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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땅을 황무지로 보전하셨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귀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수 살고 있었으며 그런 바탕위에서 이스라엘인들이 2천년만에 돌아와서 기존에 살고있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갑자가 나가라고 쫓아내어 그들이 쫓겨나서 오늘날 가자지구에 하마스가, 요단강 서안지구에 알파타가 피난민들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 혹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스라엘인들이 1882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의 땅, 이스라엘 땅에 귀환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 땅에 거주자가 희박하였으며, 그 땅이 사실상 황무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러 역사 자료들간에는 상당한 차이들이 있습니다만 다음의 많은 자료들과 증언들은 적어도 1830년까지는 이스라엘 땅이 황무지로서,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거주자들의 인구밀도보다 희박한 정도의 무인지경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증거들에 의해서 확인됩니다.
(1) 1830 년 이전의 이스라엘 땅
1590년 경의 여행가 거너 에드워드 웹에 의하면 이스라엘 땅은 낡은 벽과 잡초들만 있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Gunner Edward Webbe, Palestine Exploration Fund, Quarterly Statement, p. 86, cited in de Haas, History, p. 338.
1767년대의 영국 고고학자 토마스 쇼도 기름진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1780-85년대의 프랑스 여행가 콘스탄틴 프랑쏘아 볼르니 백작 :
폐허화되고 황폐하게 된 땅이다. 광역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데 농부가 거의 전무하다. 예루살렘 인구는 12,000-14,000 명으로 보았으며 베들레헴은 600명 정도인데 헤브론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로서 800-900 명을 무장할 수 있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799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경유하여 얍바 (오늘날의 이스라엘 주요항구인 하이파) 에 상륙하여 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전 해안에 인구가 1천명 정도로서 도저히 국가를 세울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1817-18 여행가James Mangles and the Honorable C.L. Irby는
갈릴리 호수에 배한척 없다고 하였습니다.
After a visit in 1817-1818, travelers reported that there was not "a single boat of any description on the lake [Tiberias]."
**James Mangles and the Honorable C.L. Irby, Travels in Egypt and Nubia (London, 1823), p. 295.
1827년 독일 백과사전 : 팔레스타인은 황폐하고 아랍 무장강도들이 출몰할 뿐이다고 기술하였습니다.
(2) 1830-1882 연간의 이스라엘 땅
- 1829년부터 이집트는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복무해야하는 징병제를 실행합니다.
- 터키는 이집트에 1831년부터 1841년까지 이스라엘 땅을 통치할수 있도록 위임해줍니다.
- 이집트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옵니다.(1831-41)
- 이에 이집트 정부는 관원들을 파송하여 이스라엘 땅(팔레스타인) 내의 이집트인들을 다시 붙잡아갑니다.
- 그러나 소수는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서 잔류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 1841년부터 터키는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땅(팔레스타인)을 회수합니다.
- 1838년 영국은 기독교인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설치합니다.
- 1839년 영국 영사관은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스라엘 땅은 황폐하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인구가 총 1만5천명 이하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유대인들이라고 보고합니다. 나머지 절반이하는 그것의 절반이 기독교인 순례자들이며 그 나머지가 아랍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1863년의 인구조사를 발표한 1864년 상업보고서는 예루살렘지역 전체 인구 15,000 명중8천명이 유대인이었고 4천5백명이 무슬림이었으며 나머지 2천여명이 여러 기독교 교파들이었다고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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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7년 톰소여의 모험 헉클베리 핀으로 유명한 마크 투웨인은 남북전쟁이 끝난후 이스라엘 땅을 방문하였는데 < 그 땅이 극히 황무하였고, 30마일(48킬로미터) 이쪽 저쪽으로 가도 집한채 없는 황량한 곳이며, 오직 2-3개의 베두윈 텐트모음이 있을 뿐이었고 항구적 거주 시설은 없었고 10마일을 달려도 10명의 인간을 볼수 없었다. 갈릴리 호수에는 배 한척 떠있지 않았다> 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사렛, 가버나움, 예루살렘, 벳새다, 갈릴리 호수를 방문하였는데 그 모든 지역이 황량한 폐허로 남아있음을 보고한 기록을 순진한 외국 (Innocent Abroad) 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고 지금도 출판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 1858-71 : 스웨즈 운하 건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땅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1858년부터 1871년 사이에 스웨즈 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동원된 인원이 150만명이었으며 건설 공사중 죽은 사람들이 12만명을 넘었습니다. 이들은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피하기 위해 수만명의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땅 광야로 피난 나옵니다. 나중에 돌아가지만 소수가 이스라엘 땅에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스웨즈 운하는 프랑스인 레셉스가 시공하였는데 원래 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토로 주신 영역 안에 있습니다.( 창 15장 후반)
(3) 1882-1900 이스라엘 땅
- 1883년 C.R. Conder 대령에 의하면 그땅이 황무하며 아랍인들은 오히려 인구가 줄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는 1872년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헷과 모압 1883)
- 작가 삐에르 로티는 프랑스의 유명작가로서 1895년도에 그의 기행문을 썼는데 갈릴리를 봄에 방문하여 보고 그곳이 조용했다고 보고하면서 길보아산 근처에 관해, 팔레스타인의 다른 모든지역처럼 도시와 왕궁들이 먼지로 변해있다 하고 방치와 포기의 우울함이 그 거룩한 땅을 누르고 있다고 썼습니다.
("Palestine Before the Zionists," Commentary, February 1976, pp. 48-49.)
http://www.eretzyisroel.org/~peters/depopulated.html#36
- 1880년까지 미국의 예루살렘 영사관은 그 지역이 역사적으로 인구와 부가 줄어들거나 지난 40년 동안 증가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As late as 1880, the American consul in Jerusalem reported the area was
continuing its historic decline. "The population and wealth of palestine
has not increased during the last forty years," he said.
http://www.freerepublic.com/focus/fr/604628/posts
- 1882년부터 유대인 유입이 본격화 됩니다.
그것은 1880년 유대인들에 관대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가 암살되고 알렉산더 3세가 즉위하자 마자 유대인 살육인 포그롬(Pogrom)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탈출과 시온으로의 귀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온의정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인들에 의해 제조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에 따라 유대인들에 의한 공산주의 운동도 가속화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정 러시아에 대한 저항운동이었습니다.
1882년의 유대인 귀환운동을 제1차 알리야라 하며 이때 4만명이 이스라엘 땅으로 유입되었습니다.
- 19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온주의 총회는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인들의 국가 건설을 실현할 것을 결의하였고 시온주의 운동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때 참석자는 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이에 따라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위협을 느끼며 1900년 무렵에 터키 정부에 유대인들의 유입을 막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4) 1900-1918 터키의 유대인 억압, 아랍인 자유 유입
이스라엘내의 아랍인들의 청원에 의해 오스만 터키 정부는 이스라엘 땅(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유입을 적극 저지하고 금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대인 진입 금지령은 1917년 12월11일 영국군 알렌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입성과 그 이후 1918년 터키의 일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땅에는 무수한 아랍인들이 무제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유대인들의 유입으로 인한 생활 수준의 향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터키 정부가 하이파와 예루살렘 사이의 철도를 건설함에 따라 더욱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아랍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우세한 숫자로 거주하였습니다. 그러나 터키 정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유입은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동안 2차 알리야로 추가로 4만명 가량의 러시아 유대인들이 유입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먼 러시아와 유럽으로부터 유입되는데 반하여 아랍인들은 인근 이집트와 시리아와 요르단 등지에서 유입되었으므로 빠른 시일내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5) 1918-1945 영국의 유대인 유입 제한,
아랍인 무제한 허용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유대인 유입을 관망하다가 차츰 아랍인들의
소요와 저항이 벌어지고 1차대전중 아랍인 토후들에게 약속했던 맥마흔 선언이 드러나면서 유대인들의 유입을 제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영국 정부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의 연간 유입 쿼타를 5천명(혹은 1만 5천명)으로 제한합니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무제한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유입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먼저 들어와서 유목 생활하던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들였습니다. 이 기간중에 아랍인들은 여러 차례 소요사태를 일으켰으며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시작하였는데 그 민병대가 바로 팔마크였으며 그것은 나중에 이스라엘 국군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이스라엘인들의 귀환을 도와준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실제는 유대인들의 유입을 적극 방해하고 막아왔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할 때까지의 수상이었던 네빌 쳄벌린은 반유대인 혐오주의자로 분류됩니다. 2차대전중 유대인들은 영국과 연합군을 도왔으며 아랍국가들은 독일 편에 있었습니다.
(6) 1945-48 이스라엘의 독립까지
유대인들의 대학살을 피해 생존한 생존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귀환하던 시기였습니다.
영화 영광에의 탈출의 배경이 되었던 엑소더스호의 사건도 이 무렵 발생하였는데 이때에도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하면서 유대인들의 유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아랍인들은 아무런 제한 없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영국은 1948년 5월 철수를 결정하였고 철수 다음날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독립 선언과 동시에 아랍국가들은 곧바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십배 혹은 수백배의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순식간에 이길 것으로 확신하였으며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는 아랍인들로 하여금 잠시 떠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수많은 아랍인들은 1/3 가량이 이집트 등 주변국가로 피신하였고 나머지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로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지구에 피난하여 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7) 왜, 어떻게, 팔레스타인 땅이 황무하였는가?
1) 우선 기후학적으로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16-19 세기 동안 강수량이 극히 적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작을 사실상 어렵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예언케하신대로 그땅을 황무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2) 터키 정부는 그 지역 곧 팔레스타인 지역이 반란이 자주 발생하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라 생각하고 그 지역을 고엽화시키는 정책을 취합니다. 즉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도록 황폐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3) 십자군 원정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땅에 인구가 많아져서 번성하여지면 오히려 외세를 유인하게 되어 터키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러한 정책을 오스만 터키의 고엽화 정책 Defoliation (혹은Disfoliation) Policy라고 부릅니다.
(8)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구 증가 붐
이슬람 민족주의자였던 쉐리프 후세인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과거에는 유목민들로서 유랑하였고 그땅을 떠났었는데 유대인들의 유입으로 그땅이 소생케되자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대인들은 47만이 증가하였는데 아랍인들은 58만 8천이 증가하였습니다. 아랍인 영주자들은 1922년부터 1947년 사이에 120% 증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황무지로서 아랍인들도 살기 어려우니까 그들은 왔다가도 떠나버리곤 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정착하자 아랍인들도 덩달아 많이 유입되고 떠나지도 않고 인구가 증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독립 당시에는 그 지역 인구가 아랍인과 유대인이 동수를 이루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Even a leading arab nationalist believed the return of the Jews to their homeland would help resuscitate the country. According to sherif Hussein, the guardian of the islamic holy places in arabia: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are still virgin soil and will be developed by the Jewish immigrants.
As Hussein foresaw, the regeneration of Israel, and the growth of its population, came only after Jews returned in massive numbers. The Jewish population increased by 470,000 between World War I and World War II while the non-Jewish population rose by 588,000. In fact, the permanent arab population increased 120 percent between 1922 and 1947
http://www.freerepublic.com/focus/fr/604628/posts
(9) 팔레스타인 문화, 역사, 국가, 민족
역사상 지난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 국가나 민족이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국가가 있어서 그들의 언어가 따로 있었고, 국가나 정부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후 이스라엘 땅은 유대전쟁으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35AD 에는 바코바의 난이 일어나서 유대인들이 다수 죽고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뒤로도 유대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그 지역에 살고 있었으나 640년경 마호메트의 이슬람 국가인 사라센의 침략으로 무슬림 아랍인들이 몰려왔으며, 이후 십자군 원정군이 침략했을 때에도 유대인들이 여전히 다수 살고 있었으나 전체 인구는 수십만을 넘지 않은 것으로서 희소한 인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후 몽고의 침입과( 1244-1260, 1299-1303)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황무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 어떤 시기에도 팔레스타인 국가나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이 아니라 인근 아랍국가에서 들어온 불법 체류자들입니다!
고대에 다윗과 사울왕 시대에 존재했던 팔레스타인 인들은 카나안인들이 아니라 에게해 지역에서 온 침입자였으며 그들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들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오랫동안의 지배로 멸종되었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땅을 파면 오직 이스라엘 인들의 유물이나 그 이전 카나안인들의 유물이 발굴 될 뿐이며 팔레스타인 국가나 문화 유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동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0) 성경의 예언
아모스 9: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황폐해진 성읍들을 건축하여 그것들에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예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6 장
34 그 황폐하던 땅이 경작될 것이니, 거기는 전에 지나가는 모든 자들의 보기에 황폐하였던 곳이라.
35 그들이 말하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폐허된 성읍들이 울타리쳐지고, 주민이 거하게 되었도다.
36 너희 주변에 남은 열방사람들이 나 예호와가 폐허화된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예호와가 말하였고 내가 그것을 이루리라
17. 에스겔 37장
12절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주 예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를 너희 무덤들로부터 올라오게 할 것이며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리라. “
14절그리고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둘 것이며, 너희가 살겠고, 내가 너희를 너희 땅위에 안식하게 할 것이며, 그때에 너희는 나 예호와가 말하였고 그것을 행하였음을 알리라, 예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24절...그들이 내 정의심판 가운데 행할 것이며 나의 율례들을 지킬 것이며 그들이 그것들을 행하리라.
성경 말씀대로 이스라엘땅은 이스라엘인들이 귀환하기까지 천년 이상 황무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팔레스타인 땅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었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쳐들어와서 탈취하였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예언은 실패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2013, 3. 21 하토브
(주 : 여기에 인용되어진 많은 문헌들에 관하여는 영문으로 올려진 글 How God preserved the Land 에서 올려놓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다음의 사이트가 허용하는 바이트가 한 글당 1 메가 바이트에 불과하여 부득이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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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오래전부터 쓰고 싶어서 써왔는데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기가 쉽지 않아서 지난번에 영문 글만 먼저 영문게시판에 올렸었습니다. 인용자료는 English Bible Fellowship 게시판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하토브님.
하토브님의 글을 읽기전에는 기존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무력으로 쫒아낸 줄 알았습니다
언론에서는 알려 주지 않으니 곡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토브님 때문에 가나안 땅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귀환케 하심은 알겠는데 구약 율법이 현재의 유대인에게 상벌로 작용하겠는지 궁금하군요. 하나님의 언약(또는 예언)의 성취가 다만 귀환에 그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네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율법이든 성령의 법이든 회복이 있어야 되어야 하겠지요.
율법준수 문제는 메시아 유대인들의 입장이 많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가서 4장 2절은 분명히 천년왕국에서도 율법이 유효하게 공표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 66장 23절에서는 그때에 안식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 하나님께 경배를 언급합니다. 그런 부분은 메시아 유대인들의 수가 증가할 때 더 거론될 것입니다.
1837 년 사페드 Safed 의 지진이 컸었네요. 당시에 4천여명의 주민 가운데 2000 여명이 죽었는데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곳이 지진을 당한 이유는 그곳이 카발라( 유대인 미신)의 중심도시로 유대인들에게 성지로까지 중시되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1832년 인쇄술을 갖고 이스라엘 벸 이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했다가 5년만에 이 지진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페드 Safed 는 갈릴리 호수 북방 가버나움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구글 지도로 나옵니다.
인터넷에 쳐보시면 사페드의 1837년 지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것을 믿었기에 팔레스타인에 관한 일반적인 뉴스들이 늘 이상했습니다. 겔39:28 에서 한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유대인이 100% 고토로 돌아가는 날을 생각해보며 이 시대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