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묵배미에 가다
남 민 욱
나는 열 명 내외로 구성된 <북악동인>의 일원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 소설가 박영한 선생에게 문학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집필실은 북악산 밑에 있었다.
신춘문예를 꿈꾸는 문청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소설작법에 관심을 가진 내가 들어있었다. 가끔은 원고지가 공중돌이를 하고, 단어 하나 문장 한 줄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치열한 수업이었다.
선생은 자상한 성품이었다. 추울 때 무릎에 덮을 담요를 마련하고 제자들의 저녁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여 고등어를 졸이거나 빨간 고추기름이 동동 뜨는 육개장을 끓여놓기도 했다.
또한 문학지의 표지에 모델로 나올 만큼 멋쟁이였으며 지극히 예술을 사랑한 로맨티스트였다. 음악이 흐르는 서재에는 계절마다 다른 들꽃이 놓여있었다. 가지 째 꺾어온 아카시아 꽃이 큰 오지항아리에 가득 꽂혀있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가끔 벌어지던 맥주파티에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하던 이도 선생이었다.
그는 술과 담배를 좋아했다. 수업 중에도 흡연욕구를 참지 못했고, 목이 마르면 막걸리를 마실 때도 있었다. 덕소로 이사를 하게 되어 선생을 찾아갔을 때도 동네 주막에서 그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J와 소금을 찍어먹으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건강을 위해 자애할 것을 권유했을 때 아마 죽을 때까지 이걸 끊지 못할 것 같다는 심약함을 내보이기도 했다.
이후 덕소에 한번 오시겠다던 약속은 부산 동의대에서 강의를 맡으며 무산되었다. 내가 선생을 주제로 수필을 쓰겠다고 했을 때 ‘날 어떻게 쓸지 궁금한데? 써봐’하며 흥미를 보이던 분, 금방 쓸 것처럼 넘치던 소재를 나는 끝내 엮지 못했다.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를 쓰러뜨린 원흉이 술, 담배, 스트레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상에서 했던 마지막 인터뷰에서 위암 투병의 고통보다 글 쓰는 고통이 더 컸음을 고백했던 리얼리즘의 대가, 그에게 문학은 필생의 업으로 이끈 닻이자 심신을 옥죈 덫이었던 셈이다.
‘춘초몽’은 덕소 문인들의 모임이다. 그가 생존해있다면 <작가와의 대화>에 기꺼이 응해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풀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른 봄, 나도 봄풀처럼 뒤풀이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호탕하게 웃는 선생과 마주하는 꿈을 꾸고 싶다. 4월 셋째 주 화요일 그의 발자취를 따라 춘초몽 회원들 우묵배미로 간다.
***************
먼저 도곡리 마을회관에 들렀다. 동네 토박이를 찾아 소설가가 살았던 집을 묻자 쑥배미 위치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옛 집들이 모두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는데 그 집은 원형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고대농장 입구에서 우측 산자락을 돌아 쑤욱 들어가자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마을이 나타났다. 쑥배미나 우묵배미라는 지명에 걸맞은 항아리 속처럼 아늑한 마을이다.
어귀에 있는 기와집에 들어가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리니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왕룽일가>의 안주인이자 <오란의 딸>에 미애 엄마의 실제 모델이 되는 박순례 씨였다. 영감님은 몇 년 전 돌아가시고 석구 씨(아들)부부와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선생이 살았던 문간방이며 소를 키웠던 외양간까지 집안 이곳저곳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팔십이 넘은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탁월한 기억력에 말씀도 잘 하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선생이 “같이 먹지요”하며 차린 밥상을 번쩍 들고 마당을 건너와 마루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일, 구두쇠 영감님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왕룽일가>가 TV연속극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을 무렵 집에 찾아온 선생과 나누었다는 대화도 재미있다.
“잔디아빠는 거짓말쟁이여”
“하하하 그래 맞아요. 제가 거짓말쟁이예요.”
사실에 가깝지만 재미를 위해 허구를 가미한 것을 통찰해 항변한 것이리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이웃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관찰자로 때로는 그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로 선뜻 나서는 작가의 모습은 우묵배미 연작 속에 오롯이 그려있다. 뼈에 살을 붙이고, 살에 뼈를 집어넣어가며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 소설가를 문간방에 들인 것은 일단 왕룽일가가 선택한 운명이다. 또한 동인문학상과 연암문학상,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중견작가의 소설에 주인공이 되는 운명도 함께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글을 쓸 조용한 방 한 칸을 소망하던 작가의 눈물겨운 기록의 산실인 문간방을 들여다보았다. 방에는 허름한 농가의 외양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골프백과 큰 피아노가 있다. 골프백의 주인인 아들부부는 호주에 여행을 갔다고 한다.
일찍 땅의 가치를 알았던 왕룽의 ‘大地’는 몇 해 전 우묵배미 지척에 중앙선전철역이 들어서며 땅 색깔이 바뀌었다. 이 금싸라기 땅의 최대 수혜자는 아들 석구 씨일 터이고 말괄량이 딸 미애는 미국시민이 되어 있다.
문득 <지상의 방 한 칸>에서 ‘임마, 니가 소설가야? 소설가면 소설가지 술 먹고 내 떠드는 데 니가 무슨 간섭이야 자식아’ 하며 낮술이 벌게져 들어와 문짝을 발로 차며 발악하는 정씨에게 만연필을 내보이며 사정하는 작가의 모습이 겹쳐진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과 베트남전쟁 참전 경험, 전업 작가로서의 생활고가 담겨있어 연민을 자아내는 선생의 삶과 대비되어서일 터이다.
바람이 지나가듯이, 구름이 흩어지듯이, 물이 흘러가듯이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난 우묵배미는 조용하다. 딸기코 홍씨는 결국 술 때문에 병을 얻어 저 세상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여주댁은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1980년 대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서 삶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세밀화로 그려졌던 우묵배미 사람들,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붙들네와 배일도, 공례, 쿠웨이트 박, 연실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또 지상을 떠난 박영한 선생은 어디로.....
첫댓글 한장의 흑백 사진처럼 정겹게 글이 다가옵니다. 좋은 글 잘읽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아주 재밌고 흥미롭고 좋습니다. 잘 쓰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회원으로 들어왔습니다. 님의 따뜻한 아오러움. 잘보고 또보았 읍니다. 좋은하루되세요.
이상일 선생님 부지런도 하셔라. <이미시 서원>은 격조높은 현대식 서원입니다. 회원이 되신 거 축하드리며 환영합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주 뵈어요.
모처럼 들어와 근사한 글 한편 읽고 갑니다.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은 어디로 갔으며 우리가 읽고 혹은 드라마를 보면서 공감하면서 호흡을 함께하던 그때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답니까?
년말이어서 바쁘신가 봅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방문하셨네요. 12월26일 이미시 행사 때 꼭 오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