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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발생배경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 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자 이에 불안해진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1년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전개과정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 날이 밝았다.
이 날은 장기집권을 꿈꾸는 이승만과 그의 갑작스런 유고시 뒤를 이을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예정된 승리의 날이었다.
3·15선거는 사상유례 없는 다음과 같은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첫째] 세 사람 또는 다섯 사람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 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둘째]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주는 완장부대 등장
[셋째]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유권자 조작
[넷째]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등 부정과 폭력이 난무했다.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마산에서는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고 애쓰던 이 무렵,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군이 실종 20여일 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 을 연행·고문하였고, 이에 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이 무차별 테러를 가해 수십 명의 학생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의 평화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이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자유당 정권은 걷잡을 수 없는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피의 화요일" 이라 불리우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열은 경무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규탄과 학원의 자유 를 요구했던 시위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은 전우와 애국가 를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서울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 열로 뒤덮혔다.
이 무렵 시위대의 숫자는 이미 10만 명을 넘고 있었다.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공방은 치열했다. 최루탄과 공포 사격으로 저지하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민주신념에 불타는 학생과 시민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 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미터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 사격을 시작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져 꽃다운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일삼았던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차를 뺏고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만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전국민의 궐기 4월 25일,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대학교수 들이 시민과 학생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온 국민이 궐기했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노동자, 농민, 구두닦이까지 민주를 향한 외침에 참가했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진 정한 염원이 전국에 물결치고 있었다. 4·19혁명의 승리는 희생을 아끼지 않은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붉은 선혈 위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소중한 산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및 자유당 정권 종말 4월 26일, 서울 시내엔 삼엄한 경계태세가 취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교수단 시 위 이후 국민들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모아졌다. 4·19혁명 때 경찰의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시위에 참 여했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한 상태였지만, 처음부터 엄정중립의 입장을 지켜 군은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을 원하지않았다. 사태수습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마침내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이 승리한 것이다.
새로운 민주시대를 염원하는 환호와 만세소리로 전국이 들끓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부통령 이기붕일가가 스스 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내각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4.19혁명기념관
8.15해방부터 경향신문 폐간까지
긴박했던 1960년 2월부터 4월까지
기념관 전망대에서 본 풍경
4.18기념탑
(고대 4.18기념관 가는길에 4.18기념탑이 있고, 기념탑에 있는 글은 시인 조지훈님이 쓴것이라고 한다.)
고대4.18기념관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이 무차별 테러를 가해 수십 명의 학생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의 평화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이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자유당 정권은 걷잡을 수 없는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4.18기념관을 찾아서 고대까지 갔다.
분명 4.18기념관은 있었다. 단지 기념관만 있었다. 기념관 내부는 학교에서 학교에 맞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념관내 어디에도 4.18을 기념하는 그 무엇 하나도 없었다.
참 씁쓸했다.
아래 사진이 고대에 있는 4.18기념관 건물이다.
이화장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본체인 기와집과 부속 건물인 조각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각정은 1948년 당시 초대 내각을 구성하던 곳으로 ‘이승만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의 학자 신광한의 옛 집터로, 신대(申臺)라고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명승지였다. 인조(재위 1623∼1649)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서화가 강세황이 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땅에 묻혀 있다.
(상세설명)
이화장은 한국방송대학 뒤쪽 낙산 기슭에 있다.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으로 충신동, 서쪽으로 연건동, 북쪽으로는 동숭동에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지형을 이룬 언덕진 곳에 위치하였다.
이 가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組閣堂), 그리고 여러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 내외가 살던 곳이고, 조각당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초대 내각을 구상한 곳이다.
이 건물이 자리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 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組閣)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權寧一) 등을 비롯한 30여명의 도움으로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서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게 되었다.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끔 이곳에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이곳 이화장으로 이사했고, 5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7월 23일에 이화장으로 안치되었다가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화장은 대지 약 5,500㎡, 건평 230㎡인데,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왼편 앞으로 '우남리승만박사상' 동상이 서있다. 그 뒤 작은 계곡 넘어 'ㄷ'자형의 본채가 있으며, 오른편 언덕 위로 'ㄱ'자형의 조각당이 서있다.
한양 도성의 좌청룡인 낙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어 서향〔卯坐酉向〕을 한 본채는 192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본채는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응접실(접견실)과 서재가 있다. 대청마루 왼쪽에는 침실과 부엌이 있다. 본채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건물로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한옥이 그 시대상을 수용하며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7칸, 측면 6칸,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생활관이 있다.
이화장 본채에서 조금 떨어져 동남쪽 언덕에 막돌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위치한 조각당은 역(逆)'ㄱ'자형의 평면을 한 아주 작은 건물인데, 약간 북쪽으로 튼 서향〔乙坐申向〕을 하였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위치한 1칸 반 온돌방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장마루를 깐 작은 대청 한 칸이 서향하여 있고, 서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렸다. 굴뚝은 온돌방 동쪽 밖에 독립하여 서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아주 작은 쪽마루가 놓였다. 기단 없이 네모 화강석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내각을 조직하던 당시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의자가 있고, 대청마루 처마 아래에는 '組閣堂'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와 조각당 주변에는 지형을 따라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있다.
내가 방문했을때에는 공사중 ㅠ,.ㅠ 이버 여름 폭우로 이화장이 무너져 내렸다고...내년 1월까지 공사예정이고 유물은 국가기록원에 있다고 한다. 내년 1월에 공사가 끝나더라도 유물은 그때 못돌아 올꺼라고...아마도 시간이 더 걸릴꺼라고 현장소장님이 말씀하셨다.
용산 전쟁기념관
크다...기념관 건물 무척 크다. 꼼꼼하게 볼려면 적어도 3시간 이상 걸릴것 같다. 후닥후닥 보는데도 2시간이 걸렸다.
전쟁기념관...생각했던것처럼 6.25전쟁실이 가장 크다.(뭐 잘해놨다 이렇게 표현하기에는 뭔가 이상한듯...)
쌩뚱 맞았던것은 전쟁기념관에 가니 선사시대 즉 구석기시대 뗀석기부터~~~ 헉...철기시대 근현대사 까지의 모든 역사기록물이 쬐끔씩 있다.
나라도 고조선부터...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전쟁기념관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공부를 모두 마쳐야만???
참 수원화성도 있었다.
느낀점은 뭔가 건물을 엄청 크게 지어놓고 뭔가를 채워야 되는데 전쟁기념관답게 꾸미자니 건물이 휑~~~~~ 할것 같아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전시해 놓은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건 아니라고 본다...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쩝~~~ 뭔가 분단국가로서 가슴에 찡하게 오는 그런것이 없었다.
조형물 "창조"
태양광선이 한반도를 의미하는 반구 중앙의 샘솟는 물과 만나 창조를 표현, 민족의 영원성을 상징하고 있다.
살수대첩
612년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무찌른 전투를 다오라마로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건조하여 수많은 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하고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선이다.
안시성전투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뤄양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의 군대는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장량의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연수 · 고혜진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다고 했다.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을 먼저 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손자 무기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투석기)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군은 재빨리 목책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 부복애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안시성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당군은 뒤이어 쫓아온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퇴하고, 태종은 결국 고구려 침공이 원인이 되어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한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정사에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6.25전쟁당시 참전한 나라
6.25전쟁당시 피난민들의 모습
조형물 "국민의 군인"
육.해.공.해병대의 모습을 팔각의 형태로 배치하여 국민속의 국군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 유명(?)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 18일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국제연합(UN)군측 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반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살해당한 사건.
이날 오전 10시 45분쯤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경호하던 중, 북한군 장교 2명과 20여 명의 사병이 나타나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으나 우리측 경비병이 작업을 계속하자, 북한군 장교와 북한초소에서 2대의 트럭에 분승한 50~60명의 북한병사들이 달려와 도끼·쇠꼬챙이·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하여 미군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파괴하고 물러갔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사령부는 주한미군 장병들의 휴가취소와 부대복귀명령을 내리는 한편,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돌입)를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미국은 백악관·국무부·중앙정보국(CIA) 등 행정부 고위관리들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F-4전폭기, F-111전폭기 각 1개 대대를 한국기지에 배치하고, 핵항공모함 레인저호를 한국해역으로 이동시키는가 하면, B-52폭격기를 급거 출동시키고 오키나와[沖繩] 주둔 해병대 1,800명을 한국에 증파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취했다. 이와 동시에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내셔널방송회사(NBC) 텔레비전 회견을 통해 북한의 해명과 배상을 요구했다.
동시에 8월 21일 새벽 7시 데프콘 2호(전쟁돌입상태)하에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다. 포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 양국간 협의결정으로 실시된 이 작전에는 건십헬리콥터 26대, B-52 중폭격기 3대, F-4 및 F-111 폭격기 수십 대가 판문점 상공을 엄호하는 가운데 3백여 명의 한미 양군 기동타격대가 투입되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21일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UN군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9월 1일부터는 판문점공동경비지구를 남과 북으로 분할경비하기로 합의해 사건은 19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이 합의는 9월 16일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옥외 전시장
첫댓글 육이오 전쟁 승리기념관의 모습 잘 보고 갑니다
한번 보러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