화는 고용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영리집단 사이나 그에 따라 노조를 결성한 이익집단 내에서 나라마다 업종마다 기업마다 특수한 대립이 서로 발생한다.
㉡이 대립은 자본 분파 간 대립에서 유래한 간접적인 대립이다.
㉢갈등에 대한 의식이 고취되면서 업종별로 과거의 계급적 적이었던 자본과 노동의 동맹을 이룰 수 있다. 이 동맹은 계급대립을 넘어 노사블록과 다른 혼합분파와의 대결로 귀결될 수 있다.
=> 계급대립은 생태학적 정치화의 압력 때문에 후퇴한다.
==> 이러한 블록형성의 조짐은 체르노빌 이후 서독의 핵산업의 노사대표의 합의문에서 들어난다.
“이제까지의 에너지 정책을 옹호하고 어떤 노선의 변화도 반대한다.”
7, 태러 리스크는 국제정치의 토대를 바꾼다.
테러 위험의 글로벌화는 우선 가능한 테러 암살이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아무때나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상의 세계화"로 나타난다. 법과 군대, 자유, 인간의 일상, 정치질서의 안정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바로 이 예상이다. 국민국가의 근본제도가 제공하는 안전보장을 무력화한다.
양극 질서가 붕괴된 이후 “적(enermy)”의 세계에서 “위험과 리스크”의 세계로 진입한다.
== 카와구치 카이지 작가의 침묵의 함대라는 만화책이 생각이 난다.
테러리스트들은 승리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공황상태를 초래하려 한다. 국경을 넘어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공포 상황을 확장하면서 군사와 전쟁의 국가적 문법을 평가 절하한다. 시민사회의 평화적 상징을 지옥의 도구로 바꾼다. 이러한 정국에서 비상사태는 정상이 되고 국가는 무력해지는 동시에 (기존의 수단이 소용없기 때문에) 전권이 주어진다. 잃어버린 안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가장 크고 모든 것을 정당화해서 결국 자유,평등,민주주의 등을 대가로 지불한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최강자의 약점을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글러벌 테러를 비롯한 글로벌 위험에 대한 유일한 대응은 국제적 협력이다. 무력화된 국민국가는 이를 위해 자신들의 그림자, 자율 허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새로운 불확실성의 정치를 강요한다. 공인된 리스크를 눈앞에 두고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있을수 없다. 그것이 리스크를 줄이던 늘리던 효과가 없던 중요하지 않다.
== 이 단락에서는 국민국가의 무기력한 대처에 대한 옹호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8. 정치적 성찰성 : 위험의 대항권력과 사회운동의 기회
위험은 기존의 제도내에서 연출되어 강화되거나 축소된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연출되어 있는 위험의 마스크를 벗기는 대항권력의 존재는 사회적 기본여건에 달려 있다. 대의민주주의와 보장된 언론자유, 발전된 재화생산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런한 조건이 충족된 이후 아직 사회학적인 이해를 받지 못했지만 작동해야 하는 필수적이 요소가 “네트워크화 된 개인”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우리의 생존과 연관된 모든 문제에 관해서 전문가와 대항전문가에 의존할 것인가 혹은 문화적으로 함양할 수 있는 위험 인지 능력을 통해 자신의 판단력을 회복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 Reference =========
위험에 대한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
danger : 정도와는 상관없이 위험을 뜻하는 일반적인 말
risk : 자기 책임하에 무릅쓰는 위험
peril : 임박한, 피할수 없는 큼 위험
hazard : 우연에 좌우되는 또는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수 없는 위험
=============== Question ==========
시대에 대한 구분에 대해서 질문
근대 제1현대 제2현대.. 는 각각 무엇인가?
제3장 글로벌 위험사회의 ‘세계주의적 계기’ 또는 강요된 계몽
- 글로벌 위험사회의 규범적 지평 또는 글로벌 위험사회 이론의 규범적 틀 : 철학적․ 규범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위험사회의 현실적 생성동력과 그 양의성에서 도출 ① 꾸준히 완벽을 기해온 과학기술 사회는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라는 치명적인 통찰을 선사해주었다. 바로 거기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 유래(FCKW) ② 글로벌 위험사회를 단호하게 부인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빨리 그것은 현실화된다. 전 세계로 확산되는 리스크를 무시하는 태도는 리스크의 세계화를 강화 (조류인플루엔자) ③ MD 방어체제 구축하는 사이 자살폭탄 테러로 멘붕 → 리스크의 역설은 합리성, 즉 과거의 경험이 전혀 적절하지 못한 척도에 근거하여 리스크를 평가하도록 하고, 또 리스크를 계산․ 통제할 수 있다고 오판하게 만들었다는데 있다. 반면에 재앙은 항상 우리가 알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테러보호를 위한 인권침해는 강화되지만 테러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의무능력 비판) - 글로벌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경험은 인류에게 충격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사태가 전개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 리스크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고 인지될 경우, 세 가지 형태로 반응 나타날 가능성 ① 부정 : 현대 문화의 특징 ② 무감각 : 탈현대적 허무주의에서 표현 ③ 변형하려 함 : 글로벌 위험사회의 ‘세계주의적 계기’ -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하는가에 대해 아렌트의 대답은 리스크의 역설을 선취한다. : 예기치 못한 것에 대한 기대는 자명한 것이 더 이상 자명하게 여겨지지 않는 상황을 초래 → 위험이 초래한 충격은 새로운 시작을 요구 → 새로운 시작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새로운 행위가능성 창출 (국경을 넘어 서로 관계를 맺기 시작함 → 자유를 의미) ․ “정치는 인간이 다수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 정치는 인간 안에서가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난다. 즉 다양한 세상에 속하지만 행위를 통해 공동이 행위공간을 만들어내는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행동하고 주도권을 쥐고 새로운 시작을 감행할 수 있다. - 나아가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가 가진 세계주의적 계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더 나아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없는 새로운 비판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이러니와 양의성(양자합일) ① 과거의 위험과 새 리스크의 차이에서 ② ‘세계주의적 계기’나 역사의 간계에서 아무도 통제할 수 없지만 동시에 국가들과 NGO들에게 새로운 행동 가능성을 열어주는 현재의 미래의 세계사에서 글로벌 리스크가 어느 정도의 힘이 될 수 있는가? 1. 과거의 위험들 - 새 리스크 :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 현대사회는 위험사회가 되었다. 자신이 산출한 리스크를 극복하고 막기 위해 그에 대한 논쟁과 토론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의 산물, 대중매체의 불안 선동, 사치 리스크)
경영진에 의해 생산된 불확실성
-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산한 재앙을 예측하고 막는 것, 즉 생산된 불확실성을 다루는 것이다. 이런 필연성은 기술과 전문가, 대항 전문가, 제품을 위한 전망 밝은 큰 시장을 마련해준다. → 글로벌 위험사회는 빅 비즈니스다 - 불확실성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경제, 금융, 사회과학 등)는 대체로 ‘가우스곡선’을 참고로 방향 설정을 한다. 종모양의 정규분포 곡선을 이용해 불확실성을 측정할 경우 급격한 변동의 가능성이나 비연속성은 고려되지 않으며 사소한 것으로 여긴다. - 리스크 관리의 전통적 도구는 정상적 흐름에 집중하고 극단적 현상을 부차적으로 치부 → 비직선적 고찰로의 시각 전환 필요, 즉 우리의 주된 관심을 예외로 돌려야 한다. 예외는 규칙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 직선적이거나 부드럽고 단순한 우연(무게와 높이 또는 칼로리 소모량), 비직선적이거나 거칠고 성찰적인 우연(부-소득과 금융시장에서의 이윤, 전사자 수 또는 테러공격의 희생자) → 인간이 만든 거의 모든 변수는 ‘거칠다’, 아울러 불확실성의 사례들은 점점 더 증가 - 불확실성에 대한 모델을 세우려는 시도는 리스크 분석과 리스크 관리의 전통에 머물러 있다. 이 전통은 고전적인 안전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수용할 정도로 효과적인 불확실성 ‘극복’ 방안이 그 목표이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패러다임 변화이다. 즉 주안점을 리스크를 구성하는 글로벌 사회의 조건에 두어야지, 그 결과의 해결에 두어서는 안 된다.
글로벌 리스크의 특징은 무엇인가
- 글로벌 위험사회의 이론은 과거의 리스크와 새로운 리스크를 구분한다. 글로벌 재앙을 예견하게 만든 새로운 리스크 유형은 현대사회의 토대를 흔든다. <글로벌 리스크의 특징> 1) 위치와 장소를 규정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특정 공간에 구속되지 않고 어디나 가능 2) 계산할 수 없다-결과 추정 불가. ‘가설적’리스크, 과학의 무지와 규범적 불일치에서 기인 3) 보상할 수 없다-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때문에 보상이 아닌 예방을 통한 대비원칙 대체 - 위치 확인 불가능의 세 가지 차원 ① 공간적으로 - 기후변화 ② 시간적으로 - 긴 잠복기, 지식과 무지의 변화로 피해자 규명역시 이론의 여지 많음 ③ 사회적으로 - 긴 연쇄 고리를 가진 복잡한 과정에서 유래, 원인 결과 정확하게 규명 불가 - 리스크의 계산불가능성은 ‘알 수 없음’의 중요성에서 나온다 → 안전은 현대사회의 최우선 과제로 모른다고해서 면제되지 않는다 → 위험에 직면한 사회는 안전과 통제에 의존 - 모두를 위협하는 파괴력을 가진 재앙이 예상되면, 경험과 합리성에 이거하는 리스크 계산은 와해된다. 일어날 법하지 않은 것도 포함하여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를 고려해야 한다. 경험과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에 상상력과 의혹, 픽션, 공포가 덧붙여진다. - 프랑수아 이월드 “사전대비 원칙은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규준으로 정한 의심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요구한다. 모든 행위에 앞서 나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물을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추측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만약을 위해 나는 최악의 가능성도 그려보아야 한다. 너무나 기만적이고 사악한 악마가 순수해 보이는 사업에 몰래 끼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정치가들은 위험 방지 의무 때문에 안전기준을 확실하게 준수한다고 천명한다.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치러야 할 정치비용이 과잉대응의 비용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 국가가 안전을 약속하고 언론이 재앙에 목마른 상황에서 무지의 히스테리와의 사악한 권력 게임을 막는 것이 미래에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신탁 관리인에서 피의자로 - 글로벌 리스크는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의존성의 표현이다. 이런 상호의존성은 국내정치나 현재의 국제협력으로는 적절하게 고려할 수 없다 ․ 불확실성에 대응하면서 얻은 과거나 실질적 경험은 똑같이 정당한 권리 주장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야기되는 문제에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 ․ 합리성과 안전을 보장해야 할 과학, 경제, 정치 같은 현대의 근본 제도들은 그들의 장치가 더는 확고한 토대를 갖지 못하고 기본원칙들이 더 이상 자동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 결과적으로 이 제도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신탁관리인에서 피의자로 변했고, 그들은 더 이상 리스크 관리자가 아니라 리스크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비극적 개인화 - 글로벌 위험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개인화의 급격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 전문가의 리스크 관리 실패로 인해 개인은 글로벌 세계의 불확실성 앞에서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한다 →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뿌리 뽑혀 있는 것 ․ 유전자변형식품의 장기적 영향 → ‘책임지는 소비자’가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몫 ․ 책임에 대한 호소는 제도가 자신의 실패를 미화하는 냉소주의 ․ 개인은 전문가 시스템의 개념 정의 권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신뢰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믿어야만 하는 상황 →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개인의 온전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 비극적인 일이다. - 제1현대의 행위자인 기본 제도들은 불확실성을 평가하고 통제하는데 자신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점차 의식함으로써, 자신이 취한 조치들이 반생산성을 의식함으로써 무력화 ․ ‘성찰적 현대화’ - 우리가 사는 사회는 탈현대가 아니라 더 많은 현대사회다. 의도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부작용으로 인해 제1현대의 기본 제도를 해체하는 것은 현대의 위기가 아니라 현대의 승리다 - 글로벌 위험사회는 시대 개념이다. 현대가 만들어낸 역사적으로 새로운 사회장치와 관련 ․ 현대사회는 스스로 변화해간다는 성찰적 현대화 이론의 맥락에서만 의미 있다. ․ ‘방법론적 국가주의’의 규범적 지평을 부수고 이를 글로벌 위험사회의 역동성에서 얻어지는 규범적 틀로 대체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개념의 연구는 이루어질 수 없다.
2. 글로벌 위험사회의 ‘세계주의적 계기’ 또는 역사의 간계
* ‘세계주의적 계기’란 무엇인가 - 우리는 타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세계에 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글로벌 위험사회의 역동성을 의식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는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모두가 가까운 이웃으로 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세계주의적인 것은 우선 문화적 타자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 하지만 이러한 계기는 규범적 차원을 의미하는 것(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는 누구에게나 닥친다는 경험, 깊은 외상을 남기는 끔찍한 경험이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108) => 글로벌 위험사회의 ‘세계주의적 계기’는 모든 사람이 출구없는 공동의 글로벌 위험 지역에 앉아 있다는 것, 즉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조건임을 의미한다. - 글로벌 위험사회는 세계의 다원성을 보라고 강요하며, 글로벌 리스크는 경계와 대립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끼치는 시민의 책임문화가 나올 수 있게끔 도덕적· 정치적 공간을 열어준다. // 하지만 글로벌 리스크는 이와 정반대의 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글로벌 위험사회의 양의성”). - 글로벌 리스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공포를 확산시킨다. 따라서 국가주의가 재무장되고 타자에 대한 적개심이 증가한다. 따라서 ‘세계주의적 계기’란 서술적 개념이면서, 또 규범적 개념이다. 타자를 같으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로 인정하는 일, 그것이 바로 규범적 세계주의이다. 우리는 글로벌 위험사회의 역동성이 강요하는 배제할 수 없는 다원성이라는 현실을 파악해야만 한다.
* 강요된 계몽: 언론화된 위험은 사회적 약자와 주변부 계층, 사회적 소수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다. ·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위험은 가난한 자, 주변부 계층과 사회적 소수자에게 세계여론의 발언권을 부여 할 수 있다.”(109) - 텔레비전 화면은 글로벌 위험사회의 제1법칙을 우리의 거실에 전달해준다. 즉 재앙위험은 가난한 자를 추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사건의 피해 규모는 사회적 차이와 과거의 발전 정도에 근거한다. 또한 ‘순수한’ 자연사건으로 보이는 것 조차도 리스크가 됨을 알린다. 왜냐하면 ‘거대한 파도’의 힘과 주민의 무방비 상태는 높아지는 해수면으로 인해, 즉 문명의 결과로 더 커진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계층과 계급’을 넘어 모두에게,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순간이라도 ‘발언권’을, 꼭 지역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국내 및 세계 언론이 부여해야 한다는 정언명법이 지배한다.”(111) - 이제 위험과 파괴에 신음하는 익명의 개인 운명은 정치사건으로 다듬어지며, 그것은 책임자와 사고 전환, 행동 변화를 요구한다. - 하지만 글로벌 리스크의 공론 영역은 하버마스가 조명한 ‘공론 영역’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버마스는 참여 기회의 평등이나 모두가 지켜야 할 합리적 담론원칙의 의무를 전제로 한다. 반면 “위험의 공론 영역은 비자발성에 근거하며 정서적으로나 실존적으로 결정된다.”(111) 처참한 광경을 보여주는 영상은 국경을 넘어 냉정한 이성이 아니라 동정심을 유발한다. - 전 세계적인 공적 담론은 결정과정의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의 결과에 대한 이의에서 나온다. 현대의 리스크 위기는 결과에 대한 찬반양론 덕분에 구성된다. 따라서 “리스크 갈등은 실제로 계몽 기능을 수행한다.”(112) 리스크 갈등은 기존 질서를 흔들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참호를 넘어선 강제 소통 · “글로벌 리스크는 각자가 자기논리만 고집하는 화합할 수 없는 대립세계에서 원치 않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무로 주어진 의사소통 도구이다.”(113) - 공적으로 인지된 리스크는 서로 등돌린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을 강요한다. 또한 커다란 리스크는 문화와 언어, 종교와 시스템, 그리고 국가 내 및 국제정치적 의제의 자기만족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며, 그것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만들고, 서로 모른 척하거나 적대시하고 투쟁하는 정당과 진영, 국가 사이의 협상을 위한 배경을 만들어준다.
* 정치적 카타르시스 · “눈물이 우리의 공동 언어가 될 줄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 20세기 말 연이어 발생한 대지진은 180년간 숙적이었던 전통적인 두 ‘원수국가’를 화해시켰다. 또한 반다아체의 평화와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난 두 인종 간의 아름다운 지원, 카시미르의 국경 개방을 우리는 보았다. -> 재앙은 글로벌 사건이 정치적 카타르시스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려주었다. (물론 이것은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비이성의 간계’가 될 수도 있다)
* 강요된 세계주의 · “글로벌 리스크는 경계를 넘어 원래 서로 전혀 관계 맺지 않을 법한 행위자들을 결속해 함께 활동하게 만든다.” - 리스크는 문화와 시스템, 지역 또는 학문 분과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생태학적· 생의학적· 사회적· 재정적 ·상징적 리스크처럼 종종 일시적인 리스크들은 끝없이 변신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글로벌 위험사회의 양의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강요된 세계주의’를 요구한다. ->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세계주의는 통제할 수 없는 전염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우연히 우리에게 닥쳐오고 수동적으로 겪어야 하지만 동시에 경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시작을 능동적으로 시행하라고 자극하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준다.”(115)
* 국가적 책임의 회귀 또는 왜 신자유주의 국가는 실패하는가 · “기후변화는 개인이 모여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이다.” “그러나 정부조차 ‘개별적으로는’ 무기력하다.”(116) - 이산화탄소는 국경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모든 수단을 국제적으로, 즉 지역적으로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투입하지 않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동안 누구나 다 아는 지혜가 되었다. -> 하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류를 하나로 만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중간 범위 정도의 임시 해결책이 필요하다. - 이를테면, 유럽연합과 중국의 협력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유럽인은 극히 효율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냉장고를 고안할 수 있다. 중국인은 그것을 싸게 생산하고, 그들이 가진 글로벌 시장 네트워크와 시장전략으로 전 세계에 팔 수 있다. - 글로벌 리스크의 연출은 인류에게 유익한 생산품을 소비하고 생산하고 팔아야 하는 ‘강제 시장’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즉, 국가-경제-동맹을 전 세계적으로 이뤄낼 수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 물론 이러한 계획에 대해 냉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 국민국가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글로벌 리스크는 경고신호이며, 이에 반응해야만 한다. - 이미 많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다. 그들은 인재로 인한 기후변화의 치명적 결과를 확신할 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재앙의 글로벌 연출에 들어 있는 ‘세계주의적 계기’를 발견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부시 대통령이 서구의 지도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녹색사고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후변화와 에너지 절약 문제는 더욱더 중대한 문제로 급부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녹색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이 대서양 동맹의 새로운 접합체가 될 것이다. - “서구 또는 세계의 새로운 접합체라는 표현 속에 글로벌 위험사회의 세계주의적 기회가 표현되어 있고 형성되고 있다.”(119)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인식과 토대 위에 사실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다. 이 유토피아는 국가와 정치를 다시 활성화하고 다시 정당화할 것이다.
* 세계주의적 행위의 역사적 대안 또는 글로벌 위험정책의 포지티브 섬 게임 · “글로벌 리스크의 또다른 특이점은, 그것이 경계를 넘는 정치행위를 필요로 하지만(···) 위험이라는 지상 종교에 대한 신앙이 모두를 공동 행위로 몰아”간다는 점이다.(119) - 글로벌 리스크의 신앙은 국경을 초월한 상호의존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확보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호의존성은 국가나 경제 주체에게 스스로 피해를 입지 않고 자기이익을 향상시키려면 타자의 이익도 고려하라고 강요한다. - 장차 서구를 하나로 묶을 접착제는 생태학적 위기의 도전이며, 이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위험의 공통성임을 일깨워준다. - 세계주의적 세계내정이라는 최현대식 모델은 탈국가적· 다변적· 복합체적이며, 경제주의적이고, 모든 측면에서 극히 평화적이며, 모든 방향으로의 상호의존성을 설파하고, 곳곳에서 우호세력을 찾지만 어디에서도 적을 언급하지 않는 모델이다. - 글로벌 위험사회는 어떤 국가도 혼자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는 새로운 역사적 핵심 논리를 발전시킨다. 그리고 국가정치가 글로벌화한 자본에 대한 지휘권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 “글로벌 리스크가 열어주는 행위전략은 자본과 국가 간의 신자유주의 연합이 탄생시킨 질서를 뒤엎는다.”(122) 글로벌 시민사회와 국가가 결합하는 형태 즉 “세계주의적 국가 형태”가 탄생된다. - 신자유주의 동맹 형태는 전 세계적으로 자본 이익을 극대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를 도구화한다. 반면 시민사회의 모습을 띤 세계주의 국가라는 이념은 저항력 강한 다양성과 탈국가적 질서를 고안해서 실현하려는 목표를 지닌다. - 신자유주의 의제는 자기조절과 자기 정당화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시민사회의 의제는 급진 민주주의적 세계화의 새로운 거대담론을 위한 투쟁과 인권, 세계정의의 아우라를 발산한다. -> 이것은 단지 소망이 아니며,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의 표현이다.”(123) 변동성이 강한 세계경제에 대해 국민국가의 자율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초국가적 상호의존성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개별국가의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원칙들은 이제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의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 - 정치구조와 활동이 세계주의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국가 이익은 신장될 것이며, 글로벌 시대에 국가구조의 비중은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 “물론 세계주의적 비전이 불러올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123)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세계주의와 가짜 세계주의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분명함은 분명 얻기 쉽지 않다. 세계주의는 비교적 높은 정당성을 확보하는 관계로 그것을 국가적-제국적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려는 유혹도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제 4장 리스크 문화의 충돌 또는 정상상태와 비상상태의 중첩
글로벌 리스크의 상징적 물리적 연출 1)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2)글로벌 리스크의 계산이 불가능해서 (종교적, 세속적, 정치적 서로 모순된 ) 문화와 충돌한다. 3)글로벌 리스크의 세계정치적 잠재력은 극히 모순되게도 정상상태와 비상상태의 중첩에서 발생한다. 4)국가지배의 정당성의 확대는 결과적으로 실패국가를 만들어 낸다.
1.세계주의적 사건 또는 9.11의 ‘상징코드’
리스크의 존재는 그것의현실-존재가 아니라 그것의 현실됨(realization)이다. 글로벌 테러 위험의 현실적인 파괴력 만큼이나 상징적인 파괴력을 가진다. 9.11으로 인해 ‘테러리즘에 대한 예상’을 만들어 냈고, 정당한 근심과 히스테리의 구분을 없앴다. 9.11은 상징적으로 동원하고 구성(해체)하여 전 세계가 테러 공격을 예상하게 만듦으로서 자기 신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테러 위험의 현실화가 왜 “세계주의 사건(Shillmeyer)” 분류 할수 있는가? - 재앙의 대중매체적 발생 : - 온 지구가 느끼는 고통 -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 - 문명세계의 근본이 취약하다는 인류학적으로 충격적인 경험
2.신 또는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믿음 : 리스크 문화 충돌
기본적으로 글로벌위험은 잔인한 사실성을 통해 초국가적인 “공통성”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불확실성으로 인한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인식하는 문화에 따른 리스크에 대한 문화 충돌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은 문화적, 경험적 차이에 기인하게 된다. 상징적으로, 신앙의 기준에서 재앙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리스크가 아니다. (리스크는 인간의 결정으로 전제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리스크에 대한 견해를 가진 문화들의 충돌은 문화적이다. 제1현대에서의 국민국가적 산업사회의 특징은 노동과 자본간의 사회경제적 대립이었다. 제2현대에서는 리스크 문화의 충돌이 주요 특징이다. - 문화적이란 말은 개인과 개별국가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의 생각을 말한다. - 인류의 육체적, 도덕적 생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결정은 어느정도 자인된, 이견이 분분한 무지의 범위에서 내려져야 하고, 사회적 책임 소재가 불분명 하다. - 시도와 오류라는 실험논리가 여러분야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안정성
3.위험사회는 정상상태와 비상사태가 서로 중첩되는 (잠재적)혁명사회이다.
재앙을 몰고 올 리스크를 다룰 때 미래의 지구적 비상사태가 현재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협의하는데, 이런 비상사태는 개별국가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책임지울 수도 없다.
4.글로벌 리스크는 권위주의적 ‘실패국가’를 생산한다.
국민국가라는 기준틀을 당년히 함으로써 사회학이 글로벌 위험사회의 동학과 갈등, 모순과 역설의 분석으로 나가지 못 한다는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 나든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제5장 세계여론과 글로벌 하위 정치 또는 기후재앙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 생태학적 문제의 사회과학적 분석을 위한 관점 제안 → 생태학적 문제를 사회의 주변 환경에서 나타나는 문제나 환경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사회 안에 자리잡은 세계 내적 문제로 파악 → ‘자연’, ‘생태학’, ‘환경’의 개념을 사회와 자연의 대립을 극복하고 인간이 산출한 불확실성을 중심에 세우는 개념들(재앙, 부작용, 보장가능성, 개인화, 세계화)로 대체하고자 함 - 글로벌 위험사회의 성찰적 성질 ① 글로벌 위험은 글로벌 공동 협력을 장려한다. 글로벌 공론영역 부각 ② 국가정치를 활성화하고 국제협력 제도를 만들어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적 추진력 부각 ③ 정치 분야의 경계가 사라지고, 세계적이고 직접적인 ‘하위정치’의 상황 전개 → 국민국가적 정치의 좌표와 제휴를 상대화, 무력화하며 ‘배타적인 확신의 전 세계적 동맹’으로 귀결
1. 생태학적 글로벌 위험사회 이론의 연관성
- 세상이 생태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인지하는 데에는 자연과학적 사유를 전제로 한다. 생태학적 의식은 ‘자연스러운’ 태도의 정반대이며, 오히려 지극히 과학화된 세계관이다. 여기에서는 기후연구자의 추상적 모델이 일상행위를 결정한다. 이런 추상성을 극복하고 기후변화와 그 참담한 결과를 ‘가시화’하려면 어떤 연출, 어떤 ‘시각화’가 필요하고 가능한가 검토 - 인간이 무엇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고 어떤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가를 기술적 또는 생태학적 위험 진단으로 유추해 낼 수 없다. 문화과학적 시각 필요. (생태학적 위기의 범위와 긴박성은 문화 내적인 그리고 문화 상호간의 인지와 평가에 따라 변한다) <스턴보고서> → 기후변화는 역사상 최대의 시장 분괴를 담보하므로 이러한 경제적 재앙을 막으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이것은 재앙에 비해 적고, 현명한 투자다. ◇ 사실주의-구성주의- 논쟁 - 무엇이 글로벌 위험사회 개념을 정당화하는가 ① 사실주의적 대답 : 발전한 산업생산의 결과와 위험은 그동안 글로벌 현상이 되었다. 즉, 인간에 의해 생산된 위험이 강요한 글로벌 사회화가 글로벌 위험사회이다. 이 상황은 국제공조와 국제제도의 의미를 더욱 증대시킨다. 사실주의의 힘은 산업사회가 발전단계를 두 번 거친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진행모델에서 드러남 (첫째단계: 계급과 사회문제 핵심 이슈, 둘째단계: 생태학적 문제 지배 - 중첩) ② 구성주의적 대답 : 글로벌 위험사회는 문제의 글로벌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국가적 담론 연합”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환경위기를 공적 의제로 설정(7,80년대 결성, 90년대 리우 정상회담 주요의제 설정, 21세기 신노동당과 유럽연합) 이를 위해 환경운동이 제도화와 네트워크 구성, 초국가적 행위자들의 결성(그린피스, WWF, 국제법과 협약 등) <글로벌 위험사회 진단의 반대 논리> ① 글로벌 리스크에 관한 지식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강조 (입증될 수도 반박될 수도 없는 진술 사용) ② 제3세계의 행위자와 정부들은 생태적 신제국주의의 일종이라고 비판 (빈곤국가들과의 지식과 발전 격차를 유지하려하고, 위험을 야기한 장본인임을 강조) - 자기 위협과 외부 위협을 구분 ③ ‘자연보호’를 그 정반대인 일종의 글로벌 경영으로 전도한다고 비판, 새로운 지식 독점 구축, 새로운 대립을 야기하고 국가별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 사실주의는 생태 문제를 ‘폐쇄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구성주의는 원칙적인 개방성 강조 - 어떤 이에게 위험이 중심(국제제도와 협약 탄생)에 있지만, 다른 이에게는 행위자들이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이며 맥락(초국가적 담론이 전제)이다. - 사실주의는 구성주의가 쉽게 간과하는 피해와 복구 불구능성에 유의 ◇ 제도적 구성주의 - 글로벌 위험사회이론은 제도적 구성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구체화된다 ․ 이 이론은 사회와 자연의 이원론과 결별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단지 결별 이후 자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 ‘자연’과 ‘자연파괴’는 산업을 내면화한 자연 속에서 생산되고 (일반인과 전문인의 갈등 속에서) 정의된다. 자연이나 자연파괴 ‘자체’, 그것의 본질적 내용은 제도적 행위권력 및 구성권력과 연관된다. ․ 자연의 ‘자연스러움’과 자연의 ‘파괴’, 자연이 ‘재자연화’의 차이가 어떻게, 어떤 담론적, 산업적 자원과 전략을 가지고 개인들에게 제도 내적으로 그리고 지식 행위자들 간의 대립 속에서 산출되고 억압되고 정상화되며 통합되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 현대사회는 스스로 산출한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는가? ① 산업사회와 함께 발전하고 완벽해진 제도와 규범들-리스크 계산, 보험원칙, 사고 개념, 재앙 방지, 대비 차원의 후속 배려-이 실패할 수 있다. ② 산업사회의 결정 방식의 표준과 그 부작용의 글로벌 성격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다. 과학적,기술-경제적 역동성과 관련된 결정들은 국민국가와 개별 기업의 차원에서 조직된 반면, 그 위협적인 결과는 우리 모두를 글로벌 위험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든다. - 이것이 생태위기의 ‘세계주의적 계기’이다. ․ 생태학적 담론이 시작과 더불어 ‘외교’의 종말과 ‘다른 국가의 내정’이나 국민국가의 종말은 이제 일상적 경험이 되었다. ․ 차이와 무차별을 만들어 내는 핵심 전략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책임 소재의 규정-인과성과 책임-의 기존 규칙이 통하지 않는다. 즉 행정과 경영이나 판결에 이 규칙을 꾸준히 적용하면 오히려 정반대이 결과가 나타난다. 위험은 위험의 익명화로 인해 더 커진다. 과거 해왔던 식으로 결정하고 통제하고 생산하면 자연파괴가 나타나는 동시에 자연파괴가 상징적으로 정상화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 두 현상은 서로 보완하고 서로 악화시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규칙 위반이 아니라 규칙이 생물 종과 하천이나 바다의 죽음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 조직적인 무책임성 - 물질적 폭발력 외에 담론전략적 행위로 인해 잠재적으로 위험의 정치적 폭발력이 발생한다. 행정, 정치, 법, 경영이 돌아가면서 정당화함으로써 이 위험은 정상화되고 통제할 수 없는 글로벌 현상으로 자라난다. 이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산업생산의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글로벌 생태학적 위기이 진원지로 변한 것은 ‘환경문제’가 아니라 산업현대의 제1시기, 즉 국민국가 시기의 심각한 제도 위기라 할 수 있다. - 이런 사태는 제1현대의 국민국가적 경제 모델의 토대에 대한 자기성찰을 강요하고 기존 제도들(경제와 법, 과학에서의 결과들이 외면으로 나타난)과 역사적으로 무가치해진 그것의 합리성 토대를 검토하라고 강요한다. 여기서 진정으로 글로벌적인 도전이 발생한다. 이 도전에서는 전쟁을 포함한 세계적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협력과 갈등 조정, 합의 모색을 위한 초국가적 제도가 탄생할 수도 있다. - 경제 여건도 변하고 있다. 산업이 통제받지 않던 시절에서 국가가 노동법과 안전규약, 임금협상 등의 조건을 통제하던 시대가 있었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는 이것들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이것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불확실성은 경제적-합리적 행위와 조종의 핵심 영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 거액을 투자하려면 먼저 지속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기업의 조치는 정치적 사안이 된다. -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이제까지 당연시되던 전제와 제도의 정치화 현상이다. 만들어진 불확실성의 조건 아래 누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무엇을 충분한 증거로 간주할 수 있는가? 누가 보상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가? 법규는 삶을 위협하고 동시에 정치를 위협하는 것을 일반화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회적 평화에 기여하지 못한다.
2. 글로벌 하위 정치의 징후와 발생조건, 표현 형태
* 글로벌 하위 정치라는 개념
· 글로벌 위험이 어떻게 행위를 촉발할 것인가? (170) ① 위로부터의 세계화 - 국제협약과 제도 - “위로부터 세계화의 법적 영향으로 국가 간의 법은 일종의 글로벌 법으로 대체될 것이나, 이 법은 많은 측면에서 ‘인류애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러처드 포크) ②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 대의정치 시스템과는 무관하며 기존 조직과 이익집단을 문제시하는 새로운 초국가적 행위자들이 주체이다. 로빈 우드, 그린피스, 국제사면위원회, 인간의 대지 등의 NGO가 그 대표격이다. - ‘글로벌 시민의식’의 등장은 정부와 국민국가의 분화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분화는 시민사회 집단과 국가 정부들 간의 새로운 연합으로 구체화된다. -> 글로벌 하위 정치 개념은 글로벌 위험사회의 세계주의적 계기를 강화한다.
·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정신적 태도가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 산출한 통제 불가능한 것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만이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낳고 하위정치에 문을 열어준다. -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성찰적 현대화’이고, 경험적으로는 자기변형이며, 정치적으로는 정당성 붕괴와 권력 공백이다. - 위험은 산업적으로 산출되고 경제적으로 외형을 갖추며 법적으로 개인화되고 자연과학적으로 정당화되어 정치적으로 무해한 것으로 선포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권력과 신빙성이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것은 세계사회를 하위 정치의 장으로 만들면서 시스템이 시험당할 때 일어난다. -> “‘하위 정치’ 개념은 정치와 정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현상을 말한다.”(173) 이는 정치가 국민국가의 대의제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하위 정치’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 비국가적 정치의 전세계적 자체 조직화의 조짐에 관심을 돌리게 한다. 하위 정치는 ‘직접’ 정치이기 때문에 사안별로 개입하고, 대의적 의사 결정제도를 지나쳐 정치 결정에 개인적으로 관여한다. 즉 어떤 정치적 노림수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성관없이 아래로부터 사회를 조형하고 사회를 변화한다. - 그러한 국가정치와 하위 정치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탈정치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정당한 시민사회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모든 경계를 가로질러 새로운 연합이 가능해진다. 이 연합은 국내 정치에서 야당이나 경제, 언론이나 유권자들을 상대로 새로운 행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정부에 열어준다. -> “하위 정치는 정치적인 것의 규칙과 경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정치를 기존 의무로부터 면제시켜 세계정치의 공간이 더욱 개방적이 되고 새로운 목표와 주제, 관계들에 더욱 쉽게 접근하게 된다”(174)
* 아래로부터의 하위정치: 상징적으로 연출된 대중 보이콧-글로벌 하위 정치의 연구 사례
· 그린피스는 석유회사 셸을 압박하여 낡은 해상 플랜트를 대서양에 침몰시키지 않고 육지에서 처리하게 만들었다. -> 하지만 이것은 그린피스가 한 것이 아니다. “초국적 석유회사를 무릎 꿇게 만든 것은 그린피스가 아니라 전 세계로 방영된 텔레비전의 고발 프로그램으로 인해 발생한 시민의 대량 보이콧”이다. “그린피스는 정치 시스템을 뒤흔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 시스템의 정당성 공백과 권력 공백을 눈에 보이게 만들었다.”(174) - 이렇게 폭로된 상황은 국가권력이 비합법적 행위 및 조직자들과 제휴하게 만들었다. 국가는 권력을 이용해 의회 밖의 의도적인 규칙 위반을 정당화하고, 직접정치의 주창자들은 간접적인 법치국가의 기관과 규칙의 좁은 틀을 벗어나려 한다. -> 셰을 반대하는 연합의 등장은 제1현대의 정치와 제2현대의 정치를 교체시켰다. 즉 국민국가 정부들이 관객석에 앉아 있고, 제2현대의 권한 없는 행위자들이 사건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 그린피스는 프랑스 정부의 핵실험 재개를 막았다. -> 하지만 이것도 그린피스가 한 것이 아니다. 폭로(연출)는 정부들과 그린피스 활동가, 온갖 저항집단 간의 글로벌 연합이 자발적으로 생기도록 유도했다. 이 모든 것은 직접정치의 순간적 동맹을 시사한다. 이것은 적대적인 상징적· 경제적 권력의 글로벌 제휴가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제2현대의 정치 특징은 그 ‘글로벌 특성’이 사회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느 누구든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175)
· 전통 이후의 세계는 개인화가 주도한다고 생각했으나, 겉보기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 고차적인 의미에서 전당한 일을 위해, 즉 (환경)세계를 구하기 위해 지구 전체에서 의회 밖의 재야세력과 의회세력이, 시민과 정부가 연합세력을 결성했다. -> 글로벌 위험은 적어도 잠정적으로 또 어느 역사적 순간에 글로벌 위험 공동체를 구축한다.
· 정치와 도덕이 전문가 합리성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 세계적 기업과 국민국가 정부의 행위는 세계여론의 압력을 받는다. 이때 글로벌 행동 맥락에서 개인적 또는 집단적 참여가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 “시민은 구매행위가 정치적으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투표권임을 알게 된다.”(176) 보이콧에서 그런 식으로 적극적인 소비사회와 직접민주주의가 결합하고 연합한다. 이것은 전세계적이다. 세계시민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글로벌 책임관계를 구축한다.
· “글로벌 위험사회의 정치적 장소는 거리가 아니라 텔레비전과 인터넷이다.”(178) - 정치적 주체는 노동자와 그 조직도 아니고 노동조합도 아니다. - 대중매체는 문화적 상징을 연출하고 행위자는 매체의 상징적 정치에 의존한다. -> 이렇게 추상화되고 항상화된 파괴의 상징은 글로벌 위험사회를 유지시키는 요인이면서 직접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 - 연출된 상징이 단순하고 기억하기 쉬우면 쉬울수록, 또 공적인 저항행위가 개인에게 유발하는 비용이 적으면 적을수록, 누구나 그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쉬우면 쉬울수록 행위를 유도하기 쉽다. 정보 오류가 있어도 쉽게 감출 수 있다. - 그린피스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이기는 유도시합과 같은 정치를 추구한다. 그린피스 활동가들은 다국적 미디어 전문가들이다. 그린피스는 미디어 시대의 수단으로 글로벌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을 연출한다. 그들은 정치적 상징을 다듬어내는 대장장이들이다.
· 그럼에도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놀이하듯이 서로 연대해 다양한 문화를 넘나드는 글로벌 저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세계시민사회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힘을 체험한다.”(180) -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직접 관여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 리스크를 의식하면서 글로벌 위험사회는 자기비판적이 된다. 이 사회의 토대와 좌표, 이미 정해진 제휴관계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새로 고안해내야만 한다.
* 위로부터의 하위 정치: 세계 기후정치와 ‘세계주의 국가’의 탄생 가능성
· 리스크(기후변화)의 글로벌 특성은 세계 문제의 범위와 가능한 조직적 대응, 법적 토대, 세계경제적 전제와 결과 등과 관련해 불확실성을 산출한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WTO, OECD 같은 일련의 국제기구 등이 이 문제를 검토하고 처리한다.(182) - 그들은 자국 중잉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실용적으로 또 상호대화 속에서 자기활동의 공동 목표를 정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글로벌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이익이 되는지를, 즉 세계주의에도 기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 스턴 세계은행 총재(2006)의 ‘기후 보고서’의 경우 - 이 저서의 연출력은 기후 문제의 ‘합리성’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적·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합리성의 핵심은 오늘 기후보호에 투자하면, 나중에 몇 배의 이자가 붙어 돌려받는 다는 것이다. -> ‘스턴 보고서’는 자유방임 원칙(위험은 여전히 통제가능하다) 대신 예방 원칙을 앞세웠다.
· 세계주의 국가는 국가적 관점만을 중시하겠다는 서약을 포기하고 다른 국가들이나 시민사회운동과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경제와 문화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열리는 새로운 행위공간을 개척한다. - 세계주의 국가는 시민사회 단체와 연합하여 적극적 기후보호정책으로 방향 전환할 수 있는 국가정치를 새롭게 고안해낼 수 있다. - 세계주의 국가는 주권의 양심 가책에서 벗어나 다른 정부와 비정부단체, 세계적 기업들의 순수한 협력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
· 물론 이러한 희망의 구조물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 - 그것이 취약한 까닭은 적극적 기후정치의 비용과 이윤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균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 부유한 국가들은 기후 온난화로 가장 큰 피해를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타협과 양보할 자세를 보여아 한다. 반드시 필요한 ‘글로벌 딜’을 이끌어내려면 우선 미국이 동의해야 한다. -> “어쨌든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정치적 현실 실험이 시작되었다.”(187)
* 테러의 하위 정치
· 테러는 생태학적 리스크와는 다르게 의도된 재앙이다. 이 재앙은 가시적이며 스펙타클하기 때문에 특별한 설득 없이도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게 한다. - 위협이 커지면 커질수록, 또 크게 만들수록 민주국가에서 다수는 자유의 제한에 그만큼 더 쉽게 찬성표를 던지게 된다. - 이 범죄자 집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두드러지지 않은 평범함이다. 바로 이런 점이 일반적 불안감을 조성한다. - 의심스러운 경우 결국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자, 즉 모든 사람이 자심의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 -> 이러한 상황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강력한 저항 이데올로기가 된다.
· 테러의 하위 정치는 전쟁의 개인화를 뜻한다. - 증오와 인터넷이라는 전제조건을 갖춘 사람은 누구나 ‘네-스스로-하라-테러리스트’에 동조한다. 위계질서가 없고 수평적인 테러리즘이 모델이 된다.
· 하지만 한편으로 테러리즘은 권력의 마약이다. 즉 테러리즘은 서구에서 연출된 공포의 화려한 환영적 성격을 지닌다. - 만약 서구 국가가 테러 공격에 대한 언론보도 금지조치를 내린다면 테러의 위험(예상)은 저절로 붕괴할 것이고, 행위의 세계정치적 공포의 후광도 사라질 것이다. - 테러리즘은 경제적 세계화를 저지하는 데 가장 부당한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 제3세계의 서구 현대에 대한 증오는 서구 현대가 거둔 승리의 산물이다. - 제3세계는 자신들을 유린하고 종속시킨 서구를 미워한다. 오래전부터 서구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과 서구가 이 세상을 자기식대로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오는 대응이 테러리즘이다. 그것이 테러의 하위 정치가 세계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글로벌 맥락이다.
제6장 예방국가 또는 직선적 진보비관주의의 진부성에 관해
산업사회는 부정적인 결과와 자기위협을 체계적으로 생산하지만, 그것을 공적으로 정치갈등의 형태로 이슈화하지 않는다. 산업사회의 제도들은 자신들이 통제할수 없는 리스크를 생산하고 정당화한다. 산업사회는 스스로 위험사회로 인식하고 비판한다. --> 성찰적 현대화라는 개념의 도입 성찰적 현대화의 의미 : 반성을 의미하지 않고, 일차적으로 자기대면을 뜻한다. 산업사회에서 위험사회로의 이행은 의도치 않은, 예기치 않은 잠재적 부작용이라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리스크는 예측가능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산출하는 보험이라는 것을 통해 보장하려 한다. 보장 주체들에게 사회는 위험공동체, 즉 예방국가와 부양국가로 여겨진다. (Ewald, 1993) 하지만, 이런한 시도들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꾸며지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취해야 할 행동 대상이 된다. 생산된 리스크가 예방국가에서 현재 유효한 위험 계산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무효화하는 순간이 위험사회로의 진입이다. 사적 보험의 부재가 이 위험사회의 진입이다. 산업적/과학적 기획들은 보험에 들 수 없다.
1. 직선적 기술 관료제의 종말
헬무트 셀스키, 베버, 소스타인 베블런, 아널드 겔렌 등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대국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술화와 과학화가 진행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기술을 내면화 해야 한다. --> 기술국가 요스트 할프만은 셀스키의 "모든것을 결정으로, 또 리스크로 변형시키는 현대의 발전에 내재한 폭발력은 인식조차 않는다" 라고 지적한다. "고위험 테크놀로지는 기술관료제 이론의 기대와 상반된다"
사회가 노동이 되었다면, 기술적 진보에 관한 결정과 통제는 집단 문제가 된다.
크리스토프 라우가 보여주었듯이 리스크갈등에서 중요한 쟁점은 리스크회피가 아니라 리스크분배이다. (예를 들어 핵에너지 대 오존구멍) 리스크 개념 정의와 그 사회적 결과를 둘ㄹ러싼 논쟁은 근봊거으로 공적 담론의 차원에서 과학적 논증과 정보의 도움을 받아 전개된다. 이 논증과 정보는 말하자면 집단적 행위자들의 희소한 게임자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루만은 리스크 갈등의 도식을 실마리로 삼아 논증을 전개한다. 경제적 보험 합리성의 체계적인 기준을 경시할 뿐 아니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위험사회는 보험을 통한 보호가 위험이 커지면서 줄어드는 그것도 모든 생활 영역을 아우르는 복지구구가와 자동차종합보험사회라르는 역사적 환경에서 안전장치가 풀린 사회이다.
2. 직선적 진보비관주의의 진부함
현대에 대한 심오하고 신랄한 비판자들은 대대로 손을 무릅에 얹고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중 양의성의 사회이론가의 지그문트 바우만은 다음과 같은 "위험사회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논평1. 가장 끔찍한 재난은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과거나 현재의 시도가 원이이 된 재난이다. 가장 무시무시한 재앙은 재앙에 대한 전쟁에서 발생하거나 아마 발생할 것이다. 위험은 우리의 힘과 더불어 커지고, 우리가 가장 갖고자 하는 힘은 재앙의 발생을 예측하고 그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논평2. "벡은 합리성이 하지 못한 일 대신 '성찰성'이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지하지 않았다" 바우만은 현대를 훨씬 더 직선적으로 생각한다. 예기치 못한 것에서 예상치 못한 것이 발생한다는 평범한 가능성은 안중에 없다.
* 사태 적법성
: 생산된 리스크가 예방국가에서 현재 유효한 계산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무효화하는 하는 순간
토목공학중 수문혹은 수리학에서 치수구조물들을 설계함에 있어 강우빈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치수라고 함은 홍수제어를 위한 구조물들 설치를 주로 예기하는데, 이들을 설계함에 있어 설계강우량이라는것이 설계인자로 기준이 됩니다. 그럼 설계강우량을 산정하는 방법은, 구조물의 규모나 예산 규모에 따라 50년 빈도 강우 100년빈도 강우 등을 기준으로 50년이나 100년에 한번 일어나는 홍수를 예측하고 계산합니다. 설계강우량 미만의 강우에서는 시설물이 제대로 동작치 않으면 설계오류 부터 부실시공까지 다양한 의심을 공학자들에게 보낼수 있습니다만. 설계강우량 이상의 홍수에서 무너지거나 작동치 않는 것은 공학자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죠. 발생한 사고들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설계되고, 운용된 상황에서 자연재해로 분류될 뿐이죠.
이미 최근의 기후변화상 강우 빈도, 무강우일수 등 모든 대부분의 공학자들이 설계인자를 설정하기 위한 과거의 통계데이터가 틀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에 대한 대비책은 아직 궁여지책 수준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은 아직은 모범적인 전례가 없습니다.
제7장 지식 또는 무지: '성찰적 현대화'의 두 관점
1. 출발점
-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무지와 함께 산다는 것이다. 즉, 위협과 무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역설과 딜레마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와 함께 생사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연성과 역경도 커진다. - 무지사회는 제1현대를 상징하는 ‘지식사회’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더 많고 훌륭한 과학에 의해 산출된다. - ‘지식’과 ‘진리’의 구분 (사회학적 의미) ․ 지식 : 기대와 사회적 특성 부여, 사회적 구성으로 이해 → 지식사회학자(무지사회학자)는 다양한 종류의 무지를 구분하고 체계화 (일시적 무지, 알고 싶지 않은 무지, 알고 있는 또는 모르는 불가지 등) - 무지가 침투해서 변화시키는 영역은 다양하다 (생활환경과 고통, 전문가 시스템, 통제 시스템, 주권, 국가 통치, 권리, 인간존엄에 대한 관념들) → 글로벌 위험사회 이론은 현대 세계에서 변함없는 기본 상수와 근본 개념, 근본 제도들을 그 뿌리부터 다시 생각할 것을 강요하고 또 이를 가능케 한다. - 생산된 무지는 보편적인 삶의 상황이 된다. (체르노빌 사건은 인간의 면역기능과 세포의 유전학적 구조를 파괴하고, 땅과 강 식물을 방사선으로 오염, 다양한 형태의 무지로 사회생활과 정치행위를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제도(전문가 시스템, 병원, 국가의 복지제도, 정당과 국민의 국가관)를 오염시켰다) - 자각적인 삶과 판단의 인류학적 전제조건인 의미와 상식의 박탈 (글로벌 위험사회의 근본 특징) → 그로 인해 인간 삶의 핵심이 위협받고, 인간은 판단력 박탈당함 → 이러한 상황에 대해 축적된 지식과 무지를 ‘통화’로 이용하여 통제하려는 관청과의 싸움에서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생존을 얻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 ‘진리’는 변한다. 한때 지식으로 인정되던 것이 무지로, 무지가 지식으로 자리 잡는다. 생물학적 개념 정의도 일부는 ‘기술적 진보’로 인해, 일부는 정치적 규정 때문에 변한다. 그렇게 되면 유전병 환자들이 갑자기 건강해지고, 건강한 사람들이 유전병을 앓는다. 비과학적인 지식과 무지, 의학적인 지식과 무지가 벌이는 전투대열에 따라 고통의 옛 기준들은의미와 효력을 잃는다. 늘 급격히 변하는 통계지식은 점점 더 분명히 무지의 지배를 받는다. - 정부와 당국은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에 관한 통제권을 요구하게 마련이고 또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학적 척도와 생화학적 카테고리 그리고 복지국가의 보상 요구 때문에 (어느 정도 인정한) 무지가 변화무쌍한 형태로 쏘아대는 폭격을 고스란히 맞는다. -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과 휴대폰, 화학물질의 일상적인 사용과 연관된 리스크를 기껏해야 확률 계산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산이 현실적인지, 소비자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할 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걱정을 해야 하는가? 적절한 염려와 행위를 마비시키는 불안과 히스테리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누가 그 경계를 정하는가? 과학자들인가? 그들의 결과는 어느 일정 시점에서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반대이기도 하는데? - 무지와 위협의 결합이라는 도식은 어디나 비슷하다. 무지가 작용하는 범위는 여기에서 질병의 발생에서 전염 경로와 감염 이후의 잠복기까지 이른다. 이 무지를 행동하지 않는 근거로 파악하느냐 또는 조기 예방 차원의 행위를 근거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안전히 상반된 세계관과 결론이 나올 수 있다. - 위험이 크면 클수록 무지도 커지고 결정도 필수적이 되는 한편 불가능해진다 (결정의 역설) <프레온 가스의 예> → 40년 이상 우리가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에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를 부여한다. 문제는 여기서 전통적인 ‘아직-알지-못함’이 아니라 알지 못한, 인식하지 못한 무지이다. 그리고 인류를 위협하는 ‘원인’으로 봐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알-수-없음’이다. 불가지(결정의 시점에서)를 다루고자 한다. -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어느 정도의 무지를 ‘누릴’ 수 있는가? 무지에 관한 추측과 무지에 관한 가설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하며’ 어떤 것이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할 수 있는가? 지식과 무지의 혼합과 통제, 우연의 혼합 가운데 어떤 것을 책임 있는 행위의 의미에서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쟁점으로 떠오르는 문제는 어떤 사회기구와 제도가 그런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되며, 이 경우 어떤 기준을 적용할 것인가이다. - 이 경우와 의도적 무지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알 카에다 테러리즘의 본질은 조직적인 무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테러 리스크, 더 정확하게는 다음 테럴 공격에 대한 무지를 조직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 비의도적 무지나 의도적인 무지 모두에 해당되는 사실은 통상적인 재앙은 보상할 수 있지만, 가능한 최악의 재앙은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재앙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보상원칙의 자리에 예방원칙이 등장한다. 그러나 보상이 사학적 가능성 예측과 확률 예측이라는 수공업적 기술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반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예방은 다소 허구적인 추측과 가설, 환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예방이란 경험에 의거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방원칙은 확률분석을 상대화하고 위험에 대한 환상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라는, 즉 의심스러운 가정이나 단순한 혐의점을 결정 근거로 삼으라는 요구를 함축한다. 즉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로인해 위험에서 새로운 위험이 발생한다. 재앙을 불러올 리스크에 대한 예방조치 그 자체가 재앙을 가져올 리스크를 방출하고, 후자가 결국에는 피할 수 있는 앞의 위험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예, 이라크 전쟁)
2. '성찰적 현대화' 관점
<출발점 : 제도적 성찰, 성찰적 공동체, 부작용> - ‘성찰성’의 개념 ◇ 기든스와 래시의 ‘성찰적’ 현대화는 우선 현대화의 토대와 결과, 문제점에 대한 지식(성찰)과 연관되어 있다. ↔ 벡의 성찰적 현대화는 현대화의 부작용에서 비롯 ◇ 기든스의 경우 현대화에 대한 반성(좁은 의미)을, 벡의 경우 현대화의 성찰성을 말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여 성찰성이 반성(지식)과 함께 무지 효과와 예방 효과로 이해되는 반사의 개념 포함) - 이 구분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부작용의 세기’라는 말은 절대적인 무지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지에만 의거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을 왜 알며, 왜 알지 못하는가? 지식과 무지는 어떻게 구성되고 인정받고 의문시되고 부정되고 주장되고 배제되는가? 즉 부작용의 사유체계는 성찰적 현대화의 지식이해와 모순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더 확장된, 더 복잡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그 안에는 지식의 다양한 형태와 구성들 외에 무지가 포함된다. (셋은 지식의 측면을 포함하지만, 기든스와 래시는 부작용과 무지의 의미를 배제한다) - ‘성찰적 현대화’는 후기 현대의 특징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후기 현대의 성격을 현대의 한계와 어려움에 관해 스스로 반성하는 시대로 규정한다. <기든스가 고안한 성찰적 현대화의 지식관> ◇ 사회가 현대적일수록 이 사회는 자신의 토대와 구조, 동역학, 갈등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을 생산 ◇ 사회가 스스로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하고 사용하면 할수록, 전통에 따른 행위 대신 지식에 의거하여 또 과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사회구조와 제도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 강해짐 ◇ 지식은 결정을 강요하고 행위 상황을 열어준다. 개인은 구조의 제약에서 풀려나지만 생산된 불확실성의 조건 아래에서 ‘성찰적 현대화’의 형식과 전략으로 자신의 행위상황을 새로 규정해야 한다. → 이 지식관의 문제점 : 불특정한 어느 지식과 의식, 반성, 의사소통, 자기관찰이 현대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전통사회에서도 있었다는 , 성찰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본 특징이다 - 여러 종류와 유형의 지식을 구분해서 성찰적 현대사회에 대한 진술을 특정 종류의 지식 및 반성과 결합한다. 기든스는 사회행위의 토대에 관한 과학적, 전문가적 지식과의 접촉을 ‘제도화한 성찰성’으로 표현한다. 권위를 부여받은 이 지식은 사회적 행동을 주어진 틀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맥락에 집어넣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적 행위구조와 행위 형태의 변화를 촉진하는 동력이다. (기든스 : p216 금융시장의 리스크는 성찰적이기 때문에 위험하고 복잡해진다. 내가 ‘생산된 불확실성’이라 부르는 것은 지식의 제한이 아니라 확장에 기인한다) - 제도 차원의 상호작용에서 ‘성찰적 지식 습득’이 지배적 현상이 되면 될수록 점점 더 하나의 지구 공동체로 변하는 세상에서 서로 얽힌 글로벌 관계는 그만큼 더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시스템의 자체 역동성과 인간의 영향력 간의 관계를 기든스는 ‘신뢰’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전통적인 사회질서에서 인간과 환경관계는 표준화된 태도와 행동규칙으로 결정되었고, 이는 ‘존재론적 안전’을 보장했다. 반면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기능 시스템이 기대를 충족하리라는 막연한 희망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이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는 지식이 감추어져 있다. 불안정성은 현대의 성찰적 역동성과 함께 커진다. (p217 기든스 : 신뢰는 우리가 믿는 사람이나 사물과의 직접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포괄한다. 신뢰가 효과적이려면 쌍방향적이어야 하고, 미래의 우연성에 대해 안전을 제공해야 한다. 신뢰는 쌍방향적이며 맹목적일 수 없다.) - 래시도 성찰적 현대화를 지식의 현대화와 지식의 내용, 형식의 분배․ 순환․ 소비․ 향상,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갈등 문제로 이해한다. 즉 지식의 현대화이다. 사회행위의 토대는 의문시되고, 다시 조작하고 다시 구성해야 할 대상이 된다. 기든스와 래시는 다양한 종류의 지식으로 인해 새로운 갈등이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칸트에 의거해 인지적, 도덕적, 미학적 성찰을 구분한다. 그의 초점은 ‘미학적 성찰’의 정서적 특수성에 맞추어져 있다. 미학적 성찰은 정서적, 인지적 또는 도덕적 요소로 축소될 수 없는 것으로서 ‘성찰적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래시는 이런 관점으로 기든스와 벡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즉 우리 사유의 밑바탕에는 인지주의적으로 축소된 성찰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속적인 개인화와 영미의 ‘문화이론’, ‘새로운 공동체주의’로의 경향을 배경으로 래시는 ‘성찰적 공동체’를 중심에 세운다. 이는 국제시장과 유동성, 소비 습관, 국지적 상징세계, 생활세계를 포함하고, 동시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즉 유동적이고 교환도 선택도 가능하지만 표준화된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 사회적, 개인적 글로벌 정체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 성찰적 현대화에 대한 벡의 차이는 지식이 아니라 다소 성찰적인 무지가 성찰적 현대화의 ‘매개 수단’이다. <부정으로서의 무지> - ‘무지’는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구체적일 수도 원칙적일 수도 있고,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 듣지 않고 보지 않고 고치 속에 틀어박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증상은 부정의 표현 양식이다. (알콜중독자, 부시, 무지를 외면하는 학자들) - 에런 빌다프스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가? 우리 시대의 거대한 환경 이슈와 안전 이슈에서 지식과 행위의 관계』 : 빌다프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환경보호’와 ‘건강위험’의 수많은 주제들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와 그것의 공개적(텔레비전, 신문) 서술들을 서로 비교, 분석한 후 이런 결과에 도달한다. 저자들은 자료 수집에서의 실수(한 출처만 제한)들을 입증하기도 하고, 다른 근거가 필요 없는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그저 단순히 추측한 경우를 제시하기도 한다. 리스크 연구는 산업행위의 ‘위험한 부작용’을 발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거기다 ‘적극적 시민’들의 편에서 적합한 정보를 수집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이 정보를 처리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가”라는 시사적인 질문에 대해 지식과 무지의 분명한 구분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들은 이런 구분이 전문가 합리성과 함께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연구소가 서로 다른 방법론적 관점에서 또다른 작업의 맥락에서 상호모순적인 위험 진단을 내놓기 때문에 전문가 지식이 어쩔 수 없이 (비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의문시하는 그런 형태에 대해 저자들이 묻는 것은 아니다. 무지를 언론매체나 ‘번역가’에 의한 전문가 지식의 위조로 본다면, 이런 무지는 무지의 한 차원에 불과하다. 빌다프스키가 가장 우려하는 문제는 리스크 계산에서 잘못된 확률을 의식적으로 외면할 경우 위험을 과대평가하거나 예방적인 리스크 회피 정책의 의미에서 모든 영역의 사회행위가 과잉 대응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예방원칙을 거부하고 환경보호 패러다임을 폐지하며, 더 미미한 효과를 낼 뿐인 사사한 원인을 규제하지 말자!” (가장 큰 오류가 전문가 영역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판자들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진보신앙 추종) - 많은 사회운동은 (주제와 사회적 상황을 정치화하겠다는 ‘좋은’ 의도에서) 부작용에 관한 대항 전문가 지식의 독단적 경향에 빠져 있다. 자신의 (리스크) 지식에 대한 확신 부족이 정치행위의 장애가 된다고 많은 활동가들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핵에너지와 핵폐기물 저장, 지구 온난화, 온실가스 효과와 같이 여론에 널리 알려진 리스크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하는 문제는 과학이나 기술, 행정제도에 대한 공공의 신뢰에 달려 있다. 제도적 정당성은 상당 부분 신뢰에 기초한다.” - 불가지는 행위의 면허장인가 또는 행위를 늦춰야 하거나 행위 중지, 아니면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인가? 어떻게 불가지를 통해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되는 당위성의 원칙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직선적인 그리고 비직선적인 지식이론들> - 무지의 분배와 방어에 근거하여 직선적, 비직선적 지식이론을 구분 ◇ 직선적 이론의 가정 : 무지는 성찰적 현대화와 관련 없다 (핵심적이지 않다) 비직선적 이론 : 무지의 종류와 구성, 결과는 성찰적 제2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핵심 ◇ 직선적 이론이 공식적 담당자들인 전문가 그룹과 지식 행위자들로 구성된 (다소) 폐쇄적인 서클에서 나오는 반면, 비직선적 이론은 지식 행위자들이 서로 갈등하고 경쟁하는 열린 장이 다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가 독점이나 기술 관료제적 결정 모델 vs 공담 모델 - 어떻게 참여자들의 합의하에 또는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허용규칙과 절차규칙이 정해지는 동시에 실행될 수 있는가의 문제) ◇ 직선성이란 일치된 전문가 지식을 뜻한다. 제한적으로 인정된, 허가받은 일정수의 행위자들이 연구소와 연구조직에서 일하고, 그에 따라 지식 생산과 인정, 실행 장소들이 드러내놓고 상호협력관계를 맺는다. 반면 비직선성이란 이견과 합리성, 토대를 둘러싼 갈등을 의미한다. 즉 지식행위자들과 지식동맹 집단이 각각 네트워크를 형성해 비협력적으로 대치한다. 이들은 대항전략을 가진 관철 기회 역시 제한적인 국지적 공론 영역에서 상반된 확실성과 상호배타적인 확실성(자연관과 인간관) 간의 갈등을 전개한다. ◇ 지식과 무지를 구분하고 분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 집단, 권위, 독점, 자원(연구소, 연구비 등)과 그것을 문제시하는 사람들 사이의 권력 k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작용’이란 말은 동질적인 전문가 서클이 아직은 다른 지식 행위자들과 지식 형태를 무지로 폄하하여 지배할 수 있는 갈등 단계를 암시한다. 상대를 배제할 수 없을 때, 직선적 현대화는 끝나고, 비적선적 현대화(벡의 성찰적 현대화)가 시작된다. ◇ 그 척도는 행위자의 연결망, 문제 제기, 방법, 주요 가설, 시나리오, 리스크, 위험을 판정하고 평가하는데, 한편은 폐쇄적이고 일치되었으며, 다른 한편은 개방적이고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한편으로 모든 사람에게 무지 문제(불가지와 알려고 하지 않는 것 모두)를 억지로 파헤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 스스로 ‘남의 지식’에 마음을 열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일원적 합리성의 토대가 붕괴 (오늘날에도 일원적 합리성의 체계이론의 모습으로 여전히 높은 평판을 누린다) - 자시 자신의 불가지에 대한 질문과 남의 합리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 이 두가지가 제2의 현대로 넘어가는 길목의 표지이다. <무지의 유형> ① 신빙성의 사다리에서 무지였다가 지식으로 올라간 선별적 추측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지식 의제에 대한논의가 시작되었다 ② 선별적 추측과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를 구분 ③ 이 선별적 추측과 성찰적 무지의 구분 ④ 불가지를 아는 지식 (현대 불확실성의 논쟁거리) ⑤ 의식적으로 외면한 또는 알지 못하는 무지는 자신의 한계를 반성하지 않는 지식의 제한된 지평을 가리킴 ⑥ 불가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 - 부작용의 지식 형태에는 지식과 무지가 특정 형태로 조합되어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보지 못한, 보이지 않는 부작용이 자기위협의 계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한다는 사실을 안다. 부작용은 행위, 즉 주체와 책략, 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실천을 앞당긴다. 부작용에 대한 무지는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존 행위에 제동을 거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부작용을 모르기 때문에 부작용이 커지는, 이른바 역설적인 상승효과라는 가정이 부작용에 대한 원칙적인 지식 속에 들어 있다. - 부작용이란 개념은 무지를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자기위협이 강화로 인식하는 역설적인 (무지) 지식 형태를 뜻한다. 물론 그에 관한 지식이 있고 이 지식에 대한 믿음이,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서 이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든 상관없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그렇다. 사회운동이 가진, 또 과학의 자극을 받은 공론 영역이 가진 개념 정의 대항권력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산업의 자기위협에 대한 믿음을 얻은 지식이 강하게 부정되면 될수록 (알려고하지않는 무지 뒤에서 자라는) ‘실제의’ 위험 잠재력은 더 위협적으로 된다. 예컨대 기후변화는 우리가 그것을 부인한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산업의 부작용에 관한 지식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은 인식한 위협과 실제 위협을 구분하게 해주거나 강요한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구분은 생산된 위험 ‘자체’, 즉 생산된 위험의 ‘객관적’ 세계에 토대를 이룬다. 이 세계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 지식과 무관한,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위협을 사회적으로 구성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인해 그 자체만으로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위협의 사회성은 의도적인 연구조사와 적절한 지표들을 필요로 한다. 즉, ‘객관적인’ 위협지표와 파괴지표의 사회구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벡은 두가지 관점을 제기한다. 자기위협의 ‘객관적’ 지표는 사회행위자들의 상호비판과 연관된다. 벡은 기존의 전문가 합리성이 서로 모순되는 곳에 위협지표의 제도적-구성주의적 객관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추측한다. (예, 사적 보험원칙)
제8장 보험원칙: 비판과 반(反)비판
1. 무지와 드라마, 사회학
· 울리히 벡은 뒤렌마트의 희곡인 <물리학자들>(1962)이 글로벌 위험사회의 핵심 명제를 선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 “최악의 반전은 미리 예측할 수 없고 우연히 나타난다.”
-> 글로벌 위험사회의 '이야기‘의 경우 우리는 그 결말까지 생각해야 한다. 최악의 반전까지도 예상하려고 시도할 때 끝까지 생각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악의 반전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사회학자들은 최악의 반전을 서로 다르게 혹은 종종 반대로 예측하면서- 그것이 사람들의 행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서술해야만 한다.
- “사람들이 일을 계획적으로 처리하면 할수록 그들은 사실상 더욱 더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
-> 글로벌 위험사회 이론의 핵심 명제가 이것이다. 예측된(예언된) 불행을 통제/관리하려는 철저한 계획이 오히려 그 불행을 완성시킨다(오이디푸스).
- “물리학의 내용은 물리학자의 문제이지만, 그 영향은 모든 인간의 문제(가 된다)이다.”
-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힘을 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 이것이 세계주의 현실 정치의 원칙이다.
2. 보험원칙: 비판점
·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드러나는 위험을 제1현대의 눈으로만 보면 그것은 비용대비 이익 분석이나 혹은 기업체와 경제, 과학, 기술에서의 통제 가능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줄일 수 있는 ‘잔여 리스크’만으로 인식된다(합리적 결정에 따른 통제 가능한 부작용). 하지만 제2현대의 눈을 통해 관찰하게 되면 이 새로운 불확실성과 위험은 제도적 권위의 정당성을 빼앗는 것이 되며, 또한 과학적 합리성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 울리히 벡이 통제할 수 있는 불확실성에서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석으로 포착한 것이 ‘보험원칙’이다.
-> 벡은 새로운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한 적절한 보험이 없다는 점을 제2현대의 통제할 수 없는 위험사회로 진입했다는 제도적 지표로 삼는다.
- 정치가들과 기술자들은 리스크 제로 위에 보험을 설계하지만, 실제로는 위험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적 보험을 통한 보호가 줄어든다.
- 이미 우리는 9·11 테러와 같이 예측하지 못했던 위험들에 대한 사적 보험의 무기력을 보았다. 사적 보험산업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재앙에 대해서는 국가의 연대보증에 의존한다.
3. 반대 질문과 반(反)비판
· 우리가 든 보험은 테러 리스크에 대한 것이 아니다. 보험은 예측가능한 사고/재앙만을 보장한다. 또한 그 재앙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면 보험으로 보장될 수 없다(의도된 사고를 보험은 인정하지 않는다).
- 테러 리스크의 경우 재앙의 규모는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야 겨우 가늠할 수 있다. 즉 테러에 대한 보험을 설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합리적으로 대처 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 논쟁의 여지가 있고, 이견이 많다는 것 자체가 리스크(통제/관리 될 수 없음의 반증)이다. 하지만 보험업자과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조직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완벽하고 합리적이고 성공을 보장하는 리스크 전략의 적용이 오히려 2차 리스크를 산출한다. 금융시장에서 과학/기술적으로 엄밀하게 공식화된 모델이 오히려 자신의 파괴를 낳았다. 금융 리스크를 수량화하여 이를 관리/개선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시장의 급소를 찔렀다.
-> 테러의 경우이든, 금융시장의 경우이든 사적 보험이 실패하는 지점에는 국가가 최종 재보험업자로 호출된다. 사적 보험은 전략적 리스크를 국가에 전가한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보험과 국가권력을 약화시키면서도 또한 강화시키는 측면이 여기에 있다.
- 현대화의 결과에 대한 불안을 덜어준 보험원칙은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무력해진다. 모든 개인이나 인류는 모든 일에 보험을 들 수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보험이 아니게 된다.
- 리스크는 식품의 유해물질과 같은 미시 영역에서부터 기후재앙, 핵오염 따위의 거시 영역에 이르기 까지 팽창하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영역과 구분을 관통한다.
-> 리스크는 재앙을 당한 소수의 희생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리스크는 희생자 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의 삶 자체에 문제를 일으킨다. 리스크는 인간 존재의 재생산조건을 변화시킨다.
- 리스크와 보험이 일치하여 확장하던 시대는 피해사건을 개인화할 수 있다는 원칙에 근거했다. 그러나 글로벌 위험사회의 리스크는 개인화 원칙을 조롱한다. 피해 예측은 전체 사회 및 지역과 연관되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까지도 포함한다.
-> 사적 보험을 통한 보호나 국가의 보장은 기후변화의 결과나 세계경제위기에서 드러나는 글로벌 리스크 앞에 무력하다.
제9장 체감 전쟁, 체감 평화: 폭력 연출
두가지 주제 하나. 리스크 대립 그리고 다른 사람이 관여한 리스크의 피해로 고통당하는 집단과 주민, 결정자의 차이 예) 간접흡연자 리스크 사례 둘. 국제적인 개념정의의 권력관계가 전 세계로 현실감 있게 연출하는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 리스크 전쟁
1. 리스크 대립 근거는 이미 그 논리에 들어 있다
리스크와 사회 불평등, 리스크와 지배, 리스크와 권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비대칭성은 차후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리스크의 본질이다. 리스크는 구체적이지 않아서, 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없다. 따라서 시각에 따라 리스크 혹은 위험이라 진단할 수 있다. (문맥상 위험은 리스크보다 정도가 약한 의미로 해석된다. risk vs danger) 리스크는 결정, 즉 결정자를 전제한다. 그래서 리스크는 극장적 비대칭을 연출한다. 리스크 개념을 정의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사람이 한편에 있고, 결정으로 부터 배제되어 리스크의 보지 못한 부작용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다른편에 있다. 리스크와 불평등의 결합은 이런한 분열에 기인한다. 종종 위험을 공간적으로 다른 나라로 수출하거나 시간적으로 미래세대에게로 수출한다. 이를 위해선 국경을 없애면 안된다. 오히려 이 사업은 국경이 있어야 가능하다. 폐기물, 위험한 생산품이나 이론이 분분한 연구등은 임금수준, 권익보호, 윤리수준이 낮은 국가들에게 전가된다. (장하준의 전세계의 인건비 차이가 비교우위론을 만들어 내지만 이는 결국 노동자의 이민을 초래하게 된다. 이는 국경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판단된다) 리스크를 인지하지 않거나 인지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인간 존재에게 대안이 없다는 점과 함께 증가한다. 사람들은 리스크를 인지하지 않거나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으로 전가한다. 특정 나라에서 리스크를 수용한다고 해서 이에 동의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그들의 침묵과 은폐는 궁핍에서 나온다. 받아들여진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리스크는 그 개념의 논리상 평등과 정의 합의의 부정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정당하고 불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리스크 개념정의 관계와 개념 정의 수단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수 있다. 리스크가 성찰적 현대화의 불가피한 구조조건이라면 ‘리스크프로필' 에 대한 전문가 견해와 공적 담론의 ‘수학적 도덕성'에 체계적 비판을 가해야 한다. 확율과 강도 범위의 곱으로 리스크를 표현할 수 없다. 모든 행위자가 모두 리스크의 성찰성으로 부터 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리스크 갈등의 자체 완화로서의 다원화
루만은 동일한 논증 형태의 선상에서 리스크의 구조적 - 이분적 갈등 역할을 예방하기 위해 리스크 논리에 내재한 반대 경향과 반대 논점을 끌어냈다. 첫째, 리스크 갈등의 다원화 둘째, 리스크 갈등의 보편화
흡연자와 비 흡연자의 이분화
개인화와 익명화. 담배를 피우거나 피우지 않거나 하는 문제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결정처럼 보였다. 리스크 대립. 이 대립은 자기 위협에서 외부 위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이 전환과정은 행동의 객관적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의 사회적 연출에서 드러난다. 행동은 흡연과 비흡연으로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인지하고 평가하면 처리하는 방식이 급격하게 변한다. 개념정의 관계. 언론매체를 포함해 사방에서 눈을 부릅뜨고 리스크를 예의 주시하는 상황에서 어떤 특정 링스크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진행되다가 갑작이 ‘심각한 문제'로 지목되고 온갖 비상벨이 울어대는 상황이 될 정도로 커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치전도. 리스크 갈등이 있으려면 먼저 리스크 개념 정의와 리스크 재분배에 관한 다수의 논증 기술이 있어야 하고, 반대로 리스크 갈등은 이런 기술이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흡연자는 갑작이 자신의 건강뿐아니라, 다른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부유한자와 가난한자, 키 큰자와 키 작은자, 흑인과 백인은 ‘흡연자’와 ‘비흡연자' 라는 카테고리로 결집되고모든 사회적 경계를 넘어 양립된 집단은 화해하기 힘들고, 양립할수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대치한다.
2. 리스크 전쟁 또는 글로벌 위험사회에서의 조직적 폭력 연출
전쟁의 변형과 다원화
정당성 문제
평화로운 전쟁
가상전쟁
세계주의적 공론영역
3. 테러 리스크: 체감 전쟁의 글로벌 연출
취약성
테러리스크의 세계화
군사적 명법
영상과 이야기들
제10장 글로벌 불평등과 지역적 취약성: 생태학적 위험의 갈등역학은 방법론적 세계주의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연구될 수 있다
<내부 세계위험으로서의 환경위험>
- 글로벌 환경위험은 결정이 사회적 장소와 책임이 다른 ‘낯선’ 주민들을 잠재적인 신체적·사회적 피해 대상으로 만드는 장소, 시점과 분리되는 현상을 먼저 전제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반대로 글로벌 환경위험은 이를 계속 진행시킨다. 다시 말해 글로벌 리스크 인지는 세계주의적 시각을 요구한다. 세계주의적 시각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일상생활이 익숙한 사고들을 대하면서 이를 과거에 겪지 못했거나 드물게 경험한 재앙에 비유적으로 대입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경우 이런 재앙은 기술적 시뮬레이션과 이에 상응하는 시나리오를 통해 그 ‘가능 현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재현되어야 한다. - 그런데 글로벌 생태학적 위험의 경우 그것의 비가시성과 결정, 부작용의 시간·공간적 (분리)연결을 집단적 인식의 가시권 안으로 넣는 것도 바로 과학적 진보이다. - 위험이 던지는 문제들이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더 포착하기 힘들어진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루어지는 복잡한 상호작용, 특히 파악하기 힘든 것은 글로벌 원천과 역동성, 효과들(오존층 파괴, 기후변화, 지구 온난화 등)이다. - 사회적 잠복성은 부분적으로 이런 리스크에 눈감는 ‘문화적 맹목성’의 결과이며, 부분적으로는 리스크의 불가해성과 오로지 과학적인 체질의 결과이다. ‘잠재적 부작용’의 구성은 부작용의 관리가 정치제도와 정치행위의 국민국가적 시각과 국민국가적 논리, 충돌하는 현상과 관계있다. - WTO 회합 때마다 사회운동 시위대가 일으키는 정치적 소용돌이는 무역과 금융, 자원분배를 쥐락펴락하는 국제체제가 글로벌 리스크의 분배에서도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심지어 국제적 리스크 관리는 국민국가의 리스크 정치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민국가 구조의 약화와 글로벌 시민사회의 초국가적 NGO들의 강화는 이런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다. - 이런 맥락에서 세계주의의 책임과 귀책 판단의 범위, 규범에 관한 핵심적 질문이 하나의 결정체로 나타난다. → 앤드루 링클래터는 ‘코스모폴리탄 피해조약’을 말한다.(피해와 파괴를 가할 경우 국경을 넘어 고발하고 처벌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가 간의 협상과 조약) - 글로벌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고, 그것을 사회과학적 이론 형성과 연구의 역사적 검증기관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사회학적 이론의 새로운 의제를 창조해 내야 한다. ① 사회를 국민국가로부터 떼어내고 ② 사회는 어떤 사람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며 ③ 현대화는 기능적 분화의 자기보존 과정이 아니라 자기해체와 자기위협, 자기변신의 씨앗과 국민국가적·산업사회적 기본 제도의 자기 갱신의 씨앗을 함께 품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 ④ 글로벌 리스크와 관련하여 결정하는 집단과 부작용 집단이 시간적·공간적·사회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논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유형 1 : 방법론적 국가주의>
- 방법론적 국가주의는 이중적 일치-가정에 기반을 둔다. ① 영토상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경계가 일치한다고 가정 ② 행위자 시각과 사회과학적 관찰자 시각이 일치한다고 가정 → 행위자들의 규범적-정치적 국가주의의 전제가 별다른 성찰 없이 사회과학적 관찰자 시각의 전제로 변한다. 이 두 일치-가정은 서로를 강화한다. - 생산자의 맥락과 피해자의 맥락이 공간적으로 분리되고 또 사회학의 방법론적 국가주의 시각에서 이런 점이 이중으로 일어나면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경계를 넘어서까지 불평등한 리스크 축적 현상이 심화되는 결과가 나타남. 방법론적 국가주의에 사로잡혀 국가의 맥락에만 중점을 두는 사람은 위험 피해자를 구분해야 함에도 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즉 국민국가 안에서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피해자도 있지만, 다른 한편 어떤 결정의 결과가 자신들의 건강을 해치는데 그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피해자가 있는데도 말이다. - 국가를 넘어서는 위협의 경우에 책임과 사회정이, 불신, 뿌리 깊은 문화적 편견들이 서로 충돌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에 사회학의 방법론적 국가주의는 눈감는다. - 방법론적 국가주의는 그 반대로 글로벌 리스크의 개인화로 인도하거나 오도한다.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개인은 ‘자신을 경영하는 도덕적 기업가’가 되고, 따라서 문명의 운명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새로운 ‘범주적 명법’이 생겨난다. 세계의 운명이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라. 쓰레기를 분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태양 에너지를 사용하라 등등. 개인은 글로벌 위험에 대해서도 개인화와 자기책임의 저주를 받았다. 설령 그가 결정의 맥락에서 차단되었다 하더라도, 그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유형 2 : 국제적 리스크 불평등과 위험 불평등의 위계질서> - 양 국가적 상황에 초점
- 국내에서 발생한 자기위협이 책임 소재 관련도식에서는 개인화가 가능하다. 그에 반해 국경을 넘어 발생하는 외부 위협은 위험을 인지하고 책임을 따지는 문제에서 틀이 박힌 집단적 고정관념에 순종하고, ‘우리 대 남’의 대립을 따른다. - 국가적 희생자의 공간에서 문제의 극적 과장이 일어나는 반면, 국가적 결정자의 공간에서 문제는 축소된다. 리스크의 결정자 지역에 중대한 리스크가 주어지지만, 위험한 결과는 다른 국가로 전가되면 위험을 피하고 예방할 수 있는 자원도 그에 따라 국가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수출 국가의 경영자들은 부족한 자원을 리스크 통제나 리스크 극소화에 ‘낭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국 여론은 국내 여론이 관계로 다른 국가의 위험 민감성을 과소평가 - 체르노빌 핵발전소 재앙과 우크라이나의 독립 과정
<유형 3 : 리스크 개념 정의와 리스크 분배의 초국가적 행위자 - 네트워크>
- 국가 간 협력을 통해 이것과 저것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이것-아니면 저것이라는 국가적 양자택일을 확대하고 의문시하는 삶의 리스크 상황과 행위공간들을 ‘초국가적’이라 부른다. - 접근논리 : ‘글로벌’ 환경변화와 생태학적 위기에 관한 일반적 분석과 진술은 어느 특정 맥락과 지역에서 일어나는 환경피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특히 사회적 취약성을 간과한다. 이 취약성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지역적 시각뿐이다. - 비교 지역 연구 : p302<도표4> : 방법론적 지역주의(초국가주의)에서도 지역들 간의 결합 그리고 지역과 글로벌 경제, 글로벌 리스크와의 결합이 특정 맥락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또 그에 상응하는 인과관계와 가능한 책임 문제는 어떤 것인가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리스크 분배가 이루어지고 이 문제를 다루는 글로벌 제도와 국제제도, 국가제도가 존재하는 초국가적 공간에서 결정자 지역과 위험 지역의 맥락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관될 수 있고 연관되어야 하는가는 지역적으로 제한된 초국가성 안에서는 제기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 사스의 리스크 -네트워크 분석 : 국민국가를 초월한 협조는 국가나 지역의 리스크 관리를 성공으로 이끄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지역의 자율성과 국가주권을 고집하지 않는 대신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함으로써 능력들이 모이는데, 이는 전 세계를 멀리 돌고 돌아 결국 지역 문제 해결의 지름길을 발견
<유형 4 : 글로벌 리스크의 세계주의적 불평등>
- 보편주의를 근거로 극단적인 세계 불평등 문제와 씨름하는 사람은 일련의 절망적 상황과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세계주의적’이라 불리는 규범들, 즉 잠재적 피해자인 타국 사람들을 자신의 결정에 참여시키는 것은 국가의 지배적 자화상과 배치되고 집단적 몰이해에 부딪친다. · 국경을 넘어서까지 호혜적·법적 의무를 진다는 세계주의적 관점은 이 세상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심연, 중심부의 결정자 국가와 이른바 제3세계의 희생자 국가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이다. · 제3세계가 자신들의 희생자 지위를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글로벌 위험사회를 주눅들게 만드는 역설 가운데 하나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착취의 공범자가 된다. 반대로 ‘잘난 척하는’ 세계주의자들은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계 지역의 변호인인 척 해야된다. - 규범적·정치적 세계주의와 방법론적 세계주의의 차이 상기 ① 사회적 취약성 - 리스크와 사회적 취약성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은 리스크를 부산물로 보는 이론적 관점에 익숙한 지혜이다. - 사회적 과정과 관계는 리스크에 노출되는 정도가 달라지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비롯된 불평등은 국가 내에서나 글로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의 표현이며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 사회적 취약성은 개인과 공동체, 전체 주민이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자신들의 삶에서 해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과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는 총괄 개념이다. - 사회학적으로 이해한 취약성은 확실한 미래 관련성을 갖지만, 과거와도 심층적 관계를 유지한다. 예컨대 과거의 식민지 경험에서 기인한 ‘문화적 상처’는 세계주의적 리스크 갈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 선택항목이 하찮으면 하찮을수록 어느 특정 집단이나 주민의 취약성은 더 커진다. - 빈곤의 원천은 어떤 사회단위가 다른 사회단위와 맺는 관계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이 관계를 추적하면, 빈곤한 주민이 거주하는 지리적 장소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비판적 이론은 인과고리나 원인의 네트워크를 찾고, 부작용을 사회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은폐되는 연결고리들을 밝혀낸다. - 따라서 ‘사회적 취약성’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할 수 없으며, 세계주의적 시각에서 방법론적으로 도출된다. - 맨 먼저 위험에 빠진 단위 선택 → 위험 맥락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는가와 경계를 넘어 결정자 맥락까지 추적할 수 있는가를 묻고 탐구/ 즉 “단계-교차-상호작용”의 동역학이 시야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한 단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은 다른 단계의 현상에 영향을 끼친다. 이런 의미에서 환경파괴와 법적 제도, 정치권 권위의 경계가 와해된다는 것은 취약성 분석에서 핵심 관점이 된다. - 구조 정치적 권위는 리스크 결정의 결정구조 및 여기서 비롯된 취약성과 모순에 빠지고, 그러므로 국경을 넘어 상처받기 쉬운 주민과 장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명한 사실 - 국가나 글로벌 경영 기업들은 그들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특정 지역이나 주민집단의 자연적 생활근거가 훼손되거나 파괴된다는 공개적 비난을 면하거나 반박하기가 어려워진다. - 다양한 환경법적 합의와 협약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립서비스 차원의 고백을 행동에 옮기라고 강요한 기관이 없기 때문에 책임부족, 귀책근거 부족이 지배적이다. 이와 같은 정당성의 진공 상태에서 네트워크를 구축한 집단과 소집단들, 또 글로벌 시민사회에서 깃발을 높이 든 기수들의 활동과 전략이 개념 정의 권력과 연출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권력의 기반은 특히 이 단체들이 관철시킨 세계주의적 요구이다. - 이런 세계주의는 아래에서도 나오는 동시에 위에서도 나온다. 아래에서 나온다는 것은 세계주의가 풀뿌리 운동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 때문이고, 위에서 나온다는 것은 세계주의가 중심부의 경제적·군사적 개념정의 권력을 가지고 희생자 지역에 나타나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주의는 자신이 비판 대상이 되었음을 깨닫고, 잠재적 부작용에 대항해 예방규범과 예방협약을 관철하겠다는 목표를 내건다. 활동초점을 국가와 기업이 행위의 결과에 실질적인 책임을 지도록 맞추고, 실질적인 또는 잠재적인 피해자에게 이런 종류의 외부 피해나 외부 위협을 공론화하고 상응하는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데 맞춘다. - NGO 공동체 내부에서도 이런 세계주의에 유럽 중심적 편파성의 책임을 물으려는 비판적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린피스의 정책과 유럽의 친생태주의 정부들의 국가 정책이 일치한다는 사실에서도 ‘유럽 중심적 세계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국가와 NGO가 서로의 정책을 예상하기도 한다. 결국 새로운 종류의 초국적 협력주의가 세계주의 기치아래 발생) 기후변화의 연출법을 몸에 익힌 자들과 기후변화로 인해 자연적·사회적 생활조건을 가장 심하게 훼손당한 자들 사이에 참여의 비대칭이 발생. 이른바 ‘아래에서의’ 세계주의 안에서도 ‘위에서 아래로의 명령 하달’ 정책이 형성 - 방법론적 세계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제 서서히 꼴을 갖추기 시작하는 연구 의제 ② 성찰적 글로벌 특성 : 글로벌 리스크와 결과의 공론 영역 - 장기적 효과는 국경을 넘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처음 발화되어 (갈등→통합을 거친 후) 초국가적 리스크 공동체가 확립되고, 결과에 대한 공론 영역은 글로벌 위험사회의 ‘비자발적 세계주의화’로 이어진다. - 글로벌 리스크는 양의적이다. 한편으로 글로벌 리스크는 글로벌 특성의 중요한 매체이며, 다른 한편으로 서구 현대와 다른 현대를 구별하는 동기와 근거가 된다. 이는 지역적으로 출발점이 다른 상태, 즉 일부는 제1현대를 이미 마친 상태, 일부는 진행중이고 또다른 일부는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제2현대가 세계화되고 거기서 나타난 불확실성이 서로 중첩되는 역사적 상황이 발생하면서 생겨나는 필연적 결과이다. 국경을 넘어 모두가 “서로 겹치는 새로운 운명 공동체”가 된 상황에서 현대의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의견불일치는 세계 공론 영역의 담론이 탄생하는 모태가 된다. 이 담론은 서로 연결망을 구축한 행위를 요구한다. - 글로벌 특성 자체가 저절로 글로벌 또는 지구적 의식을 가진 공동체를 장려하지는 않는다. 글로벌 특성의 일상적 경험공간의 출처나 본질은 정보기술을 통한 연결망 구축, 금융 흐름이나 자연 위기 같은 문명적 행위에서 비롯된 글로벌 위험의 긴박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결과들이 협력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이러한 압력이 세계를 압박하여 자기 필요에 의한 공동체로 만든다. 즉 공론 영역과 글로벌 특성 간의 상호관계를 장려하는 것은 글로벌 위험사회의 성찰성이다. 지구가 위험하다는 규정이 구성되고 국경을 넘어 모두가 이를 인정하면서 공동의 책임공간과 행위공간이 만들어진다. 이 경우는 모두가 위태로운 상황에 대한 개념 정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글로벌 규범과 협약, 공동행위로 이어질 때이다. 어려운 일이다!!! - 그러나 글로벌 담론의 지평과 거기서 나오는 정당성의 압력이 이미 형성 중에 있음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제도화되기 전에 항상 글로벌 규범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감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태에 대한 분노에서 생겨난다. - 지역적 취약성을 논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는 필연성은 (서구의) 리스크 지각과 (비서구의) 위험지각, 위험의 귀책 문제 간 정치적·문화적 대결이 어떤 새로운 규칙과 제도로 귀결되는가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새로운 복잡한 리스크가 분명히 어떤 지역만의 문제라고 확인될 수 있는 개연성은 없다. 즉 방법론적 지역주의로는 불충분하고, 방법론적 세계주의를 통해 새로운 갈등전선이 어느 정도까지 지리적 구분을 무력화하는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자기위협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로>
- 글로벌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연구전략상 장점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리스크와 위기, 위협적 상황은 글로벌 특성을 점점 더 의식하는 원동력이 된다. 즉 특정 위험을 전 세계가 인지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새로운 ‘운명 공동체’와 초국가적 정치행위에 대한 압력이 발생한다. 다른 한편 피해 정도와 피해에 대한 취약성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은 리스크 갈등이 불붙는 발화점이며, 이 갈등은 전 세계적 합의 도출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 - 글로벌 위험사회는 자기위협과 외부위협의 이분법적 귀책 모델을 누구에게나 위협이 되는 상황의 예상으로 대체한다. 이때 책임소재는 밝혀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으나 이는 사후 확인일 뿐, 예방이나 피해 복구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초국가적 정치를 위한 협력 기회가 바로 여기에서 열린다. 글로벌 리스크의 인지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치행위자들은 ‘인식론적 권위’를 통한 위험 흡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 지식이 나아갈 방향의 기준점이 되면서 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행위자들도 초국가적 정치과정에 편입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지식이 모두 과학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국가적 체제가 형성되면서 사적 행위자들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 환경분야에서 NGO들이 정치과정에서 편입되는 현상이 병행해서 일어난다. - 이런 발전 경향을 고려하기 위해 국제체제의 구상은 초국가적 체제형태의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비국가 행위자들의 ‘하위 정치’도 거기에 포함된다. 국가 행위자들과 비국가 행위자들이 수평적·수직적으로 제도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야만 비로소 이런 체제가 구축될 수 있다. - 글로벌 리스크와 대치하면서 국민국가의 이해관계와 비중을 중시하는 상대적으로 명료한 국제정치 시스템의 자리를 글로벌 거버넌스의 (무)질서가 차지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초국가적 NGO와 인식론적 공동체와 더불어 국가는 글로벌 자기조종이라는 비체계의 한 요소를 구성할 뿐이다.
제11장 글로벌 위험사회의 비판이론
1. 글로벌 위험사회의 규범적 지평: 규범적 세계주의와 서술적 세계주의
* 리스크의 범주와 그 양의성 · 리스크라는 범주는 사회학적 정교함을 허물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 어떤 집단이 리스크가 되면 이 집단의 다른 특성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리스크’만으로 규정된다. - 정교한 고전적 구분은 더 위험하다와 덜 위험하다로 정리된다. 리스크의 지평에서는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은 없고, 더 위험하거나 덜 위험한 사람들만 있다. · 리스크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 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따라서 리스크는 암시로 가득한 애매한 삶을 영위한다. - 리스크는 어디나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그렇게 예방정치에 근거를 제공한다. · 리스크는 글로벌 책임공간을 연다 - 리스크는 ‘강요된 세계주의’와 다양성, 다원성의 ‘접합체’를 산출한다. 따라서 리스크는 원칙적으로 타자를 고민하게 하고, 타자에게 어떤 ‘부차적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묻는다. · 리스크와 타자 - 글로벌 리스크 공론 영역의 테두리 안에서 타자들이 등장하고 대변되는 방식은 세계의 도덕성을 형성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연출을 통해 실질적·잠재적 재앙이나 전쟁을 경험하는 방식은 우리의 핵심적 경험이 되었다. - 목소리의 다원성에 대한 의미 지평을 서로 개방하려면 의사소통의 권리(하버마스)뿐만 아니라 이해받는 권리(허스번드)도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에만 자기 삶 속에 타자를 포함시킬 수 있고, 세계주의적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 글로벌 위험은 도덕 수입으로 이어지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우리를 일깨우고 새로운 입장과 시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객관성과 진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제도의 주장은 무력해진다. - 글로벌 리스크는 다른 것과 타자, 국경에 상관없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자기 삶 속에 통합함으로써 자기 삶의 지평을 확장한다. · 도덕 수입 비판에 대하여 - 케빈 로빈스: “화면은 평범한 시청자들을 거친 현실에 노출하지만, 그런 현실에서 냉혹함을 빼앗는다. 그로 인해 도덕적 무게가 없어진다. 화면은 책임을 촉구하지 않은 채 센세이션을 제공하며 우리를 스펙터클한 구경거리에 몰입시키지만, 그 복잡다기한 현실과 대결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 벡은 케빈이 ‘충격과 유일성, 진정성을 연출함으로써 거리는 사라지고 가까움이 생겨나는데, 이는 국경을 넘어 윤리 입장을 취해달라고 요구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벡은 “이 세상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이 위험에 빠져 있고, 그들도 주체로서 위험에 빠진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나 그들이 지원과 동정, 경청, 이해에 대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리스크 세계시민권: 이것은 손님 환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리스크 결정으로 피해를 입은 ‘부작용의 산증인’들이 결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법적 표현이다. -> 리스크 세계시민권은 도덕적·정치적 공동체의 경계를 새로 규정할 때, 다시 말해 타자와 이방인, 아웃사이더들의 생존과 존엄을 위협하거나 손상시키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그들을 동참시킬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 글로벌 위험사회 이론 ·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와 생산된 불확실성은 현대의 승리에서 비롯되며, 21세기 벽두에 인간조건의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재앙을 불러올 리스크와 대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 글로벌 리스크는 무한한 수의 행위자들을, 함께 일하고 싶지 않고 다른 정치 목표를 추구하며 심지어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을 강제로 징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현실과 그에 대한 인식이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를 위한 돌파구가 되어 줄 것이다.
* 역사적으로 새로운 특성을 지닌 글로벌 위험사회 · 사회학은 너무 전문화되고, 너무 추상적이며, 방법론과 테크닉만 편애함으로써 역사적 차원에 대한 시각을 잃었다. - 자기 잘못으로 인한 사회학의 편협성과 역사적 미성숙을 비판하고, 그것이 선명해 질 때 글로벌 위험사회가 역사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사회학은 위험과 불확실성이 지나간 과거 시대와는 달리 현대화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나타나는 결과이며, 인간의 결정에 따른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 제도적 모순이론 - 글로벌 현대화의 위험은 과학이나 경제 또는 정치 영역 중 어느 한 영역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부분 시스템들의 합동 작품이다. 현 사회와 그 부분 시스템들은 스스로 산출한 긴박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 문명의 꽃을 활짝 피운 현대가 과학수단과 대중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의 지원을 받아 스스로 산출한 메가 위험을 어쩔 수 없이 논의 중심에 세울 수밖에 없다는 데 현대사회의 핵심 모순이 들어 있다. -> 복잡한 리스크를 관리하고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추상 개념과 모델을 이용해야 할 필요성을 낳고 추상 개념과 모델은 다시금 새로운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바로 여기에 제도적 모순이 들어 있다. · 책임지는 현대에 대한 의문 - 극단적 형태로 재앙이 반복되고, 이로서 사람들이 재앙을 끊임없기 걱정하고 예상할수록 사회의 자기비판의 강도는 강해진다. 이는 공론 영역에서 더욱더 가시화되고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게 만든다. · 리스크와 개인 - 글로벌 위험사회의 잔여 리스크 수용자는 결국 개인이다. 리스크를 가속화하고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 정부 정책 차원에서나 시장에서 제도적 위기를 유발하는 모든 것은 결정의 궁극적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 리스크 대립 · 글로벌 위험사회의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물음에서는 리스크의 분배도 중요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리스크인가가 더 중요하다. - 리스크는 누구에게 무엇인가?- 특히, 그가 감수한 리스크의 위험성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는 권력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 리스크는 리스크 갈등이며 그 안에서 세상은 둘로 갈라진다. 즉, 체계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고 리스크의 개념을 정의하는 사람들과 리스크가 부과되는 사람들로 나뉜다. - 물론 리스크의 대립은 여러 형태로 일어나며, 리스크 생산국과 리스크 수용국 사이의 관계는 점점 복잡해진다. 리스크에 대한 전문가들의 확률 시나리오보다 사람들이 리스크가 있다고 믿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해진다. - 테러를 막기 위해 선포된 테러와의 전쟁은 오히려 테러가 더 확산되고 과격해지게 만들었다.
* 성찰적 이론과 현실적 세계주의 이론 · 리스크의 성찰성 - 국경을 넘는 강제 의사소통: 글로벌 리스크의 지평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서로 이웃하며 살고 있다. 위협으로 인해 억지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세계주의는 조건이지 선택사항이 아니다. 현재 세상에서 리스크의 생산과 분배가 강력한 정치적 이슈가 되는 까닭은 그 결과를 객관화하기가 불가능해 이견이 많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은 리스크에 대응하여 하나의 공통된 세계적 대응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림을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는 오늘날 글로벌 위험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모순 속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리스크 합리성은 전 세계적으로 실존적인 충격논리와 고통논리, 동정 ‘논리’를 펼친다. 글로벌 리스크의 경험은 깊은 외상을 남기는 실존 차원의 동정과 존재론적 불안의 심연, 증오를 드러낸다. 글로벌 리스크의 성찰성은 대중매체의 관음증과 인류학적 충격, 이타적 염려와 공포, 불안 공황장애, 이를 도구화하는 온갖 정치적 행위자들을 그 구성요소에 포함시킨다.
2. 비판적 의도의 사회이론의 현실 과학적 토대
· 글로벌 리스크의 사회적 사실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① 글로벌 위험사회의 생활세계 현상학을 정초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글로벌 특성이 점차 영향력을 확장할 때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정확하게 실증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② 글로벌 위험사회의 이론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론은 제도적 결과와 모순, 거기서 비롯된 새 시대의 역학을 규명해야 하고, 새로운 실천적 경험의 의미를 규정하며, 역사적 변동과 생활세계의 경험, 실천 간의 연관성을 해명해야 한다. - 기후변화는 이에 대한 탁월한 본보기를 제공했다. 산업의 승리가 남긴 부작용들이 전 세계적으로 결합해 나타나면서 글로벌 환경의식이 생겨났고, 글로벌 리스크를 개념화하는 동기가 되었다. 글로벌 리스크의 현상학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방법론의 지침에 따라 이론과 경험이 결합해야 하며, 이는 지속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 세계주의적 해석학의 필요성 - 사회적 사실의 새로움을 인식하고 서술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들이 있다. 글로벌 위험사회에 관한 경험지식을 밝혀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이론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운용 방식, 즉 사회적· 방법론적 조직이 변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방법론적 국가주의’의 극복이다. 리스크는 더 이상 국가주의에 묶여있지 않다. 따라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갈등역학을 이해하려면 규범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세계주의적 해석학이 필요하다.
3. 정치적 시각: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
·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의 근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떤 국가도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② 세계 문제는 초국가적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국가정치를 세계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만 살아남는다. 상호의존성은 생존의 전제조건이다. ③ 국제기구는 국가의 이해관계를 서로 묶고 변화시킨다. 국제기구는 과거와 같이 국가적 이해관계를 따르지 않으며, 국제적 이해관계를 따르지도 않는다. 국제기구는 국가적 이해관계를 초국가적 이해관계로 바꾸고 극대화하며 확장한다. 또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세계 정치행위자들과 국가들을 위한 초국가적 권력과 구성공간을 열어준다. ④ 글로벌 리스크 정치의 정당성은 근본적으로 군사적 권한과 세계여론을 통한 절차적 합의 권력 간의 글로벌 분권에 근거한다. 더 이상 군사적 힘에 의거한 통치는 불가능하다. ⑤ 세계주의적 사실주의는 경제적 사실주의이다. 세계주의적 현실 정치는 비용을 절감하고 재분배한다. 초국가적 정치는 국가 간 현업을 유도하고 이는 경제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 사회적 자기비판으로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비판이론 - 사회학은 점점 분업 시스템 속에 들어갔다. 하지만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이러한 폐쇄적 연구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글로벌 위험사회는 뒤엉킨 우연성과 복합성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학은 정치적 국가주의와 방법론적 국가주의의 전제를 의심해봐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적 행위표준의 구조와 모순, 선택권, 제약을 밝혀낼 수 있다. - 글로벌 위험사회의 비판이론은 현실 능력과 비판 능력을 동시에 갖는다. 비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즉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지배하는 국가적 시각의 인식론적 구조에서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현실 능력을 갖는다. 글로벌 위험사회의 비판이론은 확장 가운데 있는 글로벌 위험사회의 자기비판 목소리와 다양한 실질적 목소리에 귀를 열면서 기존의 사회학 이론의 폐쇄성을 넘어선다.
제12장 현대의 변증법: 현대의 위기가 어떻게 현대의 승리에서 출현하는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의 서문에서 “파리는 보편적 어리석음의 중심이고 장관이다. 프랑스가 그처럼 열성적으로 진보의 길을 걸을 줄 누가 믿었겠는가?” 라고 서술하고 있다. “보편적 어리석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행렬에 대한 믿음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이런한 지속적 변화는 암흑에서 광명으로의 이행과정으로 나타나고, 또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도덕적 진화의 포괄적 이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속에 두가지 질문이 제기 된다. 첫 번째, 신에 의지하고 신에게 보호받은 중세 사회질서의 ‘영원한 확실성들'이 붕괴된 이후 30년 종교전쟁이 남겨놓은 도덕적 지성적 페허속에서 세상에 널리 퍼져 있던 회의와 불안, 예감들을 현대의 인간학적 자시 확실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두 번째, 이러한 현대사회의 성유물들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권력을 생각할 수 있는가? 현대가 스스로 권한을 부여해 전망으로 제시하고 , 그후 권좌에서 내쳤던 대항 행위자와 대항 비젼들 -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새로운 인텔리겐치아 또는 공적인 논증의 무언의 강제 - 는 20세기의 교훈처럼 역사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현대사회의 진보의 직진성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 탈마법화하는 현대와 모순적이다. 콩트로 부터 루만에 이르는 사회이론가들과 달리 나는 언뜻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보이는 개인주의 체계가 자신의 논리와 한계를 폭파했으며, 따라서 자기해체 과정에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유럽의 스스로의 핵심개념 중 “계몽”의 개념도 처음엔 ‘현대’로 불리다가 ‘현대의 기획', 으로 의미가 축소되듯이 그것들이 ‘보편적 어리석음'의 진단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1. 현대의 기본 원칙과 기본 제도의 구별
나는 문화 비판적인 낙관주의는 아니다. ‘더 많은 현대'의 변증법들은 기본제도(완전고용사회)의 토대를 폐지하는 현대의 기본원칙들(합리화)의 연속성에서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반현대의 변증법'들은 기본 원칙들의 비연속성 자체의 결과로 생겨난다.
현대의 기본원칙
현대의 기본제도
더 많은 현대의 변증법들
급진화된 연속성 : 경계의 파괴
비연속성 : 기본원칙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관철되는 기본 제도들의 변동
반현대의 변증법들
의도적 비연속성 : 부정
(비)연속성 :기본 원칙의 부정이 그 안에서 실행되는 기본제도들의 변동
더 많은 현대의 변증법들 : 우리에게 노동이 없어지는가 “우리에게 노동이 없어지는가"라는 질문은 40년전 아렌트 이후 계속되었다. 세계화라는 연결고리가 도입된 후 노동현상뿐만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기본 조건을 확정하는 국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세계화는 사회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공격한다. 노동의 미래에 관한 숙고는 “특히 남성과 여성의 미래 역할 뿐아니라 청년과 노인의 미래관계에 대한 숙고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상관관계의 지극히 정상적인 혼돈을 현대의 기본 원칙과 기본 제도의 구별을 통해 어느정도까지 해명할수 있는가? 연금과 고령화, 두가지 문제 두가지 문제는 현대의 승리로 인해 발생했다. 인간은 점점 고령화 된다. 의학의 발전과 더 좋은 영양등은유아 사망율을 줄이고 평균 기대수명을 늘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제도(연금)를 허무는 기본원칙의(의학적 진보) 관철이다.
미래와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몇 년전 미국 의회는 한 과학위원회에 향후 만년 후 미국 핵폐기물 종말 처리장의 위험성을 가르쳐줄 언어 또는 상징적 표현을 개발하라는 과제를 위탁했다.해결해야할 문제는 이렇다. 수천년이 지난후 그때 생존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소식을 계속 전달하려면 개념과 상상들은 어떤 특성을 가져하 하는가? 물리학자, 인류학자, 언어학자, 두뇌연구자, 심리학자, 문자생물학자, 노인연구자, 예술가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상징(스톤헨지, 피라미드, 호메로스와 성경 등)을 탐구하고 기록들의 생명주기를 설명하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천년 정도이다. 미래 존재 가능한 언어로 표기하는 의견도 언어학자의 예상으로는 최대 2000년도안만 이해될수 있다. 이를 통해 미래와의 대화는 점차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세계는 이미 자주 몰락했다 현대의 기본 원칙과 기본제도를 구별함으로써 문화비판적 몰락의 수사학이 오인한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 베버와 같이 현대를 탈마법화의 힘으로 서술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현대를 통한 탈 마법화에 관해 우리는 충분히 오랬동안 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내재적' 형이상학의 건축술을 해독할 수 있는가? 과학을 예로보면 “자신의 이성을 의식하는 인간은 과학 구원자를 통해 신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 이성적 인간은 오직 이성적 신에 의해서만 구원받을수 있다. ….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면 할수록 신은 전점더 이성이 되었으면 과학의 길은 점점 더 구원의 길이 되었다.” 불완전한 반쪽짜리를 숭배하는 것은 제1현대의 위대한 종교이다. 왜냐하면 기본 원칙과 기본제도의 변증법은 반쪽짜리 현대가 스스로 산출한 확실성마저 해체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문화비판은 세계몰락과 세계몰락 사이에 필연적인 구별에서 좌초한다. 왜냐하면 이 문화 비판이 세계몰락에 관해 한탄하면서 자신의 비성찰적인 세계확실덩도 몰란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화의 양의성 관습적인 문화비판이 그 사유의 직선성 때문에 얼마나 자기자신안에 매몰돼 있는지를 개인의 자율과 제도화된 개인주의의 예를 통해 기본 원책과 기본제도의 구별을 해명하면 분명해진다. 오늘날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보다 널리 퍼져있는 소망은 없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들에게 재미는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물으면, 돈,일자리,권력,사랑,신 등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약속이라는 답과 마주치는 경우가 점점더 늘어난다. 자기 삶의 자율을 위한 일상적인 투쟁은 세계의 집단적 경험이 되었다. 이 투쟁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잔여공동체가 표현된다. ‘기본원칙'에 대한 담록, 이 경우에 개인 자율에 곤한 담론은 원칙이 사람들의 의식 깊숙이 고정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삶'은 현대의 발명품이다. 이러한 생각은 반대 생각에서 분리되어 역사를 통해 조금씩 획득되어야 한다. 개인화의 기본원칙과 기본제도의 상관관계는 울리히 헤르베르트의 시대사적 연구 중 동성애, 민법과 가족법, 이혼법의 변화등을 통해 관찰하고 있다. (동성애의 인정, 남녀평등 등)
2. 반현대의 변증법들
기본원칙의 연속성과 기본제도의 비연속성의 이 변증법은 기본원칙이 온갖 문화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휴직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담론은 현혹적일 뿐아니라 잘 못된것이다. 21세기 초에 직며나는 재앙들과 위기 영역들은 거의 모두 독립한 현대화의 승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승리 시르즈가 관습적이고 비 변증법적인 현대화 사회학의 의 이론들이 다시 쓰고 다시 생각할 필요를 느끼게 만든다.
핵폭탄 자연과학의 성공, 다시 말해 핵물학의 성공에서 유래한 이 발명품은 ‘진보'의 급진적 양의성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전 인류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다시 말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잔인한 행위에 기술적 한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확신을 허물었따.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라느 명령은 “인류를 죽여서는 안된다. “로 고양된다. 그때 까지 통용되는 전쟁과 평화이 논리는 의미를 상실했다. 승리가 더이상 승리가 아니고 패배가 더 이상 패가가 아닌 시대에 새로운 개념들과 새롱ㄴ 제도들, 즉 핵무기에 의한 자기 소멸이라는 다모클레스 칼 밑에서도 지속적인 생존과 사유 지속적인 투쟁을 가능하게 만든 그러한 새로운 개념들과 제도들이 상화 적대적인 세력에 의해 창조되어야만 헀다. 자살테러리즘과 재래식 전쟁 새로운 전쟁뿐만 아니라 핵 유혹의 공동작용을 통해 현대의 변증법은 지극히 위험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는 동시에 다음을 의미한다. 글로벌 위험을 인지한 상태에서 세계권력질서는 다시 규정된다. 홀로코스트 “합리적으로 구정된 현대문명의 세계는 홀로코스트를 가능케한다.” 그것은 현대가 테크놀로지에 종사하는 목적 지향적 행위를 도덕적 압박과 분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 전과 그 후에 세계의 여러곳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을 능가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변증법"에서 나치 테러를 야만행위로 해석한다. 즉 현대의 기본 원칙들을 타락시키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현대의 필연적 논리 자체에 내재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들의 시각에 의하면 문명적 규범과의 단절은 현대화와 함께 지속되는 합리화와 관료제화의 과정에 들어있다. 아렌트는 다른 논리를 편다. 우리가 합리화의 과정의 기본 전제조건에 갇혀있는 한 집단 수용소는 파악할 수 없다. 아렌트는 아우슈비츠를 합리화라는 현대성 원칙과의 결정적 단절로 본다. 과학적 기술적 합리성의 자본주의 정신은 그 핵심이 공리주의적이다. 자살테러리즘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자마자 수다스러운 침묵과 특별한 내용이 없는 행위의 폭발이 이어졌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는 “나는 더이상 현실을 단순화하는 습관의 시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부분으로 분열되고, 부분들은 다시 부분들로 갈라져서 어느것도 더 이상 한개념으로 포괄 할수 없었다. 개별적인 낮말들은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악(惡)의 순환 현대의 기본 원칙들을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현실성은 현대화의 급진화와 함께 뚜렷해진다. 이 가능성과 현실성이 ‘악'의 개념을 새롭게 도입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가? 악의 개념과 표상 능력 저편에 있는 행위와 사상을 표시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정당화와 변론의 저편에 있고, 범죄의 저편에 있다. 칸트 이후 우리는 악이 자유의 이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 실존이 전제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것의 근본요소이다.
문화비판의 비판 가장 급진적인 문화비판도 발전한 현대가 지는 재앙잠재력과 비교하면 단순화되어 있다. 우린 한걸은 더 나아가야 한다. 현대의 기본원칙을 부정함으로써 열리는 지평에 대한 대부분 문화비판은 낡은 이상을 준다. 그 안에는 숨겨진 낙관주의가 들어있다. 통상적으로 문화비판은 현대의 기본원칙을 아무런 의문 없이 가치 척도로서 전제하고 강화하는 내재적 비판을 하기때문이다.
3. 딜레마
성찰적 현대화 이론의 기본 모티프 - 기본원칙과 기본제도의 구별-는 현대의 다양한 변증법들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더 많은 현대의 양의성 / 반현대의 양의성)
더 많은 현대의 양의성 . 기본가치의 승리는 기본제도의 위기를 초래한다. ‘위기'는 옳음과 동시에 틀렸다. 위기담론이 옳은 것은 국민국가적 제1현대의 자명성 해체와 그로 인한 불안 체험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위기담론이 틀린 것은 더 많은 현대 이지 국민국가적 현대의 제도적 토대들을 폐지한고 변화시킨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현대의 양의성 . 충분히 낡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지나간 포스트 모더니즘 역시 유럽인들을 담들지 못하게 할 만큼 강력한 위험성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동시대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현대의 인류학적 안전이 한낱모래알로 이루어졌을지 모른다는 예깜이다. 그것은 반현대의 유혹이고 공포이다. 우리는 물질적 의존과 도덕적 책무의 조직이 부서질 수 있다는, 그리고 글로벌 위험사회의 민감한 기능체계가 붕괴한다는 급작스러운 불안이다. 이미 말했듯이 그때 그때 안전 세계가 몰락한다나는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때 그때 지배적인 안전 세계가 몰락한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참을수 없는 낯선 세계를 친숙한 방으로 바꾸는데 성공해왔다. 글로벌 위험사회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다시 한번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재포함 없는 불포함 - 재결합 없는 분리, 이는 오히려 상황의 성격을 더 잘 표현한다. 스스로 산출한 위험 세계에 엄습하는 공포를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계 개방성과 세계 사랑 , “세계주의적 고향"으로 바꿀수 있을까? 19세기와 20세기 대다수의 사상가들은 이런 의미에서 직,간접저긍로 경계가 분명한 국가주권의 영원한 고착을 옹호했다. 몇몇 사람들만이 인류가 국가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따는 생각에 효과적으로 의구심을 표명했으며, 그 반대를 보여주는 현실들을 밝혀냈다. 경계를 넘어서는 네트워크의 뒤엉킴과 상호의존, 이관성, 책임, 연대성, 운명의 공도체들 말이다. 첫째, 칸트는 누구나 언제든지 스스로 사유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서 계몽의 준칙을 발견했따. 둘때 마르크스는 어떻게 자본의 무한한 역동성이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국가와 개인의 운명들을 갈등과 함꼐 서로 엮어 놓는가를 보여주었따. 셋째, 인류가 완성된 집단적 특서응로 구성되고 그들의 문화가 인종적 종교적 영토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간학을 니체가 파괴했다. 그렇지만 글로벌 위험사회의 전개는 섬처럼 독립적인 국민국가의 사고방싱과 정치적으로 방법론적인 국가주의에 심각한 일격을 가한다. 왜나하면 표전저긍로는 자연스럽게 보이고 신이 원하는것처럼 보이는 주권과 자기 결정권, 국가와 고립주의의 결합은 현대의 변증법 자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자기 파멸에 이를 지 모를단 예견의 동원력과 함께해체된다. 끄트로 독자적으로 이런 질문이 제기될수 있다. 반현대의 변증법들은 사회학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글로벌 위험사회의 비판이론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어느편에 서있는가? 만약 사회과학이 성찰되지 않는 인간의 토대마저 부정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최종적 부정이 사회학적 이론과 연구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중립저긍로 가치와 관계없이 이론작업을 하고 연구할 수 있는가?
해제 | ‘글로벌 리스크'는 우리를 계몽할수 있는가
이진우(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철학)
1. 후기 현대의 자기성찰과 위험사회
시대는 변할 때마다 스스로를 새롭게 규정한다. 철학은 자기가 살고 있는 당대를 사상적으로 파악한다는 헤겔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과학과 기술, 새로운 사회현상이 출현하면 우리는 이를 파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만들어 낸다. 핵무기와 인간복제, 환경오염이 인간의 생명과 생존을 위협하는 우리 시대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촌철살인의 용어는 과연 어떤 것인가? 글로벌 금융위기와 글로벌 기후변화, 글로벌 테러리즘처럼 글로벌 위험에 시달리는 우리 시대를 표현할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위험사회', 1986년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개념은 이 시대를 규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표어임이 틀림없다. 이시대를 규정하는 용어들은 다양하다. ‘후기산업사회' ‘포스트모더니즘' 처럼 우리 사회의 시대 성격에 관한 용어가 있는가 하면 ‘지식기반사회' ‘정보시대' ‘글로벌 사회’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포착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전자는 시대 구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현상의 특성에 집중한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관통하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 그를 유명하게 한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 ‘다른 현대'의 출현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가 여전히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이래 지속되고 있는 현대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 성격은 철저히 변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 구분의 개념을 갖고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다. 18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가 확연히 구별된다면 종전 이전의 시대를 ‘근대'로, 종전 이후의 시대를 ‘현대'로 파악하는 것이 쓸데없는 개념의 혼란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 현상을 더 명확히 서술할수 있다. 예컨대 개인의 출현과 개인주의의 발생이 산업사회와 함께 나타난 근대 현상이라고 한다면, 종전 이후에 관찰할 수 있는 개인화 현상은 예전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인화' 또는 ‘제2의 개인화'로 불린다. ‘근대'가 전통사회와의 대립 개념이라면, ‘현대'는 스스로 이해하고 규정하기 위해 근대를 대립시킨다. 21세기의 우리는 어떤 면엥서 근대를 넘어서고, 어떤 면엥서 여전히 근대에 묶여 있는 것인가? 벡은 [위험사회]에서 자신의 주제가 불투명한 의미를 갖는 접두사 ‘포스트(post)’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라는 뜻의 접두사 포스트는 무엇인가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미래를 지시하며,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시대 용어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시대에 붂여 있다.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는 산업사회를 부정하는 동시에 여전히 산업사회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은 모더니즘 이후를 꿈꾸면서 여전히 모더니즘을 긍정한다. 시대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전환기라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벡은 과거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지만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오늘날 이미 윤곽이 드러나 있는 미래"를 포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와 함께 시작되었고 현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사회의 근본 성격을 결정짓는 핵심적 성격이 다름 아닌 ‘위험'이다. 벡은 위험에 관한 사화학적 상상과 영감을 통해 한편으로는 우리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현대 또는 새로운 현대로 불릴 수 있는 미래의 방향을 규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위험은 왜 21세기 현대사회의 핵심인가?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의 삶과 사회를 위협하는 위험들은 항상 있었다.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기아, 14세기 유럽의 인구를 1/5로 줄어들게 만든 페스트, 열악한 위생으로 인한 조기사망처럼 “위험과 불안정은 늘 인간 실존의 조건이었다". 기아와 전염병, 자연재앙의 위험은 중세가 현대보다 훨씬 더 컸으며,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줄어들었다. 여기서 우리의 의혹은 더욱 증폭된다. 현대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은 감소하는데, 왜 위험이 현대사회의 특성이란 말인가? 여기서 두 종류의 위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기아와 전쟁, 전염병, 지진, 화산폭발, 풍수해 같은 자연재해로 나타나는 ‘외부적 위험'이며, 다른 하나는 기후변화와 금융위기, 테러리즘 같이 인류문명이 산출한 ‘내재적 위험'이다. 전자가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닥치는 위험이라면 후자는우리의 의도행위에 의핸 산출되고 우리의 행위를 수반하는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가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위험이지만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벡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위험(Gefahr, dang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인류문명이 산출하는 위험을 말할 때는 ‘리스크(Risiko, risk) 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현대 사회는 근본적으로 위험사회, 즉 리스크사회이다. 현대화가 자연재해 같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함으로써 위험을 제거하고자 했다면,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들은 현대화의 부작요응로 야기된 것들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동식물과 인류의 생명, 생존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위협하는 위험들은 바로 “현대화 위험들"이다. 그것은 현대화 과정에서 산출되었을 뿐아니라 현대화를 위해 우리-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 감수한 위험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위험은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류문명에서 비롯한다. 벡이 [위험사회[를 추간한 1986년은 바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 해이다.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을뿐만 아니라 수십만명이 여전히 암과 기형아 출산 등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체르노빌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현대의 재앙이 문명의 재앙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럼에도 세계의 곳곳에서 핵발전소는 여전히 가동되고 있다. 다른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은 우리에게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만, 우리는 이러한 개연성을 과학-기술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리스크를 수용한다. 리스크는 현대사회의 핵심이다. 18세기 이래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고 자신의 행위의 비의도적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리스크를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종전 이후의 후기현대는 인류문명의 비인도적 결과가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시작한다.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위험사회의 패러다임'은 ‘기술-경제 발전 자체에서 발생하는 부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렇게 묻는다. “진보하는 현대화의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함께 생산된 위험과 위해를 어떻게 예방하고 최소화하며 극적으로 노출시켜 통제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문명 자체가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을 산출한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종전 이전의 전기 현대(근대)에는 기술 문명의 부작용마저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면, 후기 현대에는 현대문명의 리스크 자체가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다. “현대화 과정 자체가 스스로 주제가 되고 문제가 되고 그렇게 성찰적(reflexive)인 것이 된다" 벡에 의하면 후기 현대가 성찰적으로 스스로 방성하면 현대사회가 위험사회라는 인식에 필연적으로 도달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는 이러한 인식을 심화하고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한다. 벡은 한편으로 현대문명의 리스크를 통제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한편으로 글로벌 리스크는 점점 더 글로벌화 되어 그것을 개별 국가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부작용을 해결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왜 그럴까? 벡은 이 현대 문명의 역설을 위험사회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리스크의 의미론은 지금 논의되는 미래의 위험과 연관되는데, 이 위험은 종종 문명의 성공에서 비롯된다.” 현대 문명의 위험은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성공에서 오기 때문에 현대과학과 기술의 리스크를 통제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눈부신 성공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위험을 보지 못한다면, 현대문명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위험사회]와 [글로벌 위험사회]사이의 20여 년 동안 벡의 이러한 인식은 더욱 심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과학과 기술의 발달 덕택에 그 부작용을 더 잘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스크는 예측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비하기 위해 미래의 위험을 지금 미리 연출한다.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의 연평균 온도가 2도 오르면 해수면이 1~4미터 상승하여 남서태평양의 낙원 투발루(tuvalu)가 바다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곳이 심각한 재앙을 겪을 것이라고 예견하지 않는가. 이렇게 예견된 위험 즉 글로벌 리스크는 과연 인류를 계몽할 수 있는가?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가 두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 - 흉측한 얼굴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 는 재앙의 예견으로 일어난 불안으로서 온갖 정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재앙의 예견과 함께 새로운 종류의 강요된 계몽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리스크는 과연 우리를 계몽할 수 있는가?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어떤 문명비판도 이 물음을 비켜갈 수 없다. 글로벌 위험사회는 현대문명이 산출하고 감수하고자 하는 리스크의 치명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우리의 운명을 단순히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맡길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성찰은 “우리는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윤리와 철학, 문화, 정치를 부활한다. 리스크에 대한 성찰적 확인은 “현대화의 핵심 영역인 경제와 자연과학, 기술 분야에서 윤리가, 그리고 그와 함께 철학과 문화, 정치가 부활하는 형태”로 이루어 진다. 현대 문명의 리스크에 관한 성찰은 다음의 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글로벌 리스크는 오늘날 왜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윤리적 성격을 갖는가? 둘째, 글로벌 리스크로 강요된 계몽은 과연 세계주의를 발전할 수 있는가? 세째 위험의 원천이 무지 (無知)가 아니라 과도하 과학지식이라면 글로벌 리스크에 관한 성찰은 지식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2. 리스크 생산과 연출의 정치 : 누가 리스크를 결정하는가
위험사호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이 많고 적은 정도가 아니라 위험의 판단이다. 무엇이 피할 수 없는 위험이고 무엇이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인가? 누가 이러한 판단을 하고 이러한 결정을 하는가? 최근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대실패로 끝난 ‘코펜하게 기수변화회의'(cop15)는 이를 잘 말해준다. 글로벌 리스크에 관한 대명사로 인식되는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국제적 구속력이 있는 구체적 방안이 이 회의에서 도출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97년 12월 교토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기수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된 ‘쿄토의정서'(kyoto protocol) 보다 강화된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계획이 담긴 협정이 통과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전 세계 193개국이 참가해 12월 7일에서 18일까지 덴마크 코펜하게 에서 열린 제15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는 ‘코펜하겐 합의(Copenhagen Accord)”를 상진적으로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핵심쟁점은 ‘한계, 섭씨2도’였다. 기후변화협약은 기온 상상폭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섭씨 2도 이내로 제한하지 않으면 지구는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섭씨 2도는 자연체계가 붕괴되는 임계점일 뿐만 아니라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법적 한계점이다. 누가 이러한 예측을 정당화하는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문명의 위험은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판단하며 해석하는 전문가 역학은 더욱 중요해진다. 선진국 과학자들이 ‘입증한' 기후변화의 재앙을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연출하지’않는다면, 기아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시급한 아프리카인들에게 지구 온난화가 문제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코펜하게 기후변화회의를 실패로 만든 것이 개별국가의 이기주의가 분명하다면, 글로벌 리스크를 규정하고 대비하는 것은 과학 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이다. 기후변화는 지구 전체의 문제이지만, 그 원인인 이산화탄소 배출은 사실 몇몇나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벡은 “궁핍은 계급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현대적 리스크의 글로벌 성격을 강조하지만, 기후변화에 책임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 최대피해자가 된다는 뼈아픈 역설을 생각하면 기후변화의 책임이 계급적임을 알 수 있다. 미국 한 나라가 전 세계 배출량의 1/5을 차지하고 최상위 5개국인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이 절반 이상을 배출한다. 19세기 중반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대기에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70퍼센트는 선진국의 것이다. 기후변화의 결과는 민주적이지만, 기후변화의 원인은 계극벅이다. 코펜하겐의 실패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온실가스를 실질적으로 감축할 수 있는 소수의 주요선진국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국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리스크를 생산하고 규정하는 나라가 세계무대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후기 현대를 특징짓는 핵심내용은 리스크 생산과 규정이다. 전기 현대, 즉 근대의 주요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부를 증대할 수 있는가 였다면, 후기 현대의 주요 관심사는 누가 어떻게 전 인류에 영향을 끼치는 리스크를 생산하는가이다. “선진화된 현대에서 부의 사회적 생산은 리스크의 사회적 생산과 체계적으로 함께 일어난다. 이에 따라서 결핍사회의 분배문제와 갈등은 과학-기술적으로 산출된 리스크의 생산과 정의, 분배에서 발생하는 문제 미치 갈등과 중첩된다.” 리스크의 생산과 정의가 국제적 권력관계를 결정짓는 핵심요소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우선 리스크와 재앙을 구별해야 한다. 벡은 리스크가 재앙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벡은 리스크를 간단히 “재앙의 예견" 이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경제 분야에서 상식처럼 통용되는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분명히 말해주는 것처럼 리스크는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재앙과 파국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핵발전소 사고와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 2005년 미국 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시킨 허리케인 카트리나처럼 재앙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으로 규정할수 있지만, 재앙 예측은 결코 공간적 시간적으로 구체화될 수 없다. 세계 어디서나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과 세계 금융시스템에 대한 통제장치가 없으면 세계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는 예측,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하여 가공할 자연재해가 닥칠수 있다는 예측은 구체적 재앙이 아니라 -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 리스크이다. 이러낳 리스크가 현실화 되면 리스크는 재앙이 된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재앙의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행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리스크는 “세계를 변화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이다. 리스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현재의 삶과 행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다. 리스크는 어떻게 현실적인 힘이 되는가? 여기서 벡은 리스크에 관한 두번째 정의를 제시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글로벌 리스크의 현실 연출이다.” 글로벌 리스크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실제 현실이 아니지만 연출을 통해 현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재앙을 피하려면 미래 재앙의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예언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면 실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글로벌 리스크의 연출은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재앙을 반복적으로 그래는 ‘자기부정적 예언'의 성격을 띤다. 이처럼 “파괴와 재앙을 연출해 예견하는 것은 그것을 예방하는 행위의 의무를 부과한다.” 여기서 재앙을 예방한다는 것은 결코 리스크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공에 맛들인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현대화의 부박용은 더욱더 예측할 수 없게 된다. 문명의 리스크를 통제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의 운명을 우연에 맞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측하기 힘든 리스크'를 가능한 ‘계산할 수 있는 리스크'로 전화해야 한다. 리스크 연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연출되지 않은 리스크는 엄밀한 의미에서 리스크가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리스크를 연출하는가는 중요한 정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리스크는 근본적으로 결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인류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문명의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벡의 위험이 항상 인간의 실존조건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간단히 답한다. “리스크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정의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리스크를 정의하는가? 이 물음은 근대(전기 현대)와 현대를 본질적으로 구분한다. 사회적 부가 핵심문제였던 근대사회에서는 부의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것 -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 이 ‘생산관계'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리스크의 생산산과 분배가 핵심문제로 부상한 현대사회에서 이를 결정하는 것은 ‘정의관계'(Definitionverhaltnisse)이다. 정의관계는 무엇이 리스크인지를 규정하고, 리스크를 판단할수 있는 지식과 규범을 통제하며, 리스크의 분배를 결정하는 지배관계이다. “리스크의 현실성이 지식과 무지에 관해 결정을 내리는 규범에 따라 극적으로 과정되거나 극소화될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거나 단순히 부정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를 내리는 지배관계는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위험사회는 현대문명이 산출한 새로운 지배관계를 해명한다. 글로벌 위험사회는 리스크의 생산과 분배로 구성되는 새로운 지배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지배관계는 근본적으로 불평등 관계이다. 우리가 문명의 부작용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리스크들을 지배관계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메가 위험들은 더 많은 산업과 새로운 기술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승리에서 기인한다. 메가 리스크를 산출하는 나라들은 두말할 나위없이 근대의 생산과계를 지배한 선진국들이다. 이들은 현대의 리스크를 규정하고 생산하며 분배하는 정의 관계 역시 지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위험이 원인 생산자에게 해석의 독접권을 부여한다는 것"이 글로벌 위험사회의 정치적 역설이다. 선진국 과학자들이 오존구멍과 조류인풀루엔자, 미세먼지, 기후변화를 이야기 하면, 이러한 지식을 연출 형태로 전달받은 다른나라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따라간다. 여기서 우리는 리스크 정의가 새로운 글로벌 불평등이 산출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평당하다는 평등의식은 인권사상과 함께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로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글로벌 양극화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저소득 국가가 세계 인구의 1/3을 차지하지만 이산화탄소 방출량은 7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빙기는 전 해안지대를 침수시키고, 농경지를 황무지로 만들며, 동식물 종의 멸종을 극적으로 가속화 할 것이다. 벡이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세계의 극빈자들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선진국은 기후변화에 대비하려면 자긴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다른 국가들을 압박하지만, 빈고이라는 긴박한 문제를 안고 있는 후진국은 산업사회를 확장하려 한다. 선진국은 심각한 리스크를 피하려 녹색 테크놀러지를 발전시켜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지만, 후진국은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적, 재정적 재원을 받기는 커녕 선진국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세계경제는 리스크로 이익을 얻는 ‘리스크승자'와 손실을 보는 ‘리스크패자'로 양극화 된다. 21세기는 현대의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전화기임이 틀림없다. 세계의 지배질서는 사회적 부의 생산관계에서 리스크의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정의 관계로 전환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는 새롭게 등장한 지배관계를 이성적으로 규정하고 통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험은 어느 한 국가와 지역뿐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굶주림에는 위계질서가 있지만 지구온난화는 평등하고 민주적이다. 위험문제는 어느 누구도 전무가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을 전가할 - 여성,노동자,후진국 같은 - 타자도 없다. 오염된 물과 공기는 계급과 국가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글로벌 위험 잠재력에 관한 성찰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세계주의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3. 글로벌 리스크로 강요된 계몽 : 세계시민주의는 가능한가
현대 문명이 산출한 여러문제가 더 이상 국민국가의 특 안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 자명한 사시로 받아들여진다. 글로벌 리즘은 현대사회를 성찰하는데 출발점이자 핵심적인 전재조건이다. 벡 역시 [글로벌 위험사회]를 쓰면서 자신의 이론을 세가지 관점에서 확장하려 했다고 말한다. 글로벌 시각과 연출의 관점, 생태-경제-테러리즘을 비교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관점에는 더이상 어떤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로벌 경험이 관류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과연 세계시민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가? 글로벌 리스크가 현대문명이 낳은 심각한 부작용에 관한 사회학적 현실 인식이라면, 세계시민주의는 위험조건에서 어떻게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정치적-윤리적 성찰이다. 세계시민주의라는 멋진 말이 공허한 요청으로 끝나지 않고 그 자체로 실현될 수 있는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인 정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현실적인 세계시민주의의 비전을 제시하려면, 세계화가 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시민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전제돼야만 한다. 글로벌 리스크의 정의와 생산, 분배에서 새로운 불평등과 양극화가 발생한다는 것은 세계시민주의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고, 글로벌 리스크가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평등하게 위협한다는 것은 세계주의적 계기이다. 한편으로는 첨단소통과 교통수단의 발전 덕택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벌 리스크 덕택에 세계화는 점점 더 “탈(脫)경계화"로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토 경계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시민주의는 실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은 아니지만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의 형ㅇ식으로 존재한다.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엥서 이러한 세계주의의 가능성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의 멸명이라는 파국을 가능한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글로벌 리스크는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것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벡에 의하면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반응에는 세 가지가 있다. “부정”, “무감각", “변형"이 그것이다. 첫 번째 반응은 현대의 문화적 특성으로서 예견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태도이며, 두번째 반응은 외부 변화에 무감각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냉소주의적 태도라는 것이다. 벡이 선호하는 세 번째 반응은 글로벌 리스크가 초래한 충격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세계주의적 태도이다. 그것은 글로벌 리스크가 현대문명의 비의도적 부작용인 것처럼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시작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벡은 글로벌 리스크가 “계몽의 기능"을 갖는다고 확신하다. 글로벌 리스크가 우리를 계몽할 수 있다면, 그 힘과 가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글로벌 위험사회 이론의 설득력은 근본적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판가름 난다. 왜냐하면 벡은 글로벌 리스크의 위험성이 증대될수록 생존을 위협받는 인류는 더욱더 결속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험은 과연 우리를 이성으로 이끄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논의를 괄호 안에 넣고 우선 벡의 근거에 집중하고자 한다. 글로벌 리스크가 우리를 계몽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세가지이다. “탈장소화”, “계산 불가능성", “보상 불가능성"이다. 현대의 글로벌 리스크는 특정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어디서나 일어날수 있다. 우리는 글로벌 리스크를 과학적으로 예측하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끝으로, 글로벌 리스크는 세대를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다른 물질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글로벌 리스크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류에 대한 위협이다. 글로벌 리스크가 갖고 있는 세계주의적 계기는 대체로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글로벌 리스크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타자를 원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포함한다. 우리는 현재 글로벌 리스크를 의식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까운 이웃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이 글로벌 리스크를 지각하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다른다. 규범적 관점에서 보면 세계주의는 본래 문화적 차이의 인정을 의미한다. 피부색과 종교, 국적, 처해 있는 상황, 과거와 미래가 다른 사람들이 공존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바로 ‘상호인정'이다. 벡에 의하면 글로벌 리스크는 바로 이러한 인정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출구 없는 공동의 글로벌 위험지역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서로 극도로 대립적인 반응만 가능하다. 민족조의 재무장이나 타인에 대한 적개심 등도 이에 속한다. 그중 하나가 타인을 같으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로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규범적 세계주의이다.” 글로벌 리스크에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벡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 위험이 누구에게나 닥찰 수 있다는 ‘고통스러 경험' 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공동책임'이 글로벌 리스크의 두 측면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글로벌 리스크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세계주의적 책임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는 여전희 의문으로 남는다. 두번째는 글로벌 미디어들을 통한 “동정심의 세계화"이다. 우리는 발달한 미디어 덕택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앙을 실시간으로 경험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흑인 거주지에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것도 글로벌 미디어이다. 열대우림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는 모습, 해일과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도 글로벌 미디어이다. 빈곤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덮치는 자연재앙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다루는 골론 영역은 이성보다는 일차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규정된다. 글로벌 리스크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리없이 당하는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그들의 입장,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매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벡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위험이 가난한 자와 주변부 계층, 사회적 소수에게 세계여론의 발언권을 부여할수 있다"고 확신한다. 재앙위험이 가난한 자를 쫓아다니지만 세계여론은 이러한 사실을 추적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험의 공론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론이 반드시 순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개별 국가나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따라 왜곡되고 선별되며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글로벌 리스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이처럼 리스크 계몽 기능을 수행한다. 세번째는 국가간 경계를 무터뜨리고 세계시민을 정서적으로 결합하는 글로벌 리스크가 “글로벌 시민사회"를 구성한다. 전통사회에서는 지상의 삶을 초월하는 신에 대한 신앙이 인류를 하나로 묶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지상에서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신앙이 세계시민을 하나로 결합한다. 우리가 공존하려면 우리는 글로벌 리스크를 믿어야 한다. 이런 맥랙엥서 벡은 ‘지상의 위험종교' 또는 ‘세계의 위험신앙'을 말한다. 세계위험 종교는 “모든 국경을 초월한 상호의존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때만 국가 이익의 극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기후변화에 대비하려면 가능한 한 많은 국가들을 끌어드려야 하며, 많은 국가들이 동의한 기후협약은 비로소 국제적 구속력을 갖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호의존성은 타국 이익을 고려하는 동시에 자국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계시민사회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세계시민사회는 근본적으로 두가지를 전제한다. 하나는 어떤 국가도 글로벌 리스크를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논리이며, 다른 하나는 글로벌 리스크를 해결하려면 개별 국가가 글로벌한 자본에 대한 통테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 논리이다. 왜냐하면 세계주의가 반드시 하나의 세계정부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정치는 여전히 패권주의의모습을띠고 있다. 따라서 세계주의의 성공 여부는 개벌 국각가 글로벌 리스크로 형성된 세계여론에 얼마나 계몽되어 지구의 소외집단에게 어느 정도 발언권을 부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글로벌 리스크는 과연 세계, 즉 국제정치와 국제질서를 민주화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우리가 과연 글로벌 리스크로 계몽될 수 있는가와 톱니처럼 맞물린다. 우리는 발달한 과학기술을 통해 미래에 닥칠 재앙을 예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리스크 지식을 토해 우리는 우리 행위를 변화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는가?
4. 위험사회에 필요한 지식과 성찰적 현대화
현대사회는 스스로 산출한 리스크를 중심 문제로 다루면 다룰수록 위험사회가 된다. 글로벌 차원에서 생산된 불확실성은 글로벌 위험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우리가 복지를 증대하기 위해 발달한 과학과 기술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엇이 우리를 위협할지 불투명하다. 한펴으로는 현대가 우선성을 부여한 “안전원칙"이 크게 흔들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 글로벌 테러리즘의 예에서 볼 수 있듯 - 안전에 대한 요구가 더욱 증대된다. 글로벌 리스크의 불안은 대체로 무지에서 온다. 설령 어떤 행위가 미래에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손실을 보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미래의 리스크를 과감히 수용한다. 현대사회는 이를 리스크 매니지먼트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는 글로벌 리스크는 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를 시대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전기 현대, 즉 근대에 이루어진 방식과는 전헤 다르게 사회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환을 지식과 무지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기 현대의 이데올로기가 ‘지식(知識, wissen)’ 이었다면, 후기 현대의 시대정신은 ‘무지(蕪芝, Nicht-Wissen)’ 이다. 전기현대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것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지식기반 사회는 전기 현대의 다른 표현이다. 이에 반해 후기 현대의 글로벌 위험사회 -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 는 무지기반 사회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느 글로벌 리스크에 관한 논의가 이 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무지와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근본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의해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과학자도 이에 관한 전문지식을 제공하진 못한다. 어떤 과학자는 일정량의 방사선이 인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어떤 과학자는 극소량이라도 유전적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문가 의견에 따라 수십명에서 수십만명을 오락가락한다. 현대과학은 글로벌 리스크 앞에서 영향력을 상실한다. 한때는 기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과학적 발명으로 평가받던 것이 어느 날 갑작이 환경파괴의 치명적인 원인으로 폭로된다. 냄새도 없고 타지도 않는 무독의 화학물질 프레온 가스가 피부암을 막아주는 오존층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손상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현대문명을 통해 생산된 무지는 21세기 보편적인 삶의 상황이 되었으며, 무지가 커질수록 위험도 커지고 결정도 더욱 어려워진다. 여기서 우리는 후기 현대의 무지가 근대 지식기반 사회가 전재한 무지와 질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전통적인 ‘아직-알지-못함'이 아니라 알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무지이다.” 21세기 우리를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의 가장 커다란 원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알 수 없음'이다. 여기서 벡은 글로벌 리스크의 위협을 성찰의 기회로 전환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를 과학기술을 통해 아 수 있는, 즉 통제할 수 있는 리스크로 전환할수록 우리는 글로벌 리스크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혀 새로운 글로벌 리스크를 여전히 현대의 틀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로벌 리스크를 전혀 새로운 눈으로, 즉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지의 성격을 띤다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성찰은 지식을 추구한다. 앤서니 기든스와 스콧 래시 , 벡이 말하는 성찰적 현대화는 현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에 관한 지식을 전제한다. 그러나 벡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이 아니라 ‘무지'가 성찰적 현대화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글로벌 리스크의 무지나 불가지성을 전제할 때만 사유와 행위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무지가 어떻게 “성찰적 현대화의 매개수단"이 될 수 있는가? 무지에는 물론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떤 현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부정의 무지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엥서 기인하는 무지이다. 기후변화 같은 글로벌 리스크에 관한 연구에서 자연파괴와 건강위험 같은 부작용에 관한 ‘지식'이 중요하지만, 이러한 지식에도 수많은 - 회피,실수,오류,과장 같은 - 무지의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성찰적 현대화가 주목하는 것은 알 수 없음의 무지이다. 핵 발전소는 얼마나 안전한지 핵 폐기물은 정말 안전하게 저장 될 수 있는지, 온실가스를 줄이면 정말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지에 관한 전문가의 위험 진단은 종종 상호모순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글로벌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는가? 전무가들은 위험지식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글로벌 리스크에 관한 공론을 통해 전문가 집단에 성찰적 기능을 부여해야 한다. 글로벌 리스크를 원칙적으로 알 수 없다면, 이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갈등은 과학자 집단에 자기비판과 성찰을 강요할 수 밖에 없다. 알 수 없다는 무지가 확산될수록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남의 지식에 마음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뜻 벡이 추구하는 글로벌 위험사회의 성찰적 현대화는 소크라테스의 지혜, 즉 ‘무지의 지'를 복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아게 되면, 우리는 글로벌 리스크가 인류에 닥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비로서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로벌 위험사회의 전문가들이라면,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에 따라 새로운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위험사회의 철학자들인가? 21세기 과학자들은 글로벌 리스크를 통해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면 글로벌 리스크로 형성되기 시작한 세계시민사회는 과학자들에게 자기성찰의 압력을 가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불러오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무지를 감당할 수 있는가?” 글로벌 위험 사회의 미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라는 예리하고 독창적인 개념으로 “우리 시대의 신경을 분명이 건드린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이론이 글로벌 리스크의 해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 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가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사회는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병으 앓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낸 점만으로도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는 21세기 후기 현대의 시대정신을 정확히 포착한 획기적인 사회학적 저서임에 틀림없다. 설령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해도 글로벌 위험사회에 맹목적으로 편승하지도 않고 그 치명적인 부작용에 눈을 감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벡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정신이 야기하는 불안의 현실을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부정하는 것은 냉소적이며, 이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사회학적 지식과 영감으로 충만하 사유로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글로벌 위험 사회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새로운 영감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