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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운사 원문보기 글쓴이: 진주사랑
* 불교계의 인명사전입니다...혹여 참고가 될까 싶어서 올립니다..아래한글로 된 파일도 함께 오려두었으니 다운받아서 보셔도 됩니다...
ㄱ 가
가 섭(마하가섭,범 Mahakasyapa) : 意譯하면 大飮光, 大龜氏. 십대제자 가운데 頭陀第一, 왕사성 마하사다라村의 長者 바라문 니그로다칼파의 아들, 일찌기 毘耶利城 바라문의 딸 발타라가비리야와 결혼하지만 12년만에 부모를 여의고 세속적인 욕망의 無常함을 깨닫고 부부가 함께 歸依, 8일만에 阿羅漢果를 증득하다. 항상 頭陀行을 하고 불멸후 구시성 天觀寺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한 후 茶毘儀式을 거행하다. 뒤에 上首가 되어 阿難, 優婆離와 함께 經律을 結集하다. 禪家에서 傳法 第1祖로 추앙하다.(佛本行集經45, 잡아함41, 증일아함20, 달마다라선경上, 付法藏因緣傳제1, 有部毘那耶雜事39‧40, 大寶積經88, 胎藏界7集中)
가 섭 : 소승 飮光部의 始祖,
각범혜홍(覺範惠洪,1071-1128) : 송대 임제종황룡파, 瑞州(강서성) 高安縣사람 성은 彭씨, 이름은 惠洪 또는 德洪, 자는 각범. 14세에 출가하여 三峰觀선사의 侍者가 되고 다음으로 寶峰克文을 참예하여 7년을 지내다. 崇寧년간(1102-1106)에 婺州 경덕사에 있다가 瑞州 淸凉寺에 移住하다. 마침 奸僧의 讒訴를 만나 獄事를 당하고 政和원년(1111) 다시 국외로 쫒겨나고 뒤에 세번째 옥에 갇히었다. 湘西南臺에 明白庵을 짓고 살면서 [禪林僧寶傳 30권]을 짓다. 欽宗이 즉위하자 곧 칙명으로 다시 머리를 깎고 본이름을 다시 부르게 하였다. 金나라의 난을 만나 암자에 退居해 있다가 南宋 建炎2년 5월 입적. 세수 58세, 시호는 寶覺圓明.(속전등록22, 통재29, 日元17, 계고략4, 五燈嚴統17) 저서 : [林間錄 2권] [고승전 제12권] [智證傳10권] [禪林僧寶傳 30권] [志林 10권] [令齋夜話 10권] [石門文字禪 30권]
감지승찬(鑑智僧璨, -606) : 중국선종 제3조, 在家時에 風疾이 있었는데 2조 혜가와 問答往來로 풍질이 空不可得임을 깨닫다. 출가하여 二祖를 시봉하기 2년 뒤 慧可의 법을 받고, 舒州 司空山에 들어가다. 그즈음 北周武帝의 破佛(574)을 만나 同州 皖空山에 숨어서 10여년을 지내다. 隋開皇13년(593) 道信에게 衣鉢을 전하고 羅浮山에 들어가 隱居하기 3년, 그뒤 大業2년 제자들과 함께 大齋에 나아가 한 나뭇가지를 들어보이며 법문을 마치고 掩然히 示寂하다.(임종에 이르러 曰, 나는 본래 娑羅王如來로서 이 사바세계에 3번 다녀간다. 첫번째는 17조 僧伽難提존자요 두번째는 지금의 나이며 세번째는 趙州땅에 출현할 것이다.) 그는 항상 頭陀禪定을 닦았고, 獨孤及은 [碑銘]과 [塔銘]을 짓다. 唐玄宗이 鑑智(또는 鏡智)선사라 시호하다.(전당문390‧비명,탑명, 능가사자기, 전법보기, 역대법보기, 보림전8, 조당집2, 송고승전25‧法冲傳, 隋書57, 旧唐書111, 전등록3) 저서 : [신심명]
경봉정석(鏡峰靖錫,1892-1982) : 통도사스님, 聖海南炬의 제자. 경봉은 호, 詩號는 圓光 본명은 金鏞國. 밀양사람. 1892년(고종29) 密陽郡 부내면 계수동에서 父 金榮奎 母 안동權씨 사이에서 태어나다. 7세에 밀양읍의 漢文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6세에 양산 통도사 聖海에게 출가하고 明新學校를 거쳐 1912년 海曇율사에게 具足戒를 수지하다. 통도사 강원을 나오고 巡廻布敎師로 전국을 다니며 포교하고, 1925년 통도사 念佛萬日會 회장이 되어 30여년간 主導하다. 이후 제방을 편력하며 當代의 善知識을 參訪하고 통도사 極樂庵에서 눕지않고 앉아서 參禪에 몰두, 마침내 36세인 1927년 11월 20일 三更에 見燭舞하고 대도를 성취하다.(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 : 悟道頌) 그후 五臺山 漢巖, 直指寺 齊山, 大覺寺 龍城, 鄭田岡에게 깨달음을 확인하고 書信往來로 교분을 두터이하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하고 1935년 통도사 주지에 피선, 1941년 朝鮮佛敎禪理參求院(지금의 禪學院) 이사장을 거쳐 1949년 다시 통도사 주지에 再任되다. 1953년 11월 極樂護國禪院 祖室에 추대되어 이후 30여년간 주하며 후학과 불자들을 提接하다. 1967년 서울 탑골공원에 ‘卍海禪師記念碑’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27일) 입적하니 세수 91 법납 75였다.(三笑窟일지, 불교신문<1982.7.25>)
저서 : [法海] [속法海] [圓光閒話集] [三笑窟日誌] [火中蓮華消息]등
고령신찬(古靈神贊, ) : 百丈懷海의 法嗣. 受業師(득도사)는 戒賢. 緇門私記p.72 참조.
고봉원묘(高峯原妙,1238-1295) : 남악하 제21세 雪岩祖欽의 제자, 성은 徐씨 휘는 原妙, 蘇州吳江사람. 15세에 출가하고 18세에 天台敎를 공부하다가 20세에 淨慈寺에 들어가 ‘3년 死限’을 세워 斷橋화상에 묻고 北磵寺 설암을 처음으로 참방하였다. 1261년 三塔寺에서 깨달아 설암의 법을 잇다. 뒤에 天目山 西峰에 住하면서 선풍을 드날려 수백제자를 길렀다. ‘來不入死關 去不出死關 鐵蛇鑽入海 撞倒須彌山’이란 임종게를 남기고 坐亡하다.
고봉태수(高峰泰秀,1901-1969) : 근대 大講伯, 龍城震鐘의 제자, 본관은 晋州 성은 姜씨, 황해도 장연사람. 어려서 仙遊塾에서 한학을 배우고 13세에 5살위인 부인과 혼인하였으나 17세에 부인이 죽다. 그뒤 포목상으로 전전하다가 25세에 大覺寺 龍城에게 출가하다. 도봉산 望月寺 萬日結社道場, 양산 內院寺 등에서 정진하고 그후 金剛山 摩訶衍‧釋王寺등 선원에서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다. 후에 해인사, 통도사 전문강원에서 경전을 열람하다. 1943년 海印寺 講師에 취임하고 이어 銀海寺 강사로 초빙받아 그곳에서 滿空月面과 더불어 禪問答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취하는 법이 없었고 여자를 택하면서도 집착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酒高峰’이라 칭했으나, 언제나 새벽 3시에 일어나 禪定에 들고 경을 연구하였다. 또 학인들을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였고 평생동안 강의에 열중하였고 宗團의 행정직은 끝내 사양하였다. 1969년 靑巖寺 極樂殿에서 70세로 입적하시다. 제자로 雨龍, 杲山 등이 있다.(弘法院刊 [무상속에 영원을 산 사람들] 1969)
강승회(康僧會, -280) : 康居國사람, 그의 先祖는 대대로 印度에 살았다. 아버지가 장사하면서 交趾에 와서 그를 낳았으나 10세때 兩親을 여의고 출가하여 三藏과 六典에 통하였다. 또 南陽의 韓林, 潁川의 皮業, 會稽의 陳慧 등에게 道를 배우다. 吳赤烏4년(241)에 建鄴에 오니 孫權이 建初寺를 짓고 머물게 하였다. 이곳에서 [六度集經]등 7部 20卷을 번역하여 吳나라에 불교포교의 모범이 되었다. 후세에 超代禪師라 칭하였으며 天紀4년 입적하다.(出三藏記集6‧13강승회전, 安般守意經序, 廣弘明集1) 저서 : [法鏡經註解] [道樹經주해] [安般守意經주해]
고산신안(鼓山神晏, ) : 당말‧五代스님, 大梁李氏의 아들. 13세에 靈夢을 꿈꾸고 白鹿山規에 의해 출가하여 嵩岳에서 受具하다. 곧 제방의 禪德을 歷參하고 雪峰義存(821-908)에 참예하여 契悟하고 법을 이었다. 뒤에 閩師王延彬이 法要를 묻더니 福州고산에 湧泉禪院을 짓고 師를 延住케 하여 宗旨를 선양하다. 天福年中(936-944)에 77세로 입적하니 興聖國師라 시호하다. (조당집10, 전등록18, 회원7) 저서 : [鼓山先興聖國師和尙法堂玄要廣集 1권]
고산지원(孤山智圓,975-1022) : 宋代 天台宗스님(山外派), 奉先靑原의 제자. 姓은 徐, 孤山은 號. 字는 無外 自號는 中庸子,病夫 법호는 智圓.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으나 學者에게 講義하고 撰述함을 쉬지않다. 杭州 孤山寺에 住할 때 학자가 많이 모여 총림을 이루다. 능엄‧금강등의 疏를 지음. 宋眞宗 乾興元年 2월에 입적 나이는 48세. 저서 : [病夫伝]
고안대우(高安大愚, ) : 당대 南岳下, 歸宗智常의 제자. 臨濟義玄을 接化한 知識이라 알려지다.(大愚三拳 또는 臨濟大悟) 강서성 瑞州 高安에 주하다.(臨濟錄, 조당집19, 전등록12‧임제장)
공 자(孔子,552-479B.C) : 魯나라 철인, 昌平邑 鄹邑사람, 자는 仲尼 이름은 丘, 부는 叔梁紇 모는 顔씨.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빈곤 속에서도 學問에 뜻을 두어, 周公을 추앙하다. 주공의 理想政治를 실현하려고 관리가 되지만 반대로 인해 國外로 망명, 諸國을 다니며 治國의 道를 설하다. 일정한 스승이 없었지만 禮를 老聃에게 묻고 音樂을 萇弘에게, 벼슬하는 도리를 郯子에게 물었으며, 거문고를 師襄에게 배웠다. 뒤에 노나라로 돌아와서 제자교육에 힘쓰다. 73세에 卒하였는데, [禮記 檀弓記]에, ‘돌아가기 7일전에 아침일찍 지팡이를 짚고 산책하다가,“泰山이 장차 무너지리로다, 대들보가 장차 꺾어지리로다, 철인이 장차 이세상에서 꺼지리로다!”하고 노래 부르고는 병들어 누운지 7일만에 돌아갔다’한다. 문하에 顔回, 閔子騫, 冉伯牛, 仲弓, 宰我, 子貢, 冉有, 子路, 冉有, 子夏 등을 ‘孔門十哲’이라 한다.
관계지한(灌谿志閑, -895) : 당대 남악하, 魏府(하북성) 館陶사람 성은 史씨. 어려서 栢巖선사를 따라 출가하고, 臨濟義玄에게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長沙(호남성)의 灌溪에 주하다. 唐建寧 2년 5월 29일에 問侍者曰,‘坐死者誰’ 曰,‘僧伽’ 立死者誰’ 曰,‘僧會’ 乃行六七步 垂手而逝.(조당집20, 전등록12, 광등록13, 회요10, 회원11)
굉지정각(宏智正覺,1091-1157) : 송대 조동종, 隰州(산서성)사람 성은 李씨, 이름은 正覺. 11세에 淨明寺 本宗에게 剃髮하고 14세에 晋州 慈雲寺(산서성 臨汾) 智瓊에게 受具하다. 18세에 諸方을 遊歷하다가 丹霞山(하남성) 子淳의 법을 받고(1124), 建炎원년(1127)에 舒州 泰平寺에 주하고 江州 圓通, 長蘆로 移住하다. 뒤에 天童山(절강성 寧波부근)에 주하며 開法하니(1129) 따르는 제자가 항상 1,200인이 되었으며 이곳에 약 30년 住하면서 가람을 一新하고 學德을 베푸니 ‘天童中興의 祖’라 칭하다. 紹興27년 10월 나이 67세로 입적. 시호는 宏智禪師. 師는 임제종 大慧宗杲(1088-1163)와 함께 당시 禪宗의 二大甘露門이라 稱하던 黙照禪의 巨匠이었다. 그는 大慧가 ‘黙照死禪’이라 痛駁하자 오히려 [黙照銘]을 지어 反駁하였다.(속전등록17, 계고략4, 회요29, 회원14, 명고승전5) 저서 : [굉지선사어록 4권] [宏智廣錄 9권(1157)]
교연청주(皎然淸晝,720-799?) : 唐代스님 별호는 詩僧, 謝康樂의 10세손. 辯才와 詩文에 능하였다.(姚壯의 “皎然年譜稿”참조) 저서 : [內典類聚40권] [詩式5권] [詩議3권] [杼山集(교연집)10권] [儒釋交遊傳10권]
구겸지(寇謙之,365-448) : 남북조대 北魏의 道士, 자는 輔眞. 太上老君으로부터 道敎의 經文과 仙術을 배워 스스로 道場을 세우고 新天師道의 이름으로 도교를 종교로 大成시키다. 또 재상 崔 浩(381-450)와 함께 太武帝의 廢佛을 주동하다.
구마라집(鳩摩羅什,343-413) : 梵 Kumarajiva 童壽라 번역. 父는 鳩摩羅炎, 龜玆國王의 누이동생 耆婆의 사이에서 태어남. 7세에 출가하여 母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고, 북인도 罽賓國에서 盤頭達多에게 소승교를 배우고 疏勒國의 須梨耶蘇摩에게 대승교를 배우다. 귀국하여 卑摩羅叉에게 律을 배우고 후에 주로 대승을 弘布하다. 383년 秦王 符堅이 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쳐서 羅什을 모셔오게 하였으나 부견이 패했으므로, 여광이 凉王이 되어 凉州에 머물다. 그뒤에 後秦 姚興이 凉을 쳐서 401년 師를 長安으로 모셔와 國賓으로 대우하고 西明閣과 逍遙園에서 여러 경전을 번역케 하다. 번역서로 [成實論] [十誦律] [大品般若經] [妙法蓮華經] [中論] [十住毘婆沙論] 등 총 98部 425卷에 달한다. 그는 三論宗의 조사이며 그의 三千여제자 가운데 道生,僧肇,道融,僧叡등을 什門四哲이라 하다.(出三藏記集12‧14, 高僧傳2, 開元釋敎錄4, 晋書95)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 : 唐代스님, 화엄종 제5조(선종으로는 하택종). 성은 何씨, 호는 규봉 順慶府 果州西充縣사람. 젊어서 儒敎를 배우고 28세(807)에 과거보러 가다가 遂州道圓에게 출가하여 禪을 배우다. 道圓의 지시로 淨衆寺 荊南張(신회의 제자)에 참예하다.그 뒤 어느날 信徒의 齋에 가서 圓覺經을 받게 되어 거기서 얼마 읽지 않고 깨친 바가 있었다. 후에 澄觀의 제자가 되어 華嚴經의 깊은 이치를 연구하고 華嚴五祖가 되었으나 항상 禪敎一致를 주장하다. 長慶원년(821) 圭峰의 草堂寺에 退居하여 저술에 힘썼으며, 재상 裵休의 귀의를 받다. 그는 [禪源諸詮集101권]을 지었는데 武宗의 會昌法難의 와중에 유실되어 [都序4권]만 전해지고 있다. 會昌元年 1월 興福塔院에서 62세로 입적. 唐宣宗이 定慧禪師라 시호하다.(*선종계보로는 神會-南印-道圓-宗密)(全唐文743, 규봉선사탑명, 송고승전6, 조당집6, 전등록13, 통기29, 통재16)
저서 : [圓覺經大疏抄 13권] [原人論 1권] [金剛經纂要] [華嚴倫貫] [唯識論疏] [사분율소 3권]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図] [禪源諸詮集都序 4권]등 200여권.
ㄴ 나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 : 고려대스님, 이름은 元惠 법명은 혜근 호는 나옹, 또 江月軒이라 했고 성은 牙씨, 寧海사람. 태어나면서부터 骨相이 비범하고 영특하였다. 20세때에 이웃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어른들에게,‘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功德山 妙寂庵(지금의 四佛山 潤筆庵)의 了然선사에게 가서 祝髮得度하다. 了然이 나옹에게,‘네가 여기에 온 주인공 그것이 무었이냐?’라 물으니 나옹은,‘능히 말하고 듣는 그것이 왔습니다. 그러나 보려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읍니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읍니까?’ 하니 요연이,‘나도 너와 같이 말도 하고 듣기도 하는 그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다른 곳에 가서 가르침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至正4년(1344)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坐禪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 때에 일본승려 石翁이 禪床을 치며,‘大衆還聞麽’하고 물으니 師가 게송으로,‘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하였다. 1348년 3월 大都(北京) 法源寺에서 指空禪師를 뵙고 지공問曰,‘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師曰,‘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는가 神通으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습니다’ ‘신통을 보여 보아라’하니, 師가 지공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손을 포개어 叉手하고 서 있었다. 뒤에 게송을 지어 指空선사에게 드렸으니,‘山河大地眼前花 萬像森羅亦復然 自性方知元淸淨 塵塵刹刹法王身. 迷則山河爲所境 悟來塵塵是全身 迷悟兩頭俱打了 朝朝鷄向五更啼’. 1350년 8월 남쪽으로 내려가 淨慈寺 平山處林선사를 친견하였다. 平山問曰,‘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師曰,‘大都에서 왔습니다’ ‘일찌기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 ‘西天 指空선사를 만났읍니다’ ‘지공은 매일 무엇을 하는가’ ‘지공은 매일 千劒을 씁니다’ ‘지공의 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一劒을 내놓아라’하니 師가 坐具로 평산을 후려쳤다. 평산이 선상에 쓰러지면서 ‘이 도둑이 나를 죽인다’고 소리치자 師가 평산을 일으켜 세우며,‘吾劒能殺人 亦能活人’이라 하니 山이 크게 웃고 손을 잡고 方丈으로 가서 차를 권하며 몇달을 묵어가게 하였다. 山이 어느날 信表로 法衣 한 벌, 拂子 하나를 주었다. 1358년 귀국하여 가는 곳마다 법을 설하다가 恭愍王이 청하여 내전에서 法門을 듣고 神光寺에 있게 하다. 그후 淸平寺에 주하다가 1370년 廣明寺에서 왕이 親臨한 가운데 ‘工夫禪大會’를 主宰하고 이듬해 王師가 되어 松廣에 주하였다. 1372년 우연히 지공선사의 ‘三山兩水之記’를 생각하고 檜巖寺를 重修하여 文殊會를 열어 낙성하였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賓天하고 1376년 우왕의 칙명으로 밀양 靈源寺로 가다가 驪州 神勒寺에서 입적하다. 師가 示寂할 적에 오색구름이 산위를 덮고 茶毘를 하니 頭骨 5片과 牙齒 40개는 타지 않았으며 舍利는 수없이 많았다 한다. 나이 57, 시호는 禪覺 또 普濟尊者. 李穡이 碑銘을 지어 碑와 浮屠가 회암사에 있다.(보제존자나옹화상行狀, 보제존자諡禪覺塔銘)
남악회양(南岳懷讓,677-744) : 당대스님 육조의 嫡子, 金州安康(陝西省 漢陰縣治)사람 성은 杜씨, 휘는 회양 시호는 大慧 탑호는 最勝輪之塔. 15세에 荊州의 玉泉寺 弘景율사에게 중이 되고 同學인 坦然의 권고로 嵩山慧安을 만난 뒤 혜능에게 叅詣하여 六祖云,‘從什麽處來’ 師云,‘從嵩山安國師處來’ 조운,‘是什麽物恁麽來’ 師罔措 於是執侍八年 方省前話 乃告師云,‘懷讓會得當初來時 和尙接某甲 是什麽物恁麽來’ 조운,‘儞作麽生會’ 사운,‘說似一物卽不中’ 조운,‘還假修證否’ 사운,‘修證不無 染汚不得’ 조운,‘祗此不染汚 是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乃至西天諸祖亦復如是’(전등록5‧南岳讓章) 心印을 깨닫고 법을 잇다. 713년 남악 般若寺 觀音臺에서 30년동안 있으면서 선풍을 선양하다. 唐天寶3년 8월 입적하다. 나이 68. 開元년간에 馬祖가 그의 법을 잇고 中國禪의 主流를 형성하다. 또 靑原行思와 함께 六祖의 二大弟子가 되다.(전등록5, 傳法正宗記7, 宗門統要속집4, 古尊宿語錄1)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 唐代스님, 越州諸曁사람, 성은 冉씨. 어려서 六祖慧能을 따라 배우고 그의 법을 잇다. 六祖寂後에 여러 산에 두루 住하였는데 五嶺‧羅浮山, 四明‧天目山을 거쳐서 南陽의 白崖山 黨子谷에 들어가 40여년을 山門 밖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上元2년(761) 숙종이 그의 名聲을 듣고 詔勅을 내려 서울로 불러 스승의 禮로 맞게 하다. 玄宗,肅宗,代宗의 두터운 歸依를 받았으나 항상 淡泊한 本性 그대로 天眞自然을 즐기었다. 항상 南岳慧思의 宗風을 사모하고, 朝廷에 奏請하여 均州 武當山에 太一 延昌寺를, 黨子谷에 香嚴 長壽寺를 창건하고 大藏經 一部를 모시었다. 혜충은 行思, 懷讓, 神會, 玄覺 등과 함께 慧能門下의 五大宗匠으로 그의 禪風은 특히 달랐는데 당시 敎界에 光彩를 발하여, 그는 神會와 함께 北方禪風을 이끌며 馬祖의 南方禪風을 비판하였다. 그의 선풍은 身心一如, 卽心卽佛을 宗旨로 하고 또 無情說法을 처음으로 主唱하였다. 더우기 南方의 禪者가 經典을 가벼이 여기고 隨意說法을 배척하였는데, 그는 三藏을 연구하고 敎學을 重視하고 스승의 설법에 의거하여 말하였다. 大曆10년에 示寂하니 조칙으로 당자곡 향엄사에 歸葬케 하다. 代宗이 大證國師라 시호하다.(조당집3, 송고승전9, 전등록5, 회요3, 회원2, 통재13)
남천보원(南泉普願,748-834) : 唐代 南岳下, 鄭州(하남성) 新鄭사람 성은 王씨. 至德2년(757) 大隈山 大慧에게 출가하고, 大曆12년(777,30세) 嵩岳에 가서 受具하다. 처음에 性相, 三論 등을 공부하다가 玄機는 經論의 밖에 있다는 意旨를 생각하고, 馬祖門下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貞元11년(795) 池陽(안휘성)의 南泉山에 선원을 짓고 스스로 ‘王老師’라 칭하며 30년간 下山하지 않고 논밭을 일구며 주하니 學人이 항상 모여 성황을 이루다. 太和초년에 前太守 陸亘의 귀의를 받고, 문하에 趙州從諗, 長沙景岑, 子湖利蹤 등의 뛰어난 제자를 두다. 태화8년 12월 87세로 示寂. 師는 특히 학인을 接化하는 方便語가 뛰어나 ‘南泉斬猫, 南泉水牯牛, 南泉牧丹’등의 공안이 있다.(송고승전11, 조당집16, 전등록8, 會要4, 회원3)
노 자(老子, ) : 춘추시대 哲人, 道家의 시조. 성은 李 이름은 耳, 자는 伯陽 시호는 聃, 楚나라 苦縣(하남성) 厲鄕사람. 周나라 臧室의 柱史(臧書관리인)로 있을 때, 공자(30세)가 禮를 배웠다 한다.(孔子家語‧觀周편) 뒤에 亂世를 피하여 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關令 尹喜가 道를 구하자 道‧德 5千言을 전해주고([老子道德經]) 떠났다 한다. 그는 160여 세를 산 인물이라 하지만 임신후 80년을 母胎 속에서 사는 등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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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마팔라 =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 唐代 스님, 石頭希天의 法嗣. 그는 長安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馬祖에게 찾아가서 승려가 되다. 그 후 석두의 법을 잇다. 그가 洛陽의 혜림사에 머물 때 추운 겨울날 법당의 木佛을 꺼내 불을 지폈다.(丹霞燒佛) 그 때 院主왈,‘그럴 수가 있느냐?’하니 師가 ‘나는 부처님을 태워서 舍利를 얻으려고 하오’ 원주,‘목불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師왈,‘사리가 안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하다. 末年에 그는 鄧州 丹霞山에 살다가 86세에 門人들에게 목욕하게 하고 갓쓰고 지팡이를 들고 나앉으며,‘자 나는 간다. 신을 신켜다오’하고 신 한짝을 발에 걸친채 땅에 내려서는 순간 入寂하다.(宋傳燈錄11, 祖堂集4, 전등록14, 會要19, 會元5)
담 요(曇曜, ) : 5세기대 北魏스님. 태무제의 廢佛 때에 그는 法衣와 器物을 가지고 佛法을 지키다. 文成帝가 卽位하자 興佛에 盡力하다. 또 [付法藏傳] [淨度三昧經] [大吉義神呪經]등을 다른 승려들과 공동번역하다. 平城에 영암사를 건립하고 주하다. 477-499년의 30년 동안 3대의 황제를 섬기며 佛敎復興에 노력하였다.
대매법상(大梅法常,741-808,752-839) : 唐代 南岳下, 襄陽(호북성)사람 성은 鄭씨, 幼年부터 荊州 玉泉寺에서 修學한 후 冠年에 受具하고 경론을 연구하다가 禪에 뜻을 두고는 馬祖下에서 깨달음을 얻다. 貞元12년(736) 四明남쪽 梅子眞의 은거처였던 大梅山에 주하다. 거주하기 40년 卽心卽佛, 非心非佛의 宗風을 선양하였으며 開城원년(836) 護聖寺를 짓고 6‧700의 대중을 이끌다가 同四年 9월 88세로 示寂. 進士 江積이 비문을 짓다. 제자에 杭州天龍, 新羅迦智, 新羅忠彦 등이 있다.(조당집15, 송고승전11, 전등록7, 회요4, 회원3) 저서 : [대매산상선사어록1권]
대주혜해(大珠慧海, ) : 唐代 馬祖의 제자. 建州사람 성은 朱씨, 휘는 慧(또는 惠)海. 越州 大雲寺 道智에게 출가‧受業하고 뒤에 마조의 법을 이었다.(일설에 馬祖의 首弟子) 一日有法師數人이 來謁曰,“擬伸一問이니다” 師曰,“大德이 經文分明한대 那得未是오” 僧無對라가 良久却問,“如何是大涅槃이닛고” 師曰,“不造生死業이니라” 曰,“如何是生死業이닛고” 師曰,“求大涅槃是生死業이며 捨垢取淨是生死業이며 有得有證是生死業이며 不脫對治門是生死業이니라” 曰,“云何則得解脫이닛고” 師曰,“本自無縛이니 不問求解오 直用直行是無等等이니라” 僧曰,“如禪師和尙者 實謂希有니다.”하며 禮謝而去하니라.(전등록6, 대주혜해장) 이것으로 보아 百丈보다 夏臘이 많은 上首였으나 먼저 死去한 듯하다.(조당집14, 전등록6,28)
저서 : [頓悟入道要門論 1권]
대지원조(大智元照,1048-1116) : 宋代 律宗스님, 餘杭錢唐(절강성 杭州府錢唐縣治)사람, 성은 唐씨. 자는 湛如, 湛然 별호는 安忍子 이름은 원조. 錢塘의 祥符寺 慧鑑律師에게 출가하여 律을 배우고, 또 神悟處謙을 따라 천태교학을 연구하다. 元豊원년(1078)에 雷峰의 慧才에게 受具하다. 항상 베옷을 입고 錫杖을 끌고 鉢盂를 들고 市街에서 걸식하며 禁戒를 嚴守하였다. 元符원년(1098) 개원사에 戒壇을 창립하고 만년에 西湖 靈芝의 崇福寺에서 30년을 주하다. 문하에 道俗이 항상 300인에 달하고 傳戒度僧이 60여회에 이른다. 일찌기 淨土敎를 가벼이 여겼는데 후에 重病을 얻어 천태의 [十疑論]을 읽고는 정토를 篤信하다. 宋政和 6년 9월 1일 제자에게 觀經과 普賢行願品을 외우게 하고 앉아서 入寂. 나이 69세.(樂邦文類2,3,5 통기29,46 통재29, 계고략4, 淨土聖賢錄3)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 : 송대 임제종 양기파, 宣州(安徽省) 寧國縣사람, 성은 奚씨 자는 曇晦 호는 妙喜, 雲門. 12세에 鄕校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세간공부가 어찌 出世間法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16세에 東山 慧雲院에서 득도하고 自力으로 雲門, 睦州등의 說話를 熟讀하였다. 출가초기에 曹洞門下에서 禪旨參究하고 政和원년(1111) 徑山의 湛堂文準(眞淨克文의 法嗣)회하에서 공부하고 覺範慧洪(1071-1128), 張商英 등을 拜謁하다. 湛堂의 遺託으로 圜悟克勤에게 나아가 증오하다. 승상 呂舜徒의 주청으로 ‘佛日大師’의 호를 받고, 圓悟가 蜀땅으로 돌아간 후 金과의 전란을 피하여 海昏(강서성)의 雲門庵에 이주하다. 사는 특히 조동의 黙照禪에 대하여 ‘公案禪’을 鼓吹하며 徑山의 能仁禪院에서 교화하니 학인이 항상 2천을 헤아려 ‘臨濟의 再興’이라 칭하다. 그러나 戰亂이 奸相 秦檜 등에 의해 和約으로 체결되자 주전론자인 張九成黨으로 몰려 衣牒을 빼앗기고 衡州(호남성)로 유배당하며 10여년을 고생하는 동안 [正法眼藏 6권]을 지었다. 그뒤 사면되어 阿育王寺에 주하며 天童山의 宏智와 道交하였다. 1158년 다시 경산에 주하면서 孝宗帝로부터 ‘大慧禪師’라는 호를 받고, 남송 隆興원년 75세로 示寂하다.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남긴 臨終偈에,‘生也只恁麽 死也只恁麽 有偈與無偈 是甚麽熱大’라 하다. 시호는 普覺. 그는 특히 五祖演에서 비롯한 公案禪(看話禪)을 확립하여 천동정각과 當代 禪界의 雙璧을 이루었다.(大慧年譜, 회요17, 보등록15, 회원19, 통재20,속전등록27, 속선림승보전6, 명고승전5)
저서 : [大慧語錄 12권] [대혜법어 3권] [대혜보설 5권][大慧宗門武庫] 등.
대홍보은(大洪報恩,1058-1111) : 송대스님, 曹洞宗 投子義靑의 法嗣. 黎陽(안휘성)사람, 성은 劉씨, 대홍산에 오래 주하므로 호가 되다. 弱冠에 官界에 나아갔다가 세속을 싫어하여 조정에 청하여 출가하다. 舒州 투자산의 義靑에 참예하여 心要를 깨닫고,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찾은 후 丞相 公縝의 청으로 西京(하남성 洛陽) 少林寺에서 開法하다. 뒤에 隨州(호북성 德安府) 大洪山 崇寧保壽禪院으로 옮겨 주하다. 본래 律院이던 것을 禪院으로 고쳐서 曹洞家風을 擧揚하다. 無盡居士 張商英과 친하다가 政和원년 示寂하다. 세수 54, 승납 32.(湖北金石志10‧수주대홍산시방숭녕은선사塔銘, 회요28, 회원14, 보등록3, 속전등록10)
저서 : [曹洞宗派錄] [受菩提心戒文] [落髮受戒儀文](不傳)
덕산선감(德山宣鑑,780-865) : 당대 靑原下, 劍南(사천성)사람 성은 周씨. 律과 性相을 공부하고 [금강경]에 정통하여 ‘周金剛’이라 칭하다. 南方禪을 論破하다가 禪에 뜻을 두고 龍潭崇信(天皇道悟의 제자)을 참예하여(龍潭紙燭) 법을 잇다. 다시 潙山靈祐의 지시로 灃陽(호남성)에서 30년을 주하다가, 武宗의 破佛을 만나 獨浮山의 石室에서 難을 피하다. 大中初에 興佛時 武陵太守 薛延望의 청으로 德山에 주하며 宗風을 떨치다. 咸通6년 12월 86세로 示寂하다. 시호는 見性大師.(송고승전12, 조당집5, 전등록15, 속등록1, 회요20)
도 선(道宣,596-667) : 중국 南山律宗의 始祖, 丹徒사람(혹은 長城人) 성은 錢씨. 16세에 출가하여 智首律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律典을 배우다. 武德7년(624)에 終南山 倣掌谷에 들어가 白泉寺를 짓고 계율을 嚴守하며 修禪하다. 貞觀19년(645)玄奘이 귀국하여 弘福寺에서 譯經을 시작하자 勘文을 맡아 수백권의 律部와 傳記를 쓰다. 그가 西明寺에 住할 때에 밤길을 가다가 失足하였으나 다치지 않았는데 其實은 天童이 화상을 옹호한 것이라, ‘天童이 曰,“某非常人 卽毘沙門天王之子那吒也 護法之故 擁護和尙 時之久矣”라 하다. 특히 四分律宗을 이루어 南山律宗을 세우다. 乾封2년(667) 10월에 72세로 입적하니 唐高宗이 澄照라 諡號하다.(宋高僧傳14) 저서 : [속고승전30권] [廣弘明集] [大唐內典錄] [四分律行事抄]등 20여부.
도솔종열(兜率從悅,1044-1091) : 宋代 임제종 황룡파, 虔州(강서성)사람 성은 熊씨. 15세에 普圓院 德崇上人에 의지하여 출가하고 이듬해에 受具하다. 처음 雲蓋守智의 지시를 받다가 다음에 眞淨克文을 참예하고 鹿苑寺에서 세상에 알려지다. 가끔 石霜楚圓에게 得法한 淸素의 提撕함에 開發되어 그의 인가를 받고 그의 지시로 眞淨을 찾아가 법을 잇고, 隆興府의 兜率寺에 주하며 大法을 宣揚하다. 無盡居士 張商英이 그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元祐6년 11월 48세로 시적하다. 뒤에 徽宗 宣和3년(1121) 장상영의 주청에 의해 眞寂禪師라 시호하다.(속등록23, 회요15, 보등록7, 회원17, 통재19) 저서 : [兜率悅禪師語要 1권]
동진도안(釋道安,314-385) : 중국스님 常山扶柳人, 성은 衛씨. 儒學을 숭상하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2세에 출가하다. 용모가 검고 못생겨서 田舍에 驅役하기 3년만에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하니 師가 辯意經을 주자 밭에서 일하며 쉬는 여가에 책을 보더니 저녁에 모두 暗誦하거늘, 다시 成具光明經을 주니 모두외우자 스승이 크게 놀라 剃髮을 허락하다. 구족계를 받고 遊學에 나서 鄴城中寺의 佛圖澄을 스승으로 모시고 諸方을 다니면서 經律을 구하여 法濟,支曇에게 배우다. 또 同學인 法汰, 僧先, 道護와 교류하다. 東晋永和 5년(349) 華林園에 들어가고 후에 慧遠등 5백여인을 이끌고 襄陽에 이르러 불법을 홍포하니 白馬寺가 좁아서 檀溪寺를 새로 짓다. 師가 양양에 住하는 15년동안 매년 放光般若經을 강의하다. 379년 前秦苻堅이 공격하자 師는 習鑿齒와 함께 長安으로 돌아오다. 城內의 五重寺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강론하다.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1.經典을 序分,正宗分,流通分의 3과목으로 해석하여 바른 義解에 힘쓰고, 2.승려의 성을 釋씨로 통일한 것, 3.승려의 생활규범을 제정한 것 등이다. 秦建元 21년 72세로 入寂하다.(出三藏記集15, 名僧傳抄, 高僧傳5, 大智度論24, 晋書列傳52, 續高僧傳9‧29, 法苑珠林13)
저서 : [般若折疑略] [大十二門註] [陰持入註] [綜理衆經錄] [西域志20권]
석도안(北周道安, -600) : 北周代 스님, 성은 姚씨 馮翊胡城사람. 일정한 스승이 없이 大德이 계시단 말만 들으면 찾아가서 배우다. 천자가 勅命으로 불렀으나 安答曰, ‘陛下爲民故出 貧道爲法不出’이라 하니 帝가 듣고 ‘彈指嘆善久之’하더라. 獨子이므로 母를 大中興寺에 모시고 진지를 손수 지어드리고 난 뒤에 講하였다 한다. 隋文帝 開皇말년에 入寂.(속고승전23)
도연명(陶淵明,365-427) : 진대 시인, 潯陽사람 이름은 潛, 자는 淵明 호는 五柳先生. 405년 彭澤의 令이 되었으나 80여일 후에 [歸去來辭]를 남겨두고 歸鄕하다. 그의 詩는 自然味를 노래한 것이 많으며, 敍景詩가 이 때부터 형성됨. 저서 : [陶彭澤集]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 唐代스님 筠州會稽사람, 성은 兪씨. 靑原下 4세 雲巖曇晟의 法嗣, 동산은 호 휘는 良价(혹은 介), 曹洞宗의 開祖.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般若心經을 외우다가 ‘無眼耳鼻舌身意’에 이르러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이상히 생각하였다. 五洩山의 靈黙에게 중이 되고 21세에 嵩山에 가서 受具하다. 여러 곳을 다니다가 南泉普願을 찾아 공부하고 潙山靈祐에게 가서 ‘無情說法話’를 참구하여 契合하다. 위산의 指示로 雲巖曇晟에게 가서 前의 因緣을 들어 더욱 정진하다가 흐르는 물 뒤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豁然히 깨달아 雲巖의 법을 잇다. 大中(847-859)末에 新豊山에 있다가 筠州 洞山菩提院(혹 普利院)으로 옮겨 가풍을 드날렸다. 咸通10년 3월 朔旦에 剃髮披衣를 명하고 鳴鐘하고 奄然히 示寂하니, 때에 제자들이 悲痛해하자 師가 홀연히 눈을 열어 이르대,‘夫出家之人 心不依物 是眞修行 勞生息死 於悲何有 淪喪於情 太麤着乎’라 하고는 愚癡齋를 지내게 하고 재가 끝나는 날(3월 8일) 입적하였다. 나이 63, 시호는 悟本大師. 門下에 雲居道膺, 曹山本寂, 소산광인, 華嚴休靜 등이 있다.(송고승전12, 전등록15, 회요20, 통기42, 통재17)
저서 :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 [寶鏡三昧歌] [玄中銘] [新豊吟] 등.
두 순(杜順,557-640) : 당대 화엄종初祖. 雍州萬年사람, 속성은 杜씨 휘는 法順. 당태종이 귀의하여 帝心尊者라 賜號함. 항상 ‘아미타불’을 念하라고 권하고 후세인이 ‘文殊의 化身’이라 稱함
저서 : [華嚴法界觀門] [五敎止觀]
ㅅ 사
사마광(司馬光,1019-1086) : 宋代 학자, 정치가. 山西省출생 자는 君實, 호는 迂夫, 또 迂叟 司馬溫國公을 贈職받았으므로 ‘司馬溫公’이라 통칭한다. 神宗초년에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다가 失脚하고, 哲宗代에 政丞이 되어 신법을 모두 폐지하였다. 그가 지은 [資治通鑑]은 대표적인 編年體의 歷史書로 治道와 爲政者의 鑑이 된다는 뜻이다. 저서 : [資治通鑑 294권] [通鑑考異] [獨樂園集] [司馬文正公集]
사영운(謝靈運,385-433) : 劉宋代 시인, 晋代 名將 謝玄의 孫, 康樂公의 작위를 얻다. 文帝때에 侍中에 이르렀으나 讒言에 의해 죽음. 그의 淸新한 詩風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다. [대반열반경] 36권의 번역을 완성하다. 元嘉 10년에 죽다.
서산휴정(西山休靜,1520-1604) : 휴정은 법명, 성은 崔씨 完山사람. 자는 玄應 호는 淸虛, 西山. 9,10세에 兩親을 잃고 과거에 落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고는 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靈觀에게 인가를 받고 萬行하다가, 1589년 정여립의 獄事에 無業의 誣告로 체포되었으나 宣祖가 오히려 상을 내리다. 1592년 義州에서 宣祖의 명으로 都總攝이 되어 義僧 5천을 인솔하여 倭亂에 대처하다. 후에 金剛‧妙香‧頭輪山에서 가풍을 선양하다. 묘향산 圓寂庵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 뒤에 입적하다.
저서 : [禪家龜鑑] [三家龜鑑] [淸虛堂集 8권] [禪敎釋] [禪敎訣]등.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 : 청원행사의 제자, 端州高要人 성은 陳씨. 육조스님에 득도하고 육조가 입적하므로 行思에게 師事함. 저서에 [參同契 1권] [草庵歌 1권]
석망명(釋亡名,515?- ) : 北周代스님, 성은 宋씨 본명은 闕殆. 梁나라 竟陵王과 깊이 사귀며 일찌기 혼인하지 않더니 梁이 패망하자 출가하여(37세?) 호를 亡名이라 하다. 北周武帝 天和2년(567) 5월에 大冡宰 宇文護가 글을 보내었으나 答曰,‘--- 貧道 稟質醜陋 恒嬰疾惱 因傴成恭 惟道是務 不曾棲息五十二年 自捨俗緣十有五載 萬人歸國 ---’라 하며 사양하였다. 뒤에 난리가 나서 冠邑이 淪沒하고 知識이 零落하게 되자 ‘대장부가 生當降魔하고 絶學箴文을 짓겠다’하고 息心讚을 짓다.
저서 : [至道論] [去是非論] [僧崖菩薩傳] [大唐內典錄제5]등 12권
석상경제(石霜慶諸,807-888) : 唐代스님 廬陵(강서성 吉安府) 新金玉笥鄕 사람, 성은 陳씨. 13세에 洪井西山의 紹鑾禪翁에게서 중이 되고 23세에 嵩山에 가서 受具하다. 뒤에 道吾圓智(청원하,약산유엄의 자 : 769-835)의 法을 받고 石霜山에서 그를 執侍하고 圓智寂後 學徒가 운집 500이 넘었다고 한다. 僖宗 이 紫衣를 내리니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光啓4년 2월 82세로 입적하다.(송고승전12, 전등록155, 선림승보전5, 宗門統要속집14, 會元5, 계고략3)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 : 宋代스님, 雲門宗 智門光祚의 제자. 明覺은 시호 휘는 중현, 자는 隱之 성은 李씨 遂州사람. 어려서 출가하여 대자사 元瑩, 석문의 蘊聰에게 교리를 배우고 智門光祚를 參謁하고 법을 잇다. 후에 明州 雪竇山資聖寺에 住하며 禪風을 드날리다. 30년을 주하면서 70여제자를 기르니 號하기를 ‘雲門의 中興祖라 하였다. 또 傳燈錄을 중심으로 古則 100則을 가려서 [雪竇頌古]라 하다.(廣燈錄23, 續燈錄3, 禪林僧寶傳11, 會要27, 會元15) 저서로 [洞庭語錄] [瀑泉集] [祖英集] [頌古集]
설봉의존(雪峰義存,821-908) : 唐代스님 靑原下 德山宣鑑의 제자, 泉州南安(福建省)사람, 성은 曾씨. 12살에 父를 따라 蒲田 玉潤寺 慶玄에게 출가하고 17세에 중이 되다. 芙蓉山 恒照에게 배우고 뒤에 德山에게 참예하여 법을 잇다. 咸通11년(870) 行實의 請에 의해 福府 서쪽 象骨山에 암자를 짓고 주하다. 이 산은 겨울에 눈이 제일 먼저 내리므로 雪峰이라 하였는데, 후에 희종이 眞覺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紫袈裟를 주었다. 뒤에 閩(복건성)에 돌아가서 閩王의 厚意를 입었으며 梁開平2년 5월 87세로 입적하다. 그의 제자 雲門이 雲門宗을 열다.(송고승전12, 전등록16, 통기42, 통재25, 禪宗正脈7)
세친(世親,또 天親 ) :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사람, 4-5세기경의 학승, 바라문족 출신. 父는 교시가, 형은 無着(Asanga). 그는 소승에서 500부 대승에서 500부의 論을 지어 千部論師라 불린다.
수 원(修圓,770-834) : 日本 仁明王代 스님, 北谷사람, 성은 小谷씨. 어려서 賢憬에게 法相을 배우고 794년(25세) 最澄의 一乘止觀院 ‘供養會’에 勤操, 賢算등과 함께 초청되어 比叡山에 오르다. 802년 和氣, 弘世 등의 請에 응하여 高雄山寺에서 天台法文을 講하다. 827년 最澄에게 나아가 密權을 받은 후 顯敎를 배우고 傳法院을 열어 크게 講說에 힘쓰다. 承和원년(834) 65세로 입적.(南都高僧傳, )
습착치(習鑿齒, ) : 중국 晋代學者, 襄陽사람 자는 彦威. 博學하고 能文, 史才가 있었다. 영양태수를 지낸일이 있고, [漢晋春秋]를 지어 蜀의 正統性을 주장하였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승 광(僧光,혹은 僧先) : 六朝시대 道安과 같은 년배의 승려. 常山淵公(康僧淵?)의 제자. 冀州人. 성품이 소박하고 志操가 굳었다. 경론에 밝았으며 ‘石氏의 亂’을 피해 飛龍山에 숨어 지내면서 도안,축법태,道護등과 交遊하다. 뒤에 襄陽에서 병으로 죽다.(고승전5)
승 선(僧先)=승광 : 六朝代 스님.
승 우(僧祐,445-518) : 南北朝代 스님, 建業(강소성강녕부)사람, 성은 兪씨. 어려서 建初寺에 가서 禮拜하고 踊躍하여 집에 돌아오니, 부모가 그의 뜻을 憐愍히 여겨 출가를 허락하다. 건초사 僧範에게 출가하고, 14세에 定林寺 法獻을 의지하여 律部에 정통하였다. 受戒의 을 說하는 한편 定林, 建初 등의 修理를 돕고, 또 無遮大會, 捨身齋등을 주관하다. 師는 또한 畵像의 規矩에 밝아서 光宅‧攝山의 大像을 造成할 때에 그의 지시를 받다. 梁武帝의 禮遇가 두터웠으며 僧事에 관한 모든 것을 師에게 一任하였다. 晩年에 다리가 쇠약해지자 內殿까지 가마타고 들어옴을 허락하다. 師는 특히 十誦律에 정통하여 일찌기 [十誦義記10권]을 지었으며 門徒가 특히 많아 智藏, 慧廓, 寶唱, 臨川王宏, 南平王偉 등 僧俗 1만1천여에 달하였다. 天監17년 5월에 건초사에서 74세로 입적하니, 제자 正度가 碑를 세우고 東莞劉勰이 글을 짓다.(출삼장기집9‧12, 고승전8‧僧柔傳, 제11, 제12‧超辯전, 제13法獻전, 僧護전, 法悅전, 歷代三寶紀11, 속고승전1‧寶唱전, 제5智藏전, 제6明徹전)
저서 : [釋迦譜 5권] [출삼장기집 15권] [弘明集 14권] [菩薩善戒地持二經記] [大集虛空藏無盡意經記] [賢愚經記](현존), [世界記 5권] [薩婆多部相承傳 5권] [法苑集 10권] [法集雜記傳銘 7권](散佚)
승 예(僧叡,355-439) : 東晋‧南北朝代 스님, 什門四哲의 한사람. 魏郡(冀州)長樂사람. 어려서 출가하여 18세에 僧賢法師의 제자가 되다. 22세에 이르러 경론에 널리 통하게 되어 僧朗이 放光經을 강의할 때 종종 질문을 하곤 하여 僧朗이 僧賢에게 승예를 칭찬하였다. 24살이 되자 諸國을 다니며 강의하니 선비들이 곳곳에서 모였지만 僧叡는 항상,‘經法은 적게 배워도 因果를 알기에 충분하다. 禪法이 아직 전래되어 있지 않으니 마음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뒤에 羅什이 장안에 오자 제자가 되어 먼저 禪經번역을 원하였다. 27세 쯤에 遊歷生活을 끝내고 長安의 道安에게 師事하였으며, 385년 道安이 示寂하자 난을 피해 廬山으로 가서 慧遠門下에서 念佛을 배우다. 뒤에 羅什에게 [三論]을 배우고 [成實論]을 강의하여 칭찬을 받다. 또한 姚興과 姚嵩의 尊崇을 받았으며, 409년 羅什寂後 점차 西方往生에 관심을 가지고 416년 建康의 烏衣寺에 머물렀다. 梵語에 정통했던 師는 경전을 강의하다가 謝靈運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十四音訓敍]를 지어 梵漢의 음과 의미의 차이를 밝혔다. 또 羅什이 일찌기 梵漢의 同異를 師와 의논하면서 曰,“天竺의 풍속에서는 文章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宮商體韻의 五音이 絃에 꼭 들어맞게 詩의 文體와 韻律은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대할 때는 讚德의 頌文이 있고 부처님을 대하는 儀式에도 讚佛의 頌文이 있다. 그러므로 梵文을 漢語로 번역하면 문장의 멋진 修飾을 잃어버리게 된다. 飜譯은 大義는 얻을 수 있지만 문체가 변해 버리기 때문에 음식을 씹어 나누어 주듯이, 단지 원래의 맛만 없어질 뿐 아니라 맛이 없어 吐하고 싶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臨終에 이르러 제자를 불러놓고,“평생동안 西方에 태어나기를 誓願하였다. 영원히 法侶를 위해 往生西方을 원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방을 향하여 합장한 채 입적하다. 때는 元嘉16년 85세 였다.(고승전6, 출삼장기집5‧喩疑)
저서 : 大智度論, 十二門論, 中論, 大品‧小品經, 法華經, 維摩經, 思益經 등의 序文을 짓다.
승 조(僧肇, ) : 羅什門下 4哲의 한사람, 처음에 老莊을 공부하다가,‘歎曰 美則美矣 未盡善也 後讀旧譯之維摩經 歡喜頂受 始知所歸 自此出家 ---’(고승전6 )
저서 : [肇論- 物不遷論,般若無知論,涅槃無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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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 ) : 스리랑카의 거사, 본명은 데이비드 헤와비타르네. 父는 무달리야르 다르마팔라이며 母는 말리카.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속에 태어나 6세에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서를 공부하면서도 항상 5계를 지켜나갔다. 1878년 콜롬보북부의 성공회부설 ‘성토마스 학교’에 입학했다. 매년 ‘베사크 祭日’마다 학교에서 도망나와 봉축행사에 참석하다. 그는 논쟁에 탁월한 재주를 가져서 독선에 찬 기독교도와 논쟁하기를 즐겼다. 더우기 코타헤나 사원의 ‘메게투바테 구나난다’스님에게 토론과 웅변을 배웠다. 그뒤 1875년 뉴욕에서 설립된 신지학회(러시아인 H.P.Blavatsky女史와 미국인 변호사 Henrys,Olcott대령, 변호사 W.Q.Judge가 창립한 과학과 종교, 철학을 통합한 세계관의 제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단체)에 관심을 가지다가, 1880년 5월 스리랑카에 온 두 設立者가 불교로 改宗하면서 인연맺게 된다. 1884년부터는 일생을 집을 떠나 佛法의 守護와 繁榮을 위해 노력하는 Brahmachari가 되었다. 1899년 다르마팔라는 日本을 방문하는 등 세계불교의 흐름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1891년 인도불교성지순례를 결심하고 일본인 승려 코젠구나 라트나와 함께 바라나시, 사르나트에 도착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일기에,‘애석하도다. 이 聖地에 사는 불교인 누구도 파괴자들의 손으로부터 사리탑과 조각품들을 보존하는 사람이 없다니---’라고 쓰고 있다. 부다가야에서 그는 “인도에서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켜 성지를 회복하리라”고 마하보디 大塔 앞에서 誓願하고는 Mahant(힌두교 고위성직자)의 소유가 된 大覺寺를 찾는 일에 착수하였다. 1891년 3월 콜롬보에서 ‘부다가야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마하보디저널’을 창간하여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1893년 시카고에서 ‘세계종교대회’가 열렸을 때 議長인 버로우博士의 초청으로 명연설을 하여 불교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편견없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확신을 주저없이 말하고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의 길을 神學과 敎理가 막는다면 얼른 치워버리십시오. --- ” 그는 이 연설을 통하여 많은 후원자를 얻었는데 그 중에도 뉴욕의 스트라우스(미국 최초의 불교도)와 메어리 포스터부인(하와이 카메하메하大王의 직계후손)을 만나게 된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다시 마한트와 협상과 소송을 번갈아가며 한 결과 부다가야의 사원이 힌두교의 소유가 아니라는 판결에 힘을 얻어 1896년 5월 26일 켈커타에서 ‘베사크 祝祭’를 개최하였다. 그는 가끔 에드윈 아놀드(‘아시아의 빛’의 저자), 막스밀러박사(옥스퍼드대학의 동양학교수)와 교류하며, 또 대중설법에서 항상 ‘신성하고 청정한 생활’을 권하였다. 그의 일상은 항상 요가수행과 [염처경] [청정도론]의 연구와 규칙적인 禪修行, 계율생활이 기본이 되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활동의 信條는,‘죽음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나는 이미 백만번도 더 죽었고 앞으로도 백만번은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無知와 利己心,激情의 惡으로부터 건져내리라’라고 하였다. 올코트 대령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신지학회에서 벗어나 1899년 다시 인도에 가서는,‘신의 섭리가 그대들을 돌보리라 생각하지 말라. 全能者는 천년세월이 한시간에 불과할 뿐이다. 합장하고 기다린들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깨어나라 나의 형제들이여 ---’
1906년 부다가야 소송은 敗訴로 끝났으나 힌두교와 불교 공동관리하에 두는 成果는 있었다. 1913년 49세의 다르마팔라가 8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宗務院長 金錦潭스님에게 ‘석존사리 1과’를 전하였다. 그는 영국에도 불법전파활동을 벌여 1925년 가을 런던에서부터 講演과 座談을 벌이고 ‘The British Buddhist'지를 창간하였다. 1931년 모든 財産을 정리하고 7월 出家戒를 受持하고, 캘커타에 ‘물다간다쿠티 寺院’의 開院式을 열다. “8백년동안의 流配 끝에 불교도는 이제 神聖한 鹿野苑으로 돌아왔습니다. ---” 1932년 1월 실론에서 具足戒를 받았으나 건강이 워낙 악화되어 갔다. “나의 죽음을 막으려 애쓰지 말라. 藥이나 注射로 나의 고통을 더이상 연장시키지 말라. 나는 죽어 베나레스의 브라흐만 집안에 還生하여 佛陀의 法을 전파하고 부다가야 聖地를 되찾으리라” 1933년 4월 29일 승려와 제자들의 涅槃經 독경 속에 70세로 入寂하다.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성실한 열정과 護法佛事, [인도불교의 復興]를 위한 끝없는 정진’이었다.
아 난(阿難,범 Ananda) : 십대제자중 多聞第一, 意譯하면 無染,慶喜,歡喜. 불의 從弟, 제바달다의 친동생(父는 斛飯王이라 하나 異說이 있다). 부처님 成道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다고 한다. 8세에 출가하여 수행하는데 美男인지라 女子의 유혹을 많이 받게 되지만 수행을 완성하다. 불멸후 가섭으로부터 ‘阿難五罪’와 未離欲의 꾸짖음을 받고 용맹정진하여 확연히 깨닫고 나서 結集大衆에 동참하여 暗誦者가 되다. 그의 업적으로는 1.부처님의 成道 20년후부터 親近侍者가 되다. 2.다문제일로 佛滅度後 경전결집의 중추가 되다. 3.세존의 姨母 憍曇彌(대애도)비구니의 出家를 위해 노력한 것 등을 든다.(장아함2 遊行經, 중아함33 侍者經, 잡아함44, 증일아함1 序品, 사분율54, 摩訶僧地律32, 毘尼母經3, 有部毘那耶雜事39‧40, 대비바사론16, 經律異相15, 태장계七集上)
아육왕(阿育王,범 Asoka, B.C321- ) : 구역은 阿恕伽, 신역은 阿輸伽, 無憂라 번역.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왕(B.C 268-B.C 232在位). 全印度를 통일시키고 불교를 보호한 왕. B.C321년경 공작왕조를 개창한 ‘찬드라 굽타’대왕의 손자 빈두사라왕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나 부왕이 죽은 후 배다른 형 수사마를 죽이고 즉위하다. 어떤 사문의 설법을 듣고, 즉위 8년에 칼링가를 정복하여 많은 인명을 殺傷하고는 불교에 귀의하다. 이후로는 법(Dharma)에 의한 정치를 행하고 8만4천개의 寺院과 寶塔을 건축하고 石柱를 세웠으며, 즉위 17년에 華氏城에서 제3결집을 행하고 희랍5국에 전도승을 파견하다.(아육왕전, )
안 자=안영(晏子,晏嬰 -500B.C) : 춘추시대 齊나라 大夫, 夷維사람 자는 平中. 靈公‧莊公을 섬기고 景公의 재상이 됨. 節儉力行한 그의 언행은 孔子에까지 영향을 미쳤음. 후인이 그의 言行을 서술하여 [晏子春秋]를 짓다.
암두전활(巖頭全豁,828-887) : 당대스님 청원하 德山宣鑑의 제자, 泉州(복건성) 南安縣 사람, 성은 柯씨 휘는 全豁 시호는 淸儼大師. 靈泉寺 義公會下에 출가하여 長安 西明寺에서 受具하다. 처음에 敎宗에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 雪峰義存, 欽山文邃와 사귀고 仰山慧寂을 拜謁하고 德山에게 참예하여 법을 잇다. 會昌沙汰(845)를 만나 西湖江邊에서 뱃사공으로 난을 피하다. 후에 洞庭湖畔의 臥龍山 巖頭에서 종풍을 선양하다. 光啓3년(祖堂集에는 中和5년 곧 885년) 4월 8일, 中原에 도적이 창궐했을 때, 도량을 守護하려 端居하다가 도적의 칼에도 神色自若하며 大叫一聲으로 꾸짖으며 示寂하다. 세수 60세.(송고승전23, 조당집7, 전등록16, 회요21, 회원7)
앙산혜적(仰山慧寂,803-887) : 南岳下 第4世인 위산영우의 제자. 韶州懷化사람, 성은 葉씨 휘는 慧寂. 江西省 仰山의 觀音院에 住. 그는 특히 위앙종을 열어 종풍선양.
약산유엄(藥山惟儼,745-828,또 775-834) : 唐代 靑原下, 絳州(산서성)사람 성은 韓씨, 石頭希遷의 제자. 17세에 潮陽(광동성) 西山의 慧照에게 출가하여 大曆 8년(773) 29세에 受具하다. 후에 石頭에 참예하여 大悟하고 嗣法하다. 석두를 侍奉하기 13년 뒤 灃州(호남성) 芍藥山에 주하다. 이 때 낭주자사 李翶가 법문을 들으려 방문하여도 讀經不顧하거늘 翶가 ‘見面不如聞名이로다’ 時에 師가 ‘太守야 何得貴耳賤目고’하니, 翶問曰 ‘如何是道닛고’ 師가 以手指上下曰 ‘會麽아’ 翶曰 ‘不會니다’하니 師曰 ‘雲在靑天水在甁이니라’ 翶乃欣愜하여 作禮而偈曰 ‘練得身形似鶴形 千株松下兩函經 我來問道無餘說 雲在靑天水在甁’이라 하였다. 太和2년 84세로 示寂하다. 시호는 弘道大師. 제자에 雲巖曇晟, 華亭德誠, 道吾圓智, 李翶 등이 있다. 經論을 통하고 戒律을 嚴守하며 一切都莫思量하고 一句를 悟得함에 있다.(全唐文336‧灃州藥山故惟儼大師碑銘幷序, 조당집4, 송고승전17, 전등록14)
양 광(楊廣,隋煬帝,569-618;在位604-618) : 隋 第二代 皇帝(文帝 楊 堅의 제2자). 이름은 廣 또는 英, 소자는 阿摩. 604년 7월에 父王 文帝를 살해하고 즉위하였고, 本性이 호화로와서 土木을 크게 일으켜 運河를 파고 長城을 쌓았다. 특히 大軍을 일으켜 高句麗에 침입하였다가 乙支文德에 대패한 뒤 諸雄의 蜂起로 陣中에서 宇文化及에게 살해됨. 晋王에 있을 때, 智者大師에 귀의하고 千僧齋를 베풀었으며 많은 佛像과 經典을 만들고 승려를 출가시킴. 또 大業3년(607) 승려 가운데 無德者를 還俗시키고 사원을 정리하였고, 613년 寺名을‘道場’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
양 억(楊億,973-1020) : 宋代 학자, 거사. 자는 大年, 浦城사람.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서 11세때 太宗이 入面試로 불러 神童이라 찬탄하고 秘書省 正字가 되다. 진종 때에 翰林學士, 修撰, 侍郞을 역임하다. 처음에는 불교를 모르다가 학사 李維勉의 策發에 의해 발심하고 후에 汝州 廣慧禪師를 拜謁하고 득법하다. 항상 불교를 옹호하고 王欽若과 함께 [冊符元龜1천권]을 짓는 등 당대의 領袖가 되다. 더우기 조칙을 받들어 [대장목록] [전등록]을 편집,校刊하여 불법외호의 공로가 컸다. 天禧4년 병이 들어 게송을 써서 李遵勗에게 주고는 逝하다. 나이 47세 시호는 文, 문집이 있다.(속등록4, 萬姓統譜41) 明復編 [중국불학인명사전]참조.
양 웅(楊雄,B.C53-A.D18) : 前漢代 사상가, 蜀땅(泗川城) 成都에서 출생. 子雲은 자, 이름은 雄. 말을 더듬어 이야기를 잘 못하였는데 司馬相如의 賦에 감탄하여 항상 이를 본받아 賦를 지었다. 또 離騷를 읽을 때마다 감격하여 反離騷를 지어 이것을 岷山에서 강물에 던져 屈原을 弔喪하였다. 成帝때 서울에 들어왔다가 부름을 받아 賦를 바치고 朗이 되다. 哀帝,平帝를 거쳐 王莽 때에는 大夫가 되었기 때문에 節操에 관해 비난을 받다. 周易을 본따 [太玄經]을, 論語를 본따 [法言]을, 爾雅를 본따 [方言]을 지었다. 뒤에 왕망에게 의심을 받고는 治罪를 두려워하여 校書閣에서 몸을 던져 상처입고 그로 인하여 죽다.
연담유일(蓮潭有一, ) : 조선스님, [도서과목병입사기 1권] [절요과목병입사기 1권] [林下錄 4권] [釋典類解 1권] 등.
염관제안(鹽官齊安, -842) : 唐代 南岳下 마조의 제자. 海門郡사람, 성은 李씨. 해문군의 雲琮에 의지해 출가하고 南岳智嚴에게 受具하다. 江西馬祖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元和말년경 절강성 越州蕭山 法樂寺에 주하다. 후에 杭州 鹽官鎭國 海昌院에 주하다가, 會昌2년 12월 示寂하다. 宣宗이 悟空大師, 捿心之塔의 이름을 追諡하고 追悼詩를 지었다. 후에 盧簡求는 [항주염관현 海昌院禪門大師塔銘]을 짓다.(全唐文733‧탑명, 文苑英華866, 조당집15, 송고승전11, 전등록7)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 : 당대스님, 육조혜능의 法嗣, 溫州府永嘉縣사람. 성은 戴씨 이름은 현각, 영가는 호, 별호는 一宿覺. 8세에 출가하여 藏經을 널리 보고 특히 天台止觀에 정통하다. 뒤에 [維摩經]을 보다가 깨친 바가 있었고, 조계에 가서 육조를 뵙고 깨달아 印可받고는 하룻밤을 자고 떠나니 時人이 ‘一宿覺’이라 부르다. 곧 돌아가서 고향의 龍興寺에 주하니 학자가 날로 늘어나다. 唐先天2년 10월 앉아서 입적하니 나이 49세. 당예종이 無相大師라 시호하다.(전등록5, 송고승전8, 회원2, 통기10, 통재16)
저서 : [禪宗永嘉集 1권] [證道歌] [觀心十門] 등.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 北宋代 스님, 法眼宗 제3조. 臨安府(절강성) 餘杭縣사람, 성은 王씨. 28세에 翠岩令參(雪峰의 법사)에게 중이 되고 천태산 德韶국사를 뵙고 玄旨를 받다. 廣順2년(952) 雪竇山 資聖寺에 들어갔다가 吳越의 忠懿王의 청으로 靈隱寺에 주하다. 智者禪院에서 법화경을 많이 외웠고, 建隆2년(961)에 杭州 永明寺(또는 淨慈寺)에서 대중을 크게 提接하며 ‘禪淨兼修’의 법을 宣揚하다. [永明延壽自行錄]에, 항상 108事를 日課로 하였는데 특히 阿彌陀佛의 명호를 10만번씩(行道念佛)이나 불렀다. 그리하여 石芝宗曉는 蓮社七祖로 받들고, 時人이 師를 ‘慈氏의 下生’이라 崇仰하다. 고려(光宗代)스님들이 그의 문하에서 印可받은 이 圓空등 36인이 있었다 한다. 따라서 法眼宗風이 高麗에서 淨土宗으로 드날림을 보게 되다.시호는 智覺禪師.(송고승전28, 전등록26, 선림승보전9, 통기26, 雪竇寺誌3, 靈隱寺誌5, 영명연수자행록)
저서 : [宗鏡錄 100권] [萬善同歸集 6권] [唯心訣] 등 60여부 수백권의 저술.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 宋代 임제종 양기파, 綿州(호남성)사람, 성은 鄧씨. 35세에 出家受具하여 成都에 가서 唯識을 배우다. 뒤에 남방으로 遊行하여 圓照宗本(1014-1099)을 참예하고 浮山法遠에 의지해 공부하다가, 후에 白雲守端의 提撕를 받고 깨달음을 얻어 법을 잇다. 처음에는 安慶(안휘성) 四面山에 주하다가 晩年에 蘄州(호북성) 五祖山에서 크게 종풍을 드날렸다. 제자에 圓悟克勤, 太平慧懃, 佛眼淸遠(三佛), 開福道寧, 大隨元靜 등의 뛰어난 제자를 배출하다. 宋崇寧3년 80여세로 示寂하다.(속등록20, 선림승보전30, 회요16, 보등록8, 회원19) 저서 : [오조법연선사어록 4권]
옥천신수(玉泉神秀, -706) : 唐代 五祖弘忍의 제자, 開封(하남성) 尉氏縣사람 성은 李씨. 身長八尺 尨眉秀目하여 威風이 있었다. 張說의 碑文에 의하면 幼時에 經史를 배워 博綜多聞하였고 老莊과 三藏에 두루 밝았다 한다. 武德8년(625) 洛陽 天宮寺로 출가하고 蘄州 東山寺의 弘忍에게 참예하여 隨侍하였다. 師의 나이 50세에 五祖會下의 700여대중의 上座가 되어 五祖의 인정을 받았다. 上元2년(675) 10월 五祖가 入寂하자 荊州 江陵(호북성)의 當陽山으로 移住하다. 久視年中에 則天武后와 中宗‧睿宗의 禮遇를 받아 三帝의 國師가 되었고, 中書令 張說은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則天武后는 당양산에 度門寺를 세워 師로 하여금 불법을 선양하게 하다. 그의 家風은 離念, 五方便을 중시하여 南宗神會의 공격을 받았으며 慧能의 南宗禪에 대하여 北宗禪이라 칭하다. 그의 禪法은 華北, 長安,洛陽과 江南에 까지 미쳤으며 南宗禪은 華南, 江西지역에 유행하게 되다. 神龍2년 2월 洛陽 天寶寺에서 示寂하다. 시호는 大通선사. 岐王範, 燕國公 張說, 徵士 盧鴻 등이 각각 碑銘을 지었다. 法嗣者로 嵩山普寂, 京兆義福이 배출되다.(全唐文231‧唐玉泉大通禪師碑銘幷序, 舊唐書191, 楞伽師資記, 傳法寶記, 조당집2, 송고승전8, 전등록4)
저서 : [觀心論 1권] [大乘無生方便門 1권] [華嚴經疏 30권] [妙理圓成觀 3권]
용 수(龍樹 ) : 범 Nagarjuna의 음역. 남인도사람, 마명제자인 迦毘摩羅존자의 제자. 空宗의 시조 후세에 8종의 조사라 함.
저서 : [大智度論 100권] [中論] [十住毘婆沙論 17권]등
용정원정(龍井元淨,1011-1091) : 宋代 천태종, 龍井 聖壽院 원정스님. 於潛사람 자는 無象, 성은 徐씨. 18세에 受具하고 慈雲(山家派 遵式,964-1032)을 따라 天台를 배우다. 諸經에 밝았고 특히 止觀에 정통하여 杭州 天竺寺에 住하매 學人이 항상 만명을 헤아렸다. 宋神宗이 辯才大師라 시호하다.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 : 隋唐代 牛頭禪 開祖, 潤州(강소성) 延陵사람 성은 韋씨. 처음에 儒敎를 배우고 群書를 연구하면서 [大品般若經]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뒤에 茅山(강소성)의 炅法師에게 중이 되어 수학하다. 林中에서 端坐하기 20년 貞觀 17년(643) 建康 牛頭山 幽棲寺 북쪽에 禪室을 짓고 지내다가 一日에 道信이 와서 일러줌을 받고 心要를 깨닫다. 647년 [法華經]을 강의하여 奇瑞를 얻고, 永徽3년(652) 建業 建初寺에서 [대품반야경]을 강의하고 다시 奇瑞가 있었다. 고을 원인 蕭元善의 請으로 건업 건초사에서 法輪을 굴리다가 顯慶2년 윤정월 示寂하다. 세수 64세. 師는 절에 양식이 모자라자 80여리 떨어진 丹陽에서 매일 一石八斗를 져다가 300대중을 供養하다. 게송에,‘山田脫粟飯과 野菜淡黃虀에 喫則從君喫하고 不喫任東西하노라’ *또 四祖道信과의 관계는 [續高僧傳 26]에는 보이지 않지만 劉禹錫이 지은 [우두산 --新塔記](829)와 李華의 [潤州鶴林寺--碑銘] 등을 비롯한 후세의 자료는 道信의 일러줌을 인하여 심요를 깨달았다고 전한다.(속고승전26, 塔銘, 弘贊法華傳3, 조당집3, 전등록4, 통재12)
저서 : [絶觀論 1권]
우전왕(優塡王,범Udayana;B.C.600년경) : 구역에서는 于闐, 優闐이라 하고 出愛라 번역, 拘睒彌國의 왕. B.C 6세기경 印度 반사국의 푸라판타왕의 왕자. 母后가 滿朔 때에 매가 채어가 히말라야의 나무 위에서 탄생. 신심이 깊었으며 世尊이 33천에 올라 生母를 위하여 설법하실 때, 그는 佛을 예배하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병이 들자 臣下들이 牛頭栴檀 즉 우두산의 향나무로 佛像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불상이다.(대당서역기5, )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 : 唐末期 雲門宗 開祖, 嘉興(절강성)사람 성은 張씨.어려서부터 出家하기를 바라다가 鄕里의 空王寺 志澄律師에 의탁하여 17세에 得度하고 20세에 受具하다. 志澄에게 四分律 등을 배우고, 뒤에 睦州道蹤(黃檗의 법사)에 叅詣하더니, 이어서 雪峰義存에게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諸方을 遊歷하다가 많은 禪客들과 交流하고, 乾化원년(911) 曹溪六祖의 塔을 참배하다. 靈樹如敏(長慶大安 : 793-883;백장의 손제자)의 會下에 있다가 靈樹가 遷化하자(918) 廣主劉龑의 청에 의해 法席을 이었다. 同光원년(923) 韶州 雲門山에 가람을 짓고 항상 천명대중을 지도하였다. 天成2년(927) 後唐明宗이 ‘光泰禪院’이라 賜額하고, 天福3년(938) 後晋劉晟은 匡眞大師의 호를 내리다. 운문산에서 30여년을 주하며 宗風을 떨치다가 乾和7년 4월에 86세로 示寂하다. 雷岳은 [운문산광태선원匡眞大師行錄] [--實性碑]를 撰하다. 遺誡에 의해 塔을 건립하고도 遺體를 方丈에 安置하니 沒後 17년을 奇瑞가 있었다. 그는 ‘雲門胡餠, 體露金風, 須彌山, 雲門十五日(日日是好日)’ 등의 公案을 남겼다.(語錄附 行錄, 南漢金石志1‧2 實性碑, 全唐文892 碑銘, 조당집11, 전등록17, 계고략3) 저서 : [운문산광진선사廣錄 3권]
운봉문열(雲峰文悅,998-1062) : 宋代 임제종, 南昌(강서성)사람, 성은 徐씨. 7세에 龍興寺로 출가하고 19세에 遊行하다. 筠州 大愚守芝(汾陽善昭의 제자)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守芝를 모시기 8년, 守芝寂後 다시 洪州 同安元 慧南을 찾아뵙고 지내다가 翠巖寺에서 開法하다. 뒤에 南岳(호남성) 雲峰에 주하다. 嘉祐7년 65세로 示寂.(속등록8, 선림승보전22, 회요14, 회원12, 통재18)
운허용하(耘虛龍夏,1892-1980) : 근대 대강백, 대장경 한글화의 主役. 平北定州사람, 성은 李씨 속명은 學洙, 春園의 再從弟. 어려서 향리에서 漢學과 현대학문을 수업하고, 1912년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1921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강원도 희양군 鳳逸寺로 피신하였다가 慶松(월초 : 1858-1934,의 제자)에게 득도하다. 그뒤 범어사, 개운사 등지에서 8년간 교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합류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다. 1932년 다시 귀국, 봉선사 弘法講院에서 36년부터 講席에 앉다. 1946년 廣東學校를 개설하고 事變이후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에서 講主를 역임하다. 1960년부터 봉선사 復元佛事에 진력, 63년 東國譯經院을 설립하여 고려대장경 번역사업을 主導하다. 63년 정부로부터 ‘獨立有功褒賞’을 비롯 각종 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 89세로 입적하다. 부도와 행장비(81년 靈岩스님이 글을 지어 모심)는 奉先寺 어귀에 있다.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 宋代 임제종, 彭州崇寧(사천성成都府)사람, 성은 駱씨 이름은 극근, 자는 無着. 어려서 妙寂院 自省에게 출가하여 文熙敏行을 따라 經論을 연구하다가 뒤에 五祖法演의 법을 잇다. 佛眼, 佛鑑과 함께 ‘오조門下三佛’이라 稱하다. 成都 昭覺寺에 있다가 남쪽으로 가서 張無盡거사를 만나고 夾山 碧巖에서 지내다. 學徒를 위하여 雪竇의 [頌古百則]을 提唱, 이를 엮어 [벽암록]을 만들다. 뒤에 安沙府 道林寺에서 佛果선사의 호를 받고, 金陵 蔣山에서 圓悟선사라는 호를 받다. 晩年에 昭覺寺에 돌아가 紹興5년 73세로 입적. 遺偈에 ‘已徹無功 不必留頌 聊爾應祿 珍重珍重’이라 하다.(僧寶正統傳4, 普燈錄11, 회원19, 통기46, 통재30, 계고략4, 속전등록25)
원조종본(圓照宗本,1014-1099) : 宋代스님, 常州無錫사람 성은 管씨, 이름은 宗本 또는 大本, 호는 慧林, 원조는 神宗의 시호. 19세에 蘇州 永安道昇에게 중이 되다. 10년을 시봉하고 受具하고는 선지식을 歷訪하다. 뒤에 天衣義懷를 拜謁하고 법을 잇다. 후에 淨慈寺에 머물면서 衲子를 提接하고 만년에 平江靈巖에서 가풍을 드날리다가 元符 2년 12월 28일 85세로 입적.(稽古略4)
원 측(圓測,613-696) : 신라의 학승,본래 왕족 명은 文雅. 일찌기 중국에 들어가 玄奘삼장에게 唯識을 배우다. 그의 五十二位說은 窺其의 四十一位說과 함께 당대쌍벽을 이룸. 전해지는 저술에 [解深密經疏]가 유명
원통법수(圓通法秀,1027-1090) : 宋代 雲門宗, 秦州(감숙성) 隴城사람 성은 辛씨. 19세에 출가하여 受具하고 처음에 圓覺經, 華嚴經 등을 공부하다가 天衣義懷(설두중현의 제자,993-1064)의 法席에 참예하여 一大事를 요달, 법을 잇다. 후에 廬山 棲賢寺에 주하다가 王安石의 청에 의해 鍾山寺(강소성)에 居하다. 蔣山 長蘆寺에 住함에 會下大衆이 千名을 넘었다 한다. 元豊7년(1084) 東京(하남성) 法雲寺에 들어가 주하니 神宗이 圓通禪師라 賜號하다. 元祐5년 8월 64세로 입적.(속등록8, 선림승보전26, 회요28, 회원16)
원 효(元曉,617-686) : 신라代 和諍국사,성은 薛씨 仍皮公의 손자 휘는 誓幢 별호는 小性, 卜性, 栗谷沙彌, 無碍人, 久龍. 압량군 佛地村(지금의 경산 자인면)사람. 25세에 皇龍寺로 출가하고 자기 집을 初開寺라 하고 출생지에 절을 지어 沙羅寺라 하다. 일찌기 芬皇寺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어 40권까지 저술하였으나 10廻向品에 이르러 그만두다. 또 [금강삼매경소 5권]을 지었으나 잃어버리고 다시 略疏 3권을 저술하니 이것이 [금강삼매경론]이다. 650년 義湘과 함께 入唐求法을 시도하다가 당항성(지금의 인천 南陽灣)에 이르러 髑髏水를 먹고 ‘一切唯心’의 도리를 깨닫고 遊學을 포기 독자적인 길을 걷다(元曉宗,芬皇宗,海東宗). 686년 경주부근 穴寺에서 세수 70으로 入寂. 1101년 고려 숙종이 ‘大聖和諍國師’라 追諡하고, 785년 薛聰의 아들 仲宗이 ‘誓幢和尙塔碑’를 세웠는데 지금도 碑片이 서울 景福宮에 있다.
저서 : [金剛三昧經論 3권] [大乘起信論疏 2권] [遊心安樂道 1권] [法華經宗要 1권] [大慧度經宗要 1권] [涅槃經宗要 1권]등 총99부 240여권의 저술.
월굴혜청(月窟慧淸, ) : 송대스님(대개 1130-1200때의 고승), 월굴은 호 이름은 慧淸, 福州福淸사람. 어려서 洞里사람이 불에 타죽는 것을 보고 말하대,‘나는 부처가 되어 猛火에 태움을 받지 않겠다‘하니 그의 부모가 이상히 여겼다. 14세에 출가하여 湖州何山에 가서 復庵에게 중이 되고 뒤에 遯庵(華藏守演,大慧杲의 法嗣)의 법을 잇다.(增續傳燈錄1, 枯崖和尙漫錄下, 월굴집)
월초거연(月初巨淵,1858-1934) : 근대 스님, 교육가. 서울태생 성은 洪씨. 15세에 송릉리 부도암 幻翁에게 득도하고, 32세까지 제방 강원, 선원에서 수행하다. 1900년 고양군 은평면에 守國寺를 창건하고, 高宗의 동궁이 아플 때 雲門寺 舍利窟에 백일기도로 쾌차케 한 공덕으로 불사를 완성하다. 1906년 동대문 밖 元興寺에 明進學校를 열어 승려교육에 힘쓰니 東國大學의 효시이다. 1913년 奉先寺 주지에 추대되고, 1927년 사재를 들여 開運寺 講院의 설립을 도우고, 1934년 봉선사에 弘法講院을 설립 耘虛스님을 강사로 승려교육에 힘쓰다가 그해 4월 봉선사에서 입적하다. 行狀碑가 봉선사와 수국사에 있다.
위산영우(潙山靈祐,771-853) : 백장회해의 제자, 福州長鷄사람 성은 趙씨. 大圓은 唐代宗의 시호. 15세에 출가하여 建善寺 法常에게 중이 되고 23세에 百丈의 제자가 됨. 元和말년 長沙로 가던 도중 大潙山에 머물러 禪敎를 40여년 베풀고 大中7년에 입적, 나이 83세. 뒤에 제자 慧寂이 潙仰宗을 열다.(傳燈9, 會元3)(송고승전11, 조당집18, 전등록9, 傳唐文820, 會元3)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 : 달마선법의 제6대 조사, 黃梅弘忍의 嫡子. 영남薪州사람(父는 南海新興사람) 호는 曹溪, 시호는 大鑑 성은 盧씨. 3살에 父를 여의고 뗄나무를 팔아 母를 봉양하다가, 어느날 장터에서 어떤 스님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心眼이 열리다. 咸亨年間에 無盡藏비구니가 [열반경]독송함을 듣고 그뜻을 알았으며, 676년 南方으로 가서 敎化하다가 조계산에 들어가 大法宣揚. 그의 門下로부터 五宗七家 즉 禪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다. 43인의 전법제자 가운데 南岳讓, 靑原思, 荷澤會, 南陽忠등이 뛰어남.(송고승전8, 傳燈錄5, 傳法正宗記6, 宗門統要續集제2)
응암담화(應庵曇華,1102-1163) : 南宋代스님 蘄州사람, 성은 汪씨 응암은 호 이름은 曇華. 17세에 출가하고 18세에 受具하다. 후에 선지식을 참방하다가 東禪에게 圓悟禪師가 雲居山에 계신단 말을 듣고 華가 가서 시봉하였으나 悟가 밀쳐서 虎口隆에게 지시하니 紹隆을 1년 시봉하고는 頓明大事하다. 그의 開堂時 示衆法語를 大慧杲가 보고는 극구칭찬하였는데 偈曰,“坐斷金輪第一峰 千妖百怪盡潛踪 年來又得眞消息 報道楊岐正脈通”이라 하다. 宋隆興원년 6월 13일 入寂, 나이 61세.(대명고승전6, 계고략4)
의 상(義湘,625-702) : 海東華嚴初祖, 성은 金씨. 20세에 皇福寺로 출가하여 650년 원효와 함께 入唐求法을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661년 당나라 사신의 배편으로 건너가 終南山 至相寺 智儼門下에서 화엄을 연구하여 [法界圖]로 인가를 받고, 문무왕10년(670) 귀국하여 太白山에 浮石寺를 창건 화엄을 講說하다. 692년 勝詮법사 귀국시에 賢首의 저술(華嚴經探玄記)에 대한 問法質疑書인 서신을 전해받고 화답하다. 78세로 입적하니 고려숙종이 圓敎國師라 시호하다. 그의 문하에 悟眞 智通 表訓 眞定등의 十大德이 있다.
저서 : [華嚴一乘法界圖] [白花道場發願文]
이광수(李光洙,1892- ) : 근대문인, 平北定州사람 耘虛스님의 6촌형이다. 1902년 日進會의 후원으로 일본유학,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뒤에 ‘皇國臣民化 운동’에 앞장서다가 해방후 反民特委에 회부되었다가 6.25사변통에 拉北되다. 그는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초년에는 基督敎를 믿었으나 중년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圓覺經]을 즐겨 독송하고 金剛山 普光庵의 月河老師의 영향으로[法華經]에 심취하며 耘虛스님과 교분이 잦았다. 1975년 朱耀翰등 동지들의 주선으로 奉先寺에 기념비를 세웠다(1975).
이 사(李斯, -208B.C) : 秦代 楚나라 上蔡사람. 秦의 客卿이 되어 始皇帝를 도와 천하를 통일, 후에 丞相이 되어 郡縣制를 실시하다. 焚書坑儒로 사상통일을 강행하고 小篆을 창작하는 등 공이 컸으나, 시황제 逝後 趙 高와 함께 長子 扶蘇를 弑害하고 二世皇帝 胡亥를 擁立하고서 조고의 참소로 처형당하다.
인악의점(仁嶽義霑, ) : 조선스님, [인악집 3권]
일 연(一然,1206-1289) : 고려스님, 普覺國尊. 휘는 見明(혹 景明), 성은 金씨 章山郡(지금의 경산)사람. 9살에 해양 무량사에 가서 글을 배우고, 14세에 陣田大雄에게 출가하여 22세에 僧科에서 上上科에 뽑히고, 그 후부터 ‘生界不滅 佛界不增’의 話頭를 참구하여 大悟하다. 72세에 雲門寺에서 禪風을 드날리는 한편 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시작하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麟角寺에 옮겨 있으면서 遺事를 완성하다. 84세에 禪床에 앉아 問答垂示하고는 金剛印을 結하고 입적.
저서 : [삼국유사 5권] [重編曹洞五位 2권] [祖庭事苑 30권] [語錄 2권] [선문염송사원 30권]등.
행적비가 운문사 東岡에 있고, 인각사에 塔碑가 碑片으로 남아 있다.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 唐代 南岳下, 臨濟宗 開祖, 曹州(하남성) 南華人 성은 邢씨. 어려서는 재주있다고 말을 듣더니 커서는 孝子라 칭찬받다. 불교를 좋아하여 出家, 受具하고는 諸方의 高僧에게 배우고 三藏을 공부하는 가운데 律과 華嚴을 연구하다. 나중에 불교의 진수를 찾고자 遊方하여 黃檗希運에게 참예하여 非凡한 기틀을 인정받고 禪旨를 참구하다가 悟境에 이르러 황벽의 指示로 高安大愚(불상, 歸宗智常의 제자)에 참예하고(大愚三拳), 潙山을 배알하고 黃檗에게 돌아오다. 때에 희운은 證表로 百丈의 禪板과 几案을 주고 印可하였다. 그 뒤 제방의 尊宿을 歷訪하다가 大中 8년(854) 鎭州(하북성) 동남쪽 滹沱강변 근처의 작은 절에 주하였다. 그후 太尉 黙君和는 자신의 居宅을 절로 만들어 師를 모시고 臨濟院이라 불렀다. 師의 禪風을 흠모하는 이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끊이지 않으니 師叔인 普化와 克符도 師의 敎化를 도왔다. 그 뒤 戰亂을 피해 河南府로 오니 府主 王常侍는 스승의 예로 영접하다. 그 뒤 大名府(하북성)의 興化寺 東堂에 주하였다. 師는 아무런 병없이 지내다가 어느날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三聖과 問答하고는 고요히 입적하니 때는 咸通 8년 정월 10일이었다. 제자들이 師의 全身으로 大名府 서쪽에 탑을 세우니, 시호는 慧照선사, 탑호는 澄靈이라 하다. 門下 上足으로 三聖慧然, 興化存獎, 灌谿志閑, 幽州譚空, 寶壽沼, 魏府大覺 등 22인이 있다. 삼성은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을 편록하다. 그의 禪風은 大自由와 活潑潑地의 殺活自在로운 가풍이며, 禪門大宗匠의 면목을 躍如하게 전하고 있다. 그의 法系는 宋代에 크게 興하더니 淸代에는 一代主流를 형성하였다. 그의 法語 方便에 ‘三玄三要, 臨濟四喝, 四料揀’ 등이 있다.(全唐文920‧塔記, 臨濟錄‧碑銘, 조당집19, 송고승전12, 전등록12, 전법정종기7, 통기42, 廣燈錄10, 속등록1, 회요9, 회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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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종색(慈覺宗 ,1009-1092) : 宋代 雲門宗스님, 성은 孫씨 洛州人, 長蘆應夫의 法嗣. 장로는 산이름인데 사의 호가 됨. 어려서부터 儒家에 널리 통하고 문장에도 능하다. 29세에 圓通法秀에게 출가하고 長蘆應夫의 법을 잇다. 그는 또 어머니를 方丈의 東室에 모시고 奉養하며 부지런히 念佛에 精進했고, 晩年에는 緣社를 맺어 淨法을 닦았다. 저서:[坐禪儀] [禪苑淸規 10권]등
자운준식(慈雲遵式,964-1032) : 송대 天台宗(山外派) 스님 天台寧海 사람 성은 葉씨 자는 知白, 慈雲懺主. 자운은 宋眞宗이 내린 시호, 이름은 遵式. 처음 禪을 배우면서 戒律도 겸하여 닦았다. 뒤에 천태산 國淸寺의 普賢菩薩像 앞에서 한 손가락을 태워 천태교학 연구를 맹서하고 1001년 큰 가뭄을 당하여 비를 빌자 영험을 얻다. 四明山 寶雲義通(고려스님,927-988)에게 천태교를 배우고 知禮와 가까이하다. 28세에 義通의 講席을 전해받아 法華, 維摩, 涅槃, 金光明經 등을 강하다. 그 뒤에 천태산 서쪽에 암자를 짓고 대중과 함께 念佛三昧를 닦고, 1024년 조정에 奏請하여 天台의 敎文을 대장경 속에 넣게 하였다. 宋仁宗 明道원년 10월 8일 입적 세수는 69.(天竺別集下, 津文集12)
저서:[十不二門詳解 2권] [往生淨土決疑行願二門] [法門淨土略釋] [敎藏隨函目錄]등.
자은규기(慈恩窺基,632-682) : 당대스님, 法相宗의 시조. 京兆長安사람, 성은 尉遲씨(近衛將軍 尉遲敬宗의 子) 자은은 호, 자는 洪道 이름은 규기(별호는 三車法師). 17세에 출가하여 玄 의 제자가 되어 廣福寺에 머물다가 23세에 勅選에 뽑혀 大僧이 되고 大慈恩寺에서 현장에게 五天竺의 말을 배우고 25세에 經論번역에 참여하여 [成唯識論] 등을 번역하다. 뒤에 현장에게 唯識,因明學을 배우고 天台山, 泰恒山 등에 住하다가 唐高宗 永淳원년 11월 13일 자은사 譯經院에서 51세로 입적하다. 그의 성품이 豪俊하여 출입시에 항상 三車에 經書와 음식을 준비하는지라 '三車法師' 또 '百本疏主'라 칭하고, 그의 敎를 慈恩敎라 하였다.(대자은사삼장법사전10, 開元釋敎錄8, 송고승전4, 통기29, 통재15, 계고략3, 神僧傳6, 東域傳燈目錄)
저서:[成唯識論述記] [大乘法苑義林章] [攝大乘論 ]등 50여부
자조온총(慈照蘊聰,965-1032) : 송대스님 임제종, 남해(광동성)사람 성은 張, 首山省念의 法嗣. 출가한 후 百丈道常에 詣하고 다음으로 수산성념(926-993)에게서 大悟徹底하였다. 그뒤 襄州 洞山守初, 州 大陽警玄, 隨州 智門師戒 등을 歷 한 후 景德3년(1006) 양주 石門山에 주하다. 天禧4년(1020) 谷隱山 太平興國禪寺에 옮겨 주하니 兩山에 모인 대중이 千을 헤아리다. 그는 또 翰林 楊文億, 中山劉筠 등과 方外의 親交를 맺고 지내었다. 天聖10년 3월에 示寂하니 세수 68세, 慈照禪師라 시호를 내리고 李遵 이 碑文을 짓다. 어록으로 [石門山慈照禪師鳳巖集1권]이 있다.(광등록17, 회요12, 보등록1, 회원11, 계고략4)
자 하(子 夏,507- ?B.C) : 춘추시대 孔門十哲의 한사람, 본명은 卜商 자는 자하, 위나라 文侯의 스승. 공자의 제자 가운데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 文學 禮樂에 뛰어났으며, 일설에 詩序와 易傳은 그의 저술이라 하다.
작소도림(鵲巢道林,741-824) : 당대 徑山道欽의 法嗣, 작소는 호(鳥 라고도 씀) 도림은 字, 성은 藩씨 杭州富陽人. 어머니가 '日光이 입으로 드는' 胎夢을 꾸고 뒤에 태어남에 방에 향기와 빛이 가득하여 이름을 香光이라 하다. 9세에 출가하고 21세에 荊州 果願寺에서 受具하다. 長安 西明寺 復禮에게 [華嚴經][起信論]을 배우면서 禪을 닦고, 뒤에 경산의 道欽을 찾아가 心要를 깨닫다. 후에 남쪽 錢塘孤山의 永福寺에 가는 도중, 西湖의 秦望山에 나뭇가지가 茂盛하여 日傘과 같이 된 長松을 보고 항상 그 위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鳥 또는 鵲巢禪師라 불리웠다. 元和년간에 白居易가 太守로 와서 師를 찾아와서는 '계신 곳이 심히 위험합니다' 하니, 師曰,'太守가 위험한 것이 더욱 심하오. 번뇌의 불이 서로 교차하고 識性이 멈추지 않으니 위험할 수 밖에'라 하니, 白이 又問曰,'如何是佛法大義' 師曰,'諸惡莫作 衆善奉行' 白曰,'三歲孩兒也解恁 道' 師曰,'三歲孩兒雖得道 八十老人行不得'라 하다. 唐 長慶4년 2월 84세로 入寂. 시호는 圓修禪師(전등4, 稽古略3)
장경호(張敬浩:1899-1975) : 거사 실업가, 불교 대중화 운동의 선구자. 자호는 大圓, 본관은 仁同. 1899년 9월 7일 부산 동래구 사중면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張允植, 어머니는 文念伊.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를 따라 7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14세에 普城高普에 진학했으며 18세에 秋命順(법명은 積善華)과 결혼하였다. 1919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 뒤 日警을 피해 친구 許 政(정치인)과 함께 숨어 다니다가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듬해 귀국, 신앙이 더욱 깊어져 1925년 通度寺의 동안거에 동참하여 九河天輔(1872-1965)로부터 법문을 듣고 禪을 배웠다. 안거 해제일에 '商業에 종사하여 돈을 크게 벌어 불교에 바치겠다'고 맹서하고, 근검절약하며 사업을 폈다. 사업을 하는 중에도 죽을 때까지 1년중 동안거만은 절에서 수행에 몰두했으며 집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하루 4시간씩 참선에 몰두했다. 때로는 曉峰元明, 香谷蕙林, 鏡峰靖錫 등과 함께 정진했다.
손을 댄 사업마다 성공하여 마침내 1954년 동국제강주식회사를 설립, 모두 18개 회사를 거느리는 국내 5대기업의 하나로 성장했다. 불교의 大衆化를 위해 1967년 불서보급사를 세워 불교서적의 출판과 보급에 힘을 쓰며, 1970년 재단법인 '大圓精舍'를 세워 장학사업을 펴고, 수십 군데의 군부대와 사찰에 법당을 건립해 주는 등 각종불사를 지원했다. 1973년 5월 南山에 大圓佛敎會館을 건립하여 신행단체로서 대원회를 육성하였다. 또한 누차 불교방송의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성취하지는 못했다. 1975년 7월 당시 朴正熙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모든 私財 30억 6천만원을 내놓으니 불교중흥을 위해 써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이 해 9월 9일 죽었다. 이를 기본자산으로 하여 1975년 8월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회'가 설립되었으며 1990년 5월 1일 개국한 불교방송(BBS)의 설립기반이 되었다.[월간 대원 제31호]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 : 唐代 南岳下, 泉州(복건성) 同安縣 사람, 성은 謝씨. 貞元初에 洪州 馬祖를 拜謁하고 心要를 얻은 후, 濟州(산동성) 靈巖寺에 寓居하다가 定州(하북성) 百巖寺에 주하며 禪法을 폈다. 元和3년(808) 勅令에 의해 京兆府(장안) 章敬寺의 毘盧遮那院에 주하다가 元和10년 12월 62세로 示寂. 시호는 大覺禪師, 賈島가 碑文을 權德輿가 碑銘을 지었다.(全唐文501 唐故章敬寺百巖大師碑銘幷序, 조당집14, 송고승전10, 전등록7)
장구성(張九成, -1155?) : 宋代 관리및 학자, 開封(하남성)사람 자는 子韶, 無垢居士, 橫浦居士. 紹興2년(1132) 進士에 급제하고 禮部侍郞, 鎭東軍簽判, 太常博士를 지내다. 재상 秦檜의 배척으로 流配당하였으나 소흥25년(1155) 진회의 死去로 인해 溫州자사에 복귀되었지만 병으로 수개월만에 죽다. 大慧宗 (1089-1163)에 참예하여 신임이 두터웠으며, 兩者間의 사상적 교유는 當代에 큰 영향을 미쳤다.(宋史374)
장사경잠(長沙景岑, ) : 당대 남악하, 어려서 출가하여 南泉普願(748-834)을 참예하여 법을 잇다. 처음 長沙(호남성)의 鹿苑寺에 주하다. 長沙山에 오래 주하며 법을 폈으므로 長沙和尙이라 칭하였으며, 그의 機鋒이 峻 하여 仰山(803-887)은 '岑大蟲(虎)'이라 불렀다 한다. 시호는 招賢大師.(조당집17, 전등록10, 회요6, 회원4, 통재17)
장상영(張商英,1043-1122) : 송대 정치가, 無盡居士 상영은 이름, 자는 天覺 蜀中新津人. 19세에 급제하고 神宗때에 荊公(왕안석)과 함께 '新法'에 대해 共議하다. 처음에는 불교를 싫어하여 '무불론'을 써서 배척하려 하였으나 뒤에 우연히 [維摩經]을 읽고 正信을 일으켰다. 元祐년간에 오대산에 文殊像을 塑成하고 發願文을 지었다. 東林總선사에게 禪을 묻고, 다시 兜率悅을 參謁하여 비로소 깨치다. 뒤에 眞淨文화상에 나아가 言下에 大悟하다. 大觀4년(1110)에 丞相이 되고(中書侍郞) 宋宣和4년 11월에 逝하다. 시호는 文忠. 저서로 [護法論]등.
장안관정(章安灌頂,561-632) : 천태종 제4조, 이름은 관정 章安은 호, 자는 法雲 성은 吳씨, 臨海章安 사람. 7세에 출가하여 23살에 천태산 智 를 뵙고 항상 곁에 있으면서 智者의 설법을 기록하다. 지자입적후 그의 유언에 따라 國淸寺에서 강설에 힘쓰고 뒤에는 주로 많은 책을 짓다. 唐貞觀 6년 8월 국청사에서 입적하다. 나이 72.(속고승전19, 淨土往生傳12, 통기7 25) 저서:[觀心論疏 5권] [國淸百錄 4권]등.
정중무상(淨衆無相,684-762) : 신라스님, 益州金和尙(입당구법歸化僧), 성은 金씨(신라국왕의 제3자). 本國 群南寺로 출가수계한 후 開元16년(728, 성덕왕27년) 入唐하여 玄宗을 拜謁하고, 蜀땅에 들어가 資州(사천성) 德純寺 處寂(648-732 또는 665-732;智詵의 제자)에게 師事하여 摩納袈裟를 받고 법을 잇다. 항상 頭陀行을 하고 깊은 계곡의 바위아래에서 선정을 익혔으며, 후에 成都府 淨衆寺에 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0년간 독자적인 '引聲念佛과 無憶 無念 莫忘의 三句說法'을 선양하였고, 益州節度使 章仇兼瓊의 귀의를 받아 淨衆派를 형성하였다. 그는 깊은 계곡 바위아래에서 참선하곤 하다가 裸身으로 猛獸에게 布施하려 하면 두마리의 맹수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냄새만 맡고 떠나며, 城中에서 낮에는 무덤에서 밤에는 樹下에서 좌선하는 두타행을 계속하니 사람들이 무덤앞에 精舍를 지어주는 등 중국인에게 그는 神異를 자주 보이는 '感通의 高僧'이었다(송고승전 19). 寶應원년 5월 79세로 示寂하니 益州刺史 韓 이 碑文을 짓고 '東海大師塔'이라 하였다. 최근의 學說에 의하여 티벳의 古史書 [바세]에 의하면 티벳불교의 初傳인 '라사의 宗論' 이전에 이미 익주김화상의 淨衆禪法이 티벳트에 소개된 史實이 밝혀졌다.(山口瑞鳳씨의 "티벳불교와 新羅金和尙" 등) 제자로 保唐無住, 馬祖道一, 淨衆神會, 王頭陀 등.(曆代法寶記, 송고승전19 무상전, 圓覺經大疏抄3 下, 北山錄6, 전당문780 四證堂碑銘)
조계(曹溪) : 육조혜능의 別號. 원래 중국 廣東省 소주부의 동남쪽 30리 雙峰山 아래 있는 땅이름. 667년 曺叔良으로부터 이 땅을 喜捨받아 寶林寺를 짓고 禪風을 大振하다. 입적한 뒤에 全身을 이곳에 묻었으므로 육조의 별호가 되다.
조산본적(曹山本寂,839-901) : 동산양개의 제자. 泉州 田人 성은 黃씨. 처음에 동산양개에게 宗旨를 받고 撫州 曹山 崇壽院에 있다가 다시 荷玉山으로 옮겨 이 두 곳에서 法席을 융성시킴. 號는 曹山 시호는 元證선사.
조영긍(趙令矜 혹은 衿, ) : 宋代宰官, 송태조의 5대손, 博學能文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 秦檜를 거스르다가 곧 죽게 되었는데 마침 秦檜가 먼저 卒함에 사면되다. 일찌기 圓悟勤을 참예하여 법을 깨닫고는 제자가 되다. 자는 表之, 超然居士는 법호. 丞相 張商英과 함께 당시 거사불교를 이끌다.
조주종심(趙州從 ,778-897) : 南泉普願의 제자. 唐代 曹州人, 성은 씨. 어려서 曹州의 扈通院으로 출가하고 南泉에게 가니 남전이 마침 누워 있다가, '어느 곳에서 왔는가' '瑞像院에서 왔읍니다' '瑞像을 보았는가' '瑞像은 보지 못하고 누워있는 부처를 보았읍니다' '네가 有主沙彌냐 무주사미냐' '유주사미입니다' '主가 어디 있느냐' 조주,'동짓달이 매우 춥사온데 體候 萬福하시나이까'하니 入室을 허락하다. 또 黃檗, 寶壽, 官, 夾山 등을 歷 하다. 대중의 청에 의해 趙州(광동성) 觀音院에 주하고, 40여년을 독자적인 선풍을 드날리다. 그는 학인을 提接하는 方便이 뛰어나 많은 공안이 있다. 唐建寧4년 11월 120세로 입적. 시호는 眞際大師(송고승전11, 조당집18, 전등록10, 회요6, 회원4)
저서:[趙州錄] [진제대사어록 3권]
좌계현랑(左溪玄朗,673-754) : 唐代 天台宗스님, 慧威의 제자. 자는 慧明 성은 傅씨(傅大士 6代孫), 州 烏傷縣 사람. 7세에 출가하고 20세에 東陽의 淸泰寺에서 律儀를 배우고 淸宮寺 慧威에게 법화, 유마, 지도론, 止觀을 배우다. 天性이 山林을 좋아하고 世俗을 싫어하며 止觀을 닦다. 州 左溪山에 숨어 한 방에 앉아 있기를 30여년동안 하였다. 특히 涅槃經에 精通. 세수 82세 시호는 明覺尊者.(宋高僧傳26, 統紀7, 通載17, 古略 3, 釋門正統2) 저서:[法華經科文 2권]
주 공(周公, ) : 周나라 政治家, 文王의 아들이며 武王의 동생, 이름은 旦. 형 무왕을 도와 殷을 멸함. 무왕이 죽고 成王이 즉위하자 攝政이 되어 周王室의 기초를 튼튼케 하다. 周代 禮樂制度의 대부분은 그의 經綸에 의한 것이며, [周禮]의 저자로 전해진다. 孔子가 가장 欽慕하였고 道德政治의 실천자이다.
주 자(朱子,1130-1200) : 南宋代 性理學을 대성한 大儒. 안휘 源사람, 이름은 熹 자는 元晦, 호는 晦庵,晦翁등. 저서:[詩集傳] [四書集註] [資治通鑑綱目] [小學]
증 자(曾子,506- ) : 춘추시대 魯나라 사상가, 이름은 參 자는 子輿, 공자의 제자. 孝道를 역설하였고, 공자의 사상을 祖述하여 공자의 손자인 子思에게 전함.
지 승(智昇, ) : 唐代스님, 출신성명 및 生沒年 未詳. 일찌기 출가하여 大敎를 弘布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經論을 공부하다. 특히 律에 밝았으며 史學에 博識하였다. 일찌기 道眞, 道安, 道宣에 이르는 諸經錄을 보고 그 잘못을 고치려 하였다. 開元18년(730) 長安 崇福寺 東塔院에서 [개원석교록]을 撰述하다. 이 저술은 當代까지 중국에서 傳譯된 大小乘三藏과 失譯缺本된 것을 모두 기록한 名著로 이후로는이 책을 의거하게 되다. 저서:[開元釋敎錄 20권] [개원석교록略出 4권] [續大唐內典錄1권] [續集古今佛道論衡 1권] [集諸經禮懺儀 2권]
지 엄(智儼,600-668 일설에 590-668) : 당대 화엄2조 天水사람, 杜順의 제자. 성은 趙씨 호는 雲華,至相尊者. 法常에게 [攝大乘論]을 배우고 智正에게 [華嚴經]을 배우다가 '別敎一乘'의 奧義를 깨닫다.
저서:[화엄경搜玄記] [화엄五十要問答] [一乘十玄門] [화엄孔目章]
지 장(開善智藏,458-522) : 南北朝代 학승, 吳郡(江蘇省蘇州府 吳縣治)사람, 성은 顧씨, 처음이름은 淨藏 호는 開善. 어려서부터 聰明하였고 16세에 출가하여 詔勅으로 興皇寺에 머무르며 上定林寺의 僧遠, 僧祐와 함께 天安寺 弘宗에게 師事하였다. 당시 僧柔, 慧次의 名聲을 듣고 受學하다. 齊나라 太武帝가 20여명의 高僧을 초청한 法會에 어린나이로 末席에 참여하여 [淨名經] 강의로 명성을 얻다. 粱武帝가크게 불법을 일으킴에 鐘山保誌의 墓앞에 開善寺를 창건하여 師를 머물게 하다. 그 때에 占相者가 師를 보고는,'스님의 聰辯은 一世를 덥고 名聲이 天下에 알려지지만 31세에 입적한다'하니 師의 時年이 29세라 강의를 문득 쉬고 大誓願을 발하여 山門밖을 나가지 않으며 誦般若經 晝夜不輟하니 문득 空中聲曰,'汝以般若功力 得倍報年'이라 하다. 이후로 道俗이 다투어 般若經을 持誦하여 靈驗을 얻다. 師가 어느 때에 "佛法大海는 俗人이 알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後에 彭成寺에서 [成實論]을 강하고 慧輪殿에서 [반야경]을 강의하였다. 그는 光定寺 法雲, 莊嚴寺 僧旻과 함께 梁나라 '三大法師'라 칭하다. 普通3년 9월에 65세로 입적.(속고승전5, 釋氏六帖10, 통재9, 계고략2, 三國佛法傳通緣起上)
저서:[大小品般若, 涅槃, 法華, 十地, 金光明經 등의 義疏] [成實, 百論, 阿毘曇心論 등의 義疏]
지효룡(支孝龍, ) : 중국 東晋代 스님, 淮陽人(河南省淮陽縣) 孝龍은 이름 또는 法龍. 고승전권4에, '풍자見重 神彩卓 高論適時'라 하다.
진정극문(眞淨克文,1025-1102) : 임제종 황룡혜남의 제자, 陜府 鄕사람 성은 鄭씨. 호는 雲庵,眞淨, 潭,寶峰등. 어려서부터 傑出하여 繼母슬하에 지내다가 아버지가 遊學하라 하자 復州(湖北省)의 北塔에 있던 廣公의 설법을 듣고 師事하면서 克文이란 이름을 받다. 25세에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처음에 經論을 공부하다가 治平2년(1065) 大 山에서 안거하다. 어떤 중이 雲門文偃의 法語를 외우는 것을 듣고 깨달아 積翠의 黃龍慧南을 뵙고 법을 잇다. 熙寧7년(1074) 金陵에 이르러 舒王의 귀의를 받고 報寧寺에서 開山하다. 뒤에 張商英의 청을 받고 潭에 주하다가 雲庵에 물러나 閑居하다가 崇寧원년 10월에 示寂하다. 세수 78. 晦堂祖心, 東林常 과 함께 황룡파의 발전에 힘쓰다. 제자로 兜率從悅, 壽寧善資, 洞山至乾, 潭文準, 覺範慧洪 등이 있다.(石門文字禪30 行狀, 속등록13, 선림승보전23, 회요14, 회원17)
저서:[雲庵眞淨禪師語錄 6권] [운암진정화상行狀(覺範慧洪撰)]
진존숙(陳尊宿, ) : 黃檗希運의 제자, 휘는 도명 호는 睦州, 진존숙은 別號, 성은 陳씨. 후에 목주 龍興寺에서 교화함.
진 회(秦檜, ) : 남송 高宗代의 宰相, 자는 會之. 主戰派 岳飛를 誣告하여 죽이고 주전파를 탄압하여 金나라에 굴욕적인 和約을 체결하다.
ㅊ 차
찬 영(贊寧,918-999) : 宋代 南山律宗, 성은 高씨 浙江省湖州 德淸사람. 그의 선조는 渤海人이다. 어려서 後唐 天成年間에 杭州 祥符寺에 출가하여 三藏을 博涉하였는데 특히 남산율에 정통하고 談論에 능하였다. 時人이 律虎라 칭하였고 儒老에도 밝으며 文辭를 잘하였다. 忠懿王이 明義宗文大師라 號하다. 송 太平興國 7년(982, 66歲時)에 칙명에 의해 浙東에 들어가 [송고승전]을 編修하여 端拱원년(988)에 완성하다. 또 [鷲靈聖賢錄] 100권을 짓다. 咸平원년(998)에 右街僧錄에 다음해에 左街僧錄이 되다. 함평2년에 82세로 입적.(僧史略序, 통기44, 통재26, 계고략4, 석문정통8)
저서:[宋高僧傳 30권] [大宋僧史略 3권] [內典集 152권] [外學集 49권]등
척발도(拓跋燾,408-452) : 北魏(또는 後魏)의 제3대 太武帝. 성은 척발, 明元帝의 아들. 宋文帝 때 柔然을 무찌르고 北梁을 정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움. 聰明하고 淸廉, 儉素하였다. 424-452년간 在位하면서 3년에 걸친 毁佛禁壓은 중국법난의 처음에 해당한다.
천 친=세친=Vasubandhu.
청허 휴정(서산대사) :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아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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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 ·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현장 : 속성(俗姓)은 진(陳), 이름은 위(褘). 경(經)·율(律)·논(論)의 모든 불교 경전에 정통해 삼장(三藏)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인도에서는 목샤데바(Mok-adev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인도에 유학했으며, 산스크리트로 된 막대한 양의 불교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돌아와 자국어로 번역했고, 중국에 유식학(唯識學)을 기반으로 한 법상종(法相宗)이라는 종파를 세웠다. 그가 번역한 불교 경전은 그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매우 다양하며, 그가 중앙 아시아와 인도 각지를 여행하면서 남긴 풍부하고 정확한 기록은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여러 대에 걸쳐 학자들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난 현장은 어렸을 때 정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형의 영향을 받아 불교 경전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곧 불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현장은 그 형을 따라 장안(長安)까지 갔으나, 당시 중국 전체를 뒤흔들던 정치적 혼란을 피하고자 다시 쓰촨[四川]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쓰촨 지방에 머물면서 불교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곧 불교 경전들에서 수많은 모순과 상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의 스승들로부터는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하자 현장은 불교의 근원지 인도로 유학하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공식적인 여행 허가를 얻지 못해 629년 비밀리에 쓰촨 지방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지나 투루판·카라샤르·쿠차·타슈켄트·사마르칸트 등의 오아시스 중심지를 거쳐 철문(鐵門 Iron Gates)을 넘어 박트리아로 들어갔으며,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서북 인도의 카피사·간다라·카슈미르 등지를 통과했다. 카슈미르에서 배에 오른 현장은 갠지스 강을 따라 내려가 마투라를 지나서, 633년에는 갠지스 강 동북유역의 불교 성지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현장은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 있는 성지를 순례했으며, 인도 대륙의 동쪽과 서쪽 해안선을 따라 여행했다. 그러나 현장이 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당시 인도 불교교육의 중심지였던 날란다 사원이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산스크리트·불교철학·인도사상 등을 습득했다. 인도에 있는 동안 현장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드높아져서 북인도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하르샤 대왕마저 그를 만나서 경배하기를 원했다. 643년 귀국 여행을 시작한 현장은 하르샤 대왕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매우 순조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현장은 645년 다시 당의 수도 장안에 16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며칠 뒤에는 황제로부터 공식적인 영접을 받았다. 황제는 낯설은 나라들에 대한 현장의 이야기에 매우 큰 매력을 느껴 그에게 대신의 직위까지 수여하고자 했으나, 현장은 승려로서의 길을 택해 황제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현장은 인도에서 520질 657부(部)에 달하는 불교 경전들을 가져왔으며, 그 경전들을 번역하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그는 결과적으로 그 엄청난 분량 가운데 매우 적은 부분만을 번역하는 데 그쳤으나, 그가 번역한 76부 1,347권에 이르는 문헌 속에는 매우 중요한 대승불교 경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현장은 주로 유가행파의 유식(唯識) 철학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와 그의 제자 규기(窺基:632~682)는 중국의 유식학파 곧 법상종(法相宗)을 형성시키기에 이르렀다. 호법(護法 Dharmapala:530~561)이 찬술하고 현장이 편역한 〈성유식론(成唯識論) Vijnapti matratasiddhisastra〉과 그 주석서로 규기가 저술한 〈성유식론술기 成唯識論述記〉에는 그 교리가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법상종의 중심적인 가르침은 세계 전체가 마음의 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상종은 현장과 규기가 활약할 당시에는 상당한 명성과 함께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으나, 그 두 스승 이후에는 급격히 쇠락했다. 법상종의 난해한 철학, 어려운 전문용어, 머리카락을 쪼개는 것같이 세밀한 마음과 감각의 분석 등은 중국 전통에 매우 낯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쇠락이 일어나기 전인 653년 일본의 승려 도쇼[道昭]가 중국에 들어와 현장 밑에서 배우고, 660년경 배움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가 유식학파의 가르침을 전했다. 7~8세기에 법상종은 일본의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로 성장했다. 현장은 번역 작업 외에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를 저술해 자신이 인도로 여행하던 중에 거쳐간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현장이 입적했을 때 당의 황제는 그 대담하고 독실했던 구법승을 추모하기 위해 3일 동안 국사를 살피는 것을 중지했다. 현장에 대해서는 서양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아서 웨일리는 〈실제의 삼장 The Real Tripitaka〉(1952)의 앞부분에서 생동감 넘치고 흥미로운 필체로 그의 생애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르네 그루세는 〈부처의 발자취를 따라 Sur les traces du Bouddha〉(1929)에서 당의 역사와 불교 철학을 배경으로 중국의 구법승 현장의 생애를 보다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혜원[慧遠] : 염불의 결사(結社)인 ‘백련사(白蓮社)’의 개조. 속성 가(賈). 시호 변각(辨覺) ·원오(圓悟). 산시성[山西省] 닝우[寧武] 출생. 루산산[廬山]에 살았기 때문에 여산(廬山) 혜원이라고 불러 수대(隋代) 지론종(地論宗)의 학장(學匠)인 정영사(淨影寺)의 혜원과 구별하고 있다.
장안(長安)에 온 구마라습(鳩摩羅什)과 불교 교의에 대하여 문답하고, 불자는 제왕을 예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 국가권력에도 저항하였다. 또 승가바제(僧伽婆提)에게 청하여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삼법도론(三法度論)을 재번역케 하고, 담마류지(曇摩流支)로 하여금 《십송률(十誦律)》을 완역하게 하는 등 중국 불교를 학문적으로 확립한 사람이다.
혜초[慧(惠)超] : 723년(성덕왕 22) 당나라 광저우[廣州]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된 뒤, 그의 권유로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 불교 성적(聖跡)을 순례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龜玆]를 거쳐 733년 당나라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의 도량(道場)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密敎) 경전을 연구하였다.
740년(효성왕 5)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으나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不空三藏)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우타이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에서 발견되어 고대의 동서 교섭사(交涉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