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원시적'(primitive)이라는 관형어 또는 수식어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할 때의 원시적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미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초의 출발'이라는 의미쯤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까닭에 어떤 이들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 '자본'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신문의 스포츠 난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 "이종범 선수가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해태 타이거즈를 새로이 인수한 기아 타이거즈에 국내 선수로는 최고액의 연봉으로 계약 한 후, 연일 그 이름에 걸맞게 호타준족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광주구장에는 모처럼 암표상이 등장했다". 이 기사에서 기아 타이거즈니 연봉이니는 잠시 잊고 '암표상'에 주목하여보자. 암표상의 주된 목적은 공식적인 입장비 6,000원보다 웃돈을 얹어 파는 것이다. 만약 이 암표상이 6,000원 보다 더 많은 돈(예컨대 12,000원)을 받고 팔았다면 웃돈 6,000원은 이 암표상의 이윤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본은 이윤을 목적으로 한 것이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돈'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정 주영 자본의 국적은 한국일까? 또는 빌 게이츠 자본의 국적은 미국일까?"라는 의문은 품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의 국적은 이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은 항상 타자(예컨대 암표상과 구매자, 자본가와 노동자 등)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본은 '사회적 관계'의 성격을 함께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 사회적 관계의 마땅한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와 상대방간의 동등성 또는 평등성일 것이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간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는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 등이 마땅히 지녀야할 성격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는 이처럼 마땅히 동등해야할 관계의 본질이 심히 왜곡되어 있거나 기울어져 있는 모습을 오히려 더 자주 보게된다.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첫 걸음에서도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엇박자로 시작되었다. 이하에서는 서구에서의 자본주의 첫 출발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서구 사회의 경우 자본축적의 첫 출발은 어떠한 과정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서구에서의 자본주의의 이행에 관한 학설들은 다양한 논쟁 중에 있지만 통설적으로는 이중혁명(dual revolution) 또는 양대 혁명 이후부터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즉 "이중혁명은 부르조아 사회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중혁명은 대륙의 프랑스 대혁명(1789-)과 영국의 산업혁명(1760년대 중반 이후)을 총칭하는 것으로 두 혁명의 발화시점이 비슷하고 이들 혁명이 가져온 사회변화의 모습이 공통된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양대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사회변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혁명(revolution)과 진화(evolution)를 대표적으로 들고 있는데, 진화가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사회변화 과정을 의미한다면, 혁명은 이와 달리 사회성격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중혁명 역시 이전의 사회와 이후의 사회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중대 사건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들 혁명 이전의 사회를 구체제(ancient regime) 또는 생산 양식적으로는 봉건제라 하고, 혁명 이후의 사회를 근대시민사회 또는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양대 혁명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전의 사회양식과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생산력상으로는 봉건제의 토지 중심의 생산방식에서 자본제적 생산력인 공장의 기계 중심으로의 변화와, 기본적인 생산관계의 면에서는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로의 질적인 변환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자본주의로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특수한 상황들이 존재하여 모두 똑같은 발전 경로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자본주의적 공업조직의 발전은 가내제도 또는 가족제도---> 길드제도---> 선대제도---> 공장제도의 경로를 밟는다. 요컨대 우리는 근대사회의 등장과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궤적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발생하게된 몇 가지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들을 짐작해보기로 하자. 먼저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관계된 사례를 소개하도록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60년대부터(구체적으로는 박정희 군사 정권의 제 1 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대이동이 있었던 것처럼, 서구에서도 이들 혁명을 전후로 대규모의 농노들이 도시로 이동하게된다. 이들의 이동 규모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농촌으로부터의 대탈출'(rural exodus)이라 부르기도 한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농노들은 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노예상태의 사회적 존재였다. 이들은 영주나 귀족들로부터 갖가지의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비록 빈한한 수준이었지만 생산수단만큼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도시로 대거 이동하게된 데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을 들 수 있다. 종획운동은 영국의 경우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9세기 초반까지 진행된 '농가 청소' 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은 당시 각광을 받고 있던 양털을 이용한 모직산업의 융성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참고로 영국의 경우 1810년대부터 면화의 소비량이 양모 소비량을 넘어서게 된다).
즉 영주의 지배하에 있던 농노들이 이들의 압제에 저항하여 유럽 곳곳에서 농민전쟁을 일으키는 등 사회적 항거들이 이곳 저곳에서 분출하게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영주들은 어떻게 하면 이들 농노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고민하게된다. 이 고민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더욱 강력한 물리적 억압을 행사하는 것이었고(실제로 이 시기 영주의 장원에 가득 차 있던 것은 봉건제적 압제였다), 다른 하나는 아예 이들 농노들을 방출시켜버리는 것이었다.
후자의 해결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당시의 모직산업이었다. 즉 일부 영주들은 '반란이나 일으키는 농노들을 내 휘하에 두는 것보다 지금 모직산업이 융성하고 있으니까 내 땅을 목초지로 만들어 양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돈이 되겠다'라는 생각들을 가지게 된 것이다. 목초지를 만들어 양을 키우면 목동 몇 명과 목견 몇 마리만 있으면 되고, 양들이 도망 다니지 않게 말뚝만 빙 둘러치면 될 테니까(이른바 종획) 영주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연구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결과 많은 농노들이 도시로 이동하게 되는데 당시의 도시는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도시의 공기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니었다. 농촌으로부터 탈출을 한(실제로는 폭력적으로 쫓겨난) 농노들은 얼핏 보기에 봉건제적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러한 신분으로부터의 자유는 또 다른 질곡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다음 절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볼 것). 또 다른 한편 이들 농노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지만, 이러한 자유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켰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구조(즉 자본주의)에 자신들을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즉 자신의 품을 팔아야 생계를 이을 수밖에 없는)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 낙층하게 된 것이다.
한편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위와 같은 상황은 더욱 절박하게 전개된다. 즉 공장의 기계가 일자리를 잠식하고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는 등 전통적인 수공업 노동자 등의 생활 상태를 더욱 하향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나타난 대표적인 사회적 저항이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었다. 이를 흔히 '기계파괴운동'이라고 부른다. 당시의 상황은 영국의 유명한 낭만파 시인이기도 했던 바이런이 1812년 2월 27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인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기계파괴가 일어났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즉 당시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공장 안의 기계에 대한 적개심만을 갖고, 이것들만 파괴해버리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운동의 주요 타격 방향을 자본가계급(기계 소유자)에게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공업 노동자들의 기계파괴운동이 과거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평가는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 주요한 원인들이 주로 자본가들이 미숙련 노동자들을 채용하여 덤핑 임금을 준다든지, 그리고 기계의 임대료를 인상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참여자들이 모든 공장의 기계들을 폭동적으로 파괴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곳에 한정하여 이 운동을 펼쳤고, 더구나 기계파괴는 최종적인 압력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운동과정의 내용에는 공장입법 및 사회입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단결금지법]의 철폐를 위해 노동권리(특히 단결권)를 쟁취하려는 내용들이 주요하게 담겨 있었다.
특히 러다이트 운동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기계에 의해 당장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제화업자, 광부, 소상인, 양복업자, 도살업자, 목수 등)이 기계때문에 생계수단을 박탈당하고 있던 직포공과 방적공의 편에 서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은 이들의 운동들을 무력화시키면서 보다 손쉬운 자본축적을 위한 조건들을 차근차근 다져나가게 된다. 즉 자본의 원시적 또는 본원적 축적이 가능한 발판들이 구축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임금노동자의 역사적 창출이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의 본원적 축적은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2. 노동자계급의 생활 상태
폭력적인 자본의 축적과정은 영국의 경우 1840년 무렵에 이르러 명실상부하게 '세계의 공장'이라 명명되는 자본주의의 기초적 완성단계에 도달하게되고,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최초의 산업국민'이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윤색된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이 당시 영국의 주요 경제 지표들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산업별 종사자의 구성비 변화를 보면 1760-1851년 사이 농업종사자의 비중은 약 50%에서 15%로 감소한 반면 공업, 광업, 상업, 그리고 수송업의 비중은 25%에서 63%로 두 배 이상 급등을 하고 있다. 한편 1750-1850년 사이 영국의 총인구는 3배 정도 증가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공업도시의 인구는 5-10배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1851년의 경우만 보면 영국 전체 인구 2,100만 명 중 절반 정도가 도시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도시들에는 매뉴팩쳐(manufacture)라고 부르는 공장제 수공업이 번성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공장 모습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년 출간)에 나타난 옷 핀 제조공장의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공장의 전체 작업은 대략 18개의 작업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10명의 노동자들이 각자 1-2개의 작업을 맡아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하루 평균 48,000개의 옷 핀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는 한 사람 당 하루에 4,800개의 옷 핀을 생산하는 셈이 된다. 아담 스미스는 이를 분업의 효과라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성의 증대가 노동자 계급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스미스는 노동자들이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방법은 ①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일들을 하게 하고, ② 노동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적재적소에 이들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미 200년도 훨씬 전에 아담 스미스는 '노동의 인간화'(?)를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곰곰히 다시 한번 따져 보도록 하자. 정말 그가 제시한 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이었을까? 앞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설명하였듯이 당시 노동자계급의 상황은 질곡 그 자체였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상대적 과잉인구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한갓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노동자들이 부유하게 될 수 있는 방법도 제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근검과 절약을 통한 저축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당시의 노동자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은 저축이 불가능하거나 기본적인 노동력의 재상산도 불가능한 정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오랫동안 무인도 생활을 하다가 기적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후, 당분간은 세간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받은 결과 먹고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으나, 이러한 열기가 식자마자 기본적인 생계마저 이어가기 힘든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그는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들었던 것이다. 몇 날을 고민하던 중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자신이 무인도 생활을 하기 전 은행에 저축을 해 둔 통장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은행을 찾아가 자신의 통장 잔액을 확인 해본 결과, 이자에 이자가 붙어 엄청난 액수가 되어 있었고, 그는 이 돈으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축만이 상승이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교훈(?)이 이 이야기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로빈슨 크루소적 인간상'이라 하는데, 삶의 질 향상은 개인들 스스로가 하기 나름이라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발상을 자락에 깔고 있다. 과연 노동자계급의 지위 향상이 저축 등과 같은 개인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먼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도 현재의 상황만을 예를 들어도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이 시기부터 신흥 부르조아들은 매뉴팩쳐에서 발전시킨 분업을 더욱 발전시켜 공장제라는 새로운 생산방법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바야흐로 사회는 산업 부르조아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 진영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대 혁명들은 민중의 피에 의해 달성되었으나 혁명의 성과는 성공하는 순간부터 부르조아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봉기의 순간에 민중은 전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다수의 힘으로 분쇄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에 아무리 커다란 권력을 얻었을지라도, 결국은---패배했다---자유, 평등, 우애는 사실은 부르조아에게 해당하는 구호가 되었다".
이들 산업 노동자들의 당시 생활 실태를 몇 가지 구체적인 지표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분업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공장제로 인해 노동력의 특성은 더욱 더 단순 반복적인 것으로 탈숙련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 결과 당시의 면직공업 부문에는 아동과 부녀노동의 비중이 특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1835년의 경우 면직공 전체 중 14세 미만의 아동 비중은 14%, 14-18세는 25-30%, 그리고 부녀 및 소녀 노동자의 비중은 전체 노동력의 48%나 차지하고 있다(참고로 면직공업부문에서 10세 이하의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법령이 마련된 때는 1820년경이었다).
잠깐 퀴즈! 여러분들은 아래의 보고서가 어느 때의 것인가 알아 맞출 수 있겠는가?
<정답>
시간: 1934년 8월
장소: 미국 코네티컷 주
한편 공장제의 본격적인 도입과 함께 새로운 생산체제에 노동자들을 적응시키려는 새로운 규율훈련이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작업시간과 작업성과에 대한 통제였다(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금이다"). 이러한 통제방법에는 벌금제나 해고 리스트 작성 등 당근보다는 채찍이 보다 많았다. 참고로 1830년대 600개 조사대상기업 중 2/3가 이 제도들을 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영국 셰필드 지방의 한 의사의 보고서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기적으로 폭음을 하는 고주망태는 작업시간에 걸핏하면 지각을 하곤 하는 덕분에 건강에 유해한 영향을 그래도 덜 받을 것이니, 차라리 이 사람들이 딴 사람들보다 더 긴 평균수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3. 노동운동의 첫걸음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어떠했는 지를 영국의 사례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기 노동운동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담보해줄 수 있는 정치구조의 실현을 위한 기초 단계로서 투표권을 쟁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차아티스트 운동으로 나타났다.
차아티스트 운동은 1830년대부터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것으로 '순수한 정치적 강령은 갖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었다는 등의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보통 선거권(남성)
② 선출된 하원의원에 대한 급여(가난한 사람들이 공직에 출마할 수 있기 위해서)
③ 정기 연례의회
④ 후보의 재산자격 폐지
⑤ 위협을 방지하기 위한 비밀투표
⑥ 평등한 선거구
노동자들에 의한 두 번째의 대응은 노동조합 및 정치단체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경우 노동조합의 결성은 14세기에 이미 불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1792년에는 영국 사상 최초의 노동자들의 정치 단체인 '런던통신협회' 창설되었고 이 단체는 들불처럼 번져 전국에 80여 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는 1799년에 [단결금지법](Combination Act)을 만들어 모든 노동자 단체들을 없애 버렸지만 이는 오히려 노동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05년 직물공들의 경우 '최저임금법'을 공포할 것을 의회에 청원하는 운동을 벌였다. 1808년 이 법안이 부결되자 랭카셔의 면직공, 모직공들은 파업에 들어가 일시적이나마 임금인상을 성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2년 직물공의 총파업은 군대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단결금지법은 15년만에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후부터 노동조합이 비교적 자유롭게 결성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노동운동발전 단초가 놓이게 되었다.
< 읽을 거리 >
강신준(1997), [자본의 이해-(수정판)], 서울: 이론과 실천.
리오 휴버먼(장상환 옮김)(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서울: 책벌레.
위르겐 쿠진스키, [노동계급 등장의 역사], 서울: 푸른 산.
G. D. H. 코울(김철수 옮김)(1980), [영국 노동운동사(상)], 서울: 광민사.
양동휴, "영국 산업혁명기의 연소노동"(출처 미상).
편집부(1984), [노동시간의 역사: 8시간 노동제의 실현], 서울: 형성사.