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금방이라도 겨울의 빗장을 풀고 들이닥칠 것만 같은 제주의 2월. 제주시 아라동의 ‘도립 제주의료원’. 깨끗한 병원 내부는 마치 세탁해 가져온 옷처럼 산뜻하다.
따뜻한 햇살이 살금 살금 유리창을 넘어와 환자들의 얼굴을 살살 간지럽힌다.
중앙 계단을 통해 내려간 지하 1층. 마지막 계단을 밟고 왼쪽으로 몸을 틀자마자 대낮보다 밝고 환한 방이 하나 보인다. 지난해 가을 ‘춘강정사’ 주지이자 ‘제주 바라밀 호스피스회’를 이끌고 있는 수상 스님이 병원 내에 개원한 법당이다.
7평 남짓한 조그마한 공간이지만 진정으로 위안과 자비가 필요한 곳에 마련된 공간이라서 그런지 방 구석구석이 기도의 염원으로 인해 고찰에서나 느낄 수 있는 향내가 솔솔 풍긴다.
“24시간 불이 켜져 있고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누구든 마음을 쉬고, 기도하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게 말입니다.”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우고 온 딸이 조용히 ‘반야심경’을 독송하다 돌아가기도 하고, 친척 병문안을 왔다가 법당을 발견하고 쾌유를 빌며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1층 남자 병실에 입원해 있는 노스님은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매일 매일 내려와 목탁을 두드리다 돌아간다. 자신이 스님이었던 기억마저 가물가물하지만 목탁을 두드리는 그 모습은 병마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성불한 부처님처럼 장엄하고 아름답단다.
호스피스 활동이 거의 없는 제주도에서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호스피스회를 만들고 병원 포교에 나선 수상 스님. 그에게 호스피스 활동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다. 수행 그 자체다.
그는 왜 하필이면 호스피스를 수행의 방법으로 삼았을까?
“저 역시 몸이 많이 아파봤어요.” 19살 나이에 간 절제 수술을 받고 병마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는 스님은 누구보다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안다. 요양차 들어간 산사에서 부처님의 법(法)이 너무 좋아 이듬해 출가를 했다.
결정적으로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5년 전 일이다. 신장암 선고를 받고 삶을 포기하다시피한 사람의 간병 기도를 통해 삶을 되찾게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육체의 병은 의사에게 맡기더라도 환자가 겪는 마음의 괴로움은 종교인이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라 확신했다.
주로 노인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제주의료원에는 스님이 ‘바라밀호스피스(http://cafe.daum.net/susangbaramil)’ 회원들과 함께 병실을 돌 때면 병마에 지친 환자들이 스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목숨이 왜 이렇게 질긴 가요! 부처님께 제발 나 좀 데려가라고 빌어달라”고 조른다.
수상 스님은 ‘그르릉~ 그르릉’ 마지막 호흡을 가쁘게 몰아 쉬는 한 할머니 침대 앞에 가만히 선다.
“무량자비…관세음보살. 극락세계 맑은 물에 업장 소멸, 영원히 살게하소서….” 스님의 독송이 여느 때보다 길어졌다. 할머니는 독송을 들었는지 파르르 눈꺼풀을 떤다.
삶과 죽음은 ‘인생 여행’의 여정에 불과하고 영겁의 세월에 비춰보면 산다는 것은 한줄기 바람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이 메는 죽음이 있다고 한다.
스님은 얼마전, 급성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현이 엄마가 떠올랐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떠나고 나면 홀로 남게 될 아이들 걱정에 암세포의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 물고 버티던 어머니. “집착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가시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젖은 수건처럼 축축해진 현이 엄마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누구나 맞는 죽음이지만 죽음이 항상 두려운 것은 아무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누구도 동행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이 세상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거쳐가야 할 길입니다.” 수상 스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 같은 산중턱의 바위도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면서 생사소멸의 이치가 바로 우주의 질서라고 말했다.
자기 절도 없이, 신자도 없이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 절이고 그 사람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스님에게 “자기 절 하면서 편하게 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단다. 그럴 때면 스님은 “부처님이 보고 싶어도, 부처님의 법을 듣고 싶어도 몸이 불편해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2년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온 수상 스님. 장애인복지 석사과정을 마치기도 한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가 가장 필요한 곳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보듬어 왔다.
처음에는 혼자 하던 일이 어느새 30여명의 회원들도 생기고, 병원 내 법당도 마련했다.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이 좀더 편안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바로 중생을 구하는 일이 아닐까? 수상 스님에게 호스피스 활동은 봉사가 아닌 수행의 방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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